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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삼계경 중권[3]
[오는 세상에 이 경을 지니는 사람의 세 가지 이름]
가섭아, 오는 세상에 이 경을 지니는 사람은 세 가지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 세 가지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단멸(斷滅)을 말하고,
이른바 물(物)이 없음을 말하며,
음취(陰聚)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그래서 공경을 받지 못할 것이다.
가섭아, 그 때에는 이런 경은 비방을 받을 것이다.
가섭아, 그대는 보라. 그 때에는 부처님[佛]을 공양하지 않고 법(法)을 공경하지 않으며 승(僧)을 공경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부처님ㆍ법ㆍ승을 공경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승이라 하겠는가?
다만 말을 의지하고 명자(名字)를 의지할 뿐일 것이니,
비록 부처님 이름을 대중들에게 설명하더라도 무엇이 부처인지 그것은 보지 못하고,
입으로는 법을 말하면서도 여래 세존께서 어떻게 설법하시는지는 알지 못하며,
4향(向)과 4득(得)과 불세존의 성문승(聲聞僧)을 말하면서 그 이름은 고루 다 알아도 이름을 의지하는 실덕(實德)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 등의 인연을 위하기 때문에 법을 훼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그곳에서 정진하면서 이런 경을 즐거워하고 수지 독송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이 사람은 오는 세상에 법의 성[法城]을 지키기 때문이니, 왜냐 하면 91겁 동안에는 이 공법(空法)을 연설하는 것을 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섭아, 나는 지금 지난 세상의 천 겁을 생각한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으니, 그 이름은 적멸(寂滅)이요 수명은 8만 4천 세인데, 보살을 수호하고 세간을 이롭게 하셨다.
또 여래께서 계셨으니, 이름은 이구(離垢)요 수명은 21겁이며, 보살도를 행한 뒤에야 위없는 도를 이루셨느니라.
가섭아, 그대는 보아라. 여래는 얼마나 어려운 일을 행하여 모든 중생들을 끌어안는가?
가섭아, 겁탁(劫濁)이 다할 때는 이들을 나무라지 말라.
왜냐 하면 가섭아, 겁탁이 다할 때에 만일 어떤 한 사람이라도 이 법을 믿으면 그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이 법을 믿으면 그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는 이 법을 믿는 이는 칼이나 막대나 돌멩이의 해침을 받지 않아 매우 희유할 것이다.
왜냐 하면 가섭아, 이 법은 크고 좋은 대장부의 법이니, 이른바 일체의 행은 행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견(我見)ㆍ중생견(衆生見)ㆍ수명견[命見]ㆍ인견(人見)ㆍ유견(有見) 등에 집착하면 그는 이 법을 알 수 없느니라.
견(見)에 의지한다는 것은, 계견(戒見)ㆍ불견(佛見)ㆍ법견(法見)ㆍ승견(僧見)ㆍ열반견(涅槃見)에 의지하는 것이다.
만일 열반견을 일으키면 여래께서는 그것이 다 사견(邪見)임을 아신다.
왜냐 하면 가섭아, 여래께서는 열반이 없고 열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가섭아, 만일 열반이 있고 열반을 얻는다면 여래께서는 그것을 사견이라 하신다.
만일 사견이 있으면 그것을 무지(無智)라 하고,
만일 무지의 해(害)를 받으면 그는 우치한 범부요,
만일 우치한 범부라면 천상에 나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부처님의 보리(菩提)이겠는가?
가섭아, 오는 세상의 비구들은 나이 20, 30, 40, 50, 60, 70, 80 나아가 백 세가 되도록 늙어도 지혜가 없고, 옷을 장엄하고 머리를 깎아 형상을 허물어뜨리더라도 우치한 노인으로서 위덕도 없고 삿된 업을 지을 것이다.
그리하여 임종 때에는 다시 악을 짓고 계법(戒法)을 파괴할 것이니, 그는 세 가지 일로 간사하고 남을 속일 것이다.
세 가지란 어떤 것인가?
위의(威儀)를 나타내 보이고 계를 지님을 나타내 보이며 선인(善人)인 체 행하는 것이다.
상을 드러내는 이런 법으로 덕을 드러내면서 큰 교만에 떨어졌다가 회한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마칠 것이니,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섭아, 나는 말하노니, 나는 너희들의 참 벗이 되리라.
그리하여 나는 너희들을 가르치고 너희들을 이롭게 하며 너희들을 가엾이 여겨 이 뒤에 큰 고뇌를 받지 않게 하리라.
가섭아, 나는 마침내 견(見)에 집착하는 중생들이 출가를 얻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아견과 중생견과 수명견[命見]에 집착하고 인견(人見)에 집착한 사람으로서 출가를 얻었다는 말을 나는 실로 듣지 못하였다.
굳이 내 법에서 출가하여 중한 신시(信施)를 먹는다 해도 거기에는 진실한 계를 지니는 공덕이 없느니라.
가섭아, 사람으로서 차라리 엿새 동안 음식을 끊을지언정 아견ㆍ중생견ㆍ인견ㆍ수명견 나아가 열반견에 집착하여 신시를 받아먹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보살은 그 중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아견으로부터 열반견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가섭아, 이런 경을 이런 모든 훌륭한 장부들에게 부촉한다. 왜냐 하면 이런 사람들의 행은 내 행과 같기 때문이니, 이런 사람들은 곧 내 짝이요 내 친구이니라.”
그때 세존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고뇌를 받는 모든 중생들
구호하는 이 아무도 없다.
세상을 인도하는 스승과
희론(戱論)하지 않는 이 제외하고는.
고뇌를 받는 모든 중생들
도가 낮은 이를 의지하다가
온갖 욕심만 차츰 늘어나
그 때문에 악도(惡道)에 떨어진다.
길잡이 없고 이익도 없는
험준한 곳에 살면서
바르지 못한 길로 나아가나니
마침내 아무 안온함 없다.
마치 많은 재보 가지고
이익을 구해 광야를 가다가
거기에 도적 떼 일어나
모두 겁탈 당하는 것과 같다.
재물을 빼앗기고 돌아와서는
이익을 잃고 더욱 고뇌하다가
남에게서 재물을 빌고
그 때문에 더 괴로워한다.
이들도 또한 이와 같아서
업을 짓고는 돌아오지 못하다가
본래 지은 선업[白業]으로
돌아와서는 이 재물 먹는다.
겁탈에 의지하는 자와
견해에 떨어진 범부들은
아견과 수명견과
또 인견에 집착한다.
아견과 인견에 의지하는 자는
공법(空法)을 말하는 비구를
비방하다가
빨리 악도에 떨어진다.
성을 내어 업을 지으면서
다시 서로 헐뜯고 업신여기며
비방하고 거짓을 말하나니
이것은 부끄러워할 것이다.
몸이 악하고 입이 악하고
의업(意業)이 극히 간사하며
온갖 견해에 굳게 집착하나니
이들은 극히 나쁜 곳으로 간다.
악한 법을 짓고는
악도에 빨리 이르러
온갖 고뇌 받지만
그를 구호할 이 없다.
오는 세상에는
분노가 왕성한 사람이
보리로 나아가는
저 비구를 몹시 핍박하리라.
자비 없는 사람은
이런 경을 헐뜯고
석사자(釋師子)의 법을
믿거나 공경하지 않으리라.
서로서로 다투어
큰 분쟁 일으키고
서로서로 헐뜯어
사방에 악을 흩날리리라.
온갖 비방을 지어
부끄러움을 아는 이를 나무라고
악한 자 세력 얻고
온순한 이 약해지리라.
바른 법 약해지고
악한 법이 횡행함을 알고
이 비구들이 떠나면
내 사랑하는 아들들이
어디로 가서 편안함을 얻으랴.
악한 자 제거하고
여기에 자비심 없어서
나의 이런 경들을
항상 생각하면서
도사(導師)는 이렇게 말했다고
이로써 스스로 즐거워하리라.
‘부처님께서 칭찬하시는
그들에게 나는 가리.
법이 무너지는 지금
유화한 이는 얻기 어렵네.’
혹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곳을 빨리 떠나서
큰 선인(仙人)이
위없는 도를 얻은 곳으로 가라’고 하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좋구나, 그 말씀 잘 하셨다.
도사는 이렇게 말했나니
모든 탑을 돌면서 예배하라 하셨다’고 하네.
‘차라리 이곳에 와서
보리수(菩提樹)를 즐길지언정
저 질투하는 자들이
성내어 다투는 곳에 가지 않으리.’
이 비구들은 곧 떠나
내가 말하는 데로 가서
다른 살 곳을 보았나니
이른바 부처님 계시는 곳이다.
거니시고 또는 앉던 곳
혹은 돌이나 또는 빈 곳
이런 곳에 모두 모여서
서로 마주해 자주 묻는다.
‘여기는 큰 선인께서
거니시면서 사용하시던 곳
부처님께서는 본래 여기 계셨지만
그곳은 보이는데 부처님은 보이지 않네.
여기는 위없는 선인(仙人)이
위없는 법을 연설하시던 곳
우리는 지금 뵈옵지 못하나니
유위(有爲)란 다 덧없는 것이네.
사람과 또 모든 귀신과
하늘과 용들이 모였을 때에
잘 설법해 기쁘게 하셨건만
우리는 뵈옵지 못하네.
계시던 곳 여기 왔나니
이른바 그 보리수 밑인데
우리는 여기 모여 와서는
바른 억념[正念]으로 잘 생각하네.
그때 세상의 길잡이께서는
위없는 그 보리를 얻으시어
마왕(魔王)의 무리들을 두렵게 했나니
그들은 저 야간(野干) 새끼 같았네.
여기는 본래 도량의 자리
그 여래께서 앉으시던 곳
과거 미래의 부처님들이
다 이곳에 앉으시었다.
그 이는 용감하고 건장한 어른
억(億)의 하늘의 공경 받으며
이레 동안 가부하고 앉아
이 보리수를 관찰하셨네.
이 어른은 공양 마치고
다시 설법할 자리로 나아가
여기서 법륜을 굴리실 때에
그 소리는 범세(梵世)에 들리었네.’
이 비구들 거기 가서
자꾸자꾸 모두 울었다.
‘용감한 어른 여기 오시어
이 다섯 사람 제어하셨네.
이 다섯 사람 부처님 보고
곧 근심과 괴로움 생겨
나쁜 일을 공모하고는
다 일어나지 말자 하였네.
크게 자비하신 세존께서는
그들을 슬퍼하는 마음을 내어
그 다섯 비구를 위해
감로(甘露)의 법을 연설하셨네.’
법륜을 굴리신 그곳에 예배하고
다시 모두 자꾸자꾸 울다가
다시 열반하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곳을 보았다.
‘그때 세상의 길잡이께서는
많은 중생들을 이롭게 하시려고
그 몸을 가루로 내었나니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멸도에 드셨네.
아아, 불세존이시여
석사자(釋師子) 능인(能仁)
지금은 오직 그 이름만 들을 뿐
그 모습은 볼 수 없구나.’
이것은 최상의 선인으로서
선현(善賢)이 그 최후인데
큰 지혜는 그런 줄 아시고
이 내가 최후라 하셨네.
혹은 노닐다 목숨 마치고
혹은 살던 곳에서 목숨 마쳤다.
노닐다 마침내 목숨 마치고
그들은 다 좋은 곳에 왕생하셨다.
이 뒤 말세 때에
이 불법을 널리 펴실 이
그는 열반을 얻으리니
깨끗한 계율에 살던 자이리라.
계율을 허는 비구이면서
그래도 두루 공양 얻으면
그 귀중한 공양 먹고는
빨리 저 악도에 가리라.
이 비구를 보라.
이와 같이 차등이 있지만
지혜로운 이는 목숨 마치면
빨리 저 천상에 난다.
이들은 세상을 비추는 등불
세상을 가엾이 여기는 사람
큰 지혜로운 보살은
자비심으로 중생을 이롭게 한다.
일을 경영하는 사람들 속에서
기뻐서 뛰는 마음으로
‘나는 장차 부처가 되고
또한 미륵불을 만나게 되리라.
저 세존께 공양하면
일체의 대중 앞에서
일체지(一切智)께서 내게 기별 주시리니
그것은 내 생각대로이네.’
그이는 큰 세력 있다고
나는 이런 뜻을 말하노니
비록 그 부처님 보지 못해도
마주 보는 것과 같음을 알아라.
내가 그를 안위시킴도
그 또한 이와 같아서
보리분(菩提分)을 다 수행하고
일체 부처님께 예배하노라.
만일 어떤 여자가
위없는 보리를 향하면
나 또한 그녀를 안위시키어
저 한량없는 여래께 미치게 하리라.
여자의 몸을 버리고
빨리 남자의 몸을 이루어
미륵불을 보게 되거든
그 이를 공양하여야 한다.
일체의 구하는 바가
모두 그 뜻대로 되어
지혜로운 이를 따라 배우되
왕성하고 굳은 욕심을 내라.
그 견고한 욕심 가지고
계율 지니고 많이 들으면
미륵불에게서
기별을 받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런 이익 듣거든
어질고 착한 믿음을 내고
굳게 믿고는 다시 나아가
일체 중생을 끌어안아야 한다.
그 누가 이런 곳 구하다가
비록 얻지 못하더라도
슬기롭고 정진하면
보리를 얻기 어렵지 않으리라.
아첨하는 마음 짓지 않고
인자한 마음 닦아 행하며
항상 한가한 곳에 있으면
그것을 보리행이라 한다.
이런 곳을 버리고
보리 있는 곳만 말하면
그는 크게 탐하는 도적이니
모두들 그를 멀리 떠나라.
만일 음식과 그리고
이양(利養)의 일만 위하여
거짓으로 바른 법 잡는 척하고
서로 다투어 연설하면
이것은 깨끗한 삶이 아니요
우치로 살아가는 것이니
온갖 악의 해침을 받고
악도의 침노와 핍박당하리라.
이것은 한맛[一味]의 법문인데
저 거짓 이름만의 비구는
이와 같은 법과 해탈과
그리고 계율을 비방한다.
만일 계율을 지니는 이나
내가 금계(禁戒)의 법을 말하면
형상만의 비구는 비방하리니
그는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
일체 하늘과 세간이
다 버리고 떠날 것이요
일체지의 세존께서는
더구나 그런 사람 떠나리라.
만일 몸에 악업이 없고
입에도 또한 악업 없으며
의업이 다 청정하면
그는 열반에 빨리 이르리라.
[말세 때에는]
“가섭아, 여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에 차례로 닥칠 말세 때에는, 어떤 비구는 과거 부처님에게 선근을 심어 모두 열반에 들고, 순수하고 선한 중생들은 다 목숨을 마치고 떠날 것이다.
그리고 뒤 5백 세 때에는 어떤 비구는 탐하고 구하여 만족할 줄 모르고 성내어서는 각기 헤어지며, 추잡하고 악독하여 성낸 얼굴을 찌푸리면서 세 가지 법에 머물 것이다.
세 가지란 어떤 것인가?
의술을 오로지 닦고 장사하고 살며 여자를 친근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법에 머무르면 네 가지 법을 잃을 것이니,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계율의 무더기를 잃고,
선한 도를 잃으며,
과증(果證) 얻음을 잃고,
여실히 보는 법을 잃는 것이다.
이 사람이 이 네 가지 법을 가지면 다시 네 가지 법이 더욱 치성해진다.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질투가 치성하고,
분노가 치성하며,
남의 집을 탐함이 치성하고,
이양(利養)을 탐착해 저축함이 치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옷을 탐하고 사랑하여 옷상자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지마는, 빈손에 가진 것이 없으며 사문의 법도 없다.
그리하여 그는 이 법을 들으면 네 가지 법에 떨어질 것이니,
그 네 가지란 어떤 것인가?
법을 비방함에 떨어지고
때를 모르고 말하며
여자만을 위해 설법하고
계율을 범하는 것이니,
이 법을 듣고는 이런 재앙에 떨어지느니라.
가섭아, 마치 사나운 개의 코를 때린 것과 같나니,
가섭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개는 더욱 사나워지지 않겠는가?”
가섭이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더욱 사나워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이 악인들은 저 사나운 개와 같고 비사차(毘舍遮:8部衆의 하나)와 같다.
만일 뜻이 깨끗한 비구가 이런 법을 지니고 이런 법을 연설하면서 진실로 욕심이 적고 욕심이 적은 것을 칭찬하면, 이들은 이 말을 듣고는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믿지 않는다.
그리하여 겁에 빠지고 뜨거운 번뇌를 내며 다시 더욱 성내거늘, 장차 어떤 업에 머물겠는가?
아직 때는 오직 않았지마는 나는 지금 미리 말하였다.
그는 이 경을 들으면, 비방하면서 창에 찔린 듯이 크게 성을 내어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라고 할 것이며,
욕심이 적은 이를 헐뜯는 자는
‘이 사람은 욕심이 많은 자요 욕심이 적은 이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가섭아, 나는 항상 갖가지로 욕심이 적은 이를 찬탄하고 만족할 줄 아는 이와 잘 포살(布薩)하는 이와 함께 있기 쉬운 이와 두타(頭陀)를 행하는 이와 아련아처(阿練兒處)에 머무는 이와 깨끗이 사는 이를 찬탄하나니, 너희들은 저 온갖 악을 행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라. 왜냐 하면 이것은 재가법이기 때문이다.
이 법으로 남을 침노해 속이지 말라.
그리고 이 재가법으로 너희들은 크게 성내지 말며, 너희들은 많은 재물을 모으지 말고 뇌물을 버려야 한다.
너희들은 부디 이상한 상을 나타내어 자신의 덕을 자랑하지 말며,
너희들은 너무 아쉬워하여 많이 쌓아 두지 말며,
너희들은 낙타ㆍ말ㆍ소ㆍ나귀 등을 기르지 말라.
너희들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불선법을 끊고 선법을 닦아 모아야 한다.
가섭아, 나는 항상 갖가지 인연으로 아련아처와 청정하고 고요함과 친근한 집을 떠나는 것을 찬탄한다.
뒤 말세 때에는 나의 이 법을 어기리라. 나의 법을 어기고는 온갖 근심을 만들고 바른 법을 훼방하려 할 것이다.
가섭아, 마치 어떤 사람이 더울 때에 소유[蘇]를 마시는 것과 같다.
마시고 나서 갈증을 염려하여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물을 좀 주시오’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답하기를
‘훌륭한 대장부여, 그대가 물을 구하지 않고 소유를 마셨기 때문이니, 그대는 이로 말미암아 곧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분노하여 이 사람을 꾸짖으면서 이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마시고는 곧 죽었다.
[견해에 집착하는 자]
이와 같이 가섭아, 미래의 비구로서 견해에 집착하는 자는 온갖 악에 머무른다.
그래서 이 비구는 말하기를
‘이 일은 머물러 있어야 하고, 이것은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도리어 헐뜯고 비방하고 이런 경과 여래의 교법(敎法)을 비방한다.
가섭아,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도리어 여래와 다투느니라.
가섭아, 그대는 우선 저 현호(賢護) 비구를 보라.
여래가 계율을 제정할 때 다른 비구들과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이 경을 듣고는 성을 내어 석 달 동안 내게 오지 않았었다.
가섭아, 그 때에 범행을 청정하게 완전히 갖추어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멸도한 뒤에 음식에 탐착하고, 의복ㆍ발우ㆍ침구ㆍ의약에 탐착하며, 잠에 덮이고 분노가 왕성한 사람이 이러한 경을 들음이겠으며, 그들은 불여래도 공경하지 않거늘 하물며 법다이 행하는 다른 비구이겠는가?
가섭아, 이런 법이 이미 없어졌다는 것은 극히 좋지 못하고 매우 좋지 못한 일이다.
가섭아, 만일 선남자가 좋은 이익을 구하고자 하면 나의 이 법을 믿어야 한다. 뒤 말세 때에는 탁하고 악한 재변이 있을 것이다.
내 법이 끝날 때에는 말세의 잔재로서 분노가 왕성할 때에는 선인은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 때에는 만일 누가 이런 깊은 경을 들으면 그 사람을 믿어야 한다.
즉 그는 상응을 짓고 상응하지 않음이 아니며, 그 말을 믿어 받들고 믿어 받들지 않음이 아니다.
가섭아, 나도 지금 말하기를
‘상응하고 상응하지 않음이 아니며 믿지 않는 것이 이니다’라고 한다.
가섭아, 마치 사나운 말을 길들인 말과 한 멍에에 채운 것과 같다. 고요하여 아무 소리가 없어도 순종하지 않겠거늘 하물며 고둥을 불고 종을 치며 북을 두드린다면 어찌 그것을 잘 참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섭아, 계를 깨뜨린 비구가 훌륭한 장부의 법을 참는다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가섭아, 또 마치 사나운 말을 채찍으로 한 번 치면 이 말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가섭아, 만일 나가 없다는 공법(空法)을 한 번 들으면 아상(我想)에 집착하는 자는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다툼을 일으키거늘 하물며 자세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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