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검다리를 건너며(2006~)
무어라고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는 증상들로 괴로웠다. 친구가 넌지시 건네는 말에 수긍이 가지 않았다. ‘갱년기의 장애라고!’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갱년기(更年期)란 사람의 몸이 노년기로 접어드는 시기란다. 이건, 나에게는 말도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갱년기장애(更年期障礙)란 갱년기에 일어나는 생리적 장애로 이명, 발한, 두통, 신경통 따위의 증상이란다. 어이없게도, 참으로 신기하게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아직도 지천명에서 성숙미를 향하여 도전하는 여성이라 자부한다. 노년기로 접어든다는 단어를 당당하게 거부하며 반기를 들고 싶다.
또 시작이다. 요즈음처럼 폭염이 지속되는 날엔 기름에다 성냥불을 켜는 것이나 다름없는 고통이 이어진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자신과 전쟁을 치른다. 내 몸에 반갑지도 않은 얄미운 손님이 자리하고 있다. 벌써 햇수로 이십 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그 불길한 손님은 내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느닷없이 조여든다. 그것은 어쩌면 출렁이는 물살처럼 길게 또는 짧게 나를 흔들어 댄다. 잔잔한 호수 위에 돌풍이 일어 고스란히 내 복부에 관통한다.
너무나 순간적이라서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난 서서히 전기에 감전되듯이 점점 더 세차게 스파크를 맞는다. 고개를 재빠르게 저으며 헛숨만 몰아쉰다. 심장의 박동이 거칠게 뛴다. 누군가에 쫓기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오만 가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거울 속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한다. 그 여인은 희멀건 눈동자를 굴리며 얼굴에는 송송 맺힌 더운물이 흐르고 있다.
누가 볼까 봐 재빠르게 손수건으로 토닥인다. 그러고는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재빨리 바깥으로 나가 훌쩍훌쩍 뜀뛰기라도 해본다. 아니 땅이 꺼져라 힘을 다해 더 높이 무겁게 뛰어본다. 통증이 사그라질 때까지 헛발질이며 헛손질도 마구 흔든다. 누가 본들 어쩌겠는가. 가만히 통증 부위를 붙잡고 있다가는 정신이 혼미해져서 죽을 것 같아서 그 기분 나쁜 통증을 털어내서라도 쫓아버리고 싶은 몸부림이다.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란 말인가! 잔잔한 호수에 돌팔매질로 장난을 거는 그 무엇을 나는 어쩌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당하는 억울함에 슬퍼진다. 잠시 잠깐에 나를 향해 공격하는 실체를 그저 맥없이 받아들일 뿐 대항할 여유도 없이 소리죽여 끌리듯 당하기만 한다. 왜 나를 흔들어 화를 불러오는 걸까? 그럴 때면 진저리 쳐진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고통의 시간이 지나는 데는 고작 1분 정도이다. 하루에 두세 차례씩 그런 죽을 것 같은 고비를 넘겨야 했다. 주로 밤에 나타나는 증상은 가족들도 모르게 비밀스러운 시간이 지나갔다. 야비하게 일렁이던 파동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면 깊숙이 사라져 버린다. 흔적이라곤 허무한 기포 알갱이들의 몸부림 같은 쓴물로 가슴 깊이 눈물 되어 흐른다. ‘미쳐 버린다’는 말을 이럴 때 두고 쓰는 말인가. 발끝에서 찜통처럼 열기를 발산하듯이 내 자그만 체구가 순식간에 푹 삶아져 버린다. 그런 이상한 느낌은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폭염은 내가 스스로 만들고 대지는 또 나를 사투의 길로 안내하는 듯했다. 참으로 가혹한 현실이다. 야비한 운명으로 떠안기에는 너무나 억울하다. 머리카락 사이사이에서 온천수가 되어 목으로 흘러내린다. 그런 증세는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난다. 낮과 밤이 없다. 때론 한밤중에 달콤한 잠을 깨우기도 한다.
한겨울에 그런 증상이 찾아오면 차디찬 거실 바닥에서 미친 듯이 뒹군다. 증세는 1분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순간은 온통 죽음의 문턱이 손짓한다고나 할까,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아마도 이런 복잡 미묘한 심경이 우울증을 유발하여 자살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리라. 나 혼자만의 해결은 너무나 힘겹고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어려서부터 신앙의 뿌리가 버팀목이 되어 든든하게 받쳐지고 있다.
그 순간 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생각이 멈춰 버리고 그냥 죽고 싶다. 억울해서 소리 내어 크게 울고 싶어진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 줄 이가 없다. 함께 사는 남편도, 가족들도 모두가 이해해 줄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의 통곡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계절 중에 여름을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알 수 없는 통증에도 양심은 있는 것일까? 계절에 리듬을 탄다고나 할까.
이 여름이 지나면 선선한 가을이 올 것이다. 그때는 나를 찾아 호르몬 사냥에 박차 가할 것이다. 나의 자존심을 향하여 산이든 바다든 그래 기차를 타고 끝없는 평행선의 철로를 신나게 달릴 것이다. 가을이 나를 치유해 주기 때문이다. 그 치유가 되면 그 찜통의 열기는 겨울 속에서 서서히 식어 움츠러들 것이다.
봄이면 잊었던 갱년기의 장애가 생명처럼 꿈틀댈 것이다. 또다시 그 얄미운 손님이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그건 그때 가 봐야 알 일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여인들의 비명이 무더운 태양 속에서 메아리칠 것이다.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갱년기와 더 심하게 다투었다. 나는 오십 세부터 갱년기를 앓은 여인이다. 20년 넘게 동거동락했으니, 그도 이제는 내 몸의 일부다. 평생 함께할 동지로 받아들이고 살살 달래가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