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뿌리
양반 계급의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950여년전 비로소 성씨를 가졌다. 그때부터 본관이 생기고 시조가 생겼다. 그러나 신분이 좀더 낮은 상민과 노비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성씨를 갖게 된 것은 조선 말기에 개혁 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200여년 아니면 300여 년 전부터 성씨를 가진 것이다.
우리의 성씨는 신화 속에 있는 성씨와는 좀 거리가 있다. 핏줄(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우리 민족은 어느 누구나 아버지 계통의 부계 중심으로 하여 제각기 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각 성마다 씨족의 역사를 가지고 서로 협조하며 발전하고, 또 후세로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성씨는 성씨마다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과 정신이 강하고, 또 겨레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성씨를 통해 조상을 받들고, 가족의 전통을 이어가며, 조상의 얼과 발자취를 더듬어가면서 하나의 가보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긍지와 명예를 자랑하게 되고 성씨의 보존에 남다른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성씨의 발달과정 성씨의 종류와 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성씨의 발달 과정은 우리 나라 역사의 흐름에 따라 왔다.
조선 세종실록지리지라는 책에는 당시에 성씨가 265성이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고, 조선 영조 때 나온 도곡총설 책에는 298성씨가 있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조선 정조 때인 1776년에 이르러서는 성씨가 486성으로 두배 가까이 늘어났고, 다시 6년 뒤인 1782년에는 성씨가 무려 10배 가까이 되는 4296성씨로 크게 늘어났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갑자기 289성씨로 줄어들었다. 이처럼 우리 나라 성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볼 때, 성씨의 발달 과정은 정치의 흐름에 따라 역사의 변천에 따라 시대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30년 일제 시대 때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성씨 조사에서 250성씨로 나타났고, 1934년 중추원에서 펴낸 '조선의 성명 씨족에 대한 연구 조사'에는 326성씨로 나타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60년 국세 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성씨 11성씨를 포함해 258성씨였고, 1975년 국세 조사에서는 249성씨로 밝혀졌다. 그러다가 1985년 경제 기획원에서 본관별로 분류하여 실시한 결과 274성씨로 확인되었다. 이 조사에 따르면 1975년부터 1985년 사이에 25개 성씨가 새로 생겼으며, 성씨의 본관은 모두 3435개에 이르렀다.
이들 성씨 가운데서 김씨가 전체 인구의 21.7%로 가장 맣고, 이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나 되며, 김·이·박·최씨 등이 45%를 차지했다. 이와 함께 우리 나라의 10대 성씨는 김, 이, 박, 최, 정, 강, 조, 윤, 장, 임씨로서 전체 인구의 64.5%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관 수로 으뜸인 것은 김해 김씨가 9.8%, 밀약 박씨가 6.7%, 전주 이씨가 5.9%, 경주 김씨가 3.8%, 경주 이씨가 3% 순으로 되어 있다. 새로 생겨난 성씨로는 후, 제, 두, 환, 명, 교, 저, 학, 습, 난, 루, 강전, 소봉, 망절, 장곡, 비, 춘, 흥, 초, 애, 운씨 등인데, 이 가운데 루, 저, 강전, 소봉, 장곡, 초씨는 일본, 중국, 베트남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단 1명씩 뿐이다.
성씨가 없이 이름만 있는 사람도 전국에 180명이나 되고, 본관을 마음대로 정해 쓴 경우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부모가 없는 고아 출신으로 법원에서 성씨를 받을 때 본관도 함께 받은 것이다.
인구별로 볼 때, 500만 명 이상인 성씨는 김씨와 이씨 둘 뿐이고, 500만 명 미만 100만 명 이상인 성씨는 박씨, 최씨, 정(鄭)씨 등 3개이며, 100만 명 미만 50만 명 이상이 14개, 50만 명 미만 10만 명 이상이 32개, 10만 명 미만 1만 명 이상이 53개의 성씨로 나타나, 실제적으로 인구수가 많은 성씨는 90여 성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성씨의 유래와 역사
단군은 우리 한(韓)민족이 세운 나라의 첫 임금 천제(天帝) 환인(桓因) 손자이며 환웅(桓雄) 아들. BC 2333년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개국 동일 언어권을 갖고 있는 민족 연합. 한반도에는 옛부터 외국인이 귀화한 성씨도 많다. 검교정승을 지냈다. 아들 인승단이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연안부원군에 봉
조선시대 초기에만 만해도 성씨가 있는 양반은 10%
조선시대 중기에 들어와 양반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 평민들도 구전 자료에 의하여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고 토착민들은 지역 별 동일 씨족으로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성씨와 본관 성씨마다 본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본관은 바로 시조가 탄생한 땅으로 성씨의 고향인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씨가 점차적으로 확대되면서 같은 성씨라고 해도 계통이 달라, 그 근본을 명확하게 밝히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그래서 같은 한자는 쓰는 성씨 가운데서도 한 할아버지 자손이냐, 조상이 다르냐를 구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 고향을 따지는 본관이 생겨난 것이다.
본관은 본 또는 관향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관은 돈을 가리키는 뜻으로, 옛날 돈은 구멍이 뚫린 동전이었다. 이 돈을 한줄에 꿰어 묶어 가지고 다니는 것처럼, 친족이라는 사람들은 하나의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선조의 고향을 따져 본관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그러나 큰 공을 세워 임금님이 특별히 성을 내린 일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사관이라고 하여, 그 사람이 태어난 땅과는 관계없이 활동하는 지역을 본관으로 쓴 일이 있다. 예를 들면,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성씨를 임금으로부터 받은 신숭겸은 곡성 사람이었으나, 고려 태조와 함께 평산으로 놀러갔다가 그곳의 경치가 너무 좋아서 평산을 신씨의 본관으로 삼았다. 때문에 같은 글자를 쓴다고 하여 모두 같은 할아버지 자손이라고 행각해서는 잘못이며, 본관까지 같아야만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동성동본이 된다. 동성동본이라는 말은 같은 성씨에 같은 본관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 사이에는 결혼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지금이야 호적법도 없으니까 많이 달라졌지만2008년1월1일기준
정(鄭)씨 본관은 옛 문헌에 210여 본이 기록 되어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청주 동래 연일 해주 진주 하동 초계 온양 경주 봉화 광주 나주 김포 야성 함평 청산 장기 영덕 곤양 서경 서산 등 30여 본이다 역사적으로 명벌로서의 지위를 누려 왔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청주 동래 연일 온양 진주 하동 정씨 등이 상당한 세력을 폈다 정씨 의 원조는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3대 유리왕(서기24년~57년) 육촌중 지산 진지촌(본피부) 의 촌장인 지백호(좌명공신)이다 본피 부락은 현재의 경주시 중심부에 있었으므로 정씨는 일찍부터 한반도 남단에 자리 잡고 살던 선주민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정씨는 각 본관별 시조 등은 모두 지백호 의 후손 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 이지만 그 혈연적 계보를 가려낼 방도는 없다 그중 경주 정씨가 큰집이라는 대는 별로 이론이 없고 다만 동성 이족으로서 서산 정씨가 있다 그 시조 신보(臣保)는 원래 중국의 절강성 사람으로 송(宋)나라가 망하자 고려에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청주정씨 유래와 인물편
◇ 정충사(약포유물관) 약포(藥圃) 정 탁(鄭 琢)은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이충(鄭以忠)의 아들이다.
본관 청주(淸州). 자 자정(子精). 호 약포(藥圃) ·백곡(佰谷). 시호 정간(貞簡). 이황(李滉)의 문하생.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에 급제한 뒤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1568년(선조 1) 교리 겸 춘추관기주관(校理兼春秋館記注官)이 되어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이조좌랑 ·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우회(寓懷)
평생의 독서는 늘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길 헤아렸는데 (讀書常擬濟時艱) 벼슬살이에 분주하여 얼마나 오랜 세월 보냈던가 (奔走紅塵幾暑寒)
왜구의 난리 칠년 동안 한가지의 계책도 내지 못하고 (寇亂七年無一策)
도리어 백발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향 산에 돌아온 것이 부끄럽도다 (還白髮始歸山)
읍호정 마루에 들어서면 우회(寓懷: 회포에 부쳐)라는 이 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약포는 우의정 때 나이 70 이 되어 누차 사임하려 했으나 선조대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제세광민(濟世匡民)을 당부하였다. 78세에 사임하여 고향산천에 돌아와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경책(警責)한 이 시를 보노라면 나라에 대한 끝없는 충정과 그의 겸손에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약포는 만년에 우국의 수심을 안고 내성천에서 배를 저어 고기잡이로 소일을 하며 고향의 민중들을 보살폈다. 낚시하던 어느 날 한 초립동이 큰 소리로 배를 불러 노인의 등에 업혀 배에 올라탄 후 강을 건너면서 "요즘 이곳에 사는 약포대감이 어떻게 소일하고 지내는가" 하고 물었다. 노인은 "예, 이렇게 낚시 하다 길손을 업어 건네주기도 하면서 지냅니다"라고 하자 초립동은 깜짝 놀라면서 대감을 몰라본 죄를 사죄했다. 이는 평소 약포가 얼마나 겸손한 성품인가를 전해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대과에 급제했으나 부인 반(潘)씨마저 이를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다가 약포가 사당에 고할 일이 있다고 할 때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 약포는 낙향 때 나라에서 많은 은전(恩典)을 내리려 했지만 국난을 겪은 어려운 시기라며 이를 모두 사양했다. 그는 나라에서 굳이 은전을 주려 하자 낙동강 관리권을 받아와 지금의 고평들을 개간해 이 일대 사람들의 농토 기반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리고 협동자치규약인 고평동계약문(高坪洞契約文)을 만들어 지역 사회풍속을 순화시켰는데, 이것이 예천향약의 근원이 되었다. 읍호정에는 동계(桐溪) 정온이 쓴 기문과 후손인 정희섭이 쓴 중건기가 있고 퇴계 이황, 윤두수, 김응조 등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문화재 도굴범들 때문에 모각을 걸어두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聰明博學했던 당대의 대 선비 약포는 일찍이 8세 때 글을 깨우쳐 능통할 정도로 영민하였다. 13세 때 금사사(金沙寺)에서 함께 공부하고
훗날 대사헌을 지낸 백담(栢潭) 구봉령은 "약포는 당시 학질을 앓고 있으면서도 태음력의 계산법인 기삼백(朞三百)을 혼자 풀어내어 음력의 윤달과 윤년의 법칙을 통달했다"고 극찬했다.
그는 삼가현감인 중부(仲父) 정이흥에게 수학했고 훗날 퇴계 문하에 나아가 성리철학의 요체를 체득했다. 진주교목으로 근무할 때는 남명 조식 선생에게 나아가 천길 절벽같이 서있는 기상(壁立千氣像)을 보고 평생의 절개를 세우게 된다. 그는 또한 성리학뿐만 아니라 경학과 천문, 지리, 상수(象數:음양, 복서(卜筮)), 병법에 두루 박통했다. 특히 그가 깊이 연구하여 제시한 고금팔진육화법(古今八陣六花法)은 병법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탁견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 한 대신이 약포를 보고 "진인군자(眞人君子)로 만민을 구제할 상"이라고 하였고, 작은 체구였지만 총명과 박학으로 기민한 판단을 내릴 때는 중국 대신들도 경탄했다. 약포는 임란 중에는 망우당 곽재우, 김덕령, 박명현, 한백겸, 사명대사, 홍경신, 변홍달 등 30 여명의 인재를 발굴하여 천거하는 등 임란 승리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나중에 분조(分朝) 받은 세자를 호종(扈從)할 때는 희천을 지나 설한령(雪寒嶺)에서 풀밭에 자고 비바람 속에서 먹는, 초숙우찬(草宿雨餐) 가운데서도 군사모집과 작전지휘, 의병장 격려 등 국사를 흔들림 없이 처리했고, 면밀히 파악한 시국수습책을 행재소(行在所: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 보냈다. 이러한 와중에 당시 상황을 남김없이 기록한 것이 바로 용사일기이다. 약포의 저서는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과 용사일기, 임진기록, 용사잡록, 약포의 저술을 총괄 정리한 약포 선생 문집 7권4책과 속집 4권2책이 전한다. 용사일기는 임진년과 계사년에 걸친 난중기록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저술은 약포의 셋째아들 청풍자(淸風子) 정윤목이 임진왜란 중 부친을 수행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약포의 인품 소신·대의 관철 위해 목숨 걸고 바른말 이순신 생명 구해 약포는 원칙과 대의명분에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했지만, 대범한 성품과 바다처럼 넓은 도량을 가진 대학자였다. 그는 이조참판시절 조정이 부정축재자 윤의중을 형조판서로 임명하자 율곡 이이와 함께 그 부당함을 아뢰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이조(吏曹)를 문책하려 하자 사임으로 대항하였다. 또 명종 때 문정왕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20년 동안 전횡을 일삼는 윤원형의 부당함을 서슴없이 탄핵하였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시절 향실(香室)에서 숙직을 하고 있을 때 문정왕후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향실에 있는 향을 갖고 오라고 명하자, 약포는 "이 향은 종묘사직에 쓰는 물건입니다" 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문정왕후는 진노하여 그를 하옥하라고 명했지만 약포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고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은 전하고 있다. 이순신 에게 사형이 구형되었을 때 약포가 목숨을 걸고 구명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순신은 훗날 "나를 추천한 이는 서애요, 나를 구해준 이는 약포"라고 말한 바 있다. 또 명나라에서 원군온 이여송이 임진강에서 왜적에게 패한 책임을 물어 그의 참모인 두사충을 참수하려 하자, 약포는 "전시에 인재를 참수하면 불리하다"며 구명했다. 또 노수신, 이산해, 황정욱, 권율, 김덕령 등을 옥사에서 사면시키거나 감형토록 했다. 그는 이 같이 국가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였고 인재를 귀하게 여긴 대담하고도 선지적인 인물이었다. 퇴계 문인으로 동인에 속했던 약포는 동서붕당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파당이 지는 정국 속에서도 중립을 취하며 서인의 영수 오음(梧陰) 윤두수와 도의지교(道義之交)가 두터웠다고 연보는 기록하고 있다.
◈ 崇忠祠 o. 위치 : 충남 천안시 성환읍 매주리 o. 건립 : 1984년 8월 o. 용도 : 15세 栢谷백곡(諱 崑壽(곤수), 諡號 忠翼公(충익공), 輔國崇祿大夫,(보국숭록대부) 議政府 左贊成,의정부좌찬성) 贈 議政府 領議政 西川府院君증 의정부 영의정 서천부원군), 壬亂時 明(임난시 명)나라 請 兵陳奏使청 병진주사)로 扈聖1等 功臣(호성1등공신))先祖(선조)의 位牌(위페)와 影幀 (영정)을 奉安(봉안)하고 매년 4월 마지막 휴일을 기하여 奉享(봉향)하고 있 다. o. 경위 : 백곡선조의 위패는 백곡선조가 사시던 京畿道 長湍郡 津東面 下浦里에서 후손들이 모시고 奉享하고 있었으나 1950년 6. 25動亂을 맞아 不遷之 位牌가 栢谷派 成歡 世居 地로 피란 오시게 되어 천안시 성환읍 매곡종친회에서 성 금을 모아 1984년 8월 崇忠祠를 건립 奉祭祀 해 오던 중 1994년 國立中央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는 栢곡선조의 影幀 을 문화재 관리국의 허가를 얻어 複製하여 奉安 하고있다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
회연서원은 1581년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께서 후진양성을 위해서 성주군 수륜면 양정 봉비암 기슭에 회연서당을 지어 존현양사의 실현을 위하여 강론하시던 곳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2년이 되던 해에 전국사림이 한자리에 모여 서원 창건론이 발의되어 5년 후인 인조 5년 정묘 9월(1627)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사당에는 주향으로 한강선생을 모시고 배향에 석담 이윤우선생을 받들고 있다.
견도루(見道樓)
서원 출입문
회연서원 강당(講堂) 현재수리중으로 천막을 덥어 놓은상태(2012년) 동재(東齋) 명의재
서재(西齋) 지경재
신(新) 사당
전사청으로 출입하는 내삼문
구(舊) 사당
관리사와 연결되는 쪽문
관리사
숭모각(崇慕閣), 한강 정구 선생의 유물전시관
향현사 내삼문
향현사(鄕賢祠) 야성인 신연 송사이와 광산인 용재 이홍기, 광산인 육일헌 이홍량, 광산인 모재 이홍우, 광산인 동호 이서 선생을 봉향하고 있다.
신도비
청주 정씨(淸州) 1세 시조 휘는 극경(克卿)으로 정확한 출생연대는 알수없으나 손자 되시는 대장군부군의 활약상으로 보아 그 년대를 기록으로 미루어보면 서기1127년즉 고려17대왕 인종5년 전후로 추산된다(지금으로부터(2012년현재)약885년 전으로추정된다) 벼슬은 중랑장 을 역임 하셨으며 배위 또한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묘소 또한 실전 되어 안동시 와룡면 서현리 추원제 뒤에 시조위 이하 8세조 까지 제단을 세워 매년 봄 한식일 에 제향을 올린다. 청주정씨세천지단 청주 정씨시조 고려 중랑장 휘 극경(배 실성씨) 2세 휘는 효문(孝聞)이고 생몰 년대 미상 관직은 별장 이시고 증직으로 중랑장 이시다 묘소도 실전이며 배위도 기록이 없다.
2세별장 증중랑장 휘 효문 (배 실성씨) 3세 휘는 의(?)며 관직은 조의대부 행신호위 대장군 이시며 증직으로 감문위 상장군 이시다 1217년 평양에 반란군 최광수 를 물리친 공으로 여러번 승진하였으며 1233년 반란군 필현보 에게 살해 당하시니 조정에서 포상과 증직을 더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 충의전에 실려있다 조선조 선조왕 께서 평안도 성천에 사당을 짖고 표충 표절사란 현판을 내리다. 배위는 적성 백씨이다 3세 조의대부 행신 호위대장군 증 정의대부감문위상장군 휘의(배 적성백씨)
4세 휘는 현(?)이고 역임한 관직은 승봉랑 감찰어사 이며 증직은 은청광록대부 상서 좌복야 이시다 (목은 이색이 쓴 가전에 의하면 어사는 조상이 배푼 덕을 누리지 못하였으나 후손들은 그 음덕으로 경사를 누렸다)고 하였다 배위는 김포정씨와 연덕 군부인 청주 한씨 이다.
4세승봉랑 감찰어사 증 은청광록대부 상서 좌복야 휘 환(배 김포정씨 연덕랑부인 청주한씨) 5세 휘는 해(?)이며 자는 회지(晦之) 이며 삼형제중 셋째로 태어나시고 맏분은 무후이고 둘째분은 승려로 출가하다 1254년(고려고종41)에 출생하시어 벼슬은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영연정 대사학 동 제수사를 역임 했으며 시호는 장경공이다 부군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시고 외롭게 자랐으나 열심히 학문을 쌓아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과거에 급제 하시며 문장이 뛰어나시다 1305년(충렬왕30)6월 5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52세이시다 묘는 경기도 임진현 감악산 이며 배위는 부안 김씨(부령군부인)와 남양 홍씨(익성군부인)이시다 5세 광정대부 도천의찬서사 연영전 대사학동제수사 휘 해(배 부여군부인김씨 익성군부인홍씨)
6세 휘는 책(心+責)이며 형제분중 맏분으로 1274년(고려원종15)에 탄생하시어 벼슬은 통헌대부 판선공사 중대광 청하군 에 봉해졌다 1328년 8월 12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55세이시며 묘는 개성에 있다 동생 되시는 분은 휘는 이(怡) 벼슬은 판도 판서겸 대제학을 역임 하셨으나 무후이시고 배위는 영가군부인 안동 김씨로 충렬공 김방경의 손녀이시다 6세 통헌대부판선공사 봉 중대광청하군 휘 책 (배 영가군부인김씨)
7세 휘는 오(敖+頁) 자는 사겸(思謙) 호는 설헌(雪軒) 형제분중 맏분으로 1299년(고려충렬왕25)에 탄생 하시다 윈나라 벼슬은 선수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 유학제거이고 고려 벼슬은 추충진의 보리공신 중대광 금자광록대부 수사도주국 도첨의 평리이고 공신호를 서원백 으로 받으시고 1364년 7월 14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66세이며 그때의 사람들이 나라에 주춧돌이 무너지고 유림의 대들보가 부러졌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묘는 개성에 있으며 시호는 문극공 이시고 동생 되시는 분은 휘는포 자는 중부 호는 설곡이시다 배위는 평강 채씨와 남양 홍씨이시다. 후배부인 홍씨는 고려 충숙왕비 명덕왕후와 자매간이다. 7세 추충진의 보리공신 수사도주국 도첨의평리 봉서원백 휘오(배 평강채씨 남양홍씨) 8세 휘는 침(?) 자는 공보(公寶) 호는 퇴은(退隱) 삼형제 분중 맏분으로 1323년(고려충숙왕10)에 출생 하시어 벼슬은 봉선대부 소부정윤 에 계시었으며 고려가 망하자 진외가인 안동 으로 내려오시고 1395년 5월 4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73세이시고 묘는 안동 남산 사동인대 아쉽게도 실전이다 배위는 안동 김씨이시다 8세 봉선대부 소부정윤 휘침(배안동김씨)
9세 휘는 의룡(義龍) 1352년(고려공민왕1) 에 출생하시어 벼슬은 좌우위 보승산원 이나 조선의 혁명으로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시고 선친을 모시고 남쪽 안동으로 내려와 살다가 1426년(세종8) 2월 20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75세이시고 묘는 안동시 풍산읍 자을파동 오향이나 아쉽게도 실전이다 배위는 거제 반씨 이고 묘는 안동시 조해동 이며 비석이있다
10세 휘는 약(若) 1379년(고려우왕5)에 출생 하시고 10여세에 안동으로 오셨으며 태종조에 고려의 충신후예라하여 음사로 벼슬은 중훈대부 형조도관 좌랑 이시며 1429년(세종11) 9월 19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51세 이시며 묘는 안동시 와룡면 제수봉 을향 이며 비석있음 1956년 고쳐세움 배위는 보주 김씨이며 1383년(고려우왕9)에 출생 하시어 1454년 4월 21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72세 이며 안동 서돈촌 오향이며 비석 있음 1956년 고쳐세움
11세 휘는 보문(普文) 1404년에 출생하시고 벼슬은 장사랑 영숭 진전직 이시고 1475년 11월 6일 별세 하시니 향년 72세며 묘는 안동시 와룡면 서현리 묘향 이며 비석 있음 1982년에 고쳐세움 배위는 광주 김씨와 진성 이씨두분인대 광주김씨 묘는 예안 지경현 오향이며 비석있음 1980년 고쳐세움 진성이씨 묘는 안동 감악산 손향이며 비석 있음 1980년 고쳐 세움 시제일 음10월 15일
12세 휘는 원로(元老) 자는 방숙(方叔) 삼형제 분중 셋쩨로 1440년에 출생 하시어 벼슬은 네고을 현감으로 계셨고 1521년 7월 20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82세 이시고 묘는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 장수골 오향이며 비석있음 후에 증손 탁이 정승이 되어 증직에 자헌대부이조판서이시다 배위는 증 정부인 연안 김씨이며 1438년에 출생하시어 1492년 7월 12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55세시고 묘는 안동시 와룡면 감악산 오향에 비석 있음 시제일 음10월14일
13세 휘는 교(僑) 자는 자미(子美) 삼형제 분중 맏분으로 1470년년에 출생 하시고 1496년에 생원시에 합격 하였으나 연산군의 폭정에 낙향하였다 1535년 (중종30) 7월 13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66세 이시다 묘는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 모산 오향에 비석있음 손자 탁이 정승으로 증직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이시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 광주 김씨이며 묘는 부군과 연분이다 시제일 음10월13일
14세 다야 파조이신 선무랑 강계 교수 부군은 휘는 이청(以淸) 자는 직재(直哉) 호는 죽사(竹舍) 공께서는 선고이신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와 선비이신 증 정경부인 광산 김씨 사이에 셋째로 1498년에 출생 하시였다 공의 배위는 의인 안동 권씨로 1495년에 출생 하시어 1550년 6월 28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56세이시다 가정이 불행하여 일찍 요수 하시고 아드님 또한 일찍 하직 하니 공이 애석지심이 어떠하였으리요 공 께서는 향시에는 여러번 합격 하였으나 과거에는 실페 하시었다 과거 실페 원인도 가정 불행이 아닌가 싶다 늘 술로 세월을 보내시다가 1579년 3월 3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82세에 별세 하시고 그해 11월에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 다야골 을향 배위 권씨 묘소 몇보 아래에 장례를 치르다 처음 비석을 세울때에 청춘에 상부하고 홀로계시든 따님께서 공의 조카 되시는 약포공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백담 구봉령 선생께서 비문을 지으시고 별세 하신 다음 해에 비를 세웠다 한다 그후400여년의 세월이 흐르니 풍상으로 비문이 마모가 심하여 후손 들의 뜻을 모아 1992년부터 시작하여 성금 50만원 이상 내는 후손은 비문에 기명하기로 합의하고 비문은 명호면 북곡 계시는 도진파 세원씨가 수정 완료 해주시고 글씨는 봉화 내성리에 계시는 광평파 승국씨가 수고를 해주셨다 고유는 1992년 음력 10월 12일에 타파친족과 본손 다수가 참석하여 성대히 거행하였다 비문 기명자 명단 차규(車逵) 주근(柱根) 주상(柱相) 주창(柱昌) 상섭(祥燮) 재악(載岳) 백원(百元) 경원(慶元) 성금자 명단 차규(車逵50만) 주근(柱根50만) 주상(柱相50만) 주창(柱昌100만) 상섭(祥燮20만) 재악(載岳50만) 백원(百元30만) 경원(慶元100만) 영규(永逵5만) 주석(柱錫5만) 수원(壽元10만) 해원(海元10만) 만원(萬元6만) 승국(承國3만) 승민(承玟2만) 재규(在圭2만) 의인(義仁2만) 원낙(元洛2만) 승준(承俊3만) 사정(思定3만) 원용(元容1만) 봉근(奉根2만) 대의(大義2만) 기섭(禾+己燮2만) 재국(在國2만) 경화(慶和1만) 승욱(承旭2만) 재천(載千3만) 우섭(禹燮2만) 마암문중(世元 復元 潤盛) 간산문중(3만) 총 수입금531만원 지출360만2천8백원 잔금19십만7천5백원은 묘소 관리비로 입금함 시제일 음10월13일
15세 휘는 수(璲) 자는 경보(景寶) 호는 연당(蓮塘) 1527년에 출생 하시어 벼슬은 선무랑 의령 훈도 이시고 약포공 과는 4촌 사이로 한 살 아래이시다 1564년 4월 19일에 별세하시니 향년 38세이시니 이름난 선비라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묘는 안동시 와룡면 감악산 을향이나 애석 하게도 확인을 못하다 배위는 의인 순흥 안씨이고 묘는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 모산 간향이고 찬성공 묘소 서쪽이라는대 또한 확인을 못하니 후세에 찾을 방법을 연구 바람.
16세 휘는 중준(中俊) 자는 군영(君英) 3형제분중 둘째로 1549년에 출생 하시어 별세 하신 년대는 기록이 없고 묘는 안동시 율전동 오향 이시다 배위는 광주 김씨이고 묘는 연분이다.
17세 휘는 석규(錫圭) 자는 복부(復夫) 1578년에 출생 하시어 벼슬은 호군이시며1673년에 별세 하시니 향년 96세 이며 묘는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 장수골 오향이며 배위는 두분인대 두분 모두 안동 권씨이시다 묘는 대야골과 다야골 오향이다.
18세 휘는 지열(之烈) 자는 열지(烈之) 묘는 장수골 선산내에 백호 병향 제2분 배위는 영양 남씨와 영천이씨로서 묘는 두분 모두연분이다.
19세 휘는 겸(鎌) 자는 치겸(穉謙) 4형제분중 막내로 1682년에 출생 하시고 묘는 손의동 사향이며 배위는 청송 심씨로 묘는 쌍분이다.
멀리보이는 과원위에 억세꽃이핀곳인대 관리소홀로 보기에 흉한모습이였으며 주소는 안동시 와룡면 감애리(오리원) 산252번지이니 다음 영명한 후손의 관리를바람
20세 휘는 태목(泰穆) 자는 태방(泰邦) 묘는 손의동 사향이며 형제분중 둘째이시다 배위는 고창 오씨이고 묘는 손의동 사향이다. 고위와 같은곳
21세 휘는 명상(命相) 자는 석보(碩甫) 형제분중 둘째로 1762년에 출생 하시어 1834년 1월 12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73세이시며 묘는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북장골 오향이며 배위는 영천 이씨로 묘는 북장골 유향이시다.
22세 휘는 중개(重盖)요 자는 인석(仁錫)이며 호는 청호(靑湖)이시다 관향은 청주이며 고려 의종 시 중랑장 휘 극경(克卿)이시조이시며 고려 정의대부 상장군 의(?)의 후손이시다 중간 세계는 생략하고 휘 이청(以淸)은 교수공 으로 공의 파조가 되시고 조고의 휘는 태목(泰穆)이시며 고의 휘는 명상(命相)이시다 비는 영천이씨 권(權)의 따님으로 두분 사이에 둘째로1800년에 태어나시다 한양 조씨 한흠(漢欽)의 따님을 맞으시여 삼남매를 낳으시니 맏 아드님 래열(來悅) 은 큰댁으로 입양하시고 둘째이신 래기(來基)로대를 잇개 하시고 따님은 광산김씨 중현(重鉉) 에개 시집 보내시다 손자 분은 사형제로서 태진(兌鎭장능참봉) 은진(銀鎭) 해진(海鎭) 기진(箕鎭)으로 맏손자에서 홍규(鴻逵) 대규(大逵) 둘째손자에서 석규(碩逵) 옥규(玉逵) 셋째손자에서 영규(永逵) 성규(成逵) 창규(昌逵) 평규(平逵) 넷째손자에서 철규(轍逵) 차규(車逵) 삼규(三逵) 이시다 고손부터 는 모두 기록치 못하였다
안동에는 고려가 쇠망하면서 은거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이 이곳에 세거 한지는 정확한 년대는 알 수 없으나 공의 생년 전후로 추정할 뿐이며 아쉽개도 공이 돌아가신 년대도 상고할 수 없어 기록치 못하고 이곳 명호면 북곡리 하 강변 신향에 잠들어 계시니 배위 한양 조 씨 묘소는 몇 보 아래에 계시다돌아가신지 일백 수십 년이 지나니 봉분도 쇠퇴하여 자손들의 마음 죄스러움을 금할 수 없기에 후손들의 성금으로 금년 봄에 가토와 석물을 하기로 결정하고 성금에 참여한 후손은 돌에 각명하여 길이 남기며 후세에도 공의 내력을 상고 할 수 있는 문헌이 발견 시에는 고쳐서 남길 것을 간곡히 바라며 성금에 참여한 후손은 주손 재복(載復) 창규(昌逵) 주근(柱根) 주상(柱相) 주창(柱昌) 주완(柱完) 주한(柱翰) 주탁(柱卓) 주성(柱星) 그 외에도 많은 후손들의 성금이 있으나 모두 기록치 못하다 2012 3월 일 현손 주웅 삼가씀 고유제는 2012년 5월 19일 성대히 거행 하였으며 성금 기탁자 명단 창규(昌逵50만) 주근(柱根50만) 주상(柱相200만) 주창(柱昌100만) 주욱(柱昱20만) 주완(柱完50만) 주한(柱翰50만) 주탁(柱卓50만) 주성(柱星50만) 주만(柱晩10만) 재복(載復50만원) 총수입금 680만원 지출 440만9천4백원 잔금 239만6백원
23세 휘는 내기(來基) 자는 덕윤(德潤) 1856년에 출생 하시었으나 별세 하신 년대는 기록이 없고 2월 29일 별세하시다 묘는 하북곡 장암 사향 이며 배위는 안동 김씨로 1856년에 출생하시고 별세하신 년대는 기록이 없고 6월 20일 별세 하시다 묘는 북곡리 굴피등 묘향이시다.
24세 휘는 태진(兌鎭) 자는 경첨(景瞻) 호는 만초(晩?) 1878년에 출생하시어 장능 참봉을 지내시고 1938년 1월 26일 별세 하시니 향년 61세시며 묘는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산40-4번지계지현 병향 이시다 배위는 단인 안동 권씨이며 1877년 출생 하시어 1948년12월 20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72세시며 묘는 봉성 계지현 신향이다.
24세 휘는 은진(銀鎭) 자는 순첨(順瞻) 1882년에 출생하시다 별세 하신 년대는 기록이 없고 11월 22일에 별세 하시다 묘는 명호면 북곡리 남대현 미향이시다 배위는 안동 권씨로 1883년에 출생 하시고 12월 30일에 별세하시고 묘는 연분이다.
24세 휘는 해진(海鎭) 자는 경중(景中) 1890년 1월 11일 출생 하시어 1970년 11월 9일 별세 하시니 향년 81세이며 묘는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삼거리)건향 이시다 배위는 진주 류씨와 안동 김씨 두분이대 진주류씨는 1893년 출생 하시고 1월 27일 별세 하시고 묘는 명호면 도천리 강임대 곤향 이고 안동 김씨는 1906년 7월 19일에 출생 하시어 1985년 2월28일 별세 하시니 향년 80세이시며 묘는 명호면 고감리 손향 이시다
24세 휘는 기진(箕鎭) 자는 경팔(景八) 1894년 출생 하시어 1930년 12월 20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37세 이시다 묘는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강변 산 해향 이시다 배위는 고성 이씨로 1895년 9월 10일에 출생 하시어 1960년 12월 3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66세이고 묘는 명호면 매능동 수까마골 묘향 이시다.
25세 (부 兌鎭) 휘는 홍규(鴻逵) 자는 한여(翰汝) 1902년 월 일 출생 하시어 1971년 2월 3일 별세 하시니 향년 70세 이시고 묘는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 솔골 손향 이시다 배위는 안동 김씨로 1898년 8월 10일 출생 하시어 1989년 4월 23일 별세 하시니 향년 92세시고 묘는 솔골 거더리 이다
25세 (부 兌鎭) 휘는 대규(大逵) 자는 대원(大元) 1912년 5월 25일 출생 하시어 1991년 11월 25일 별세 하시니 향년 80세 이시고 묘는 명호면 여포 축향 이시다 배위는 진주 강씨로 1909년 월 일 출생 하시어 1981년 5월 25일 별세 하시니 향년 73세시며 묘는 여포 축향이다
25세 (부 銀鎭) 휘는 석규(碩逵) 자는 양오(養五) 1915년 1월 14일 출생 하시어 1980년 11월 20일 별세 하시니 향년 66세 이시고 묘는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정향이다 배위는 안동 권씨로 1914년 월 일 출생 하시어 1959년 9월 28일 별세 하시니 향년 46세 이시며 묘는 명호면 아랫솔골 손향 이시다
25세 (부 銀鎭) 휘는 옥규(玉逵) 자는 학서(學瑞) 1917년 2월 20일에 출생하시어 1992년 8월 14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76세이며 묘는 명호면 솔골 정향 이시다 배위는 안동 김씨로 1919년 6월 13일에 출샐 하시어 1999년 3월 20일에 별세 하시니 향년 81세시며 묘는 쌍분이다
25세 (부 海鎭) 명은 영규(永逵) 자는 양문(養文) 1928년 1월 13일 출생하시다 배위는 단양 우씨 1927년생이며 묘는 북곡 굴피등 묘좌이고 실은 안동 김홍동 1936년 5월 28일 출생 하시다
25세 (부 海鎭) 명은 성규(成逵) 자는 양선(養善) 1938년 월 일 출생하시다 실은 안동 김옥금 1936년 8월 1일 출생하다
25세 (부 海鎭) 명은 창규(昌逵) 자는 양무(養武) 1941년 5월 2일 출생하다 실은 봉화 금순성 1941년 10월 26일 출생하시다
25세 (부 海鎭) 명은 평규(平逵) 1944년 4월 17일 출생 하여 1978년 5월4일 별세하니 향년 35세이고 묘는 명호면 고감리 미좌이다 실은 광산 김씨로 1946년 10월 17일 출생하다
25세 (부 箕鎭) 휘는 철규(轍逵) 자는 양봉(養奉) 1916년 9월 5일 출생 하시어 1980년 12월 26일 별세 하시니 향년 65세이며 묘는 봉화군 상운면 토일리 축좌이다 배위는 안동 권씨로 1919년 11월 28일 출생 하시어 1970년 9월 1일 별세 하시니 향년 52세이며 묘는 명호면 고감리 신좌이다
25세 (부 箕鎭) 휘는 차규 (車逵) 자는 운경(雲耕) 1919년 9월 2일 출생하시어 2007년 9월 16일 별세 하시니 향년 89세 이시고 묘는 영주시 안정면 안심동 296번지 병향이시다 배위는 안동 김필한(畢漢) 1922년 10월 20일 출생 하시고 2001년 6월 18일 별세 하시니 향년 80세 이며 묘는 안심동 296번지 병향이다
25세 (부 箕鎭) 휘는 삼규(三逵) 자는 운서(雲瑞) 1922년 11월 27일 출생 하시어 2004년 2월 15일 별세 하시니 향년 83세이며 묘는 경남 창녕군 면 리 좌이다 배위는 풍산 김병규(秉閨) 1928년 10월 18일 출생 하시어 2006년2월 15일 별세 하시니 향년 79세이며 묘는 쌍분이다
항렬도(行列圖) 25세 ㅇ규(逵) ㅇ락(洛) ㅇ영(永) 26세 ㅇ흠(欽) 주ㅇ(柱) ㅇ화(和) 27세 승ㅇ(承) ㅇ섭(燮) ㅇ용(容) 28세 ㅇ원(元) 재ㅇ(載) 재ㅇ(在) 29세 ㅇ의(義) ㅇ진(鎭) ㅇ호(鎬) 30세 ㅇ윤(潤) ㅇ원(源) ㅇ수(洙) 31세 수ㅇ(樹) 인ㅇ(寅) 진ㅇ(震) 련ㅇ(?) 32세 헌ㅇ(憲) ㅇ항(恒) ㅇ창(暢) 일(日部) 심(心部) 33세 건ㅇ(建) 교ㅇ(敎) 박ㅇ(珀) 용ㅇ(墉) 34세 ㅇ발(發) ㅇ회(會) ㅇ록(錄) 35세 도ㅇ(道) 우ㅇ(遇) 홍ㅇ(洪) 36세 종ㅇ(種) 화ㅇ(華) 정ㅇ(程) 화(禾部) 초(艸部) 37세 ㅇ묵(?) ㅇ희(熙) ㅇ정(晶) 38세 치ㅇ(致) 규ㅇ(奎) 보ㅇ(報) 39세 ㅇ조(祚) ㅇ희(禧) ㅇ용(鏞) 40세 상ㅇ(湘) 용ㅇ(溶) 준ㅇ(準)
역사의 인물 정 오(鄭敖+頁):1299(충렬왕 25, 기해)∼1364(공민왕 13, 갑진). 자는 사겸(思謙). 호는 설헌(雪軒). 정책 子. 김순의 외손자. 제 포와 함께 문장이 뛰어남. 외가인 풍산 회곡에 류거함. 1317년(충숙왕 4) 문과 급제, 동지밀직사사검?도첨의평리 역임. 시호:문극(文克), 저서:『설헌집』.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 포(鄭?):1309(충선왕 1, 기유)∼1345(충목왕 1, 을유)..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오의 弟. 1326년(충숙왕 13) 문과 급제. 좌간의 역임. 1340년(충혜왕 1) 雪軒(오)과 함께 내인 최안계의 참소를 입어 형은 영해로, 그는 울주(蔚山)로 유배됨. 그 후 석방되자 1344년(충혜왕 5) 연경에 갔는데 원나라 승상이 매우 공경하여 천자에게 천거하였으나 병을 얻어 이듬해 죽음. 저서:『설곡집』.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 침(鄭?):1323(충숙왕 10, 계해)∼1395(태조 4, 을해). 자는 공보(公寶). 호는 퇴은(退隱). 오의 子. 1343년(충혜왕 4) 문과 급제. 소부정윤 역임.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명분을 지켜 안동으로 은거함.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의룡(鄭義龍):1352(공민왕 1, 임진)∼1426(세종 8, 병오) 침의 子. 동정내시산원, 좌우위보승산원을 지냄. 조선의 혁명으로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음. 부친을 모시고 남으로 내려와 안동에 은거함.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 약(鄭若):1379(우왕 5, 기미)∼1429(세종 11, 기유) 의룡의 子. 전조의 충신후예라 하여 음사로 형조도관좌랑을 지냄.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보문(鄭普文):1404(태종 4, 갑신)∼1475(성종 6, 을미) 약의 子. 장사랑 영숭전진전직을 지냄.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인로(鄭仁老):생몰년 미상 보문의 子. 현신교위 수용양위사직을 지냄.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훈로(鄭勳老):생몰년 미상 보문의 子. 한성부주부 계공랑 록사를 지냄.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원로(鄭元老):1440(세종 22, 경신)∼1522(중종 17, 임오). 자는 방숙(方叔). 침(?)의 현손. 성종조에 진안?은진?의령?장수현령으로 나아가 치덕이 높았음. 증손 탁(琢)의 귀하게되므로 이조판서에 증직됨. 고향에 돌아와 우향계의 개칭인 진솔회에 참여하여 고장의 덕망있는 사람들과 교유.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윤소(鄭允韶):생몰년 미상. 자는 선미(善美). 인로(仁老)의 子. 공무랑 의영고직장을 지냄. ▣참고:『외룡면지』 ?집필:이원걸
정 교(鄭僑):1470(성종 1, 경인)∼1535(중종 30, 을미). 자는 자미(子美). 원로(元老)의 子. 1496년(연산군 2) 생원시 합격. 연산조의 혼정을 당하여 향리로 돌아와 은거. 시사가 청고하여 사림의 추종을 받음. 증직: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 권벌(權?)?이현보(李賢輔)?박찬(朴璨)?윤반로(尹磻老)?김세경(金世卿)?남흠(南欽)?류공권(柳公權)?권향(權珦) 등과 교유.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언보(鄭彦輔):1477(성종 8, 정유)∼1520(중종 15, 경진). 자는 충경(忠卿). 인로(仁老)의 손자. 사마시 합격. 서책을 일삼아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였고, 품성이 온아하여 안자(顔子)(顔淵)라 불림.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이흥(鄭以興):생몰년 미상. 원로(元老)의 손자. 문행으로 삼가현감 역임.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이청(鄭以淸):1498(연산군 4, 무오)∼1579(선조 12, 기묘) 자는 직재(直哉). 호는 죽사(竹舍). 원로(元老)의 손자. 강계교수 역임. 학업에 정진하여 무너진 향풍을 진작시키는데 힘씀.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 괄(鄭?):1499(연산군 5, 기미)∼?. 자는 수백(秀伯). 호는 일제(一齋). 언보(彦輔)의 아들.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 역임.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이충(鄭以忠):1502(연산군 8, 임술)∼1546(명종 1, 병오). 자는 신중(信仲). 원로(元老)의 손자. 아들 탁(琢)의 貴로 영의정에 증직되고 청성부원군에 봉해짐.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 두(鄭枓):1508(중종 3, 무진)∼1576(선조 9, 병자). 자는 대임(大任). 호는 죽헌(竹軒). 언보(彦輔)의 아들. 음보로 사첨사첨정 역임. 증직:한성부우윤.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 련(鄭璉):1524(중종 19, 갑신)∼1594(선조 27, 갑오). 자는 연기(廷器). 호는 송파(松坡). 이충(以忠)의 맏아들. 과거에 관심을 두지 않고 후생을 가르치는데 힘씀. 참봉 역임.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 탁(鄭琢):1526(중종 21, 병술)∼1605(선조 38, 을사).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원로(元老)의 증손, 이충(以忠)의 아들. 이황(李滉) 문인.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 급제. 여러 청요직을 역임하고 예조판서와 좌의정을 거쳐 령중추에 이름. 임란때 왕이 몽진하자 호종하였으며 동서당색에 동요하지 않고 인물을 적재적소에 등용함. 이순신(李舜臣)이 무고를 당해 사경에 이르자 그를 구원함. 호종한 공으로 서원부원군에 봉해짐. 시호:정간(貞簡). 제향:도정서원(醴泉). 저서:『약포집』?『만견문록』. ▣참고:「행장」(황섬(黃暹) 찬) ?집필:이원걸
정 수(鄭璲):1527(중종 22, 정해)∼1564(명종 19, 갑자). 자는 경보(景寶). 호는 연당(蓮塘). 이청(以淸)의 아들. 정탁(鄭琢)?구봉령(具鳳齡)과 함께 도의로 강마함. ▣참고:『와룡면지』 ?집필:김태안
정 경(鄭璟):1530(중종 25, 경인)∼1605(선조 38, 을사). 초명은 장옥(璋玉). 자는 치량((致良). 호는 청호(聽湖). 교(僑)의 손자. 남후면 단호에 거주. 진사시 합격. ▣참고:문중자료(정회원) ?집필:이원걸
정사성(鄭士誠):1545(인종 1, 을사)∼1607(선조 40, 정미). 자는 자명(子明), 호는 지헌(芝軒). 두의 아들. 외조는 안동 권식(權軾). 이황(李滉)?김언기(金彦璣)?구봉령(具鳳齡)의 문인. 류운룡(柳雲龍)?이덕홍(李德弘)?금응협(琴應夾)?김성일(金誠一)?류성룡(柳成龍)과 교유.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대과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 1590년 유일로 천거받아 태능참봉을 거쳐 현감을 역임. 임란시, 태조의 영정을 받들어 난이 평정될 때까지 봉안함. 만년에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됨. 제향:사계서원. 저서:『지헌집』?『역학계몽질의』. ▣참고:「행장」(이상정 찬) ?집필:이원걸
정희성(鄭希聖):1548(명종 3, 무신)∼1633(인조 11, 계유). 자는 경지(敬之). 기(璣)의 아들. 탁(琢)의 종질. 김언기(金彦璣)의 문인. 호군에 제수됨.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사공(鄭士恭):1555(명종 10, 을묘)∼1593(선조 26, 계사). 본관 淸州. 자는 자아(子安). 호는 죽헌(竹軒). 사성(士誠)의 동생. 장사랑 삼척교수 역임. ▣참고:문중자료(정상의) ?집필:이원걸
정사신(鄭士信):1558(명종 13, 무오)∼1619(광해군 11, 기미). 자는 자보(子孚). 호는 매창(梅窓). 사성(士誠)의 동생. 구봉령(具鳳齡) 문인. 1582년 식년문과 급제. 저작랑?예조좌랑?감찰?정언 역임. 임란 발발 당시, 노모를 위해 귀근 중이라 황급히 상경하여 왕을 호종하려고 통천까지 뒤따라 감. 그곳 고을 원인 정구(鄭逑)의 만류로 강릉에 당도하여 향병과 함께 적을 토벌함. 이내 반대파들의 상소로 삭직 당함. 1595년 재등용되어 선산군수 역임. 1609년 문과 중시에 급제. 판결사에 이름. 추증:예조참판. 저서:『매창집』?『조천록』. ▣참고:「행장」(류활규[柳?奎] 찬) ?집필:이원걸
정계준(鄭季俊):1559(명종 14, 기미)∼?. 자는 여언(汝彦). 이청(以淸)의 손자. 구봉령(具鳳齡)?김언기(金彦璣)의 문인.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사의(鄭士毅):1562(명종 17, 임술)∼1631(인조 9, 신미). 자는 자홍(子弘). 호는 물제(勿齋). 사신(士信)의 동생. 1601년 선교랑행 대구교수에 제수됨.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부기(鄭?企):1566(명종 21, 병인)∼1636(인조 14, 병자). 자는 도보(道甫). 사성(士誠)의 아들. 구봉령(具鳳齡)?김성일(金誠一)의 문인. 임란시 김해(金垓)의 휘하에서 서기를 담당. 곤양훈도 역임. 문학과 예법에 뛰어남.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 전(鄭佺):1569(선조 2, 기사)∼1639(인조 17, 기묘). 자는 수보(壽甫). 호는 송오(松塢). 사성(士誠)의 아들. 외조는 영양 남순효(南舜孝). 김성일(金誠一)?류성룡(柳成龍)?구봉령(具鳳齡)의 문인. 1601년 사마시 합격. 광해군의 혼정을 피해 출사를 일시 중단함. 인조반정 이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시종 독서궁리하며 후진을 양성함. 저서:『송오집』. ▣참고:「행장」(이현일[李玄逸] 찬) ?집필:이원걸
정석윤(鄭錫胤):1570(선조 3, 경오)∼1648(인조 26, 무자). 자는 술부(述夫). 이청(以淸)의 증손. 구봉령(具鳳齡)?권춘란(權春蘭)?권대기(權大器)의 문인. 문사과 행의로써 중망을 받음.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 면(鄭?):1579(선조 12, 기묘)∼1652(효종 3, 임진). 자는 면보(勉甫). 호는 매헌(梅軒). 사성(士誠)의 아들. 생원시 합격.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 숙(鄭?):1584(선조 17, 갑신)∼1631(인조 9, 신미). 자는 근보(謹甫). 호는 사헌(思軒). 사의(士毅)의 아들. 1624년(인조 2) 사마시 합격.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 신(鄭伸):1584(선조 17, 갑신)∼1656(효종 7, 병신). 자는 시보(時甫). 호는 보졸당(保拙堂). 사성(士誠)의 아들. 생원시 합격. 문학과 예법에 힘쓰는 한편 후학을 양성함.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 흔(鄭?):1590(선조 23, 경인)∼1654(효종 5, 갑오). 자는 완보(完甫). 호는 인헌(忍軒). 사의(士毅)의 아들. 1624년(인조 2) 사마시 합격.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 준(鄭儁):1595(선조 28, 을미)∼1683(숙종 9, 계해). 자는 영보(英甫). 사의(士毅)의 아들. 호군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권진호
정 칙(鄭?):1601(선조 34, 신축)∼1663(현종 4, 계묘). 자는 중칙(仲則). 호는 우천(愚川). 사신(士信)의 아들. 1627년 사마시 합격. 장능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사의하고 곧 물러남. 영주의 구성 남쪽 우천에 집을 짓고 자연을 벗하여 독서함. 증직: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저서:『우천집』.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기경(鄭基敬):1601(선조 34, 신축)∼1674(현종 15, 갑인). 자는 이직(而直). 호는 송은자(松隱子). 사성(士誠)의 손자. 성품이 간결하고 서예에 능함.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 담(鄭?):1605(선조 38, 을사)∼1692(숙종 18, 임신). 자는 정보(正甫). 사의(士毅)의 아들. 호군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권진호
정개현(鄭開顯):1609(광해군 1, 기유)∼1662(현종 3, 임인). 자는 재명(在明).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이원걸
정응수(鄭應壽):1612(광해군 4, 임자)∼1673(현종 14, 계축). 자는 문숙(文叔). 경(璟)의 손자. 참봉 역임. ▣참고:문중자료(정회원) ?집필:이원걸
정삼중(鄭三重):1624(인조 2, 갑자)∼1699(숙종 25, 기묘). 자는 중언(中彦).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권진호
정기숭(鄭基嵩):1628(인조 6, 무진)∼?. 자는 관중(寬仲). 숙(?)의 아들. 호군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권진호
정 선(鄭?):1634(인조 12, 갑술)∼1717(숙종 43, 정유). 자는 기언(器彦). 호는 삼기제(三棄齋). 전(佺)의 손자. 기적(基績)의 아들.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함. 부모가 돌아가시자 초옥삼간을 지어놓고 안분자족한 삶을 영위. 효우가 극진하고. 고금의 예서에 매우 밝음. 수직:뷰호군. 저서:『예의보유』?『삼기제집』. ▣참고:「묘갈명」(조술도 찬) ?집필:권진호
정기조(鄭基祚):1641(인조 19, 신사)∼1697(숙종 23, 정축). 자는 계응(季膺). 호는 추만(秋巒). 문예가 숙달했으나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 물러나 한가롭게 지냄. 추증:參判. ▣참고:문중자료(정세환) ?집필:권진호
정기만(鄭基萬):1646(인조 24, 병술)∼1732(영조 8, 임자). 자는 이수(而壽). 호는 삼오제(三梧齋). 담(?)의 아들. 호군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권진호
정사중(鄭士重):생몰년 미상. 자는 중관(仲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권진호
정 인(鄭?):1650(효종 1, 경인)∼1715(숙종 41, 을미). 자는 성용(聖用). 기윤(基胤)의 아들. 통덕랑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 ?집필:권진호
정태징(鄭泰徵):1656(효종 7, 병신)∼1714(숙종 40, 갑오). 자는 래지(來之). 호는 졸수제(拙守齋). 전(佺)의 증손. 저서:『졸수제집』. ▣참고:「묘지명」(이광정[李光庭] 찬) ?집필:권진호
정 탁(鄭鐸):1659(효종 10, 기해)∼1718(숙종 44, 무술). 자는 여선(汝宣). 호는 매계(梅溪). 사의(士毅)의 증손. 문과 급제. 통훈대부 사헌부장령 역임. 저서:『매계집』. ▣참고:문중자료 ?집필:권진호
정천주(鄭天周):1666(현종 7, 병오)∼1710(숙종 36, 경인). 자는 주천(周天). 호는 신계(新溪). 사성(士誠)의 현손. 1689년(숙종 15) 생원시 합격. 진취에 뜻이 없어 임천에 물러나 서사를 가까이 하며 후진을 양성함. 저서:『신계집』. ▣참고:「묘갈명」(류필영[柳必永] 찬) ?집필:권진호
정태형(鄭泰亨):1669(현종 10, 기유)∼1629(영조 5, 기유). 자는 원겸(元謙). 호(鎬)의 아들. 1713년(숙종 39) 진사시 합격. ▣참고:『사마방목』 ?집필:권진호
정의모(鄭宜模):1670(현종 11, 경술)∼1730(영조 6, 경술). 자는 사범(士範). 호는 석강(石岡). 사성(士誠)의 오대손. 이현일 문인. 타고난 자품이 간결하며, 문학과 지행으로 중망을 받음. ▣참고:『와룡면지』 ?집필:권진호
정의장(鄭宜樟):1685(숙종 11, 을축)∼1748(영조 24, 무진). 자는 사장(士章). 호는 덕계(德溪). 기경(基敬)의 증손.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창의함. ▣참고:『와룡면지』 ?집필:권진호
정태옥(鄭泰玉):1705(숙종 31, 을유)∼1775(영조 51, 을미). 자는 시회(時晦). 호는 무면제(無名齋). 인흥(仁興)의 아들. 생부는 운흥(雲興). 통덕랑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 ?집필:권진호
정천흥(鄭天興):1709(숙종 35, 기축)∼1769(영조 45, 기축). 자는 순칙(舜勅). 기만(基萬)의 아들. 증직:죄승지. ▣참고:문중자료 ?집필:권진호
정중렬(鄭重烈):1714(숙종 40, 갑오)∼1772(영조 48, 임진). 자는 광보(光甫). 호는 서암제(棲巖齋). 사성(士誠)의 6대손. 박학호선하여 세상의 명리에 뜻이 없었으며, 문예와 학행에 힘써 향내에 명성이 높았음. ▣참고:『안동향교지』?집필:권진호
정택상(鄭宅相):1715(숙종 41, 을미)∼1778(정조 2, 무술). 자는 성지(成之). 생부는 태도(泰道). 계부는 태달(泰達). 증직:좌통례.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성귀(鄭聖龜):1735(영조 11, 을묘)∼?. 자는 국서(國瑞). 동지중추부사 역임.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이원걸
정중수(鄭重燧):1735(영조 11, 을묘)∼1813(순조 13, 계유). 자는 맹회(孟晦). 택상(宅相)의 아들. 증직:좌승지.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세귀(鄭世龜):1743(영조 19, 계해)∼?. 자는 낙서(洛瑞). 증직:사복시정.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이원걸
정래성(鄭來成):1744(영조 20, 갑자)∼1835(헌종 1, 을미). 자는 기서(岐瑞). 호는 사헌(思軒). 사성(士誠)의 7대손. 중섭(重燮)의 子. 1780년 문과 급제. 장악원주부?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 역임. 가학을 전수하고 주자학을 신봉함. 저서:『사헌집』. ▣참고:「행장」(류치명[柳致明] 찬) ?집필:이원걸
정태복(鄭泰復):1745(영조 21, 을축)∼1792(정조 16, 임자). 자는 성초(聖初). 천흥(天興)의 아들. 증직:참판.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중대(鄭重大):1763(영조 39, 계미)∼?. 자는 덕유(德由). 구상(九相)의 아들. 증직:통훈대부 사복시정. ▣참고:문중자료(정경호) ?집필:이원걸
정한제(鄭漢濟):1766(영조 42, 병술)∼1793(정조 17, 계축). 자는 여인(汝人). 호는 청문자(靑門子). 사신(士信)의 6대손. 효자로 1863년(철종 14) 복호가 내려짐 .▣참고:『교남지』 ?집필:이원걸
정지순(鄭之純):1766(영조 42, 병술)∼1819(순조 19, 기묘). 자는 맹일(孟一). 호는 명림(明林). 천성이 단아하고 문사가 정민함. ▣참고:『와룡면지』 ?집필:이원걸
정래진(鄭來震):1772(영조 48, 임진)∼1837(헌종 3, 정유). 자는 동언(東彦). 중수(重燧)의 아들. 증직:호조참판.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지락(鄭之洛):1773(영조 49, 계사)∼1857(철종 8, 정사). 자는 맹용(孟容). 호는 침천제(枕泉齋). 생부는 내성(來成). 계부는 내양(來陽). 저서:『침천제유고』. ▣참고:「행장」(류필영[柳必永] 찬) ?집필:이원걸
정광진(鄭光珍):1777(정조 1, 정유)∼?. 자는 경망(景望). 증직:통정대부 좌승지.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이원걸
정재동(鄭在東):1778(정조 2, 무술)∼1812(순조 12, 임신). 자는 성오(星五). 태복의 아들. 통덕랑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래격(鄭來格):1780(정조 4, 경자)∼?. 자는 치경(致敬). 중급(重?)의 아들. 동추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래달(鄭來達):1785(정조 9, 을사)∼?. 자는 성민(聖民). 증직:통정대부 스정원좌승지. ▣참고:문중자료(정경호) ?집필:이원걸
정재연(鄭在淵):1786(정조 10, 병오)∼1857(철종 8, 정사). 자는 약여(躍如). 태복(泰復)의 아들. 증직:참판.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창윤(鄭昌潤):1803(순조 3, 계해)∼?. 자는 영호(永浩). 증직:가선대부 호조참판. ▣참고:문중자료(정경호) ?집필:이원걸
정래호(鄭來鎬):1809(순조 9, 기사)∼?. 자는 찬지(贊之). 증직: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이원걸
정지승(鄭之昇):1809(순조 9, 기사)∼1892(고종 29, 임진). 자는 일여(日如). 래진(來震)의 아들. 동추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지성(鄭之成):1813(순조 13, 계유)∼1891(고종 28, 신묘). 자는 여운(汝運). 래정(來貞)의 아들. 1864년 사마시 합격. ▣참고:『사마방목』 ?집필:이원걸
정중기(鄭重琦):1816(순조 16, 병자)∼1899(광무 3, 기해). 자는 백온(伯蘊). 재연(在淵)의 아들. 동추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희락(鄭喜洛):1821(순조 21, 신사)∼?. 자는 건안(建安).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경호) ?집필:이원걸
정달규(鄭達逵):1827(순조 27, 정해)∼1905(광무 9, 을사). 자는 문민 호는 죽오(竹塢). 지일(之一)의 아들. 중추원의관 역임.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장규(鄭莊逵):1831(순조 31, 신묘)∼1894(고종 31, 갑오). 자는 덕장(德章). 지룡(之龍)의 아들. 통덕랑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취동(鄭就同):1833(순조 33, 계사)∼?. 자는 광서(光瑞). 중쾌(重快)의 아들. 도사 역임. ▣참고:문중자료(정광섭) ?집필:이원걸
정창렬(鄭昌烈):1834(순조 34, 갑오)∼1909(융희 3, 기유). 자는 문서(文瑞). 통정대부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이원걸
정지백(鄭之栢):1838(헌종 4, 무술)∼1906(광무 10, 병오). 자는 성덕(聖德). 통정대부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이원걸
정주완(鄭柱完):1840(현종 6, 경자)∼?. 자는 진숙(進叔). 도사와 선략장군행충무위부사용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경호) ?집필:이원걸
정하규(鄭厦逵):1841(헌종 7, 신축)∼1926. 자는 비언(庇彦). 지승(之昇)의 아들. 통덕랑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래운(鄭來運):1843(헌종 9, 계묘)∼1892(고종 29, 임진). 자는 성순(聖循). 중기(重琦)의 아들. 통덕랑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창서(鄭昌瑞):1844(헌종 10, 갑진)∼1914. 자는 이옥(爾玉). 통사랑행의금부도사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이원걸
정려규(鄭驪逵):1853(철종 4, 계축)∼1909(융희 3, 기유). 자는 성도(聖道). 지학(之學)의 아들. 통덕랑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지륜(鄭之倫):1853(철종 4, 계축)∼?. 자는 경립(敬立). 통정대부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승수) ?집필:이원걸
정주문(鄭柱文):1855(철종 6, 을묘)∼1936. 자는 화영(和永). 호는 오계(梧溪).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경호) ?집필:이원걸
정약흠(鄭若欽):1856(철종 7, 병진)∼?. 자는 경처(敬天). 대규(大逵)의 아들. 1876년(고종 13) 사마시 합격. ▣참고:『사마방목』 ?집필:이원걸
정순섭(鄭淳燮):1859(철종 10, 기미)∼?. 자는 명호(明浩). 종사랑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경호) ?집필:이원걸
정호흠(鄭昊欽):1862(철종 13, 임술)∼?. 자는 일청(一淸). 록규(錄逵)의 아들. 참봉 역임. ▣참고:문중자료(정진호) ?집필:이원걸
정민락(鄭玟洛):1866(고종 3, 병인)∼1942. 자는 성군(聖君0. 통정대부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용섭) ?집필:이원걸
정흥섭(鄭興燮):1873(고종 10, 계유)∼?. 자는 명원(明元)인느참봉서판임관. 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경호) ?집필:이원걸
정명규(鄭明逵):1876(고종 13, 병자)∼?. 자는 대현(大賢). 궁내부주사서판임관에 제수됨. ▣참고:문중자료(정경호) ?집필:이원걸
정성흠(鄭成欽):1878(고종 15, 무인)∼1952. 1919년 3월 21일 길안면 천지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 그해 5월 3일 징역 1년형에 벌금 50원형을 언도받고 복역. 추서:대통령 표창(1983년). ▣참고:『독립유공자공훈록』 ?집필:이원걸
정진규(鄭晋逵):1883(고종 20, 계미)∼1955. 자는 인숙(仁淑). 홍능참봉 역임. ▣참고:문중자료(정경호) ?집필:이원걸
정치문(鄭致文):1891(고종 28, 신묘)∼1959. 1919년 3월 17일 예안면 예안 장날 이광호?이동봉 등과 함께 장터에 모인 시위 군중들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됨. 그 해 4월 17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름. 추서:대통령 표창(1986년). ▣참고:『독립유공자공훈록』 ?집필:이원걸
정문흠(鄭汶欽):1893(고종 30, 계사)∼1976. 자는 윤명(允明). 호는 벽초(碧樵). 환규(煥逵)의 아들. 국회의원 3선. 자유당 원내총무 역임. 경북도당위원장 역임. ▣참고:문중자료(정회원) ?집필:이원걸
정유복(鄭有福):1898(광무 2, 무술)∼1973. 1919년 3월 21일 길안면 천지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 그해 4월 28일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복역. 추서:대통령 표창(1993년). ▣참고:『독립유공자공훈록』 ?집필:이원걸
정후원(鄭厚元):1900(광무 4, 경자)∼1984. 자는 덕예(德詣). 호는 춘강(春岡). 광복후 강습소를 개설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함. 오룡초등학교 설립. ▣참고:문중자료(정봉호) ?집필:이원걸
***청주정씨 불천위 선조 9세(설곡 장단)휘 총(摠)호 복제(復霽) 시호 문민공(文愍公) 관직 정당문학조선개국 1등공신 사당~인청시 서구 연희동(경기도 장단 소재 사당은 6.25때소실)제향일 음 2월15일 묘소~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청계리 제향일 음 10월 3일
9세(설곡 장단)휘 탁(擢)호 춘곡(春谷)시호 익경공(翼景公)관직 우의정 조선개국 1등공신 사당~서울 종로구 훈정동(종묘)태종묘정에 배향 제향일 양5월 첫 일요일 묘소~경기도 파주시 원통면 덕은리 제향일 음 10월 첫 일요일
15세(설헌 마암)휘 두(枓)호 죽헌(竹軒) 관직 증 한성우윤 사당~경북 안동시 와룡면 태리(말바우) 제향일 음 3월10일 묘소~경북 안동시 와룡면 서현리 제향일 음 10월 15일
15세(설헌 고평)휘 탁(琢)호 약포(藥圃)시호 정간공(貞簡公)관직 좌의정 임란위성 1등공신및 호성3등공신 사당~정충사 경북 예천군 예천읍 고평리 제향일 양 4월 18일 묘소~경북 예천군 호명면 본리 뒷산 제향일 음 10월 8일 서원~도정서원 경북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제향일 음 8월 21일
15세(설곡 장단)휘 곤수(崑壽)호 백곡(栢谷)시호 충익공(忠翼公)관직 좌찬성(임란호성 1등공신) 사당~인천시 연희동 제향일 음 11월 14일 장단사당은 6.25때 소실 숭충사~충남 천안시 성환읍 매주1리 제향일 양 4월끝 일요일 묘소~경기도 파주시진동면 하포리 제향일 음 10월 3일 다음일요일
15세(설곡 지촌)휘 구(逑)호 한강(寒岡)시호 문목공(文穆公)관직 대사헌 증 영의정 사당~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제향일 음 1월 5일 서원~회연서원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제향일 음 2월 8월 중정일 묘소~성주군 성주읍 금산리 제향일 음10월 첫일요일
16세(설헌 마암)휘 사성(士誠)호 지헌(芝軒)관직 양구현감 사당~충의단 대구시 동구 효목동 망우공원(임란호국 영남 충의단 보존회)제향일 양 4월 15일 운산정~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구름재) 제향일 양 3월 15일 묘소~안동시 와룡면 서현리 추원재옆 제향일 음10월 15일
16세(설헌 광평)휘 사신(士信)호 매창(梅昌)관직 판결사 증 예조참판 사당~경북 문경시 농암면 화산리 제향일 음 1월 25일 운산정~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구름재)제향일 양 3월 15일 묘소~경북 의성군 금성면 만천2동 제향일 음 10월 3일
16세(설헌 삼강)휘 윤목(允穆)호 청풍자(淸風子)관직 통훈대부 행 소촌도 찰방 사당~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제향일 음2월 27일 묘소~예천군 풍양면 청운리 제향일 음 10월 3일
21세(설곡 경산)휘 동범(東範)호 노암(蘆庵)관직 부호군 정려(정충문표창) 사당~대구시 수성구 시지동500(충효재 정려각) 제향일 음 8월 10일 묘소~경북 영천시 북안면 북리 산26 제향일 음 10월 17일
23세(철곡 유촌)휘 시(蓍)호 백우(伯友)시호 충열공(忠烈公)관직 가산군수 증 병조판서 사당~표절사(사액) 평안도 정주 제향일 음 12월 18일 묘소~경북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제향일 음 10월 *일요일
청주정씨 시호고(諡號考)
* 정 추(鄭 樞) 1333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원재(圓齋). 성주 시호: 문간(文簡) * 정 총(鄭 摠)1358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복재(復齋). 성주 시호: 문민(文愍). * 정곤수(鄭崑壽)1538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백곡(栢谷). 성주 지동 시호: 충익(忠翼).危身奉上曰忠. 思慮深遠曰翼 현종 4년 改諡 * 정 구(鄭 逑) 1543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한강(寒岡). 성주 류촌 시호: 문목(文穆). 勤學好問曰文-道德博問曰文(숙종4년 바뀜). 抱德執義曰穆 인조 3년 * 정 탁(鄭 琢) 1526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약포(藥圃). 예천 삼강 시호: 정간(貞簡). 淸白守節曰貞. 一德不懈曰簡 인조 13년 * 정 로(鄭 魯) 1751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창파(蒼坡) 시호는 충경(忠景) 고종 1년 * 정 시(鄭 蓍) 1768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백우(伯友). 시호: 충렬(忠烈) 순조 12년(1812)
* 정추(鄭樞) 1333(충숙왕2)∼1382(우왕 8). 성주 시호: 문간(文簡). 봉호: 청원군(淸原君) 관직: 동래현령. 예문관직제학. 간의대부. 대사성.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권(公權), 호는 원재(圓齋). 조부는 판선공(辦繕公) 정책(鄭?)이고, 아버지는 설곡(雪谷) 정포(鄭?)이다. 정포는 충혜왕 때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지냈으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는 1353년(공민왕 2)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을 지공거(知貢擧)로 한 과거에 급제한 이후 예문검열(藝文檢閱) 및 여러 관직을 거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올랐다. 1366년(공민왕 15)에 인척인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의 죄를 탄핵하다가 도리어 큰 고초를 당하였다. 신돈은 반대파 숙청을 위한 무고의 기회로 삼으려 거짓 자백을 강요했으나 정추는 폭압적 문초에도 굴하지 않았다. 다행히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하고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가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발탁되었다. 이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가 고려 멸망 10년 전인 1382년에 병사하였다. 선생의 학문적 연원은 이제현에 잇닿아 있다. 그는 문생으로서 “어릴 때부터 공경하며 역옹(?翁)을 섬겼다”고 하였는데, 당대의 병폐를 바로잡고 새로운 문풍을 진작시키려 했던 익재의 사상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익재의 영향은 그의 시문에 내용과 성격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는 이곡(李穀)과 돈독한 교유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러한 관계는 선대의 인연을 이은 것으로 정포와 이곡 역시 돈독한 교류가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 신뢰를 바탕으로 수십 년간을 교류하였는데, 시적 교류 역시 왕성하여 그들의 시문집에는 서로 화운한 시편이 상당수에 이른다. 한수(韓修)는 정추와는 동갑이며 인척관계였다. 그는 문재로 이름이 있었고,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한 당대의 명필이었다. 선생은 당시 국권을 전횡하며 사회악을 빚어내던 권문세족 및 부원배(俯元輩)와 대립하던 전형적인 여말 사대부였다. 그에 대하여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는 “항상 권간들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것을 미워하고 분개하여 마음에 불평을 가지고 있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의 치열했던 정치의식은 직언을 서슴지 않다가 정치적 핍박을 받았던 부친이나 좌주 이제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변(變)’에 대한 중시라는 그 자신의 진보적인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물이란 무형에서 생겨나 형(形)에 얽매이게 된다. 형에 얽매인다면 변하기 어렵다. 변하기 어렵게 되면 리(理)에 모자람이 있게 된다. 나는 무형을 주장하여 그 변을 숭상하는 사람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정추가 자신을 ‘무형자(無形子)’로 자호하고, 호에 ‘원(圓)’자를 쓴 이유도 바로 변의 추구에 있다. 고착화된 상태를 부정해야만 변화가 가능하며, 마치 수레바퀴처럼 둥글어야 장애를 돌파하며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를 이치상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실현하고자 할 때,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한 첨예한 대립은 필연적인 것이다.
* 정총(鄭摠)1358(공민왕 7)∼1397(태조 6). 성주 시호: 문민(文愍). 정종 1년. 봉호: 서원군(西原君) 관직: 병조판서, 이조판서, 예문춘추관태학사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만석(曼碩), 호는 복재(復齋). 정당문학(政堂文學) 추(樞: 일명 公權)의 아들이며, 조선개국공신 탁(擢)의 형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9세로 춘추관검열이 되고, 대간·응교·사예를 거쳐 대호군에 이르고, 1389년(공양왕 1) 병조판서에 승진되었으며, 1391년 이조판서를 거쳐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당시 중국에 보낸 표전문(表箋文)은 대부분 그가 지었다. 조선개국 후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고,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1394년(태조 3) 정당문학이 되고, 다시 예문춘추관태학사가 되어 정도전(鄭道傳)과 같이 《고려사》를 편찬하고, 그 서문을 썼다. 1395년 태조 이성계의 고명(誥命) 및 인신(印信)을 줄 것을 청하러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때마침 명나라에 보낸 표전문이 불손하다 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트집잡혀 대리위(大理衛)에 유배도중 죽었다. 글씨를 잘 쓰고 문집으로 《복재유고》가 있다. 태조조의 명신(名臣) 정총(鄭摠) 정총은, 자는 만석(曼碩)이며, 호는 복재(復齋)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고려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태조가 개국할 때의 공신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다. ○ 태조 5년에 명 나라에서 표문(表文)의 내용이 공손하지 못하다고 표문을 지은 사람을 불렀다. 그때 공의 아우 정탁(鄭擢)이 표문을 짓고, 김약항(金若恒)이 전문(?文)을 짓고, 공과 권근이 글을 다듬었다. 공과 약항과 권근이 모두 불려 가서 문책을 받았는데, 권근은 용서되어 돌아오고, 공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대리위(大理衛)로 귀양가서 죽었다. * 정곤수(鄭崑壽) 1538(중종 33)∼1602(선조 35). 성주 지동 시호: 충익(忠翼). 危身奉上曰忠。思慮深遠曰翼。 현종 4년 改諡 봉호: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관직: 강원, 황해감사. 좌찬성 제향처: 성주 충현사. 성주 유계서원(柳溪書院).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규(逵).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경음(慶陰)·조은(朝隱). 곤수는 선조의 하사명이다. - 한강집에 내용은 부친(백부 대호군 승문(承門)께서 꿈에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아버지는 부사맹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부사과 정희수(鄭希壽)의 딸이다. 백부 대호군 승문(承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동생은 한강(寒岡) 구(逑)이다 1565년(명종 20) 예안 도산정사(陶山精舍)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찾아가 《심경 心經》을 전수하였다. 그 이후로도 관계를 지속하여, 1566년에는 한훤당(寒喧堂)김굉필(金宏弼)의 사적·시문과 그에 관한 다른 선비들의 글을 모아 퇴계 이황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며, 이황은 주로 그것들을 바탕으로 《경현록 景賢錄》을 편찬하였다. 1555년 별거초시(別擧初試)를 거쳐 1567년(선조 즉위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72년 성균관의 천거를 받아 의금부도사가 됨으로써 관로에 들어섰다. 그 이후 경력·전생서직장·주부·장례원사평을 역임하였다. 1576년 중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고, 부사과를 거쳐 1577년에 공주목사로 승진하였다가 곧 상주목사로 옮겼다. 1581년 사과·파주목사, 1583년 부호군 겸 오위장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단종의 능인 영월의 노릉(魯陵)에 사묘(祠廟)를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1585년 첨지중추부사·동부승지·우부승지, 1586년 상호군·호조참의·좌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1587년에는 여러해 흉년을 겪은 황해도의 관찰사로 특별히 임명되어 진휼사업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88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서천군(西川君)에 봉하여졌다. 1589년 도총관을 겸하고 판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충훈부 공신등록을 편찬하고 동지돈령부사 겸 오위장·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91년 동지의금부사·대사성·한성부좌윤 등을 거쳐 159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형조참판으로 옮겼으며, 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였다. 대사간이 되어서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청병진주사(請兵陳奏使)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1593년 원병을 얻어온 공로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판돈령부사가 되었다. 이즈음 영위사(迎慰使)·접반사(接伴使)를 맡아 명나라 장수와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같은해 거듭 보국숭록대부에 오르는 상을 받고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595년 도총관·예조판서, 1596년 좌찬성을 역임하고, 1597년 판의금부사·도총관 등을 겸하고 사은 겸 변무진주사(謝恩兼辨誣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선조를 호종한 원훈으로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녹훈되었다. 일찍이 수령을 지낼 때는 학문을 진흥시키고 사풍(士風)을 진작시키는 데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대명외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사후 인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추록되었다. 성주의 유계서원(柳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곡집》 4권 4책이 규장각도서에 전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었는데 현종 4년 충익(忠翼)으로 바뀌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24권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 치제문
옛적 남쪽 왜구가 침략해 왔을 때 / 昔有南寇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월(播越)하였는데 / 翠華西巡 모사가 비늘처럼 일어나고 / 謀士?興 용부는 구름처럼 많았었네 / 勇夫如雲 평양(平壤)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 浿城不守 서로 돌아보며 놀라서 당황했으니 / 相顧錯愕 누가 책략을 내어 / 誰其籌之 어육이 될 뻔한 우리를 구했던가 / 拯我魚肉 경은 당시에 형조 판서였는데 / 卿時?冠 강개한 심정으로 말고삐를 잡았으니 / 慷慨執? 임금은 중국 조정에 귀부(歸附)할 듯하고 / 王如內附 신하는 그림자처럼 따랐네 / 臣則景從 중국에 구원을 청하여 / 控于大邦 황제의 영무(靈武)를 맞이하러 감에 / ?我皇靈 한 대의 수레로 머나먼 만 리 길을 / 單車萬里 별처럼 빨리 달렸다네 / 其馳如星 소매에 주청할 글 한 통을 넣어 / 袖一封奏 구중궁궐에서 부르짖어 / 叫九重闕 조정의 의논이 어긋났으나 / 廷議齟齬 가슴엔 혈성(血誠)이 가득하였네 / 我有腔血 천자가 차탄하며 칭찬하기를 / 天子曰咨 그대 사신을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 嘉汝行人 민복의 병사를 다 징발하고 / 悉賦?? 이에 용감한 장수를 명하였네 / ?命虎臣 종묘사직이 바뀌지 않고 / 鐘?不改 산하가 다시 온전하게 되었으니 / 山河復圓 우리나라가 안정되어 / 奠我宗? 억만년에 이르게 되었네 / 垂萬億年 성조의 공업과 / 聖祖之業 신종황제의 은혜여 / 神皇之恩 경이 한 번 힘쓴 덕분에 / 賴卿一辦 건곤(乾坤)의 자리가 바로 서게 되었네 / 轉乾旋坤 신포서(申包胥)가 진 나라 궁궐에 엎드려 울고 / 包胥哭秦 목숙이 주 나라에 가서 절하였으니 / 穆叔拜周 위엄이 오랑캐 나라를 두렵게 하고 / 威?蠻邦 이름이 천자의 나라에 떨쳐졌네 / 名動帝州 높은 품계에 오르고 / 煌煌華? 일등공신에 녹훈되었으니 / 奕奕?常 중흥의 공이 있는 신하 가운데 / 中興諸臣 경과 더불어 견줄 사람이 없네 / 侯莫與方 수립한 바가 우뚝한 것은 / 卓乎所立 대개 독서의 공이었으니 / 蓋讀書功 멀리 한훤당(寒暄堂)을 사숙하고 / 世淑寒暄 퇴계(退溪)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았네 / 親炙陶翁 충신을 주로 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 曰主忠信 가슴에 깊이 새겼으니 / 三字佩膺 정성이 움직이는 바에 / 誠之所動 하늘인들 어찌 감동하지 않으랴 / 天豈不能 북원에서 재계함은 / 齋衣北苑 천추절이 돌아와서이니 / 節回千秋 풍천의 감개가 더욱 크고 / 風泉增愾 한강은 유유히 흐르도다 / 江漢悠悠 이렇게 의관을 보존한 것이 / ?玆冠裳 그 누구의 공이던가 / 伊誰之力 사신 노릇을 경처럼 한다면 / 使乎如卿 나라에 무슨 근심이 있으리오 / 何憂疆場 찬후의 자손을 녹용하고 / 錄?侯孫 문정공(文貞公)의 집을 돌려주게 하였으며 / 還文貞第 거듭 술을 올려서 / 申以?? 길이 후세를 권면하노라 / 永勸來世 * 정구(鄭逑)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성주 류촌 시호: 문목(文穆). 勤學好問曰文 抱德執義曰穆 인조 3년 勤學好問曰文-道德博問曰文(숙종4년 바뀜). 관직: 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부사·공조참판. 증직: 영의정 제향처: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 관산서원(冠山書院), 안동 도연서원. 칠곡 사양서원. 대구 연경서원. 대구 사양서원. 현풍 도동서원. 함안 도림서원. 언양 반귀서원(반구서원). 창원 회원서원. 성천 학령서원(學翎書院), 통천 경덕사(景德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판서 사중(思中)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일컬었다. 7세 때 《논어》와 《대학》을 배워 대의를 통하였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 겨우 건(乾)·곤(坤)두 괘만 배우고 나머지는 유취하여 8괘와 64괘의 뜻을 쉽게 통하였다 하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비상하였던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그 이듬해 상경하여 과장(科場)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귀향하였고, 그 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구도의 일념으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73년(선조 6)에 김우옹(金宇?)의 추천으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뒤에도 계속하여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그때마다 사임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따라서, 그는 학문하는 자세와 인격수양의 방법은 이황을 닮았고, 천성이 호방하고 원대한 기상은 조식의 모습 그대로였다. 1580년 창녕현감을 시초로 하여 그 이듬해에 사헌부지평, 1582년에 군자감판관에 제수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1584년 동복현감에 이어, 1585년에 교정청의 교정랑이 되어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하였다. 1591년 통천군수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각군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선도하였다. 1594년에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석방하라는 상소를 올린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으며,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향우문도(鄕友門徒)를 모아 교육하였다. 그는 관도에 나왔으나 내직을 사양하고 주로 외직을 맡았다. 이것은 당쟁에 얽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중앙정계보다 외직을 맡아 자신의 덕치주의 이상인 지방학문을 융성시키고 민중을 교화하기 위함이었다. 선생의 학문세계는 우주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경서(經書)·병학·의학·역사·천문·풍수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예학(禮學)은 특출하였다. 선생의 저서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는 정호(程顥)·정이(程?)·장재(張載)·사마광(司馬光)·주희(朱熹)의 예설을 분류한 것으로 예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예를 통하여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생활을 이롭게 한다는 도덕지상주의적인 이론을 펴고 있다. 선생의 성리학 부분의 대표작으로는 《심경발휘 心經發揮》를 들 수 있다. 심경발휘는 선생의 경사상(敬思想)을 토대로 하여 퇴계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역사서로는 고금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치의 득실과 그 요체를 밝힌 《고금충모 古今忠謨》와 《고금치란제요 古今治亂提要》 등 10여권이 있으며, 의서로는 눈병에 관한 처방을 수록한 《의안집방 醫眼集方》과 산아와 육아에 관한 《광사속집 廣嗣續集》이 있다. 그밖에도 수령직을 맡을 때마다 그 고장의 산천·물산·고적·인정·풍속 등을 조사, 수집하여 내용을 정리한 7종의 읍지(邑誌)를 간행하였는데, 현존하는 것은 《함주지 咸州誌》 하나뿐이다. 그밖에 《성현풍 聖賢風》·《태극문변 太極問辨》·《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심의제도 深衣制度》·《무이지 武夷志》·《곡산동암지 谷山洞庵志》·《와룡지 臥龍志》·《역대기년 歷代紀年》·《경현속록 景賢續錄》·《관의 冠儀》·《혼의 婚儀》·《장의 葬儀》·《계의 ?儀》·《갱장록 羹墻錄》 등이 있다. 인조 9권, 3년(1625 을축 / 명 천계(天啓) 5년) 6월 2일(무인) 2번째기사 정구에게 문목이라는 시호를 내리다
정구(鄭逑)에게 문목(文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구는 성주(星州) 사람으로 자호를 한강(寒崗)이라 하였다. 그는 소시부터 학문에 열심이었고 더욱이 예학(禮學)에 정통하여 당세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광해가 혼란한 짓을 하자 누차 소장을 올려 효도를 다할 것을 극력 진언하였고, 다시는 벼슬하지 않다가 집에서 졸하였다. 상(上)이 즉위하여 증직(贈職)과 치제(致祭)를 하였고 이때에 와서 또 시호를 주라고 명하였다.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에 대한 제문 여헌 장현광
아 슬프옵니다 / 嗚呼哀哉 말세에 태어나 / 生乎季世 선생과 같으신 분을 / 而有如先生 어찌 항상 얻을 수 있겠습니까 / 安可常得其?匹 저 중국의 명현과 헤아려 보고 / 揆諸夏賢 고인과 비교해 보더라도 / 等之古人 바른 도를 행하여 길함은 또한 많이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 亦不多讓其履道之貞吉 도가 우주간에 있어 / 夫道之在宇宙間 그 이치는 하나이니 / 其理則一 땅은 내외의 구별이 있고 / 地焉有內外 때는 고금의 차이가 있으나 / 時焉有古今 이치는 내외의 구별이 없고 / 理自是無內外 고금의 차이가 없어 / 無古今 한 판과 같고 / 如一局 하루와 똑같습니다 / 如一日 그러므로 문왕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난 호걸들은 / 故不待文王而興者 어찌 일찍이 지역과 때를 반드시 한정함이 있겠습니까 / 何嘗地與時之有必 비록 그 조예와 성취한 사업은 / 雖其造詣成就之業 혹 모두 지극하고 다 구비하지는 못하였으나 / 或不能皆至且備 또한 함께 호걸 중의 갑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蓋亦同爲豪傑中之甲乙 오직 선생은 일찍이 스스로 이 이치를 보시고 / 唯先生早自有見於此理 성현을 좇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謂聖賢可追而遵 진유의 사업이 / ?知眞儒事業 박학과 독행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 在博學與篤行 종사하여 부지런히 힘쓴 것이 / 所從事而孜孜者 의리를 궁구하고 / 義理之窮 덕행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 踐履之實 선비들은 나아감에 올바른 길을 잃어 / 士趨失正 많이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 多由於應科 선생은 과거 공부를 버리고 뜻이 더욱 전일하였으니 / 遂捐擧業而志益專壹 이는 진실로 기질이 특이하고 빼어나서이나 / 固惟氣質之秀異 또한 어찌 학술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 豈亦無自其學術 우리 나라 명현들의 정학은 / 東賢正學 한훤당에 이르러 독실해졌사온데 / 至寒暄而篤實 선생은 바로 그 외손이시니 / 先生爲其外裔 남은 가르침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 卽餘訓之有? 정론을 두류산에서 받으니 / 承正論於頭流 수립한 것이 마치 기둥이 주춧돌을 얻은 듯하며 / 所以樹立者如柱得 분명한 뜻을 도산에서 얻어 들으니 / 聞的旨於陶山 합하여 깨달음은 향기로운 난초의 방에 들어간 듯하였습니다 / 所以契悟者如入蘭室 돌아와 다시 육경과 사서에 찾으니 / 歸而更求諸六經四子 서로 전하는 심법과 / 相傳之心法 이미 정해진 법도를 / 已定之繩墨 스스로 알고 스스로 다스리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 無非可以自會自律 효도와 공경은 과연 인을 행하는 근본이니 / 孝悌果爲爲仁之本 미루어 백 가지 행실을 하는 것입니다 / 推之爲百行者 이는 진실로 뿌리 깊은 나무가 / 誠若根深之木 자연 가지와 잎이 무성한 것과 같습니다 / 自有枝葉之茂密 충양함이 이미 쌓임에 / 充養旣積 연마함이 더욱 깊어지니 / 磨?旣深 평탄하고 화락한 말씀 / 坦夷樂易之辭氣 화기애애하게 가득 넘쳤습니다 / ??乎其盈溢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온화한 가운데에 엄함과 사납지 않은 위엄을 두려워하여 / 人猶畏溫中之?不猛之威 비록 친애함을 입었으나 감히 친압하고 가까이 하지 못하였습니다 / 雖被親愛而不敢狎? 천 년 동안 끊긴 학문이 / 千載絶學 정주에 이르러 다시 밝아졌사온데 / 至程朱而復明 그 학설을 독실히 믿으시어 / 篤信其說 신명에게 질정하듯이 하였습니다 / 擬神明之可質 선생은 더욱 예학에 유념하여 / 尤留意於禮學 삼천 가지와 삼백 가지의 근본과 뜻을 모두 다하였습니다 / 三千三百本末之俱悉 우리 동방의 선유들은 / 我東儒先 비록 일찍이 예를 강론하지 않은 것이 아니오나 / 雖未嘗不講於禮 대개 회암의 가례를 근거하여 대략 스스로 따름에 불과하였사온데 / ?不過乎據晦庵家禮而略自循率 선생은 경전과 자집을 널리 상고하고 / 而先生博考于經傳子集 또 반드시 주소를 참고하여 뽑아 냈습니다 / 又必參商註疏而括出 다섯 가지 예를 종합하여 집안과 고을과 나라에 행하는 것이 / 五禮之錯綜乎家鄕邦國者 진실로 굵은 줄이 올려짐에 그물눈이 펼쳐지듯 하여 / 固如綱擧而目張 찬란한 하늘의 질서 아님이 없었습니다 / 無不燦然其天秩 근래에 선비들이 관혼상제에 의장과 도수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 / 邇來士子之得知夫冠婚喪祭之不可無儀章度數 예문(禮文)을 서로 강하며 / 持文相講 일에 임하여 서로 질문하는 것은 / 臨事相質者 이 모두 선생의 창솔 때문이었습니다 / 莫非先生之唱帥 때로는 임천에 거닐고 / ??林泉 한가로이 노닐며 술 마시고 시 읊조리되 / 逍遙觴詠 바람 불고 꽃 피며 눈 내리고 달 밝은 때였으니 / 每在於風花雪月之辰 이는 실로 모두 덕을 기르는 자리요 고상한 지취(志趣)에 맞게 한 것으로 / 實無非養德之地雅趣之適 답답하고 막힘을 펴신 것입니다 / 而有以宣暢其?窒 벗과 문도들을 불러모아 / 召集朋徒 서적을 상고하고 교정하기를 / 攷校書籍 질병으로 신음하는 즈음에도 쉬지 않으셨으니 / 不輟於疾病沈呻之際 또한 이는 범위의 가운데에 훈도시켜 / 亦所以薰陶於範圍之中 하여금 마음과 생각을 개발하고 / 使之開發其心思 방탕한 데로 흐름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防閑其流? 진서산의 심경 한 책은 / 眞西山心經一部 실로 이 학문의 냇물을 막는 돌기둥과 남쪽을 가르쳐 주는 수레가 되옵는데 / 實爲此學防川之柱指南之車 보주가 미진함을 흠으로 여겨 / 而欠其補註之未盡 마침내 선유들의 한 마디 말씀과 짧은 글귀를 거두어 취하되 / 則遂爲之收取先儒之片言隻句 삼십칠 장의 뜻을 발휘하는 것이 있으면 / 有以發揮乎三十七章之義者 하나도 누락하거나 빠뜨림이 없었습니다 / 無所漏逸 송조(宋朝)의 다섯 선생의 예를 논한 말씀은 / 五先生禮之說 성인이 예를 제작한 본의를 미루어 밝혀 우익이 되옵는데 / 得以推明羽翼乎聖人制作之本義者 여러 책에 흩어져 나와 산만함을 염려해서 / 患其散漫於各書 이에 유로 모으고 편을 배열해서 / 則於是乎類輯篇排 한 질의 가운데에 모았습니다 / 會聚於一帙之中 그리하여 절문과 의칙이 / 而節文儀則 나열되어 모두 구비하였으니 / 森列畢備 이 어찌 보통의 저술이겠습니까 / 是豈尋常之著述 이는 바로 선생의 참다운 사업이니 / 此正先生之眞事業 비록 이 세상에 펴서 시행하지 못했으나 / 雖不得展布於斯世 어찌 피차의 득실을 한탄할 것이 있겠습니까 / 何歎夫此得彼失 일곱 고을을 맡은 작은 공적과 / 至於歷典七邑之小績 이품에 이른 부운 같은 영화로 말하면 / 爵至二品之浮榮 스스로 선생의 여사로서 밖에서 이른 것이니 / 自是先生之餘事外至 어찌 큰 사업의 시작과 마침에 경중과 유무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 何足爲輕重有無於大業之始卒 군주에게 요순 같은 성군이 되기를 바라 / 若夫望君堯舜 일에 따라 정성을 다한 뜻이 / 隨事盡誠之志 확고하여 도끼 따위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 確確乎有所不畏於斧? 널리 사랑하고 두루 포용하여 / 唯其汎愛包容 사람마다 후하게 대하지 않음이 없는 덕은 / 無接不厚之德 정성스러워 보통 정으로는 미처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 梱梱乎常情之所不及恤 돌아보건대 이 어리석고 용렬한 몸은 / 顧惟愚庸 일찍이 딸을 부탁하는 의리를 받자와 / 早承贅托之義 실로 친자식과 조카처럼 똑같이 여기셨습니다 / 視實幷於子姪 질병으로 쓰러져 누워 / 疾患頹靡 비록 함장에게 경전을 잡고 배우지는 못했사오나 / 縱不得執經於函丈 적셔 주고 보태 주신 은혜를 / 涵濡滋益之恩 어찌 말과 섬 양과 근으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 何可量以斛斤鎰 아 슬프옵니다 / 嗚呼哀哉 매양 절하고 뵈올 때면 / 每於拜接之時 반드시 부지암재의 조용하고 편안함을 언급하시며 / 語必及於不知巖齋之靜謐 말씀하기를 내 병이 다소 편안해지고 / 而曰吾待得此?少安 시절이 다소 평화로워지며 / 詩節稍平 봄에 흐르는 물이 다소 불어나거나 / 方春流微漲 혹 가을에 물결이 깨끗해지거든 / 或秋波澄? 외객들을 번거롭게 동원하지 않고 / 卽不煩外客 이 사이의 관동 육칠 명을 데리고 / ?此間冠童六七 조그마한 배를 금호강(琴湖江)에서 출발시켜 / 發片舟於琴灘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밧줄을 이끌고 / ?洛江而引? 부지암 언덕에 배를 매어 놓은 다음 / 止繫於不知巖畔 빈 집에 앉아 증점의 비파를 울리겠다 하였으며 / 坐虛堂而鳴點瑟 마침내는 반드시 이 소회를 과연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시고 / 終必曰此懷之其果得以遂之耶 혹은 서찰에 간곡히 써서 보이셨는데 / 或示丁寧於札筆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 今焉已矣 영구히 무궁한 한 가지 한이 되오니 / 永爲無窮之一恨 어찌 조물주에게 이것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 誰從造物者而致詰 장례를 모시는 좋은 때에 임하여 / 迫卽遠之靈辰 맑은 술과 향기로운 음식 올리오며 / 奠爵淸與?? 밝은 영령께서 굽어 흠향하시기 바라옵니다 / 冀昭明之垂歆 말은 다하오나 정은 다함이 없사오니 / 情莫盡而言畢 아 슬프옵니다 / 嗚呼哀哉
* 정탁(鄭琢) 1526(중종 21)∼1605(선조38). 예천 삼강 시호: 정간(貞簡). 淸白守節曰貞. 一德不懈曰簡。인조 13년 봉호: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관직: 예조·형조·이조 판서.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 영중추부사. 제향처: 예천(단성) 도정서원(道正書院).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현감 원로(元老)의 증손으로, 이충(以忠)의 둘째 아들이며,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문인이다.- (퇴계와 남명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 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중에 공을 세우게 하였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하였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일시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오르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약포집》·《용만문견록 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 정로(鄭魯)1751년(영조 27)∼1811년(순조 11). 시호: 충경(忠景) 고종 1년 관직: 증 이조판서 제향처: 가산 충렬사(忠烈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공면(公勉), 호는 창파(蒼坡). 한강(寒岡)구(逑)의 후손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는데, 1811년(순조 11)에 무반(武班)출신인 그의 아들 시(蓍)가 가산군수에 임명되자 그의 조카 질(?)과 함께 따라가 있었다. 이때 홍경래·김사용(金士用)·우군칙(禹君則) 등 평안도 지방의 유랑지식인층이 중심이 되어 가산 다복동(多福洞)을 근거로 반란을 기도하여, 같은해 12월 18일에 남·북진(南北陣)의 두 갈래로 군대를 나누어 평안도 각 지역을 공격하였다. 홍경래가 이끈 남진군은 이날 밤 3경에 곧장 가산군 군아(郡衙)를 습격하였다. 난군의 침입이 있자 아들 시가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그는 “국록을 받는 사람이든 받지 않는 사람이든 마땅히 반란군에 대항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아문(衙門)에 돌입하여오는 적을 군졸로 하여금 막게 하였다. 적에 의하여 군아가 함락되자 난군에 합세하기를 거부하다가 아들과 함께 난군의 선봉장인 홍총각(洪總角)에게 피살되었다. 이때의 순절로 난이 평정된 뒤 집의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에 가증(加贈)되었다. 가산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순조실록,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6월 10일(신해) 1번째기사 김재찬이 정시 등의 포상에 대하여 아뢰다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증 판서(贈判書) 정시(鄭蓍)는 바로 선정신(先正臣) 정구(鄭逑)의 후손입니다. 선정신이 명륜 정의(明倫正義)의 학문을 후손에게 남겨 주었으며 정시가 임금을 섬기는 데 본분을 다하는 충성심을 가정에서 얻게 되어 이번에 부자(父子)가 함께 성취함이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그 유래한 바를 논하자면 바로 선정신의 공로인 것입니다. 청컨대 선정신의 사판(祠版)에 특별히 은유(恩侑)를 내려 성상이 크게 감동하였다는 뜻을 보이소서. 정시의 아버지 증집의(贈執義) 정노(鄭魯)가 정시와 동시에 의리를 좇아 몸을 바쳤는데, 정시가 붙잡혀 협박 당하고 있을 때 정로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네 부모 생각은 하지 말고 반드시 옳게 죽어야 된다.’ 하였고, 적이 또 정로를 붙잡아 칼을 몸에 들이대자 계속 꾸짖다가 죽었으니, 그 높은 의리와 뛰어난 절조는 옛날에도 또한 드물었습니다. 청컨대 정로에게 아경(亞卿)을 더 추증하소서. 듣건대 정시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그의 종제(從弟) 정숙(鄭塾)에게 정주석(鄭胄錫)이란 아들이 있다고 하니, 청컨대 특별히 양자를 세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시(鄭蓍)1768년(영조 44)∼1811년(순조 11). 시호: 충렬(忠烈) 순조 12년(1812) 1월 22일 시장 없이 시호를 내렸다 관직: 가산군수. 증직: 병조판서 제향처: 정주(定州) 육의사(六義士) 사당 (表節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원(德園), 호는 백우(伯友). 처사(處士) 노(魯)의 아들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8대손이다. 1768년(영조 44년), 수륜면 수성동 갓말에서 태어나 1811년(순조 11년) 가산군수로 홍경래의 난(洪景來亂)에 순국(殉國)했다. 1799년(정조 24년), 무과에 급제하고 그 후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훈련원 주부(主簿), 도총부경력(都 府經歷) 등을 역임하고 1811년(순조 11년) 가산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해 겨울에 홍경래가 광부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니, 가산이 온통 적의 소굴이 되었다. 비단 그의 도당들 뿐 아니라 관청의 군교사령(軍校使令)들까지도 적에 가담한 자가 많았다. 홍경래의 도당은 밤에 관청으로 몰려 와서 군수가 잠자는 방으로 들어와 칼을 들이대며 관인(官印)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선생은 무릎에 칼을 맞고도 관인을 오른손에 쥐고 완강히 거절하니, 적은 칼로 그의 오른팔을 쳤다. 팔이 떨어지자 선생은 왼손으로 관인을 집어서 "내 머리는 너희들에게 줄지언정 관인은 줄 수 없다." 하고, 다시 거절하니 적은 칼을 휘둘러 난도질을 하여 죽게 하였다. 이 날은 그해 12월 18일이었다. 이때는 선생의 아버지도 함께 관청 안에 있었는데 적이 선생을 죽인 후에 그의 아버지도 끌어내어 항복을 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그의 아버지는 끝내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선생은 그의 인품이 청렴결백한 사람으로서 관직에 있을 때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여 왔다. 한번은 휴가를 얻어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그의 부인은 나들이 옷이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사내 대장부인 당신이 비록 가난하기로서니 안사람의 몸을 가릴 변변한 옷 한벌을 장만하지 못한다고 해서야 말이 되겠소?" 부인의 말을 들은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부인의 말이 옳소, 그러나 내 여러 제수(弟嫂)들도 모두 옷이 없으니, 어찌 오직 내 아내의 옷만을 장만하리오." 하니,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다시 내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산에는 연홍(蓮紅)이란 기생이 있었다. 연홍은 적들이 관청을 습격하는 밤에 선생의 아우 질이 칼에 상처를 입은 것을 자기 집으로 부축해 가서 숨겨 두고 간호를 하여 살아나게 하니, 사람들은 연홍을 의기(義妓)라고 일컬었다. 또 선생은 말을 잘 탔다. 관청에는 그가 특히 좋아하던 말이 한 필 있었는데, 적들은 그 말을 끌러 가지고 가서 홍경래의 부하 장수에게 바쳤다. 부하 장수는 이 말을 타고 관군을 대항해 싸우는데 한창 싸우는 도중에 말은 소리를 높여 울면서 위에 탄 적장의 머리를 베이게 되었으니 이 또한 의마(義馬)라고 하였다. 선생이 순직한 지 28일만에 안주에서 염을 하였는데, 얼굴이 살았을 때와 같았으며, 고향인 성주로 운구하게 되자 관(棺)이 지나가자 연도(沿道)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을 영송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자를 공면(公勉), 호를 창파(蒼坡)라고 하였다. 독서하기를 좋아했으며 젊은 시절에 진주로 유람을 갔다가 의기 논개(義妓論介)의 사당에 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동행한 친구들이 깜짝놀라며 "양반이 한갓 기생의 사당에 절을 하느냐?" 하고 , 책망하니 그의 그 친구에게 정색하고 말하였다. "나는 기생에게 절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충절에게 절을 한 것이네." 관청에 홍경래 도당이 습격해 오던 밤에 두 아들이 순직을 각오하고 그 뜻을 아버지에게 알리니 그는 얼굴에 위엄을 갖추고 두 아들에게 "나라에 난이 일어났을 때에 나라를 위해서 죽는 것은 백성의 본분이다. 너희는 이 늙은 아비를 염려하지 말고 오직 본분을 위해서 심신을 다 바쳐라." 하고 말하였다. 선생의 아우인 질은 적들이 칼을 달고 달려들자 아버지 대신 나를 죽여라하고 몸으로 막다가 여덟 군데나 상처를 입었는데, 이 때에 기생 연홍(蓮紅)이 통인(通引) 한 사람과 더불어 방에 들어가 보니, 선생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아우인 질, 3부자는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졌는데 오로지 질만이 아직 맥박이 뛰고 있으므로 그를 업고 집에 와 간호하여 소생시켰다. 그 후 조정에서는 그를 참봉으로 임명하였으나 상처가 다 낫지 않아 얼마 안가서 죽으니, 사람들은 '팔창참봉(八創參奉)' 이라고 하였다. 팔창은 칼에 맞은 상처가 여덟 군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순조임금은 이들 부자가 순직했다는 보고를 받자, 매우 애석히 여겨 관(棺)을 하사하고 아버지 정노(鄭魯) 선생에게는 집의 (執義) 벼슬을 증직하였다가 뒤에 이조참판을 증직, 1859년(철종 10년)에 다시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충경(忠景)이라 시호하였다. 아들 정시(鄭蓍) 선생에게는 병조참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증직하였다가 뒤에 다시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충렬(忠烈)이라 시호하였으며, 정주성 남쪽에 그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청주정씨 자료) 1799년(정조 23)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훈련원주부·도총부경력 등을 역임하였으며, 1811년 가산군수로 임명되었다. 이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는데, 홍경래가 통솔하는 남진군은 선봉장 홍총각(洪總角)을 필두로 그날로 가산에 진격, 군리(郡吏)들의 내응으로 쉽게 읍내를 점령하였다. 당시 평안감사 이만수(李晩秀)의 장계에 의하면, “그날 난리가 일어난다고 민심이 흉흉하고 군내가 떠들썩하며 백성들이 피난가려 하자, 그는 홀로 말을 타고 군내를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을 효유하여 피난가는 것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봉기군 50여명이 관아에 돌입하여, 살고 싶으면 인부(印符)와 보화를 내놓고 항복문서를 쓰라고 하자, 그는 ‘내 명이 다하기 전에는 항복할 수 없다. 속히 나를 죽여라.’ 하고, 그들의 대역무도함을 꾸짖다가 칼에 맞아 죽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그대로 적의 칼을 받았다.”고 하였다. 봉기군은 각 지방 관속들의 내응으로 며칠 만에 7개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당시 관군은 제대로 응전조차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패퇴하였다. 정부에서는 상황판단조차 올바로 할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들 지역의 군수들은 봉기군에게 치욕적으로 항복하였다. 먼저 곽산군수 이영식(李永植)은 벽장 속에 숨었는데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가 야반도주하였고, 정주목사 이근주(李近胄)는 향교로 피신하였으나 적과 내통한 좌수·집사 등이 목사의 인부를 빼앗고 안주병영으로 쫓아보냈으며, 박천군수 임성고(任聖皐)는 처자와 노모까지 버려둔 채 서운사로 숨었다가 노모의 구금소식을 듣고 봉기군에 항복하였다. 더구나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의 경우, 수하군졸을 데리고 검산산성(劍山山城)에 숨어 있다가 김사용(金士用)이 격서를 보내어 위협하자 항서를 쓰고 새끼로 목을 매고 와서 항복하여 옥에 갇혔다. 그뒤 김사용이 김익순의 족쇄를 풀게 하고 전(錢) 30냥, 백미 30석, 민어 10마리, 조기 10속(束)을 보내고 “이젠 서울에 가도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우니 같이 일하자.”고 하자 봉기군에 합류하였다. 이렇듯 지방수령들의 수치스런 항복 속에서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값지고 떳떳하였던 것이다. 순조는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는 뜻에서 병조참판·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을 추증하고, 관(棺)을 하사하였다. 관찰사의 진상보고를 다시 접한 순조는 그 충렬을 찬탄하고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을 가증(加贈)하였다. 그리고 살아남은 동생과 수청기생에게도 관직과 상품을 내렸다. 1813년 왕명으로 정주성 남쪽에 사당을 세워 당시 싸우다 죽은 6인과 함께 제사를 지내도록 하니, 이를 7의사(七義士)라 한다. 정주사람들은 또 오봉산(五峰山)밑에 사당을 세워 7의사를 모셨는데, 왕은 ‘表節’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왕조 실록 순조 12년(1812 임신 / 청 가경(嘉慶) 17년) 1월 10일(갑신) 1번째기사 평안 감사가 고 군수 정시의 충성을 보고하여 이를 포상하다
평안 감사가 아뢰기를,
“고(故) 군수 정시(鄭蓍)를 증직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게 하는 의절(儀節)은 실로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해당 군이 적의 소굴에 떨어져 있음으로 인해 용기를 세운 사실을 미처 즉시 상세히 보고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종영(趙鐘永)이 사람을 보내어 전말을 상세히 탐지하게 했더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난달 18일 저녁 흉적(凶賊)에 관한 소란스런 말들이 해당 군에서 크게 떠돌아 군 아래 사는 백성들이 일시에 놀라 흩어지므로, 해당 군수가 말을 타고 혼자 나가서 직접 방리(坊里)를 돌아다니며 효유(曉諭)했더니, 혹은 떠나가기도 하고 혹은 머무르기도 하였습니다. 돌아와 정각(政閣)에 앉아 각반(各班) 관속(官屬)들을 불렀더니, 나졸(羅卒) 등이 각기 깃발과 북·징 등의 물건을 가지고 일제히 달려나갔고, 그 다음으로는 관노(官奴)들이 죄다 나갔으며, 그 다음으로는 아전(衙前)이 또한 가버렸습니다. 일이 바야흐로 창졸간에 일어났는지라 어쩔 줄을 알지 못하고 있노라니, 유리(由吏) 김정척(金正倜)이 비로소 들어와 고하기를, ‘적보(賊報)가 이와 같으니, 소인은 지금 마땅히 파발마를 타고 탐지해 오겠습니다.’ 하고는 즉시 나가더니, 얼마 안 있어 돌아와 말하기를, ‘적당이 다복동(多福洞)에 모여 있는데, 그 세력이 심히 성대합니다. 먼저 인부(印符)를 보내고 이어 항서(降書)를 던져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현명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군수가 이 말을 듣고 발분(發憤)하여 크게 꾸짖기를, ‘나는 차라리 적의 손에 죽겠다. 네가 어찌 감히 이런 대역(大逆)의 말을 지껄이는가?’ 하고, 즉시 쫓아내게 하였습니다. 그때가 밤 2,3경 사이였는데, 관문(官門) 안과 정각(政閣) 위에 촛불을 대하고 앉아 있는 사람이라곤 오로지 군수와 그의 늙은 아비와 그의 아우 한 사람, 그 외삼촌(外三寸) 한 사람, 수청기(隨廳妓) 연홍(蓮紅) 한 사람이었습니다. 군수가 수청기를 물리쳐 보내고 그 외삼촌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으면 마땅히 시신을 거두어 먼저 즉시 피신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어 그 아비, 아우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여 순영(巡營)에 급히 보고할 것을 함께 의논했는데, 군에 한 사람의 아전도 없고 문첩(文牒)을 작성할 겨를도 없는지라 서찰로 병영(兵營)에 보고하고자 바야흐로 종이를 잘라 쓸 즈음에 적병 4,50명이 큰 소리로 떠들며 관문(官門)으로 일제히 돌입하였습니다. 창검을 손에 쥐고 난간에 올라 에워싸며 들어와 상투를 잡고 크게 소리치며 협박하기를, ‘네가 만약 살고자 한다면 부인(符印)과 각 창고의 열쇠를 속히 가져다 바치고, 투항하는 문자 또한 써서 올려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군수가 목소리를 돋구어 꾸짖기를, ‘네 놈은 효경(梟?)2971) 의 종자로 하늘을 거슬러 날뛰니, 참으로 극적(劇賊)이로구나. 내 목숨이 다하기 전에는 반드시 그럴 리가 없으니, 속히 나를 죽여 네 뜻을 시원히 풀어라.’라고 하였습니다. 적이 또 관정(官庭)으로 잡아 끌고가서 몇 차례 위협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으니, 적이 이에 칼을 뽑아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그 아비를 끌고나가 계속 손을 대려 하매, 군수의 동생이 자신의 몸으로 안고 엎어지니, 적들이 어지러이 칼날을 휘둘러 부자가 칼에 찔렸는데, 아비는 먼저 목숨이 떨어졌고 아들은 혼절하니, 모두 끌고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적들은 유영장(留營將)을 차출하여, 군의 일을 주관하게 한 뒤 즉시 그 군사를 이끌고 도로 다복동으로 들어갔습니다. 고 군수의 외삼촌은 칼날을 피해 살 수 있었는지라, 아노(衙奴)와 더불어 먼저 군수의 동생을 구해 연홍의 집에 숨겨두고는 2구(具)의 얇은 판자를 구해 겨우 때묻은 옷 한 벌로 시신을 염습(殮襲)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6일에야 비로소 관문 밖 5리에 빈소를 마련했고, 군수의 동생은 겨우 실낱같은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습니다. 29일이 되어 관군이 대승을 거두어 적의 무리가 패하여 흩어지자, 가산(嘉山)의 잔당들이 그제야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관군이 해군(該郡)에 들어가서 잔당을 모조리 수색하였는데, 군수의 동생과 외삼촌이 결박당한 채 진으로 나와 스스로 적이 아니라고 말하여, 이에 그가 죽은 수령의 친속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영(本營)의 우후(虞候)가 불러 보고 위로하고는 쌀과 돈을 주어 지금까지 그것에 의지해 연명해 살고 있다 합니다. 증 참판 정시가 용기를 세운 시말에 대해 이제야 비로소 듣지 못했던 바를 더욱 잘 듣게 되었는데, 드높은 충성과 높은 절개는 옛 충신 송상현(宋象賢)에게 견주어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이처럼 도망가는 수령이 이어지고 음려(陰?)2972) 가 채 소탕되지 아니한 날에 이 한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신하의 절조를 권려하고 적의 간담을 부술 수 있었으니, 삼가 특별히 내린 은전에 의거하여 신의 영(營)에서 마련해 보내는 빈렴(殯殮)에 소용되는 물자와 반장(返葬) 때 호행(護行)하는 절차에 대해 연로(沿路)의 각 고을에 각별히 신칙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일전에 풍성(風聲)을 수립했다는 뜻으로 비록 포증(褒贈)한 일이 있었다만, 그래도 그가 용기를 세운 사실을 알 수가 없어 매일 언제나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제 평안 감사의 장사(狀辭)를 보니 늠연(?然)한 충의가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여 더욱 측은하고 마음 아프다. 아!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2973) 과 무엇이 다르랴? 조용히 그 의를 생각해 보건대, 국조(國朝)의 송상현과 무엇이 다르랴? 더욱이 부자 형제 일문(一門)이 화를 당한 것이 변씨(卞氏)의 두 세대에 부끄럽지 않으니, 어찌 그리도 충렬(忠烈)을 다 바쳤던가? 증 참판 정시에게 병조 판서를 더 추증하고, 그 아비는 이름을 물어 또한 관직을 추증하도록 하되, 모두 작설(綽楔)2974) 의 은전을 베풀라. 그 아우는 칼에 찔리고도 죽지 않았다 하니, 천리가 밝고 밝음을 볼 수 있다. 특별히 복(服)이 끝나기를 기다려 즉시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그리고 관이 돌아와 서울을 지나는 날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는 일을 분부하라. 기생 연홍의 일은 이처럼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나졸(羅卒)과 아속(衙屬)들이 모두 도망했음에도 시종 일관 피하지 않았고, 그 죽은 수령의 동생에 대해서도 그 집에 숨겨 주어 살 수 있게 하였으니, 미천한 부류이지만 뛰어난 행실을 숭상할 만하다. 후하게 상을 주는 일을 일체로 분부하라 하였다. ***자료수집에 어려웅 점도 있었고 미비한 점도 많으나 조상에 대하여 좀더 알고저 하는 후손들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전함
2012년 월 일
26세 주웅(柱雄) 삼가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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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송집 원문보기 글쓴이: 일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