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 『우포늪』 |
기행팀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우포늪이었다.
‘살아있는 자연사 박물관’ ‘생태계의 고문서’. 경남 창녕의 우포늪을 가리키는 말이다. 개발논리에 밀려 국내의 수많은 늪이 사라져간 지금, 묵묵히 늪의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우포(소벌), 목포(나무벌), 사지포(모래벌), 쪽지벌 총 4개의 늪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를 보통 우포라고 부른다.
우포의 역사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 시대에는 비사벌로, 고대 부족국가 연맹체인 가야시대에는 비화가화로 고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땅이다.
지금은 동부 경남과 서부 경남, 그리고 경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우포늪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이곳에 가시연꽃 부름 창포 갈대 등 수많은 물풀들이 자라고 있고, 나무들은 밑동을 반쯤 늪에 담근 채 늠름하게 서 있었다.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 생태계의 고문서 등으로 일컬어지는 우포를 조명하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었다. 소벌(우포), 나무벌(목포), 모래벌(사지포), 쪽지벌 등 네 개의 늪으로 이루어진 우포는 231만㎡에 이르는 지역에 1500여 종에 이르는 생명체가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다.
이곳 생태계 역사를 1억 4000만 년으로 짐작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곳에서 인간은 어쩌면 가장 늦게 발을 디딘 생명체일지도 모른다. 또한 “생명의 창고이자 금고”라고 추앙하는 것에 손색이 없었다.
돌로 쌓은 얼음 저장고 『 창녕 석빙고』 |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창녕석빙고’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에어컨이나 선풍기,냉장고가 없는 여름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럼 옛 사람들은 어떻게 더운 여름을 지냈을까?
신라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얼음을 채취해 저장했으며,이 일을 맡은 관직을 빙고전(氷庫典)이라 했다고 한다.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를 `빙고`라 하는데 나무로 지어졌으면 `목빙고`, 돌로 지어졌으면 `석빙고`라 한다.
창녕석빙고도 반은 지표면 아래 반은 지표면 위에 있다. 땅 밑 지하공간은 외부 기온의 영향을 적게 받고 지하의 보냉과 축열 효과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기 쉽다. 즉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겨울에 따뜻하다면 얼음을 어떻게 저장할까? 그 비밀은 남쪽으로 난 석빙고 입구의 오른쪽 날개벽에 있다. 겨울에 북서풍이 불어오면 석빙고 문을 열어 찬바람이 입구의 날개벽에 부딪혀 빙고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 내부 온도를 영하로 낮췄다.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닥은 안쪽으로 갈수록 아주 조금씩 낮아진다. 이렇게 바닥이 경사져 저장된 얼음이 조금씩 녹으면 북쪽으로 모여 즉시 배수구로 흘러간다. 북쪽 배수구는 석빙고 뒤의 개울로 연결되어 있는데 대부분의 석빙고 뒤에는 이렇게 개울이 흐른다. 여름철에 개울물이 흐르는 곳은 다른 곳 보다 시원하다. 석빙고를 개울가에 만든 것은 배수를 쉽게 하기위한 목적도 있지만 여름철 석빙고 주변 온도를 낮게 유지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을 듯하다.
창녕 석빙고를 밖에서 보면 마치 고분처럼 보인다. 이는 지붕 돌 위에 석회와 진흙을 발라 비가 내려도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한 후, 그 위에 또 흙을 덮은 다음 잔디를 심었기 때문이다. 태양의 복사열을 차단하는 구조이다. 환기구도 밖에서 보면 낮은 벽체를 세우고 뚜껑을 덮어 빗물과 직사광선이 들어갈 수 없도록 설계되어있다. 이렇듯 석빙고는 과학적 토대위에 설계된 건축물이기에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건축물로 꼽힌다.
이렇게 저장한 얼음은 누가,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까?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면 `부여`에 `장사를 치를 때 여름에는 얼음을 쓰고...`라는 기록이 있다. 얼음을 갈아서 화채에 넣어 먹거나 음식을 시원하게 저장하는 실용적인 용도 이외에도 여름철 상을 치를 때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문종 3년의 기록에 `벼슬에서 물러난 공신에게는 3일에 두 차례씩, 고급관리들에게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 얼음을 나누어 주도록 제도화 했다는 사실을 보면 일반 서민까지 얼음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겨울철에 꽁꽁 언 강에서 얼음을 잘라 나르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어서 민가에서는 채빙노역을 피해 달아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빙고의 얼음을 백성의 눈물이라는 의미에서 `누빙(淚氷)`이라 부르며 얼음받기를 거부하는 선비들이 있었을까.
지금 우리는 손쉽게 얼음을 얻고 시원한 물을 마시며 에어컨을 켜서 쾌적하게 여름을 지낸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리는 백성은 없지만 눈물을 흘리는 지구가 있다. 인간의 과도한 에너지 사용으로 지구온난화,사막화,기후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더운 여름이지만,석빙고를 떠올리며 에어컨 온도를 1℃ 높이는 것은 어떨까?
한편, 석빙고 기행을 마치고 나들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바로 먹을거리. 토속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민속마당에 들러 돼지고기 두루치기랑 푸짐한 반찬에 더해 좋은데이(부산.경남지역에서 인기 있는 소주)까지 한 잔 걸친 후 우리 일행은 창녕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귀천...『창녕박물관』 |
1996년에 `유물전시관` 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창녕박물관은 인근 지역의 가야 권 박물관보다 규모가 다소 작은 편이나, 240여 종 700여 점의 고대에서 근대를 아우르는 폭넓은 시대의 유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원통 형, 발 형, 소형기대 등의 가야의 제기와 장경호, 단경호 등의 신라 가야시대의 도질 토기류와 금동제 마구, 금제 귀고리,반지 등의 장신구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특히 박물관 뒷편 언덕에 있는 세기를 전.후 해서 6세기 중반까지 조성된 창녕군의 수백기의 고분들 중,발굴 조사 후 복원 한 수십 기의 아름다운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그 경치가 빼어나고 잘 보존 관리돼 창녕을 답사하는 많은 답사 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번에 창녕박물관은 120여 기의 고려와 조선시대 분묘들을 발굴하면서 나온 부장유물들을 테마로 한 특별전 `귀천`을 열고 있었다. 특별전 주제인 `귀천`은 "하늘로 돌아가다"란 뜻이 담긴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다.
심온 천상병 시인은 자신의 대표 시(詩) `귀천` 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아침 이슬 더불어 손에 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 하리라"라고 노래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감정은 하나도 없고 마치 꼭 돌아가야 할 고향 같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보면 `내세관`이 있어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세상에서 영위하는 생의 시작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고대에서부터 장례를 지낼 때에 고인이 생전에 일상생활에 쓰던 모든 생필품들을 무덤에 가지고 갔던 것이다. 심지어 최고의 지배자는 부리던 사람까지도 `순장`해 데리고 갔던 이유는 또 다른 세상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삶의 준비였던 것이다.
한편, 박물관을 중심으로 우측과 앞쪽 도로 양쪽으로 펼쳐 있는 마치 ‘어머니 젖가슴’ 같은 고분군을 보면서 3세기 전후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은 가야 시대의 위대했던 정신 문화와 장인 정신을 말하고 있었고, 철기문화는 이웃 일본에 전해 현재 경제대국의 일본이 되었건만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고 고분군의 부장품들을 얼마나 도굴해 갔는지 도굴품을 실은 수레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하니 씁쓸한 마음 감추지 못하고 개혁세상을 꿈꾸다 뜻을 이루지 못한 신돈을 생각하면서 옥천사로 향했다.
개혁세상 꿈꾼 신돈... 폐사된 『옥천사 터』 |
관룡사 오르는 길과 화왕산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어름 왼쪽 수풀 속에 있다. 옥천사는 고려말 개혁 세상을 꿈꾸고 실행에 옮기려다 실패한 스님 신돈이 태어나 자란 곳이다. 그는 공민왕의 신임을 등에 업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권문세족의 권한과 재물을 줄이려고 애썼다.
당시 귀족들은 양민의 논밭을 빼앗고도 모자라 양민 자체를 자기네 노비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했다. 전(田)과 민(民)을 귀족들이 독차지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흉흉해졌다. 나라 전체의 생산은 늘지 않았고 조정의 곳간은 조세를 걷지 못해 텅텅 비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공민왕과 신돈은 배짱이 맞아 개혁을 추진했으나 권문세족의 저항은 아주 거세었다.
결국 신돈은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빼앗겼다. 신돈을 미워한 권문세족은 신돈의 근거지라 할 옥천사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다른 폐사지와 달리 옥천사 터에는 사람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어 망가뜨린 자취가 뚜렷하다. 석탑이든 석등이든 제 자리에 온전하게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징으로 내리쳤거나 쐐기를 박았던 자취가 지금도 선명하다. 산산조각난 옥천사터에 서면 당시 권문세족의 원한과 분노가 생생하게 느끼면서 마지막 기행지인 관룡사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화왕산 관룡사(火旺山 觀龍寺) |
화왕산 관룡사(火旺山 觀龍寺)는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에 소재해 있다. 화왕산 군립공원을 들어서자 앞산의 다정한 봉우리가 반기고 길가에 늘어선 벗꽃들은 어서 오란듯이 손짓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길을 따라 산을 오르니 넓은 공터의 주차장이 나온다. 화왕산의 품에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 절까지는 걸어서 가야 화왕산의 운치를 더 많이 느낄 수가 있었다. 얼마를 오르자 돌장승 한 쌍이 반겨준다. 여기부터 절의 경내란 뜻이다. 무척이나 특이하게 생긴 장승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상투를 틀어올린 듯 모자를 얹어 둥글게 솟아오른 머리모양과 불쑥 튀어나온 왕방울 보다 더 큰 눈에 뭉툭한 주먹코의 다분히 해학적인 표정으로 나그네를 지켜보는 품이 훤칠한 키만큼이나 싱거워 보이면서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올라가면서 왼쪽에 서 있는 것이 할배장승이고, 오른쪽이 할매 장승이란다.
김도영 교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절 앞에 장승을 세우는 까닭은 절터의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신성한 경내로 들어오는 나쁜 잡귀들을 막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저렇게 시골 할아버지처럼 다정한 모습이라서야 어디 악귀가 겁을 내겠는가 생각도 한편으로 들었다. 조각품은 만든 사람의 인품을 닮는다는데 아마도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가 만들어 세웠는가 보다는 생각도 들었다.
절로 올라가는 길옆으로 맑은 계곡이 흘렸다. 산 속에 자리한 산사의 앞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졸졸 소리 내어 흐르고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놓여 있다. 경내를 들어서기 전에 다리를 건너면서 흐르는 물에 속세의 흔적을 모두 씻어내라는 뜻일게다. 속세에서 들었던 말과 보았던 것들, 그리고 마음의 찌꺼기까지 흐르는 물에 모두 흘려보내고 깨끗하고 참된 수도의 마음으로 경내를 들어서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관룡사를 들어가는 입구에도 다리가 있고 그 아래로 계곡물이 흐른다. 내 마음도 흘러가는 맑은 물을 바라보며 대자대비한 부처님 만날 생각에 잠시나마 속된 마음을 가다듬어 봤다. 절 앞에 이르자 백팔 계단을 제일 먼저 만났다. 계단을 오르며 다리위에서 가다듬었던 마음에 불심을 심어 백팔번뇌를 떨구어 내는 순간이다.
계단을 다 오르면 이번엔 일주문이다. 관룡사의 일주문은 좀 특이했다. 기둥을 세우는 대신에 문의 양쪽으로 돌을 쌓아 그 위에 기와지붕을 얹었다. 형식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부처와 내가 하나 되는 깨끗한 일체심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완전한 부처님 안에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는 너와 내가 따로 없고 부처가 나이고 내가 곧 부처가 된다. 마음에 한 점의 삿된 생각도 가지지 말고 일체의 청정심(淸淨心)으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가 되는 것이 진정한 불국정토의 정신이 아닌가.
돌로 만든 계단을 몇 개 더 올라 화왕산 관룡사라 현판을 단 절의 정문에 들어선다. 문 안에는 흔한 사천왕(四天王)의 모습이 없다. 악귀를 물리치는 사천왕상이 없는 것은 관룡사에는 모두 마음착한 이만 온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래의 돌장승이 모두 물리쳤다는 것인지 아리송한 마음에 이 문의 이름을 사천왕문이라 할 수 없어 정문이라 혼자 부르며 합장하고 대웅전으로 다가갔다.
관룡사는 588년 통일신라 후기에 원효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신라 8대 종찰의 하나였다.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제자 송파와 함께 백일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화왕산 정상의 삼지(三池)에서 용 아홉 마리가 영롱한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나서 절의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도 구룡산(九龍山)이라 했다 한다.
한때는 원효대사가 1천여 명의 제자들을 상대로 화엄경을 설법하며 대도량(大道場)을 이룩했다고 전해지는 관룡사는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많은 전란(戰亂)과 화재(火災)를 겪으면서 사찰의 규모가 많이 위축되었고, 특히 1704년에는 대규모의 산사태가 발생해 금당(金堂)과 부도밭이 유실되고, 스님 20여명이 목숨을 잃는 참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가람들은 모두 그 후에 중건된 것이라 한다. 그 중에서도 보물 제212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보물 제146호로 지정된 약사전은 당대 건축 수법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건물로 꼽힌다.
넓게 펼쳐진 병풍바위 아래 솔숲과 대숲이 이룬 아늑한 터에 자리 잡은 관룡사의 중심 혈에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모두 9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다포양식이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만들어 높이 올린 가운데에 석가모니삼존불을 모셨다.
한편, 우천과 시간관계로 둘러보지 못한 곳이 있다 바로 용선대다. 관룡사 서쪽 요사채 뒷길로 500m쯤 떨어진 중턱에 위치한 용선대는 통일신라시대 석가모니 돌부처가 모셔져 있는데, 사통팔달 막히지 않은 데라 바람도 시원하고 동쪽과 남쪽 아래로 풍경을 내려다보는 눈맛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용선대에서 발아래 아스라한 사바세계와 파도처럼 일렁이는 산줄기들을 둘러보면 일순 배멀미 같은 현기증이 일어난다. 그러나 정신을 가다듬고 보면 기가 막힌 자연법당이다. 어느 부처님이 이처럼 장엄한 법당(法堂)에 앉아 있을까. 아침 해가 뜨면 동향한 돌부처는 햇살을 받아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고 온몸에 생기가 돌아 곧 손을 내밀듯 생동감이 넘친다.
용선대 부처님은 잔잔한 미소에 인자한 표정으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앉아 있다. 항마촉지인은 마귀를 항복받을 때 취한 자세이다.
그런데 이 돌부처에 아픔이 하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돼 천백년을 넘게 남쪽을 보고 앉아 있었던 것을 40∼50년 전 관룡사 어느 스님이 절을 바라보도록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앉히다가 목을 부러뜨린 것이다. 지금도 시멘트로 때운 자국이 뚜렷하게 보인다. 우매(愚昧)한 중생보다 더 탐욕스런 땡중이 관룡사에도 있었던 모양이다.
피안의 불국정토로 향하던 반야용선이 방향을 잃고 중생을 잘못 인도하지나 않을지 심히 우려되는 것은 기우일까.
맺으면서... |
이번 기행은 큰 우려속에서 시작됐다. 전날 일기예보가 강풍을 동반한 80mm의 폭우가 내린다는 것.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큰비는 없었고 가랑비만 오락가락 하는 바람에 무사히 기행을 마칠 수 있었다.
경남 창녕은 역사와 자연이 숨 쉬는 곳이다. 낙동강을 자양분으로 문화와 경제가 번성했고, 국내 최대의 자연늪인 우포늪과 천년고찰 관룡사를 품은 화왕산이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과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 창녕읍·계성면·영산면 등에 있는 고분군, 고려시대 불교문화, 향교와 서원 등 중요한 문화유적이 즐비해 역사가 살아 있는 땅이기도 하다.
우포늪으로 상징되는 물기운, 화왕산으로 상징되는 불기운, 각종 역사문화의 흔적이 남긴 문화유산의 기운, 즉 삼기(三氣)의 땅이라고 부르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댓글 덕분에알려주신대로역사기행창령으로 탐방길 출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