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사도들교회 속장,선교회장 수련회
⚫일 시: 2019년 10월8일(화)-9일(수) 1박2일
⚫장 소: 전라남도 증도 순교지 일대(엘도라도 리조트)
⚫참석자: 14명(담임목사 부부와 속장)
⚫회 비: 170,000원
⚫차 량: 쏠라티 15인승 렌트카(방방곡곡 쏠라티 협동조합 010-5897-5804)
◾주요일정
10월8일(화) 첫째날
07:00 사도들교회 집합 및 출발(휴게소에서 아침식사)
08:30 화성휴게소 도착 및 아침식사(거리:64km)
09:00 화성휴게소 출발
11:20-12:20 김제 금산교회(189km)-남녀칠세부동석 한옥예배당 및 자료실 관람
금산교회 김종원목사님(010-5338-8291)
12:30 점식(현지식) 점심은 김제에서 먹는다(금산교회 주변)
*백제회관(김제시 모악로 460-11, 063-548-4019, 010-3673-4019)
13:30 신안으로 이동
16:00-16:30 문준경전도사 사역지 증동리교회 방문(150km)
16:30-17:40 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묘역,순교지 방문(1시간20분)-1km
17:40-18:20 증도의 명물 "짱뚱어다리" "우전리해수욕장" 관광(30분)-1.1km
18:30 엘도라도 리조트 체크인(4km)
19:00 석식(현지식) *증도에서 저녁식사 할 곳을 찾는다(증동리교회 문의).
21:00 도착예배 및 교제의 시간
23:00 취침
10월9일(수) 둘째날
06:30 기상
07:30 엘도라도 리조트 조식뷔페(4인은 무료티켓) 1인 19,800원
08:30 리조트 체크아웃 및 목포 해상케이블카 북항 승강장으로 출발(86km)
10:10 목포 해상케이블카 북항승강장 도착 및 케이블카 탑승(40분) *왕복:22,000원
11:30 목포 북항 승강장 출발
12:50 점심식사(영광 염산골 손맛집, 65km) *쭈꾸미 샤브샤브, 보리굴비얼음녹차정식
*영광군 염산면 향화로5길 10(061-352-2366)
13:50-14:20 새우젓갈로 유명한 설도항 어시장(50m)
14:20-15:20 영광 염산교회(500m) - 6.25전쟁시 77인이 순교한 교회
*염산교회 임준석 목사님 010-3614-6479
14:30-15:30 영광 야월교회(6km) - 6.25전쟁시 전교인이 순교한 교회
*야월교회 061-352-9147
16:00 일정을 마치고 인천으로 출발
19:10 저녁식사(행담도 휴게소) *커피타임과 나눔시간(30분)
20:20 행담도 휴게소 출발(교회까지 85km)
22:10 사도들교회 도착 및 해산
1. 김제 금산교회
1)건립시기 : 1905년(신축), 1908년(이건)
2)소재지 :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063-548-4055)
3)문화재 지정 : 전북 문화재자료 제136호(1997년7월18일 지정)
4)내용 : 김제 금산교회
금산교회는 한국 기독교 초창기 ㄱ자형 교회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교회다.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초기 교회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꼽히는 교회는 1997년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ㄱ자형 교회형태는 유교 풍습이 반영된, 당시의 한국 전통사회의 남녀유별이라는 과제를 건축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에서 나온 것이다. ㄱ자형의 한옥 교회로 잘 알려진 금산교회는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금산교회는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김제 금산리의 지주 조덕삼(1867~1919)이 1905년 자신의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금산교회는 시작되었다. 테이트 선교사가 어느 날 조덕삼의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었다. 서양선교사를 지켜본 조덕삼이 “살기 좋다는 당신네 나라를 포기하고 왜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왔습니까?”라고 묻자, 선교사는 “오직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선교사의 희생 정신과 용기에 감동받은 조덕삼은 자기 집 사랑채를 내주어 예배를 보도록 했고, 이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었다. 이자익(1879~1958)은 여섯 살 때 부모를 여의고, 열두 살에 고향인 경상도를 떠나 멀리 전라도 금산까지 왔고, 김제에서 제일 큰 부자 조덕삼의 집에서 마부로 일을 하게 되었다.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이자익은 영특했다. 어깨 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다. 이를 눈여겨 본 조덕삼은 자기 머슴이었지만,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하고 신앙생활도 하도록 배려했다.
몇 년 후 조덕삼과 이자익은 영수가 되었고, 1907년 금산교회의 장로 선출 투표에 이들이 후보에 올랐다.
주인과 머슴이 경쟁 상대가 되었는데 투표 결과는, 머슴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님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훨씬 높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장로가 된 이자익이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강단에서 설교할 때면, 조덕삼은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설교를 들었다. 조덕삼은 머슴을 섬겼을 뿐만 아니라,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학비는 물론 가족의 생활비까지 지원하였다. 조덕삼은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되었다.
1915년 이자익은 금산 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담임목사로 적극적으로 청빙한 사람이 조덕삼 장로였다. 조덕삼 장로는 1906년에는 자비를 들여 유광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의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아쉽게도 조덕삼 장로가 1919년 52세 젊은 나이에 별세하자, 아버지 뒤를 이어 아들 조영호가 유광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자익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세 차례(제13회, 33회, 34회)나 총회장을 지냈다. 또한, 1952년에는 대전신학교를 설립하여 가난한 학생들도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자익 목사는 1958년 79세로 별세하였고, 이듬해에 예장통합과 합동이 분열하는 아픔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