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론 상권
3. 일과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하다
【經】
“또 수보리야, 보살은 일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布施)를 행해야 하느니라.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하나니,
빛깔[色]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해야 하니, 모습이라는 생각에도 머물러서는 안 되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모습이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의 덩어리는 생각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생각으로써 동방(東方)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수보리야, 그러면 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간방[四維:동북ㆍ동남ㆍ서북ㆍ서남]과 위아래의 허공을 생각으로써 헤아릴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어떤 모습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복덕의 덩어리도 이와 같아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오직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해야 하느니라.”
【論】
게송으로 말하리라.
단(檀:布施) 바라밀에는 여섯 바라밀의 뜻이 포함되어 있네.
자생시(資生施)와 무외시(無畏施)와 법시(法施)가 있어
여기에 하나와 둘과 셋을 포함하고 있으니,
수행주(修行主)라 부른다.
[하나와 둘과 셋:
하나라는 것은 단(檀:布施)바라밀이니 자생시(資生施)에 해당하며,
둘이라는 것은 시(尸:持戒)바라밀과 찬제(羼提:忍辱)바라밀이니 무외시(無畏施)에 해당하며,
셋이라는 것은 유체(惟逮:精進)바라밀ㆍ선(禪:禪定)바라밀ㆍ반야바라밀이니 법시(法施)에 해당한다.]
무엇 때문에 오직 단바라밀만을 설명하고서 여섯 바라밀을 다 설명했다고 말하는가?
일체 바라밀은 단(檀:布施)의 모양과 뜻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일체 바라밀에 단의 모양과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곧 자생단(資生檀:財施)바라밀과 무외단(無畏檀:無畏施)바라밀, 법단(法檀:法施)바라밀을 말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그 뜻은 무엇인가?
자생이란 곧 하나의 단바라밀이니 자체의 이름만 있기 때문이요,
무외단바라밀이란 두 가지가 있으니 시(尸:持戒)바라밀과 찬제(羼提:忍辱)바라밀을 말한다.
이미 지었거나 아직 짓지 않은 악(惡)에 대하여 조금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법단바라밀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비리야(毘梨耶:精進)바라밀 등을 말한다.
그것은 피곤하거나 게으르지 않기에 훌륭한 지혜의 마음으로 여실(如實)하게 설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보살마하살의 수행주이다.
앞에서 세 가지 단(보시)이 여섯 가지 바라밀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마하살의 수행주라고 한다.
어째서 보살은 일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만 하는가?
이 같은 것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자기의 몸과 은혜에 대한 보답
그리고 과보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자기를 보호하거나 존양(存養)하기 위해 보시하지 않으며
다른 일에서 구하는 것을 방지한다.
‘일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집착하지 아니함을 말한 것이요,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 있을 것이라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은혜에 대한 보답’이란 공양(供養)과 공경을 받는 등의 갖가지 일을 말한 것으로서 마치 경에서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빛깔 등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과보(果報)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 데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만 하는가?
게송에서 말하기를,
“자신을 보호하거나 존양하기 위해 보시하지 않으며, 다른 일에서 구하는 것을 방지한다”라고 하였다.
만약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집착하면 보시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제 몸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것이며,
만약 은혜에 대한 보답과 과보에 집착하면 불보리(佛菩提)를 버리고 다른 뜻을 위해 보시를 행할 것이므로 이러한 행위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 아래는
“보살은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에 대한 설명이니,
이 일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降伏) 받는 것이기에 항복이라고 말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러한 일을 조복(調伏)시켜야 하나니
모양에 집착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가지가지 의혹을 끊어 없애야
또한 생겨나는 마음을 방지할 수 있다.
이 글은 무슨 뜻을 설명한 것인가?
보시하는 물건과 보시를 받는 이, 보시하는 사람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게송에 이르기를
‘저러한 일들을 조복시켜야 하나니, 모습에 집착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어야 한다’라고 말한 이유가 그것이요,
경에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해야 하니, 모습이라는 생각에도 머물러서는 안 되느니라”라고 말한 이유가 그것이다.
다음에는 보시로 얻는 이익에 대한 설명이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서
‘만약 보시 등의 모습에 대한 생각을 여읜다면 어떻게 보시의 복을 이룩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이 생겨났는데도
그 사람이 이와 같이 보시를 하면 틀림없이 그 복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도 보시로 얻어지는 이익에 대한 설명이니,
경에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모습이라는 데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그 복덕의 덩어리는 생각으로써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생각으로써 동방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내용에서 무엇 때문에 먼저 수행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다음에 보시로 얻어지는 이익에 대하여 밝혔는가?
마음을 항복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다음에 보시로 얻어지는 이익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 뜻이 무엇인가?
모습이라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 이 아래의 일체 수다라(修多羅)는 의심이 생겨날 것을 끊어버리는 일에 대하여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떤 의심이 생겨나는가?
‘만약 모든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행한다면 무엇 때문에 불보리(佛菩提)를 위해서 보시를 행하는 것일까?’라고 할 것이므로 그런 의심을 끊기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