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랫동안 성씨를 사용해 온 민족이다. 뿌리가 없는 민족이라면 길가에 버려진 잡풀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 보학(譜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인간산맥(人間山脈)의 큰 뿌리가 확실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누구의 자손이며, 누구의 혈통인가? 이곳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각 성씨의 원조(原組)의 뿌리를 정확하게 캐낸 인맥(人脈)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이 자료를 통하여 나의 뿌리에 대하여 조금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제가 이 곳을 다녀가시는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부모(父母)와 조부모(祖父母)의 이름 정도는 한자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입니다.
昔(석)氏
김포정(金浦鄭)씨
丁(정)氏
程(정)氏
諸(제)氏
趙(조)氏
曺(조)氏
鍾(종)氏
宗(종)氏
朱(주)氏
左(좌)氏
周(주)氏
俊(준)氏
池(지)氏
智(지)氏
陳(진)氏
秦(진)氏
晋(진)氏
眞(진)氏
千(천)氏
天(천)氏
楚(초)氏
崔(최)氏
이 성씨는 절강(浙江)과 용강(龍岡)이 대본이다.
시조 팽우덕(彭友德)은 원래 중국 절강 사람으로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군의 중군 부총병서로서 동원장사로 뽑힌 아들 신고(信古) 장군과 함께 우리 나라에 와서 많은 전공을 세우고 귀국했다.
그 후 명나라가 망하자 신고의 아들 팽부산(彭富山)이 우리 나라로 건너와서 귀화, 맨 먼저 우리 나라와 관계를 맺었던 조부 팽우덕을 시조로 하고, 시조의 고향인 절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본관을 절강으로 하였다.
그 뒤 헌종 때에 이르러 팽장군의 전공에 보답하는 뜻으로 우리 나라에 귀화한 그의 후손들에게 경남 진해 소재의 토지를 하사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절강팽씨는 주로 경남 창원·마산·김해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용강팽씨세보(龍岡彭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팽조적은 원래 중국 금릉 사람으로 1351년(충정왕3)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가 고려에 들어올 때 원나라 내각학사로 공주를 호종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용강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용강으로 하였다고 한다.
한편 다른 문헌에는 팽조적이 고려의종때 학사벼슬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연대적으로 백여년 차이가 나는데 그 사실 여부는 상고할 수 없다.
아무튼 희성중에서는 역사가 오랜 성씨로 북한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고, 일부는 경기도 양주군과 충북 단양군 등지에 살고 있다.
편씨(扁氏)의 본관은 희천(熙川)단본이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충북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에 편창락(扁昌樂) 1가구가 있었다.
절강편씨
시조 편갈송(片碣頌:자 景修, 호 幕幹)의 선대는 당나라 종실의 후예로 원래는 이씨였다. 그의 고조 이지(李址)가 명나라 한림학사로 있을 때 영종이 동궁에 있으면서 궁인 원씨(袁氏)를 총애하다가 제위에 오르자 원씨가 황후의 망상을 품고 암약하자 모든 신하들은 원씨를 비호했으나 그는 「정실을 황후로 책봉하는 것이 천리에 마땅하다. 」고 극간 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고 하옥 당했다. 그러나 끝내 굽히지 않고 정도를 주장하자 임금이 그의 충절을 치하하며 일편단심의 <편(片)>자를 따서 사성함으로써 편씨가 되었고, 그의 아들 일(鎰: 시호 貞武)이 이부시랑으로 절강백에 봉해져서 절강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 나라 편씨의 시조인 편갈송은 명나라 어양총절사로 있다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에 유격장군으로 어양병 2천을 거느리고 이여송의 아장이 되어 우리 나라에 와서 평양을 탈환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고 이듬해 8월 귀국했다. 정유재란 때 다시 마귀의 중군도독으로 나와 경략 중군도곡 겸 병부상서 총독군문 부원수가 되어 직산에서 대첩을 거두고 선조로부터 노고를 치하하는 친서를 받았으며, 서생포에서 적을 궤멸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 본국 조정에 아첨과 모해를 좋아하는 간신 정응태(丁應泰)가 그의 영예를 시기하여 모함한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단념, 경주의 금오산에 은거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들 풍세(豊世), 풍원(豊源), 산보(山甫) 3형제가 우리 나라로 들어와 아버지를 봉양하다가 상을 당해 금오산에 안장하고 3년상을 치른 후 경주를 떠나 풍세·풍원은 나주에 산보는 만경에 세거처를 마련했다.
경남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 <편장군 승첩동>이라는 마애비가 있고, 그곳의 창표당에 마귀와 함께 제향되었다.
후손 편좌언(片佐彦)이 고종 때 무과에 급제, 부사를 지냈으며 근세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인 애사(愛史) 편강렬(片康烈)이 두드러진다. 그는 편상훈의 아들이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7년 영남의 의병장 이강년(李康 )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되었다. 전국의 의병이 서울로 진격할 때 선두에서 싸우다가 부상하여 고향이 연백으로 들어갔다. 1910년 평양에서 숭실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105인 사건에 관련, 3년간 복역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구월산주비대를 조직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다시 1년 6개월 복역했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성 회덕현에서 양기탁(梁起鐸) 등과 의성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그 후 장춘에 있는 일본 적십자병원을 습격하였고, 이어 봉천의 시가전을 전두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신의에서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심한 고문으로 발병, 병보석되었으나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평씨(平氏)의 본관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충주외에도 부평(富平), 인천(仁川), 예산(禮山), 가흥(嘉興), 평원(平原)등이 나타나 있으나 모두 동원 분파로 사실상 충주 단 본이다.
평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한나라 성제 때 평당(平當)이라는 사람이 평릉을 식읍으 로 받아 <平>을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평씨가 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931년 (고려태조14) 평환(平喚)이 강덕진두가 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오늘날의 평씨와 관련이 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충주평씨가보(忠州平氏家譜)》에 의하면 시조는 선조∼인조대의 사람인 평우성(平友聖)이 라고 하는 데 그의 사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인천시 남구 서창동 앞산에 있다.
표씨(表氏)는 중국계 귀화성씨로 본관은 신창(新昌)단본이다.
시조 표대박은 오계시대에 후주의 이부상서를 지내다가 장(張), 방(方), 위(韋), 변(邊), 윤(尹), 진(秦), 감(甘), 황보(皇甫) 등 8성을 이끌고 960년(광종11) 고려에 들어와서 귀화, 온창(지금의 신창)에 정착했다. 그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 충숙왕 때 합문지후로 좌리공신에 올라 온창백에 봉해진 표인려(表仁呂)를 중조 1세로, 본관을 신창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신창표씨는 조선조에서 문과급제자 5명, 호당1명, 청백리1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계(藍溪) 표연말(表沿沫)이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1년(성종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484년 공조좌랑이 되고, 1486년 장례원 사의로서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어 장령, 시독관, 사간 등을 지내고, 1495년(연산군1) 응교로 춘추관 편수관이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직제학으로 폐비윤씨의 추승을 반대하였다. 그후 승지, 대사간을 지내고 소릉(단종의 모후 현덕황후릉) 추복에 관한 사실을 사초에 적은것과 김종직의 행장을 미화해 썼다는 이유로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에 경원으로 유배 도중 은계역에서 죽었다. 그후 갑자사화 때 다시 부관참시당했다가 뒤에 신원되었다.당대의 문장가로 유호인(兪好仁)과 함께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뒤에 신원되고 함양의 구천서원, 함창의 임호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남계문집(藍溪文集)>이 있다.
선조 때 의 표헌(表憲)과 광해군 때의 표정로(表廷老)부자는 다같이 명역관·명문장으로 유명했고, 인조때의 무관 표정준(表廷俊)은 김상헌(金尙憲)과 절친해서 병자호란때 척화신으로 청나라에 잡혀가는 김상헌을 끝까지 수행하여 칭송을 들었다. 표정로는 역관 표헌의 아들이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선조 때 원접사의 역관이 되어 의주에 가서 명나라 사신을 맞을 때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나와 상대할 문장가가 없을 것이다」하고 은행을 먹으면서 <은행갑중장벽옥>이란 시를 지어 대구를 청하므로 그가 즉석에서 <석류피리점주사>라 하자 명나라 사신이 놀라며 격찬하였다. 통사를 거쳐 1616년(광해군8)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풍씨(馮氏)는 주나라 문왕의 제15자 필고가 진나라에서 벼슬하고 위나라의 후가 되어 풍성을 식읍으로 받음으로써 고을 이름인 <馮>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 나라 풍씨의 본관은 임구단본이고 시조는 풍삼사(馮三仕)이다.
풍삼사는 원래 중국 산동성 임구현 사람으로 명나라 말엽에 태학이었는데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석권하게 되자 청에 대항하여 의병활동을 하다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심양관에 억류당했다. 때마침 병자호란 때 볼모로 잡혀와 심양에 억류된 봉림대군(효종)과 만나 명나라의 광복을 협의하다가 1645년 봉림대군이 귀국할 때 수행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 귀화했다. 이때 같이 수행해 온 명나라 의사 아홉 사람을 구의사라고 한다. 그는 궁중에서 봉림대군과 같이 침식을 하다시피 하며 명나라의 광복을 논의하였고,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북진 계획을 추진하던 중 효종의 급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고향인 임구를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양주군구리면 양원리에 있었으나 남양주군 진접면 팔야리로 이장하였다.
시조 피경정(皮慶廷:초명 起光)은 원래 중국사람으로 원나라 순제때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 록대부 신경위 대장이 되어 남변을 정벌하였으나 전세가 불리, 전공을 세우지 못하자 순제 의 진노를 사게 되어 화를 피하고자 가족을 거느리고 고려에 와서 망명했는데, 공민왕은 그 를 우대하여 괴산 군에 봉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괴산(槐山)으로 하 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그러나 괴산 피씨를 중흥시킨 인물은 피득창(皮得昌)이다. 그는 시조 경정의 현손이요, 이부상서 성무(成茂)의 아들로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개국공신에 책록, 병조판서·전라감사 등을 역임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중 시조로 받들고 있다. 괴산 피씨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린 후 6백년이란 짧지 않는 역사를 지닌 성씨임에도 특출한 인 물을 내지 못하고 후손도 영락 하여 족세를 떨치지 못해 오늘날 소성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피세만(皮世萬)을 들 수 있다. 그는 숙종 때 적상별장을 거쳐 훈련원 판관이 되었다 영조조 정희량(鄭希良)의 난이 일어나자 병방군 류만원(柳萬元)등과 더불어 적을 토평, 많은 공을 세우고 순절했다. 병절교위 훈련원 첨정, 부사과에 추증되고, 성산에 기공비가 세워졌으며, 그 사적이 <충의효열록(忠義孝烈錄)>에 실려 있다.
시조 피위종(皮謂宗)은 원래 중국 사람으로 송나라의 금오위 상장이었는데, 고려 정종 때 동 국안렴사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여러 해를 지내는 동안 자연히 우리나라 풍물에 정이 들어 귀화하자 정종이 크게 기뻐하며 병부시랑에 제수하고 죽은뒤에 좌사의대부에 추증하였다. 그러나 그 후 문헌이 실전되어 근 3백년 동안의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고려사(高麗史)》 에 명종조에 중서평장사를 지냈다는 피형문(皮瀅文)이 있으나 시조와의 관계는 알 수 없다.
충 숙왕 때 피인선(皮寅善)·피인고(皮寅古)형제가 있었는데 형 인선은 정당문학·좌복야 등을 지내고 홍천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그를 득관조로 하고 본관을 홍천으로 하였다. 그리고 아우 인고 역시 대상·평장사를 지내고 단산군(단산은 단양의 옛이름)에 봉해져서 본관을 단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그러나 다같은 시조 위종의 혈손으로서 오늘날 족보 와 종친회 활동을 단일화하고 있다. 이 집안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인고의 아들 피맹인(皮孟仁), 피원휴(皮元休)·피자휴(皮子休) ·피원량(皮元亮)등이 있다.
피맹인은 고려 충복왕 때 진사에 급제, 직학사를 지냈고, 맹문의 아들 피원휴는 공양왕 때 한림학사를 지냈다. 맹인의 아들 피자휴는 박학하고 시문에 뛰어 난 학자로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종부시 주부를 거쳐 상서에 이르렀다.
피원량은 고려말 순창현령으로 있으면서 왜구를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그 이름이 <동국여지승 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피상의(皮尙宜)를 들수 있다. 그는 세종조에서 세조조에 이르는 동안 일어 통사로 있으면서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험악할 때 수차례 쓰시마에 드나들며 도주와 교섭, 국교를 정상화한 공으로 상호군이 되었다.
근세인물로는 오촌(梧村) 피중락(皮中洛)이 있다. 그는 고명한 학자로서 <오촌설림(梧村說林)>, <동남아탐견기(東南亞探見記)> 등의 저서를 남겼고, 중국에서 공자성상을 모셔와 장개석(蔣介石)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필씨(弼氏)의 문헌에 본관이 대흥(大興), 전주(全州) 등 2본이 전해지는데 전주관은 1985년도 8명으로 조사되었다.
대흥필씨의 시조는 필몽량(弼夢良)으로 무과 출신이다. 그의 후손 두만(斗萬)이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두만의 증손 성뢰(聖賚)는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에 이르렀는데, 그의 이름이 <동국명신록>에 올라있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전국에 73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그 중 65가구가 함주(咸州), 영흥(永興), 신흥(新興)등 북쪽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하씨(河氏)는 진주(晋州)의 토성으로서 본관이 문헌에 70본이나 나타나 있으나 그것은 모두 진주에서 갈린 분파로서 하씨의 세거지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진주하씨(晋州河氏)로 일원화되었다 그런데 진주하씨의 세계는 서로 계통을 대지 못하는 세파로 갈리어 족보가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시랑공파(侍郞公派)로 시조는 고려 현신의 한 사람인 하공진이다. 그는 고려 성종 때 압강도 구당사가 되고, 1009년(목종12) 중랑장·상서좌사 낭중이 되었다. 그해 강조(康兆)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옹립하자 거란의 성종이 강조를 문책한다는 핑계로 고려를 침입해왔다. 그때 강화교섭사로 적진에 들어가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병시켰다.
누차 탈출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마침내 요주 성종의 친국을 받게 되었다. 그때 요주가 「너는 내 신하가 되겠느냐」하고 묻자 그는「나는 내 나라에 두마음을 가질 수 없으므로 결단코 요를 섬길 수 없다.」하고 버티다가 끝내 절사하고 말았다. 조선 개국공신이며 태종때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은 그의 후손이다.
둘째는 사직공파(司直公派)로 시조는 고려 정종∼문종대에 사직을 지낸 하진(河珍)이고 세종때 영의정을 지낸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은 그의 후손이다. 하연과 하륜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던 같은 시대의 정승이었으나 서로 계보를 상고할 길이 없었던 것 같다. 하연이 1451년(문종1) 에 《경태보(景泰譜)》를 처음 내면서 그 서문에 <오하는 진주의 토성으로 백제시대에 타주(진주의 옛이름)로 불릴 때부터 사대부의 문벌이었으나 세계가 무전하고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난 시랑 하공진(河拱辰)과 동원이라 하나 분파계대가 확실하지 않고, 또 강인문(姜引文)이 정승에게 시를 보냈을 때 하복야라 했을 뿐 휘를 알 수 없으므로 이를 한탄하며 고려 정종∼문종양조에 사직을 지낸 하진을 시조로 하였다.>고 하였다.
또 다른 한파는 사육신의 한사람인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의 집안이다. 흔히 하위지의 호를 따서 단계 하씨(丹溪河氏)로 일컬어지지만 역시 진주 하씨이다. 파계를 밝히지 못하고 고려조의 주부 하성(河成)을 시조로 하고 있다.
진주 하씨는 조선조에서 영의정2명, 호당1명, 공신2명, 문과급제자39명과 많은 학자를 배출한 영남의 명문이다. 그 중에서도 하륜과 하연 그리고 하위지가 두드러진다.
호정(浩亭) 하륜은 순흥부사 하윤린(河允潾)의 아들이다. 1365년(공민왕14) 문과에 급제, 감찰규정으로 신돈(辛旽)의 비행을 공박하다가 지영주사로 좌천되고 1371년 안렴사 김주(金湊)가 그의 치적을 제1로 보고하여 고공좌랑에 올랐다.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첨서밀직사사가 되었다. 1392년 조선개국 후 경 기도 도관찰사가 되어 계룡산 천도를 반대, 한양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다음해 첨서중추원사 로 전임, 명나라 태조가 표전물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문책하자 1396년(태조5) 한성부윤으로 계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보고함으로써 해명에 성공했다. 1398년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제1차 왕자의난 때 방원을 도와 공을 세우고 정당문학에 승진, 정사공 신 1등으로 진산군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 난때도 방원을 도왔고, 이어 판 의홍삼군부사를거쳐 우의정에 되어 진산백으로 진봉, 이해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1 등에 책록, 다음해 관직을 사임했다. 1402년 좌정승이 되어 판승추부사를 겸임, 이해 등극사로 명 나라에 다녀왔다.
1409년 영의정부사가 되어 군정을 개정했고, 영춘추관사로 《태조실록(太 祖實錄)》의 편찬을 지휘했다. 1412년 다시 좌의정을 지내고 1416년 치사, 진산부원군에 진 봉죄더 왕명으로 함길도에 있는 선왕의 능침을 순심했다. 시문에 능했고 음양·의술·성경 ·지리에도 정통했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호정집(浩亭集)》이 있다.
경재(敬齋) 하연(河演)은 판서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며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96년(태조5) 문과에 급제, 홍문관과 승정원을 거쳐 예조참판 때 사신으로 중국에 가서 금은 세공을 면하도록 했다. 1423년(세종5) 대사헌으로 조계종 등 7개 종파를 선·교 2종으로 통합하고 사사·사전을 줄이도록 건의하여 실시하게 했다. 경상·강원·전라·평안4도 관찰사, 병조·형조참판, 대제학, 형조·이조판서, 판이조사 등을 거쳐 1445년(세종27) 우의정이 되어 괘장을 하사 받고 좌의정에 승진했다. 1449년(세종31) 영의정·새자사에 오르고 기로소에 입사, 1451년(문종1)에 치사했다. 문종 묘정에 배향, 문의의 우록, 무주의 백산, 합천의 신천, 진주의 종천 서원에 제향, 주일영당·문원영당이 있다. 편저에 《경상도지리시(慶尙道地理誌)》, 저서에 《경재집(敬齋集)》이 있다.
단계(丹溪) 하위지는 하담(河澹)의 아들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1438년(세종20) 식년문과에 장원, 이해 사가독서를 했고, 1444년 집현전 교리가 되어 《오례의주(五禮儀註)》상정에 참여했다. 1451년(중종1) 직집현전이 되어 수양대군을 보좌, 앞서 신정한《진설(陣說)》의 교정과《역대병요(歷代兵要)》편찬에 참여했다. 1454년(단종2) 부제학·예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455년(세조1)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침착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그 동안 집현전에 있으면서 왕의 측근에서 시정을 보필했으며 세조의 간청으로 부득이 벼슬하는 동안 받은 녹을 먹지 않고 별실에 저장해 두었다. 다음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등과 단종복위를 꾀하다 거사가 실패하자 체포되어 차열형에 처해졌다.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아 과천의 밀절서원, 연산의 충곡서원, 의성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그의 형 강지(綱地)와 아우 기지(紀地)·소지(紹地)도 모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이 밖의 인물로는 태종때 무과에 급제,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로 있으면서 북방수비에 공을 세운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 성종 때 문과에 급제, 간신 임사홍(任士洪)의 서용을 반대하고 연산군의 난정으로 사퇴한 후 폐비 윤씨의 입묘추숭을 극간 했던 운수당(雲水堂) 하윤(河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최영경(崔永慶)과 교분이 많았던 학자 하진보(河晋寶), 문장이 뛰어나고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송익필(宋翼弼)등과 함께 당대의 <팔문장>으로 일컬어진 하응림(河應臨), 선조 조에 왕자사부로 있다가 이이(李珥)·성혼(成渾)등이 무고를 받고 조정을 떠나자 그도 사퇴하고, 임진왜란 때 순절한 하락(河洛), 탁월한 성균관유생이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에 실망하여 벼슬에 뜻을 버리고 경사의 연구에 전념한 하홍도(河弘度) 등이 있다.
하씨(夏氏)는 송나라의 귀화성씨로 본관은 달성(達城) 단본이다.
시조 하흠(夏欽)은 원래 송나라의 대도독으로 고려 제 17대 인종 때 우리 나라에 와서 귀화, 달성에 정착했다고 한다. 주요인물로는 고려 명종 때 효자로 정문이 세워진 하광신(夏光臣)과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등이 있다. 이 밖의 인물로는 하인경(夏仁敬)이 선조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하운서(夏雲瑞)는 판관을 지냈다. 한편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고구려 산상왕 때 한평주 사람 하요(夏瑤) 등 1천여 가구가 고구려에 투항해오자 왕이 책성을 쌓고 그곳에서 살게 했다고 하는데 그 후손들이 지금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현재 대구를 비롯하여 경북의 달성과 경산, 경남의 밀양, 전북의 순창과 장수, 강원도의 원주지방에 많이 살고 있다.
한(韓)씨는 한국에서 제일 오랜 역사를 지닌 이른비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다. 특히 조선 때에는 많은 공을 세운 신하와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쥐고 정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오늘날 한씨들은 청주 한씨 하나 뿐이라고 내세우지만, 문헌에는 평산(平山), 한양(漢陽), 안변(安邊), 양주(楊州), 곡산(谷山), 단주(湍州), ?주(?州), 가주(嘉州), 대흥(大興), 부안(扶安), 당진(唐津), 개성(開城), 함흥(咸興), 금산(錦山), 신평(新平) 등 10여 본이 있으나 모두가 청주 한씨에서 갈리어 나왔다고 한다.
한씨의 시조는 멀리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의 후손으로 우성(友誠), 우평(友平), 우량(友諒)의 삼형제가 있어, 각각 기(奇)씨, 선우(鮮于)씨, 한(韓)씨가 되었다고 한다. 즉, 청주 한씨의 시조 난(蘭)은 기자의 후예인 우량(友諒)의 자손이 되는데, 기자(箕子)는 원래 전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아니고 우리 나라 땅에서 태어난 기(箕)씨가 아닌 한(韓)씨라는 것이다.
역사학자의 학설에 따르면 箕(韓) 시조인 마지막 왕 준(準)이 위만에서 쫓겨 약간의 무리를 이끌고 진국(辰國)에 들어가 조그만 나라를 건설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일컬은 것만 보더라도 그의 성이 기(箕)씨가 아니고 한(韓)씨인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한씨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많은 명신(名臣)과 명상(名相)을 배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큰 세력을 가진 명벌(名閥)로서 오랫동안 정치권좌를 주물렀다.
청주 한씨는 한란(韓蘭)을 시조로 하여 내려오는 동안 봉군(封君)과 지역 분적(分籍)으로 인해 30여파로 나뉘는 데 그 중 후손이 많기로는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 左議政)파와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 左贊成)파, 충간공(忠簡公) 한리(韓理, 吏部尙書)파, 몽계공(夢溪公) 한철충(韓哲沖, 禮部尙書)파, 한연(韓漣)의 관북(關北)파,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파 등 6파가 청주 한씨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청주 한씨의 인물 가운데 여러모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뭐니뭐니해도 충성공(忠成公) 한명회(韓明澮)이다. 그는 단종을 내몰고 세조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워 영의정에까지 벼슬이 올랐으며, 그를 맨 윗 조상으로 삼는 충성공(忠成公)파가 성립되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심복으로써 단종 즉위년 계유정란(癸酉靖亂)에 가담하여 성공을 하자 정란공신(靖亂功臣) 1등에 올랐다. 그는 다시 2년 뒤에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며, 성종 때에는 귀성군(龜城君)을 제거하는데 큰 공을 세워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에 오르기도 했다. 한명회는 이러한 삼대에 걸친 공훈과 권좌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과 권좌의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이다.
양절공(襄節公) 한확(韓確)은 세종 때 병조판서와 이조판서 등을 거쳐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세조 때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의 딸은 성종의 아버지 덕종의 비(妃)가 되었으며, 그의 누이 둘은 각각 명나라의 태종비(太宗妃)와 선종비(宣宗妃)가 되었다.
선조 때의 명상인 한응인(韓應寅)은 한확의 6세손이 된다. 그는 선조 10년 알성시에 급제한 후 광국공신(光國功臣), 평난공신(平難功臣)에 각각 오르고 임진왜란 때에는 팔도도순찰사(八道都巡察使)로 활약했다. 또 양절공파에도 역시 많은 공신(功臣)과 명신(名臣), 그리고 학자들이 쏟아져 나와 명성이 드높았다.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 左贊成)는 관찰사 혜(惠)의 아들이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학문과 인품이 높아 선배들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다가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세자(世子)의 스승이 됐고, 3년 후에는 해양대군(海陽大君,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다시 그의 스승이 되었다.
문정공의 후손으로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저술한 실학의 선구자 한백겸(韓百謙)이 있고,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인 한원진(韓元震)은 심리학의 대가 이동(李東)과 낙론(洛論)의 논쟁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 한리(韓理)를 파조로 하는 충간공(忠簡公)파와, 고려말에 전법판서를 지낸 한철충(韓哲沖)을 파조로 하는 몽계공(夢溪公)파, 그리고 북변 일대에 몰려사는 소위 관북(關北)파 등이 있어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 냈다.
한씨(漢氏)는 중국의 성씨로서 언제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본관은 충부 단본으로 알려졌으나 시조는 미상이다. 경북 영일군에 몇 가구만이 살았다.
함씨(咸氏)는 중국계의 귀화성씨로 본관은 강릉(江陵)외에 60여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것은 강릉함씨(江陵咸氏)의 세거지를 뜻할 뿐 모두가 동원분파이다.
시조는 중국에서 귀화한 함혁(咸赫:시호 文簡)인데 그의 동래 연대에는 양설이 있다. 일설에는 주무왕 때 기자를 따라 왔다고 하며, 다른 일설에는 당나라 무종때 대사마 대장군으로 조서를 받들고 신라에 들어와 문성왕으로부터 익화자사(익화는 지금의 양평)로 임명받았다고 한다. 그 무렵 조양·복홀의 두현을 합하여 양근군(지금의 양평)을 만들었기 때문에 본관을 양근으로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양평땅에는 <함공성>이니 <함씨대왕성>이니 하는 함씨에 관한 전설이 많다고 한다.
그의 후손중 함신(咸信)이 신라 원성왕 초에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를 따라 명주 땅에 들어온 이후 후손들이 강릉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함씨는 시조 이하 약 20대의 세계가 확실하지 않아 고려 개국공신으로 광평시랑 평장사를 지낸 함규(咸規:시호 襄厚)를 1계조로하고 규의 14세손 함부림(咸傅霖)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동원군(동원은 강릉의 옛이름)에 봉해져서 본관을 양근에서 강릉으로 이적했다. 함부림은 검교중추원 학사 함승경의 아들이다.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 검열·좌정언 등을 거쳐 1389년(공양왕 즉위) 우헌납이 되었다. 그 후 형조정랑을 거쳐 1392년 병조정랑겸 도평의사사 경력사 도사가 되고, 이해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공신 3 등에 책록되었다. 예조의랑에 이어 좌산기상시로 상서소윤을 겸임했고 명성 군에 봉해졌다. 1403년(태종3) 참지의정부사가 되어 동원군에 개봉되었고, 다음해 대사헌이 되었다. 1408년 형조판서에 오르고 병으로 사직했다가 곧 경기·충청·경상·황해등 각도의 도관찰출척사, 동북면 도순문찰리사를 역임했다.
강릉 함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에서는 양경공(襄敬公) 함유일(咸有一)이다. 함유일은 광평시랑 함규의 5대손이자 상의봉어동정 함덕후의 아들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5세에 서울에 올라와 아버지의 친구인 재상 이준양(李俊陽)의 집에 묵다가 1126년(인종4)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이부기관으로서 준양을 따라 대궐을 지켰으며 1135년 서경 반란 대 말단 관리로 종군, 공을 세워 서경유수 녹사가 되었다 그 후 선군기사를 거쳐 보성을 청렴하게 잘 다스렸으며, 의종때 내시에 들어가 교로도감을 관장하며서 무당을 교외로 추방, 음사를 불지르는 등 미신 타파에 힘썼다. 감찰어사, 황주판관, 삭방도 감창사 등을 거쳐 1170년(명종즉위) 다시 내시에 불려 들어가 곧 병부낭중이 되었다. 뒤에 성서좌승을 지내고 1179년 공부상서에 이르러 치사했다. 일생을 베옷만을 입고 질그릇을 쓰며 청빈하게 살았다. 그의 아들 문익공(文翼公) 함순(咸淳)은 문장과 덕행이 높아 당대의 명유인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등과 함께 강좌칠현으로 알려졌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정평공(定平公) 함부림(咸傅霖)이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공신에 오르고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시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의 아우 함부열(咸傅說)은 고려말에 예부상서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그의 자손들이 종전의 관향인 양근(楊根)을 본관으로 써오다가 최근에 합보했다. 부림의 아들 문희공(文僖公) 함우치(咸禹治)는 참지의정부사 함부림의 아들이다. 음보로 감찰이 되고 고부군수·군기시 부정·나주목사 등을 거쳐 1453년(단종1) 판사복시사·첨지중추원사·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457년(세조3) 공주목사·함질도 관찰사를 지냈다. 1459년 대사헌·중추원 부사를 지내고 이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466년 경상도·충청도의 관찰사, 개성부 유수를 역임, 형조참판으로 동원군에 습봉되고, 이어 지의금부사·함흥부윤을 거쳐 1468년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471년(성종2) 형조판서에 올라 좌리공신 4등이 되고 좌참찬을 거쳐 1479년 봉조하가 되었다.
강릉 함씨의 유일한 문과급제자 함헌(咸軒)은 중종 때 서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공자유상을 가지고 돌아와서 강릉에 오봉서원을 세우고 거기에 봉안했다.
이 밖의 인물로는 함진태(咸鎭泰)·함진숭(咸鎭嵩)형제가 순조∼현종 대에 각각 예학과 시문으로 이름이 났었고, 함제홍(咸濟弘)·함재영(咸在 )·함재운(咸在韻) 3부자가 국악의 명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중국 평양(平陽). 당나라 숙우(叔虞) 후 주나라(周) 영왕(靈王) 때 해호(解狐)가 있어 진(晋) 나라 사람 한(漢의) 성제(成帝) 때 해만년(解萬年)이 있으니 장작대장 진대부 해양(解揚)의 후 읍으로써 시가 됨.
시조 해서필(海瑞必:호 陽村)은 원래 명나라 사람으로 명나라 태조 때 이부상서를 지내고 우리나라에 와서 김해군에 봉해졌다.
《중광보(重光譜)》에 의하면 해서필이 명나라 태조의 명을 받아 대도독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공을 세우고 김해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고 한다.
시조의 묘소는 전남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에 있고, 매년 4월 5일에 향사한다. 그러나 《중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등 문헌에 해씨의 본관을 <靈巖>이라 하였고, 시조나 그 밖의 사항은 미고라 하였는데 김해해씨의 시조묘가 영암에 있는 것으로 보아 김해해씨와 영암해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김해해씨가 전남 영암에 5가구가 살고 있었고, 목포와 나주에 2가구씩 살고 있었는데 본관을 미상으로 조사되었다.
허(許)씨는 그 연원을 가락국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비(妃)인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 허 왕후는 원래 인도의 한나라인 아유타국(阿踰陀國) 공주로써 배를 타고 지금의 창원군 응동면 앞바다에 이르러 수로왕의 영접을 받고 그의 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 데 맏아들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 왕후의 뜻을 살려 허(許)씨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 하여 성불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김해 김(金)씨와 부성 허(許)씨는 모성을 각각 계승한 셈이다. 그래서 김해 김(金)씨와 허(許)씨는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
허(許)씨의 본관은 양천(陽川), 하양(河陽), 김해(金海), 태인(泰仁), 함창(咸昌), 수원(水原), 양주(梁州) 등이 전하고 있지만 지금은 양천(陽川), 하양(河陽), 김해(金海), 태인(泰仁)의 4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각 본관의 시조는 가락국이 신라에 망하면서 각 지방으로 흩어진 가락의 왕조들이라고 한다.
시조 허염(許琰)은 수로왕비인 보주태후 허씨(許氏)의 35세손으로 고려 무종 때 탄생, 고려조에 벼슬하여 삼중대광에 오르고 가락국에 봉해졌다.
김해허씨(金海許氏)는 허씨 중에서 종통으로 가락이 신라에 의해 망하면서 왕손들이 각지방으로 유리하였으나 종파는 김해에 머물러 있었고 시조 허염도 김해에 거주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
김해허씨는 고려조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서도 문과 급제자 16명, 호당 1명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허유전(許有全),과 조선조의 허백기(許伯琦)를 꼽을 수 있다. 충목공(忠穆公) 허유전은 원종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1295년(충렬왕21) 감찰시사로 있을 때 폐신의 무고로 순마소에 갇힌 후 사형 직전에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98년 국학사예로서 전라도 안렴사가 되고, 1307년 감찰대부·권수동지밀직사사가 되어 지공거를 겸임했다.
그후 전조시랑을 지낸 뒤 도첨의참리, 지밀직사사에 오르고, 1314년(충숙왕1) 가락군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의호를 받았다. 1321년(충숙왕8) 정승이 되었는데 토번에 귀양간 충선왕으로부터 간곡한 편지를 받고 그의 환국 운동을 위해 민지(閔漬)와 함께 원나라에 갔으나 심양왕 호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정헌공(正憲公) 허백기는 직제학 정(楨)의 아들이며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시관을 거쳐 다음해 주서가 되었다. 그후 형조, 병조의 좌랑, 형조정랑, 경상도도사를 역임, 1529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장령, 사건, 교리, 동부승지, 형조참의, 판결사, 첨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동지중주부사에 이르렀다.
근대 인물로는 구한말에 일본 정부로부터 칙임관 2 등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한 왕산(旺山) 허위(許蔿)가 있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병서를 탐독했다. 1897년(광무1) 이은찬(李殷燦), 조동호(趙東鎬), 이기하(李起夏)등과 의병을 일으켜 금산·성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고종황제가 해산을 종용하자 해산하고 귀향했다. 다음해 참봉·성균관 박사·중추원 의관 등을 지내고 1904년 의정부 참찬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반대의 격문을 돌리다가 체포되어 일본의 회유책으로 칙임관 2 등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7년 의병장 이인영(李麟榮)등과 원주에서 전국의병연합부대를 조직, 서울의 각국 영사관에 서한을 보내고 한국의 정식군대로서의 발족을 선언하고, 이인영이 아버지의 사망으로 귀향하자 의병의 군사장이 되어 일본통감부를 격파하기로 결정, 3백여 명의 선발대를 인솔하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이르렀으나 후속부대가 일보군에게 진로를 차단 당하자 포위되어 싸우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김수로왕비 보주태후의 30세손이다. 그의 선대는 공암(지금의 양촌)에 세거하면서 농사에 힘써 거부가 되었다. 마침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이 모자라 병졸들의 사기가 저하되자 많은 군량을 보급하여 군의 사기를 드높여 견훤군을 대파하게 했다. 태조가 그를 존경하여 가부라 칭하여 공암촌주에 봉하고 공암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양천을 본관으로 하였다.
허씨 중에서 양천 허씨가 가장 번성했다. 고려조에서는 허재(許載)·허공(許珙), 허숭(許嵩), 허금(許錦)등 명신을 배출했는가 하면 조선조에서는 상신 5명, 호당 6명, 청백리 5명, 공신 9명, 문과급제자 93명을 배출하여 대성의 지위를 누렸다. 허공(許珙)은 추밀원 부사 홍수의 아들이다. 고종 말기에 문과에 급제하고, 추천으로 내시에 소속하여 정사점필원이 되고 국학박사를 거쳐 원종 초 합문지후가 되었다. 1267년(원종8) 호부 시랑으로 신종, 희종, 강종 등 3조의 실록을 수찬하는데 참여, 1269년 우부승선, 이부시랑, 지어사대사가 되었다. 이때 권신 임연(林衍)이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자고 제의했으나 거절하여 미움을 받았으며 임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울 때 많은 조신들이 살해되었으나 그는 중용되어 첨서추밀원사에 올랐다. 1274년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뒤한 전선 300척을 고려에서 건조할 것을 명하자 추밀원 부사로서 전주 도지 휘사가 되어 전선의 건조를 담당했고, 다음해 지추밀원사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밀직사사·판밀직사사를 지내고 1279년에 원나라의 명으로 다시 90척의 전선을 건조하게 되자 경상도 도지휘사로 이를 지휘했다. 다음해 참문학사세자보가 되고, 1284년 수국사를 겸하여 원부(元傅)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참술, 1288년 첨의중찬이 되어 지공거를 겸했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허종(許琮), 허침(許琛)형제와 허엽(許曄), 허목(許穆)형제를 들 수 있다. 충정공(忠貞公) 허종은 시중 허공의 후손이다. 1457년(세조3)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직장·지제고 등을 거쳐 선전 관을 역임했다. 1460년 평안도 도절제사도사가 되고, 그 후 함길도 도사, 정언, 지평 , 동부승지 등을 역임, 1465년 함길도 절도사가 되었다. 1467년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 자 함길도 절도사로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1등으로 양천군에 봉해졌 다, 1469년(예종1) 평안도 관찰사·대사헌을 지낸 뒤 이해 전라도에서 장영기(張永奇) 가 난을 일으키자 전라도 절도사로 나가 이를 평정,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1471년(성 종2) 좌리공신 4등이 되고, 147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가 건주위의 여진족이 침공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이를 격퇴한 후 우참찬에 이어 좌참찬에 올랐다. 1481년 호 조판서를 거쳐 다음해 우찬성이 되고, 1483년 세자이사를 겸임, 이어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양천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491년 영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여진족이 북변을 괴롭히자 북정도원수로 2만 4천의 군사를 이끌고 적의 본거지를 소탕, 다음해 우의정 에 승진했다. 궁마에 뛰어났고 문명이 높아 문무를 겸비한 명신으로 여러 차례 북변 에 파견되어 양인의 침입을 막았다. 앞서 1488년(성종19) 에는 서거정(徐居正), 노사신(盧思愼)등과 함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했으며 철저한 배불론을 주 장, 세조의 불교신봉을 반대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성종 때 허종은 어느 날 성조의 계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를 폐하는 정의가 열릴 것을 알고 대궐로 가는 도중 다리 위에서 짐짓 개울로 떨어져 정의에 참석을 피하여 뒤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앞서 폐비를 위한 정의에 참석했던 이들이 무더기로 숙청될 때 화를 면했다는 일화가 전하는 인물로 그가 떨어진 다리를 종침교라고 불렀다.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은 현감 허교의 아들이다.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며, 송시열(宋時烈)과 쌍벽을 이루던 당대의 석유로서 학문·문장·서예에 모두 뛰어나 <學·文·書>의 <三古>로 불리고 특히 전세에 능하여 동방의 제1인자로 일컬어졌다.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 지지 않고 제자백가의 서를 연구하다가 다시 경서의 연구에 전심하였다. 특히 예학에 있어서 일가를 이루었다. 1650년(효종1)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657년 지평에 초임, 다음해 장령이 되고, 1660년(현종1)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 이 일어나자 집권층인 서인 송시열(宋時烈)등이 채택한 기년설을 반대하고 3년설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모두 숙청당할 때 그는 삼 척부사로 좌천당했다가 2년 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74년 (숙종즉위) 제2차 복상문제로 예송이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을 반대하여 기년설을 채택케 하는데 송공 한 남인이 집권하게 되자 대사헌에 특진되어 이조참판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고, 이해 장기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가 일어나자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 이로 인해 남인은 양파로 갈라져 송시열의 처벌 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과 대립,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1679년 탁남인 허적을 탄 핵하다 사직 후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했다. 독특한 도해법을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 를 지어 가르쳤다. 전의 미강서원, 나주의 미산서원, 창원의 회원서원에 제향되었다. 그 후 허적은 조부 잠(潛)의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중종의 유악을 함부로 사용한 사건으로 대죄 하던 중 서자 견(堅)의 역무 사건에 연좌되어 사사 당했다가 뒤에 경신대출척으로 신원 되었다.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정목공(貞穆公) 허욱(許頊)은 종의 현손으로 광해군 초에 원주에 유배되어 죽었다. 뒷날 인조반정 후에 신원 되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초당(草堂) 허엽은 선조조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로 슬하에 허성(許筬), 허봉(許 ), 허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이 있어 모두 시문에 뛰어났다. 특히 허난설헌은 여류시인으로 이름나 황진이(黃眞伊)·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삼대 여류시인으로 꼽히고, 허균은 서손을 차별대우하는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자로 널리 이름났으며 허엽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2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검열·설서를 지냈으며 1597년 중시문과에 장원, 다음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다. 이어 춘추관 기주관·형조정랑을 거쳐 1602년 사예·사복시정을 역임, 이어 전적·수안군수를 지낸 뒤 1606년 원 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영접, 이때 탁월한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 후 사의원정, 삼척부사, 내자시정, 공주목사, 형조참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2) 진주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교의가 깊었던 서자 출신의 박응서(朴應犀)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정을 위해 당시 권신이던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예조·호조의 참의를 지내고, 숭문원 부제조를 거쳐 1614년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폐모론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해 좌참찬에 승진, 다음해 하인준(河仁俊)등과 반란을 계획하기기 탄로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처형되었다. 그의 소설《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제도를 비판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이다.
허적은 1637년(인조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부수찬을 지낸 뒤 1641년 의주부 윤으로 관향사를 겸했다. 그 후 경상도 관찰사·명조판서를 거쳐 1659년(효종10) 형조 판서에 전임, 이해 효종이 죽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남인으로서 서인의 기년설에 대해 3년설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 후 호조·병조의 판서를 지 내고 1662년(현종3) 진주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1664년 우의정에 오르고, 이해 사은 겸 진주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 1668년 좌의정에 되었다. 1671년 영의정에 올랐으 나 다음해 송시열(宋時烈)의 논척을 받아 영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1674년 인선대비 가 죽어 자의대비의 제2차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의 대공설을 반대 기년설을 주장 해 채택됨으로써 영의정에 복직, 남인정권을 이룩했다. 그후 집권한 남인 사이에 송시 열의 처벌문제로 청남·탁남으로 갈라질 때 온건파인 탁남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 사은겸 진부변무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5도 도체찰사가 되고, 1678년 재정으 고갈을 막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 이를 사용케 했으며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는 남인의 영수로서 영의정의 자리에 있던 허적(許積)과 의견이 맞서 강경론자인 허목은 청남으로 온건파인 허적은 탁남으로 분파 되었다. 그 후 허적은 조부 잠(潛)의 시호를 받게 되어 그 축하연을 베풀 때 중종의 유악을 함부로 사용한 사건으로 대죄 하던 중 서자 견(堅)의 역무 사건에 연좌되어 사사 당했다가 뒤에 경신대출척으로 신원 되었다.
이 밖의 인물로는 효민공(孝敏公) 허계(許棨)가 현종 때 좌포도대장, 철종 때 금위대장, 고종 때 도총관을 역임했다.
시조 허사문(許士文)은 김수로왕비 보주태후 허황옥(許皇玉)의 30세손으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부마가 되어 시산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산이 태인(泰仁)의 옛이름인 까닭에 본관을 태인으로 하였다.
《태인허씨세보(泰仁許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사문이 양천허씨(陽川許氏) 시조 선문(宣文)과 함께 고려 태조를 섬겨 공을 세웠고, 그의 큰아들 즙(楫)의 묘소가 공암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선문과 사문은 친형제로 생각되나 문헌이 없어서 상고할 수 없다고하였다. 그리고 둘째아들 도(棹)는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공이 있어 성은 이(李), 이름은 허겸(許謙)으로 하사받고 소성백에 봉해져서 인천이씨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 3세 징(澄)이 대아찬을 지내고 송도로 이주한 후 인물과 벼슬이 끝이지 않아 고려의 대성이 되었는데 고려말에 경(慶)이 좌우위보승산원 중랑장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되자 전라도 태인으로 낙향하여 충절을 지켰다.
허경에게 아들 6형제가 있었다. 큰아들 사인(斯仁)은 일찍 죽었고, 둘째 지재(止齋) 사문(斯文)은 교리·지평 등을 지낸 뒤 고부로 이거하였으며 사문의 둘째아들 곤원(昆元)이 다시 옥과로 이주했다. 셋째 사의(斯義)는 동복으로, 넷째 사행(斯行)은 직장을 지내고 부안으로 다섯째 사효(斯孝)는 진안현감을 지내고 고부로 여섯째 사제(斯悌)가 사평을 지내고 금구로 각각 이주하여 5파로 갈리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순평공(順平公) 허경(許慶)을 꼽을수 있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고, 문학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청렴충직하여 부료로 뽑혀서 잠저 시절의 숙종을 모시다가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추밀원 승선이 되어 금중에 출입하며 총애를 받았다. 1101년(숙종6) 상서좌승으로 즉위사가 되어 요나라에 다녀왔으며, 1109 년(예종4) 동지추밀원사, 형부상서, 추밀원사,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거쳐 중서시랑 등평장사가 되고 검교사도, 상서예부사에 이어 1113년 검교태위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
조선조에서는 허사문이 유일의 문과 급제자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 병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시조 허강안(許康安)은 김수로왕비 보주태후 허황옥(許皇玉)의 33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 호부 낭장을 지내고 하주자사가 되어 그 곳에 거주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후에 하주가 화성으로, 화성이 다시 하양(河陽)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하양으로 하였다. 하양허씨는 조선조 초기부터 정계에 진출, 상신 1명, 문과 급제자 11명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간숙공(簡肅公) 허주(許周)는 개성부윤 허귀룡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음보로 벼슬에 나가 여러 관직을 거쳐 전법정랑이 되고, 1385년(우왕11)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았다. 그 후 지안성군사, 개성소윤, 공조와 호조의 정랑, 경기우도의 염문계정사, 안렴사 등을 역임하고 1392년(태조1) 조선이 개국되자 내부경이 되어 1397년 사헌중승을 겸직했다. 같은 해 노비변정도감 도청사가 되어 노비 소유에 대한 소송사건을 공정히 처결했으며, 1399년(정종1) 판사수감사·지형조사극 역임하고 1401년(태종1) 판전농시가로서 경상도 안렴출척사가 되었다. 1405년 형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호조좌참의·판홍주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사퇴, 1409년 다시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참지의정부사·한성부윤·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뒤에 개성유후사 유후를 거쳐 1418년(세종 즉위) 판한성부사에 이르렀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공사를 공정하게 처리했다.
그의 동생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허귀룡의 아들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으로 1390년(공양왕 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건국 후 좌보궐에 특임되고, 봉상시승으로서 예제의 제도화에 힘썼다. 1397년(태조6) 성균전적에 올라 석전의 의식을 개정했으며 1400년(정종2) 사헌부 집단을 거쳐 완산부 판관, 이조정랑, 집의, 판내섬시사 등을 역임하였다. 1411년(태종11) 예조참의가 되어 처음으로 학당을 세우게 하고 왕실의 의식과 일반의 상제 등을 법전화하는 데 노력했고, 계속하여 의례상정소 제조를 겸임했다. 뒤에 병조·이조의 참의를 거쳐 1416년 예조참판에 승진, 이어 봉상시 제조·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 의정부 참찬이 되고, 그후 두차례에 걸쳐 이조판서를 지낸 뒤 1433년 판중추원사로 판예조사를 겸임, 1438년(세종20) 우의정을 거쳐 다음해 좌의정에 올라 치사했다. 경사에 정통했으며 검소한 생활을 하여 신망을 얻었다.
그의 아들 정간공(貞簡公) 허후(許珝)는 좌의정 허조의 아들이다. 1426년(세종8) 식년문과에 급제, 직제학을 지내고, 143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승지를 거쳐 1442년 한성부윤이 되었다. 이어 예조참판·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445년 대사헌·형조참판을 지내고, 예조판서를 거쳐 1451년(문종1)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다음해 지춘추관사로서 《세종실록(世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453년(단종1) 좌찬성이 되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필했다. 이 해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여 효수하자 이를 반대하여 거제도에 유배, 배소에서 살해되었다.
공간공(恭簡公) 허성(許誠)은 조(稠)의 조카이며 한성판윤 주(周)의 아들로 태종때 문과에 급제, 세종때 판서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이밖의 인물로는 성종때 부제학·대사간을 지내고 명필로 알려진 허계(許誡)가 있다.
현(玄)씨의 본관은 연주(延州), 창원(昌原), 성주(星州), 천령(川寧) 등 여럿이 전하나 모두 연주현시를 대종으로 갈려진 것이다.
시조 현담윤(玄覃胤: 시호 敬獻)은 고려 의종조에 장군이 되었고, 명종 때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벼슬이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으며 연산군에 봉해졌다. 연주와 연산은 평안도 영변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연주(延州)로 하였다.
현씨는 시조 현담윤 이전부터 연주의 토호로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씨가 처음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명조조 조위총의 난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운 것에 기인하는데 당시 현담윤의 직책은 도령이었다. 도령은 도령중랑장을 가르키는 것으로 고려시대 주현군 조직의 최고위직이다. 그러니까 현씨는 연주의 향리 조직 중에서도 상층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시조 현담윤과 덕수(德秀), 이후(利厚), 덕유(德裕) 세아들이 조위총의 난 때 중앙 정부에 세운 공을 기반으로 중앙의 관료로 진출하게 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평북 영변군 연산면 관동에 있는데 분단으로 길이 막혀 충남 천원에 모선재를 세워 매년 음력 3월 1일 및 10월 1일에 향사하고 있다.
시조 현담윤에 대해선 《고려사(高麗史)》에 그의 큰아들 <현덕수전>에서 볼수 있다. 현덕수(玄德秀, 高麗 官職: 兵部尙書)는 어려서 연주분도 장군 김치규(金稚圭)에게 발탁되어 서울에 올라와 공부하고 여러번 과거에 실패한 후 병으로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1174년(명종4) 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인정권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절령 이북의 40여성이 모두 그에 호응하였다. 이 때 현담윤은 도령으로 연주의 주군을 거느리고 아들 덕수와 함께 반군 측에서 보낸 사자를 잡아 죽이고 성을 고수하여 덕수는 주민들에 의해 권감창사가 되었으며 난이 평정된 후 내시지후에 임명되고, 이어 안남도호부 부사가 되었다. 정치가 청렴 결백하여 이민들이 존경했고, 음사를 엄금했다. 병부낭중·사재소감을 지내고 신종조에 전중감을 거쳐 병부상서에 이르러 치사했다. 처음에 팔거군에 봉해졌다가 뒤에 성산부원군에 봉해졌다. 현이후는 난이 평정된 후 경상안렴사에 제수되고 광성군에 봉해졌다. 그는 연주성에서 반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 주민들에 의해 권행병마사에 추대되기도 했다.
현씨는 현담윤과 덕수 부자가 중앙정계에 기반을 굳힌 후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덕수의 아들 현원렬(玄元烈)은 충렬왕조에 태복윤을 지냈고 이후의 아들 현원도(玄元燾)는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큰인물을 내지 못해 족세를 떨치지 못했으나 회당 현익수(玄翼洙)가 나와 가문을 빛냈다. 그는 형빈의 아들이다. 가세가 빈궁하였으나 청백하여 처사로 이름났다. 19세 때 이구암(李龜巖)의 문하에서 수업, 학문을 연구하는데 적은 것부터 시작하여 식견을 넓혔으며 빈곤에 처하여도 지조를 굳게 하였으므로 명성이 높았다. 상서 김이양(金履陽)의 천거로 지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노부모를 위해 나아가지 않았고 다시 상국 김이교(金履喬)가 찬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젊어서는 마반·한구의 글을 애독하다가 뒤에 《주자서(朱子書)》에만 전심하였고 역학에 대해서는 태극서명을 탐구하였다. 스승이 죽은 뒤 3년 동안 심상을 치르고 동문들과 더불어 유고를 정리하여 문집을 발행하였다.
현석문(玄錫文)은 조선말기의 천주교신자로 《기해일기(己亥日記)》의 저자이다. 玄錫文(朝鮮 교명:칼로로 天主敎殉敎者)은 역관 현계흠의 아들이다. 아버지 계흠(啓欽)이 신유교난에 순교하자 더욱 신앙을 굳게 하여 1836년(헌종2) 에는 의주까지 가서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를 맞아들였으며 전도에 힘써 천주교 한양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헌종5) 기해박해로 아내와 누이가 순교하자, 이해 엥베르 주교의 부탁으로《천주교순교자열전(天主敎殉敎者列傳)》의 집필을 시작해서 3년만에 《기해일기(己亥日記)》라는 이름으로 완성했다. 1846년(헌종12) 김대건(金大建)등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 1925년 교황비오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다.
시조 현덕유(玄德裕: 시호 正獻)는 연주현씨(延州玄氏) 시조 현담윤(玄覃胤)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1186년(고려 명종16) 문과에 급제, 관직에 나아갔는데 뜻이 크고 기개가있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당시의 집권자였던 최충헌(崔忠獻)을 꺼려 오랫동안 산지에 있다가 뒤에 이부시랑·예부시랑·서경유수를 거쳐 참지정사·대사공에 이르렀고 회원군에 봉해졌다. 회원은 창원(昌原)의 옛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연주현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창원으로 하였다.
창원현씨는 고려조의 명족으로 시조 덕유의 아들 현승(玄昇)은 이부상서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현장(玄璋)은 추밀원사를 지냈다.
현문혁(玄文爀)은 장의 아들로 도원수를 지냈고, 그의 동생 현상혁(玄象爀)은 삼사사를 지냈다. 상의사도를 지낸 현간(玄簡)의 아들 현태로(玄台老)는 평장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현유의(玄惟義) 역시 평장사에 이르러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좌참찬을 지낸 현효생(玄孝生)의 아들인 문헌공(文憲公) 현석규(玄錫圭)를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그는 효령대군의 아들인 서원군의 사위로 1460년(세조6) 문과에 급제하였다. 위인이 정직 청렴하여 매사에 공의를 주장하였고, 명석한 판단으로 공사를 잘 처리하였다. 성종이 특히 총애하여 모든 동료들의 참소에 대하여 성종이 「그 사람의 낯은 옻과 같이 검으나 그 마음은 맑아 물과 같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언제나 겸허한 마음으로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사헌부 감찰을 비롯하여 형조판서·평안도 관찰사·우참찬 등을 지내는 동안 왕의신임이 두터웠으며 은권이 깊었다. 때로는 선은 진수와 어선이 하사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첨정을 지낸 현사원(玄士元), 관찰사를 지낸 현지준(玄之俊), 부사를 지낸 현수간(玄守諫), 지중추부사를 지낸 현성운(玄星運), 한말에 내부협판을 역임한 현호민(玄好敏)등이 씨족을 빛낸 인물들이다.
시조 현원고(玄元羔)는 고려 명종조에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 문하시랑 평장사에 오르고 연산군에 봉해진 연주현씨(延州玄氏) 시조 현담윤(玄覃胤)의 손자이며 성산부원군 현덕수(玄德秀)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조에 영동정을 지내고 순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연주현씨에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순천으로 하였다.
순천현씨 역시 고려조에서는 현담윤의 후광을 받아 대대로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다. 현보(玄甫)는 시조 원고의 아들로 영동정을 지냈고, 그의 아들 현병성(玄秉性)은 찬성사를 지냈다. 현충수(玄忠守)는 병서의 아들로 승지동정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 현광수(玄光壽)는 판도판서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들오와서는 문과 급제자 2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현광우(玄光宇)는 영조조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양사를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이 밖에 현인량(玄仁亮)은 수군절제사를 지냈고, 현극(玄極)은 방어사를 역임했다. 현지후(玄之厚)는 도호부사를, 현벽(玄璧)은 오위장을 현말승(玄末丞)은 참의를 지냈으며, 현석로(玄碩老)는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 외에 학자로 이름을 날린 청금당(聽琴堂) 현두찬(玄斗燦)과 옥천(玉泉) 현서익, 그리고 효자로 칭송을 받은 현적복(玄積福), 현범렬(玄範烈)등이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시조 현규(玄珪)는 조선 세종조에 군자감정·고부군수 등을 지냈다. 그는 연주현씨(延州玄氏)의 시조 현담윤(玄覃胤)의 큰아들로 고려조에 병부상서를 지내고 성산부원군에 봉해진 현덕수(玄德秀)의 8세손으로서 그의 후손들이 성주에 오래도록 세거하면서 연주현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성주로 하였다. 그 후 언제 관적지를 떠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충남 천원군 일원과 전남 영암군 신북면 용산리에 주된 세거지를 이루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관봉(冠峰) 현상벽(玄尙璧), 삼벽당(三碧堂) 현약호(玄若昊)를 들 수 있다.
현상벽은 영조 때 고명한 성리학자로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강문팔학사의 한사람으로 이간(李柬)과 함께 낙론에 속해 인물성동론을 주장하였고,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저서에 《관봉문답(冠峰問答)》·《관봉유고(冠峰遺稿)》 등을 남겼다.
현약호는 참봉 현징(玄徵)의 아들이며 당대의 석학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숙종조 기사환국 때 제주도에 유배된 송시열(宋時烈)을 위해 당액을 썼으며 학행으로 유명하였다. 저서에 《병계집(屛溪集)》이 전한다.
사환으로는 현덕량(玄德良)이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에 공을 세우고 안동현감을 지냈으며, 현덕승(玄德升)이 선조조에 증광문과에 급제, 지평을 지내다가 광해군의 난정으로 물러나 학문에 전념했다.
형씨(邢氏)는 중국의 성씨로 주공의 제4자를 형후에 봉함으로써 <邢>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형씨의 본관이 문헌에 반성(班城)·진주(晋州)외에 몇본이 전하고 있은 반성은 원래 진주의 속현이므로 다 같은 동원분파이고 나머지는 모두 진주형씨의 세거지를 말하는 것이어서 요즘에는 진주형씨로 일원화하고 있다.
시조 형옹은 원래 당나라의 학사로서 634년(당태종8, 고구려 영류왕17) 에 8학사의 한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서 귀화, 벼슬이 대광보국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으로 고려 태조 때 신호위 상호군을 지낸 형적(邢積), 역시 고려 태조조에 예빈경을 지내고 밀직사에 추증된 형순(邢順)등이 있었다고 하나 문헌이 실전되어 계대를 상고할수 없으므로 고려조에 문하시중을 지내고 비로서 진주의 반성에 정착 세거한 형방(邢昉)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본관은 방(昉)의 손자 공미(公美)가 고려 충렬왕조에 문하시중·이부상서 등을 지내고 정왜 도원수로 왜구를 격파, 1등공신에 오르고 진양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
형씨는 고려조에서 이부상서·정당문학 등을 지내고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부벽루운>이 전하는 형군소(邢君紹)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나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특수한 인물을 내지 못해 퇴조한 느낌이 든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형사보(邢士保)가 있다.
그는 중종 때 조광조가 혁신 정치를 단행하기 위해 한나라의 과거 제도인 현량방정과를 본따서 실시하던 현량과에 천거되어 문과에 급제, 성균관 전적·군수 등을 역임했다.
신평(新平)·보안(保安)·나주(羅州)등 호씨(扈氏)는 모두 동조 동원이다.
시조 호의(扈義:일명 元甫 시호 禧開)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堅萱)과의싸움에서 여러 군장을 거느리고 남하할 때 가담, 승전케 함으로써 개국공신에 책록,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태사에 증직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호철(扈哲)이 배천군에 봉함을 받아 배천으로 본관을 삼았다. 또 호철의 첫째 아우 호은열(扈殷悅)이 보안군에 둘째아우 호흥인(扈興仁)이 나주군에 봉해져서 각각 보안과 나주를 본관으로 삼음으로써 배천·보안·나주 3관으로 갈라졌다.
그 뒤 배천호씨는 17세손 호종국(扈從國)이 공민왕때 승록대부·정당문학·수문전 태학사·감수국사·상장군에 이어 대사도에 오른 뒤 개국공신으로 책록, 신평군에 봉해지고 신평을 식읍으로 하사 받음으로써 호종국을 중흥조로 삼고 신평으로 이관하였다. 그러나 이들 3관 호씨는 모두 동조 동원임을 확인하고 1956년에《병신대동보(丙申大同譜)》를 간행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황해도 배천군 태백산성에 , 중조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고랑포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사한다
전주호씨(全州扈氏)는 중국계의 귀화성씨이다.
시조 호준(扈浚)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낼 때 이여송장군의 부장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많은 전공을 세운 뒤 귀국을 단념, 귀화했다. 그는 명나라의 유신으로서 조선의 왕을 섬길 수 없다 하고 전주에 정착하여 여생을 마쳤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였다. 그의 후손 호중권(扈仲權)이 고종때 대호군을 지냈으며, 호영택(扈榮澤)이 군수를 지냈고, 호영욱(扈榮旭)은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호(胡)씨의 본관은 파능(巴陵)·아산(牙山) 등 7∼8본으로 전한다.
호씨(胡氏)의 본관이 문헌에 8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파릉(巴陵) 외에는 현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파릉호씨의 시조 호극기(胡克己: 자 禮復)는 송나라 때의 문정공(文定公) 호안국(胡安國)의 15세손인 이부상서 호사표(胡士表)의 아들이다. 그는 명나라 말엽에 한림학사로서 1643년(인조21) 답례사가 되어 우리 나라에 왔다가 이듬해에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하자 귀국하지 않고 가평군 대명연에 은거하다가 북청군 덕성면 중장에 초가를 지어 <치암우>라 이름짓고 여생을 보내니 효종이 그의 충성심을 높이 치하하고 그 지방의 조세로 녹을 삼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은 시조의 고향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파릉으로 하였다.
한편 송나라 복주 사람으로 상선을 타고 고려에 와서 귀화한 호종조(胡宗朝)가 예종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 보문각 대제를 지내고 인종 때 기거사인에 이르렀으며, 풍수의 대가로서 지압술에 능했다고 하는데 그의 후손이 현존하는지는 알 수 없다
홍(洪)씨는 이조에 정승 15명, 대사헌 7명, 공신 17명, 왕비 2명, 청백리 6명을 배출하여 조선 10대 벌족으로 뽑혔다. 문헌에는 10여본이 나와 있지만 현존하는 본은 남양(南陽)·풍산(豊山)·부계(缶溪)·홍주(洪州) 4본 뿐이다. 이중 단연 으뜸가는 본이 남양홍씨다. 그런데 남양홍씨 가운데는 전연 계통을 달리하는 두 집이 있다. 당홍(唐洪)과 사홍(士洪)이 바로 그 것. 당홍은 고려 초기의 인물인 홍은열(洪殷悅, 三重大匡太師, 그의 선조가 당나라로부터 문화 사절의 임무를 띄고 왔다고 함)을 시조로 하고 있는 반면, 사홍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인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고 있다.
시조 홍천하(洪天河)는 중국 강남 휘주 사람으로 당나라의 태학사였다. 그는 640년 고구려 제28대 영류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유학을 가르칠 학사의 파송을 요청하자 제일 만저 선발되어 우리나라에 입국, 평양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와 은수포 당관으로 옮겨 문화를 진흥시키니 왕은 그가 사는 곳을 당성이라 하고 이에 사적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 태사를 지낸 홍은열(洪殷悅)을 중시조 1세로 하고, 본관은 당성이 고려시대에 남양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남양으로 하였으며 같은 남양홍씨(南陽洪氏)인 홍선행(洪先幸)계와 구분하기 위해 <당홍(唐洪)>이라 통칭하고 있다.
당홍의 파계는 시조의 12대손에서 14개 파, 그 윗대에서 3개 파로 도합 17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 벼슬 열력이 뛰어나고 후손의 수가 많은 파는 아래와 같다.
남양군<주>파(南陽君<澍>派)
문정공<언박>파(文正公<彦博>派)
판중추공<언수>파(判中樞公<彦修>派)
익산군<운수>파(益山君<云遂>派)
예사공<복>파(禮史公< >派)
중랑공<후>파(中郞公<厚>派)
당홍(唐洪)은 조선조에서 상신 8명, 대제학2명, 왕비 1명, 호당 7명, 청백리 3명, 문과 급제자 206명, 그리고 공신 10여 명을 배출했으며 그중 종파인 남양군파가 주류를 이루어 상신 5명과 대제학2명, 왕비1명을 비롯하여 20여 명의 판서급을 배출, 열력이 단연 으뜸이다.
남양군 홍주의 7대손인 석벽(石壁) 홍춘경(洪春卿)은 천민(天民), 일민(逸民), 성민 (聖民)형제를 두었는데, 그중에서도 셋째 졸옹공파(拙翁公派)에서만 상신 4명이 나왔다.
백파인 율정공파(栗亭公派)에서 천민의 아들 문정공(文靖公) 홍서봉(洪瑞鳳)이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으며 그 자신과 아버지 천민, 조부 춘경이 모두 호당에 뽑혀 3대 호당으로 이름을 날렸다.
중파인 연기공파(燕岐公派)에서는 일민의 손자 해봉(海峰) 홍명원(洪命元)이 인조때 관찰사를 지내고 당대의 시문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또 명신으로서 <장덕군자>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의 다섯 아들인 처후(處厚), 처심(處深), 처윤(處尹), 처대(處大), 처구(處久)가 모두 현달했으며 특히 맏아들 처후의 자손이 가장 번창했다. 경종 때 노론의 선봉으로 세제의 대리청정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과 맞섰던 충간공(忠簡公) 홍계적(洪啓迪)은 처후의 증손이요,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나오는 <도둑이 들어왔다가 솥뚜껑에 먼지가 뿌옇게 쌓인 것을 보고 엽전꾸럼미를 두고 갔더니 방문을 붙여 되돌려 주었다.
>는 일화의 주인공 홍기섭(洪耆燮)은 계적의 증손이며, 헌종의 국구로 여영대장을 지낸 익헌공(翼獻公) 홍재룡(洪在龍)은 기섭의 아들이다.
졸옹공파에서는 졸옹 홍성민이 선조 때 대제학을 지냈고, 그의 손자 문간공(文簡公) 홍명하(洪命夏)는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 명하의 형 명구(命耉)의 아들인 충익공(忠翼公) 홍중보(洪重普)는 현종 때 우의정을 지냈으며 중보의 아들 효간공(孝簡公) 흥득기(洪得箕)는 효종의 부마가 되었고,손자인 충간공(忠簡公) 홍치중(洪致中) 영조때 영의정에 올랐다.
고종때 수구 강경파의 거두로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洪淳穆)은 치중의 7대손으로 아들 영식(英植)이 개화당 간부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3일만에 실패하고 대역죄인으로 처형되자 자결했으며, 영식의 형 홍만식(洪萬植)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음독 자결했다.
이밖의 남양군파 인물로는 중종반정 공신인 홍경림(洪景霖), 홍경주(洪景舟) 형제가 있다. 문정공파에서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안무공(安武公) 홍달손(洪達孫)이 나왔고, 판밀직공파에서는 청백리 홍계방(洪桂芳), 판중추공파(判中樞公派)에서는 태조의 부마 홍해(洪海)와 단종조의 정난공신 홍순로(洪純老)가 나왔다. 익산군파(益山君派)에서 성조조에 좌의정에 오른 충정공(忠貞公) 홍응(洪應)과 성종의 아버지로 추존된 덕종의 부마인 소양공(昭襄公) 홍상(洪常)등이 나왔다.
예사공파에서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운 홍효손(洪孝孫), 선조조의 호성공신 홍진(洪進), 그리고 헌종 때 대사헌을 지내고 유학자로 이름높은 문경공(文敬公) 홍직필(洪直弼)등이 나왔다.
중랑공파에서는 조선 개국공신 문경공(文景公) 홍길민(洪吉旼)과 그의 아들로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문량공(文良公) 홍여방(洪汝方) 등을 배출했다.
이밖에도 경력공파에서는 위평공(威平公) 홍윤성(洪允成)이 나왔다. 그는 문종즉위년에 문과에 급제,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이 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으로 우의정에 올랐으며 예종때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시조 홍선행(洪先幸)은 고려 고종때 인물로 금오위 별장을 지냈다. 그는 당성(지금의 남양)에 토착한 호족의 후예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이 실전되어 선대의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조상의 세거진인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남양으로 하였다.
남양에는 당나라의 귀화족인 홍천하(洪天河)계의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있어 이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홍선행계의 홍씨를 <토홍(土洪)>으로 통칭하고 있다. 토홍의 세계는 시조 홍선행의 9대손에서 12대손 사이의 5개 종파로 구별된다.
문희공<언필>파(文僖公<彦弼>派)
정효공<담>파(貞孝公<曇>派)
참의공<한>파(參議公<澣>派)
주부공<귀호>파(主溥公<貴湖>派)
대호군공<귀연>파(大護軍公<貴演>派)>
사홍은 조선조에서 상신 2명, 대제학1명, 청백리3명, 부마1명, 공신 3명, 그리고 문과급제자 123명을 배출했는데 각파별 열력은 다음과 같다.
문희공파에서는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은 승지 홍형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로 지도에 유배, 1506년 중종반정으로 석방,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 저작·지평 등을 지냈다. 사가독서한 후 우부승지가 되었고, 기묘사화로 투옥, 영의정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풀려나왔다. 1526년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여섯 번 대사헌을 역임, 이어 이조·호조·형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가 김안로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자 다시 호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 1544년 영의정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자 류관(柳灌)과 함께 원상이 되어 시정을 처결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고, 1545년(명종즉위) 위사공신2등으로 익성부원군에 봉해졌고, 1548년(명종3) 다시 좌의정·영의정에 올라 궤장을 하사받았다. 인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경헌공(景憲公) 홍섬(洪暹)은 영의정 홍언필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23) 생원이 되고,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홍양에 유배, 석방된 후 사찬, 부제학, 경기도 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1552년(명종7) 에 청백리에 녹선, 그후에 좌찬성, 이조판서,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했다. 이량(李樑)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삭직, 다시 편의금부사로 복직하여 양관 대제학, 예조판서룰 지내고, 선조 즉위 원상으로 서정을 처결, 우의정이 되었고,1571년 좌의정, 1573년에 궤장을 하사받고 영의정을 세 번에 걸쳐 중임, 1579년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홍섬의 어머니 여산송씨(礪山宋氏)는 중종 때의 영의정 송질(宋帙)의 딸이어서 외조부와 부자가 모두 영의정에 오른 집안으로 유명하다.
정효공파에서는 언광(彦光)의 아들인 정효공(貞孝公) 홍담(洪曇)이 훈구파의 거두로서 선조때 이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효자 정문이 세워졌다. 정효공의 손자 희(熹)의 아들 충목공(忠穆公) 홍진도(洪振道)와 충정공(忠靖公) 홍진문(洪振文) 형제는 인조의 외조부인 구사맹(具思孟)의 외손자요, 인조와는 이종간으로 둘다 인조때 반정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진도의 5대손 정간공 홍억(洪檍)은 정조 때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했다.
참의공파에서는 이조참의 홍한(洪瀚)이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화를 당했고, 그의 증순 문장공(文莊公) 홍가신(洪可臣)은 광해군 때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시문과 필법에도 뛰어났다. 가신의 손자 문간공(文簡公) 홍우원(洪宇遠)은 남인의 중진으로 숙종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홍우량(洪宇亮)은 효종때 경상도 수군절도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대호군공파에서는 장희공(莊僖公) 홍숙(洪淑)이 중종때 형조판서로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숙청에 간여한 후 좌찬성에 이르렀다. 그의 손자 홍려(洪礪)는 중종의 부마이고, 병자호란 때 척화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은 진서 홍이성의 아들이다. 1615년(광해군7)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2) 공주행재 정시문과에 장원, 사서가 되었고, 1635년에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 사신이 와서 굴욕적인 요청을 하므로 사신을 죽이자고 상소하였다. 또한 병자호란 때 최명길(崔鳴吉) 등이 화친을 주장하므로 극력 반대하다가 평양서윤으로 좌천되었다. 그후 척화신으로 몰려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와 함께 심양에 압송되어 1637년(인조15) 3월 15일에 순절하였다. 1653년(효종4)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1686년(숙종12) 에 이조판서에 가증되고,정려를 명했으며, 1757년(영조33)에 의리장과 부조묘를 명했으며, 청나라 태종은 그 충렬에 감복하여 삼한태두라는 비석을 건립하였다. 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장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이밖의 인물로는 실학자로 혁신적인 제도 개혁을 주장했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있다. 그는 목사 홍력의 아들이다. 당시 유학자들과는 달리 군국, 경제에 대한 학문을 연구하였고, 숙부를 따라 청나랑에 가 여러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경의, 성리, 역사, 풍속등에 대하여 토론 했으며, 천주당에 가서 서양문물을 견학하고 독일인 흠천감정 할레르슈타인, 부감 고가이슬과 면담, 관상대를 견학하고 천문학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귀국 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 1775년 음보로 선공감 감역이 되었다. 이어 세손익위사 시직, 감찰, 태인현감, 영주군수에 이르렀다. 종래의 음양오행설을 부정하고, 기화설을 주장한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의 자전설을 설파하고, 경제정책에 있어서 균전제, 부병제를 토대로 국민생활의 보장과 국방의 기반을 견고히 하며, 계급의 타파, 인재의 등용, 학제개혁, 관제개혁, 민권옹호 등 혁신적인 제도개혁을 주장했다. 천주교를 배척하고 주자학,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다.
음악가로 <봉선화>의 작곡가인 홍난파(洪蘭坡)가 있다.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를 마치고 동소교사가 되었다. 1918년 도교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업, 귀국후 <봉선화>를 작곡하였고, 1922년 연악회를 창설, 1925년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다. 한편 음악잡지《음악계(音樂界)》르 발간했으며, 그 동안 소설《처녀혼(處女魂)》·《향일초(向日草)》·《폭풍우 지난 뒤》 등을 발표, 문학적 재질도 보였다. 1927년 도교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고, 2년 뒤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교수를 거쳐 1931년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를 지내고 이해 도미, 셔우드음악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하다가 1933년 귀국,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6년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가 되어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서양음악을 보급했다. 작품으로는 <봉선화> <옛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등이 있다.
시조 홍좌(洪佐)는 고려조에 직장동정을 지냈다. 그의 선대는 한양에서 살다가 부계로 이주하여 세게했다고 하며,시중을 지낸 홍란(洪鸞)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문헌이 실전되어 중간 세계를 상고 할 수 없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부계로 하였으며 뒤에 부계가 의흥으로 개칭된 까닭에 의흥홍씨라고도 한다.
부계홍씨(缶溪洪氏)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8명, 대제학 1명, 호당2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홍귀달(洪貴達)과 그의 두 아들 언충(彦忠)·언국(彦國)형제를 들수 있다.
문광공(文匡公) 홍귀달은 1460년 강릉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464년 겸예문을 거쳐 봉교가 되었다. 1460년 설서로서 문무를 겸했으므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이조정랑에 승진, 1469년(예종1) 장령으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직제학, 동부승지, 도승지를 지내고 1481년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1483년 왕명으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정했다. 충청도 관찰사, 형조·이조의 참판을 거쳐 경주부윤, 대사성, 지중추부사 겸 대제학, 호조판서 등을 지내고,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좌참찬으로서 10여조에 달하는 왕의 난정을 들어 간하다가 좌천되었다. 1500년 왕명에 의해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역대명감(歷代明鑑)> 등을 편찬하고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 후 그의 손녀를 궁중에 들여 보내라는 왕명을 듣지 않아 형장을 맞고 경원으로 유배가던 도중 살해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성격이 강직하여 부정에는 끝까지 항거했다. 이조판서에 추증, 함창의 임호서원에 제향되었다.
우암(寓菴) 홍언충은 좌참찬 홍귀달의 아들이다. 1495년(연산군1) 증광문과 급제, 승정원 부정자를 거쳐 정자·자작·박사를 역임했다. 1498년 사가독서를 한 후 다음해 수찬이 되고,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3년 교리에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갑자사화로 문외출송되었다가 진안에 유배,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직강에 복직되고, 다시 사가독서를 했다. 예서를 잘 썼으며 문장이 뛰어나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등과 함께 사걸로 일컬어졌다. 상주의 근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아우 홍언국도 문장과 지조로써 사림의 존경을 받았고,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언국은 앞에서 말한 바와같이 연산군이 그의 딸의 미모를 탐내어 입궁을 강요했으나 거절,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시조 홍지경(洪之慶)은 고려 고종때 국학직학을 지냈으나 그의 선대는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할 수 없다. 그래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은 조상의 세거지가 풍산(豊山)이기 때문에 풍산으로 하였다.
풍산홍씨(豊山洪氏)는 조선조에서 왕비1명, 상신5명, 대제학3명, 공신1명, 장신3명, 문과 급제자 129명을 배출했는데 특히 헌종때의 세도가문으로 유명하다.
풍산홍씨를 중흥시킨 인물은 문경공(文敬公) 홍이상(洪履祥)이다. 그는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선조때 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대사헌에 이르렀다. 그의 여섯 아들도 모두 문과에 급제했으며, 여섯 아들에게서 11명의 손자를, 6대손에서는 140여명으로 자손이 번창, 풍산홍씨의 세력이 급속도로 신장되었다. 홍이상의 아들들은 모두 현달했으며 그중에서 넷째인 영(零)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다. 영의 아들 주원(柱元)은 선조의 부마가 되었고, 주원의 큰아들 만용(萬容)은 숙종때 예조판서, 만용의 손자 현보(鉉輔)는 영조 때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봉한(鳳漢)과 인한(麟漢)은 현보의 아들이다. 봉한(鳳漢)은 홍현보의 아들이다. 음보로 세마 등을 거쳐 1743년(영조17) 딸이 세자빈(사도세자의 비)으로 뽑힌 두 다음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이 되었다. 1745년 광주부윤에 특진, 1749년 세자가 대리청정케 되면서부터 누진하여 다음해 어영대장에 오르고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 제조를 지낸 뒤 1752년 동지경연사가 되고, 다음해 비변서 당상으로 <임진절목(臨津節目)>을 찬진했다. 1755년 구관당상·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 이어 좌참찬에 승진, 1761년 우의정에 발탁되고, 다시 좌의정을 거쳐 판돈령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그 후 영조의 정책에 순응하여 많은 업적을 이룩했으며 특히 당쟁의 폐해, 인재의 발탁등 시무 6조로 당면한 정책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고, 백골징포와 환곡의 작폐의 엄금, 은결의 재조사 등을 단행케 하여 국고의 충실고 백성 부담의 절감을 기하는 등 영조를 도와 조선 후기 문화 부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봉한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사도세자비로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다. 사도세자가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궁중 참변이 일어나면서 조정은 영조의 실덕을 책하는 <시파>와 세자의 실덕을 책하는 <벽파>로 갈리어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다. 이 무렵 홍봉한은 시파로서 세손(사도세자의 아들로 뒷날의 정조)의 보호에 힘썼고, 그의 아우 인한은 벽파에 가담하여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정조 즉위 직후에 정조를 해치려는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사사당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정조를 세손 때부터 보호해 온 사람이 홍국영(洪國榮)이다. 그는 주원의 둘째 아들인 만형(萬衡)의 5대손이며, 판돈령부사 홍낙춘의 아들이다. 1771년(영조48) 정시문과에 급제, 정자를 거쳐 실서가 되어 당시 사도제자를 죽이는 데 주동역할을 한 벽파들이 세손(정조)을 해치고자 수차 음모를 꾀하자 이를 막아 세손에게 깊은 신임을 얻었다. 이어 세손의 승명대리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 등을 탄핵, 1776년 정조가 즉위하는 데 많은 힘을 썼다. 이어 동부승지에 특진하여 정예병을 별도로 뽑아 숙위대장을 겸직하여 신변이 위험한 정조의 보호에 힘쓰고 다시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모든 상주와 결정이 그의 손을 거쳐 나가게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세도정권이 이룩되었고, 갖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아 정후겸과 비슷하다 하여 대후겸을 불렸다. 그가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로 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도승지 겸 숙위대장이 되어 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한편, 모든 정사가 그를 통하여 이뤄지게 함으로써 세도정치를 시작했지만 갖은 정치적 파란 끝에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풍산홍씨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홍양호(洪良浩)와 홍만선(洪萬選)을 꼽는다. 문헌공(文獻公) 홍양호는 당대에 뛰어난 학자요, 문장가이다. 그는 영조때 문과에 급제,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와서는 고증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또 일본에서 벚나무를 들여와 서울 우이동에 심어 경승지를 이루게 했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특히 <진체>와 <당체>를 잘 썼다.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은 예조참의 홍주국의 아들이다. 1666년(현종7) 진사시에 합격하고, 장악원정에 이르렀다. 행실이 근엄하고 당쟁에도 가담치 않아서 당시의 완인이라 일컬어졌다. 류형원(柳馨遠)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실용후생의 학풍을 일으켜 실학발전의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농예·의약·구황에 관한 저서 《산림경제(山林經濟)》는 실학사상 중요한 공적을 남겼고, 류중림(柳重臨), 서유구(徐有 )등 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밖의 인물로는 이상(履祥)의 셋째아들인 집의 후손 중 효안공(孝安公) 홍낙성(洪樂性)이 정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문간공(文簡公) 홍석주(洪奭周)가 순조 때 대제학·좌의정을 지냈다. 넷째아들 영(零)의 후손에서는 문헌공(文憲公) 홍낙순(洪樂純)이 정조때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냈다.
시조 홍규(洪規)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토평할 때 홍주에서 처음으로만나 견훤과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통합삼한 삼중대광 벽상 익찬공신으로 해풍부원군(해풍은 홍주의 옛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홍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홍주홍씨(洪州洪氏)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시조의 아들 홍유후(洪儒厚)는 태사를 지냈고, 손자 홍욱(洪旭)은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다. 욱의 손자 홍간(洪侃) 역시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고, 간의 손자 충숙공(忠肅公) 홍탁(洪濯)은 태사를 지냈다. 탁의 현손 홍위(洪僞)는 대제학을 지니고, 위의 5대손 홍우평(洪禹平)은 조선조에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우평의 아들 홍강(洪剛)은 관찰사를 지냈다. 학해(學海) 홍빈(洪濱)의 아들 홍석견(洪石堅)은 1520년(중종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홍락(洪珞)의 아들 홍찬서(洪纘緖)는 1629년 (인조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사를 지냈다.
화씨(化氏)는 중국계의 귀화성씨로 본관은 진양(晋陽)단본이다.
《진양화씨세보(晋陽化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화명신(化明臣)은 원래 중국 낭야 사람으로 본성은 화씨(花氏), 본명은 광신(光新)이며, 명나라의 개국공신이자 태조 때 사마대장군 영상서사를 지낸 충장공(忠莊公) 화운룡(花雲龍)의 6세손이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명나라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는 세가였는데, 시상이 맑고 절의가 굳은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낭야의 화촌대에 은거했다. 때마침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낭야가 함락되자 그는 나라의 장래를 군심하며 <나라의 장래가 위태롭게 되었는데 어찌 오랑캐의 치하에서 편안하게 있으면서 선영을 받드리요>하고 조선으로 건너와 경주에 정착하여 살았다.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기특히 여겨 <화(花)씨가 우리나라에 들오온 것은 향화(向化)의 의리라>하며 화씨(化氏)로 사성하여 도승지에 기용하고 경성군에 봉해졌다. 그러나그 후 약 백여년 사이의 세계가 실전되어 임진왜란 때 군공을 세우고, 영월에서 진주로 이주한 화섭(化燮)을 중조1세로 하고 본관을 진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報)》에는 <화씨의 본관이 복룡(伏龍)·여황(餘 ) 2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나주의 지역명으로서 사실상의 나주화씨 단본>이라고 되어 있는데 나주화씨가 진양화씨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진양화씨의 오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황(黃)씨의 본관은 163본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약 20본 정도이다. 그들 여러 관향 가운데 창원(昌原), 평해(平海), 장수(長水)의 3본에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씨의 원시조는 중국 후한(後漢)의 벼슬아치였다는 황락(黃洛)으로 전해온다. 그는 한광무제(漢光武帝) 건무 4년(신라 유리왕 5년)에 구대림(丘大林) 장군(평해 구씨 시조)과 함께 사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평해(平海)에 표착하여 그 곳에서 자리잡고 살며 황장군(黃將軍)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나라 황씨의 시원이다. 지금도 평해(경북 울진군 평해면) 월송(越松) 지방에는 황장군 묘가 전하고 있으며, 구(丘)장군이 살았다는 곳은 구미진(丘尾津)이라고 불리고 있다.
황씨는 주로 고려 말엽에서 조선전반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조선시대에 정승 3명, 대제학 2명을 비롯하여 모두 171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특히 장수황씨가 부자(父子) 영의정과 2명의 대제학을 내어 단연 빼어나지만 문과 급제자 수가 많기로는 창원황씨가 으뜸이다.
시조 황사청(黃士淸)은 조선 선조 때 인물로는 학자였다. 그는 고향인 경주에서 어릴 때 임진왜란을 피해 함경도 지방으로 가던 중 가족과 헤어져 경기도 양주군 산내면에 정착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 선계를 알 수가 없어 그를 시조로 하고 그의 고향인 〈慶州〉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후손 7세 황치홍(黃致弘)은 1890년(고종27) 절충장군 행용양위 부호군을 역임하였고, 8세 황기석(黃基錫)은 1907년 중추원 의관, 궁내부 주사 등을 지내고 서당을 세워 후학을 위하여 면학에 전념하였으나 정미의병으로 인해 서당은 파손되었다. 그 후 9세 황해철(黃海哲)이 잃었던 선계와 본관을 찾기 위해 1928년 경북 울진 월송에 가서 문의하던 중 경남 양산에 거주하는 황우찬(黃宇贊)이 소장한 <병신보>에서 황사청이 평해황씨 시조 온인(溫仁)의 9세손 란(鸞)의 5세손 황진운(黃進雲)의 둘째아들임이 밝혀졌고, 영덕군 창수면 황장구의 족보에도 똑같이 실려 있어 선계가 평해황씨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근 4백년간을 〈慶州〉를 본관으로 하여 족보를 편찬하였으므로 평해로 복원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평해황씨의 분적종으로 하여 황사청을 시조로 하고 세계를 잇기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경기도 신북면 금동리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15일에 향사한다.
시조 황언필(黃彦弼)은 고려 경종, 목종, 현종 3조를 섬겨 벼슬이 삼중대광 도첨의정승에 오르고 덕풍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그 후 문헌이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고려 의종때의 인물로 첨의중찬 수문전 태학사를 지낸 황광적(黃光迪)을 1세조로 하고 시조가 사적받은 덕풍이 덕산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덕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덕산황씨(德山黃氏)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린(黃璘), 황위(黃瑋), 황필(黃珌) 3형제를 꼽을 수 있다. 황린은 성종 때 문과에 급제, 합천군수, 교리, 승지, 상주목사 등을 지냈으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고, 정붕(鄭鵬), 김일손(金馹孫) 등과 도의로 사귀었다. 매정(梅亭) 황위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때 문과에 급제, 동래부사, 현감, 교리 등을 거쳐 승지를 지냈으며 상정(橡亭) 황필은 성종때 문과에 급제, 정언, 교리 등을 지냈다.
시조 황자신(黃自新)은 고려조에서 대장군을 지냈으며, 그의 현손 황효원(黃孝源)은 정자 홍사간의 아들이다. 444년(세종26) 문과에 장원, 예빈시 주부·예조좌랑·좌헌납· 검상·사인을 역임하고 1455년(세조1) 사복시윤으로서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 이 되고 이조참의에 특진했다. 1457년 공조참판으로서 성절 겸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 에 다녀온 뒤 상산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충청도 관찰사를 역임, 1459년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듬해 한성부윤에 올랐다. 두 번 관찰사를 지 내면서 유능하다는 평이 있었다. 그래서 후손들은 상산이 상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상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그러나 <전고대방(典故大方)>의 <만성시조편> 및 <황씨소원록>에 의하면 상주황씨(尙州黃氏)의 시조 황석주(黃石柱)는 창원황씨(昌原黃氏) 회산군파(檜山君派)의 시조 황석기(黃石奇)의 아우이고, 황효원은 석주의 6세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상주황씨는 창원황씨의 분적종이고 자신(自新)은 석주의 손자가 되는 셈이나 사실 여부는 상고할 수 없다. 상주황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3명, 청백리1명, 공신2명, 장신2명을 배출했다. 황사간(黃士幹)은 태종때 문과에 급제, 정자를 지냈고, 그의 아들 양평공(襄平公)황효원(黃孝源)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좌찬성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세조때좌익공신, 성종 때 좌리공신에 올랐다. 동산(東山) 황우한(黃佑漢)은 좌찬성 황효원의 5대손이며 이조참판에 추증된 홍세근의 아들이다. 생원으로서 1574년(선조7) 문과에 급제, 1580년 헌납이 되고, 1589년 좌승지를 거쳐 1594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 관찰사, 1596년 한성부윤이 되었다. 이듬해 개성부유수, 1599년 부제학이 되고, 이어 지중추부사를 지낸 뒤 1601년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1605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병조참판·사옹원제조 등을 지낸 뒤 1606년 대사헌으로 죽었다. 황징(黃徵)은 황우상의 손자로 1662년(현종3) 생원시에 합격하고, 1669년(현종10) 무과에 급제, 선전관, 비변사 낭관, 호조정랑 등을 지내고 훈련원 부정 겸 사복시 내승을 거쳐 어영대장에 이르렀다. 부호군 겸 내금위장 태복내승으로 재직 중, 연로한 부친이 있는 곳 가까이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뜻을 임금이 알고 충주영장에 임명하여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1682년(숙종8) 허새(許璽)의 의옥사건 때와 인현왕후의 복위 때 두 차례에 걸쳐 유배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소명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시조 황세득(黃世得)은 창원황씨(昌原黃氏) 회산군파(檜山君派)의 시조 황석기(黃石奇)의 아우이며, 문헌에 상주황씨(尙州黃氏) 시조로 나타나 있는 황석주(黃石柱)의 17세손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주황씨(星州黃氏)는 창원황씨 회산군파와 동원이며 상주황씨의 분적종으로 보인다.
시조 황세득은 직산 출신으로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장흥부사가 되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선봉이 되어 벽파정 고금도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도 이순신 함대의 선봉으로 출전하여 많은 적을 무찌르고 이듬해 전사,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황박(黃珀) 역시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고,1621년(광해군13) 명나라 사신이 왔다가 귀국할 때 마침 후금이 심영, 요양을 함락하여 육로가 막히자 자원하여 해로로 명나라 등주까지 그들을 전송하고 돌아왔다. 1634년(인조12) 의주부윤을 거쳐 뒤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고 노령으로 퇴관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 휘하 군대에 종군, 용인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얼굴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숙종때 그 부자에 대한 정문이 고향에 세워지고 공조판사에 추증되었다.역시 광해군때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고, 의주부윤·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낸 뒤 노령으로 퇴관했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鄭世規) 휘하에 종군, 용인에서 얼굴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시조의 묘소는 충남 아산군 탕정면 용두리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향사한다.
시조 황민보(黃旻甫)는 고려조에 중윤을 지냈다. 그의 선대에서 장수황씨(長水黃氏)으로부터 분적했다고 하지만 문헌이 실전되어 어느 연대에 어느 조상이 우주(紆州)로 사적 되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우주황씨(紆州黃氏)를 중흥시킨 인물은 시조의 10세손인 문숙공(文肅公) 황거중(黃居中)이다. 그는 고려말 우왕 때 이성계(李成桂)가 남원 운봉으로 쳐들어 온 왜구 아기바투를 칠 때 종사관으로 참전, 공을 세운 것이 인연이 되어 조선 개국 후에 태조가 그를 정당문학에 발탁했다. 평소 유학에 심취했던 그는 사찰의 난립과 각종 불교행사의 폐단, 불교도의 타락을 바로잡기 위한 건의를 했다. 경학에 뛰어난 젊은 선비들을 뽑아지방에 배치하여 백성들을 교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써 조선초기 배불숭유를 국책으로 삼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공으로 개국원종공신에 오르고 공조전서, 호조전서 등을 역임했다. 또 그의 아들 기(圻), 육(陸), 균(均), 견(堅) 4형제도 모두 현달하여 번성한 까닭으로 그를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우주황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3명밖에 내지 못했지만 그 중 상신 1명을 배출하여 황씨 중에서는 장수황씨(長水黃氏) 다음으로 열력이 빼어나다.
황헌(黃憲)은 현감 윤조(胤祖)의 아들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대사간이 되어 권신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여 사사케 했다.
명종때 위사공신으로 좌의정이 되었으나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인 진복창(陳復昌)의 탄핵을 받고 사직되었다.
이밖의 인물로는 죽봉(竹峰) 황박(黃璞)이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등과 함께 웅치에서 적을 대파한 후 권율(權慄)과 함께 이현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고향에 정문이 세워지고, 금산에 충절비가 세워졌다.
시조 황경(黃瓊)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사위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에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명종 때 전중감으로 권신 이의방(李義方)이 모해하려 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수로 돌아왔다가 남원으로 이주하여 세거한 황공유(黃公有), 태학생으로 학문이 뛰어나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에 기록된 일재(逸齋) 황감평(黃鑑平)등이 선대에 있었으나 계대가 불가능하므로 이조참의에 증직된 황석부(黃石富)를 1세조로 하고 선대의 요람지요 세거지인 장수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장수황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40명, 상신2명, 대제학2명, 호당2명, 청백리 1명, 공신6명을 배출하였으며 조선 4대 명상의 한사람으로 꼽히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정승을 낳아 더욱 유명하다. 그는 판강릉부사 황군서의 아들이다. 고려말 1389년(창왕1) 문과에 급제, 성균관 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은거했으나 조선 태조의 간청으로 1394년 성균관 학관으로 세자우정자를 겸임, 여러 관직을 거쳐 1404년(태종4) 우사간대부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에 올랐으며,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등 왕의 처족이 횡포를 부리자 이를 제거했고, 형조, 병조,예조, 이조, 호조의 판서를 역임, 1416년(태종16) 이조판서로서 세자 양녕대군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공조판서로 전임되었다. 이어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나 1418년 세자가 폐출되고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이 되어 교하로 유배, 이어 남원에 위배되었다. 1422년(세종4) 풀려나와 1427년 좌의정에 오르고 세자사부를 겸했다.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듬해 복즉, 영의정에 올라 이후 1449년 치사할 때까지 18년간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소생의 천역면제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겨 세조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왕을 보좌했다. 그는 정승의 자리에 24년, 영의정에만 18년 동안 있으면서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청렴하여 청백리에도 녹선 되었다. 시조 몇 수가 전하며 인품이 원만하고 생활이 청렴한 명상으로 후세의 추앙을 받고 있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 파주의 방촌영당, 상주의 옥동서원,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방촌집( 村集)》이 있다.
그의 큰아들 호안공(胡安公) 황치신(黃致身)은 세종때 호조판서, 단종 때 중추원사, 세조 때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셋째아들 열성공(烈成公) 황수신(黃守身)은 세조 원년에 좌익공신에 올라 좌참찬·좌찬성을 지내고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문정공(文貞公) 황정욱(黃廷彧)은 희(喜)의 후손으로 부원군 열(悅)의 아들이다. 그는 1558년(명종13)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고, 당시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부친이 이인임(李仁任)이라고 명나라에 잘못 기재된 것을 여러 차례 진정하다가 승지에 올라 종계변무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정정시켰다. 이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에 봉해지고 예조를 거쳐 병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가 되어 왕자 순화군 보를 배종하여 강원도에 들어가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8도에 돌렸으며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모반자 국경인(國景仁)에 의해 임해군·순화군 두왕자와 함께 잡혀 왜장 가토로부터 선조에 항복권유를 쓰라는 강압을 받고 거부했으나 두 왕자와 그의 손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고 아들 혁이 대신 썼다. 그는 선조때 광국공신에 오르고 대제학이 되었다. 이에 그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 거짓임을 밝힌 또 한 장의 글을 썼으나 이를 입수한 제찰사가 묵살함으로써 석방된 뒤에 동인들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1597년 풀려났고, 죽은 뒤에 신원되었다. 문장·시·서예에 능했으며, 저서에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또 한 사람의 대제학인 문경공(文景公) 황경원(黃景源)은 정욱의 8대손이며 기(璣)의 아들이다. 그는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영조 때 문과에 급제,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삼례(예기·주례·의예)에 정통하고 특히 고문에 밝았으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황맹헌(黃孟獻)·황여헌(黃汝獻)·황효헌(黃孝獻) 3형제도 유명하다. 그들은 부사 관(瓘)의 아들로 맏이인 소양공(昭襄公) 황맹헌은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에 오르고 벼슬은 한성판윤에 이르렀다. 둘째인 유촌(柳村) 황여헌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전적을 지냈다. 문장·서예에도 뛰어나서 <죽지사(竹枝詞)>라는 그의 시문은 명나라에서까지 격찬을 받았다. 셋째인 축옹(蓄翁) 황효헌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 호당에 뽑히고 이조참판·안동부사 등을 지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이행(李荇)등과 함께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였다.
이밖에 선조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내침이 있을 것을 예고했던 우송당(友松堂) 황윤길(黃允吉), 임진왜란 때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많은 전공을 세우고 진주성 방어전에서 전사한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숙종때 학자로서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한 황엽(黃曄), 한말의 야사를 엮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 황현(黃玹)등이 유명하다.
시조 황을구(黃乙耉)의 선계는 중국 노나라 사람인 황보(黃輔)이다. 보의 아들 황석기(黃石奇: 시호 恭僖)가 고려 충혜왕비 덕녕공주를 배종하고 고려와서 회산부원군(회산은 창원의 옛이름)에 봉해져서 창원황씨(昌原黃氏) 공희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황을구는 석기의 손자 윤서(允瑞)의 둘째아들로서 고려 공민왕 때 출생, 조선 태종을 보좌하여 조영규(趙英珪)등과 같이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훈에 책록되고 제안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창원황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제안(齊安)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그러나 제안은 황주의 옛이름으로서 같은 지역에 관적한 황주황씨가 있는데 이 두 집안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 까닭은 이 두 집안의 손록에 같은 인물이 두군데에 똑같이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국조방목(國朝榜目)》에 황주황씨의 손록에 실려있는 인물의 본관이 대부분 제안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제안과 황주가 같은 혈족이면서 도전거를 찾지 못해 동원여부를 가리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시조의 묘소는 황해도 황주군 제안면 성북리에 있고, 매년 음력 9월 18일에 향사하였는데 분단 이후 내왕이 막혀 근황을 알 수 없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인조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을 지낸 황윤후(黃胤後), 현종 때 문과에급제, 현감을 지낸 황재인(黃載仁)이 있다.
이밖에 황기홍(黃起鴻)과 황일룡(黃一龍)이 철종과 고종 때 각각 문과에 급제하였다.
창원황씨(昌原黃氏)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3파가 있다.
이른바 <토황(土黃)>이라하여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黃忠俊)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황신(黃信)을 1세조로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와 공희공(恭僖公) 황석기(黃石奇)를 시조로 하고 <당황(唐黃)>이라 일컬어지는 공희공파(恭僖公派), 그리고 고려조에서 호장을 지낸 황양충(黃亮沖)을 시조로 하는 호장공파(戶長公派)가 그것이다. 이들 3파간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따라서 족보도 따로따로 편찬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원나라에서 귀화한 것으로 알려진 까닭에 <당황>이라 불리는 공희공파의 시조 황석기가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서 고려 공민왕때 노국공주를 배행하고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져 왔었으나 이미 그보다 20년 전에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적의 난을 토평하는 등 크게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어 원래 원나라 사람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창원황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78명, 공신 2명, 상신1명을 3파에서 고루 배출했다. 시중공파에서는 황재(黃梓), 황인검(黃仁儉), 황인점(黃仁點) 3부자가 유명하다.
황재는 숙종때 문과에 급제, 영조 때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뒤에 다시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인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을 편술했다. 그의 큰아들 정효공(貞孝公) 황인검은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 황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하여 창성위가 되었다.
호장공파에서는 황사우(黃士祐), 황응규(黃應奎), 황섬(黃暹)의 3대가 두드러진다.
용헌 황사우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우찬성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송간(松澗) 황응규는 우찬성 황사우의 아들이며, 주세붕(周世鵬),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초서를 잘 썼으며 543년(중종38)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차 과거에 응시했으나 실패, 후에 성균관의 천거로 전한사별제가 도어 장흥고 직장을 지낸 뒤 1569년(선조2) 52세로 알성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1588년 고향에 은거,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많은 양곡을 군량으로 바쳐 그 공으로 절충장군에 오르고, 1594년 동지돈령부사가 되었으며 향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장정·군량 등을 모집하여 출전을 준비중 병사했다.
응규의 아들 정익공(貞翼公) 황섬은 정탁(鄭琢)의 문인이며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처남으로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윤사가 되어 많은 공을 세우고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계축옥사 이후 낙향, 학문에만 전념했다.
공희공파에서는 시조 석기의 아들 공정공(恭靖公) 황상(黃裳)은 충혜왕 때 호군이 되고 공민왕 초에 민직부사에 올라 추충익찬공신의 호를 받았다. 1354년(공민왕3) 중국에 가서 장사성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고 지추밀원사가 되었으며 1356년 기철(奇轍)일파를 숙청하는데 공을 세워 찬추밀원사에 올라 1등공신이 되었다.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호종, 교조강릉도 도만호가 되어 안우(安祐)와 함께 서울을 수복, 찬성사 상의에 호성수복 1등공신이 되고, 지문하성사에 승진, 추충분의익찬공신이 되었다. 이어 문하찬성사를 지내다 회성부원군에 봉해졌고, 1364년 동북면 도순토사로 덕흥군 혜를 왕으로 추대하고 원나라에서 침입해온 최유(崔濡)를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무찔렀다. 이듬해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원나라로부터 봉훈대부 경정감승을 받고 다시 문하찬성사가 되어 추충분의보리익찬공신이 되었고, 1377년(우왕3) 의창군으로 서강도원수가 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무예와 용맹이 탁월했으며 특히 궁술로 이름을 떨쳤다. 이어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으며 명궁으로도 이름이 높아 원나라 순제도 그의 궁술을 관람했다고 한다.
석기의 현손인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은 성종 때 무과에 급제, 중종때 평안·함경도 병마절도사로서 변방 야인의 반란을 토평하는 등 많은 무공을 세우고 공조찬서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황기(黃琦)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권신 김안로(金安老)에게 아부하지 않아 길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부자가 함께 당대의 명신이었다.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은 정랑 황대수의 아들이며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21) 알성문과에 장원, 여러 관직을 거쳐 1589년 정언으로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관해 대신들의 직언하지 않음을 논박하다가 고산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 전저의 문제에 관련,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때 기용, 지평으로 명나라 송경략을 접반하고 세자(광해군)를 따라 남하 제찰사의 종사관을 지냈다. 1596년 절충장군으로서 적영에 다녀온 뒤 통신사가 되어 명사를 따라 일본에 왕래, 화의가 결렬된 뒤 조정으로 하여금 명나라의 내원을 청하게 하여 가선대부에 올랐고, 그 뒤에 위유사·찬획사·전라도 관찰사 등으로 왜란에 공이 많아 1597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이듬해 공조·호조의 참판, 이어 한성부 우윤·대사간을 역임했다.
1601년 대사헌으로 문경호(文景虎)에게 지탄받는 스승 성혼(成渾)을 변호하다가 파면되었다. 1602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간 사이에 또 앞서의 사건으로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에게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공훈으로 복관이 결정되었으나 상신 류영경(柳永慶)이 시행하지 않아 낙향했다. 1610년(광해군2) 호조참판으로 진주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공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를 지내고, 임진왜란때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 2 등에 회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613년 계축옥사에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은 죄수 정협(鄭浹)의 무고로 웅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인조초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공주의 창강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추포집(秋浦集)>,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이 있다. 뒤에 호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위성공신으로 회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재정에 밝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황신의 후손에서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의 암살 계획을 추진했던 충렬공(忠烈公) 황일호(黃一晧), 정조 때 학자이며 서예가로 이름났던 황운조(黃運祚)등이 나왔다.
우리나라 황씨(黃氏)의 종파라 일컬어지는 평해황씨(平海黃氏)는 서기 28년(신라 유리왕5) 중국 후한의 학사로 구대림(丘大林)장군과 함께 교직국에 시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평해에 표착, 그곳에 자리잡고 살았다는 황락(黃洛)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갑고·을고·병고가 각기 기성군(기성은 평해의 옛이름)·장수군·창원백에 봉해져서 각각 평해황씨(平海黃氏), 장수황씨(長水黃氏), 창원황씨(昌原黃氏)로 갈라진 후 다시 세계가 실전되어 갑고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금오위장군·태자검교를 지낸 황온인(黃溫仁)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평해황씨(平海黃氏)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21명, 공신 1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희석(黃希碩), 황현(黃鉉), 황여일(黃汝一), 황윤석(黃胤錫) 등을 들 수 있다.
양무공(襄武公) 황희석은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회군한 후 조선 개국에 참여, 개국공신으로 평해군에 봉해졌다. 황현은 공조전서 유정(有定)의 아들로서 태조 때 문과에 태종때 문과중시에 각각 급제, 세종때 대사성·인수부윤 등을 지낸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매월헌(梅月軒) 황여일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權慄)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공을 세우고 참판에 이르렀다.
이재(李齋) 황윤석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이 익찬에 이르렀다. 그는 영조∼정조대의 실학자요 언어학자이다.
이 밖의 인물로는 명종때 장원서 별좌로 시폐 4조를 상소하고 진보현감이 되어 민심을 수습한 황응청(黃應淸),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중종때 문과에 급제, 성주목사를 지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인조때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함락될 때 중군으로 전사, 병조참의에 추증된 황선신(黃善身)등이 있다.
시조 황공(黃功: 자 聖報)은 원래 중국 항주 사람이다.
그는 명나라 말엽에 중도유수로 있다가 당시 북쪽의 오랑캐 누르하치가 후금국을 세워 명나라를 자주 침범하자 양병 정책을 세우고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국권의 회복을 꾀했으나 1644년에 끝내 명나라가 멸망하자 의병을 일으켜 청병과 싸우다 포로가 되어 심양에 압송, 계류되었다. 때마침 조선에서 병자호란 때 볼모로와 있던 봉림대군과 만나게 되어 서로의 뜻이 같음을 알고 명나라의 재건을 위해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1645년 봉림대군이 볼모에서 풀려나 귀국할 때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여덟 사람과 함께 심양을 탈출, 봉림대군을 배종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들을 세칭 9의사라 일컫는다.
봉림대군은 이들 9의사에게 자신의 본저인 어의궁과 조양루 남장 밖(지금의 종로구 어의동·연지동·인의동 일대)에 거쳐할 곳과 전답 및 노비까지 마련해 주었다. 그 후 계속해서 북벌계획을 논의하다가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본격적으로 북벌정책을 진행하였으나 1659년 효종의 승하로 큰 뜻은 무너지고 그도 조국 광복의 한을 풀지 못한 채 만리 이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은 시조의 고향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항주로 하였다.
시조 황응성은 조선 중기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의정부 사록이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서행할 때 호종한 후 영유현령을 거쳐 평안도 병마평사가 되어 군량수송 등에 많은 공을 세웠다. 그 후 보령현감으로 있을 때 이몽학(李夢鶴)이난을 일으키자 최호(崔湖)·홍가신(洪可臣)등과 함께 이를 토평하고 정난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그의 선계는 확실하지 않으나 누대를 황주에 세거한 사족의 후예로 황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병자호란때 구성부사로 철옹성을 지키고, 난이 끝난 뒤 의주부윤을 지낸 황윤후(黃胤後), 정조조에 휘릉참봉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은중경(恩重經)》및《두율(杜律)》을 하사받았으며,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황인기(黃仁紀)를 들 수 있다. 1613년(광해군5)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 1625년(인조3) 순릉참봉으로 별시문과에급제, 1627년 정묘호란때 가동과 마을 장정 수십명을 이끌고 참전코자 하다가 화의 소식을 듣고 귀가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636년(인조14) 구성부사가 되어 부원수의 종사관을 겸임, 이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공을 세워 의주부윤이 되었다.
《회덕황씨세보(懷德黃氏世譜)》에 의하면 시조 황락(黃洛)은 한나라 유신으로 교지국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신라에 표착하여 회덕에서 살았으므로 회덕에 관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서 지문성부사를 거쳐 호부상서에 이르고 좌명공신으로 회천군에 봉해진 황윤보(黃允寶)를 1세조로 하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충남 대덕군 동면 마산리 관동에 있다. 회덕황씨는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자후(黃子厚)·황종해(黃宗海)·황세정(黃世楨) 등을 들 수 있다. 혜의공(惠懿公) 황자후는 음보로 인녕부윤을 거쳐 1413년(태종13) 형조좌참의가 되어 호패법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였으나, 그후 소합유의 진상에 부정이 있었고, 또 환상미의 부정 처분으로 회덕·진주 등지에 유배되기도 했다. 이듬해 호조참의로 종마관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여러 관직을 거쳐 1421년(세종3) 좌군총제가 되어 정조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한성부윤·중추원부사를 역임, 1425년(세종7) 첨구전문업의 설치를 건의했으며, 중추원사에 올라 전의감 제조를 겸임했다.
황종해는 황덕휴의 아들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11년(광해군3)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정인홍(鄭仁弘)의 전횡을 논박했고, 1613년(광해군5)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 1618년(광해군10) 연산 김장생(金長生)을 찾아가서 예학을 강의 받았다 1628년(인조6)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32년 최명길(崔鳴吉)의 추천으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저서에 《후천집(朽淺集)》이 있다.
그의 아들 황유(黃裕)는 태종의 부마로 회천위에 봉해졌다. 후천(朽淺) 황종해는 정구(鄭逑)의 문인이며, 덕휴(德休)의 아들로 광해군 때 유생들과 함꼐 상소하여 정인홍(鄭仁弘)의 전횡을 논박했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학을 배웠다. 인조반정 후에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제곡(齊谷) 황세정은 송준길(宋浚吉)의 수제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고, 또 송시열(宋時烈)에게도 사사했다 숙종 원년에 제2차 예송이 일어나 송시열과 이미 죽은 송준길이 화를 입자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윤휴일파의 죄상을 규탄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다. 경신대출척 때 풀려나와 연풍현감이 되었으나 송시열이 사사되자 이에 비분, 벼슬을 떠나 학문에 전념했다.
뒤에 김창집(金昌集)의천거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후(后)씨의 본관은 기인(器寅)인데 본디 중국의 성씨이다.
남궁씨는 고조선 시대 중국에서 동래한 성씨로 본관은 함열(咸悅)단본이다.
<함열남궁씨족보(咸悅南宮氏族譜)>에 의하면 B. C 1122년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멸망시키자,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건국하고 사도 벼슬을 지낸 남궁수(南宮脩)가 우리나라 최초의 남궁씨라고 한다.
그래서 그를 원조로 하고, 고려 성종조의 대장군 남궁원청을 시조로 하였다고 한다. 시조 남궁원청은 고려 경종 초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다녀왔고, 991년(성종10) 대장군으로 여진족을 백두산 이북으로 몰아냈다 그 공으로 문하시중평장사에 오르고 감물아현(甘勿阿縣)을 식읍으로 받았다. 감물아현은 지금의 익산군 함열(咸悅)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함열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조 이하의 세계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 남궁득희(南宮得禧)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고려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남궁신(南宮信) 남궁민(南宮敏)을 들 수 있다. 신은 1세조 득희의 아들로, 충혜왕조에 호군을 지냈다. 그는 조적의 난 때 왕을 보좌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고, 1343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같이 압송되어 도주로에 유배되었다. 민은 판서 경(璟)의 아들로 충숙왕 때 문과에 장원, 충목왕조에 경상도에 파견되어 안렴존무사를 겸했고, 뒤에 정치관이었다.
남궁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했는데, 그 중 남궁찬(南宮璨), 남궁침, 남궁옥(南宮鈺) 등이 걸출한 인물이다.
남궁찬(南宮璨)은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하고, 한림원의 여러 별슬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나, 1495년 연산군의 난정을을 개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무오사화를 때 화를 입은 김종직(金宗直)등 제현을 신구하려는 상소로 극간했다가 용안으로 유배되고, 이어 1503년 그 곳에서 죽었다. 중종반정 후 신원되었고, 이조판서 겸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숙(淑)은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 한성부 우윤에 이르렀다.
남궁침은 찬의 손자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명종 초에 춘추관 기사관으로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한성부 판윤 부총관 등을 역임했다.
남궁옥은 관찰사 율의 아들로 효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은 시정에 이르렀다 문장과 글씨, 그림에 뛰어났으며 속필로 유명했다. 근세 인물로는 시인 남궁벽,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남궁억이 유명하다. 남궁벽(南宮璧)은 1920년대에 인도주의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당시 천재 시인이라 불렀으나 28세로 요절했다.
남궁억(南宮檍)은 한말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자는 치만(致萬). 1883년(고종 20) 영어학교에서 수학, 1886년 내부주사가 되고 이들해 전권대사인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원으로 상해에 다녀와서 칠곡부사를 지냈다. 그 후 홍화학교에서 영문법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을 겸임했다. 1898년 황성신문사 사장, 1905년성주목사, 다음해 양양 군수가 되어 현산학교를 설립했다. 1907년대한협회장, 1908년 <교육월보(敎育月報)>를 간행하는 한편 관동학회(關東學會)장이 되었다. 1910년 배화학당 교사로 <가정교육(家庭敎育)> <신편언문체법(新編諺文體法)> 등의 교과서를 지었다.
1918년 홍천의 우곡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 무궁화 묘포를 만들었다. 1933년 무궁화와 역사사건으로 투옥, 1935년 병으로 석방되었다. 저서로는 <동사략(東史略)> <조선(造船)이야기> 등이 있다.
동방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본관은 진주(晉州) 단본이다. 동방씨는 중국 상고시대 복희씨의 후손으로 복희씨가 동방의 진땅에서 나왔기 때문에 동방을 성으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 왔는지 알 수 없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1792년(정조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을 지냈다는 동방숙(東方淑)의 본관 이 진주로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와 본관을 진주로 하게 된 연유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총 60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50가구가 평북 정주·박천지방에 있었으며,그 외에 평남에 4가구, 강원도 회양에 1가구, 경북 대구에 1가구, 경기도 장단에 3가구, 파주에 1가구가 있었다.
시조 독고공순(獨孤公舜)은 원래 중국 하남(河南)출신으로 고려 중엽에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 명종 때 시중을 지냈다. 확실한 세수는 알 수 없으나 연조로 보아 그의 손자로 추정되는 향이 원종 때 원나라에 가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종하고 돌아 와서 태사가 되고 남원군에 봉해져 본관을 남원(南原)으로 하였다.
그러나 세계가 실전되어 세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조선 중종 때 사직(司直)을 지낸 독고신(獨孤信)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세조의 묘소는 평북 의주군 고령삭면 천마동에 있었다.
독고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입(立), 성(成) 형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독고신의 증손으로 입(立)은 벼슬은 군자감 판관에 이르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의주남성(南城)을 지키던 중 적의 야습을 만나 아버지 행(行), 동생, 아들 수와 함께 전사했다. 호조참의에 추증되고 의주의 구암사에 제향되었으며, 성(成)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웠고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김경복과 함께 의주의 문묘를 수호했는데 성이 함락되어 부형이 모두 살해되자 적진에 돌입, 수십명을 죽이고 전사했다.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의주 구암사에 제향되었다.
사공씨는 중국계 귀화 성씨로 그 근본은 진나라때 사공이라는 벼슬을 하던 가신이 벼슬 이름을 성으로 삼아 사공씨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공씨는 효령(孝令) 단본으로 시조는 사공도(史空圖)이다.
그는 본래 중국 산서성 하중우향 사람으로 당나라 희종 때 예부낭중을 지내고, 신라 효공왕 때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귀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숙왕 때 판의시사를 지내고 효령군에 봉해진 사공중상(史空仲常)을 1세조로 하고 효령에 관적하였다.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중상(中傷)의 아들 사공실(史空實)이 고려 말에 대호군을 지냈고, 손자 사공민(史空敏)이 문하시중을 지냈다. 조선조에서는 현종 때 정암(定菴) 사공조(史空祚) 지암(止菴) 사공호(史空祜)가 문장과 덕행이 뛰어났고, 송암(松菴) 사공익(史空瀷)도 영조 때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이조정랑을 지냈으며, 남은(南隱) 사공호 역시 순조 때 행의로 천거되어 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한편 무신으로는 사공지(史空祉)가 숙종 때 용양위 부호군, 사공현(史空鉉)이 순조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서문(西門)은 중군 하남성 북부, 산서성 서남부의 지명으로 정나라의 대부가 그곳에 살면서 지명을 성으로 삼은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서문씨는 안음(安陰) 단본으로 시조는 서문기(西門記)이다. 그는 중국 하남 사람으로 원나라 순제때 중랑장을 지내고 위왕의 딸 노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서 귀화하여 안음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안음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는 경남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에 있다.
선우씨의 본관은 태원(太原) 단본으로 청주한씨·행주기씨와 함께 멀리 기자에 연원을 둔 성씨이다.
<태원선우씨세보>에 의하면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둘째아들 중(仲)에게 우땅을 식읍으로 내리니 그 후손들이 조선의 <선(鮮)>자와 우땅의 <우(于)>자를 합한 선우를 성으로 삼고 기자가 원래 태원부 사람이었기 때문에 태원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기씨조선 41대 애왕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하하여 금마군에 마한을 세워 통치하다가 10세 원왕에 이르러 백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는데, 그 때 원왕에게 양(諒), 친(親), 평(平) 세 아들 중 양은 선우씨의 세계를 이어받고, 친은 한씨, 평은 기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문종 때 중서주서를 지낸 정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선우씨는 조선조에서 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는데, 역사상 대표 적인 인물은 관서부자라고 일컬어지며 존경받은 선우협(鮮于浹)을 들 수 있다. 그는 선우식의 아들로써 김태조(金台左)로부터 시, 서 역, 춘추를 배우고 장현광(張 光) 깁집(金集)등을 찾아 도를 물었으며 용악산에 들어가 후진을 가르쳤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관서부자>라 일컬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에는 (돈암전서)가 있다. 그는 심성이기의 묘리를 터득한 인조·효종대의 학자로서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 되었으나 사양했다. 근대 인물로는 사내 총독 암살사건에 관련, 옥고를 치르고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교통차장 을 지낸 선우혁(鮮于爀)이 있다.
제갈씨(諸葛氏)의 본관은 남양(중국 황동성) 단본이다.
제갈씨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496성 중에나 《도곡총설(陶谷叢說)》의 296성 중에도 나타나 있지 않는 성씨로서 공식적으로는 1930년도 국세조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제갈씨조(諸葛氏條)를 보면 먼저 중국의 성씨임을 밝힌 뒤에 <조선 순천지방 유제갈씨 자래구거>라 한 것으로 보아 그때 비로서 생긴 성은 아닌 것 같다.
《남양제갈씨세보(南陽諸葛氏世譜)》에 의하면 시조는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한 제갈량(諸葛亮)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이고, 그의 20세손인 제갈공순(諸葛公巡)이 신라 흥덕왕 때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이 그 시초라고 전한다.
그 후 고려 제갈홍(諸葛泓)·제갈형(諸葛瀅)형제가 복성을 서로 한자씩 나누어 쓰기로 하여 형은 제씨(諸氏)로 아우는 갈씨(葛氏)로 분성하였다. 그래서 제갈씨(諸葛氏)는 없어졌다가 구한말에 성씨환원 운동이 일어나 제갈씨로 복성했는데 미처 복성하지 못한 일부는 제씨와 갈씨로 그냥 남게 되었다고 한다. 제갈씨는 구한말에야 원성으로 환원된 성씨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드러난 인물이 있을 수 없고, 근세 인물로는 구한말의 의병장 제갈윤신(諸葛允信)이 있다.
그는 경북 영덕 출신으로 구한국군에 복무중 1907년(융희1)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장 연기우(延基羽)의 부장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 1910년 의병대장으로 현청농(玄靑農), 김공선(金公先)과 협의, 삭녕군의 세금수송 일자를 탐지하여 부하들을 지휘, 세무관리와 일본 기마헌병을 사살했으며 그 후 철원·평강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다 목전면 산성곡에서 일본군의 야습으로 전사했다.
황보씨(皇甫氏)의 본관이 문헌에 영천(永川)·황주(黃州)등 9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영천을 제외한 나머지는 영천황보씨의 세거지를 말하는 것이고, 현재는 영천 단본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조 황보경(皇甫鏡)은 신라 말에 당나라에서 귀화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의 후손 황보능장(皇甫能長)이 금강산 장군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합에 공을 세워 영천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영천을 관향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황보안(皇甫安)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영천황보씨는 고려 및 조선 초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특히 복성씨로서는 유일하게 영의정을 배출했다.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명종때의 명유로서 <강좌칠현>의 한사람인 황보항(皇甫抗), 의종때 대사성을 지내고 두차례나 전선을 맡았던 황보탁(皇甫倬), 정종때의 평장사 황보영(皇甫穎), 고종조의 평장사 황보기(皇甫琦)등이 있으나 특히 황보유의(皇甫兪義)·황보림(皇甫琳)이 유명하다. 유의는 목종때 김치양(金致陽)이 천추태후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위에 추대하려고 하자 당시 삼각산 신혈사에 유폐되어 있던 대량원군 순을 맞아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고, 훗날 문하평장사를 지냈다. 임은 유의의 5대손으로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무찔러 1등공신이 되었고, 우왕 때 이성계의 회군에 가담, 또 1등공신이 되었으며 여러차례 왜구를 격퇴, 서북면 도절제사가 되었다. 조선개국 후에 지중추원사에 올랐다. 그의 아들이 단종 충신으로 유명한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이다. 황보인은 1414년(태종14) 친시문과에 급제하고, 세종때 여러관직을 거쳐 1440년 평안·함길도 체찰사가 된 후 약 10년간에 걸쳐 절제사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6진을 개척했다. 그 후 좌·우찬성, 우의정을 거쳐 1452년(문종2) 영의정에 올랐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2년에 승하하자 그는 김종서, 정분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보호하다가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되고, 두아들과 손자도 함께 화를 입었다. 영천의 임고서원, 종성의 행영사에 제향되었다. 이때 그의 두 아들 석(錫)·흠(欽), 손자 한명도 함께 죽음을 당하고 셋째아들 은(銀)은 종 만이(萬伊)가 업고 도주하여 전전하다가 황주의 김만동(金萬同)의 집에 얹혀 살았다. 이런 까닭으로 영천황보씨가 황주에 집단 거주하게 되었다.
계유정난으로 타격을 받은 영천황보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4명을 냈으나 그도 모두 조선 초기의 인물들이고, 그후 재기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원나라의 석말선(石抹宣)이란 사람이 있어 그 자손이 도원수(都元帥)가 된 일이 있다.
당나라 고조(高組) 때 대방왕(帶方王)부여융(扶餘隆)이 시조
중국 고양(高陽)에서 나옴
중국 하내(河內)에서 나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