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피면 출신의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 선생의 열정과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식이 지난 1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열렸다.
이날 추모식에는 김홍빈 춘고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한 김학무 남부보훈지청 과장, 이중환 군산향우회 사무처장, 임피중 정병서 교장과 재힉생 전원 등 80여명이 참석해 애국지사이며 임피중 제2대 교장으로 10여년간 후세들의 교육에 전념했던 이인식 선생님의 높은 뜻을 기리며 엄숙하게 거행됐다.
또 추모식을 마친 뒤 2011년도 정기총회를 가졌으며, 임피중 재학생 전원과 대 선배들 간의 만남으로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됐다.
김홍빈 기념사업회장은 “우리고장의 자긍심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인식 선생의 강인함과 교육자로서 인자함에 한 없이 고개가 숙여진다”며 “오늘 추모식에 참여해준 많은 동문들의 관심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춘고기념사업회는 이인식 선생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기념사업 등을 적극 추진하기 위해 임피중학교 동문을 중심으로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많은 이들이 전국에서 회원으로 가입해 동문 중심을 벗어난 추모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춘고(春皐) 이인식(李仁植)선생
그는 1901년 10월 22일 임피면 읍내리에서 당시 거부 이태하 씨의 3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나 임피초 1회 졸업 후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16년 16세 때 조득 여사와 결혼한 후 항일독립운동이 열린 1919년 3월 1일 보성고보 대표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했고, 시위 군중을 미국공관 쪽으로 유도하는 선봉에서 활약했다. 3월 5일 밤 송현동 자택에서 학생대표들이 모여 협의 중 들이닥친 일본경찰에게 체포(총 43명)됐으며, 10개월의 징역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감한 그는 25만여평의 가산을 정리해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거금 8000원을 헌납했다. 또 독립쟁취를 위해 먼저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일본에서도 그의 활동은 계속돼 재일본 학생 항일결사의 일원으로 항일운동을 도모했다.
이같은 활동은 그러나 1925년 일경에게 발각돼 조직이 일망타진의 위기에 다다르자 일부 동지들과 중국으로 밀항 망명생활을 했다. 주로 동 만주 지역에서 활약하며 임정요인과 연락, 정보수집과 국내에 잠입해 자금조달 등의 역할을 맡았다.
또 만주 망명지에서 목단강 고려중 교장으로 독립투사 자녀들을 가르치던 그는 조국 해방을 맞아 귀국했다.
숱한 정치계의 손짓도 있었지만 문맹률 90%의 당시 암울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교육계에 투신했다. 새 조국의 문맹퇴치 운동에 첨병으로 나선 것이다.
당시 임피, 서수, 나포, 성산 등 4개면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이에 뜻을 가진 조영완 심복동 양일동(당시 국회의원) 등, 임피 서수 지역 주민들이 전답 등으로 출자해 1949년 11월 11일 일인이 경영하던 이엽사 농장자리에 중학원이란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다.
하지만 시골 사립학교의 경영이 한계에 달했고 주민들의 탄원에 따라 1952년 1월 18일 ‘임피중학교’라는 교명으로 정식 공립중학교 인가를 받았다.
6.25전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학생이 없는 임피중이 폐교 위기에 놓였던 1953년 11월 15일 그는 임피중 교장으로 부임해 우선 학생 모집에 나섰고, 훌륭한 제자 배출에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