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제11회 등대문학상 소설부문 당선작] 남선정 김성대
■대상
단 하나의 빛 / 남선정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등롱 유리를 닦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무리 닦아내어도 창 모서리에 낀 오래된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소금기를 머금은 해풍이 만들어 낸 미세한 창틀 부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창 닦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하, 하고 입김을 불어 넣었다. 유리 표면에 뽀얀 습기가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기다랗게 숨을 내뱉었다. 맥 빠진 한숨이 나지막하게 새어 나왔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로 훔쳤다. 마음이 그냥 번잡하기만 했다. 며칠 전 육지에서 걸려 온 전화가 계속 맘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날따라 본청 직원의 앳된 목소리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강석호 주무관님, 2024년 3월 4일부로 서해안 제유도 등대장(燈臺長)으로 전근 발령받으시게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감지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인가. 그 소식은 며칠째 잠자리를 뒤척이게 했다. 여기서 묵묵히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던 그 순간에도 직원은 군청으로부터 곧 공식적인 발령 공문을 받게 될 거라고 하면서 휴가가 많이 남았으니 얼른 쓰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이 섬에서 가장 가까운 유인도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섬과 육지 사이에 큰 대교가 건설되었고 그 섬에 최첨단 시설을 갖춘 무인 등대가 개관될 예정이라는 얘기가 사실로 확정된 지는 제법 되었다. 그래서 관광객 필수 코스 명소랑은 거리가 먼 이 등대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어 조만간 폐등대가 될 예정이었다. 등대를 에워싼 담장 안 관사에 머무르고 있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짐을 싸는 수밖에 없었다.
광조도(光照島)는 육지에서 배로 몇 시간을 들어가야 하는 외진 섬이었다. 험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이 섬은 무인도였다. 섬 이름을 딴 광조 등대는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 남은 기계식 등명기를 가동하는 등대로서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급진적으로 발전된 기술로 인해 원격제어가 가능해져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기계식 등대인 광조 등대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광조도 해역은 위험천만한 해류와 커다란 암초들이 길게 뻗어있는 지역으로 선박들의 크고 작은 사고들이 빈번한 곳이라 낡고 오래되었지만, 이 등대만은 폐관시킬 수 없다던 해양수산부의 견해가 바뀐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것을 시대적 흐름이라고 했던가.
그는 이곳에서 그의 나이 스물여섯부터 항로표지 관리원으로 일해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등명기를 닦은 세월이 자그마치 25년이나 되었다. 지난 세월 내내 그는 줄곧 이 등대를 지켜왔다. 등대관리원은 보통 2년에 한 번씩 순환 근무를 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광조 등대에 근속 근무하고 싶다는 그의 의지를 직장에서도 존중해주었다. 등대와 관사 건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 근무를 자처하는 직원은 여태껏 그를 제외하고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근무하던 동안 수많은 동료가 오갔고 심지어 두 명은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하고 일을 그만두었다. 새로 발령받아서 온 동료들은 여기서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일을 할 수 있냐며 의아해하기 일쑤였다. 그도 처음부터 이곳이 좋아 근무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무인도의 등대를 지키는 것은 그야말로 외롭고 고독한 일이라고 했던가. 지금이야 섬에 있어도 인터넷으로 바깥세상 소식을 접하거나 TV로 무료한 시간을 메울 수도 있지만, 예전에는 전혀 그럴 수 없었던 것이 무인도 생활이었다. 그 역시 처음 근무했을 그 당시 이곳 생활이 너무나 적적하고 고달파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 방식이 정말 지긋지긋했지만 억지로라도 광조도 생활에 적응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는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과가 주는 절대적인 안정감을 만끽하기에 이르렀고, 일상은 그 나름의 리듬을 타면서 조용하게 흘러갔다. 바라던 바의 삶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고 여겨졌다. 매번 근무 기피 지역인 광조 등대의 근무를 자처하던 그는 자신이 퇴직할 때까지 이 등대를 떠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얼마 후면 이 정든 섬과 광조 등대를 떠나야 했다.
오늘도 등롱 창을 닦기 위해 등탑에 올랐다. 철제 사다리를 한 칸씩 밟고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늘따라 그 소리가 꽤 거슬렸다. 그는 우직하게 유리를 닦던 손을 멈추고 바닷가를 내려다보았다. 비릿함을 품은 칼바람이 머리칼을 흩날렸다. 너울과 너울 사이로 갈매기들이 세차게 날아올랐고, 거센 파도가 절벽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졌다. 순백의 물방울들을 마구 흩뿌리던 파도는 흡사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밀려갔다 밀려오기를 반복했다. 계속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해서 현기증이 났다.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 감각이 꽤나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는 해안가를 쳐다보던 눈길을 거두고 사다리에서 내려와 등탑 문을 열었다. 열린 문틈으로 간기를 머금은 바람이 쓱 들어왔다. 삭막한 정적이 감돌았다. 숨을 내리 쉬면서 바닥 여기저기 죽어있는 벌레를 쓸어 담았다. 섬광을 향해 달려들었을 날벌레의 사체가 가득 내려앉은 렌즈 표면을 꼼꼼히 세척포로 닦아내었다. 마치 늙은 어머니의 언약한 손을 닦듯이 천천히 그리고 아주 정성스럽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 등대, 이 익숙한 생활,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등탑 안 공기마저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는 건 그저 내 기분 탓일 테지. 날이 점점 어둑해졌다. 시간을 확인했다. 5시 58분 57, 58, 59, 5시 59분.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그의 손이 등명기 스위치에 닿았고 6시 정각이 됨과 동시에 스위치를 올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화, 하고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불빛은 강력하게 프리즘 렌즈를 통과해 등롱을 타고 바다 먼 곳을 훤하게 비추었다. 등명기가 360도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눈이 부셨다.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빛이 다가오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손바닥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 빛은 손으로 가린다고 가려질 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쏟아지는 태양 광선같이 강렬했다. 그때였다. 가슴 속 깊이 넣어놓았던, 이제는 기억조차 아득한 아버지의 모습이 가슴 시리게 떠올랐던 것은. 이젠 한스러운 그리움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되었는데…. 불현듯 생각난 아버지의 모습이 마치 오래된 영화의 빛바랜 한 장면처럼 생각되었다.
그의 아버지 영식은 오징어잡이 배의 선장이었다. 젊었을 때 농사를 짓던 그는 석호가 여덟 살이 되던 해부터는 원양 어선을 탔다.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가 한 번씩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그는 아들에게 다정다감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 시대 수많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영식에 대한 석호의 기억은 조금 달랐다. 아버지에 대한 어두운 기억은 그다지 없었다. 정이 많고 다정다감하지는 않았지만 늘 책임감 있고 성실한 아버지로 기억되었다. 다음 항해에 나서기 전 잠시 집에 머물렀던 아버지가 자신을 바다로 데리고 나가 가르쳐주었던 낚시, 방파석 위에서 함께 올려다본 보름달, 그리고 직접 잡은 해산물로 만들어주었던 요리가 어린 석호는 그렇게도 좋았다. 몇 년 후 영식은 그동안 억척스레 모은 돈으로 어선을 한 척 마련해 오징어잡이 배의 선장이 되었다. 그가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영식은 아들을 자신의 배에 태우기를 몹시 꺼렸고, 석호가 배에 오르는 것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중학교를 졸업한 그가 공고를 진학할 때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20살이 되어서도, 전문대 전기학과 졸업한 후 항로표지 기능사 시험에 최종 합격하고 대기발령 중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아버지, 저 발령받기 전까지는 시간이 많이 있으니 일을 도울 수 있어요.”
“ 됐다, 니 하고 싶은 거나 해라. 정 할 일이 없으면 친구를 만나던지.”
급기야 석호는 오징어 잡는 법을 알려달라고 아버지를 조르기까지 했다.
“ 제발요, 아버지. 저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 괜찮대도 그러네. 이 일은 니가 할 일이 아니고 내가 할 일이다.”
단호한 어조로 말하던 영식은 끝끝내 아들의 간청을 거절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석호는 고향 마을과 근접한 등대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영식의 선체에 오를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그때가 첫 근무 두 해를 넘기 전의 일이었으니 지금은 20년이 훌쩍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날은 한반도 전 해역이 태풍의 직접 영향권에 들었던 날이었다. 인접 해역 기상 악화로 그가 근무하던 등대에도 초비상이 걸렸었다. 다음 날 태풍이 예상보다 빠르게 지나간 뒤, 배전판을 손보던 그에게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어머니 인숙에게서였다. 모처럼 조업을 나간 영식의 배가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다는 연락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사고 현장으로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근무 교대 때까지는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상태였다. 우선 어머니를 안심시켰던 그는 다음 날 근무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사고 해역 인근 해경청을 찾아갔다. 며칠째 실종자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다던 해경은 영식의 배가 연락정과의 마지막 교신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했다. 사고 선박은 항구로 옮겨왔지만, 배에 타고 있던 선장을 포함한 선원 6명 모두가 실종되었다는 통보와 함께 마지막 구조 무선을 치고 연락이 끊긴 장소가 바로 광조도 앞바다라고 전했다. 알고 보니 강력한 태풍이 광조도를 무섭게 휩쓸고 지나가면서 등롱 창이 처참하게 깨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고, 그로 인해 등대의 전력이 일시적으로 끊겼지만, 등대관리원이 재빨리 비상 발전기를 돌려 곧바로 등댓불은 켜졌다고 했다. 등대와는 상관없이 태풍의 세력이 워낙 커 파선된 배에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게 전문가의 설명이었다. 그는 선두 일부가 부서진 아버지의 어선에 올라섰다. 속으로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그렇게 기를 쓰고 오르려 했던 배에 이런 이유로 서 있는 게 무척 마음이 아팠다. 태풍이 올 예정이니 조업에 나가지 말라고, 내가 그 한마디만 했었더라면…. 맹렬한 폭풍우를 만나 사납게 출렁거리던 파도 위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을, 그 짙은 암흑 속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에 서 있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아려왔다. 그 후로도 영식과 나머지 선원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고, 해경도 그들을 찾는 데 주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때 당시 인숙은 만삭의 몸이었다. 나이 오십에 생긴 늦둥이라 부끄러워하면서도 내심 기뻐했던 아버지가 싱글벙글한 얼굴로 마을을 돌아다녔던 것이 그가 기억하는 부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녀는 사고 소식을 듣고 난 뒤부터 동그랗게 솟은 배를 끌어안고 울다가 결국에는 몸져눕고 말았다. 일순간에 남편을 잃는 슬픔을 견디다 못해 연거푸 혼절했고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 8개월 동안 품었던 뱃속 태아를 잃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어머니의 모습이 꼭 곡예사의 줄타기를 보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고 느낀 것은.
그가 광조 등대에서 일한 지 3년을 갓 넘길 즈음이었다. 아침 근무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인숙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의 얘기는 마을 어부 A가 조업을 위해 대마도 근처까지 갔다가 강력한 태풍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고 인근 섬에 발이 묶였다는 것으로 시작했다. 태풍이 지나가고 어제 마을에 돌아오자마자 집으로 찾아와서는 오징어잡이 어부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회자 되는 소문에 대해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후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던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A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니 아부지가 배를 타고 나가서 사라진 게 태풍 탓이 아니었다고 카더라. 글시, 대마도에서 일본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고, 얼마 전에는 얘까지 낳아 살고 있다고 글카더라.”
그렇게 말하던 어머니에게 그는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억측이냐고, 말도 안 되는 뜬소문 따윈 절대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근데, 석호야. 그래도 내 눈으로 꼭 확인해야겠다. 그래야만 맘이…. 이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내 맘이…. 훨 편해질 것 같어.”
그럼 나머지 선원들의 행방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따져 묻던 석호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친인척들까지 그녀에게 그게 다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그냥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그곳을 찾아가는 것만은 극구 말렸지만,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A가 언급한 섬을 어머니 혼자 가는 게 도무지 안심되지 않아 결국 그녀를 따라나섰다. 어쩌면 나도 아버지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몇 날 며칠을 머물면서 두 사람은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영식의 얼굴이 인쇄된 전단지를 보여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을 본 사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여기 오기 전부터…. 기도했다 아이가. 내사 마, 니 아부지가 딴 여자랑 사는 거라도 봤으면 억수로 좋겠다고. 그러면 내도 딱 포기하고 잊고 살끼라고. 진짜로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노. 만약 진짜 죽은 거라면 내 눈으로 직접 니 아부지 시신이라도 봤으면 내 맘이 이렇게 애달프진 않을 낀데….”
그렇게 한탄하던 그녀는 갑자기 배를 감싸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 남편의 유해라도 찾아 장례를 치러줘야만 자신이 편히 눈감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던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를 달래던 그는 언젠가는 남편이 살아 돌아오리라는 것을 굳게 믿으며 결코 단념할 수 없다는 일념이 그녀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와도 같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 누구도 아버지의 주검을 보지 못했으니 그것은 죽지 않은 거나 다름없다고 치부했던 청년 석호는 이제 영식과 비슷한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그 당시 어머니의 가엾고도 애달픈 울음소리를 기억했던 그는 매일같이 등댓불을 밝히면서 말하고 싶었다. 여기 환한 빛이 있다고, 밤새 불을 밝게 켜 둘 테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지 말라고, 일을 무사히 끝내고 기다리는 가족의 품으로 반드시 돌아오라고. 그는 아마 아버지가 돌아오면 어머니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밤안개가 얕게 깔린 광조도는 온통 매서운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법 쌀쌀한 기운을 느낀 그는 작업복 지퍼를 끝까지 올려 채웠고 빛바랜 작업 모자를 희끗한 새치가 가득한 머리에 깊숙이 내려썼다. 손전등을 들고 밖으로 나가 섬 주위를 순찰했다. 싸늘한 밤공기가 온몸을 에워쌌다. 모자를 뺏어 갈 기세로 펄럭이던 바닷바람은 거칠고 사나운 기세로 그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난 후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뭐 하나 특별한 것 없는 광조 등대가 서 있을 뿐이었다. 공중에서 등댓불이 동그랗게 돌았다. 회전하는 등명기 불빛을 따라 숫자를 세었다. 11, 12, 13. 정확한 주기로 불빛이 원위치로 돌아왔다. 쏟아지는 불빛을 끊임없이 지켜보던 그가 이번에는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불빛이 그의 눈길을 따라 칠흑 같은 바다 위에서 별빛이 되었다. 그때였다. 수평선 가까이 배 한 척이 언뜻 보였는데 그것은 환한 띠를 두르며 불을 쟁쟁하게 밝힌 오징어잡이 어선 같았다.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던 그 배는 파도 위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듯이 보였다.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바다를 다시 보았다. 어, 배가 사라졌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잘못 봤나. 고개를 연신 꺄웃거렸다. 분명 만선을 기뻐하던 오징어 채낚기의 불빛이었단 말이야. 뭔가 생각이 난 듯 그는 바다를 쳐다보던 눈빛을 거두고 등대로 향했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그는 등대 안으로 들어갔다. 등탑으로 올라가는 난간을 잡고 층계를 밟았다. 한 걸음씩 계단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대는 철제의 낡은 소음이 짙은 어둠 속에서 파동을 일으켰다. 계단 꼭대기에 다다르자 그는 숨을 서서히 내쉬다가 들이마셨다. 공중을 향해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숨소리의 검은 잔영이 길고도 깊었다. 나 몰래 어머니가 흐느껴 우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은 환청일까. 순간, 그의 모든 생각이 그 소리에 흡수되는 듯했고, 어머니의 음읍만이 이 공간에 남아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동안 우리에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니, 어머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5년 전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 불현듯 떠올랐다.
영식이 실종된 지 15년이 훨씬 넘었을 때였다. 휴일을 맞아 집에 온 석호에게 인숙은 엉뚱한 말을 불쑥 꺼냈다.
“석호야, 너거 아부지 오실 때가 다 됐는데…. 니가 전화 한번 넣어봐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머니가 추억 삼아 옛날얘기를 드물게 꺼낸 적은 있었지만, 전과는 확연히 달랐던 느낌.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감지한 그는 이튿날 어머니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인지기능 장애라는 진단을 듣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어머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하루아침에 진행되는 병은 아니라던 의사의 말이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그렇게도 남편에 대한 희망 고문을 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되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를 모셔야 하나. 그러면 광조 등대를 떠나야 할 것이다. 그러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어머니를 무인도에서 지내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모두 내키지 않은 선택들뿐이었다. 가끔 남편을 찾으러 바닷가로 나가 멍하니 앉아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녀를 광조도와 가장 가까운 육지에 있는 요양원에 보내게 되었다. 어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마음 이곳저곳이 마구 들썩거렸다. 슬픔과 후회, 그리고 그리움과도 느낌이 비슷한 거였다.
저녁을 간단히 라면으로 해결하고 누웠다. 발령 공문을 받고 나서부터는 마음이 더 심란했다. 정성스레 요리하는 것이 귀찮아질 정도로 그의 일상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복잡한 생각이 떠나질 않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피곤했지만, 상관없었다. 오늘부터 휴일이라 육지로 나갈 예정이었다. 먼저 어머니한테 들려야 해. 그는 여태껏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두 차례 요양원을 방문했다. 휴일 첫날과 마지막 날. 어머니를 더 자주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근무 날에는 섬에 발이 묶여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요양원 출입구를 들어설 때마다 만약 어머니가 나도 잊어버렸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다행스럽게 이번에도 그녀는 아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어머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석호야, 얼굴이 많이 야위었구나. 무슨 일이라도 있니?”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잠을 좀 설쳤을 뿐이에요.”
무심한 듯 말하던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덩그렇게 말린 등허리가 매우 황량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얼른 눈물을 훔친 그는 그녀의 손을 넌지시 잡았다. 어머니의 퀭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처음 요양원에 모셨던 날이 문득 생각났다. 요양원에서 나오자마자 그가 맨 처음 챙긴 일은 여태 미뤄왔던 아버지의 사망 신고였다. 해양 사고의 경우 법 개정에 따라 특별 실종은 1년만 지나도 사망 처리가 가능해졌다고 하던 주민센터 직원의 설명에 그는 침묵을 지킨 채 가만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실종에‘특별’이란 게 무슨 소용인 건지…. 뭐가 특별하다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아버지의 사망신고서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살아있다는 증거도 없지만 죽었다는 증거도 없는 영식은 이제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 최영식 이름 옆에 비로소 새겨진‘사망’이라는 두 글자가 낯설고도 묘했다. 사실상, 그는 줄곧 아버지를 생각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잊고 지냈다. 아니, 솔직히 잊고 싶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에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뜻하는 바대로 되지 않는 일이 있는 것처럼, 그에게는 영식의 실종이 그러했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도 같았다고나 할까.
‘우리는 여전히 유가족이 아닌 실종 가족인 거야. 아직은 한 가닥 실오라기만큼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지 않겠어?’라는 마음과‘오랜 시간이 지났잖아. 인제 그만 포기하고 단념해도 괜찮다고.’라는 양가적 감정이 온통 고통으로 변해 가슴속 깊숙이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수십 년 동안 실종된 사람이 집으로 돌아온 어느 외국의 놀라운 뉴스처럼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길 그는 내심 소원하고 있었다.
섬에 돌아온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등롱 창을 공들여 닦았고 제시간에 어김없이 등대의 불을 밝혔다. 한참을 등명기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나서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교대 근무를 하려면 조금이라도 자둬야 했다. 얼핏 선잠이 들었다가 금방 깼다. 잠은 쉬 오지 않았고 밤은 무척 길었다. 여러 번 베개를 고쳐 베며 잠을 청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고 알림이 울리기도 전에 잠이 깨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5시 전이었다. 밖은 아직 어슴푸레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디오를 켰다. 주파수를 날씨 채널에 맞췄고, 근무일지를 펼쳐 오늘 점검해야 할 항목을 살펴보았다. 배전판을 손봐야 했다. 그는 아침 식사하던 도중에 수평선 너머로 동이 터오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 풍경도 더는 못 보게 되겠지. 그는 광조도로 들어오기 전에 군청에 들러 사표를 제출했다. 사직서를 받아 든 직원이 놀라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10년 이상 남은 퇴직을 앞당겼다. 아쉬움이 조금 남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날 밤 자정이 막 지날 무렵이었다. 등표들의 등명기가 잘 작동하는지를 점검하던 도중에 해경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받았다. 인근 해상에서 수색 중이라고 밝혔다. 민간인 3명이 밤낚시를 하던 가운데 보트 엔진이 고장 나서 몇 시간째 껌껌한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다고, 진작에 119를 통해 구조 요청을 받았으나 주위가 너무 어두운 나머지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길이 없어 수색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했다. 일반인이 말한 바로는 등대 불빛이 깜박거리긴 하는데 등대 이름을 몰라, 그들의 배가 출발한 지점에서 반경 100km 안에 있는 모든 등대에 연락 중이라는 해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재빨리 에어 사이렌을 가동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그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광조 등대의 무신호기 소리를 들은 사람들 모두 무사하게 구조되어 지금 인근 육지로 이송 중이라고 말했다. 아, 진짜 다행이야.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던 그는 갑작스레 떠오르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속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저들처럼 아버지도 무사히 구조되었더라면, 저렇게 안전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안도감과 안타까움의 감정이 거듭 교차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음날도 늘 그랬듯이 그는 6시 정각에 등명기를 밝혔다. 그리고 숙소로 걸어갔다. 어둠에 싸인 섬 전체가 짙게 내려앉은 해무로 삥 둘러싸여 있었다. 달마저 거무죽죽한 구름에 가려졌다. 어둑한 길 끝에 멈춰 섰다. 멍하니 바다를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이번에도 찬연한 빛을 내뿜는 등탑으로 옮겨갔다. 유일하게 깊고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한 줄기의 빛. 일정한 주기로 밤하늘에 빛을 흩뿌리는 광조 등대를 계속 올려다보던 그는 기도하듯 웅얼거렸다. 내가 얼마나 이곳에 애착을 갖고 살아왔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그때 별안간 번개가 번쩍였고 우르르 쾅쾅하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강한 바람을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붓는 탓에 그의 시야가 자꾸 흐려졌다. 비에 흠뻑 젖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급히 숙소 쪽으로 뛰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유일(唯一)한 빛이 장대 같은 빗속의 어둠을 뚫고 내비쳤다. 그가 외쳤다. 아버지! 그 한마디가 메아리쳐 돌아왔다. 아버지! 줄기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기대어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아버지에게 간절히 소원했다. 당신과 진짜 이별할 기회를 달라고, 제발 어머니에게도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다시금 살아갈 힘을 달라고, 당신을 향하던 빛을 멈추고 이제부터 그녀의 삶에 온전한 빛을 비추는 등대로 살게 해달라고, 라고 외치던 그는 울고 또 울었다. 길 잃은 어린애 마냥.
그는 그날 밤 그토록 보고팠던 아버지의 꿈을 처음으로 꾸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꿈이었다. 조금은 늙고 초췌한 모습을 한 영식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초롱초롱한 그의 눈에 가득히 핀 달빛이 정말 예뻤다. 아버지, 정말로 돌아오셨군요. 눈물이 났다. 기다려 온 시간이 억겁의 세월 같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아버지를 와락 껴안았는데, 그의 몸이 얇고 마른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며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아악! 하고 괴성을 질렀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 보니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 생생한 장면이 그저 한낱 꿈이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렇게 꿈에서라도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다.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에 가까웠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절벽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을 쭉 내려갔다. 비가 온 뒤라 섬의 모든 풍광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바다를 지켜보았다. 맑은 공기가 자유로이 섬을 유영했다. 캄캄한 바다가 등대에서 퍼져나오는 빛을 받아 일렁거렸다. 저 멀리 배 한 척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오징어 어선의 어화 빛처럼 휘황찬란했다. 만선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왔다. 그 배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파도를 헤치며 드넓은 바다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배는 아득히 멀어져갔다. 이제 저들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나와 어머니처럼. 그 하나의 빛이 마음속에 뚜렷하게 아로새겨졌다.
며칠 뒤 근무를 마치고 숙소에서 쉬고 있던 석호에게 동료 K가 말했다. 등대만 없어지는 건데, 왜 일은 그만두냐고. 다른 등대로 옮겨가면 될 일이 아니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말에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그가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고 말하자 K는 아무리 부모지만 치매에 걸린 노인을 남자 혼자 돌보기는 매우 힘든 일이라는 조언을 건넸다. 공무원직을 관두는 그에게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낯빛을 드러내던 K는 평생 연애도, 결혼도 안 하고 살 거냐고, 그게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지 않냐는 말에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일전에 마주한 어머니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려있었다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조차 또렷하지 않은 그녀의 멈춰진 시간을 더는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무엇보다 배가 어둠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지켜주는 등대처럼 지금부터 나도 어머니를 지켜주고 싶다는 감성적인 말을 K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광조 등대에서의 근무 마지막 날이 되었다. 오늘 같은 날은 연차 휴가로 대체할 수 있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등댓불은 마지막 밤까지 밝혀둬야 하니까. 단 한 척의 배도 바다에서 방황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한 마지막 바람에서였다. 오늘도 예외 없이 등명기를 닦았다. 이 일도 오늘이 지나면 못 한다는 생각이 들자 극세사 천으로 렌즈를 닦는 손길이 더욱더 정성스러워졌다. 그때 마침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본청에서 온 연락이었다. 기어이 올 게 왔구나! 수화기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숨을 기다랗게 쉬면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를 경청하는 그 짧은 찰나가 영원같이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차분하고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내일 오전 6시가 되면 등대의 전원 장치는 일제히 차단될 것이다. 밖을 보았다. 어느덧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저녁 햇살이 고운 자태를 드러내더니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차츰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가는 석양이 내비치는 바다는 실로 장관이었다. 저녁 6시 정각이 되자 등명기가 켜졌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프레넬 렌즈가 마지막 광채를 뿜어냈다. 그는 매시간 알람에 맞춰 등명기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다가 영롱한 빛이 내비치는 바다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그곳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안온했다. 까만 밤하늘을 빼곡히 채운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광활한 바다와 유난히도 뽀얗게 떠 있는 달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물끄러미 올려다본 보름달이 문득 떠올랐다. 그날도 새하얀 달이 어두컴컴한 바다 위를 유영하고 있었다. 방파제에 나란히 앉아 고요히 낚싯대를 드리웠던, 한적한 가로등 불빛에 비친 아버지의 거무스름하고 주름진 얼굴이 빛났던, 모든 순간의 기억이 그리움으로 변해 있었다. 그와 나눴던 대화와 따뜻한 포옹까지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뭉클하고 애끊던 기억이 이젠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밤이 새까맣게 깊었다. 밤바다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고 달이 가득히 내려앉아 달그림자가 드리웠다. 은은한 달빛이 잔잔한 물결 위로 떨어지면서 반짝하고 빛을 내었다. 빛에 출렁이는 바다를 응시하던 그는 한결 마음이 놓이는 듯한 안색을 드러냈다. 이슥한 밤도 거의 다 지났다. 등롱 너머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바다가 새벽 동을 받아 물고기 비늘처럼 번들거렸다. 아침 6시 정각이 되었다. 그는 등대의 모든 전원을 끄고 난 뒤 등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낡고 허름한 등대의 외벽을 한참이나 만지고 나서 관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빛이 꺼진 등대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등탑의 불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가만히 상상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이 등대를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리라. 정성 들여 닦아내던 등롱 창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걸음을 돌렸다. 옅은 바람결에 촉촉한 풀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청명한 하늘과 푸른빛의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이 드넓게 맞닿아 있었다. 아득히 날아가는 갈매기가 그의 시선 안에 머물렀다. 등명기 불빛이 걷힌 바다 저 멀리 미명의 새벽빛이 올라오고 있었고, 그 광경을 본 그의 입언저리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최우수상
땅 끝에서 바다 끝에서 / 김성대
폭풍우가 몰아쳤다. 바다는 시퍼런 칼날을 휘둘렀다. 파도는 산산조각 나며 흰 포말이 되어 갈기갈기 흩어졌다. 배는 금방이라도 전복될 듯 위태로웠다. 두 남자가 성난 파도에 맞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뱃머리 쪽에 서있던 남자가 힘 빠진 손을 들어 육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화염에 휩싸인 검은 등대가 있었다. 등대는 바다가 아니라 하늘을 향해 불빛을 쏘았다. 남자의 표정은 모호했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등대 근처 절벽위에는 어린 소년이 바다를 향해 온몸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 물과 뭍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오늘 인터뷰할 ‘제임스 한’ 의 작품, ‘침몰’이었다. 그림은 불안한 기운이 가득했다. 색감은 어두웠고 인물들은 처절했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에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막상 제임스 한의 작품을 보고 나니 벌써부터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 막막했다.
“어렵게 인터뷰를 따왔는데 그 작가의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세밀한 인생사까지 포함한 이야기 거리를 제대로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선배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신문사에 근무하는 후배가 인터뷰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해왔을 때 좀 더 숙고했어야 했다. 이곳 출신에다가 나이대가 비슷하다는 말만 없었어도 인터뷰를 맡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즈음 나는 이십팔 년을 일했던 출판사를 나와 지역 신문사와 연계된 잡지사에서 문화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며 전시된 다른 작품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사람들은 ‘침몰’을 건성으로 한 번 훑어보고는 지나쳤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유명작품 쪽으로만 쏠렸다. 윈슬로 호머의 ‘걸프스트림’과 모네의 ‘폭풍우 치는 벨-일 연안’ 앞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한적한 지방 소도시 문화제에 거장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올해는 등대 건립 6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등대문화제가 예년에 비해 큰 규모로 열렸다. 행사가 열리는 속초등대는 1957년 6월 8일에 불을 밝힌 이래 동해안 연안을 운행하는 선박의 지표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속초등대 건립 시 설치된 3등급 수은 중추식 회전등명기는 직경이 무려 1미터에 달했다. 불빛이 최대 36킬로미터 거리까지 도달한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등대 내부에 있는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동해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에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작품을 감상하기도 했고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오후 2시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림을 보며 답답했던 마음을 해소할 겸 전시장 바깥으로 나왔다.
평소엔 한산했던 곳이 등대로 올라가는 계단 초입부터 입장객들로 북적였다. ‘속초 등대 문화제’ 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바닷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바다는 하늘과 짙은 남색으로 맞닿아 경계가 불분명했다. 야외 전망대에서도 등대의 절경을 담은 사진전, 바다를 소재로 한 그림 전시회, 야외 음악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시민들에게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야외 전망대 난간에 기대어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건드렸다. 돌아보니 윤석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만배와 함께 삼총사로 불릴 정도로 단짝이었던 녀석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동창회를 나가도 눈인사만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쩐 일이냐? 네가 여길 다 오고.”
“나 같은 놈은 이딴 데 오면 안 되나?”
톱니가 서로 어긋나며 돌때 발생하는 묘한 비틀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자식 말꼬리 잡기는. 전시된 작품 중에 ‘침몰’이란 그림, 상당히 독특하지 않니?”
“폭풍우 치는 바다에 배 한 척 있는 그림 말하니? 섬찟 하더라. 등대가 불타는 것도 이상하고. 작가가 바다에서 불행한 일을 많이 겪은 모양이다. 언제 회 한 번 먹으러 넘어오라.”
윤석은 아바이 마을에서 횟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인사치레를 하고 계단을 따라 바닷가 쪽으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언제부터 이런 사이가 됐는지. 입안에 쓴 맛이 감돌았다. 행사 관계자를 만나 인터뷰 시간과 장소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뒤 바닷가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브런치를 주문하고 노트북을 열었다. 제임스 한과 관련된 검색어를 입력했다. 그는 최근에 세계 미술계를 이끌어갈 20인으로 선정될 만큼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1년 전 뉴욕 첼시 갤러리에서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미술 비평가들은 만선의 부푼 희망, 가족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 흉포한 바다에 대한 두려움, 밤낮 없이 그물을 당겨야 하는 고단함 같은, 선원들이 망망대해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작품 속에 잘 녹여냈다고 극찬했다. 늘 접하는 일상적 멘트의 나열 같아 식상했다.
이렇게 정보가 없어서야. 아무래도 오늘 인터뷰가 쉽진 않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신문사 후배에게 작가에 관한 추가 자료를 요청한 후 카페를 나와 영금정 쪽으로 걸어갔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거문고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영금정으로 이름 지었다는데, 아무리 귀를 쫑긋 세워 봐도 내겐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바다를 담은 찬바람의 비릿한 짠 내만 코끝에 맴돌았다. 태풍은 어젯밤 포항 앞바다를 통해 빠져나갔다. 바람은 여전히 사나웠다. 패딩의 지퍼를 목 윗부분까지 올렸다. 내친 김에 동명항까지 걸어갔다. 만선을 기원하며 달아놓은 깃발들이 정박한 배들의 돛대에서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펄럭였다. 선창가에 정박한 고기잡이배들은 야간 출항을 준비하느라 부산스러웠다. 선원들은 뱃전 위를 움직이며 그물을 점검하기도 했고, 발전기를 돌려 집어등에 불을 밝히기도 했다. 검푸른 바다가 발아래서 일렁거리며 발 묶인 어선들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어선 하나가 바닷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뱃머리에 부딪힌 바닷물이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양쪽으로 갈라졌다. 발 아래로 하얀 물거품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침몰’이란 작품이 아까부터 계속 신경을 건드렸다. 등대가 불타는 것도 그렇고, 검은 등대가 상징하는 게 뭔지도 모호했다. 배가 결국 전복된다는 뜻일까? 울부짖는 아이가 겪게 될 삶의 몰락을 의미하는 걸까? 궁금증은 점점 커졌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무슨 놈의 인터뷰를 번개 불에 콩 볶듯 하면 어쩌란 거야. 조급한 마음에 옆머리를 박박 긁었다. 이러지 말고 물어볼 것부터 먼저 정리해보자. 그게 낫겠다. 이번 전시회에 참여한 이유? 첫 질문은 이것으로 하고, 조금 전 검색한 자료를 보니 바다라는 소재를 통해 절망이나 두려움 같은 인간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한다고 했으니……, 바다를 주제로 한 작품세계를 추구하는 이유가 뭔지에 대해서도 물어봐야겠다. 질문거리를 고민하느라 머리가 한참 복잡해지고 있을 때 후배가 보낸 작가의 프로필이 도착했다는 알림을 받았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바다를 소재로 하여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정도가 그와 관련된 정보의 대부분이었다. 이미 파악한 내용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는지, 그림을 그리게 된 특별한 계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마지막에 해야겠다.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인터뷰가 예정된 등대전망대로 향했다. 전망대에 도착하니 통통한 체구의 남자가 헝클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먼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제임스 한, 맞으시죠?”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오늘 인터뷰 때문에 오신 분이시군요. 제임스 한입니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짧은 인사를 나눈 다음, 전망대 한 쪽에 마련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실루엣 뒤로 바람물결이 일렁였다. 검은 뿔테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이 어딘지 꽤 익숙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날씨 이야기로 가볍게 대화를 시작한 후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번에 전시한 작품, ‘침몰’의 분위기가 상당히 어두운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는 답을 하는 대신 자신의 그림을 봤냐고 되레 반문했다. 말을 할 때마다 얼굴 피부가 일그러져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특히 왼쪽 눈언저리가 그랬다. 작품 속 등대를 손으로 가리키던 인물이 연상됐다. 나는 긍정의 제스처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 교통사고가 크게 났어요. 수술을 몇 차례 받았는데도 아직까지 말할 때 불편합니다.”
“아 괜찮습니다. 편하게 생각하고 말씀해주세요.”
그는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하다는 뜻을 표시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인터뷰어인 것처럼 작품 속 등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다소 무례하다 싶게 질문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한 후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혔다.
“절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희망이 되어야 할 등대가 화염에 휩싸여 제 기능을 못하고 있으니까요.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절망스러울 것 같은데요.”
“우리는 등대에서 보통 희망적인 이미지를 연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절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말이죠. 등대에 가졌던 믿음이 무참히 깨어질 때, 등대가 더 이상 등대가 아닌 것이 될 때, 그때야말로 세상 모든 등대가 검게 보이지 않을까요?”
등대가 더 이상 등대가 아닌 것이 될 때라니? 그는 왜 이런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의아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인터뷰는 삼십여 분간 진행됐다. 마지막으로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기 시작했는지, 그림을 그리게 된 특별한 계기가 무엇인지를 질문했다. 그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말 못할 사정이 있음을 직감한 나는 서둘러 인터뷰를 끝냈다.
“나중에 한 번 더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나는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받아든 그가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그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사를 오늘 중으로 마무리 지어야만 했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기사를 작성한 다음 신문사로 보내고 나니 저녁 어스름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노트북을 닫고 일어서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등대에서 마주친 윤석이었다. 간간이 얼굴을 마주하는 경우는 있어도 개인적인 연락을 취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니 오늘 인터뷰한 ‘제임스 한’이란 작가, 혹시 만배 아니니?”
“만배?”
“등대문화제 기획팀이 지금 여서 회식 중이다. 낼 보고 ‘제임스 한’ 이란 작가가 나랑 같은 학교를 나왔다 하지 않겠니. 혹시 아는 사람이 아니냐고 묻는데 갑자기 만배가 떠올라서 니한테 전화했다.”
“만배라니?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렇게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뭔가 찜찜했다. 내가 만배를 기억 못할 리가 없잖아? 제임스 한의 얼굴에 만배의 얼굴이 계속 오버랩 됐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헝클어졌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의 여름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만배와 나는 등대 앞 바위해변에 누워 절벽 위 하얀 등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 맞닿아 있는 등대가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 길까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등대가 예쁘네. 그렇지 않냐?”
“나도 너처럼 등대가 아름답게 보이면 좋겠다.”
그 말을 하고 만배는 먼저 집에 가겠다고 일어섰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등대로 급히 뛰어갔다. 뛰어가는 내내 오랫동안 지워졌던 기억이, 그와 함께 했었던 시간이 양파껍질 벗겨지듯 하나씩 속살을 드러냈다. 전시회장에 도착해서 인터뷰에서 미처 질문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관계자에게 부탁해 그가 묵고 있던 숙소의 연락처를 어렵게 알아냈다. 한참을 망설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오후에 인터뷰했던 기자인데…… 혹시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가…… 해서요.”
“…….”
그는 말이 없었다. 가쁜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나 경선이다. 너 만배 맞지? 아까는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미안하다.”
전화기 너머로 짙은 망설임이 느껴졌다.
만배와 연락이 끊긴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터다. 우리는 설악중학교가 있는 교동 한적한 주택가에 몇 집 건너 살았는데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만배 아버지는 고기잡이배를 두 척이나 갖고 있었다. 배 한 척이 집 한 채보다 비쌀 때였으니 만배 집은 우리 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였다. 하지만 만배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리면서 그의 집안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침묵은 길었다. 침묵의 무게를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내일 저녁에 시간되면 윤석이랑 같이 얼굴 봤으면 해서.”
“윤석이? 양미리?”
어떡하든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만배와 윤석, 그리고 나는 중학교 때 단짝 친구였다. 우리는 윤석을 양미리라 불렀다. 빼빼마른 몸에 얼굴이 가늘고 길어 생김새가 양미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인 별명이었다. 만배는 몸이 통통하고 입이 커서 심퉁이(도치)로, 나는 눈이 작아서 가자미로 불렀다. 우리 셋은 어물전 삼총사가 되어 잠시라도 보지 않으면 금방 죽을 것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녔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한 번 떨어지게 되면 접착력이 급격하게 상실되는 불량 투명테이프처럼 멀어졌다. 이유가 뭔지도 정확히 모른 채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것을 성장 과정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윤석의 횟집은 아바이 마을 끝 편에 있었다. 그곳으로 가려면 갯배를 타야 했다. 갯배는 사람이 줄을 당겨야만 움직였다. 녀석의 집에 놀러갈 때마다 만배와 나는 디귿자 모양으로 꺽인 쇠꼬챙이를 쇠줄에 걸고 서로 끌겠다며 다퉜다. 윤석은 그런 우리를 보고 촌놈이라고 놀렸다. 아바이 마을에서는 동해바다와 청초호가 동시에 보였다. 좁고 긴 사주에 의해 동해로부터 자연적으로 격리되어 만들어진 청초호는 시내의 건물과 멀리 보이는 설악산이 물에 잠기면서 꽤 그럴싸한 그림을 만들어 냈다. 태풍은 물러갔지만 바람은 여전히 셌다. 윤석이 손바닥을 비비며 입구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장사 잘 돼?”
“친구란 놈이 몇 년 만에 오는데 장사가 잘 되겠니?”
“미안하다. 이제부터라도 자주 올 게.”
“니는 만배를 어째 한 번에 못 알아볼 수가 있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니.”
나는 사람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때는 암기를 못해 성적은 늘 바닥에 머물렀고, 어렵게 들어간 출판사에서도 동료들의 이름을 매번 다르게 불러 구설수에 오른 적도 많았다. 내 눈에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 고만고만했다.
“만배가 좀 늦는 갑다. 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추운 걸 그리 못 참나. 가게 안에 먼저 들어가라. 내는 만배 오면 같이 들어갈 테니.”
찬바람에 잔뜩 움츠린 나를 보고 윤석이 말했다. 무심한 말투에서 그간 내게 섭섭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저녁시간이 되자 바람이 거칠어졌다. 10월이 되면 설악산에서 내려 부는 바람과 바다에서 올라 부는 바람이 힘겨루기를 했다. 그때마다 돌풍이 일었다. 사람들은 원산내기가 심술을 부리는 것이라고 했다. 바람이 심할수록 그 해에는 큰 눈이 내렸고, 고기잡이배는 발이 묶여 사람들의 삶은 더욱 팍팍해졌다.
30년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잔이 넘치도록 소주를 따랐다. 건배소리와 함께 세 개의 술잔이 경쾌하게 부딪혔다. 단숨에 잔을 비운 뒤 만배에게 바로 못 알아봐서 미안하다고 거듭 말했다.
“몇 년 전에 교통사고가 크게 나 심하게 다쳤어.”
만배는 안면골절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아서 옛날 모습과 많이 달라진 거라 했다. 자신도 거울을 보면 웬 낯선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아 깜짝 놀란다며 미안해하는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내는 니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줄 알았다. 이 새끼 중학교 때부터 고집 센 게 보통이 넘었잖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기다.”
윤석의 말에 그게 고집 센 거랑 무슨 상관이 있냐며 만배가 싱겁게 웃었다.
“너희들은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윤석이 너는 사관학교 가고 싶어 했잖아?”
만배가 우리의 근황을 물었다.
“지난 이야기를 와 들추고 난리니.”
윤석은 아버지가 실향민인데다 삼촌이 납북되어 송환되는 바람에 신원조회에 걸려 최종 면접에서 해군사관학교 합격이 취소되었다. 윤석은 자기 앞에 있던 술잔을 들어 한 입에 비웠다. 만배가 도루묵찌개와 심퉁이 숙회, 물가자미 무침회가 가득 차려진 술상으로 화제를 돌렸다.
“이거 진짜 먹고 싶었다.”
“많이 먹어라. 니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 어찌 그리 연락 한 번 없을 수 있나?”
윤석은 섭섭하다는 듯 만배에게 술을 권했다.
“니들 학교 앞 문방구에서 도루묵 알 팔았던 거 기억나나? 학교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많이 사먹었잖니. 그게 생각나 얼마 전에 도루묵 알을 왕창 사지 않았겠니. 한 솥이나 쪘는데 다 버렸다. 옛날 맛이 아닌 기라.”
학교 앞 문방구에는 지금의 순대 집처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양은솥이 입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닐을 젖히면 동글동글한 도루묵 알이 먹음직스럽게 쌓여 있었다. 알은 컸고 질겼다. 씹으면 떼글떼글한 알갱이가 미끌미끌한 점액질을 빠져나와 입안에서 터졌다. 씹을 때마다 ‘오도독 오도독’ 하는 소리가 났다. 비싼 껌 대용으로 도루묵 알을 씹고 다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도루묵 알은 해초와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에 자주 떠밀려 왔다. 그만큼 도루묵은 흔했다. 팔아도 제 값을 못 받으니 친구 집 어딜 가나 있었다. 찌개에, 구이에, 조림에, 그도 아니면 식해로 등장했다.
“오늘 만배 온다고 해서 양미리 좀 구웠다. 금방 갖고 올게.”
윤석은 웬만하면 양미리를 먹지 않는데 오랜만에 만난 만배와 나를 위해 양미리를 준비한 모양이었다. 감초 같은 녀석이다. 양미리는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이다. 깨끗하게 씻은 후 연탄불 위 석쇠에 올려놓고 소금을 살살 뿌려가며 내장을 빼지 않고 통째로 구워 뼈째 먹는다. 우리는 접시에 담긴 양미리를 걸신들린 듯 먹어 치웠다.
“중학교 2학년 땐가, 공설운동장에서 북한 어선나포에 항의하는 규탄대회 열렸잖니. 니들 기억나니?”
“기억나지. 그날, 만배 너 혈서 썼잖아. 그거 보고 깜짝 놀랐어. 손가락을 찢어 혈서를 쓴다는 게 말이 쉽지. 그때 모두들 손가락을 입에 넣고 눈치보고 있는데 갑자기 너희들 있는 곳이 웅성웅성하는 거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만배와 윤석이 눈을 마주치며 박장대소를 했다. 한참을 웃고 난후 윤석이 불콰해진 얼굴로 사건의 전말을 밝혔다.
“내가 책가방에서 손톱 다듬을 라고 연필 깎는 칼을 꺼내지 않았겠니. 그런데 만배 이 새끼가 내가 혈서 쓴다고 칼을 꺼낸 걸로 생각했던 모양이야. 미쳤니? 하고 손에 든 칼을 뺏으려 하지 않겠니. 나는 안 뺏기겠다고 야랑 몸싸움을 했고. 그런데 서로 잡고 밀치다가 그만 만배 손가락이 베였잖니. 손에서 피가 철철 나오길 래, 이왕 이렇게 된 거 혈서나 쓰자고 했지. 그걸 보고 옆에 애들이 떠드는 바람에 단상까지 올라가게 된 기다.”
허무한 결과에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윤석은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각자의 궤도를 돌며 멀어졌던 시간들이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원했던 마음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었다. 건배소리가 높아졌고 취기가 올랐다.
“지금도 대원극장 그대로 있냐?”
만배가 나를 보며 말했다.
“없어진지 오래됐다. 문 닫은 지 20년도 넘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호텔이 들어섰다.”
“그렇겠지.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만배는 멍하니 어두운 밤바다를 바라봤다. 중학교 때였다. 당시 새로운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극장 측에서는 아버지에게 극장표 몇 장을 보내오곤 했다. 공짜표를 몰래 빼돌린 나는 종종 만배를 불러 영화를 보러갔다. 만배는 영화보다 극장 간판이나 영화 포스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때 극장 간판을 그렸던 사람이 있었는데 만배는 그 사람이 일하는 창고를 수시로 기웃거렸다. 만배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학교 마치면 거의 매일 극장에 갔어. 극장 간판을 그리던 배씨 아저씨라고 계셨는데 그분한테 그림을 처음 배웠어.”
만배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미국에는 언제 건너간 거야?”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 가 한 2년 공사판에서 일하며 돈을 모았어. 그리고 비행기를 탔지. 고맙게도 배씨 아저씨가 미국에서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 분을 소개해주셔서 그분 밑에서 일하며 그림을 배웠어.”
“고생 많았겠네. 그래도 가끔 연락 좀 하지 그랬냐?”
“나라고 너희들을 안 보고 싶었겠냐? 너희들에게 연락하면 결심이 흔들릴 까봐 두려웠어. 가더라도 성공해서 가고 싶었어. 이 악물고 버텼지. 너희들과 보낸 추억이 없었다면 절대 견딜 수 없었을 거야.”
만배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 장례식은 그렇더라도 니 형 장례식 때는 왔었어야지. 니 형 죽기 전까지 얼마나 고생 했는지 아나?”
윤석은 답답하다는 듯 술잔에 소주를 따라 거푸 마셨다.
만배 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만배 형도 고문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작년 겨울에 죽었다. 나는 만배 아버지와 만배 형 장례식 모두 가지 못했다. 아니 갈 수 없었다. 10년 전 만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접하고 속초로 내려갔었다. 검은 넥타이를 매고 집을 막 나서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누구 장례식장에 가냐고 물었다. 만배 아버지 문상을 다녀오겠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방안에서 나를 불렀다. 중학교 다닐 때 만배 그 아이는 빨갱이니 어울리지 말라고 혼을 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앉아라.”
이어 아버지는 책장 깊숙한 곳에서 수첩 서너 권을 꺼내와 내 앞에 놓았다. 중학교 때 극장표를 몰래 가지고 나올 때 책장 안에서 가끔 봤던 수첩이었다, 형사수첩, 속초경찰서란 글씨가 표지 위아래로 새겨 있어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몹쓸 짓을 많이 했다.”
수첩을 펼치자, 거기에는 납북어부들을 속초시내에 있는 여인숙에 끌고 가 북에서의 행선지와 발언내용, 간첩 지령 수령여부 등을 집중 추궁했던 일, 전기고문을 비롯해 숱한 구타와 폭행을 자행했던 일이 일자별로 소상히 기록되어 있었다. 또 다른 수첩에는 경찰서 고위간부와 속초지검 검사가 자신들의 출세를 위해 납북되었다가 귀환한 사람들을 어떻게 간첩으로 몰고 갔는지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만배 아버지도 있었고 만배 형도 있었다. 그때는 여름이었고 전날 비가 내려서인지 무척 습했다.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는데도 땀에 젖은 옷이 몸에 쩍쩍 달라붙었다. 아버지가 말로만 듣던 간첩 조작 담당 형사였다니 눈앞이 깜깜했다. 아버지의 위선에 숨이 막혔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왔다. 다시는 아버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두 달 후에 일하고 있던 출판사로 아버지가 불쑥 찾아왔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죽기 전에 꼭 참회하고 싶다.”
같이 일하고 있던 동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날 쳐다봤다. 창피한 마음에 아버지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 이야기 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갖고 있던 수첩을 내 손에 쥐어 주며 눈물을 흘렸다.
“부탁한다. 네가 그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노력을 해주면 안 되겠니?”
그때부터 납북귀환어부와 그 가족을 위한 인권회복을 위해 매달렸다. 수첩에 적혀있던 분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빌었다. 빨갱이로 살아야했지만 빨갱이가 뭔지도 몰랐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탓하기보다 고맙다고 했다. 진실만 규명된다면 여한이 없다고 했다. 분노를 표하기보다는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작년 초에 형이 한 번 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어. 부랴부랴 비행기 표도 끊고 첼시 갤러리 전시회만 끝나면 바로 들어오려고 일정도 조정했어. 그런데 숙소로 가던 중에 교통사고가 크게 난거야. 6개월 가까이 병원에서 지냈어. 형이 죽었다는 소식도 그때 들었어.”
만배는 멍하니 창밖 밤바다를 바라봤다. 등대불빛이 밤바다를 밝히고 있었다. 아버지가 경찰이었던 사실을 만배는 알았을까? 자기네 집이 몰락하게 된 것이 내 아버지 때문이라고 하면 나를 여전히 친구로 대할까?
“임마는 뭔 생각을 이리 골똘히 하니? 경선아, 니 아버지 아직 살아계시지? 만배야, 경선이 아버지 경찰이었던 거, 니 알았나? 존나 멋있었다. 우리 동네에도 가끔 와서 납북됐다가 돌아온 사람들 뭐하는지 알려주면 용돈도 주고 그랬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고 지랄이야.”
나는 윤석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니 아바이 멋있다고 한 게 머 잘못됐나.”
속에서 불덩이가 끓어올라 밖으로 나갔다. 언젠가는 밝혀질 일이었지만 막상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니 친구들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죽을 때까지 감추고 싶었던 어두운 민낯이었다. 가게 옆 하수구에 쭈그려 앉아 토악질을 했다.
1년 전부터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는 올 초에 세상을 떠났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겨우 숨만 붙어있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봤던 날, 아버지가 누워있던 침상 맞은 편 벽에 달린 티브이에서는 납북귀환어부 과거사 및 인권침해사건을 재조명하는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동해지역 납북귀환어부와 그 가족에 대한 인권침해 사실을 조사했던 나는 그간 조사했던 자료를 정리하여 몇 년 전 언론매체에 제보했다. 반드시 진실규명이 필요하다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막 끝나자, 환자 모니터링 장비에서 빨간 불이 깜박거리면서 ‘삐삐’ 하는 기계음이 울렸다. 소리는 다급했고 날카로웠다. 미세하게 떨리던 초록선은 이내 직선으로 바뀌었다. 다가가서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생전의 마음고생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걱정됐는지 만배와 윤석이 밖으로 나왔다. 우리 셋은 방파제에 걸터앉았다. 등대 불빛이 먼 바다를 향해 산란하듯 흩어졌다. 우리는 어두운 바다를 말없이 바라봤다.
“미안하다. 만배야. 네 아버지와 형 일 정말 미안하다.”
“네가 미안할 게 뭐 있냐? 네 아버지 경찰이라고 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난 다 잊었다. 아니 다 잊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게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큰 소리로 흐느꼈다. 만배가 내 어깨에 손을 걸쳤다.
“아버지가 간첩으로 몰려 투옥되고, 생계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형이 배 타고 나갔다가 아버지에 이어 또 간첩으로 몰렸을 때는 정말 죽고 싶었다. 친구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나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너는 나를 점점 멀리하고…….”
“이 새끼들은 오랜만에 만나 가지고 왜 다 울고 지랄이니.”
윤석도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이번에 전시한 침몰이란 작품, 그거 아버지와 형 생각하며 그렸다. 인터뷰 때 등대가 누군가에게는 절망이 될 수도 있다고 했잖아. 아버지와 형 이야기야. 북한 경비정에 의해 강제로 납북되었다가 이듬해 송환되었을 때 멀리 보이는 속초등대를 보고 이젠 살았다며 엄청 기뻐했었는데…….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을 완성하고 나니까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절망과 고통이 몸 안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어. 그때 깨달았어. 등대는 등대일 뿐이라는 사실을. 등대를 바라보는 마음이 문제였던 거지.”
“얘들아. 내일 납골당에 모신 아버지와 형한테 인사드리러 가려는데 같이 갈래. 내 꿈이 시작된 대원극장이 있던 곳도 가보고.”
“기걸 무슨 말이라고 하나. 당연히 같이 가야지.”
윤석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배씨 아저씨는 아직 살아 계시냐? 어떻게 지내시는지 얼굴 한 번 뵙고 싶다.”
“응. 지금 서울 양재동에 살고 계셔. 여기 오기 전에 인사드리고 왔다. 엄청 반가워하시더라.”
만배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35년 만에 우리 삼총사래 다시 뭉치는 거니. 이왕이면 내일 배 타고 바다도 한 번 나가는 게 어떻겠니?”
우리 셋은 내일 만나기로 하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갯배 쪽으로 걸어가는 데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빨간 등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이기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망이기도 한 등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암흑의 바다를 향해 불빛을 쏘아낼 뿐이었다. 만배의 그림 속 등대도 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절망이 되었던 검은 등대는 과거의 고통과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 침몰되어 버렸으면 좋겠다.
다음 날 우리는 만배 아버지와 만배 형을 모신 승화원에 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올 초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고를 뒤늦게 알렸다. 윤석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며 혀를 찼다. 우리는 만배 아버지와 만배 형, 그리고 내 아버지 모두에게 인사를 드렸다. 나는 너무 늦게 와 죄송하다고 용서를 빌었다. 승화원을 나와 대원극장이 있던 곳으로 갔다. 극장은 사라지고 호텔이 들어선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우리의 시간과 추억이 훼손된 것 같아 섭섭했다. 만배는 호텔 주변을 돌며 자신이 그림을 그렸던 곳이 여기쯤이 아니었을까? 하며 애석해 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다음 윤석의 고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바다는 고요했다. 설악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바다를 가볍게 어루만졌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뱃머리에 서서 등대를 바라봤다. 만배 아버지와 만배 형, 그리고 이 바다를 지나간 그 누군가도 여기 어디쯤에서 저 등대를 바라봤을 것이다.
하얀 등대는 오늘도 여전히 땅 끝에서 바다 끝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땅 끝은 바다의 시작이었고, 바다의 끝은 땅의 시작이었다.
첫댓글 유가족이 아닌 실종자의 가족인 주인공이 인지 장애 노모를 위해 사표내는 과정이 폐등대와 점철되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