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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봉 고경명 (霽峰 高敬命)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 또는 태헌(苔軒) 시호는 충렬공(忠烈公) 이름은 경명 본관은 장흥이다. 고조는 상지(尙志), 증조는 현감을 지낸 자검(自儉), 조부 운(雲)은 조정암(趙靜庵)박눌재(朴訥齋)와 더불어 도의의 사귐을 맺었던 기묘명현이다. 아버지는 대사간(大司諫) 맹영(孟英)이요, 어머니는 남평 서씨(南平徐氏) 진사 걸(傑)의 딸이다.
1533년 중종 28년 (계사) 11월 30일 인시에 광주 압보촌(鴨保村) 옛 집에서 출생하였다. 생긴 풍모가 명랑하고 식견과 역량이 넓고 깊었으며 어릴 때부터 점잖은 모습이 어른과 같았다.
1541년 중종 36년 (경자) 9세 휴암(休庵) 백공(白公)이 남평재(南平宰)가 되어 글씨 쓰는 문방구를 선물로 보내주었다.
1552년 명종 7년 (임자) 20세 사마양시에 합격하였고 진사시에 장원하였다.
1553년 명종 8년 (계축) 21세 봄에 부제학 백균(百鈞)의 딸인 울산 김씨에게 장가들었다.
1554년 명종 9년 (갑인) 22세 정월에 아들 종후(從厚)가 태어났고 5월에 어머니 증정경부인 서씨의 상을 당하였다.
1558년 명종 13년 (무오) 26세 10월에 문과에 합격, 갑과의 제1인이 되었다. 임금이 반궁(泮宮:성균관)에 친히 임하여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선생이 1등을 차지하자 바로 전시(殿試)에 나아가도록 하고 또 첫 번째로 발탁했다. 즉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제수하고 곧이어 호조좌랑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1559년 명종 14년 (기미) 27세 봄에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어 임금의 명을 받들고 기우(祈雨)하였다.
1560년 명종 15년 (경신) 28세 문신정시(文臣廷試)에서 제1인으로 합격하여 말 한 필을 하사받았다. 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다가 여름에 형조좌랑이 되어 지제교(知製敎)에 뽑혔다. 이 후부터는 늘 삼자함(三字啣:세 글자로 된 관어)을 띠고 휴가를 얻어 호당(湖堂)에서 독서하게 되었다. 이 때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이 선생을 지제교에 추천하여 뽑히도록 했는데, 이 사실은 선생이 일과(日課)로 지은 시에 보인다.
1561년 명종 16년 (신유) 29세 봄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으며 여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옮겼다. 다시 헌납으로 있다가 또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다. 윤 5월에 아들 인후(因厚)가 태어났고, 가을에 소명을 받고 입시하였다. 이 때 임금이 열무정(閱武亭)에 나아가 삼공(三公)과 모든 재추(宰樞) 또는 옥당(玉堂)춘방(春坊)백부(栢府)미원(薇垣)을 모두 불러들이고 열무정 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열무정은 창덕궁 집상전(集祥殿)의 후원에 있는데 바로 광묘(光廟)께서 열무하던 곳이다. 앞에는 대내(大內)가 내려다보이고 동쪽에는 서총대(瑞蔥臺)가 빙 둘러져 있고, 북쪽에는 응벽지(凝碧池)가 엿보이며 성안에 즐비한 수많은 집들도 다 눈 밑에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궁궐 안에서 제일 좋은 경치로 꼽혔다. 술을 처음 마시려고 할 때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꽃을 하사하면서 온종일 화기롭게 놀도록 하였다.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겨울에는 홍문관 부교리로 승진하여 사명(使命)을 받고 관서(關西)로 나갔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임금이 "연로(沿路)에서 지은 시를 써서 바치라"고 했다. 이 때 사명이 무슨 일이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사율(四律) 두 편과 절구 두 편이 있다. 10월에는 소명을 받고 입시하였다. 이 때 임금은 창경궁에 계시면서 부제학 이언충(李彦忠) 등을 불러들이고 장경문(長慶門)안에서 술을 하사했다.
장경문은 궁궐 뜰과 아주 가까운 곳이고 여러 가지 병품(餠品)도 천주(天廚: 왕의 음식을 만드는 부엌)에서 맛있게 장만하였다. 모두 마음놓고 취하도록 마시다가 밤이 된 후에 파하고 서로 흩어져 나왔는데, 임금이 또 은촉(銀燭) 한 자루씩 나눠주도록 하였으니 이는 옛날 금련고사(金蓮故事)와 비슷하였다.
1562년 명종 17년 (임술) 30세 정월 15일에 옥당(玉堂)에서 숙직했다. 이 때 주은(酒隱) 김명원(金命元)과 함께 했는데 임금이 감귤을 하사하고 잇달아 술도 내려 주었으니 이는 참으로 태평시대의 성사였다. 이 해 별시(別試)를 보일 때 고관(考官)이 되어 정철(鄭澈)을 뽑아 장원을 시키니, 모든 공론이 사람을 옳게 뽑았다고 치하했다. 병으로 인해 부교리를 그만두었다. 또 전적이 되었다가 여름에 수찬으로 옮겼으며, 얼마 안되어 부교리에 승진했다. 9월 24일에 동호(東湖)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본래 봉은사(奉恩寺)에 놀러 가려고 했다가 강사필(姜士弼)과 오음(梧陰) 윤공(尹公)과 함께 동호 상류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10월 26일에 소명에 따라 입시하였다. 이 때 임금이 은대(銀臺) 옥당의 여러 신하를 불러들이고 비현당(丕顯堂) 앞 뜰에서 금을 하사한 다음, 잇달아 전교하기를 "지금 옥당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마침 날씨가 추운 까닭에 은대와 아울러 술을 하사하도록 하였다"하고 어필로 쓴 칠언배율 10운을 내려주었다. 선생은 한림원에서 몇 해 있을 때도 이런 성사(盛事)를 친히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보다 앞서 신유년 겨울에도 임금이 창경궁에 계시면서 옥당에 술을 하사할 때, 선생은 병이 들어 나아가지 않았으나 빨리 들어오라는 명이 있어 억지로 참석하기도 했다. 12월에 임금이 한 화본(畵本)을 내보였는데 모두 62폭이나 되었다. 이를 합쳐서 한축으로 만들고 어필로 폭마다 짤막한 발문을 써 붙였다. 선생에게 시를 지어 바치도록 하고 특히 표피(豹皮) 한 장, 황모필(黃毛筆) 열 자루, 단산오옥(丹山烏玉) 다섯 개를 하사했다.
1563년 명종 18년 (계해) 31세 송강이 병조좌랑에서 공조정랑으로 승진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에게 시를 써서 부쳤다. 이 때 고봉이 동호에 있으면서 편지를 부쳐왔으므로 선생이 시를 지어 사례했다.
1565년 명종 20년 (을축) 33세 7월에 아들 준후(遵厚)가 태어났다. 11월에 의정공(議政公)이 별세하였다.
1567년 명종 22년 (정묘) 35세 6월 28일에 명종대왕이 승하하였다.
1569년 선조 2년 (경오) 37세 2월에 아들 순후(循厚)가 태어났다.
1570년 선조 3년 (경오) 38세 고봉이 적벽에 놀러간다는 소문을 듣고 축하시를 부쳤다. 아들 종후는 진사에 합격했으며, 선생은 여름에 부름을 받고 궁궐에 나아가 기우제문을 지어 바쳤다.
1572년 선조 5년 임신 40세 아들 준후가 요사했다. 여름에 면앙정 송순을 그의 정자로 찾아가 보았다. 이 때 송순이 정자에 써 붙일 시를 청하면서 그가 지은 절구 한 편을 외워 보였다.
1573년 선조 6년 (계유) 41세 4월 9일 이첩(梨帖)에서 놀았다. 이 때 정중실(鄭仲實)유지숙(兪止叔)과 함께 월출산에서 놀았는데, 내관(內官) 오계성(吳繼成)도 진도 적소(謫所)에서 오게 되었다. 오계성이 가야금을 타면서 명종이 지은 악부 2장을 부르자 모인 사람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1574년 선조 7년 (갑술) 42세 4월에 갈천(葛川) 임공(林公)과 함께 서석산에서 소풍하고 「유산록(遊山錄)」을 만들었다. 임공은 이 때 광주목사로 있었다. 주은 김공이 서울로 돌아갈 때 전송했다. 이 때 선생은 극락정(極樂亭)에 있다가 주은이 그의 형 응선(應善)의 환보(患報)로 인해 빨리 서울로 돌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증별시를 써 주어 응선과 함께 보도록 하였다. 11월에 아들 유후(由厚)가 태어났다.
1575년 선조 8년 (을해) 43세 정월 초 2일에 인순왕후(명종의 왕비인 심씨)가 승하했는데 비통한 마음으로 지은 시가 있다. 송강이 시골로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전에 장생동(長生洞)에서 지은 운에 따라 절구 한 편을 지어 부쳤다.
1576년 선조 9년 (병자) 44세 겨울에 불이재명(不已齋銘)을 지었다. 이 때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이 보령에서 배를 타고 순천에 온 후, 배를 버리고 걸어서 송강(松江)과 서로(栖露)를 두루 찾고 서석산에 올라 증심사에서 엿새 동안 머물렀다. 증심사를 떠나 설죽산우(雪竹山寓)로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하룻밤을 쉬었다. 그 이튿날 선생이 재호(齋號)를 지어달라고 청하자 토정은 "불이재로 하라"고 했다.
1577년 선조 10년 (정축) 45세 정월에 아들 용후(用厚)가 태어났고 또 아들 종후는 문과에 합격했다. 시를 지어 송강에게 사례했다. 이 때 송강이 소쇄정(瀟灑亭)에서 파초 잎에다 시를 써서 부쳐 보냈으므로 선생이 사례한 것이다.
1578년 선조 11년 (무인) 46세 여름에 정허명설(靜虛名說)을 지었다.
1579년 선조 12년 (기묘) 47세 인후가 진사에 합격했다.
1581년 선조 14년 (신사) 49세 영암군수가 되었다. 얼마 후 변무사(辨誣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받고 성균관 직강으로 옮겨 사헌부 지평을 겸직하고 경사(京師)에 들어갔다. 이 때 나라에서 선계(璿系)의 잘못을 명나라에 들어가 바로잡으려고 했는데 사신으로 임명된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가 선생을 서장관으로 삼도록 하였다.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망해정(望海亭)에 올라 소풍을 즐겼다. 이 망해정은 산해관에서 10리 가량 떨어져 있는데, 상사(上使) 김중회(金重晦)와 부사(副使) 최입지(崔立之) 그리고 한경홍(韓景洪)과 함께 올라갔다. 선생이 절구 한 편을 짓자 그들도 모두 화답하였다. 예부에 나아가 진정서를 올렸다. 황제가 황극문에 나오자 예관이 배신(陪臣) 등을 인솔하고 옥좌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아 하사하는 의복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이 때 지은 지감시(志感詩)가 있다. 북경을 떠나 성동(城東)에 이르렀는데 길 왼편에 삼충사(三忠祠)가 있었다. 이는 제갈무후(諸葛武侯)악무목(岳武穆)문승상(文丞相) 세분을 제향하는 사당이었다. 선생은 문승상에게 더욱 느낀 바 있어 시를 지었다.
1582년 선조 15년 (임오) 50세 봄에 명나라에서 돌아와 복명한 후 서산군수가 되었다. 가을에는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을 맡았다가 사섬시(司贍寺) 첨정으로 옮겨 한강까지 나아가 사신을 영접하였다. 이 때 한림편수(翰林編修) 황홍헌(黃洪憲)과 급사중(給事中) 왕경민(王敬民)이 황자가 탄생했다는 조칙을 가지고 왔는데, 원접사 율곡 이선생이 선생의 문장은 나라를 빛낼 수 있다 하여 종사관으로 추천하였다.
율곡은 본래 선생과 안면이 없었는데 이 때 한 번 보고 문득 엄중(嚴重)히 여겨 마음에 숨긴 것 없이 다 털어놓고 이야기했으며, 중국사신과 더불어 창수(唱酬)할 때 선생이 시를 많이 쓰도록 하였다. 선생의 사우연원(師友淵源)을 따지면 하서고봉송강 등 여러 선생과 가장 친근했고 율곡과는 도가 같고 지기도 맞아 저절로 통하는 점이 있었다.
1583년 선조 16년 (계미) 51세 봄에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가 얼마 후 한산군(韓山郡)으로 이배(移拜)되었다. 겨울에 문한(文翰)에 대한 일로 예조 정랑을 제수했으나 부임하지 않고 바로 향리로 돌아왔다.
1584년 선조 17년 (갑신) 52세 여름에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었다가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으로 옮겼으며 겨울에 사예(司藝)가 되었다.
1585년 선조 18년 (을유) 52세 정월 27일에 정이상(鄭貳想)에게 편지를 써서 부쳤다. 옥봉(玉峰)백공(白公)에게 편지를 보내 사례하였다. 이 때 옥봉이 붓과 밀촉을 보냈으므로 선생의 이 편지가 있었다. 봄에 세 품계를 특진하여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다. 이 때 임금이 선생의 문장으로 보아 하급관료에 둘 수 없다 하여 이런 특명이 있었으나 여름에 또 순창군수로 나갔다.
1586년 선조 19년 (병술)54세 7월 16일에 적성(赤城)으로 유람 갔다. 청계(淸溪) 양공(梁公)이 동파고사(東坡故事)로써 선생을 비유한 시가 있어서 화답하였다.
1587년 선조 20년 (정해) 55세 오음 윤공과 더불어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이 때 윤공이 호남 안절사가 되어 순창에 이르러 함께 놀았다.
1588년 선조 21년 (무자) 56세 여름에 순창군수를 그만두었다. 11월 7일에 선계(璿系)를 개정할 일로 황조에서 칙서(勅書)가 내려왔다는 소문을 듣고 지감시를 지었다.
1589년 선조 22년 (기축) 57세 아들 인후가 문과에 합격하였다.
1590년 선조 23년 (경인) 58세 여름에 내섬시정(內贍寺正)이 되었다가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 지제교(知製敎)로 옮겨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어떤 사람이 임금 앞에서 선생의 문장을 아깝다고 여겨 추천하자 임금께서 승문원 지제교에 제수한 것이다. 광국일등공신(光國一等功臣)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의 녹훈교서(錄勳敎書)를 지어 바쳤다. 가을에 통정대부로 승급하여 동래부사로 부임했는데 청렴하고 결백한 지조가 있어 아전과 백성이 모두 기쁘게 생각하였다.
1591년 선조 24년 (신묘) 59세 봄에 광국훈(光國勳)에 녹명(錄名)되었다. 이 때 종계(宗系)가 변무(辨誣)되자 여러 공신들이 모두 녹훈됨에 따라 선생도 서장관(書狀官)을 지낸 공로로 기록되었다. 여름에 동래부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도리어 배척을 받고 시골로 돌아갔다. 이 때 간관들이 송강을 논박하면서 선생이 송강을 선발하였다 하여 아울러 배척했다. 아들 순후가 진사에 합격하였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 60세 봄에 선생이 천문을 보고 집안에 이르기를 "올해는 장성(將星)이 분명히 보이지 않으니 장수가 이롭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4월에 왜노(倭奴)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13일에 왜병 50만기가 바다를 건너와 부산을 함락시키자 첨사(僉使) 정발(鄭撥)이 죽었고, 14일에 동래성이 함몰되자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었다. 17일에 밀양이 함락되었다.
부사(府使) 박진(朴晉)이 힘껏 싸우다가 적의 포위를 뚫고 나오자 변보(邊報)가 비로소 경성까지 이르게 되었다. 18일에 김해가 함락되자 부사 서원례(徐元禮)는 도망쳐 버렸다. 이 때는 나라가 태평한 지 오래여서 사람들이 병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적이 물밀듯이 몰아닥쳤다. 29일에 충주 달천에서 패보가 이르자 30일에 대가(大駕)가 도성을 떠나게 되었다. 5월 1일에 대가는 개성까지 이르렀다. 3일에 경성이 함락되었다.
이 때 삼로(三路)에서 모인 군사 5만 명이 모두 용인에서 허물어지고, 7일에 대가가 개성에서 평양으로 떠나갔다. 선생이 도순찰사(都巡察使) 이광(李洸)에게 답한 편지가 있는데 이는 광이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격문을 요청했던 때문이었다. 그에게 답한 편지는 대강 아래와 같다. "국사가 이 지경까지 이르니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날마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통곡할 뿐입니다. 지금 온갖 걱정으로 마음이 흔들리던 중에 영감(令監)의 편지를 받아들고 반도 채 못읽어서 눈물이 쏟아집니다.
나는 전야(田野)에 묻힌 몸이고 더구나 늙고 병들어 누워있으니 행장을 꾸려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문안 드릴 수도 없고 또 막부에 나아가 군사에 대한 계획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번 죽음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격문을 지어달라는 부탁은 제가 글을 폐한지 오래지만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대강 초해 드립니다. 그러나 문장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절하(節下)의 창의(倡義)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밝히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이 달 초순에 주동(州東) 폐장(弊庄)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3일 발송한 편지를 6일에 어떤 우졸(郵卒)이 내가 없는 빈집에다 던져두고 갔습니다. 이래서 시일이 지연 되었으니 혹 너무 늦어 못쓰게 될까 도리어 걱정 입니다. 구구한 저의 생각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어 망령스레 별지에 적어 아울러 드립니다. 오직 절하(節下)께서는 이 못난 사람의 말로 여기지 말고 중지를 모아 널리 받아들이면, 과연 국가를 위해 큰 업적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김사중(金士重:천일)의 편지가 마침 왔기 때문에 영감의 뜻이 이렇다는 것을 자세히 알려 주었습니다." 5월 22일에 대가가 또 평양에서 떠나 의주까지 이르렀는데 호종한 관원은 겨우 1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선생은 이 때부터 본주(本州) 촌사(村舍)에 있었는데 대가가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부르짖으며 통곡하였다. 두 아들 종후와 인후에게 본주에 도망쳐 와 있는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 진영으로 달려가 본주 목사 정공(丁公) 윤우(允祐)에게 소속시켜 주고 돌아오도록 하였다.
당초에 본도 체찰사 이광은 왜적이 경성에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교서(敎書)와 인신(印信)을 전주 진전(眞殿)안에 내버려둔 채 그의 본가인 고부로 가서 숨어 있었다. 잘못이라는 비판이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자 하는 수 없이 다시 나와 임무를 보게 되었다. 나중에 징병하라는 교지가 내리자 도내 군사를 출동시켜 공주까지 이르렀다. 이 때 경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대가가 기성(箕城)으로 파천했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 진영을 해산시키자 여러 군사가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또 두 번째 징병할 때도 각 고을 군사가 제대로 모이지 않고 본도에 있던 군사조차 흩어지고 말았다. 선생은 이 때 본주 촌사에 있었다. 나라가 엎어지게 된 것을 슬피 여기고 순찰사가 머뭇거리는 것을 통분하여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과 더불어 이리저리 도망친 군사들을 쫓아다니며 불러모았다. 그리고 두 아들을 시켜 모든 군사를 수원전소(水原戰所)까지 거느리고 가도록 하였다. 또 평양행재소까지 달려가 문안하고자 했으나 길이 막혀 돌아오게 되었다. 맏아들 종후는 여산까지 와서 병들어 머물러 있었고, 둘째아들 인후는 추성관 거의소(秋城館擧義所)로 내려와 선생을 뵙게 되었다.
5월 29일에 선생이 추성관(秋城館)에서 단(壇)을 설치하고 분향서천(焚香誓天)한 다음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창의기를 높이 세웠는데 여러 의병들이 선생을 대장(大將)으로 추대하자 삽혈동맹( 血同盟)하게 되었다. 이 때 용인에 모인 군사가 모두 해산된 후부터 일도의 인심이 물 끓듯하여 걷잡을 수 없었다. 선생이 나주 김천일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자, 좌도에서 선생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았으므로 단을 만들과 하늘을 향해 재배한 후 대장기를 세우고 뭇사람들과 맹세하였다.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유학(幼學) 안영(安瑛)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은 종사관이 되었고, 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유학(幼學) 양희적(梁希迪)양사형(楊士衡) 등은 모량 유사(募糧有司)가 되었으며, 우도에서는 김공 천일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6월 1일에 격서를 도내에 띄웠다. 선생은 이때 공조참의 겸 지제교가 되어 초토사를 겸임했다. 임금은 용만(龍滿)에 있었는데 선생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아주 아름답게 여기고 기뻐하면서 이 관직을 제수한 다음 편지까지 하사하고, 심지어 "열읍을 통제하고 도성을 회복하라"는 교명(敎命)까지 있었다. 공조좌랑 양산숙(梁山璹)이 행조(行朝)에서 호남으로 돌아올 때 임금이 직접 타이르기를, "네가 빨리 돌아가 나의 이 말을 고모(高某)와 김천일에게 전하고 너희들 모두가 빨리 도성을 회복시켜 나와 한 자리에서 만나 보도록 하라"고 하였다.
6월 11일에 담양에서 군사를 출동시켜 태인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맏아들 종후가 태인으로 와서 선생에게 문안하자, 선생은 바로 종후를 시켜 금구로 달려가 품군을 사서 격서를 탐라로 띄워 좋은 말을 뽑아오도록 하고, 또 김제와 임피 등지로 가서 병기와 군량을 모아 여산에서 대기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또 전주에 이르러 남원의 군사를 집합시키고 잇달아 본도의 각 고을에 지령을 내렸다. 이 때, 둘째아들 인후는 휘하의 용사를 거느리고 진안무주 등지에 복병을 매복시켜 영남에서 몰려오는 적들이 호남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방어하였다.
얼마 후에 적군이 영남으로 퇴각하였으므로 선생은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여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도체찰사 이광에게 보낸 격서에서 "지금 본도 의병의 당초 계획은 바로 북로를 향해 왜적을 물리치고 대가가 서울로 돌아오도록 하려했는데, 벌써 윤좌상(尹左相: 斗壽)이 서북도의 정병을 통솔하여 양경(兩京: 개성과 평양)에 머물러 있는 적들을 토벌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북쪽 지대는 별로 걱정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호서에 있는 적들이 차츰 금산으로 들어오는데 방어할 군사는 아직 용계(龍溪)에 주둔해 있기만 하고 한 사람도 앞잡이로 나서는 자가 없는 판국입니다"라고 했다.
6월 20일에 체찰사 정철에게 편지를 부쳐 창의의 전말을 이야기 하였다. 이 때 송강이 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가 되자 선생이 이 편지를 써서 의견을 알렸다. 6월 22일에 전주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선생은 장사들과 더불어 상의하기를 "진안과 무주를 몰아쳤던 왜적이 이미 용담과 진안으로 향해 간 것은 반드시 전주와 남원을 침입할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대군(大軍)은 마땅히 본도 진영으로 다 가야할 것이고, 다만 노약자(老弱者)는 남겨두어서 후방을 지키도록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진산(珍山)에 머물면서 가끔 적들이 나타나면 모조리 섬멸시키고 또 도망치는 자를 재빨리 추격하면 저 적들은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설 수 없어서 이 깊은 산중에서 저절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라 하고, 군사를 이끌고 여산으로 진영을 옮겼다. 이 때 맏아들 종후는 임피 모량소(臨陂募糧所)에서 달려왔고 둘째아들 인후는 무주 설복소(茂朱設伏所)에서 달려왔다.
6월 23일에 여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 때 금산에서 들어온 통보에 "옥천(沃川)과 양산(梁山)에 머물러 있던 왜적이 여산 진영을 향해 갔다"고 했다. 또 체찰사 정철이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강진해남 두 수령에게 격서를 부쳤다. 6월 24일에 금산에서 들어온 통보에 "본군에서 10리쯤 떨어진 거리에 적병이 집결하고 있다"고 했다. 선생은 또 호서, 경기, 해서 등지로 격서를 띄워 평안도까지 전달하도록 했다.
6월 27일에 군사를 이끌고 은진(恩津)으로 나아갔다. 이 때 황간(黃澗)에 있던 적이 금산을 넘어 잇달아 완산을 침범하려 했으니, 저 적들이 어찌 하루인들 이 호남을 잊었겠는가? 만약 우리 군사가 북상한다는 소문을 들으면, 반드시 이 때를 틈타 기세를 부리면서 휘몰아 칠 것이다. 만약 완산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호남의 전체가 위태로울 것이고, 더구나 이 완산은 진전(眞殿)이 있는 곳인만큼 먼저 구하지 않을 수 없다하여 드디어 호남부터 보장할 계획을 결정했다.
7월 1일에 군사를 이끌고 연산(連山)으로 향했다. 7월 5일에 충청 의병장 조공(趙公:重峰)에게 편지를 부쳐 함께 형강(荊江)을 건너 적을 토벌하자고 약속했다. 이 때 중봉 조공은 호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7월 6일에 연산에 진을 쳤다. 이 때 이광이 그의 관군을 선생에게 보내 그만 회군하여 함께 방어하자고 요청하였으나, 선생은 허락하지 않고 연산에서 진산으로 진영을 옮긴 다음, 정예병을 뽑아 양쪽으로 적세를 정찰하도록 했다. 이광은 또 곽영(郭嶸)에게 전령을 보내 빨리 달려오도록 하였으나, 곽영도 응하지 않고 의병을 따라 왔다.
7월 9일에 진산에서 행군하여 금산으로 들어와 방어사 곽영과 함께 군사를 갈라 좌우익으로 만들었다. 이 때 선생은 정예병 수백명을 미리 파견하여 적의 소굴을 곧바로 치도록 했다. 적은 숨어서 이리저리 망보다가 벌떼처럼 돌격해오므로 모든 군사가 퇴진하려 하였다. 선생은 북을 울리면서 선두로 달려가 모든 군사를 격려하여 힘껏 싸우도록 하였다. 토성 속에 꽉차 있던 적병은 사방으로 포위한 다음, 성 밖에 있는 관사(官舍)는 모조리 불태우고 또 성안을 향해 포를 쏘아대었다.
성 밖에서 대항하던 적들은 거의 다 쓰러져 버렸고, 성 안에 있던 있던 적들도 배기다 못해 튀어나오기는 했으나 사방으로 포위한 의병에게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이 때 해가 거의 저물었는데 관군은 응원하지 않고 적의 토성도 워낙 튼튼해서 갑자기 무너뜨릴 수 없어 퇴진하게 되었는데, 이 날 저녁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 다음날 협력하여 공격하자고 했다. 또 선생의 맏아들 종후도 선생에게 여쭈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승리한 셈입니다. 그만 전군이 다 진영으로 물러가 있다가 다시 기회를 보아 토벌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 깜깜한 들판에서 저 적의 보루를 마주 대해 하룻밤을 새우다가 혹 무슨 변고가 생길까 염려됩니다"라고 했다. 선생은 이르기를 "너는 부자간 애정을 생각하며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느냐? 국가를 위해 한목숨을 바치는 것이 나의 직책이다"라고 했다. 과연 이 날 밤에 적들이 몰려와 의진(義陣)을 공략하려다가 나졸(邏卒)에 발각되어 되돌아갔다.
7월 10일에 선생이 순절하였다. 휘하에 있던 장수 안영과 류팽로도 함께 죽었다. 선생의 둘째아들 인후는 무사를 거느리고 늘 앞잡이가 되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그의 부하를 정돈하여 꼭 복수하려고 했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또 순절하고 말았다. 이 때 선생은 적과 5리쯤 떨어진 거리에서 작전태세를 갖추었다면 방어사가 이끈 관군도 합세하기 전에 적은 모조리 성밖으로 나와 먼저 관군에게 왈칵 달려들었다. 방어사의 휘하장 김성헌(金聲憲)이 말을 달리면서 선두에서 도망치자 적이 육박하였는데, 방어사의 관군은 모두 건너다 보기만 하다가 다 흩어져 버렸다.
선생은 홀로 대적할 계획으로 군졸에게 모두 활을 바짝 세워들고 충분한 대비를 하도록 하였다. 갑자기 몇 명 군사가 아우성치면서 "방어사의 진영이다 무너졌다"고 하자, 의군(義軍)도 물밀 듯이 흩어지므로 다시는 제지할 수 없었다. 선생은 유팽로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싸움에 익숙하지 못한 탓으로 불행히 패전하게 되었으니 나는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자, 좌우에서 모두 말을 달리면서 후퇴하자고 간청하였다. 선생은 또 이르기를 "내가 어찌 구차스레 죽음을 피하겠느냐? 너희들이나 빨리 후퇴하여 적에게 포위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유팽로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때 적봉이 바짝 휘몰려와 선생은 결국 순절하게 되었다. 유팽로는 그의 몸으로 선생을 가리우고 죽었으며 안영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선생의 둘째아들 인후는 선봉이 되어 모든 군사를 독려하다가 갑자기 진영이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다시 대오를 정돈시켜 꼭 복수하려 했으나 역시 순절하고 말았다. 선생의 맏아들 종후는 군사가 모두 흩어질 무렵에 타고갈 말이 마침 가시덤불 속에 자빠지므로 빨리 일으켜 세워서 안장을 지우고 있었다. 노복이 헐떡이면서 달려와 "영공(令公)께서는 벌써 멀리 가셨습니다"라고 했다.
드디어 급히 달려 거의 30리나 간 후에 비로소 충렬공(忠烈公)과 학유공(學諭公)이 함께 순절한 줄 알았다. 그만 말에서 떨어져 한참 동안 졸도하였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빈손으로 적에게 달려가 복수하려 하였다. 좌우에서 모두 끌어안고 만류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한갓 죽기만 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고, 또 선영공(先令公)의 체백(體魄)이 지금 저 시체더미 속에 있는데 공이 또 죽는다면 거두어 염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라고 했다. 종후는 오랫동안 울부짖다가 그렇겠다고 하고 적들이 다 물러간 후에 전쟁터로 걸어들어가 선생의 유체와 학유공의 유체를 다 찾았다.
두분의 옷자락 안에 모두 이름이 적혀져 있었으니, 이는 아마 거의(擧義)하던 날 반드시 죽음을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뒷날 수시(收屍)의 증거를 삼도록 했던 것이다. 금산 산중에 남모르게 묻어두었다가 이해 8월에 비로소 관곽(棺槨)을 갖추게 되었다. 날짜를 따지면 40일이 넘었고 여름철 장마도 많이 겪었는데 안색이 살았을 때와 똑 같았으므로 보는 이가 모두 이상하다고 했다.
10월 4일에 선생의 관구(棺柩)를 화순현 흑토평(黑土坪)으로 옮겨 장사를 지냈다. 이 때 선생의 맏아들 종후가 고향으로 반장했는데 장사를 다 마친 그 이튿날은 바람과 눈보라가 심했으며, 긴 무지개가 산소 왼쪽에서 일어나 온 영역(塋域)에 가로 걸쳤다. 빛나는 광선이 수십리 거리에 환히 비쳤는데 하루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기고 선생의 충분(忠憤)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했다. 임금께서 선생 부자가 함께 순절했다는 소문을 듣고 특명으로 예조판서를 증직하고 의정부 좌찬성을 가증(加贈)하였다. 아들 인후에게는 예조참의 증직을 내렸고 나중에 그의 아들 부천(傅川)의 녹훈(錄勳)으로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하고 시호는 의열(毅烈)이라 하였다.
1593년 선조 26년 (계사) 6월 29일에 선생의 맏아들 종후가 남강(南江)에서 순절하였다. 이 때 종후는 상신(喪身)으로 의병을 일으켜 복수하려고 여러 차례 적과 싸우면서 진주까지 갔다. 6월 29일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창의사 김천일병사 최경회와 더불어 각지 종관(從官)을 거느리고 서울을 향해 두 번 절한 다음,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는데 이 분들이 바로 '삼장사(三壯士)'이다. 임금은 선생의 맏아들이 순절했다는 소문을 듣고 특명으로 도승지를 증직하고 또 이조판서를 가증했으며 시호는 효열(孝烈)이라 했다.
1594년 선조 27년 (갑오) 정월 22일에 왕세자가 예관 이희간(李希幹)을 보내 사제(賜祭)했다.
1595년 선조 28년 (을미) 여름에 임금께서 선생의 집 앞에 정려를 세우도록 특명을 내렸는데 맏아들 종후와 둘째아들 인후도 배향하였다.
1597년 선조 30년 (정유) 노상룡(盧尙龍)에게 출가한 딸과 안여인(安汝仁)에게 출가한 질녀가 모두 적을 꾸짖고 자결하였다.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정문을 세우도록 특명을 내리니 세상에서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고 칭송했다.
1599년 선조 32년 (기해)「정기록(正氣錄)」이 완성되었다. 이 때 아들 유후가 격문을 모아 한 책을 만들었는데 월정(月汀) 윤공(尹公)이 '정기(正氣)'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는 아마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를 의미한 듯하다. 아들 용후가 이 「정기록」을 간행하자 월정이 서문을 썼고 월사(月沙)한음(漢陰)백사(白沙)․청음(淸陰)문곡(文谷)상촌(象村)성재(醒齋) 등 여러 사람이 잇달아 서문을 지었으며, 서경(西坰) 류공(柳公)은 발문을 썼고 또 황명어사(皇明御史) 손원화(孫元化)가 발문을 지었다. 이 때 아들 용후가 태인군수로 있으면서 판각하여 본원(本院)에 간직해 두었다.
1601년 선조 34년 (신축) 임금이 특명으로 본주에 사당을 세우도록 하였는데, 맏아들 종후둘째아들 인후월파 유팽로청계 안영도 모두 배행했다.
1603년 선조 36년 (계묘) 6월 2일에 임금이 포충사(褒忠祠)라 사액했는데 이는 백사 이항복의 주청에 따라 윤허한 것이다. 8월 2일에 임금이 예관 정랑 조엽(趙曄)을 보내 사제했다.
1604년 선조 37년 (갑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이 해에 이르러 비로소 지나간 임진년 호성(扈聖)선무(宣武) 양훈(兩勳)을 책정했다. 한음이 굳이 훈부(勳府)의 화사(畵師)를 되돌려 보내고 차자(箚子)를 올려 선생과 조헌에게 양보하였다. 이 때 간신(奸臣) 류영경(柳永慶)이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녹훈을 맡아 보았는데 선생과 조공을 밉게 여기고 모두 빼버리자, 한때 공론이 떠들석 했으며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1605년 선조 38년 (을사) 정월 7일에 임금이 예관 지제교 윤광경(尹光敬)을 보내 사제했다.
1608년 선조 41년 (무신) 신도비문이 완성되었는데 월정 윤공이 지었다.
1609년 광해 원년 (기해) 3월 경인에 선생의 묘소를 장성부(長城府) 오동리(梧桐里) 오좌원으로 이장했다. 전에 모신 흑토평은 터가 좋지 못해서 일찍부터 이장하려는 의논이 있었는데 이 해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쌍분으로 모셨다.
1617년 광해 9년 (정사) 이 때 백사 이상공이 문집을 편찬한 다음 서문을 지었고, 황명(皇明) 예부상서 오장(吳莊) 응회(應會)도 서문을 썼다. 「서석산유록(瑞石山遊錄)」도 이해에 간행되었는데 나중 신미년에 한림 학사 서광계(徐光啓)가 발문을 썼다. 이때 선생의 아들 용후가 남원부사로 있으면서 판각하여 본원에 간직해 두었다. 9월 정묘일에 금산(錦山) 성곡서원(星谷書院)에 배행했는데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도 병향(竝享)했다. 나중 계묘년(1663) 7월 15일 경진에 임금이 사액하고 사제했는데 예관은 정동엽(鄭東燁)이었다.
1623년 인조 원년 (계해) 임금이 사제했다.
1632년 인조 10년 (임신) 금산 종용사(從容祠)에 문열공 조헌과 병향했으며, 봉안제문은 우암송문정공이 지었고 계묘년(1663)에 또 사액했다.
1635년 인조 13년 (을해) 3월 28일에 충렬공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시장(諡狀)은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이 지었다.
1687년 숙종 13년 (정묘) 2월에 연시(延諡)했는데 예관은 이조정랑 김창집(金昌集)이었다. 순창 화산서원(華山書院)에 배향했다. 이 서원은 하서(河西) 김문정공(金文正公) 인후(麟厚)의 서원이다.
1734년 영조 10년 (갑인) 7월 19일에 임금이 부수찬 유건기(兪健基)를 보내 사제했다.
1771년 영조 47년 (신묘) 특명으로 부조전(不 典)을 내렸다. 이 때 호서에 진사 이헌이 상소하여 부조전을 간청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그 이튿날 다시 전지(傳旨)를 내리고 특별히 윤허했다.
1772년 영조 48년 (임진) 2월 20일에 예조정랑 고익경(高益擎)을 보내 사제했다.
1796년 정조 20년 (병진) 10월 29일에 원임 좌승지 서형수(徐瀅洙)를 보내 사제했다.
1812년 순조 12년 (임신) 8월 20일에 광주목사 홍양묵(洪養黙)을 시켜 사제했다.
1832년 순조 32년 (임진) 3월 11일에 영광군수 한희운(韓羲運)을 금산(錦山) 전망유허(戰亡遺墟)로 보내 사제했다.
1839년 헌종 5년 (기해) 4월에 연보가 완성되었다. 이 때 10세손 제인(濟寅)이 옛날 청사선생이 지은 사실을 뽑아 모으고 또 모든 유적에 따라 차례로 간추려 광주목사 조진민(趙鎭敏)에게 교정을 받은 다음 출판하게 되었다. 11월에 8대손 시민(時民)이 유적을 모아 분류하여 1권의 서책을 만들었는데, 그 저술한 바가 누락이 있을까 염려하여 종형의 아우 시유(時愈)와 족손 제인으로 하여금 다시 상자를 뒤져 발견되면 보충하도록 하였다. 헌종 4년 봄에 화순현감 민로행(閔魯行)이 교정하였고 그 해 여름에 광주목사 조진민이 고정(考訂)하였으며 기해년 3월에 판서 성수묵(成遂黙)이 산정했다.
1892년 고종 29년 (임진) 3월 20일에 예관 무주부사 민치순(閔致純)을 보내 치제하였다.
咸平李氏箕城君派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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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후손으로 참고하고싶어 가져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