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보훈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작] 민병식 외
개망초의 향기와 비빔밥의 마음 / 민병식
나의 고향은 경기도 연천, 휴전선과 아주 가깝고 북한과 경계가 맞닿아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 전 38선이 그어졌을 때는 북한 땅이었고 전쟁 후엔 남한에 속하게 된 수복 지구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구순이 되신 아버지가 전쟁 전에는 북한 땅에서 살았다는 뜻도 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은 탓에 북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뿔이 난 도깨비 같은 모습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점차 북한 이탈 주민 들을 접하게 되면서 그들도 나의 부모, 자녀와 같은 같은 피가 흐르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특히 성인이 되어서는 소년원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탈북한 북한 요리사 선생님께서 자원봉사로 학생들에게 북한 요리 무료 강습을 해주시는 도움을 받기도 하여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뿌리를 내리고 당당히 살아가는 이탈 주민들의 모습에 감사하는 마음까지 갖기도 한다.
아들과 함께 고향을 찾았다. 해마다 고향을 한 두 차례씩 방문하는데 아직 고향에 어릴 때 살던 집터가 남아 있고 친척 분들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방문은 내 고향 연천 의병을 발자취를 찾아 순국의 의미를 되새기고 6. 25의 비극을 모르는 전후세대,'특히 현 세대의 학생들과 미래세대 에게 한국 전쟁의 아픔과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기성세대에게 있다고 보아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 들을 전달하고 한국 전쟁에 대해 우리 민족이 겪은 분단의 아픔과 이산의 고통을 교훈으로 삼기위한 호국 보훈 여행으로 아들을 동반했다. 차로 약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 고향을 상징하는 우뚝 선 산이 하나 보인다. 바로 보개산이다. 이 보개산에 심원사라는 절이 있는데 바로 이 곳이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의 주무대이다. 연천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왕회종, 박종한, 한창렬, 김규식 등 우리가 잘 모르는 분들도 셀 수없이 많은데 ‘연천의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분은 고등학교시절 교과서에도 나왔던 의병장 허위다. 그는 이인영, 이강년, 민긍호 등과 1907년 말 일만여 명의 의병과 함께 서울 탈환 작전을 두 차례나 펼쳤고 끊임없이 일본군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그 활동의 대표적인 근거지 중 하나가 바로 보개산 심원사인 것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 해마다 소풍을 갔던 동막리 유원지가 보인다. 아미천 계속의 청정수가 흐르는 계곡을 지나 심원사 입구에 다다른다. 입구에는 연천 한일 의병비가 당당하게 서있다. 심원사가 항일 의병의 주둔지였고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많이 희생되었으며 시신을 수습하여 안치했다는 내용이 있다. 나이 50이 넘도록 나는 왜 이렇게 훌륭한 고향의의병들을 몰랐을까. 아마 관심도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 터 이제와 서 묵념을 드리는 내 모습이 죄송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면서 반면에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목숨을 바친 애국의 땅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라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다.
"아들, 아빠가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계셨던 곳, 충절의 고장 출신이다. 너도 이 분들의 후손이니 나라를 위해 가진 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빠의 고향은 의병의 고장이란다. "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의병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다시 한 번 가슴이 뭉클해진다. 하늘이 모처럼 높고 맑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붉고 노랗게 피어 하늘거리는 꽃들과 펄럭 날개 짓을 하며 날아다니는 산새들, 초록으로 변해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은 자나 깨나 죽을 때까지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 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위해 회사 밖으로 나가려다 보니 정원에 개망초가 가득 피어있다. 수천, 수만 가지 꽃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중의 하나가 개망초인데 도시나 농촌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 전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들꽃으로 군락을 이루어 하늘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개망초를 보면 어릴 적 고향의 들판을 보는 듯 무척이나 정겹다. 개망초는 생긴 모습이 계란 프라이를 닮았다고 해서 계란꽃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내가 이 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디든 조금의 빈 땅이라도 어김없이 피어나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들꽃의 최고봉이기 때문이다. 낚시 여행을 가거나 등산을 갔을 때, 논 밭둑 길을 거닐 때라도 개망초는 어김없이 피어있다. 샛노란 얼굴로 웃으며 하얀 날개로 손짓을 한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나누면 은은한 자연의 향기를 내게 선물하고 자신은 늘 그 자리에 있으니 언제든지 와서 쉬었다가 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개망초 가득한 들판을 거닐면 어릴 적 동무들과 뛰어놀던 고향 생각이 저절로 난다. 그땐 무슨 꽃인지도 몰랐었는데, 동무들과 신 나게 뛰어 놀다가 꽃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흘러가는 구름이 어떤 모양인지 재잘 대던 개구쟁이 들은 지금 모두 중년의 아저씨 들이 되었다.
예로부터 하나의 민족이 분단 되어 있던 경우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도 많았다. 그러나 모두 통일이 되었고, 현재까지 남은 분단 국가는 거의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특히 한반도는 이념이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국가로 냉전 체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곳이다. 분단의 이유는 남한과 북한이 추구하는 체제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를, 북한은 공산주의와 계획 경제 체제를 선택하고 있기에 서로 평행선을 달릴 뿐 합일점을 찾는 것이 극도로 어렵다. 그러나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독재 국가를 유지하려는 북한의 지도층이지, 북한의 주민이 아니라는 거다. 즉, 무조건적으로 북한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하다. 통일은 그 어떤 문제보다도 무한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양측의 지도자가 판문점에서 만나 손을 잡고 사진을 찍는다고 통일이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겉으론 평화가 유지되는 듯하지만 그 와중에도 북한 수뇌부는 끊임없는 핵실험과 연평도 폭격, 천안 함 폭침 같은 도발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핵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내가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고, 내가 고민하고 노력하면 통일에 도움이 되는 지에 대해서 방관자가 되게끔 만든다. 정말 중요한 것은 통일에 대한 관점이다. 결국, 우리는 북한 주민들의 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꼭 필요하다. 내 가족이 고통 받지 않도록 도와야 하고 함께 잘사는 나라, 함께해서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통일을 해야 한다는 거다. 그 전제 조건은 관심이다. 북한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필요하다. 경제 협력 이외에도 문화, 역사적 공통점, 음식, 좋아하는 것들 등 문화적 접근과 교류가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통점도 발견하고 차이점도 연구하면서 서로 한 발 다가가는 것이 기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하였을 때 경제적 차이는 바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개성 공단은 참 좋은 예인데 폐쇄되어 안타깝지만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문을 두들겨야 한다. 감시당하는 관광으로 달러를 쓰고 오는 원조의 방식보다 남북 경제 협력 같은 생산성 있는 경제 교류가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오늘 점심은 비빔밥이다. 비빔밥에는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데 무생채, 콩나물, 시금치, 버섯 등에 더하여 계절에 따라 생산되는 각종 채소와 제철 나물을 첨가하여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다. 또, 빨강, 노랑, 초록 등의 총 천연 색의 경계선이 어느 순간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어 정갈한 계절의 맛이 입안에서 춤을 춘다. 비빔밥은 어떤 재료를 넣어도 어울리게 되는 화합의 음식인 것이다. 개망초의 꽃말은 화해다. 꽃말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는다면 그 마음들이 아름다운 사랑의 향기가 되어 따뜻함이 가득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모든 이들이 생김새부터 성격도 개성도 생각도 다르듯 다름만을 내세울 수는 없다. 각기 다른 사람이 모여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때는 한 가지 맛만 나는 각각의 채소일 뿐이지만 그것들이 고추장, 된장과 합쳐져 비빔밥이 되면 최상의 맛을 내듯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할 터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는 지켜온 순국선열과 호국보훈 영웅들의 마음이며 그분들에게 보답하는 우리의 의무인 것을 나부터 개망초의 향기와 비빔밥의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날이다.
가보 / 이미임
큰오빠가 자신의 이름이 대표로 적힌“이ㅇㅇ 가문” <병역명문가>패를 받았다. 상패에는 1대인 아버지를 비롯하여 2대인 아들 넷과 3대인 다섯 명의 손자 이름이 모두 올라있다. 아버지로부터 손자까지 3대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병역 의무를 성실히 잘 마쳤기에 이를 빛내기 위한 증표로 받은 가문의 영광인 가보이다. 은색 상패 직사각 테두리에는 3대가 군 복무 중 흘렸을 땀방울이 인내와 끈기의 결정체인 무궁화 꽃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상패 아랫부분 중앙에는 커다란 무궁화 꽃 한 송이가 마치 큰오빠처럼 중심을 잡고 활짝 피어있다. 중앙에 놓인 무궁화 꽃 양 옆에는 꽃송이를 받치고 있는 나뭇잎이 가족들처럼 소중히 놓여있다.
집안 장남인 큰오빠는 마지막 조카가 병역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병역명문가 가문을 신청하기 위한 서류를 취합했다. 취합한 서류를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 병무청에 직접 접수했다. 마침내 병무청으로부터 병역명문가 가문으로 선정되었다. 동시에 큰오빠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 도지사 표창까지 받는 영예를 안았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얼마나 많이 자랑스러워 하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했다.
아버지는 6.25전쟁 때 강원도 최전방에서 직접 싸웠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차출되어 군사훈련을 받았고 경무대에서 헌병으로 복무하였다. 아버지는 슬하에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병역명문가 선정이다 보니 병역과 관련이 없는 두 딸의 가족과 아버지 친손녀들은 병역명문가패에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아버지를 필두로 하여 네 아들과 네 아들에게서 태어난 손자만 해당되었다. 아버지는 평소에 가문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여 말씀하였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보잘 것 없을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하찮은 일일지라도 아버지는 가문의 영광으로 귀결시켰다.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에 부응이라도 한 것일까. 이제 아버지의 손자들까지 모두 병역의 의무를 잘 마치고 아버지 가문도 병역명문가 가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장남인 큰오빠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동생들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자원하여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철원 어느 부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어언 4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푸른 제복을 벗었다. 큰오빠가 군 복무를 끝내고 퇴역하던 날 우리 가족은 모두 강원도 어느 부대 연병장 앞 계단으로 모였다. 아직 쌀쌀하던 3월이었다. 퇴역식이 거행되었다. 우리는 계단 상단에 마련해 놓은 내빈석에 앉아있었다. 어머니는 내빈석 맨 앞자리에 앉았다. 식순에 따라 영광스러운 보국훈장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앞자리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눈시울을 훔치자 우리도 모두 눈시울을 훔쳤다. 퇴임식 마지막 순서였다. 큰오빠 내외는 커다란 꽃다발을 목에 걸고 군용 자동차에 올라 나란히 섰다. 큰오빠 내외를 태운 자동차가 연병장을 돌며 카퍼레이드를 진행하였다. 빗발 같은 박수소리가 연병장에 울려 퍼졌다. 어머니는 큰오빠 내외가 카퍼레이드를 마치고 차량에서 내려올 때까지 내내 눈물만 훔쳤다. 부모님께 편지를 보낼 때마다 푸른 제복을 벗고 사회에 나가면 장남으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수행하겠다던 큰오빠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자신의 청춘을 바쳤던 것이다. 그 공로로 보국훈장을 가슴에 안았다. 군 생활을 하면서 일가를 이루었다. 큰오빠 딸은 경찰간부로 복무 중이다. 아들도 장성하여 자신의 아버지처럼 자랑스러운 현역으로 군 복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잔잔히 빛나는 은색 상패에는 아버지를 비롯하여 네 아들과 다섯 명의 손자가 나라를 위해 흘렸을 땀방울을 하나도 떨어뜨리지 않고 보석처럼 값지게 머금었다. 도가니에서도 아랑곳없이 잘 견뎌낸 은빛이 화려하다. 이제 병역명문가에 입성한 가족들은 나라를 위해 흘린 값진 땀방울을 가슴 한 편에 더욱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3대가 땀으로 일궈낸 자랑스러운 가보는 저들의 가슴속에서 무언의 힘으로 자리 잡고 혹 살아가는 일이 힘에 부쳐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서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3대의 이름을 감싸고 있는 은빛 무궁화 꽃송이가 더없이 또렷하게 빛난다.
나의 영웅, 백씨 아저씨 / 정승권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평화로운 동네 분위기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50대 중반의 나이에 머리가 반쯤 세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리던 백씨 아저씨였다.
백씨 아저씨는 성격이 괴상하고 고약했다. 동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모여 놀고 있으면 냅다 쫓아와 조용히 하라며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우리는 백씨 아저씨를 흰머리독수리라고 불렀는데, 항상 매의 눈을 하고서 쫓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데 저만치서 백씨 아저씨가 매서운 눈초리를 하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동네친구들은 “조심해~ 흰머리독수리가 쫒아온다.”라고 외치며 도망을 쳤다.
잠시 후 우리 곁으로 동네 아주머니 한분이 다가와 “너희들 학교에서 6.25 전쟁에 대해 배웠지? 백씨 아저씨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6.25 때 참전을 했던 분이야. 그렇게 고마운 어른을 놀리면 안 돼!”라고 말씀을 하셨다. 나와 친구들은 괴팍한 백씨 아저씨가 참전용사였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며칠 후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백씨 아저씨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아저씨가 정말 6.25 참전용사예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어쩐 일인지 백씨 아저씨는 평소의 딱딱하고 퉁명한 말투대신, 부드럽고 온화한 어조로 옛 이야기들을 천천히 들려주셨다.
아주머니의 말대로 백씨 아저씨는 6.25 참전용사였다. 1950년 6월 25일,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군에 입대했던 백씨 아저씨는 6.25가 발발한 후 어린 나이에 압록강까지 진격해 적과 싸웠다.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서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청춘을 바친 것이다.
백씨 아저씨는 나라를 위해 싸운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갔다고 말씀하셨다. 한 번은 중대가 야간기습을 받아 수십 명 중 10명 정도만 살아온 적도 있었고, 또 한 번은 산골짜기에서 급습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다고 하셨다. 백씨 아저씨는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먼저 피 흘리며 죽어간 전우들을 생각하면 늘 미안해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백씨 아저씨로부터 들었던 실제 전쟁의 모습은, 그간 학교에서 6.25 전쟁에 대해 배우며 머릿속로만 상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뚫고 전진하며, 전우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저씨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러다 아저씨는 전쟁터에서 총을 맞아 왼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얻게 되었다. 전쟁터에서 총상을 입고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 것도 가슴 아픈데, 더 비극적이었던 것은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이 모두 풍비박산 나버렸던 것이다. 백씨 아저씨의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북한군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저씨는 충격을 받아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1.4 후퇴 당시 북한군은 국군에게 협조를 했거나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모두 끌고 가 즉결처형을 했는데, 이 와중에 백씨 아저씨의 가족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백씨 아저씨는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해 애통해했다. 무엇보다 이 같이 끔찍한 일을 겪고도 살아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 매일 같이 술을 마시며 폐인처럼 지냈다고 한다.
부모를 잃고, 한쪽 다리마저 잃은 채 상처와 아픔으로 부대껴온 삶은 얼마나 험난했을까. 아저씨는 트라우마를 끌어안은 채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마음의 문을 꼭 닫고 살다 보니 의도와는 다르게 괴팍한 노인으로 보였었던 것이다.
“되돌아보면 힘들고 모진 세월이었지만, 6.25 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지켰다는 사실이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지 몰라! 나라가 있어야 국민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거든.”
그 순간 백씨 아저씨와 같은 참전용사들이 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깊은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백씨 아저씨는 평화로운 동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괴팍한 노인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젊음을 희생해 우리에게 평화를 안겨준 조국의 영웅이었다.
얼마 후 나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백씨 아저씨의 집에도 놀러가게 되었다. 아저씨는 내게 6.25 전쟁 참전 당시 찍었던 사진들을 보여주셨다. 사진을 보면서 덤덤하게 그때를 설명해주셨지만, 사진을 만지는 손끝에서 애잔함이 느껴졌다.
내가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넉넉한 형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씨 아저씨가 평생을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기부해 오셨다는 점이다. 지독한 트라우마로 인해 당신의 삶에는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지만, 아저씨는 최선을 다해 희망의 날갯짓을 하셨던 것이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옛 동네를 찾아가면 백씨 아저씨 생각이 난다. 마치 옛 일기장을 넘기듯 백씨 아저씨의 6.25 참전 이야기가 기억 속에서 새록새록 되살아나 늘 코끝이 찡해진다.
추운 겨울이 수십 번 지나가도 6.25 전쟁의 냉기는 아직도 이 땅위에 뼛속 깊이 남아 있다. 6.25는 우리에게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전쟁이다. 6.25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가 잿더미로 변했고,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산가족의 슬픔과 고통이 오늘날까지도 고스란히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남과 북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단이 고착된 것은 전쟁이 초래한 가장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평화는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어렵게 쟁취해낸 것이다. 6.25 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전례 없이 빠른 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 역시 목숨을 바쳐 자유와 평화를 지켜낸 백씨 아저씨와 같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살아 숨 쉬는 조국의 영웅 백씨 아저씨께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