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헌공 권홍(大司憲公 權 弘)
權弘(1467 - 1516)은
1489年(成宗20年) 進士가 되고, 進士로 1497年(燕山君3年) 別試文科에 壯元及第하였다.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으며, 1504年(燕山君10年) 司憲府 執義로
甲子士禍에 連累되어 全州에 付處되었다.
(대사헌 이자건(李自健), 대사간 박의영(朴義榮), 집의 권홍(權弘), 사간 강숙돌(姜叔突), 장령 이맥(李陌)과 김근사(金謹思), 지평 김인령(金引齡)과 김철문(金綴文), 정언 김관(金寬)을 의금부 옥에 가두었다.
전지하기를,
"이세좌가 자신이 중한 죄를 범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방면되므로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아뢰지 않았다.
또 무릇 가옥의 매매는 두 집의 사정에 따라 하는 것인데,
사헌부의 관원들이 민원(民怨)을 빙자하고 간한다는 이름을 사려고 하여,
집을 철거하지 말기를 청했다. 지금 바야흐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통렬히 없애려 하는데, 도리어 선동하니,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으니, 사헌부에서 장 숙원(張淑媛)의 이웃집 철거하는 것을 간했기 때문이었다.)
공의 이름은 홍(弘)이고 자는 사의(士毅)이다.
아버지는 참의 영(齡)이고 어머니는 군수 박신함(朴信諴)의 딸이며
정해년(세조 13, 1467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능하여 자라면서 더욱 정진하여 23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살에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곧바로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니 명망이 드날리게 되었다.
당시 연산군이 윤씨를 복위시키려고 하자
사헌부집의였던 공은 굳게 간쟁하다 곤장을 맞고 완산(전주)으로 유배당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해에 소환되어 관직을 제수 받았는데
이듬해 중시(重試)에서 또 수석을 차지하여 대사간으로 승진했다.
얼마 있다 승정원에 들어가 우부승지가 되었고 등급을 뛰어넘어
우윤에 제수되었다가 관직에 들어간 지 1년 남짓 후에 대사헌에 올랐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 상을 마친 뒤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체직된 뒤 참판에 제수되었다.
평소에 풍질을 앓고 있었으므로 요양하기 위해 개성부윤이 되기를 청해 나갔다가
병자년(중종 11, 1516년) 5월 18일 관서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0세였다.
공의 효성과 우애는 마음에서 우러났고 강직함은 성품에서 나왔다.
집에 있을 때나 관직에 임할 때나 바른 것을 지키되 흔들림이 없었고 문장과 덕업으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부인 송씨는 진천(鎭川)의 명망있는 집안인 대사간 우(愚)의 증손으로 능히 부도(婦道)를 다했다. 공보다 오래 살아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자녀가 없어서 공의 아우인 목사 박(博)의 아들 덕유(德裕)로 후사를 삼았다.
덕유는 감찰에 올랐으며 우찬성 조계상(曺繼商)의 딸을 맞이하여 5남을 낳았다.
장남 극인(克仁)은 일찍 죽었으나 아들 하나를 두었고,
둘째아들 극의(克義)는 봉교,
극례(克禮)는 정자,
극지(克智)는 진사이고
극관(克寬)은 어리다.
공이 누린 수명은 그 덕과 맞먹지 못했고
지위는 그릇에 차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자손이 끊임없이 훌륭한 가업을 계속 이어가니 적선한 집안에 보답이 있다는 말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아아! 성대하도다.
가정(嘉靖) 경신년(명종 15, 1560년) 7월 일 세움.
1506年 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軍器寺副正을 지냈으며,
1507年(中宗2年) 京畿道 御使로 나가고, 文臣重試에 壯元及第하여
司諫院大司諫에 昇進하였다가 同副承旨가 되었다.
이어서 漢城府 右尹을 거쳐
1509年(中宗4年) 禮曺參判이 되고, 大司憲이 되었다.
1511年(中宗6年) 黃海道觀察使,
1513年(中宗8年) 別試 試官이 되고,
全羅道觀察使로 赴任하여 迷信打破에 努力하였으며,
工曹參判으로 起用되고 1515年(中宗10年) 開城府 留首에서
1516年(中宗11年) 死亡하였다.
享年 50歲이다. 특히 文章이 뛰어났다. 繼子는 署令公 權德裕이다.
權弘의 墓所는
京畿道 楊州市 德溪洞에 夫人 貞夫人 鎭川宋氏와 單墳合葬 하였다.
封墳은 圓形으로 構成되었으며 護石을 둘렀고, 뒤에는 넓은 莎城으로 둘러쳐져 있다.
封墳 앞에는 碑座冠首 形態의 墓碑와 魂遊石, 床石, 鼓石, 香爐石 等이 配置되었다.
1560年(明宗15年)에 建立된 墓表의 碑文에는 權弘의 世系와 官職履歷이 簡潔하게 나와 있고 夫人과 子息의 이름과 官職이 나와 있다.
權弘은 平素에 風疾을 앓아 病을 조리코자 開城府尹으로 일부러 나갔는데
在職 中 50歲의 나이로 死亡하였다.
燕山君의 虐政에 反對하고 中宗反正에 參與한 士林 權弘의 生涯를 살필 수 있다.
墓表의 크기는 높이 184cm, 너비 58cm, 두께 20cm의 規模이다.
또한 左右에는 望柱石과 文人石이 各各 한 雙씩 세워져 있고,
中央에는 火窓이 4個인 長明燈이 세워져 있다.
또 封墳 옆 右側에는 臺石에 烏石의 碑身을 얹고 屋蓋石을 갖춘 墓碣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