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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세옥의 전통건축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황세옥
천주교 박해와 홍경래의 난 초기 천주교 교회의 미사 모습.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아들 공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의 스물 세번째 임금인 순조다. 임금의 시호는 그의 업적에 따라 사후에 내려진다. 덕이 높은 왕에게는 ‘종’을, 왕조를 창업한 임금과 공을 세운 임금에게는 ‘조’를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순조의 경우엔 그의 재위 기간 중 천주교를 물리치고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것이 공으로 인정되어 시호에 ‘조’가 붙여진 것이다. 순조 연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와 홍경래의 난을 살펴 본다. ‘기해박해’ – 샤스탕, 모오방, 앙베르 3인의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되는 사진으로 천주교 박해의 귀중한 사료다.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탄압했던 구실은 천주교가 조선의 지배윤리를 뒤흔드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집권세력의 반대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천주교 영세 신자가 된 이승훈.
“1783년 이승훈의 부친이 청나라로 가는 사신의 한 사람이 되자 그도 일행에 끼어 북경에 머무는 동안 그라몽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고 이로써 조선 최초로 영세를 받은 신자가 되었다. 귀국 후 이벽 이가환 정약종 형제들에게 세례를 주고 명례동에 있는 김범우의 집을 신앙 집회 장소로 정하여 포교 활동을 했다.” 1785년 봄 명례방(지금의 명동성당 부근)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공동체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 이승훈, 이벽, 권일신, 정약용, 정약진 등 젊은 학자들과 청지기, 하인들이 신분을 초월하여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을 나누는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집을 수색한 끝에 예수 화상과 천주교 서적을 발견하여 김범우 등 여러 사람이 형조로 끌려가게 되었다. 형조판서는 이 가운데서 양반층은 타일러 돌려보내고 김범우는 가두었다가 문초하여 김범우가 자신은 천주교 신자라고 주장해서 단양으로 귀양보냈다. 김범우는 귀양가서도 포교활동을 하다가 장형을 맞은 상처가 덧나 일 년 만에 죽음으로써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것이 소위 주리를 트는 모습이다. 악형은 이미 영정조시기에 법으로 금지되었으나 천주교 박해 때는 다시 되살아나 배교를 강요당하는 혹독한 형벌로 부활하였다.
김범우와 함께 체포된 이승훈은 양반이라는 이유로 요즘말로 하면 훈방조치되었다. 그러나 1787년 천주교 교리를 강론하고 사제 대행권자로 주일미사와 영세를 행하는 등 적극적인 교회활동을 시작했다.
17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예산에 유배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다. 이후 이승훈의 집안에서는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나왔다.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와 균구가 순교한 것이다. 주문모 야고버 신부.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자신 때문에 박해받는 교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국경까지 몸을 피했다가 '목자는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한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 돌아와 자수하고 처형된다. 주문모 신부가 효수형을 당할 때 청명하던 하늘이 순간 천둥이 울고 번개가 쳤다고 한다. 성 김대건 신부와 103위 순교성인.
1804년 순조가 열다섯 살이 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고,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정조의 유탁을 받아 순조를 30여년 간 보필하였던 영의정 김조순. 그는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기틀을 마련되었다.
견제할 세력이 없는 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매관매직이 이루어지고 정치기강이 무너졌다. 권력의 독점은 조선 사회 곳곳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홍경래와 농민봉기.
특히 서북지역의 백성들은 조선 건국 이래 4백여년 동안 대대로 인재등용 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소외되어 온 지역이었다. 서북인들의 원한은 쌓일 대로 쌓였고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든데다 가혹한 세금착취는 서북사람들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1812년 관군이 정주성에서 홍경래 군을 포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신미년 정주성 공위도' 이다.
홍경래가 죽은 뒤에도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가 하면 홍경래의 난에서는 소극적인 입장이었던 소농과 빈민층들이 이후 반란에서는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나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홍경래의 난은 1894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동학농민항쟁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홍경래의 반란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민간에는 홍경래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비록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백성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백성들은 봉건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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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주교 박해와 홍경래의 난|작성자 햇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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