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함... ***
철없던 시절... 하나님과 무척 친밀하다고 생각했던 시절... 정말 개념없이 하나님을 옆집 할아버지 대하고, 우리 동네 아저씨로 대했었습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신 분이고, 절대자이시며, 너무나 크신 분이고, 지극히 존귀하신 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나는 그분의 자녀니까 라는 이유로 종종 기도할 때, 또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분에게 말씀 드릴 때 옆집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하듯, 우리 동네 아저씨에게 이야기하듯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철이 조금씩 들기 시작하면서 과연 내 태도가 성경적으로 타당한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고, 계속 갈등하다가 어느 순간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정말 개념이 없었다고....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맞습니다. 그 사실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 가장 위험하고 불경스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의 시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육적인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도 할 수 있다고,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 친밀함을 느낄수록 더욱 담대하게 그리합니다. 투정도 부리고, 원망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요구도 많이 합니다. 친구에게 말하듯이 말하며,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갖고서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소견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산타할아버지의 이미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분은 단지 우리를 위해서 선물을 나누어 주시는 분일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얼마나 불경하고 위험한 생각입니까? 우리가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여전히 그분은 무한하고 우리는 유한하며, 그분은 신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분은 절대자시며, 우리는 그 절대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그분은 전능하시고, 그분은 전지하시고, 그분은 아름다움과 선, 그리고 거룩 그 자체이시지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것들을 계속 나누어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분은 흠이 없으시고 완전하시지만, 우리는 죄와 오류가 가득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은 저 천국에 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죄가 없는 존재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해진다거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처럼 성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고, 친밀한 분이 없으시며, 성부와 깊이 교제하고 있는 분도 없으십니다. 삼위위일체 하나님이시니까요! 그러나 성자는 성부를 대하실 때, 우리가 아는 인간 아들이 인간 부모에게 하듯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성부를 대하실 때 경외감을 가지셨습니다.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그 누구보다도 가까이 맛본 모세조차도, 하나님께서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셨다고 언급된 저 위대한 사람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완전히 바닥에 납짝 엎드려 두려워 떨었습니다. 감당하지 못하고, 최대한의 경외심을 표현하며, 예배하고 찬양했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요한 사도 또한 그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때마다 바닥에 낮게 엎드리며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품에 안겨 있었던, 정말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친밀하고, 예수님을 사랑했던 그 제자 또한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낮고 낮은 모습으로 최고의 경외심을 표현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러했고, 교회사의 영적 거장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크게 맛볼수록, 그분의 임재가 더욱 분명하고 강력할수록, 하나님께 더욱 연합할수록 더욱 낮게 엎드리고, 더욱 두려워하며,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담대함을 근거로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렇게 나아가도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녀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기뻐하시며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성경의 인물들은 그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까요?
거룩한 담대함은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 자녀가 인간 부모에게 행할 수 있는 것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문제는 하나님의 시각과 하나님의 수준에서 인간의 것들을 이해하고 이야기하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시각과 사람의 수준에서 하나님의 것들을 이해하고 이야기하고 적용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거룩한 담대함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근거도 없고, 나아갈 수 있는 근거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분께 간구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한 어둠 가운데에서 영원토록 멸망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으로, 자신을 제물로 삼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원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이제는,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 즉 그의 공로, 그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거룩한 담대함의 본질입니다.
비참하고, 너무나 가증스럽고 경멸스러운 존재, 너무나 사악하고, 무능력한 존재가 구원받았다고 하여 자신의 신분을,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하나님처럼, 하나님과 정말 친구가 된 것처럼 군다는 것이 얼마나 어이없고 해괴망측한 일입니까?
인간의 불완전하고, 감상적이며, 이기적이고, 제한적인 이성과 시각으로 하나님을 그에 맞추고, 그러한 것들을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지를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래 글은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1권에 나오는 내용인데, 속죄에 대한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에 있는 부분을 제가 발췌했습니다. 속죄에 대한 교리를 증거하기 위한 글이지만,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볼만한 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 충분하다라고 말하는 논증도 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대속이 없이도, 아무런 처벌이 없이도 서로를 용서해 준다. 우리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그와 같이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큰 사랑을 갖고 계신 하나님은 훨씬 더 쉽게 용서하실 수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오직 사랑이시기만 하다면 이 논증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빛이시고,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의로우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경우에 비추어 하나님을 판단하는 그런 논증보다 더 큰 오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대단히 흔한 오류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와 같은 주장을 합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에게는 얼마나 더 그럴까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과 동급인 양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죄 가운데 있으며 우리의 모든 생각은 잘못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잘못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사고에 비추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참으로 딱하기 그지없는 상황입니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상적이고, 엉성하고, 불공정하고, 불의한 개념을 영원하신 하나님께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시도입니다.
-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 1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p.554
(인용된 글은 파란색으로, 그중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빨간색으로 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무척 길지만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래 글은 <신앙감정론> 509쪽부터 512쪽까지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적극적 표지 중 9번째인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라는 챕터 안에 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면 잛은 인용은 괜찮지만, 너무나 긴 인용은 저작권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래 에드워즈 글의 긴 인용이 문제가 있다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삭제하고, 글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9. 아홉 번째 표지 : 하나님을 두려워함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하나이다"(시 119:120).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사 66:5). "이에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가 이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인하여 다 내게로 모여 오더라"(스 9:4).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스 10:3). 어린 아이는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가지고 다가간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거룩한 경외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욥 13:11)
거룩한 경외심은 참된 믿음의 본질의 주된 부분이어서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을 경외함이라는 말로 자주 묘사한다.
따라서 거룩한 감정들은 사람들을 자신만만하게 하고, 잘난 체하며,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만드는 경향이 없다. 오히려 떨면서 말하게 한다(호세아 13장 1절-"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인하여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그들의 모든 행동은 일종의 거룩한 두려움으로 옷 입히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시편 2편 11절; 베드로전서 3장 15절; 고린도후서 7장 15절; 에베소서 6장 5절; 베드로전서 3장 2절; 로마서 11장 20절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서 혹자들은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거룩한 담대함 같은 것이 있지 않는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물론 당연히 그런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탁월한 성도들, 위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하지만 이 거룩한 담대함은 분리됨이나 비굴함이 아닌 경외심 같은 것이다. 거룩한 담대함은 도덕적 거리감이나 소외 때문에 생긴 마음을 제거하거나 약화시킨다. 또한 노예 관계처럼 거리감 있는 관계를 제거하고 약화시킨다. 또한 노예 관계처럼 거리감 있는 관계를 제거하고 약화시킨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보다 무한히 낮은 자라는 사실 때문에 생기는 자연적인 거리를 제거하거나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땅에서 사는 가련하고 죄 많은 벌레들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들을 바로 볼 줄 아는 벌레들이 가진 어떤 담대함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는(이사야 6장 앞부분), 하늘에 있는 흠 없고 영광스러운 천사들보다 못한 경외심과 존경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리브가는(이삭과의 결혼생활과 거의 모든 상황에서 명백하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위대한 모형이었던) 이삭을 만날 때, 비록 그녀가 두 사람 사이의 가장 친밀한 연합과 가장 가까운 관계로 이삭과 함께 살기 위해 이삭의 신부로서 소개되고 있었지만, 리브가는 약대에서 내려, 면박을 취해 스스로 얼굴을 가렸다.(207번 주 - 에임스는 그의 책 Cases of Conscience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있어야 할 거룩한 공손함을 참된 겸손의 한 표지라고 말한다. Ames, Cases of Conscience, 제3권, 제4장, pp53~54.) 하나님과 너무도 거룩한 친밀함을 누렸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웠을 때, 심지어 그가 산에서 하나님과 대화할 때에도 그의 얼굴을 겉옷으로 가렸다. 그것은 그가 어떤 노예적인 두려움, 두려운 바람과 지진과 불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간 뒤, 하나님께서 친구와 같이 아주 작은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꼐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왕상 19:12~13). 또한 사람이 그의 친구와 대화하듯이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고 말씀하시고, 그가 체험한 하나님과의 친밀감에서 모든 선지자보다 뛰어났던 모세는, 그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간 때에, 후에 엘리야와 말씀하실 곳과 같은 산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그에게 나타내셨을 때, 그는 급히 땅에 엎드리어 경배했다(출 34:8). 어떤 사람들은 위대하신 여호와를 너무 합당치 못하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하게 부른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과 대단히 가까우며 친밀한 것처럼 뽐내고, 거룩한 담대함을 가장한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하나님과 자신들 사이의 거리를 본다면, 공포감과 황망함으로 자신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탁월하게 거룩하다고 확신하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던 바리새인들과 같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참으로 자신의 사악함을 본다면, 그들은 멀리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도 들지 못했던 세리와 같아질 것이다. 세리는 그의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다. 죄에 대한 통회와 자복 그리고 부끄러움과 황망한 얼굴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비록 믿음으로 그리고 두려움 없이) 우리와 같이 죄 많은 피조물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교회의 마지막 영광의 날, 교회가 지상에서 최고의 특권을 누릴 때, 이것이 교회가 취할 자세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당신의 언약적 자비를 계시하심으로써, 교회를 놀랍게 위로하실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네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세워서 너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너로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6:60~63).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여인은 탁월한 성도였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47절), 그 여인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 참된 사랑이 많이 있었다. 그 여인은 사랑스럽고 예절바르게 그리스도께 나아왔고, 겸손함과 경외심과 부끄러운 마음으로 왔고, 예수님의 얼굴 앞에 나타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여겨서, 예수님 뒤로 그 발 곁에서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씻었다.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감정론>, 3부 적극적 표지 중 9번째 표지. pp.509~512
올마이티 시리즈의 두 번째인 [에반 올마이티]와 같은 영화는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인간적인 시각과 관점으로 끌어 내렸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물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정도까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하나님과 인사할 때 hey~ 라고 합니다. 아무런 경외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어떤 본질적인 차이도, 거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은 더욱 가관입니다. 그 영화에서 하나님은 정말 산타할아버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분은 단지 마음씨 좋은 분이시며,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영향력을 조금 행사할 뿐입니다. 영광을 받으시는 분도, 높임을 받으시는 분도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화가 보여주는 오늘날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합니다. 참된 신앙은 거룩한 담대함이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합니다. 참된 신앙은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그리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지극히 존귀한 분으로 높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기에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 낮게 엎드립니다. 얼굴을 들지 못하고, 떱니다. 그분의 영광은 너무나 커서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처럼 떨 수밖에 없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무섭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겸손한 태도와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입니다.
하나님은 옆집 할아버지, 산타할아버지, 우리 동네 아저씨, 형, 누나가 아니라 지극히 크시고 엄위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크기로 젤 수 없고, 우리의 생각에 담을 수 없으며, 우리의 것으로 적용할 수 없는... 무한히 완전하시고, 무한히 의로우시고, 무한히 크신...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펀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