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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스크랩 천주교 박해와 홍경래의 난
동일 추천 0 조회 122 16.11.05 01: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천주교 박해와 홍경래의 난 다시 읽는 우리역사

2007/01/18 13:41

복사 http://blog.naver.com/himammo/90013272579

 

천주교 박해와 홍경래의


초기 천주교 교회의 미사 모습.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아들 공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의 스물 세번째 임금인 순조다. 임금의 시호는 그의 업적에 따라 사후에 내려진다. 덕이 높은 왕에게는 ‘종’을, 왕조를 창업한 임금과 공을 세운 임금에게는 ‘조’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순조의 경우엔 그의 재위 기간 중 천주교를 물리치고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것이 공으로 인정되어 시호에 ‘조’가 붙여진 것이다. 순조 연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와 홍경래의 난을 살펴 본다.

순조가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순조의 증조할머니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도세자와 정조에 강력하게 반대해온 세력 가문의 출신이었다. 정순왕후는 순조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간사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의 ‘척사’를 표방했다. 바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기해박해’ – 샤스탕, 모오방, 앙베르 3인의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되는 사진으로 천주교 박해의 귀중한 사료다.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탄압했던 구실은 천주교가 조선의 지배윤리를 뒤흔드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집권세력의 반대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론 시파 세력과 남인 세력)반대세력을 정계에서 제거하기 위해 양반층이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던 천주교를 믿는 자들을 색출해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정순왕후는 곧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 중에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김범우와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 실학자 정약용과 처남 매부 지간인 이승훈도 있었다.

1784년 이승훈이 청나라 베이징 천주교당에서 영세를 받았다. 영세명은 베드로. 그는 교리서적과 십자고상을 가지고 조선에 귀국했다.


최초의 천주교 영세 신자가 된 이승훈.

 

“1783년 이승훈의 부친이 청나라로 가는 사신의 한 사람이 되자 그도 일행에 끼어 북경에 머무는 동안 그라몽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고 이로써 조선 최초로 영세를 받은 신자가 되었다. 귀국 후 이벽 이가환 정약종 형제들에게 세례를 주고 명례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을 신앙 집회 장소로 정하여 포교 활동을 했다.”

김범우는 이승훈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해서 동생들과 가까운 친지들을 입교시켰다. 1785년 서울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창설예배가 열렸다. 한국에서 천주교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 바로 이때부터다.

그날도 김범우의 집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용 형제 등이 모여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마침 형조 관리가 지나가다가 도박판이 열린 것으로 의심하고 수색하기 시작했다.


1785년 봄 명례방(지금의 명동성당 부근)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공동체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 이승훈, 이벽, 권일신, 정약용, 정약진 등 젊은 학자들과 청지기, 하인들이

신분을 초월하여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을 나누는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집을 수색한 끝에 예수 화상과 천주교 서적을 발견하여 김범우 등 여러 사람이 형조로 끌려가게 되었다. 형조판서는 이 가운데서 양반층은 타일러 돌려보내고 김범우는 가두었다가 문초하여 김범우가 자신은 천주교 신자라고 주장해서 단양으로 귀양보냈다. 김범우는 귀양가서도 포교활동을 하다가 장형을 맞은 상처가 덧나 일 년 만에 죽음으로써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것이 소위 주리를 트는 모습이다.  악형은 이미 영정조시기에  법으로 금지되었으나

천주교 박해 때는 다시 되살아나 배교를 강요당하는 혹독한 형벌로 부활하였다.

 

김범우와 함께 체포된 이승훈은 양반이라는 이유로 요즘말로 하면 훈방조치되었다. 그러나 1787년 천주교 교리를 강론하고 사제 대행권자로 주일미사와 영세를 행하는 등 적극적인 교회활동을 시작했다.

 

17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예산에 유배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다. 이후 이승훈의 집안에서는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나왔다.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와 균구가 순교한 것이다.

평신도의 미사집행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게 된 조선의 천주교도들은 북경주교에게 사제파견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에 사제로 입국한 사람이 중국인 신부 주문모이다. 이후 주문모 신부는 엄격한 감시 속에서도 쉬지 않고 포교활동을 한다.


주문모 야고버 신부.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자신 때문에 박해받는 교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국경까지 몸을 피했다가 '목자는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한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 돌아와 자수하고 처형된다. 주문모 신부가 효수형을 당할 때 청명하던 하늘이 순간 천둥이 울고 번개가 쳤다고 한다.

“대대적인 천주교도 색출이 이루어지고 3백여명이 처형당했다. 이 무렵 천주교 교인이 이미 만여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이 탄압을 피해 전국 각지로 흩어져 숨어살며 천주교를 포교하게 되자 오히려 서울에 집중되어있던 천주교가 전국 각지에서 신봉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는 꾸준히 성장해서 1831년에는 한국교구가 독립하게 되었다. 1845년에는 한국 최초의 신부가 탄생하는데 그가 김대건이다. 그해 8월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은 페레올(Ferreol J.J) 주교와 함께 비밀리에 입국, 포교활동을 펴다가 체포돼 서품받은지 겨우 1년여만인 1846년 9월에 순교한다.


김대건 신부와 103위 순교성인.

 

1804년 순조가 열다섯 살이 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세도정치는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를 국왕이 장악하는 원칙에서 벗어나 이를 국왕의 위임을 받은 다른 인물이 행사하는 데서 명칭이 비롯되었다. 국왕이 世途를 위임하는 경우는 그 전에도 있었으나(정조 초에 홍국영) 외척인 경우는 없었는데, 순조가 세도를 위임한 인물이 국왕의 외척인 것에 대해 비판적 관점에서 세력 세자를 쓴 勢道정치라 부르기 시작했고, 19세기 동안 왕실의 외척에 해당하는 주요 가문 출신 관료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양상이 지속되었다.”

일 년 후 정순왕후가 숨을 거두자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세도정치의 첫 장을 열었다. 사실 그는 어떤 종류의 벼슬도 사양하면서 국왕을 보필하는데 전념을 다했지만, 막상 조정의 요직을 차지한 이들은 김조순의 가문인 안동 김씨 사람들이었다.


정조의 유탁을 받아 순조를 30여년 간 보필하였던 영의정 김조순.

그는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기틀을 마련되었다.

 

견제할 세력이 없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매관매직이 이루어지고 정치기강이 무너졌다. 권력의 독점은 조선 사회 곳곳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부농층과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한 상인 등 경제력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던 중간세력을 정치적으로 포용하려고 영조, 정조 등이 노력했는데, 19세기에 정치적 반동현상이라 할 세도정치가 전개되면서 그 희망이 좌절되었다. 이러한 점은 농민층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경제적 성취를 더 늘릴 수 있다는 희망이 좌절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권력의 핵심에 줄을 대어 독점권 형태의 특권을 확보하면 대상인, 대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권력이 삶을 좌우하는 양상이 이 시기에 들어와 더 심해지게 되었고, 결국 곳곳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민중항쟁의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

민중항쟁은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에 이르러 정점에 달한다.

홍경래는 농민이 아니라 평안도 용강 출신의 양반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몰락한 가문이라서 형편이 사실상 농민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유랑 지식인으로 여러 곳을 떠돌면서 서당 훈장이나 남의 묘자리를 봐주는 지관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생활이 얼마나 고달픈지 목격했다.

 

홍경래와 농민봉기.

 

특히 서북지역의 백성들은 조선 건국 이래 4백여년 동안 대대로 인재등용 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소외되어 온 지역이었다. 서북인들의 원한은 쌓일 대로 쌓였고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든데다 가혹한 세금착취는 서북사람들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평소 중앙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부농과 상인들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은 홍경래는 광산노동자와 농민, 유민들을 흡수해서 군대로 삼았다.


1811년 11월18일 출병한 수천명의 군대는 백성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 열흘 만에 이북의 10개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곧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반란군이 서울로 진격하는 시기를 놓쳐 중앙에서 진압군을 조직해서 내려보내고, 중앙권력과의 유대를 강화해서 지역사회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거나 독점권 무역권을 강화하려고 하는 평안도 세력자들이 홍경래 반란군 진압에 앞장서게 되어 반란에 실패했다. 그런데 진압군이 가혹하게 주민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자... 많은 농민들이 적극 저항하여 4개월이 지난 뒤에야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1812년 관군이 정주성에서 홍경래 군을 포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신미년 정주성 공위도' 이다.

 

홍경래가 죽은 뒤에도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가 하면 홍경래의 난에서는 소극적인 입장이었던 소농과 빈민층들이 이후 반란에서는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나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홍경래의 난은 1894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동학농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홍경래의 반란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민간에는 홍경래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비록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백성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백성들은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http://world.kbs.co.kr/korean/network/network_click_detail.htm?No=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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