kj park 님의 메! 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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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칸느 영화제에서 ! 랑프리를 수상한 작품 중에 ‘나라야마 부시! ’라 일본영화가 있다. 노동력 없는 노인을 갖다 버리는 일본식 고려장을 그린 영화다. 69세인 주인공 오린 할머니는 육체적으로 정정 했는데도 식솔들의 끼니 해결과 부담스런 눈총을 피하기 위해 아들에게 나라야마 골짜기에 빨리 버려달라고 독촉한다. 아들이 고민하자 오린 할머니는 일부러 이를 여러개 부러트려 노인행세를 한다.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산속으로 들어가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눈물겹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옛날에는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식량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늙은이는 짐스러워 내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에스키모도 그랬고 몽골에서도 그랬다. 한국의 고려장은 몽골인 원나라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인간은 늙는다. 그리고 죽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은 진리로 받아들이면서도 늙는 것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18세나 21세가 되면 성인식을 치르지만 노인은 몇 살부터 노인이라는 통과의식이 없다.
몇 살부터 노인인가. 60세는 너무 젊다. 그러면 70세인가. 이명박 대통령이 70세인데 노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는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마음고생이 많았을 텐데 얄미울 정도로 얼굴이 반들반들하고 젊어 보인다.
사업이나 직장을 갖고 있는 한 노인이라고 부르기가 애매하다. 그러나 아무 직업도 없는데다 생활능력까지 없어 자식눈치만 보는 사람은 노인이 아니라 늙은이로 불리운다. ‘노인’과 ‘늙은이’는 같은 뜻인데도 어감이 전혀 다르다. ‘늙은이’는 어딘가 힘없고 버림받은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단어다.
동물은 생물적으로 퇴화한다. 늙는다. 그런데 호랑이나 사자는 늙어도 얼굴이 별로 변하지 않아 늙은 것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반면 인간은 퇴화하면 얼굴이 너무나 달라져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의 모습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특히 여성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늙은 얼굴을 보면 “이게 정말 나란 말인가”하며 자기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처칠은 80세 생일 때 친구들이 그의 초상화를 선물하자 “이건 벌써 은퇴했어야 할 주름진 늙은이의 얼굴이군. 이게 내가 아니라는 것 여러분이 동의해 주겠지?”라고 조크했다고 한다.
오늘 미국에서 사는 한인 고령자들은 정부의 도움으로 늙은이처럼 살 필요가 없는데도 자진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노인이 되지만 정신적으로는 늙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나이에 무슨” “우리 같은 늙은이는” 운운하며 만사에 의욕이 없다. 미국에는 시니어를 위한 프로그램이 너무나 많다. 사진, 등산, 댄스, 여행, 외국어 공부, 악기연주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한인노인들은 배움에 대한 굶주림 의식이 별로다.
늙는 것의 특권은 자유다.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위로는 상사가 없고 아래로는 부하도 없다. 자식들도 결혼해 자녀부담의 짐도 다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아무것도 않고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인생 제1막이 어린 시절이라면 제2막은 결혼과 직장시절, 그리고 제3막은 은퇴시절이다. 제3막의 숙제는 자유를 기반으로 새로 출발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무엇인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배움을 시작한 사람 - 그 사람은 노인이 아니다. 젊지 않은 사람일 뿐이다.
<이철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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