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대중 스타 기생에 대한 연구
1. 한·중·일 기생사
2. 관기의 행방을 찾아서
3. 권번의 탄생, 그리고 영욕의 세월
4. 기생, 대중스타로 태어나다
1. 일제시대 대중스타 기생
1] 우리나라의 기생
우리나라 기생의 대표 브랜드는 누가 뭐라고 해도 황진이(黃眞伊)다. 생몰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중종 6년(1511)에 태어나 중종 36년(1541) 30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명은 진랑(眞娘)이고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기에 '개성기생 황명월'로 불러야 맞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6세기를 살았던 황진이는 약 270년이 지나서 19세기 화풍으로 풍속화를 그린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에 의해 '풍속화 기생 이미지'로 치장하게 된다.
또한 1909년 기생조합에서 일제강점기의 권번 기생으로 이어지는 '전통예악의 기생 이미지' 역시 오늘의 입장에서도 황진이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에게 황진이의 기생 이미지는 '16세기에 태어나 19세기 옷으로 치장하고 21세기 언어로 의사소통하는 퓨전형 기생'이다. 기생 황진이는 아무리 다른 기생을 비추어도 늘 항상 '황진이'만 보이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우리나라 기생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조선해어화사』(1927)는 빼놓을 수 없는 자료다. 기생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다루면서, 삼국시대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층으로 취급받은 기생들의 자료를 역사서와 각종 문집에서 모았다.
기생의 기원과 각 시대별 제도, 기생의 생활, 유명한 기생들, 기생의 역할과 사회적인 성격 등을 다루고 있다. 또 각종 일화와 시조 및 시가 등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기생이 비록 천민층이었으나 매우 활동적인 여성들이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전통문화의 계승자였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의기나 의료에 종사한 의녀도 있었으며, 우리 문학사에 적지 않게 공헌했음도 재확인시켜주었다.
대한제국 궁정 관기 정장 사진(1900년대)
기생을 부르는 별칭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미인'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해어지화(解語之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생(妓生, a gisaeng girl;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호칭이다. 지난날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돕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를 일컫는 말로 '예기(藝妓)'와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우리나라 문헌에서 조선시대 와서야 비로소 출전을 찾을 수 있다. '기생'의 '생'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학생'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또한 성씨 뒤에 붙어 '젊은이' 또는 '홀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예컨대 교생, 서생, 선생, 학생, 이생, 허생 등과 같은 경우이다.
기생의 원류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여자 무당 직능의 유녀화에 따른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찾는다. 무당의 유녀화는 인류의 매춘 역사를 논의하는 일반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정약용과 이익은 기녀의 문헌 기록을 들어 고려 때에 그 기원을 찾았다.
백제 유기장의 후예인 양수척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예로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다.
고려 때에는 관기(官妓)를 기첩(妓妾)으로 맞고 사대부들이 집마다 둔 기록이 있어 공물이면서 사물로도 여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제도를 한층 정비하였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는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막료의 수청기(守廳妓) 구실로 삼았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엄연히 구별되었지만,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하였으며,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관기이면 딸도 관기가 되었다.
이것은 비인간적이면서도 고약한 경우이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한 지방 수령관이 관기 모녀와 관계를 맺고, 모녀가 번갈아 가면서 수청을 드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습되는 기생이 아닌 때는 고아거나 빈곤하여 팔리는 것처럼 외적 환경에 의했다.
그밖에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은 허영심에 본인이 희망하거나, 과부가 되어 자원하거나, 양반의 부녀로서 음행하여 자녀안(恣女案)에 기록된 경우가 있었다.1)
『고려사』의 기(妓) 출전(제129권 열전 제42 반역3 최충헌)
조선시대의 교방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시·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였다.
혜원 신윤복의 '전모를 쓴 여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8, 9살이 된 기생은 동기(童妓)라 하는데, 교방에서는 12세부터 교육을 시켰다. 춤을 잘 추는 기생은 무기(舞妓), 노래를 잘 하는 기생은 성기(聲妓) 또는 가기(歌妓)라 불렀다. 또한 악기를 잘 다루는 기생은 현기(弦妓) 또는 예기라 하였다.
외모가 뛰어난 기생은 미기(美妓), 가기(佳妓), 염기(艶妓) 등으로 불렀다. 특히 사랑하는 기생은 애기(愛妓), 귀엽게 여기어 돌보아 주는 기생은 압기(狎妓)라 하였다. 나이가 지긋한 기생은 장기(壯妓)라 했고,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은 의기(義妓)로 칭송받기도 하였다. 물론 기생의 우두머리는 행수 기생으로 도기(都妓)다.
어두운 호칭으로 노래와 춤과 몸을 파는 기생인 창기(娼妓), 천한 기생이라는 천기(賤妓), 퇴물기생이라는 뜻의 퇴기(退妓)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 두드러지는 기부(妓夫), 즉 기생서방으로 종8품 벼슬인 액례·별감·승정원 사령·의금부 나장·포교·궁가·외척의 겸인 청지기·무사 등이 등장하여 후대에 오랫동안 지속된다.
대원군 시절에는 금부나장과 정원사령은 오직 창녀의 서방이 되는 것으로 허락하였을 뿐 관기의 서방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생을 첩으로 삼으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기생서방에게 돈을 주고 그 몸을 속량(贖良)해야 한다. 이는 그동안 먹여 살린 비용을 갚는 것으로, 사회적 합의였다.
조선시대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은 서울·평양·성천·해주·강계·함흥·진주·전주·경주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이 지역에서 이러한 역할을 이어갔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었다.
비로소 일반인도 요릿집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된 기생은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쳤으며, 이들 권번 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었다. 그 당시 기생에 대해서는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함께 있었다. 한쪽에서 보면 기생들은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상은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이기도 하였다.
주1). 1 현문자, 「기녀고」, 동아대학교 대학원, 1967.
2] 중국의 기생
기생에서의 '기(妓)'는 형성문자로 '계집 녀(女)'의 뜻과 '가를 지(支)'에서 바뀐 음이 합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한·중·일 기생 호칭의 변별이 필요하다. 중국에서는 기생이라는 호칭 대신에 '기' 또는 '기녀' '창기' 등을 널리 사용하였다.
기생이라는 호칭의 용례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인용조차도 않았다. 중국의 문헌 기록을 보면 우리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기(妓)'와 '기(伎)'의 차이다. '기녀(伎女)'는 고대의 여자 가무예인을 가리키는데, '기녀(妓女)'는 여자 가무예인이지만 매음을 위해 영업하는 여자로도 그 용례가 보인다.
중국의 옛 문헌에는 '기(妓)'보다는 '창(娼)'으로 불리었다. 특히 옛 시대 창녀는 음악에서 기원한다. 이런 까닭으로 후세에 창녀가 비록 살기 위해 매음을 하지만 음악과 가무가 그들의 주요 기술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창(娼)'은 남녀로 구분되지 않았다.
중국 한나라 이래로는 창(倡), 기(伎), 여창(女倡), 여기(女妓), 어기(御妓)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이후에 관기(官妓), 가기(歌妓), 영기(營妓), 음기(飮妓), 교방여기(敎坊女妓), 성기(聲妓), 가기(家妓)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여악(女樂)의 연희가 전제되고 있다.
창(娼)은 은나라 시대에는 종교매음의 '무창(巫娼)'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서주 시대에 노예 '창기'와 '관기'가 처음으로 생겨나고, 춘추전국 시대 이후 '여악'과 '창기' 발달이 이루어졌다. 한무제 때 군영에 설치되었던 창기를 '영기'라 하였다.
『서언고사 書言故事』의 기록을 보면 '옛날에는 기(妓)가 없었는데, 한무제가 처음으로 영기를 설치하여 아내 없는 군사들을 위로했다'고 하여 위만조선 땅에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면서 함께 들여온 것이 '영기'였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사노예처럼 집안에 둔 '가기'와 '성기'의 전성기였다. 당나라 시대에는 그 유명한 '진사'와 '창기'의 관계가 두드러진다. 당나라에서는 관원들이 창기와 함께 있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대부들이 창기와 함께 연희를 즐기는 풍조가 생겼다.
송나라 시대에는 '태학생'과 '창기' 관계가 많이 회자된다. 그 후 청나라 시대에는 예전 왕조처럼 교방을 두고 국가에서 관리하였다. 나중에 개인이 창기를 경영하는 식으로 유지되다가 폐창(廢娼)으로 진행되어간다.
청나라 말기 상해 10대 명기 사진
3] 일본의 기생
일본에서는 기생이라고 하지 않고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예기(藝妓)'는 일본 기생을 일컫는 말로, 예자(藝者, げいしゃ, 게이샤)로 통용된다. 게이샤는 일본에서 1688 ~1704년경부터 생긴 제도로서 본래 예능에 관한 일만 하였다.
하지만 유녀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의 두 종류로 나뉘었다. 전문적으로 질 높은 접대를 제공해야 했던 그들은 높은 수준으로 일본 전통예술의 훈련을 받았다. 기품 있는 게이샤는 매력적이면서 우아했다
일본 게이샤 사진엽서
또한 흥미로운 것은 예전에 게이샤는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18세기에 여자로 바뀌었으며 젊은 소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게이샤는 아름다운 사람, 예술로 사는 사람, 예술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들은 예술분야 즉, 음악·서예·다도·시·대화 그리고 샤미센이라 부르는 악기를 배운다.
그들은 화려하고 우아한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하얀 얼굴에 아주 빨간 입술로 화장을 한다.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여러 차례 금지령을 내린 일도 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일반 게이샤의 수는 크게 증가하여 지방도시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예능의 정도에 관계없이 매춘만을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게이샤의 이름으로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권번은 예기 중심의 기생권번이 아니라 유곽의 공창(公娼)인 예창기(藝娼妓)라고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 일본인 예창기가 수입되어 당시 남대문과 태평로에 5, 6호의 애미옥(曖昧屋)이 있어서 '어요리(御料理)'의 간판을 붙이고 10여 명의 매춘부가 비밀 영업을 하였다.
러일전쟁 때 일본인이 격증하여 예창기가 증가하면서 예기의 권번도 생기고 창녀의 유곽도 생겼다. 일본의 유곽제도는 집창제(集娼制)로 매음업자를 일정한 곳에 모아 사창(私娼)이 일반주거지역으로 침투·난립하는 것을 단속한다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1924년 당시 일본에 생겨난 유곽은 544개소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서울에는 중구 묵정동 일부 지역이 '신마치' 유곽의 소재지가 되어 여기에서만 매음업이 허용되었다. 신마치 유곽지대는 동·서로 나누어져 동쪽은 조선인이 경영하여 창기들도 주로 조선인이었으며, '한성대좌부조합'을 결성하였다.
서쪽은 '다이와신치'라고 해서 주인·창기가 주로 일본인이었으며, '신마치유곽조합'을 결성하였다. 그 뒤 유곽은 개항지에 예외 없이 먼저 생겼고, 이어 내륙 도시들로 번져갔다. 당시 유곽에서 여자를 사는 사람은 큰 홀의 벽에 기대어 늘어앉은 여자를 직접 고르거나 번호가 붙은 사진첩 또는 벽에 걸린 사진들을 보고 번호를 지정하였다. 유곽이 설치되자 임질·매독 등의 성병도 번져 대개의 유곽에는 그 구내에 성병진료소를 설치하였다.
서울에 있던 일본인의 예기권번은 욱정 1정목 28번지에 있던 혼권번, 신정 12번지의 히가시권번, 원정 2-1번지의 난권번, 그리고 츄우나가권번이 있었는데 1924년 기준으로 혼권번의 예기 숫자가 268명이었다.
묵정동의 신마치권번은 창기 권번으로 일본인 창기가 340명이었으며, 또 용산에 야오이마치 유곽이 있었다. 지방의 일본인 권번은 거의 몸을 파는 창기 중심의 유곽들이었다.1)
일제 과거사 청산의 대상으로 '집창촌(集娼村)'도 예외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유곽'이 집장촌의 유래이면서 당시 전국에 설치된 지역이 대부분 현재 집장촌 지역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부산의 속칭 '완월동' 집창촌은 일제에 의해 소화통(昭和通)으로 불리던 충무동의 완월동 지역에 1907년 '미도리마치 유곽'을 조성하면서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부터 일제에 의해 생겨난 유곽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이다. 광복 후 미군정 시대에 '공창제도'가 폐지되자 '완월동' 집창촌은 사창화된다
일제강점기의 부산 미도리마치(綠町) 유곽 사진
각주 : 1 . "京城의 花柳界", 『개벽』 제48호, 1924.6.1.
2. 관기의 행방을 찾아서
기적(妓籍)에 올라있는 관기는 그 부역(賦役), 즉 기역(妓役)에 벗어날 수 없었다. 더구나 관기의 정년(停年)은 50세이기에 더욱 그랬다. 1894년 갑오개혁의 노비 해방과 관기의 해방은 별개였다. 조선의 관기를 관장하던 궁중악은 1895년 예조에 소속되어 있던 장악원이 궁내부 장례원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1897년 관제 개혁 때에는 장악원이 교방사로, 1907년에 교방사는 장악과로 개칭되면서 궁내부의 예식과에 소속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장악과를 이왕직아악대로, 1913년에는 이왕직아악부로 교체했으며, 교방사 설치 시 772명의 악원 수가 1917년 57명으로 줄어들었다. 이 또한 일제에 의해 치밀하게 계산된 조선 궁중 아악의 말살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1895년 이후 궁중 관기는 장악원 직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태의원(太醫院)과 상의사(尙衣司)로 소속되면서 관기 해방 기록에 혼동이 일어났다. 내의원(內醫院)의 의녀(醫女)는 1907년에, 상의사의 침선비(針線婢)도 1907년에 폐지되었다.
따라서 직제상 관기가 폐지된 것은 1907년이다. 1907년 12월 14일 「대한매일신보」에 관기가 자신의 소속을 밝히고 자선 연주회를 개최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광고] 기등(妓等) 백여 명이 경성고아원 경비규세하야 유지극난지설(維持極難之設)을 문하고 난상(爛商)협의하여 자선연주장을 야주현 전 협률사에 개최하여 수익을 급수히 해원에 기부할 터이옵고 순서는 여좌하오니 자선하신 인인군자(仁人君子)는 내림 완상하심을 복망(伏望).
순서
평양랄탕패–환등–창부땅재죠–승무–검무–가인전목단–선유락–항장무–포구락–무고–향응영무–북춤–사자무–학무. 기 외에도 자미있는 가무를 임시하야 설행함. 음 11월 21일 위시하야 한삼야(限三夜) 개장함. 매일 하오 칠시에 개장하야 지 11시 폐장함.
자선연주장 발기인
궁내부 행수기생 계옥 태의원 행수기생 연화 상의사 행수기생 금화 죽엽 계선 앵무 채련 등 고백
이 기사에서 궁내부 행수기생, 태의원 행수기생, 상의사 행수기생 등이 자선 연주회를 발기했다고 했는데 궁중에 속해 있어야 할 관기가 궁중 밖에 궁내부, 태의원, 상의사의 이름을 걸고 독자적으로 연주하였다. 행사에 초대된 것이 아니라 관기들이 연주회를 주최한 것이다.
이는 궁중 윗전의 허락이 있어서 가능했거나, 궁중의 허락과 상관없이 기생들이 독자적으로 연주할 수 있으므로 가능하다. 그런데 궁중무와 민속무의 종목이 섞여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궁중 소속 관기라면 민속무, 즉 승무·북춤은 추지 않았다. 이것은 여악의 전통이 흔들렸거나 궁 밖에서의 연주였기에 가능했다.1) 1908년 7월 11일 「대한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린다.
[자선연주(慈善演奏)] 경성고아원 역사비에 보충하기 위하여 관기(官妓) 백여 명이 자선지의로 협의하고 음력 금월 십삼일 동구 내 장안사로 관기자선연주회를 개최하고 해수입금은 몰수해 경성고아원에 기부한다더라
1908년 7월 13일 경성고아원을 위해 장안사에서 열었던 자선 연주회, 즉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는 조선 관기들의 마지막 무대 공연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여악(女樂)이 실질적으로 해체된 것다.
관기 사진엽서(한말 궁중의 연희가 끝난 후 기념촬영)
하지만 국가에 소속된 일종의 공인 예술가로서 '관기'라는 개념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은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령' 제정 때부터이다. 1908년 9월 15일 「황성신문」을 보면 상방과 약방과 장악과에 관련되었던 관기를 앞으로는 경시청에서 관리한다는 기사가 실린다.
기생들은 이제 궁내부와 전혀 관련이 없게 되었으며, 경시청을 통해 관리 받게 되었다. 그날 바로 '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령' 제정되었고 10월 6일 '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심득'이 내려졌다.
경시청에 의해 모든 기생들이 기생조합소에 조직되어 가무영업 허가를 받아 활동하게 된 것이다. 기생에 대한 감독과 통제는 이미 치밀한 준비하에 계획되고 있었다. 결국 궁중 관기가 사라진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 궁중 관기를 요릿집에서나 볼 수 있게 된 시기가 되었던 것이다.
한말 요릿집의 기원은 일본식 요정에 있다. 1880년대에 들어 서울에는 청국인과 일본인 등 외국인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일본인의 거주는 주로 진고개 즉 지금의 충무로 일대였다. 당시 일본인 3천 명이 모여 살면서 일본식 과자점이 생기게 되었다.
이 과자점에서는 '왜각시'라 불리는 일본 여자들이 과자였던 '눈깔사탕'을 팔았는데 일본 남자들이 여기에 몰려들자, 조선 남자들도 '왜각시'를 보려고 진고개 출입이 잦아졌다.
당시 진고개에 여럿 들어섰던 일본 요릿집에서 '왜각시'의 인기에 주목하게 되었고, 단순히 요리를 파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시까지 파는 발상을 한 결과가 술과 요리, 그리고 게이샤를 함께 파는 요정이 등장한 것이었다.
그래서 1887년 처음으로 일본식 요정인 '정문루(井門樓)'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화월루(花月樓)'가 생겼다. 친일파의 대명사로 불리는 송병준이 '청화정(淸華亭)'까지 내면서 한말의 3대 요릿집이 생겼던 것이다.
일본식 요릿집은 목욕간을 두었는데, 조선식 요릿집은 이를 따로 두지 않았다. 이 일본식 요릿집을 이어받으면서 조선식 궁중요리를 내놓은 집이 바로 명월관이다.2)
이처럼 관기 제도가 폐지되고 기생들이 서울로 몰려들어 요릿집들은 매일 밤 성시를 이루어 장사가 잘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여기에도 골치 아픈 일이 차차 생겨나기 시작했다.
찾아온 손님이 부르고 싶은 기생의 이름을 대면 일일이 연락해서 불러와야 했고, 한 기생을 놓고 신분의 고하가 있는 몇 사람이 서로 불러오라고 으르렁대는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불려온 기생이 실수를 범하거나 손님이 너무 무례하여 시비가 벌어지는 날에는 요릿집 주인이 일단 책임을 져야 했으니, 무척 번거롭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불편을 덜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기생조합이다.
이와 같은 이해타산 속에서 태어난 조합도 출신 지방별로 따로따로 모이게 되어 광교 쪽에 자리 잡은 광교기생조합은 서울 출신과 남도 출신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고, 다동기생조합은 거의 평양지방 출신인 서도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조합이 일제에 의해 1914년 '권번'으로 바뀌게 되는데, '검번(檢番)' 또는 '권반(券班)'이라고도 불렀다.
각주
1.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 pp.18-19
2.『내일을 여는 역사』 14호, 서해문집, 2003.
3. 권번의 탄생, 그리고 영욕의 세월
일제강점기 시절의 기생은 권번에 소속된 기생을 말한다. 권번은 가부키 극장에서 사이반(菜番)이라는 관행이 생겨났을 때의 이름들과 아주 관계가 깊다. 일본은 이미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를 거쳐 다이쇼 시대(1912~1926)에 이르는 기간에 극과 음악 위로 파티를 연 연희장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차 시중을 드는 사람들인 차반(茶番)과 술 시중을 드는 사카반(酒番)이나 모치반(餠番)으로 분화·변화해 '사이반'에 이르고 있었다.
이때 그 일을 맡은 당번(當番) 모두를 '권번(券番, 칸반)'으로 부르고 있었다. 같은 발음의 칸반(爛番)은 요리점 등에서 술을 데우는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모두는 일본 내 기생들의 기관이자 기생학교였던 '교방'의 기능을 민간에서 모방한 것으로, 다이쇼 기간에 일본에서 예기들의 조합을 좁혀서 '칸반'이라고 하였고, 조선총독부는 그 한자음을 따와 '권번' 시대를 열어간 것이다.1)
권번은 기생을 관리하는 업무대행사로, 등록된 기생을 요청에 따라 요릿집에 보내고 화대를 수금하는 일을 맡았다. 권번에서는 매일 '초일기(草日記)'라는 기생명단을 요릿집에 보내 단골손님이 아닌 사람도 기생을 부를 수 있게 하였다.
물론 예약도 가능했는데 일류 명기의 경우에는 일주일 전부터 예약을 해야만 만날 수 있었다. 신입기생은 권번에서 인물이나 태도, 가무, 서화 등을 심사해 채용했으며, 권번은 어린 기생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요릿집 출입을 지휘하는 일종의 매니저 역할을 하였다.
당시 권번에 들어오는 여성들은 남의 추천을 받아오는 이가 제일 많았고, 일부는 본인들이 직접 찾아왔다. 좋은 권번에서 예의범절과 노래와 춤을 배우고 지체 높은 양반의 눈에 들기만 하면 팔자 고치는 것은 시간문제라 시집가기 위해 권번을 찾는 여성도 많았다. 권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입회금으로 10-20원씩 내었고, 일단 이름을 올려놓으면 매월 50전씩 회비를 내야 했다.
권번에 들어오면 팔에 기운이 있음직한 뼈대 굵은 기생들은 주로 거문고를 배웠고, 몸이 가냘픈 축은 양금을 익혔으며, 가야금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노래는 우선 목이 터야 했는데 노래를 부르는 수창기생이 되려면 담이 크고 침착해야 했다.
대개 노래는 우조 6가지, 계면 6가지, 편 1-2가지, 춤은 춘향무·장상보연지무·무고·사고무·무산향 등을 익히면 어느 정도 기초수업은 끝나는 것이었다. 권번에 이름을 올린 모든 기생이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니었고 출석제도도 없어 게으른 축에게는 편리했으나 후에 명기가 될 수는 없었다.2)
일제강점기 서울의 권번 명기는 서도(평양)기생과 남도기생으로 나눌 수 있었다. 남도 출신은 멋을 잘내는 것으로 소문났다. 철철이 유행 따라 옷을 새로 지어 입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서도기생들은 태가 많다고 소문났다. 태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애교가 많다는 뜻이다.
같은 권번에 있던 남도기생들과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농담이 무르익고 속을 털어 놓을 수 있게 되면 남도기생들은 서도기생에게 "제 앞을 잘 가리는 깍쟁이"라고 말했다. 제 앞을 잘 가린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싹싹하고 경우가 바르다는 뜻과 약간 비꼬는 표현으로는 돈에 너무 악착같다는 뜻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서도기생에 대한 표현은 비단 기생들 사이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도기생들은 수심가·노량 사거리·난봉가 등 시조·가사에 능했고 남도기생들은 춘향가·육자배기·흥타령 등 창을 잘 불렀다. 그러나 서도기생은 어렸을 때부터 노래서재에서 목을 트고 손끝을 익히기 때문에 훨씬 명창이 많았다.
어떻든 지방의 사투리를 닮을 수 없는 것처럼 서도기생이 남도기생을 흉내 내거나 남도기생이 서도기생을 모방하기는 힘든 노릇이어서 서로의 구별은 확연했다.3)
각주
1. 노동은, 「평양기성권번」, 『노동은의 두 번째 음악상자』, 한국학술정보(주), 2001, 204쪽
2. 이난향, 「중앙일보」 1970~1971년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明月館', 1971
3. 이난향, 「중앙일보」 1970~1971년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明月館', 1971
1] 서울의 권번
한성권번(漢城券番)은 1908년에 광교의 '한성기생조합'을 효시로 창립되었는데, 이 조합은 1패 기생중심의 약방기생으로 기생서방이 있는 '유부기조합'이었다. 후에 광교 한성기생조합은 한성권번으로 이름이 바뀐다.
1938년에는 주식회사 한성권번 부속 기생학교가 인가되었다. 당시 기생학교는 보통과(2년), 본과(1년), 전수과(1년)가 있었으며, 입학 연령은 12세로 1938년 5월 초 개교 계획이 언론에 소개되었다. 한성권번은 1942년 8월 17일에 삼화권번(三和券番)으로 통합된다.1)
다동기생조합은 1913년에 조직되어 후에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바뀌면서 뛰어난 명기들이 즐비하여 장안 명사들의 화제가 되고 인기의 초점이 되었다. 대정권번은 평양의 서방이 없는 기생, 즉 '무부기'들을 중심으로 기타 서울과 지방 기생을 합하여 만들어졌다.
하규일 학감이 1923년 대정권번에서 나와 새로 만든 것이 조선권번(朝鮮券番)이다. 이 권번의 초창기로부터 1936년까지 교육시킨 기생이 무려 3천 명을 헤아렸다. 1942년 8월 17일 삼화권번으로 통합된다.
한남권번도 역시 다동에 있었고, 1918년 경상도와 전라도 두 지방 기생을 중심으로 한남권번이 창립되었다. 당시 남도에서 기생 수업을 받고 서울생활을 위해 올라오는 많은 기생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35년에는 영업부진으로 유명무실하게 된다.
명칭 | 권번 | 주식회사 | 대표 | 주소 |
---|---|---|---|---|
한성(漢城) |
1914 |
1936.9.10 |
안춘민 |
무교정92 |
대정(大正) |
1914 |
1923.10.4 |
홍병은 |
청진동120 |
한남(漢南) |
1917 |
- |
송병준 |
공평동 65 |
경화(京和) |
1917 |
- |
신태휴 |
남부시동 |
대동(大同) |
1919 |
1920.8.14 |
황희성 |
청진동120 |
경성(京城) |
1919 |
1923.10.4 |
홍병은 |
인사동141-2 |
대항(大亢) |
1919 |
1923.10.4 |
홍병은 |
인사동106 |
조선(朝鮮) |
1923 |
1936.4.30 |
하규일 |
다옥정45 |
종로(鍾路) |
1935 |
1935.9.11 |
김옥교 |
청진정164 |
삼화(三和) |
1942 |
1942.8.17 |
|
낙원동164 |
경화권번은 경화기생조합에서 생겨났는데, 이것은 당시 경무사 신태휴가 주로 40여 명의 3패들을 중심으로 남부시동에 마련한 것이었다.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서 서울 4대 권번으로 소개된 3패 중심의 '경화권번'도 명색이 기생조합으로 조합을 구성했으니, 다른 조합원들과 격과 질이 떨어지는 관계로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1923년 하규일과 기생들에 의해 조선권번으로 매수되어 흡수된다.
대동권번은 평양출신 기생으로만 조직되어 대정권번과 경쟁관계에 놓였다가, 결국 1924년에 대정권번으로 흡수되어 폐업하게 된다. 대항권번은 영업의 목적이 예기 양성과 권번업으로 대정권번, 경성권번의 설립대표와 시기가 일치하고 있다.
경성권번도 조선물산공진회의 연예관에 참여할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8년 일시 영업중지 상태에 있었다가 조병환에 의해 관수동 160번지로 권번을 옮겨 다시 부활한다. 그 이듬해 경성권번의 예기 대운동회를 장충공원에서 개최하기도 한다. 1932년 3월 12일에는 서린동 70번지로 이전하지만, 그 후 명맥만 유지된다.
종로권번은 1935년 9월 11일 권번 출신 기생 김옥교에 의해 주식회사로 설립된다. 당시 종로권번은 '조선색' 농후한 기생양성소 출현이라고 언론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였다. 1937년 평양 기생학교처럼 기생다운 기생, 기예 있는 기생을 양성하는 기관을 세우고자 '경성 기생양성소 설립계획'(보통과 70명(3년), 특과 70명(1년), 전수과 50명(1년)) 등을 세워 종로 경찰서에 신청하였다.
그 목적을 조선 노래와 서화는 물론 전통적인 조선 기생으로서 필요한 예의작법 등을 가르쳐 조선색이 알맞은 기생을 만듦에 두었다.2) 하지만 1942년 8월 17일에 삼화권번으로 통합되었다.
삼화권번은 경성부내 조선·종로·한성 3대권번 주주들이 1942년 5월 25일 다옥정 조선권번에서 회합하여 3대권번을 합동하여 만든 권번이었다. 이는 일제의 전시동원체제로 인하여 생긴 통합권번이었다. 1942년 8월 17일에 그 결성식은 경성부 대륙극장에서 거행되어 그 후 일제에 의해 영업 제지를 받았다가, 광복 후에 부활하지만 1948년에 그 명맥이 끊어지게 된다.3)
서울의 기생 권번 변천사
1910년대 |
4대 권번 : 한성·대정·한남·경화 |
---|---|
1920년대 |
4대 권번 : 한성·조선·대정(대동)·한남 |
1930년대 |
3대 권번 : 종로·조선·한성 |
1946년 |
4대 권번 : 삼화·한성·서울·한강 |
1948년 |
2대 권번 : 한성·예성 |
각주
1. 名妓榮華史, 漢城券番", 『삼천리』 제8권 제8호, 1936.8.;「동아일보」 1938.4.17.;「매일신보 每
日新報」 1942.8.18
2. "조선색 농후한 기생양성소 출현, 종로권번에서 인가원", 「동아일보」 1937.6.24.
3. 「매일신보 每日新報」 1942.5.26.; 1942.8.18.
2]지방의 권번
대구 달성권번은 1927년 1월 6일 대구부 상서정 20번지에 자본금 6천 원의 합작회사로 출발한다. 달성권번은 권번에서 2년 내지 3년 정도 기예를 학습하고 나면 시험을 통해 그동안 습득한 기예의 실력을 판가름하게 된다. 여기에 합격해야만 비로소 놀음을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놀음의 장소는 퇴기가 운영하는 요릿집이나 규모가 큰 시내 음식점이었다.
기생들은 지방 유지들의 환갑잔치 또는 관에서 개최하는 각종 행사의 뒤풀이 등에 나가서 놀음을 연행한다. 놀음을 원하는 주최 측에서 시간과 장소, 기생 수 또는 특별히 원하는 기생이 있으면 그 명단을 적어 신청하고, 권번에서는 적합한 기생을 선정하여 게시판에 공고하고 또 이를 해당 기생들에게 연락해 주었다.
화대는 권번에서 일괄적으로 받아 보름이나 한달 단위로 계산해 주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놀음을 한 당일 기생들에게 직접 주기도 했으나, 이때 역시 권번에 냈다가 정기적인 날짜에 계산해서 받는 형식이었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지방의 조선 기생 권번
명칭 | 권번 | 주식회사 | 대표 | 주소 |
---|---|---|---|---|
개명(開明)·개성(開城)·야명(夜明) |
|
1935.11.10 |
권용락 |
개성부 서본정 320 |
계림(鷄林) |
|
1930.3.15 |
손승조 |
경주읍 노서리113 |
광주(光州) |
|
1932.4.10 |
김승동 |
전남 광주읍 남정 21 |
기성(箕城) |
1924 |
1932.9.23 |
윤영선 |
평양 신창리36 |
남선(南鮮) |
1922 |
- |
- |
마산부 오동동 |
남원예기(南原藝妓) |
|
1939.3.5 |
이정근 |
전북 남원읍 쌍교리 140 |
단천(端川) |
|
1940.6.6 |
이성렬 |
함남 단천군 단천읍 주남리9-6 |
달성(達城) |
|
1927.1.6 |
겸용산 |
대구부 상서정 20 |
대전(大田) |
|
1935.12.23 |
오재흥 |
대전부 본정2정목 85 |
동래예기(東萊藝妓) |
|
1932.12.20 |
윤상직 |
경남 동래읍 교동 357 |
동래예기(東來藝妓) |
|
1932.12.20 |
이병진 |
경남 동래읍 온천정 188 |
마산(馬山藝妓) |
|
1939.11.21 |
김영우 |
마산부 오동동 26-4 |
목포(木浦) |
|
1942.3.18 |
김광일 |
목포부 죽동 132 |
반용(盤龍) |
|
1929.1.24 |
이희섭 |
함흥부 서양리 100 |
봉래(蓬萊) |
|
1938.2.11 |
임선이 |
부산부 영주정 674 |
소화(昭和) |
1928 |
1937.2.7 |
박재효 |
군산부 동영정 55 |
연안(延安) |
|
1936.8.1 |
서수남 |
황해 연안면 연성리 132-4 |
원춘(元春) |
|
1939.5.3 |
이순철 |
원산부 상리 2동 25 |
인천(仁川) |
|
1938.2.12 |
김윤복 |
인천부 용운정90-4 |
인화(仁和) |
|
1935.8.9 |
김명근 |
인천부 용리 171 |
전주(全州) |
|
1939.9.15 |
최병철 |
전주부 대화정 |
진주예기(晋州藝妓) |
1928 |
1939.9.10 |
전두옥 |
진주부 영정 177 |
해주(海州) |
|
1935.10.15 |
오돈근 |
황해도 해주읍 남본정 317 |
시험 종목은 상식 위주의 구술시험과 노래, 두 종목이었다. 구술시험 문제는 "도청 소재지는 어디냐?" "올해는 단기 몇 년이냐?" 등 소학교 2학년 정도의 것을 채택하였으나, 이것도 어렵다 하여 반 이상은 답을 못하였다고 한다.1) 진주권번은 1928년 4월 김창윤에 의해 세워졌다.
그 후 1939년 10월 전두옥에 의해 자본금 5만 원의 주식회사로 바뀌게 된다. 진주권번의 춤 교육기간은 3년이었다. 교육기간이 끝나면 반드시 졸업시험을 쳤으며, 심사는 춤 선생과 권번장 그리고 권번 후원인 자격으로 참여한 춤에 안목이 있는 지방의 유지들이 맡았다.
기생들은 졸업시험에 합격해야만 소위 놀음을 나갈 수 있었다. 놀음의 형태는 관에서 베푸는 행사와 개인연회가 있었고, 장소는 주로 큰 요릿집이나 요정이었다. 기생들이 춤과 소리, 가야금, 거문고 등을 연주하고 받는 화대는 대개 권번과 약 7 : 3으로 분배되었다.
놀음의 대가로 받는 화대는 시간단위로 계산되었다. 놀음의 소요시간과 액수가 적힌 전표를 받아다 권번에 제출하면 권번에서는 기생 개인별로 놀음시간에 따른 수입액수를 게시판에 공고한다. 돈은 보름이나 한달 단위로 지급되었다.
진주권번에서는 반드시 기예기생만이 놀음을 나갈 수 있었다. 기생이 놀음을 나갈 때에는 권번장을 비롯한 한두 명을 딸려 보내 기생들이 놀음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겼다. 기생들이 놀음과정에서 권번에서 정해놓은 규정이나 법도를 어긴 경우에는 즉시 보고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별도의 책임과 추궁까지 뒤따르는 등 매우 엄격한 면모를 보였다.
그 규정 중의 하나는 손님상에 차려진 음식에는 먼저 손을 대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정에서는 기생들을 위해 따로 음식상을 차려내주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진주권번 수업 장면
부산 동래예기권번은 1932년 12월 20일에 윤상직에 의해 자본금 5천 원으로 경상남도 동래읍 교동 357번지에서 주식회사로 출발한다. 동래권번 역시 기생들의 기예가 일정수준에 도달해야 비로소 놀음을 허가했다.
동래권번의 놀음방식 역시 다른 지역의 권번과 비슷했다. 다만, 놀음 전 들어오는 상차림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었다. 요릿집에서는 놀음이 펼쳐지기 전에 우선 요리상이 들어오는데, 이때 상은 3원·5원·7원·10원 등의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즉 연회의 내용과 규모, 그리고 참여한 기생들의 품격과 기예의 수준에 따라 값이 다르게 매겨졌던 것이다. 화대는 1시간당 1원 20전이었고, 1시간이 경과하면 매시간 80전씩 추가되었다. 계산은 요정에서 끊어주는 전표를 권번의 회계장부에 기록했다가 한 달에 두 번 기생에게 지급되었다.
전라도 정읍권번의 놀음 방식 역시 다른 지역과 유사했다. 다만, 권번에서의 학습기간이 다른 지역에 비해 다소 길었다. 기생들은 권번에서 최소 5년 정도의 수련을 거쳐야 놀음을 나갈 수 있었다. 대신 졸업시험제도는 없었다.
권번으로 놀음요청이 있으면 이를 기생들에게 알려주고 기생들은 인력거를 타고 놀음을 나간다. 화대의 분배는 7 : 3 또는 6 : 4로 계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배가 모든 기생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고 기생들의 용모와 재능에 따라 각기 다르게 계산되었다.
광주권번은 기생학교인 학예부를 병설하여 기생 특히 동기를 교육 양성하였다. 입학금으로 50원과 월사금으로 5원을 받았고 입학원서에는 학부형의 보증이 필요했다. 8세에서 20세까지를 대상으로 3년 정도 지도하여 졸업시켰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시상하기도 하였다.
조기졸업도 가능했고 졸업 시에는 졸업증서를 수여하였다. 화초머리를 올려 명예를 표시하고 놀음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갖게 하였다. 잘못을 범하게 되면 권번 정원에 있는 석류나무 가지로 만든 매를 맞았고 다방 등의 출입을 금지하였다.
군산의 소화권번은 놀음의 방식이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놀음에는 꼭 시험을 통과한 기생만이 나갈 수 있었고, 시험에 통과해서도 군산경찰서로부터 허가증을 발급받는 절차를 꼭 거쳐야 했다. 군산지역의 놀음은 주로 시내 죽서동에 있는 명월관과 영화동의 만수장에서 이루어졌다.
기생의 놀음 참여 기회는 연회 주최측이나 권번의 낙점으로 주어졌는데 선배나 동료의 추천에 의해 참가하기도 하였다. 놀음을 행하고 받는 화대는 놀음차 또는 해옷값이라 했다. 해옷값은 권번과 7 : 3 내지 6 : 4로 분배되었다.
군산소화권번은 1937년 2월 7일 박재효에 의해 군산부 동영정 55번지에 자본금 8천 원의 주식회사로 바뀌게 된다. 평양의 기성권번은 부속된 3년 학제의 기생학교를 운영하였다.
대동강 부근에 있었는데 그 부근 일대에 산재해 있는 10여 군데의 대규모 요릿집을 대상으로 운영하였다. 평양에 기생조합이 세워진 것은 1908년으로 이른 시기였다.
기생을 전문적으로 키우던 평양 기생학교에는 10대 소녀들이 모여 가무음곡을 익혔으며, 일제 말기 대동강변의 기생 수효는 무려 500-6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조선말 '평양관기학교(平壤官妓學校)'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2)
일본인들도 아름다운 평양기생의 공연을 보기 위해 '기생학교'를 관광일정에 꼭 포함시켰다. 이처럼 1937년 당시 평양기생은 국내외를 통해 명성을 떨쳤는데도, 실제로 화대는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해 시간당 50전이었다.
쌀 한 가마에 20원하던 시절인데 5원정도면 3, 4명이 실컷 즐길 수 있었으니, 유흥객의 전성기였다. 기생들과 함께 놀이하는데 가장 즐겨 사용됐던 것은 뱃놀이였다. 놀잇배 수백 척이 대동강에 두둥실 떠 있다가 손님과 기생이 오르면 모란봉 아래 능라도 주변 등지로 뱃놀이를 시작하는데, 기생들이 창을 시작하면 흥취는 절정에 이른다.
평양 기생학교에 들어가는 동기(童妓)는 대체로 하류층 자녀로 보통학교를 졸업하는 즉시 기생수업을 받기 시작하며, 기생학교를 졸업하면 권번에 입적되어 손님을 받게 된다. 1937년 기준으로 살펴보면 '기성권번' 총 인원은 252명으로, 그 중에서 휴업이 19명, 임시휴업이 26명, 영업 기생은 207명이었다.
당시 하룻밤에 한 번 불리는 이가 66명, 두 번 불리는 이가 47명, 세 번 이상 불리는 이가 21명, 한번도 못 불리는 이가 71명이었다. 이러한 기성권번은 그 후 조합제로서 주식제가 되면서 기존 기생들의 저항으로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1932년 9월 23일 윤영선에 의해 평양부 신창리 36번지에 자본금 2만 원의 주식회사로 바뀌게 된다.3)
각주.
1 「대구시보」 1948.9.23.
2. 德永勳美, 『韓國總攬』, 東京 博文館, 1907.
3. 中村資良,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2년, 1937년, 1939년, 1942년판), 東亞經濟時報社.; 김산월, 「고도의 절대명기, 주로 평양기생을 중심삼고」, 『삼천리』 제6권 제7호, 1934.6.1
3] 전통예능 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
일제강점기 권번은 기능면에서는 전통예능 교육의 산실이었다. 하규일이 운영하던 조선권번에서는 성악으로 여창가곡, 가사, 시조, 남도소리, 서도소리, 경기십이잡가, 잡가 등과 악기로는 가야금, 거문고, 양금, 장구 등을 가르쳤다.
또 춤은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망라했고 그 밖에 서양댄스, 서화를 가르쳤다.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능종목은 물론 일반교양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내용으로 짜여 있었다. 이렇게 권번은 전통예능의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해내었다.
평양기생 - 평양협판사진부 발행(Wakizaka Shoten. Heijio)
이를 좀더 자세히 보면 조선권번의 예기 중 경성잡가는 주영화(朱永化), 가곡과 조선무용, 그리고 거문고는 하규일, 이도잡가(而道雜歌)는 양서진(楊瑞鎭), 사교댄스는 윤은석(尹恩錫), 양금은 김상순(金相淳) 등이 담당하였다.
한성권번의 경우에는 경성잡가를 주영화, 서도잡가를 유개동(柳開東), 가곡을 장계춘(張桂春), 사교댄스를 김용봉(金用奉), 거문고를 조의수(趙義洙), 양금을 김영배(金榮培) 등이 담당했다. 종로권번은 경성잡가를 오영근(吳榮根), 가곡과 조선무용을 황종순(黃鐘淳), 서도잡가를 김일순(金一順), 사교댄스를 기룡(奇龍), 거문고와 양금을 박성재(朴聖在) 등이 가르쳤다.1)
옛 조선의 기생은 궁중 향연에 불리어 '선상기(選上妓)'가 되는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권번의 기생과는 달리 금전과는 멀리 떨어져 깨끗한 기생도의 수양에만 온몸과 정신을 쏟았다.
하지만 권번의 기생들은 돈 많은 사나이들을 사귀지 못하게 되면 그날그날의 생활이 문제였다. 그들은 얼굴을 곱게 단장하고 몸치장을 하여서 뭇 사나이들에게 잘 보여야만 그들의 생활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여기에 권번 기생에 비애가 있었다.2)
조선의 기생을 1패·2패·3패로 나눌 수 있었다. 1패·2패는 기생, 3패는 준기생(準妓生)으로 능력에 따라 1패·2패로 진급할 수 있고, 3패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이는 기생이 왕실이나 관아에 소속했을 때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
1패는 관기, 2패는 관기에서 첩이 된 자 혹은 관기에 준한 예능의 소지자, 3패는 사창 등으로 보는 관점은 예능만으로 살 수 없게 된 19세기 말의 새로운 개념이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서는 1패 기생은 궁중연회에 참석하는 기생으로 가장 훌륭한 기생들이고, 2패 기생은 고관대작들이나 선비들을 벗하여 노는 그 다음가는 기생이며, 이들만 진정한 기생이었다.
그리고 3패 기생이란 가장 천하고 추한 종류의 기생계층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매음도 하고 천한 짓도 마다 않았기에 이를 기생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이 기준은 기생과 창기의 차이가 애매하게 된 시기의 개념이다. 이러한 혼란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왜곡되는데, 1패·2패·3패의 구분을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에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조사한 기생의 숫자는 조선 기생이 3413명, 일본 기생이 4891명이었다. 조선 기생을 출신도별로 보면 경상남도 1139명, 경기도 626명, 평안남도 469명, 충청북도 11명, 강원도 12명이며 소학교도 다니지 못해 글을 읽지도 못하는 기생은 2780명으로 80%나 되었다.3)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에 유명하였던 요릿집 '명월관' '천향원' 등이 재개업을 하면서 전국 5천여 명의 권번 기생도 부활한다.
당시 서울 4대 권번은 삼화·한성·서울·한강 권번으로 예전과 같은 부흥을 꾀하지만, 미군정 시기에 일제 잔재인 '공창의 단속'에 맞물려 청산의 대상이 된다. 미군정 이후에 그 명맥을 서울 2대 권번인 한성·예성 권번이 이어받는다.
하지만 1948년 당국은 가무음곡을 금지하면서 '접대부'라는 제도로 권번 기생을 강제 편입시키게 되면서 기생은 우리 근대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 후 기형적인 요정이 생겨나면서, 과거 밀실정치라고 지탄받은 '요정정치'나 일본인에 대한 기생접대 중심의 '기생관광' 등을 통해 기생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
각주.
1 『삼천리』 제8권 제8호, 1936.8.1.
2.『삼천리』 제13권 제12호, 1941.12.1.
3.「東亞日報」 1925.8.30.
4. 기생,대중스타 기생으로태어나다
1] 대중매체의 보급과 기생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에서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가 단절된 특별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벌어진 식민지적 경제의 파행과 왜곡된 근대화 과정 등으로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후유증이 남았다.
오늘날 '근대(近代)'라는 말은 널리 사용되고 있고, 여러 곳에서 논의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 그 개념 규정이나 내용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전근대적인 상태로부터 근대적인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 또는 '후진적 상태에서 선진적 상태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는 근대화의 정의는 보편적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근대화의 척도 중에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보급'은 보편적인 근대화의 개념과 구분되는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근대화 개념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조선 땅에 1920년대 중반부터 레코드산업이 시작된다.
판소리와 민요 등을 일본에 가서 취입한 사람들은 당대의 명기·명창들이었다. 1925년 11월에 발매한 「조선소리판」이라는 레코드에 당시 유행했던 일본 유행가를 처음으로 우리말로 부른 노래 '시들은 방초(원제: 船頭小唄)'를 취입한 사람은 도월색(都月色)이었고, '장한몽(원제: 김색야차 金色夜叉)'은 김산월(金山月)이 불렀는데, 이들은 모두 기생 출신이었다.
나아가 1930년대 이후 레코드산업이 본격화되자 당대 명기·명창들은 서둘러 레코드업계로 진출했다.1)
1930년대에는 스포츠가 볼거리와 유흥의 대상으로서 등장하기 시작했고, 미국 영화의 상영으로 도시적 감수성, 서구화된 육체와 성에 대한 개방적 관심이 증폭되었으며, 이에 따라 '모던 걸'과 '모던 보이'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에 맞추어 '카페'도 보급되었고, 기생출신 '카페'의 여급도 많이 늘었다. 요릿집보다 카페에 손님 수요가 많아지자, 권번의 기생들은 차츰 화류계에서도 밀리는 상황을 맞는다.
이 시기에 평양 기생 출신에서 대중스타로 변신한 왕수복(1917~2003)의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왕수복이 태어난 시기는 3·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가 종래의 무단정치 대신 표면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던 때였다.
일제는 서둘러 관제를 고치고 조선어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는 등 타협적 형태의 정치를 펴는 듯하였으나, 내면으로는 민족 상층부를 회유하고 민족분열 통치를 강화하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 우리말 신문 간행이 바로 이러한 문화정치의 산물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뒤로 하고, 왕수복은 12세에 평양 기성권번의 기생학교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 레코드 대중가수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이어 왕수복은 콜롬비아에서 폴리돌레코드로 소속을 바꾸면서 '유행가의 여왕'으로 등장한다.
왕수복 데뷔 시절 사진(1933년)
왕수복은 건장한 몸집과 같이 목소리도 우렁차고 기운 좋고 세차게 나왔다. 특히 평양 예기학교, 즉 기생학교를 졸업한 만큼 그 넘김에는 과연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본 성대가 아니라 순전히 만들어 내는 성대이면서도 일반대중에게 열광적 대환영을 받아 「고도의 정한」은 조선 최고의 유행가가 되었다.
레코드 판매도 조선 레코드 계에 있어서 최고를 기록했다. 왕수복이 평양 기생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대가수가 되자 콜롬비아·빅타 등 각 레코드 회사의 가수쟁탈전은 평양 기생들을 싸고 전개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와 함께 한국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1930년대가 열리고 있었다. 근대음악사의 발전과정에서는 그 시대가 새로운 대중음악을 등장시킨 하나의 전환기였고 그 중요한 획을 그은 이가 평양 출신 기생 왕수복이었다. 이처럼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라 생성된 새로운 대중음악의 등장은 그 시대를 앞 시대와 구분 짓도록 만든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이는 송방송(宋方松)이 「한국근대음악사의 한 양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로 지금의 대중가요의 뿌리에 해당하는 유행가·신민요·신가요·유행소곡 등과 같은 새로운 갈래의 노래들이 이 시기에 작사자와 작곡가들에 의해서 창작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새 노래문화의 창작자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음악사적 관점에서 보면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없었던 명백한 증거물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30년대 본격적으로 작곡가에 의해 새로 등장한 '신민요(新民謠)'라는 성악의 갈래는 일제강점기 전통 민요와 유행가의 중간 다리 역할을 맡았던 전환기적 시대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기생 왕수복의 폴리돌레코드 신문광고「동아일보」(1933.10.2.)
신민요의 등장은 근대의 단초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근대화는 전통적 사회에 내재된 전통적인 바탕 위에서 외재적인 요소를 가지고 변질 또는 변형시키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민요는 전통적인 문화에 외래적인 문화가 더해진 문화적 종합화라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레코드 산업의 등장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뿐 아니라, 새로운 가수의 등장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것은 기존의 서양음악가나 전통음악가와 달리, 새로운 수요에 적극적으로 응대할 수 있는 유행가 가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8년에서 1936년 사이에 콜럼비아, 빅타, 오케이, 태평, 폴리돌, 리갈, 시에론 등 각 레코드사들은 음반 제작에 기생 출신의 여가수들을 잇따라 참여케 함으로써 1930년대 중반 레코드 음악의 황금기를 장식했다.
왕수복이 첫 전성기로 '10대 가수'의 여왕이 된 1930년대를 중요한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봉건적 잔재의 전근대 표상이었던 '기생'이 근대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대중문화의 '대중스타'로 바뀌어는 과정은 바로 근대 사회로의 변화 모습이다.
레코드 축음기의 보급은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그 레코드 가요의 주축 팬은 기생들이었다. 기생들은 레코드에서 배운 노래를 술자리에서 불러 유행에 도움을 주어 레코드회사에서 보면 큰 고객이었고 이에 따라 판매 전략이 세워지는 것이었다.
결국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 바로 전근대 표상이었던 기생이었기에, 기생출신이었던 왕수복, 선우일선, 김복희 등 3명이 1935년 발표한 『삼천리』 잡지 10대 가수 순위에서 5명의 여자 가수 중에 1위, 2위, 5위를 차지하며 대중 유행가의 여왕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37년 21세의 왕수복은 폴리돌레코드와 결별하면서 일본 우에노 동경음악학교 벨트라멜리 요시코의 영향으로 조선민요를 세계화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이탈리아 성악을 전공하게 된다. 그녀는 1959년 43세에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고, 마침내 2004년 애국열사릉에까지 묻히게 되었다.
각주.
1 김창욱, 「이 땅의 음악을 생각하면서: 일제강점기 음악의 사회사–신문잡지(1910~1945)를 중심으로」, 『음악학』 11호, 한국음악학학회, 2004, 111쪽
2]화려한 연예인 스타의 선조
기생은 오늘날 연예인의 선조다. 재주와 끼도 많고 스캔들도 만들고, 대중 인기의 수명을 가졌다. 항상 안정된 삶을 위해 은퇴를 생각하고 멀티플레이어의 전형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한다. 레코드 가수로 성공하면 영화에 진출하고, 경성라디오방송에 출연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러면서도 사생활을 밝히기 싫어하며, 예뻐지기 위해 뭐든 하였다. 그 당시 잡지와 신문의 연예란은 그들을 봉건적인 타파의 대상이 아니라 근대의 대중스타로 대우해주었다.
이처럼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은 라디오의 음악방송에 주로 출연하고, 축음기의 음반을 취입하여 대중적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라선 이들도 있었다.
초창기 영화도 기생 출신의 영화배우가 중심이었으며, 각종 전람회와 박람회에 흥을 돋우기 위한 예능의 기예도 각 권번의 기생들의 몫이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조선의 특산품으로 기생을 출품하려고 한 당시의 상황만 하더라도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경인철도 개통 초기에 손님이 거의 없자 철도회사는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평양명기 앵금' '인천기생 초선'하는 식으로 주요 역 정거장 마당에 기생 이름을 적은 푯말을 꽂아놓고 일종의 라이브 공연을 벌였다.
더 나아가 기차 칸칸마다 타고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오가면서 승객 유인에 한몫을 했다. 당시 신문광고에 등장하는 제품광고 및 잡지, 행사 포스터의 표지 사진, 웨이브 파마 등도 기생들이 주축이었다.
평양명기 김옥란의 은단 광고 포스터
광고 모델의 이미지는 광고를 의뢰한 회사가 즉시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할 때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은 인지도 면에서 비교적 파급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제시대에 기생들은 그러한 면에서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회적 계층이었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기생이 등장하는 신문광고는 거의 대부분이 미용과 관련된 제품이다.
일반적으로 샴푸, 비누, 화장품의 광고는 대부분 기생이 등장한다. 기생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전까지 아마도 이들은 지금의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외양이 아름답고 가무에 소질이 있으며, 이들의 삶의 이야기와 에피소드는 곧바로 대중의 화젯거리가 되고 일반적 여성들에 비해 미용과 패션, 화장 등 미적인 면에서 월등히 시대를 앞서나가며 유행을 선도해 나간다는 점에서 볼 때 이들은 지금의 여자연예인과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분명 조선의 일반 여인들은 이들의 이러한 면을 부러워하고, 또 따라하고 싶었을 것이고 광고를 하는 회사들은 바로 이점을 놓치지 않았다. 초창기의 인쇄광고는 사진을 쓰지 않았으며, 1920~1930년대는 광고에 모델을 등장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이들이 광고하는 제품을 통해 당시 일반 대중이 받아들였던 기생의 이미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기생을 모델로 한 광고의 형태나 그 소구방식은 놀랄 정도로 현재와 흡사하다. 많은 여자연예인 중에서도 정확히 그 제품의 이미지와 맞는 인물을 찾아내 돈을 더 주고서라도 광고 모델로 지목하는 지금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얼짱 기생' 장연홍은 최고의 광고 모델로 손색이 없었다. 아름답고 복스런 웃음을 가진 인기 최고의 화초기생이었던 그녀의 이미지는 깨끗하고 맑은 이미지의 비누와 신제품 화장수에 잘 들어맞았다.
장연홍의 사진과 함께 써있는 "한 번 두 번에 살 거친 것, 벌어진 것, 주름살은 꿈같이 없어지고 백분이 누구의 살에도 잘 맞도록 화장이 눈이 부시게 해 줍니다.
이렇게 여천으로 만들어낸 화장미는 당신을 훨씬 젊게 만듭니다"라는 다소 허무맹랑하고 직설적인 광고 문구는 마치 깨끗하고 선하며 순수한 이미지를 가진 그녀가 직접 귀에다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함으로서 그 광고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미활비누'는 장연홍뿐만 아니라 김영월, 김화중선 같은 다른 인기있는 기생들을 포함한 여러 모델들을 두었다. 또한, 그 모델들의 사진 옆에는 "나의 애용하는 (중략) 미활비누"라는, 광고 모델 기생이 직접 이용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문구를 주로 적어놓았다. 이것은 분명 기생들의 순백의 피부가 당대 여성들에게 부러움을 샀었고, 그 아름다움이 모두에게 인정될 만큼 매우 빼어났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장연홍의 '미활비누' 광고 김영월의 미활비누 광고
기생들의 빼어난 얼굴뿐 아니라 비단결 같은 머릿결도 광고의 소재로 빠짐없이 이용되었다. 노은홍을 모델로 등장시킨 '화왕샴푸' 광고는 그녀의 미발 비결을 화왕샴푸라고 소개하고 "일주일 화왕샴푸로 세발하면 기분을 명랑케 하고 발륜을 빛나게 합니다"라는 경쾌한 문구를 적어놓았다.
이렇게 개화의 물결이 넘친 1920년대 또는 1930년대에 여인들이 사용한 향장품은 동백기름, 백분, 연지 정도가 전부였는데, 이 가운데서도 머릿기름으로 가장 많이 썼던 동백기름은 여인들의 필수품으로 윤택하고 건조가 잘 안되어 머리를 길게 땋거나 쪽지는 데 긴요했고 후에 상표를 달고 샴푸로 개발되었다.
이러한 몇 안 되는 미용 관련 상품의 신문광고에는 당대 인기 있던 기생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고 주로 얼굴을 강조하는 상반신 사진이나 클로즈업 사진을 사용하였다. 복장은 한복으로, 머리의 모양은 찰랑찰랑한 머릿결을 강조하는 샴푸의 광고에서도 쪽지게 가르마를 탄 한 갈래 묶음머리를 벗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본 화왕삼푸 광고를 한 평양기생 노은홍(「동아일보」 1935.8.14. 광고)
당시의 권번 기생들은 현재의 연예인처럼 방송, 음악, 영화, 광고, 행사 도우미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권번은 지금의 연예기획사나 매니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권번 기생은 당국의 '기생영업인가증'을 받아야 했는데, 오늘날 '개인사업자등록증'처럼 생각할 수 있다.
웃음과 기예를 팔던 기생을 대신하여 권번이 화대를 받아주고 이를 7 : 3의 배분으로 나누어 가진 상황이 요즈음 연예인들과 얼마나 흡사한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당시 미술대학에서 동양화, 서양화의 모델도 권번의 기생에서 찾기가 쉬웠다.
이당 김은호 선생이 1939년 남원 광한루에 있는 춘향사당에 모실 춘향의 초상을 그릴 때도 조선 권번에 나가던 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요릿집에 불려가는 기생의 전용물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인력거. 택시가 갈 수 없는 골목길도 다닐 수 있고, 도심의 웬만한 거리는 택시보다 요금이 저렴했기 때문에 인력거는 계속 이용되었다.
하지만 전차보다 속도도 느리고 한 사람밖에 탈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구시대 유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인력거를 타면 휘장을 내리고 타지만, 기생들은 자신을 선전하고 과시하는 목적으로 휘장을 치지 않고 다녔다.
인력거꾼들은 기생들을 요릿집으로 나르면서 그들의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고서는, 자신의 딸들을 키워 동기(童妓)로 입적을 시키는 일도 많았다.
3] 놀랄만한 권번 기생의 수입
1930년대 기생 수입은 당시 다른 직업보다 상당히 많았다. 기생은 1시간 당 실수입이 1-1.2원이며, 한 달 동안 화대수입은 평균적으로 100-200원이 넘었다. 당시 쌀 1가마에 7-8원 하였는데, 거기에 비하면 화대는 싼 것이 아니었고 한번 가면 3-4시간에 5-6원의 벌이는 되었다.
그러나 어쩌다 돈 잘 쓰는 한량을 만난다든지, 그 기생한테 마음이 있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 그 기생한테 호의를 보이느라 화대를 특별히 많이 주기도 하였다. 권번에는 물론 규정대로의 수수료만 내면 그만이었으므로, 기생의 수입은 당연히 많아지게 되었다.
1937년 하반기 서울 소재 기생의 수입
종로권번 | 조선권번 | 한성권번 | |||
---|---|---|---|---|---|
1. 최금란(崔錦蘭) |
1875원 |
1. 박소향(朴小香) |
396원 |
1. 정월(鄭月) |
523원 |
2. 박송자(朴松子) |
1850원 |
2. 김은옥(金銀玉) |
346원 |
2. 정운중월(鄭雲中月) |
468원 |
3. 설명희(薛明姬) |
1836원 |
3. 엄산월(嚴山月) |
337원 |
3. 한옥향(韓玉香) |
324원 |
4. 고봉(高峰) |
1448원 |
4. 성추월(成秋月) |
314원 |
4. 최도화(崔桃花) |
312원 |
5. 김명주(金明珠) |
1396원 |
5. 이덕화(李德華) |
313원 |
5. 권계홍(權桂紅) |
307원 |
「機密室(우리 社會의 諸內幕)」, 『삼천리』 제10권 제10호, 1938.10.1.
그 시기 일반인들에게는 전차가 대중교통 수단이었다. 일부 계층의 사람들이 인력거를 이용하고 있었으며, 부유한 사람들은 인력거를 자가용으로 가지고 있었다. 자동차는 워낙 비싸서 특수한 층에 있는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었다.
차츰 영업용 자동차 수가 늘어나면서 서울 교외로 드라이브하는 것이 당시 유행이 되었다. 여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기생들이었다. 요릿집에서 1차를 하면 그 다음은 대부분 교외에 있는 경치 좋은 절간으로 기생들을 태우고 드라이브하면서 2차 주흥을 즐기곤 하였다.
전차는 대중적 요금으로 누구나 탈 수 있었기에 운행 초기의 거부감을 없앨 수 있었던 반면, 자동차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있어 자신을 과시하는 수단이었기에 일반인에게는 부정적으로 비쳐졌다.
더구나 기생들을 함께 태우고 가는 택시의 경우에는 당시 신문 사회면에서 몹쓸 일을 저지르는 것처럼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급기야는 총독부에서 "경성에 있는 권번 기생은 자동차에 타면 처벌한다"는 조치가 내려질 정도로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이 무렵 술 마시는 풍습은 주로 요릿집에서 1차를 하고 에인젤, 낙원회관, 퀸 등 카페와 바에서 2차를 하는 것이었다. 여흥이 도도한 일부는 '콜택시'를 불러 1-2원을 들여 한강변이나 근처의 절간에 드라이브하기도 했다. 주로 찾는 곳은 동대문 밖 개운사, 우이동의 화계사, 청량리의 청량사, 보문동의 미타사와 탑골승방 등이었다.
1930년대에 '단발미인'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질 만큼 이전 시대부터 실행해온 단발이 신여성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고, 웨이브를 주는 파마까지 등장해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화력을 이용한 '고데'를 하는 바람에 모발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서구에서 파마 기구가 수입되면서부터는 한층 안전하고 편리해졌다. 당시 파마의 가격은 쌀 두 섬에 해당할 정도로 엄청났지만, 주로 기생을 선두로 해서 차츰 확산되었다
4] 기생 자선 연주회, '온습회'
첫댓글 이렇게 좋은 자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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