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고가 인물 요약>
김원주(1907~1995)-88세 사망—
아명: 소저/서선(서조선 평안도)의 구롬보(검둥이의 일본말)
-서문여고 (평양여고) 입학-피겨스케이트 선수, 테니스 주장
- 일본 청산학교원에 합격했으나, 아버지 반대로 은사 기쿠치 선생의 주선으로 구 이왕직의 관비 장학생으로 일본 고등잠사학교 졸업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일본어: 青山学院大学 아오야마가쿠인다이가쿠[*], 영어: Aoyama Gakuin University)은 도쿄도 시부야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일본의 명문 사립 대학이다. MARCH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백석 시인이 졸업한 대학으로 유명하며,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의 두아들 신동주, 신동빈이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의 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의 약칭은 아오가쿠(일본어: 青学), 아오가쿠다이(일본어: 青学大) 또는 아오야마(일본어: 青山).
-아버지가 딴살림을 차리자 서울로 상경 개벽사 기자생활. 그 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 생활
오일도(본명 오희병-술에 취해 안국동 파출소에 오줌을 싼 사람) 소개로 성유경과 만남. 서해 최학송이 급사한 사건으로 가까워 짐
*김원주 어머니는 장신 백석의 귀공자 윤석중을 의중을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윤석중이 명륜동에 살았음/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 듯 우리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윤석중이 김원주에 보낸 시, 이 일로 성유경과 말다툼이 있었음, 이 시는 졸업식 1절 가사가 됨.
*이강국이 유학중이 독일로 유학 갈려고 했지만, 성일기가 1933년 동경 우시고메에서 태어나 유학을 포기 함.
**김일엽(본명 김원주(元周)은 김원주와 음이 같았음 한국 최조 <새여자> 주간을 지냈으며 후에 수덕산에 입산 함.
고향 선배 도산 안창로를 흠모 함, 상해를 갈려고 했는데, 도산이 체포되어 불발됨.
- 1933년 26살 : 성유경과 결혼
-1945년 :결혼 생활 13년간
-1945년 : 여성동명<부녀조선> 주간
-1948년 4월18일 12살 혜림 늑막염 앓다
-1960년 노동신문에서 평양신문으로 좌천
2.성유경(1904~1992)
-7세부터 서당을 다님, 17세까지 지양강습소에 다님
-14살에 결혼(딸 셋 낳음- 성혜란-나중에 빨치산 활동)
-17살 서울상경, 서울에 백림대학, 케임브리지 대학에 있다는 말을 듣고, 큰아버지와 아버지에 잡혀 옴
-18세 다시 달아나서 보성중학교 1학년 ㅇ비학, 다른사람들 4학년 임화(3학년) 이강국(4학년)
-19세 일본감 60원 훔쳐감,
-1925년 유원우 소개로 간다기독교회관에서 강사 다카스세이토 사회주의 강의에 이끌림
-마르크스주의 학습 2차례 유치장 신세. 유치장에서 얻은 병으로 서울서 치료 기간에 서울서 김원주를 알게 됨.
-동경외국어학교 2학년 시간회 동경지부 사건 관련되어 윤길현, (자유당 함안 출신 국회의원)과 투옥됨, 축옥후 귀국해 신병 치료 함.
-김원주와 결혼을 위해 단식 투쟁을 함
-지주 보증인(이승엽과 이강국 간첩 누명을 씀)
-<노력인민> 성재경 대성출판 비밀리에 찍은 공산당 기관지/ <부녀조선> 김원주 노력으로 부담
-8.15 폭동 준비라는 날조 사건으로 3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1982년 4월13일 심근경색으로 사명 78세
-한국전쟁 주단(미군정에 있던 것) 소 두 마리에게 찰떡을 먹이고 싣고 가다가 포격으로 모두 불탐
-한 러 사전 5백권을 제작해서 월북, 대난 공작금 450만원을 받았으나, 돈암교 불심검문으로 모두 빼앗김, 조병옥과 장택사의 도움을 받음,
-1952년 5차 전원회의 이후 핍박
-헝가리 통조림 사장을 지냄, 위원장과 싸우 추방 됨/ 65세 퇴직 친구 조헌영과 만연을 함께 보밴
**형 성윤경
-서울과 대구에 여러 채의 집이 있었음. 명륜동 돈암동 수양버들 집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음.
3.성일기-成日(1933년~2021년)
아명: 몽이- 夢鯉(잉어 꿈)/빨치산 이름 차진철 동경출생, 일본 아키히토도 같은해 태어남
-홍양공파 26세손 22세이 아석공 화룡에서 살다가 석동으로 이사옴- 아석공파
-성일기는 인력거를 타고 등교를 함. 방학이면 재종숙 대경과 함께 창녕으로 내려 감.
_아석헌 : 윤용구 가 ㅡ양각을 하고, 아석정기는 허부가 쓴 글
-우포는 매기가 하품을 해도 물이 넘친다
-미군이 고니 사냥을 했다.
-토평천은 고암면에서 발원<어물레>들을 가로 질러 낙동강에 흘러 들어 감.
-일기가 창녕으로 내려오면 아석헌 어머니(성유경 첫째 부인) 마름을 시켜 마산에서 대구를 사옴
-참외서리를 하면면 원두막 사다리를 없앰.
-낙동강 멱감은 아낙데들 옷 훔치고, 쫒아오면 벼짚에 불을 붙임
-조영부(경성사범학교 학생) 사학과 복학생으로 제주주도 대정면 출신, 보성이 사람 대정초등학교 교장 아등
3년 이래 졸업까지 가정교사을 함. 아버지 상이 나자 성유경이 용이 새긴 양초를 줌- 김원주가 돈을 안주었다고 타박을 함. 김원주 말- 가난해 보지 못한 사람은 가난함 사람 사정을 하나도 모른다.
-어려서 폐문임파선 결핵을 앓음/ 방학을 이용해서 원산 송도 온천을 다님. 여름은 달포 반쯤 바람을 쐬고 옴, 계동 뒷집 박병천(화신백화점 박홍식의 아들) 과 동행., 친구인 이건섭(통천군 일대 핳아버지의 땅 지부) 이동철(이건섭 아버지 경남경찰국장, 경찰토벌대 사령관) 이동철 부인 김갑인을 작은 어머니라고 불렸음.,
영화<태양의 아이들>에 출연 시사회때 총독 나베가 와서 일본말을 잘하니까 <너는 조선인이 아니다> 라고 함. 일본말 잘하는 조선인은 힘들다. 조선인을 얇잡아 봄,
-가정교사 조영부가 독서회 사건으로 헌병대에 연행 되었는데, 공군 부대 사령관 <남곡 南谷稙-미마니다니 중좌에게 부탁해서 풀어주도록 함, 1945년 황해도 배천 온천 가는 길에 만나서 잘 지냄. 남곡은 가나자와 성주 차남임.
서울 예지동 200번지 수영사 인쇄소 대성출판사와 같은 회사임, 협성농산주식회사 운영.
-1943년 소학교 입학
-1946년 경기중학교 2차 구술 면접 시험에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 이야기 해보라는 질문에 소미공동회라고 함.
그래서 경기중학교 입학 대신 용산중학교에 입학함. 친구 문형조(소아과의사) DDT를 뿌린 것에 항의해 자퇴하고 성백능에게 1년간 가정교사에 공부 함.
-1947년 보성중학교에 입학 재종숙인 성대경과 함께. 입학생 중에 시계 찬 사람 두사람 한 사람은 세이코(원치규) 성일기는 유니버셜시계 1만 7천원 스위수 밀리터리워치 야광시계 임,
-1948년 2월26일 삼선교집을 나와 월북/
-1949년 5월~ 9월까지 강동학원(회령)에서 4개월간 훈련을 받음. 입교하자마자 충수염 수술을 받음, 한 살 위인 문옥회 군관이 24시간 병간호를 함.
*김상오(후일 인민군 군단장) 어머니에게 성일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전 함,
*고유섭: 28세때 부립 개성박물관장. 경성제국대 동기인 이강국, 유석균, 한기준이 송도에 위로차 감.
고유섭 제자로는 (호아수영, 진홍섭, 최순우가 있음)
*경성제국 3대 천재 유진오(1회) 이강국(2회) 허규(3회)
*이강국은 보성중학교 시절 성유경과 동창
**성혜분(성일기 이복 누이) 빨치산 활동을 함. 창녕 성씨고가에 숨어 있을 때 청도경찰서에서 손미라가 밀고한 단서가 됨. 청도경찰서와 창녕경찰서가 서로 공을 내세울 수 있어 특무대에 바로 밀고 함.
-김학윤이 일기를 생포했을 때 서울말을 쓴 것에 신기 했음, 서울사람을 우대 한 일,
-밀양 손박사댁 사랑채에서 일주이 쯤 머물렸음/ 판견대장 염희춘(일본 헌병출신) 대구특부대 본부 특무처장 이진용(보성전문 출신) 같은 학교하고 잘 대해 줌,
-고영섭(특무과 고참 문관) **오제도(빨갱이 잡는 검사)
-김창룡 특무대장에서 유학 허가증을 얻었으나, 1954년 김창룡이 죽자 무산 됨, 단국대 영문과 입학 그만두고 1년을 쉬었음
-1956년 금석학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교수 알선으로 성균관대 사학과에 입학
-1959년 졸업 재종숙 성대경(임국희는 사학과 동기)의 3년 후배가 됨.
-벽제 관산리 쇠자리골 움막집에서 10년간 기거/ 부평 플라스틱 사출기 공장에서 검사일을 함,
**1976년 김상선(74세)빨치산 시절 성일기를 좋아한 여성* 지춘남- 석방되어 운동권 사나이와 산다* 안병화(중학동기)
4. 성혜랑(1935~현재)
-12월 20일 태어남‘-1942년 서울사범대학교 부속 소학교 입학
-1943년 명륜동으로 이사
-경기여중에 입학 되었으나, 오빠가 경기중학교에 못가게 되자 진명여중에 입학
진명여중 진급 8월 여순사건 동맹휴학 사건으로 1년반 동안 자습
-1950년 3월 서울이화여중교 3학년 편입
-김일성 대학 물리수학과 졸업 같은과 이태순과 결혼. 아들 이일남, 딸 이남옥
*이태순 1968년 교통사고로 사망
*고종사촌 오빠 첫째 이문휘(보성전문) 둘째 이원장(은행일- 대구에서- 그뒤 대전에서 처형됨)
-1982년 아들 일남은 입학 수속 행방불명 14년간 비밀에 부쳐짐, 이한영 사업실패 성형수술
-1992년 딸 이남옥은 영국 탈출
1995년 모스크바에서 47년만에 오빠와 상봉/ 이일남과 옛 전화번호로 연결되 통화 함 통화 테이프 <월간조선> 우종찬 기자에게 3백만원을 받고 판매.
**소식을 전합니다(1994년.지식나라
*등나무집은 (일본인 오미야 집)
*이일남(가명 이한영) <대동강로영패밀리 서울잠행 14년-1997년 2월25일. 성남시 분단궁 한 아파트에서 머리 가슴 2발 총상으로 사망. 부인 김종은 *김대곤(전청와대 공보수석실 비서/전 동아일보 출판부장)
5. 성혜림(1936~
-1949년 서울사범부속대학교 소학교 입학
풍문여중 입학
- 시아버지 이기영(한설야의 쌍벽 <땅>, <두만강>, 조선의 고리키
19살에 맏며느리가 됨
*김정일(1946년 생)
-평양예술학교 졸업 조선문화예술 총연맹 위원장 이기영 아들 이평(동생 이종균 김정일과 절친)과결혼
-1959년 평양연극영화대학 졸업반에서 <분계마을에서> 주연 인민상을 받은.
1968년 캄보디아 프놈펜 영화 축전에서 시아누크 공이 칭찬-기자회견 테이블 스피치에서)
-1974년 신병치료차 모스크바에 감. 파리로바 거리 아파트 2002년 사망
1.성씨고가(더피플 권오철)
http://www.ithepeople.kr/news/articleView.html?idxno=20457
2.경남매일(오종식 해설사 참고 글)
https://cafe.daum.net/moonhawje/DjWn/10718?svc=cafeapi
3. 임국희 선생과 함께
https://cafe.daum.net/KBS88/NbKv/668?svc=cafeapi
4.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625751.html
5.족보 자세한 내용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625751.html
6.부산일보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80822000262
14-경남-창녕
해제
1. 전체 개관 및 주요 수집자료
2014년 창녕군의 14개 읍면 중에서 창녕읍, 대지면, 이방면, 대합면, 유어면, 성산면, 고암면의 7개 읍면과 경화회를 대상으로 근현대사 지역사 사료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총 193건 29,143장이 조사수집되었다.
창녕에는 영산의 3·1운동을 포함한 식민지기의 민족운동과 변화, 해방과 한국전쟁 시기의 격동, 1960, 70년대 경화회를 통한 자발적 농촌운동 등 근현대 유산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창녕은 경상남도에 속하지만 전통적으로 대구문화권과 가까우며, 현재도 구미고속도로를 통해 대구에서 접근성이 높은 지역이다.
이번 자료 조사에서는 최초 발굴한 『경화』를 비롯해 근대 묘지 관련 기록, 농지개혁 관련 기록 등을 집중적으로 수집하였다. 특히 경화회 자료조사는 한국 현대사회에 있어 자발적 농민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다만 경화회 건물의 신축 공사 관계로 일괄 수집을 다음해로 미루게 된 것이 다소 아쉽다. 또한 근대 묘지 관련 자료와 농지개혁 관련 자료를 일괄적으로 수집하였기에 묘제와 농지개혁 관련 연구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2. 경화회와 『경화(耕和)』
경화회는 1963년 한국 최초의 자발적 농촌․농민단체로 조직되어 지역 농민을 위한 농민 계몽과 농업 기술 보급 운동을 펼쳐 왔다. 특히, 경화회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활동을 시작했기에 한국 현대 농촌운동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경화회는 1909년 창녕에 양파재배를 최초로 시작했다는 성찬영의 손자인 성재경의 주도로 조직되었다. 성재경(1916~1981)은 일제강점기에는 사비를 털어 ‘지양 강습소’라는 학교를 세워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될 때까지 인재를 양성했다고 하며, 한국전쟁 이후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양파 재배법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화회는 결성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운영되고 있다.
『경화(耕和)』는 1965년 3월 16일에 창간된 경화회의 기관지이다. 발행인은 김성수(金性洙), 편집인은 조성국(趙星國)이며, 발행처는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직교리 5의 경화회(耕和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맞추어 발행되는 계간지이고, 비매품으로 회원들에게 배부하였다.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발행되고 있다.
발행인 김성수는「회지 창간에 제(際)하여」라는 제목의 권두언에서 다음과 같이 『경화』의 창간 취지를 밝혔다. "대지의 가슴팍을 헤치고 참된 씨알을 뿌려 대자연과 투쟁하여 우리들의 정성어린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이 회지를 발행하여 안으로는 우리의 창조적인 정신을 기르고, 밖으로는 일반 생활에 필요한 양식과 도구가 될 것을 바라는 바이다"
창간호의 편집은 권두언, 기술공부, 기고, 수필, 내고장, 회원의 일인일언, 경화회 발자취, 회원명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지의 가장 큰 특징을 나타내는 기술공부에는 온상육묘, 보리와 양파 추비법, 감자재배법, 벼농사강좌, 크리미엄의 효과와 사용방법, 재배원론 등 농업 기술이 실려 있다.
창간호에는 경화회의 실질적인 창립자인 성재경(成在慶)이 「회원에게 드리는 말」이 실려 있다. 이 글을 통해 회지 발행과 경화회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농민들은 올바른 생활을 통하여 긍지와 자존심을 가지자. 누구에게도 의연한 태도로 대하자 참된 생활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농민이 가난한 생활을 통하여 나라에 옳게 이바지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꼭 해나가야 하며 훌륭한 사업이다. 경화의 길도 이러한 길이 되어야 할 것이다.…(중략)…정의와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곳 즉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중략)…우리 회를 회원 각자가 인격을 닦는 수도장으로 생각하고 또한 이 경화회를 위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 되고 또 내가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는 길에 통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우리의 경화회를 올바르게 키워 나가자."
회지의 1973년 여름호는 회지 발행 10주년을 기념하는 방식으로 발행되었다. 회원발언대를 통해 '10년을 맞이하여'(박상석), '경화 10주년을 맞이하면서'(성락구), '확실히 노력과 실천하자(양희준)', 꿈과 현실', '노력으로 발전하자' 등의 글이 실려 있다.
3. 일제강점기 호적관련 자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개인정보에 관한 기록을 새롭게 정비하였는데, 제적부, 제호부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기록은 모든 행정기관에서 오늘날에도 보관․활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창녕군 근현대 자료조사 및 수집에서는 고암면의 제적부, 제호부 일부, 이방면의 호적사건지원부를 수집하였다.
4. 근대 묘지 관련 자료
우리나라의 묘지에 관한 풍습은 조선총독부가 1912년 '묘지․화장․화장장에 관한 취체 규칙'을 제정하면서 크게 변화하였다. 규칙 제정 당시에는 개인 묘지의 설치를 엄격히 하여 허가하지 않았기에 기존의 묘지 조성 관습이 쇠퇴한 것이다.
창녕군 근현대 자료 수집․조사에서는 묘지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조사․수집하는 방향을 세웠다. 그에 따라 자료 조사․수집 대상 면사무소 소장의 묘지관련 자료가 대거 수집되는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예를 들어 대합면의 공동묘지이장 대장(1913), 대지면의 분묘대장(1915), 대합면의 공동묘지이장대장(1913) 등 묘지 관련 자료들이 수집되었다. 향후 묘지 관련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5. 농지개혁 관련 자료
농지개혁은 1949년 1월 국회에 농지개혁법안이 제출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법안은 미군정기 신한공사가 관리하고 있던 일본인 소유농지, 곧 귀속농지에 대한 농지개혁에 이은 것이었다. 이 법안은 국내의 모든 한국인 지주 소유 농지 115만 6천ha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 뒤 법률개정을 통해 1950년 3월 10일 공포되었다. 이로써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농지개혁 실시를 위한 입법조처가 완전하게 갖추어졌다.
제2차 농지개혁의 실시는 <농지개혁법시행령> 및 이 시행규칙이 공포될 무렵인 1949년 6월 21일에 집계된 총 매수대상면적은 60만1000㏊로, 총 경지면적의 27%에 달했으며, 귀속농지 29만1000㏊를 포함한 총 분배예정면적은 89만2000㏊에 이르러, 총 경지면적 222만6000㏊의 40%에 달했다. 그러나 농지개혁이 구체적인 실시단계에 들어갈 무렵 불행하게도 6·25전쟁이 일어나 전화를 모면한 경상남도 일대를 제외한 전국이 농지개혁 실시를 부득이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지개혁은 한국근현대 토지문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이에 창녕군 근현대 자료 수집․조사의 주요 대상으로 설정하여 집중적으로 수집하였다. 특히, 조사대상 모든 면에 걸쳐 시행단계에서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관련 자료를 집중 조사․수집하였다.
6. 한국전쟁 관련 기록
경남 창녕군은 한국전쟁 중 인민군 점령지역이었다. 그 가운데 고암면을 대상으로 전쟁 관련 자료를 조사․수집하였다. 수집된 자료는 전사통지서철(1952), 유가족등록부(1953) 등이었다. 향후 수집에서는 보다 폭넓게 조사․수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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