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향(貫鄕)경주는 문충공 익재선생(휘 제현)의 후손들이 많이 세거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경주 인근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크고 작은 문중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이들 문중은 대부분 그선대의 뿌리는 경주의 서동 ,소정,양월문중이 주류이다.
이 세 문중을 있게 한 분이 익재선생의 장자(휘 서종)의 삼자인 대사성(휘 원익)공의 손(孫)인 판윤공(휘 지대)이시다.
판윤공께서는 고려말에 태어나셔 약관의 나이에 무과에 올라 조선 태조때 경상도 수군만호로써 왜선을 나포하는 등 나라에 혁혁한 공로가 있었다.
이 후 공께서는 누진하여 내직인 한성부 판윤(檢校)에 제수(除授)되셨다.
그 즈음 왕가의 권력다툼에 환멸을 느끼게 되셨고 특히 공의 고조부가 되시는 익재선생의 문묘 배향문제로 성균관 생원 김일자,사성 김반 및 집현전 학사들의 끊임 없는 주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유불기의 불윤됨을 보고는 후손으로써 큰 불효로 선향인 경주부 남중리(현 울주군 구량리)로 은거하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음이 사료에서 볼수있는 바이다.
지금의 울주군 구량리에 공께서 집 연못가에 심은 은행나무가 천연기념품로 지정되어 있음이 그것이요 또한 그 곳에 공의 행적을 기리는 유허비에서 낙남하신 기록과 흔적이 자세히 남아 있다.
공께서는 생을 마칠 때까지 자손들에께 출사를 크게 원치 않으셨다.
아드님으로 휘 점,휘 묵,휘 연을 두시었고 장자 부사공(휘 점 중조22세)께서는 휘 석림,휘 원림,휘 형림 그리고 곡산한씨,여강이씨로 출가한 두따님을 두셨다.
장자 참군공(휘석림)후손은 서동,군수공(휘 원림)후손은 소정,선략장군(휘 형림)후손은 양월에서 임진왜란 이전부터 각기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선략장군(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