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오래 전부터 꿈꾸어 왔던 전원생활이 앞으로 한 달 후부터는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월부터 전원주택을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기에 흙 속에서 살기를 갈망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생겨 과감하게 시도했습니다. 집 짓는 과정을 시리즈 기사로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내 집 마련에 입을 것과 먹을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에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전원주택의 꿈을 안고 사는 독자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바라며 집 짓는 과정을 순서대로 쓰려고 합니다. 또 이 글을 읽고 조언을 해주실 분들은 댓글이나 전화를 주시면 누구든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왜 전원주택을 꿈꾸는가 집에서 자동차로 불과 5분만 달리면 논과 밭이 나타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주택 주변은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돼 한 뼘의 땅도 구경할 수 없는 곳이다. 이런 삭막한 곳에서 탈출하려고 지난 10년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터였다. 탈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라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말한다. 대개 은퇴 후 노후를 보내려고 전원주택을 장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생명력이 있는 흙과 새와 벌레가 있는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 아이는 아들인데 감수성이 뛰어났다. 새와 벌레 등을 유난히 좋아한다. 등산을 하다가도 벌레를 하나 발견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관찰하기 일쑤다. 둘째 아이는 아파트 구조인 집에서 이구아나, 도마뱀, 잉꼬 등을 기르고 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차일피일 미룰 일이 아니다 싶어 일을 저지른 것이다. '탈출은 무모함과 과감함을 요구한다'는 지론을 스스로 위안 삼아 집을 짓기 시작했다. 좋은 터 장만하기 약 3년 전부터 집 지을 터를 고르기 위해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지난해 봄부터는 바짝 서둘렀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서는 연기공주와 인접해 있어 땅값이 점점 오르는 기세였기 때문이다. 집 지을 좋은 터를 고르는 데는 인문지리와 자연지리를 종합한 풍수지리를 참고했다. '남향집을 얻으려면 3대가 적선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남향이 아니라도 편안한 자리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내 나름대로 정한 좋은 터의 조건은 첫째로 배산임수(산을 뒤로 하고 물이 앞에 있는 터)다. 또 주산과 청룡백호가 갖추어졌으면 더 없이 좋은 터로 여겼다. 둘째로는 깊은 산 속이나 벌판이 아닌 마을에 가까운 곳을 택하기로 했다. 호젓한 전원생활을 하겠다고 동네에서 먼 곳에 집을 지었다가 외롭다고 포기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동네주민들의 인심을 따졌다. 풍수적으로 길지라도 동네사람들의 인심이 사나우면 결코 살아가는 데 편안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지리학에 정통한 18세기 실학자인 이중환은 "집터는 지리, 생리, 인심이 좋아야 하고 그 다음에 산수가 좋아야 한다"고 말해 좋은 집터의 조건으로 동네사람들의 인심을 꼽았다. 이런 잣대를 갖고 좋은 집터를 찾아 나섰다. 부동산업자들에게 집 지을만한 곳을 찾아달라고 여러 곳에 의뢰해 놓기도 했다. 차를 몰고 지나다가 괜찮은 집터다 싶으면 차에서 내려 찬찬히 살펴본 후 땅주인을 찾아 염치불구하고 매도 의사를 묻기도 했다. 또 동네 이장을 찾아가 집터로 쓸만한 곳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한번은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 개태사 맞은편에 있는 양지서당 뒤편에 700여 평의 밭이 좋다고 해 달려가 보았다. 이 땅의 장점은 산 속이면서도 민가와 가깝고 밭 앞으로 오염이 되지 않은 맑은 물이 사계절 끊이지 않고 흐르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땅은 매물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땅은 송정리 이장이 주인이었는데, 동네 주민 중에 이장님과 친분이 두터운 분을 찾아가 밭을 팔 생각이 없는지 타진을 해보도록 부탁을 했다. 결과는 허사였다. 팔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땅 주인을 동네사람의 집으로 두 차례나 초대해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시며 간청을 했다. 하지만 땅을 팔 생각이 없음이 확고부동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결국은 그 땅을 포기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지금 주택을 짓고 있는 땅을 만났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지만 땅과 사람이 만나는 것도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지난해 5월경, 여기저기 땅을 의뢰해 놓은 곳 중의 한 곳인 연산 사거리에 있는 D부동산에서 소개했는데, 2300평이나 되는 밭이었다. 밭 가운데 대지가 200여 평이 있었다. 이 땅은 해발 30여 미터쯤 돼 보이는 낮은 구릉을 뒤로 하고 앞은 동남향으로 트였으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냇물이 사계절 끊이지 않고 굽이굽이 흘렀다. 구릉은 작은 야산을 형성하고 있는데 동남쪽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황룡산에서 뻗어 내려온 맥이다. 대지의 뒤 언덕인 이 구릉은 부모격인 황룡산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을 띠고 있다. 황룡산은 대둔산에서 시작한 작은 산맥이었으니 풍수적으로 해석하면 이른바 회룡고조(回龍古祖)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분할하여 나는 500여 평만 쓰기로 하고 나머지는 다른 분들이 계약을 했다. 이곳은 백제와 신라가 최후의 전투를 벌인 황산벌이다. 대지의 남쪽으로 보이는 국사봉과 그 왼편으로 깃대봉이 있고 그 사이에 한민대학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금의 한민대학 자리는 1400여 년 전 신라군이 진을 쳤고, 대지의 뒤편 서북쪽으로 10km 떨어진 연산면 관동리에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진을 치고 사투를 벌인 곳이다. 낙점... 설계 시작 대개는 집터로 전쟁터를 피한다고 하지만 이 땅은 이미 14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풍수지리학자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도 이곳을 밝은 터로 평한 바 있어 샀다. 또 2~3년 전만 해도 평당 10여만원도 안 됐는데 논산-대전 간 국도에서 가깝고 행정중심복합도시 예정지와도 그리 멀지 않은 탓에 투기 붐이 일어나 나날이 땅값이 오르는 곳이었다. 땅을 구하느라 심신이 지치기도 했지만 이만하면 되겠다 싶어 대지를 포함하여 밭 550여 평을 평당 20만원에 계약했다. 이렇게 해서 몇 년간에 걸친 대지구입이 이루어졌다. 그런 뒤 지난해 10월에 등기를 내자마자 곧바로 대지 550평에 건평 35평의 집을 짓기로 하고 설계를 시작했다. (*기사 계속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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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 깨나 전원 속에서 살 집의 모양을 머릿속에 그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집의 모양은 소나무 기둥에 기와지붕이 아늑한 한옥이었다. 대청마루가 있어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구들 들인 방에서 푹 자고 일어나면 몸이 거뜬해지는 그런 집을 그렸다. 본격적인 설계에 앞서 주택에 관한 책을 사서 보기도 하고 고택을 찾아가 꼼꼼하게 살피면서 사진도 빠짐없이 찍었다. 보면 볼수록 한옥에 대한 매력이 더욱 깊어져 갔다. 한옥은 흙과 나무로 지은 그야말로 친환경주택이면서도 과학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이렇듯 내가 살 전원주택으로서 한옥에 대한 애착이 깊어가면서 고민거리도 커졌다. 이 고민거리란 다름 아닌 건축비 문제다. 한옥을 제대로 지으려면 건축비가 평당 500만 원 이상 들여야 가능했다. 국산 소나무로 문화재청에 등록된 한옥목수가 지으면 평당 건축비는 800만원을 훨씬 넘는다. 그래서 전통한옥을 포기하되 한옥의 장점을 듬뿍 살린 현대식 주택을 짓자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건강한 주택의 기본적인 건축소재는 흙과 나무였다. 나무로 골조를 세우고 벽체는 황토벽돌로 하기로 정하고 주택의 내부평면도를 그렸다. 주택의 평면구성은 방 4개에 주방과 거실, 화장실 등이 있는 35평 정도의 아파트 구조로 하기로 했다. 이중에 방 한 칸은 구들을 깔기로 했는데, 구들장 위에 온수보일러를 또 깔아 이중난방을 하기로 했다. 고유가 시대에 난방비는 주택유지비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최근에는 심야전력을 이용한 보일러 난방을 많이 하고 있는데, 편리하기는 하지만 전기료가 자꾸 올라가니 유지비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전원주택에 많이 설치하고 있는 화목보일러를 염두에 두고 있다. 한옥의 특징은 개방적이면서도 독립적이며 입체적인 구조다. 그러나 아파트(목조주택 등 서양식 주택의 구조 포함) 구조는 폐쇄적이고 비독립적인 구조다. 아파트 구조는 현관이 별도로 있고 이곳으로만 드나들며, 하나의 울타리(외벽)에 안방, 화장실, 부엌 등을 가둬 놓는 구조다. 융통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한옥의 구조는 별도의 현관이 없다. 대청마루나 쪽마루가 현관이다. 방을 드나들 때도 독립적이다. 이래서 한옥은 20여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도 3대가 함께 살 수 있었다. 이처럼 한옥은 멋과 맛이 뛰어나지만 지금까지 아파트 구조에 길들여져 있어 선뜻 한옥구조로 결정할 수 없었다. 결정이 어려웠던 가장 큰 이유는 한옥 구조는 겨울에 추울 것이라는 것이었다. 한겨울 꽁꽁 언 대청마루를 통해 방과 화장실 등을 다니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옥설계 포기와 대안 그리고 풍수지리
밖에서 방안으로 들어가려면 현관문을 열기 전에 실외에서 신발을 벗고 작은 우물마루를 통해서 현관을 들어서게 했다. 현대주택의 경우 대개 신발을 신을 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신발에 흙이 묻은 채로 실내로 곧장 들어오게 되므로 먼지 등 위생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구조는 전원주택을 설계할 때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한다(사진 평면도 참고). 현대주택에서 현관은 담장이 있는 한옥에서는 대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풍수학에서는 집의 좌향(집의 중앙에서 바라보는 방향)에 따른 대문(현관)과 안방 그리고 부엌의 위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설계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 중의 하나가 집의 좌향을 정하는 일이었다. 대지의 뒤쪽 구릉을 등지고 앞을 보면 동향, 동남향, 남향이 된다. 집의 좌향에 대해서는 해석하는 사람마다 각각 달랐다. 어떤 이는 신좌을향(동향)을, 또 어떤 이는 자좌오향(남향)을 말해 혼란스러웠다. 간단한 것 같지만 막상 좌향을 정하려니 집주인인 내가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풍수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 반신반의 하는 분, 무관심한 분으로 나뉠 것이다. 풍수학에 대한 오해도 많지만 의외로 관심을 갖는 분도 많다. 주택을 짓고자 풍수학이론서와 풍수학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얻은 공통적인 결론은 풍수학은 미신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인간의 지혜'라는 결론을 얻었다. '건강한 내 집 짓기' 시리즈 기사를 쓰면서 독자들에게 '풍수학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을 요청한다. 풍수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과연 우리는 풍수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래서 집의 좌향과 구조는 서사택이고 현관의 위치를 남서쪽, 안방의 위치를 동북쪽, 부엌의 위치를 서북쪽에 두는 이른바 '생기택(生氣宅)'이라 불리는 좌향으로 정했다. 집의 모양은 마당에서 보아 집의 전면이 13.2m, 폭이 8.7m로 현관을 포함하여 34.7평인 직사각형 구조다. 단층구조이며 나무로 골조를 하고 흙벽돌로 벽체를 하고 기와로 지붕을 하되 지붕모양은 맞배지붕(집의 변이 좁은 곳에서 보아 지붕의 모양이 마치 ㅅ자 형태를 띤 형태)으로 결정했다. 대개 주택은 팔작지붕(맞배지붕과 달리 ㅅ자 밑에 지붕이 하나 더 달린 형태로 가장 흔한 기와지붕 모양)이지만 내 집은 완벽한 한옥도 아니므로 지붕 모양을 단순하게 해 건축비를 절약하려 했다. 실내 안쪽으로 한옥창문을 달고 바깥쪽으로는 유리를 낀 알루미늄 새시를 달기로 했다. 한옥의 멋스러움이자 단점인 지붕을 꾸미는데 엄청난 목재가 드는 것은 한옥의 건축비 상승요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건축비를 줄이려고 지붕 부분을 단순하게 했다. 또 기와를 깔기 전 바닥에 흙을 얻는 전통적인 방식 대신 '인슐레이션'이라고 하는 솜처럼 생긴 아주 가벼운 단열재를 넣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대략적인 주택의 형태는 그려졌다. 이제는 목수를 구할 차례다. 물론 목수가 정해지면 가설계한 것을 상의해서 수정보완할 생각이었다. 우선 논산 근처에서 한옥목수를 찾아보기로 했다. 목수를 건축현장에서 먼 외지에서 구하면 숙식을 해결해주어야 하므로 건축비가 더 든다. 설계완료 목수정하기 설계를 정하고 난 지 두어 달이 넘도록 마땅한 목수를 구하지 못했다. 목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만나면 누구나 "한옥을 지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개는 대목장으로 참여해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 하고도 일을 맡을 요량으로 업적을 부풀리기 일쑤다. 우여곡절 끝에 충북괴산의 한양통나무건축학교(소장 지호진, 31세)에 골조 부분만 맡기기로 했다. 한양통나무건축학교에서 골조를 세우면 황토벽돌로 벽체를 마무리하고 기와를 얹고 설비와 전기공사, 창호공사 등은 내가 하기로 했다. 골조는 설계대로 기둥과 보, 도리 등 골조는 캐나다산 '더글러스'라고 하는 소나무를 사용하기로 했으며, 지붕 부분은 각재로 서까래를 엮은 후 합판을 치고 처마 부분의 서까래는 둥근 서까래를 1m 정도 노출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지붕 모양은 맞배지붕으로 하고 집의 폭이 크기 때문에 오량집 구조를 하기로 했다. 이제 건축의 준비가 끝났다. 이대로 골조가 완성되면 30%는 통나무주택, 70%는 한옥의 모양으로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 다음기사는 기초~골조세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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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짓기에 사용한 벽돌은 계룡산 신원사 근처에 있는 '계룡산황토벽돌'인데 시멘트나 생석회를 섞지 않은 순수한 황토벽돌이다. 생석회나 시멘트를 섞지 않은 순수한 황토벽돌은 좀 무르기는 하지만 건강을 생각하자면 순수한 황토벽돌이라야 한다. 견고함만을 생각해서 생석회나 시멘트 등을 섞어 만든 황토벽돌도 있다고 하는데, 순수한 황토벽돌 한 장을 놓고 보면 좀 무른 듯하지만 여러 장이 견고하게 쌓이고 황토모르타르로 벽을 바르면 단단해진다. 벽돌-기둥 사이엔 나무, 벽돌-벽돌 사이엔 간격 두어야 단열효과 벽을 쌓으면서 가장 유의해야 할 부분이 벽돌과 기둥이 만나는 부분인데, 대부분 벽돌과 나무가 마르면서 틈이 벌어져 겨울철에 바람이 들어와 난방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한옥이 춥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이것 때문이다. 그런데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외벽 2장 쌓기에서 벽돌이 만나는 기둥면에 지름이 약 2~3㎝ 정도 되는 나무를 켜서 고정을 시킨다. 이렇게 하면 벽돌과 나무의 틈을 막아주어 틈이 생기더라도 바람이 관통하지는 않아 추위를 막을 수 있다. 황토벽돌 2장으로 외벽을 쌓으면서 벽돌과 벽돌 사이를 2~3㎝ 정도 간격을 두는데, 이유는 공기층을 형성해서 단열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다. 화장실과 부엌과 같이 물을 사용하는 곳에서는 황토벽돌과 시멘트벽돌을 함께 쌓아도 되지만 황토벽돌로 쌓고 방수만 잘하면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조적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물을 자주 사용하는 공간이라도 시멘트벽돌보다는 황토벽돌로 쌓아도 괜찮다고 한다.
'건강한 내 집 짓기'에서는 땅바닥에서 기초를 90㎝ 정도 노출시켰다. 또 벽체의 양옆인 박공부분은 아예 점토벽돌로 마감을 했다. 벽체공사가 끝나갈 무렵 천정공사를 시작했다. 현관 천정과 서재 등은 홍송 루바를 붙였다. 루바는 마치 마루판처럼 두 장을 끼우게 되었는데 가격도 그다지 비싸지 않으면서 나무 무늬를 그대로 살릴 수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거실 천정은 서까래와 도리 등을 노출시키고 서까래 사이에 흰색 테라코타를 발랐다. 한옥의 대청마루는 서까래를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천정을 높게 했다. 이는 매우 과학적인데 방은 여러 명이 기거하지 않으므로 높이가 240~250㎝ 정도로 낮아도 되지만 거실은 여러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천정을 높였다. 이러한 한옥의 구조는 기의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니 한옥구조가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기선·수도관은 방바닥 지나지 않도록 집을 지으면서 전기공사에 대해 좀 불만이 있다. 벽돌을 쌓기 전에 배선작업을 하자고 했다. 벽돌을 쌓고 나서 배선을 하는 것보다는 벽돌을 쌓기 전에 기둥과 보, 천정 등에 배선작업을 하면 벽돌을 쌓으면서 콘센트나 스위치 등의 설치가 간단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전기공사를 맡은 사람은 벽체를 쌓고 해야 한다고 우겼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느라 그렇다. 벽돌을 쌓고 나서 전기공사가 진행되었다. 커다란 전기드릴로 황토벽돌과 기둥을 뚫느라 건물전체가 흔들거렸다. 전기선을 감추는 작업이 요란했다. 전등 배선은 천정에서 벽을 타고 내려오느라 벽체를 까부숴 놓았고, 콘센트 배선을 하기 위해 방바닥에 쫙 깔아 놨는데 방안에 꽉 찼다. 전기, 통신, TV 등 8~9가닥이나 되는 배선을 방에서 방으로 연결하느라 복잡했다. 전기선이나 수도관 등은 방바닥을 지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전자파나 풍수적인 측면도 있지만 만약 배선에 이상이 생겼을 때는 교체나 수리가 쉽지 않다. 벽돌을 쌓기 전에 배선 공사를 했더라면 벽돌을 깨고 다시 덮는 일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쉽게 배선을 했을 것이다. 집을 지으면서 살펴보니 건축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습성이 강했다. |
▲ 기와를 얹을 때 황토를 기왓장 밑에 깐다. 황토는 단단하게 기와를 잡아주고 곡선을 만들 수 있으며 단열효과도 뛰어나다. |
골조를 세우고 황토벽돌로 벽체를 만든 다음 기와를 올렸다. 대개는 골조를 세우고 곧바로 지붕을 올리는데, 골조를 올릴 때까지도 기와의 종류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순서가 뒤바뀌었다.
기와를 선택하기까지는 진통이 컸다. 한옥구조에는 기와가 제격인데, 기와를 얹으려면 지붕의 구조를 단단히 해야 한다. 흙으로 구운 한식기와의 무게는 평당 600㎏이나 된다고 한다. 전통적인 한옥의 지붕은 서까래를 걸고 그 위에 송판이나 피죽을 깐 다음 흙을 받고 기와를 얹었다.
'왜 한옥을 지을 때 지붕을 무겁게 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들었다. 서양식 목조주택의 경우 가벼운 서까래에 합판을 얹고 '아스팔트 싱글'이라는 아주 얇고 비교적 가벼운 지붕을 만든다.
한옥의 지붕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어느 와공(기와 전문가)으로부터 들었다. 한옥의 구조는 못을 쓰지 않고 끌로 구멍을 파서 나무와 나무를 끼워 맞췄기 때문에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이 있어야 견고하다고 한다. 우리 한옥이 수백 년 동안 모진 풍파에도 견뎌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요즘엔 기와의 종류도 다양해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선택의 고민도 커졌다. 흙으로 구은 전통한식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가 각각 있다. 그런데 근래에는 암수기와가 하나로 된 '일체형기와'가 많이 쓰인다. 특히 시멘트로 만든 기와는 거의 대부분이 일체형기와다. 일체형기와는 암수기와가 한몸인 만큼 전통한식기와에 비해 평당 무게가 1/4도 채 안된다. 기와의 가격도 시멘트기와가 전통한식기와에 비해 1/5 정도로 싸다.
'건강한 내 집 짓기'에서 선택한 기와는 한옥의 멋을 살리고 무게가 가벼운 일체형인 시멘트기와를 선택했다. 그런데 시멘트기와를 쓰려니 시멘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시멘트기와를 선택하게 된 것은 경제적인 문제를 감안한 지붕구조의 설계에 따른 것이다. 전통한식기와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하려면 지붕의 골조를 단단히 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건축비가 상당히 상승하게 된다.
시멘트기와는 한식기와처럼 불에 굽지 않으므로 기와형태가 일정해 하자가 적다고 한다. 기와를 찍은 후 1년이 넘는 것을 선택했다. 시멘트의 양잿물기가 좀 빠진 것이라야 페인트가 잘 스며들기 때문이다. 기와를 얹고 나서 생각하니 시멘트기와로 정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멘트기와를 생산하는 업체가 전국적으로 많다. 하지만 기와를 찍어내는 틀이 저마다 다르고 특히 모래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기와의 질에 결정된다. 또 기와를 얹는 와공의 경력과 솜씨에 따라 지붕모양이 크게 달라진다. 똑같은 가위를 갖고 헤어디자이너의 실력에 따라 머리 모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 유성기와 유만식 사장. 대표적인 '충청도 아저씨'다. | |
ⓒ 윤형권 |
부여에서 대천을 가다보면 '유성기와'라는 기와공장이 있는데, 시멘트기와로는 전국적으로도 알아주는 곳이다. 유성기와 유만식(62세) 사장은 대표적인 '충청도 아저씨'다. 유만식 사장의 푸근한 인상처럼 기와도 순하게 생겼다. 문화재수리전문위원인 유 사장은 50년간 기와와 함께 살아 왔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성기와의 비결에 대해 "백마강 모래가 좋아서 그런가?"라며 겸손한 웃음을 활짝 편다.
기와를 얹을 때는 지붕의 곡선을 만들어낸다. 서까래를 걸며 곡선을 잡는데, 지붕의 끝과 끝에서 두 사람이 동아줄을 잡고 적당히 늘어뜨린 다음 그 선에 따라 곡선을 만들었는데 이를 '현수곡선'이라고 한다.
지붕의 골조를 세울 때 어느 정도 곡선을 만들었으면 기와를 얹으면서 좀더 세밀하게 곡선을 만든다. 황토로 기와를 얹을 때는 황토와 짚을 이겨 수박덩어리만하게 만들어 기왓장 밑에 붙인다.
이렇게 흙을 사용하면 곡을 만들 수 있을 뿐더러 단열효과도 뛰어나다.
기와를 얹고 나니 비로소 한옥다운 집이 되었다.
▲ 집 뒤에서 본 기와지붕 |
ⓒ 윤형권 |
[출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