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2 송가인의 마을 앵무동으로 건너가던 장구포 나루를 떠올리다
앵무동은 ‘전남 진도군 지산면’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한자로는 앵무새 앵鸚 그리고 앵무새 무鵡로 쓴다. 왜 앵무鸚鵡인지는 알지 못한다. 혹자는 지형이 앵무새 모양이라 그렇다고 한다. 나의 15대조께서는 1680년 무렵에 이곳으로 입촌하시어, 나의 부친까지 300여 년을 살았다. 진도 지역의 호족, ‘창녕昌寧 조曺씨’의 집성촌이다. 요즘에는 트롯가수 송가인의 고향으로 잘 알려졌다. 송가인도 창녕 조씨인데 족보를 찾아보니 나보다 한 항렬위이고, 무려 21촌 사이이다. 앵무동에 입촌하고 바로 갈려나간 먼 혈연이다.
앵무동이 속한 ‘진도군 지산면’은 1895년 조선 말까지 ‘국영 말馬 목장’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진도에서도 가장 늦게 인구가 유입된 지역이다. 1975년 소포만 간척제방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진도읍과 지산면 사이로 들어와 임회면 십일시 장터까지’ 깊숙하게 만灣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도읍에서 지산면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소포나루나 장구포나루를 배로 건너거나, 십일시 장터까지 돌아가서 ‘돌다리石橋’를 건너가는 3가지 길이 이용되었다. 3가지 길 가운데, 고을 원님이 다니는 길은 읍성에서 가장 가까운 소포나루를 건너는 길이었다. 나는 주로 ‘장구포 나루’를 건너서 나의 아버지의 고향 앵무동으로 갔다. 소포나루는 지산면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지산면 중간 지점에 위치한 앵무동까지는 나루에서 내려서 남쪽으로 10여리(약4키로미터)를 또 걸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 말까지 진도읍내에서 장구포 나루까지 가기 위해서는, 진도읍성의 남문을 나와서 ‘하굴마을’로 가서 ‘굴재(대곡산)’를 넘어 갔다. 산을 넘어 다니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남문포 제방과 염장포 제방의 물막이 공사가 이루어지고, 진도읍에서 장구포까지 신작로가 생겨났다. 1920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나루는 읍내에서 10리 길이었고, 거기서 바닷길 4리를 건너면 바로 앵무동에 닿을 수 있게 되었다. 장구포 나루는 소포나루의 바닷길 2리에 비하면 배나 넓은 바닷길이었지만, 물살이 빠르지 않았고 호수처럼 잔잔하였다. 석교 돌다리까지 섬 깊숙이 들어와 만들어진 만灣이었기 때문이다. 앵무동으로 가는 사람들은 장구포 나루를 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지산면 고야리와 길은리와 인지리와 보전 갈두로 가는 사람들도 장구포 나루를 이용하였다. 앵무동으로 건너가서 각자의 마을로 가는 것이 소포나루보다 더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옛 장구포 나루터에는 지금도 옛날 주막집 모습이 남아있다. 주막집 아래에 바다와 경계를 이루던 돌담장도 그대로다. 들물 때면 바닷물은 돌담장 아래까지 순식간에 밀려왔다. 그리고 돌담장에 부딪히며 찰싹 찰싹 파도소리를 만들었다. 물이 차오르면 갯벌 위에 누워있던 나룻배는 흔들거리며 물위로 일어선다. 뱃사공은 ’두꺼운 나무 널빤지에 구멍을 뚫고 밧줄을 넣어 만든 건널 판자‘로 바닷가와 배를 연결해준다. 사람들이 타기 쉽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 타면 ’건널 판자‘를 배 위로 끌어올린다. 건널 판자는 앵무동 나루에 도달하여 배에서 내릴 때에도 또 사용하는 것이다.
바다의 들물과 썰물은 하루 2차례씩 번갈아 일어나지만, 시간은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어떤 날은 갯벌 위로 물이 찰 때까지 한참을 기다리게 된다. 그런 날이면 어른들은 주막집에서 막걸리를 한 사발 걸쳤다. 주막집이 내놓는 ‘개다리소반’ 위에는 막걸리를 담은 옹기그릇과 표주박으로 만든 주걱이 있었다. 안주거리는 신 열무김치와 막 딴 고추와 된장이다. 술 탓일까 나이 탓일까? 남자 어른들은 늘 늦장을 부렸다. 아녀자와 아이들이 배를 다 타도 여전히 ‘궁둥이 무겁게’ 일어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공이 두세 번 재촉해야 마지못해 배위에 오른다. 어린 마음에, 나는 아버지가 배를 놓칠까봐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나룻배는 앵무동으로 건너갈 사람이 다 타야 출발하는 맞춤형이었다.
앵무동으로 건너가는 나룻배는 사람의 힘과 바람과 조류를 이용하여 움직이는 비동력선非動力船이다. 나룻배는 소나무로 만들었다. 나무판에 홈을 내서 짜 맞추고, 나무못을 사용하였다. 배의 앞부분(이물)은 물살을 가르기에 적합하도록 좁게 만들었고, 뒷부분(고물)은 넓게 벌어졌으며 뱃바닥은 평평하고 널판자를 깔았다. 배의 양편으로는 뱃바닥보다는 조금 높게 판자를 걸쳐놓아 앉을 수 있었다. 배의 뒤편에는 키(치)가 있었고, 노가 있었다. 키나 노는 모두 탈착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배의 앞뒤 중간 지점에 있는 ‘멍에’에 돛대를 세웠다. 돛대 역시 나무로 만들었고, 돛은 대나무로 살을 만든 후에 광목을 달아매어 만든 사각형 돛이었다. 외돛이었는데, 돛을 펴고 접는 것은, 요즘 우리가 줄을 당겨 커튼을 오르내리는 방법과 같았다. 배의 앞부분에는 동그랗게 말아둔 굵은 밧줄이 실려 있었다. 나룻배를 물가로 끌어당기는데 사용하였고, 나룻배를 나무나 돌에 묶어두는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깊은 바다가 아니기에 ‘닻’ 대신 밧줄을 사용한 듯하다.
사공은 혼자서 모든 일을 하였다. 사람들이 배위에 오르면 우선 양편으로 나누어 앉도록 한다. 한쪽으로 몰리면 작은 나룻배가 자칫 균형을 잃고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진도 말로 “배가 까바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다 타면, 긴 대나무로 만든 삿대로 배를 밀어서 갯골(수로)로 나간다. 사공은 해도가 없어도 장구포 앞바다의 물길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윽고 바닷물에 나룻배가 충분히 뜨게 되면, 삿대를 거두고 배 뒤쪽에서 노를 젓기 시작한다. 노를 몸쪽으로 끌어 당겼다가 반쯤 돌리면서 다시 밀어낸다.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며 배는 점점 석교만(소포만) 바다 가운데로 나아간다. 바다 한 가운데 들어서면, 사공은 노 젓기를 멈추고 배위로 노를 끌어 올려놓는다. 이제 조류의 흐름을 따라 가거나 또는 돛을 올려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사공은 배 뒷전에서 키(치)를 잡고 나룻배의 방향을 조절하면서 잠깐 여유를 가진다. 무명 옷 바지춤에서 잘게 썬 담배잎과 역시 잘게 자른 종이를 꺼내서 담배를 말아 입에 문다. 어른들이 있어도 사공은 자유롭게 담배를 피웠다.
배의 양옆으로 높지 않은 난간 너머로는 갱물(바닷물)이 찰랑거린다. 햇빛에 반사되는 바닷물은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갱물 너머로 앵무동이 보인다. 앵무동 좌측으로 개머리 마을이 보이고, 삼당산이 보인다. 바닷물은 소포만으로 들어와서 임회면 석교 다리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소포만으로 빠져 나간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닷물이 신기하여 난간 너머로 손을 뻗쳐 본다. 그럴 때면 어른들은 야단을 친다. 어른들은 바다를 무척이나 경계하였다.
아주머니들은 배 양쪽보다는 뱃바닥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농사철이면 이종(모내기) 걱정이 가장 많았다.
“어째 이렇게 가믄지 모르겄어라아. 나는 여제껏 이종날도 못 잡고 있소.”
‘그란께 말이요. 아까 장에서 들은께, 누가 멧뚱을 앞산에 써갖고 그란다 안 하요. 그래 갖꼬, 여자들이 가서 멧뚱을 파부렀답디다.“
”바테 곡식도 타들어가니 어째사 쓸지 모르것소. 살다 살다 징한 가뭄도 다 본당께라.“
겨울에는 바닷바람이 매서웠다. 배가 움직이면 더 추웠다. 난간 뒤로 몸을 수그려서 바람을 피했다. 여자들은 큰 보자기로 머리 위부터 귀를 감싸고 턱 아래에서 매듭을 지었다. 하늘에 구름이 끼고, 진도의 싸라기 눈발이 날리는 날이면, 바다는 더 으스스 하였다. 난간을 꽉 붙들고 어서 앵무동 갯가에 닿기를 기다렸다.
배는 ‘닭섬’ 옆을 지나간다. 닭섬은 닭 모양을 한 작은 섬이다. 옛 사람들은 섬의 모양을 너무 잘 알았고, 거기에 딱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 불렀다. 뱃사공은 닭섬에서 살았다. 앵무동에 가까운 위치라 큰 소리로 부르면 서로 들리는 거리이다.
닭섬을 지나면 나룻배는 곧 앵무동에 닿았다. 장구포 나루에서 출발하여 20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다. 사공은 삿대로 배를 밀어 갯가로 붙인다. 갯가에 마을 사람이 나와 있으면 뱃머리에 매어둔 밧줄을 던졌다. 그러면 마을 사람이 밧줄을 받아서 배를 끌어 주었다. 마을 사람이 없을 때는, 사공은 얕은 바닷물에 뛰어 내려 배를 끌어당겨 갯가에 댔다. ‘건널 판자’로 나룻배와 갯가를 다시 이어주면 사람들은 내리기 시작한다. 고야리와 길은리로 보전과 가치로 가는 사람들은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읍장에서 산 물건을 들고, 다시 발길을 재촉하였다. 앵무동 잔등(고개)을 넘어 서쪽으로 갔다. 언제인가 물때가 맞지 않아서 앵무동 갯가까지는 도저히 배가 닿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나는 ‘닭섬’에서 내려서 ‘노둣길’을 건너 앵무동으로 갔다. 노둣길은 바닷물이 크게 빠지면 드러난다. 주로 음력 사리 때이다.
내가 장구포 나루를 건넌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1962년 초등학교 2학년 이후에는 나룻배를 탄 기억이 없다. 앵무동으로 가는 길은, 읍내에서 지산면 소포素浦로 가는 버스를 타고 ‘십일시 장터’까지 빙 돌아서 지산면 고야리까지 간 다음에 걸어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그 즈음에 장구포 나룻배도 운항을 중단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버스길이 편해지면서 장구포 나루터는 잊혀져갔다.
1975년 진도의 소포제방이 완공되면서 앞서 말한 넓은 소포만은 간석지 논으로 변하였다. 앵무동으로 가는 길은 다시 장구포 마을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제는 나룻배가 아닌 자동차를 타고 간다. 옛날 장구포 제방의 수문이 있던 곳에서 앵무동까지는 일직선으로 쭉 뻗은 포장길이다. 도로 초입에 있는 조그만 둔치는 앵무동 출신 가수의 이름을 따서 ‘송가인 공원’이라 불린다. 4월 남도의 봄날이면 앵무동으로 가는 도로 양쪽으로는 유채꽃이 화려하다. 중간 지점에는 ‘붕어 낚시터’로 유명한 수로가 있다. 나는 눈을 감고 ‘나룻배’를 타고 갱물(강물)을 건너가는 추억에 잠긴다. 그러나 1키로 미터를 조금 넘는 짧은 길이기에, ‘어! 아!’ 하는 순간에 앵무동에 다다른다. 진도읍에서 출발하여 앵무동까지 모두 20분도 안 걸린다. 옛날 사람들이 반나절 걸려서 가던 길이다. 옛날 장구포구에 바닷물이 들고 나듯이, 이제는 지산면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이 길을 들고 난다. (태허당)
첫댓글 앵무동과 장구포에 관한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아짐들이 나누는 사투리에 고향의 정겨움이 넘쳐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