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양도증.2
1. 친구가 적으로
“판사 검사 다 해 먹어라”
장달호가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내 뱉은 말이다.
그는 부천에서 플라스틱 포장재를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의 사장인데 항상 자금이 모자라 쩔쩔 매고 있었다. 수출이 호황이라 포장재의 수요가 급증하며 기일에 맞추어 납품하라는 주문이 계속 폭주하는데 제품의 생산량은 늘리지 못하고 있다. 공장을 확장하고 인력도 늘려야 하는데 돈이 없다. 융자를 받으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를 믿고 대출을 쉽게 해 줄 은행이 없었다. 담보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은행 지점장과 선이 닿아 있지 않으면 담보물이 있어도 대출 순위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이제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 먹는 것은 해결되어 끼니를 굶는 일이 없어졌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경제개발은 가속도가 붙어 모든 산업분야에서 일거리는 태산 같고 노동력은 총 동원되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사회가 모습을 달리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투자할 자금이 모자라 많은 사람들이 일거리를 뻔히 앞에 두고도 사업을 확장할 수 없다. 사람 몸에서 피가 돌지 않으면 몸이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이 돈이 돌지 않으면 사업을 운영할 수가 없다. 어느 분야에나 자금 수요는 넘쳐나는데 자금 공급은 새 발의 피다.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은 줄을 서 있는데 은행은 항상 돈이 모자라 고민이다. 그러니 금리는 고금리이고 년 12%이하는 없다. 은행에 돈이 없으니 사채시장이 성업 중이다. 사채금리는 최하가 24%, 월 2부(2%)가 보통이다. 개인 간에도 2부 이자가 상식이고 급전은 4부 5부 끝이 없다. 누구든지 은행에서 돈만 빌릴 수 있으면 어떤 사업을 시작해도 돈 벌어 땅 사고 집사고 사채놀이도 할 수 있다. 벌은 돈은 은행에 갚지 않고 싼 이자만 물고 계속 사업을 벌이거나 사채놀이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러니 은행은 더욱 돈이 모자라고 대출 수요는 계속 증가한다.
사채 금리와의 격차가 심하니 대출 커미션도 만만치 않다. 보통이 5%이고 많게는 7~8%까지 요구할 수도 있다. 그래도 사채금리보다 유리하니 은행대출을 원하는 사람이 줄을 선다.
은행들은 예금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다. 예금을 유치해야 대출자원이 확보되고 대출이 잘 되어야 예금도 잘 된다. 선순환이다. 반면에 예금을 끌어 들이지 못하면 대출자원이 고갈되어 더 이상 대출을 해 줄 수 없고 대출이 안 되는 은행은 고객이 점점 줄어들어 은행들의 경쟁에서 낙오된다. 악순환이다. 지점장들은 예금실적이 올라야 근무 성적이 오르고 승진도 하는 한편, 막강한 대출권한을 행사해서 대출 커미션을 받아 비자금을 만들고 그 돈으로 예금주들과 교제를 하여 예금을 더욱 끌어 들이고 각종 잡 경비를 쓸 수 있다. 예산에 업무추진비가 책정되어 있으나 쥐꼬리만큼 형식적으로만 책정되어 있을 뿐, 그나마 극히 공식적인 비용에만 쓸 수 있는데 실제로는 비공식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잡경비가 몇 배나 많이 필요한 실정이다. 비자금이 있어야 부하직원들과 저녁식사라도 하고 봄 가을 야유회도 갈 수 있다. 회사 돈으로 직원들의 모임을 주선하는 것은 비단 은행뿐만이 아니다. 유명 관광지, 해수욕장, 하계휴양지 등에 단체로 온 모든 기업체는 회사 비자금을 쓴다. 온 나라가 비자금 천국이다. 은행 직원들은 불만이 커지면 금융 사고를 칠 확률이 높다. 사고 없이 지점의 예금과 대출 실적이 오르고 수지가 좋아지면 지점장으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는 행복이다.
장달호는 마침 이웃에 사는 전태영의 소개를 받아 김동채를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약간의 은행 돈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고의 발단이 되었다.
전태영은 창성그룹의 자회사인 (주)BE글로벌의 영업부 부장이다. 창성그룹은 대기업은 아니지만 매년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잘 나가는 중견 회사이고 (주)BE글로벌은 작년에 설립한 편의점 프랜차이즈 회사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의 유명 식품과 생활용품까지 수입하여 판매하는 업체이다.
회사는 가맹점 모집공고를 하였다. 편의점 창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가계약을 하고 회사에 창업신청을 하면 회사는 점포의 위치, 규모, 배후지 등을 분석하여 사업의 타당성이 인정되면 예비창업자로 선정하여 가맹점계약을 체결하고, 이를 N은행에 통보하는 한 편, 점주교육을 하고, 점포공사와 개점을 진행시킨다. 예비창업자는 회사의 안내에 따라 은행에 대출신청을 하면 금리 년 12%, 대출기간 2년으로 최대 2,000만원까지 담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회사는 위험부담 없이 가맹점을 늘려 사업을 확장할 수 있고, 창업자는 담보물만 있으면 은행 대출을 받아 편의점사업을 할 수 있는가 하면 은행은 안전하게 담보대출을 하고 거래처를 끌어 들일 수 있어 3자가 다 만족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김동채는 강북에 있는 D구청에 근무하던 공무원이었는데 인허가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중 큰 뇌물을 받은 것이 발각되어 파면을 당했다. 파면 당했으니 연금도 날아가 버렸다. 간신히 봉천동에서 작은 점포를 하나 얻어 과일가게를 하였으나 경험이 부족하고 장사 속을 알지 못하여 겨우겨우 현상유지를 해 나가는 정도였다.
기고만장하던 자태가 점차 일그러져 몰골이 초라하게 변하여 갔다. 살림밖에 모르던 아내가 그나마 장사에 약간의 눈이 띄어 가게를 꾸려 나갔다. 김동채는 가게를 아내에게 맡겨 놓고 여기 저기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하여 친한 체하며 만나자고 억지 약속을 받아내고 점심을 얻어먹고 돈 뜯어 낼 궁리를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노른 자리 민원부서에 있을 때 챙긴 돈도 바닥이 났다. 그러던 중 고향 선배인 C씨를 만나 그의 직장동료인 전태영을 소개받아 (주)BE글로벌의 편의점 사업을 알게 되었다. 마침 (주)BE글로벌은 광범위하게 일간지에 사업공고를 하여 창업희망자를 모집하던 중이라 전태영은 김동채에게 프랜차이즈 편의점을 해 보라고 권유하였다. 장소만 잘 선택하면 점포시설, 개점, 물품공급, 회계, 홍보 등 모든 업무를 회사가 지원해 주니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이 회사가 안내하는 대로만 하면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전직 공무원이나 월급쟁이들이 가장 안전하고 쉽게 운영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하였다. 김동채에게는 안성맞춤이고 구원투수였다. 회사와 김동채의 입장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다.
김동채는 봉천동의 과일가게를 편의점으로 업종 변경하여 신장개업하는 계획과 동시에 아내 명의로 새로운 편의점을 하나 더 개점하려는 욕심까지 생겼다. 서울시내 구석구석을 파고 다닌 끝에 화곡동 재래시장 근처에서 15평쯤 되는 마땅한 점포를 찾아내어 우선 10만원을 걸고 가계약을 하였다. 편의점 선정이 되면 정식 계약서로 전환하고 보증금을 일시에 지불하는 조건으로 아내 박연지를 임차인으로 한 점포임대(차)계약서를 작성하였다. 김동채명의의 봉천동 점포와 박연지명의의 화곡동 점포에 편의점을 개점하겠다는 신청서를 (주)BE글로벌에 내었다. 편의점은 점포의 위치나 규모가 적당해야 하고 주택가를 끼고 배후지가 좋아야 하고 기존의 편의점과 300m이상의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추어야 기존의 편의점과 영업상 충돌이 생기지 않고 성공할 수 있으므로 회사의 선정심사에 통과할 수 있다. 거기에 점포 임차보증금과 월세가 비싸지 않아야 수지를 맞출 수 있다. 편의점 장소만 잘 물색하여 신청하면 사업은 절반 성공한 셈이다. 가맹점 선정심사는 별도의 심사팀에서 하였다.
김동채와 박연지는 어렵게 가맹점 심사에 통과하여 예비창업자가 되었다. 이제는 담보물을 제공하고 은행대출을 받아 회사의 안내에 따라 점포 시설 공사를 하고 개점하면 된다. 김동채는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으니 이제 열심히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큰 희망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런데 어렵게 대출 길을 뚫어 놓았으나 마땅한 담보물이 없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전세집이므로 담보물이 될 수가 없다. 동생 김우채에게 사정을 털어 놓고 협조를 구해 볼까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동네 시장바닥 노른자위에 있는 동생 김우채의 점포도 실질적 가치는 충분하나 소유권이 시장 주식회사에 있고 점포주는 기간의 약정이 없는 장기 임대차계약으로 임차권만 분양받아 사용하고 있는 속칭 임대분양의 물건이라 담보물이 될 수가 없었다. 시장 주식회사는 관리비만 받아 시장을 관리하고 임대분양의 점포주는 등기상 소유자는 아니지만 실질적인 소유주로서 점포를 사고팔고 한다. 점포는 통상 권리금까지 붙어 있어 매매가는 높지만 은행 대출의 담보물은 될 수가 없었다.
한편 (주)BE글로벌은 예비창업자가 3개월 이내에 개점하지 않으면 편의점 선정을 취소하도록 내규로 정해놓고 있어 김동채는 시간에 쫒기고 담보물 구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김동채에게 편의점사업을 권유한 전태영은 개점을 도와주고 영업실적을 올려야 하는 직책에 있는데 김동채의 형편이 쉽게 풀리지 않음을 보고 마침 이웃에서 가까이 지내는 장달호를 소개해 주면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장달호가 전에도 은행 대출을 받을 길이 없겠느냐고 물어 온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장달호가 생산하여 대기업에 납품하는 플라스틱 포장재는 생산하기 무섭게 날개 돋친 듯이 실려 나가는데 돈이 없어 사업을 확장할 수가 없다. 돈만 있으면 생산 설비를 크게 확충하여 더 큰돈을 벌 수도 있다. 전태영과는 7년째 담하나 사이로 매일 아침 인사를 하며 가까이 지내는 이웃인데 저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가를 알 정도로 집안 사정을 서로 빤히 알고 있다. 이웃이 좋아 이사를 가고 싶어도 못 간다고 할 정도로 절친하게 지냈다. 담이 낮아 까치발을 하고 목을 쭈욱 뽑으면 옆집 마당을 볼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마당가에서 헉! 헉! 역기운동을 하던 전태영이 담 너머 얼굴을 내밀고 말한다.
“어이! 장사장, 요즘 사업 잘 되고 있어? 저녁에 시간 있으면 영등포에서 보신탕 한 그릇 할까?”
“사업은 잘 되는데 돈이 안돌아 고민이야...그래, 전부장하고 식사한지도 오래고 오늘이 초복 아닌가? 마침 잘 됐네.”
그들은 저녁 7시 영등포에서 이름난 ‘할매보신탕집’에서 만났다. 이 집은 사시사철 보신탕으로 유명한 음식점이다. 골목으로 약간 들어간 단독 건물인데 마당이 넓고, 크고 작은 방이 여러 개 있는 2층집이라 단체 예약 손님이 많다. 원조 할매는 오래전에 저세상으로 가고 아들이 맡아 대를 이은지도 20년이 넘었다.
“아니, 자네 혼자인 줄 알았는데, 이 분은 누구인가?” 장달호가 눈이 둥그래졌다.
“아, 그래, 내가 미리 말 하지 않았군, 미안하네. 이쪽은 김동채라고... 강북에 있는 D구청 공무원이었는데 지금은 놀고 있어. 내가 있는 (주)BE글로벌의 편의점사업을 준비 중인 예비사장이야. 이쪽은 엇 그제 말한 부천 장사장이고... 서로 인사하게!”
김동채와 장달호가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먼저 통성명을 하고, 세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주고받으며 시장바닥과 음식점에 얽힌 얘기들을 나누었다. 웃고 떠들며 소주도 몇 병 비웠다. 김동채는 공무원 사회의 실상과 그들이 뇌물 먹고 상납하는 숨은 사정들을 흉허물 없이 털어 놓았다. 그날은 대출이나 담보물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장달호와 김동채는 전태영을 제쳐 놓고 둘이서만 두어 번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제법 친해졌다.
김동채는 담보물 구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차에 장달호를 알게 되었고 장달호가 항상 자금이 급하다는 것까지 알았다. 장달호는 대다수의 중소기업 사업자가 그러하듯이 납품대금은 3개월짜리 약속어음(외상)으로 받고 구입한 원자재 값도 어음을 끊어 주었다가 3개월 후에 결제해 주는 형식으로 사업을 해 왔기 때문에 항상 부도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납품대금을 제때에 받지 못하면 부도가 난다. 장달호만 그런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업자들이 거래대금을 어음으로 결제하는 어음 만능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부도가 나면 뒤에 있는 사업자들이 줄줄이 부도가 난다. 연쇄부도이다. 이 무서운 부도를 면하기 위해서는 항상 여유자금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김동채가 담보물만 대어 주면 은행융자를 받아 같이 나누어 쓰자고 한다. 그러나 장달호는 은행돈을 융통하는 것은 구미가 당기지만 김동채의 대출까지 안고 집을 저당 잡히는 것은 곤란하다며 망설이고 미적미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달호의 집은 아내 정수자 명의로 되어있고 이미 K은행에 300만원의 담보가 잡혀 있어서 그 돈을 먼저 갚기 전에는 담보물로 쓸 수도 없었다. 장달호는 자기가 융자 받는 대신 손아래 동서인 윤건중을 소개해 주었다.
마침 윤건중도 은행에 선만 닿으면 얼마가 되든지 융자를 받고 싶어 하던 중이었다. 윤건중은 사업수완이 좋아 자동차 부품사업으로 큰돈을 벌었고 공장을 확장하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였다. 은행융자는 끌어 쓸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끌어다 투자해도 이익이 남는 장사였다. 매사에 자신이 있고 수완이 좋은 윤건중은 의외로 손쉽게 김동채의 은행대출에 담보물을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대신 뭐든지 믿을 만한 물건을 잡히라고 하였다. 김동채는 자기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전세 보증금과 봉천동 과일가게의 임차 보증금을 잡히겠다고 하면서 주택의 전세계약서와 점포 임대차계약서를 공증까지 해 주었다. 윤건중은 그 정도 서류만 있어도 김동채가 쓰는 융자금 이상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하여 전태영의 보증을 받아 오라고 요구하였다. 전태영과는 직접 알지 못하는 사이지만 동서인 장달호의 이웃사촌으로 장달호가 신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보증만 있으면 더욱 안심하고 집을 잡혀도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김동채는 전태영에게 보증을 부탁할 처지가 아니었다. 고향 선배인 C씨를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일 뿐 서로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무슨 낯으로 그에게 보증을 부탁하겠는가? 그러면서도 편의점사업이 확실하고 성공할 수만 있다면 단기간의 대출을 위해서 일시 보증을 서 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한번 부탁해 보기로 하였다. 편의점을 하나라도 늘려 회사의 사업을 번창시키는 것이 전태영의 업무이기 때문에 그가 무조건 거절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김동채는 전태영을 그의 회사 근처 다방으로 불러내어 윤건중을 소개하고 은행대출에 담보를 제공하기로 하였다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보증을 부탁하였다.
“제가 편의점을 개설하는데 돈이 모자라 은행 대출을 좀 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마침 이 윤사장님이 담보를 제공해 주겠다고 하면서 편의점 사업이 확실한지, 그리고 저를 믿을 만한지 전부장님이 보증을 서 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정말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보증을 서 주시면 사업을 꼭 성공시켜 크게 보답하겠습니다.”
전태영은 깜짝 놀랐다. 아니, (주)BE글로벌의 편의점사업과 개점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어 만나자고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느닷없이 알지도 못하는 윤건중을 데리고 와서 보증을 서 달라니? 윤건중은 이웃집 장달호의 손아래 동서라고는 하지만 초면인 사람 아닌가? 그들이 대출을 받기로 하였다지만 전혀 내용을 모르는 입장이고 알 필요도 없었다.
“보증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보증을 아무한테나 서 주나요? 직장 동료인 C씨로부터 당신을 소개받아 알게 된지도 얼마 안 되고 아직까지 당신의 재력이나 사업능력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보증을 서 달라니요? 그러고 우리 회사는 회사 일에 관련해서 직원이 보증을 설 수 없도록 되어 있어요.”
예상대로 전태영은 김동채를 꾸짖듯이 쏘아주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아, 제가 철딱서니 없는 부탁을 하였네요. 죄송합니다. 그러시면 제가 윤사장님 앞으로 각서를 써 주려고 하는데 그냥 입회인이 되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입회인이야 서 주어도 괜찮겠지요.”
『 각서
본인 김동채는 귀하의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고 은행대출을 받아 그 중 금 700만원를 사용함에 있어 만일 이를 갚지 못할 때에는 봉천동 점포의 임차보증금과 운영권 일체를 귀하에게 양도하기로 각서 합니다.
년 월 일
각서인 김동채 (인)
입회인 전태영 (인)
윤건중 귀하 』
글씨 좋고 사람 좋은 전태영이 자필로 각서를 작성하여 입회인 도장을 찍어 주었다. 윤건중은 (주)BE글로벌의 현직 부장이면서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입회인이 되어준 전태영이 믿음직스러웠다. 보증인까지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그가 자필로 쓰고 입회인이 되어 도장을 찍어 주는 것만으로도 김동채가 믿을 수 없는 허술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반은 마음이 놓이고 며칠 후 1,000만원의 큰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욕심이 동하여 담보를 제공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인감증명서와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김동채와 같이 은행에 가서 근저당설정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주어 급속도로 융자가 진행되었다. 1,700만원의 은행 대출을 받아 윤건중이 1,000만원을 쓰고 김동채가 700만원의 돈을 손에 쥐게 된 것은 그해 8월이었다.
(주)BE글로벌의 편의점은 요즈음 인기 있는 사업이라 누구든지 잘 알지만 김동채라는 사람은 처형 정수자로부터 알게 되었고, 처형도 전태영 부장으로부터 소개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는 사람인데 과연 사업을 제대로 할 줄 아는가? 대출금을 2년 내에 갚을 수 있을까? 혹시 사기꾼은 아닌가? 만에 하나 대출금을 갚지 않으면 내가 그 짐을 짊어져야 하는데 피해를 입지 않을까? 윤건중은 계획했던 대로 융자를 받아 공장을 확장하여 기분이 좋았으나, 한 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윤건중의 담보로 대출을 받아 봉천동 가게를 편의점으로 개설하기 위한 공사를 대강 마친 김동채는 아내 박연지 명의의 편의점개설에는 시간을 놓쳐버려 회사로부터 시설공사를 빨리 하라는 통보를 받은 입장이었다. 빨리 담보제공자를 구해서 대출을 받지 않으면 편의점 선정이 취소될 처지에 놓였는데 지금으로서는 장달호 밖에 기댈 데가 없다. 장달호의 아내 정수자 소유의 주택만이 담보물이 될 수 있는데 그 장달호는 선뜻 담보를 제공해 줄 마음이 없어 미적미적하니 속이 탔다. 장달호 부부를 설득하기 위해서 뾰족한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앞으로 개점하는 화곡동 편의점과 동생 김우채의 봉천동 점포를 잡히고 장달호의 믿음직한 이웃인 전태영을 끌어 들여 도움을 받기로 마음을 먹었다.
묘수를 찾은 김동채는 만약 자기 몫의 대출금을 갚지 못할 때에는 앞으로 개설할 화곡동 편의점의 임차보증금은 물론 상품 및 운영권 일체를 본사 영업부장인 전태영에게 넘겨주어 전태영이 정리하도록 일임하면 어떻겠느냐고 그럴 듯한 제안을 하였다. 양도증.1을 써 주면서 가지고 있다가 언제든지 필요하면 전태영에게 넘겨주라고 하였다.
『 양도증.1
본인이 은행대출을 받을 때 정수자가 담보물을 제공하였는바, 만약 본인이 융자금을 기한 내에 상환치 못할 때에는 화곡동 편의점 점포의 임차 보증금과 운영권 일체를 귀하에게 양도키로 한다.
년 월 일
양도인 김동채(인)
양수인 전태영 귀하 』
장달호는 ‘본사’라는 말에 속아 넘어가 담보를 제공하고 김동채와 함께 대출을 받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편의점과 본사와의 관계는 판매계약관계이지 회사 내부의 본사와 지사 관계가 아니므로 설사 편의점이 도산하더라도 본사가 책임질 일이 전혀 없는데 장달호는 이를 착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편의점의 재산 가치는 자기 몫의 대출금 보다 2배가 넘는다고 보았다.
장달호를 직접 설득한 김동채는 동생 김우채의 봉천동 점포를 양도해 주겠다는 양도증.2를 같은 날자로 작성하여 가지고 와서 전태영에게 주면서 장달호 부부에게 잘 말해 달라고 하였다.
『 양도증.2
본인은 형 김동채가 은행으로부터 700만원을 융자받을 때 귀하가 연대 보증한 건에 관하여 만약 형이 융자금을 기한 내에 상환치 못할 때에는 본인의 봉천동 점포(참기름 가게)를 귀하에게 이의 없이 양도한다.
년 월 일
양도인 김우채(인)
양수인 전태영 귀하 』
장달호는 양도증.1을 받은 사실을 전태영에게 알려 주지 않고 그냥 받아 놓기만 하였다. 전태영도 김우채의 양도증.2를 장달호에게 보여주지는 않고 김동채를 그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만 하였다.
세상 물정에 밝고 사업수완이 좋은 동서 윤건중이 덜렁 담보를 제공하고 손쉽게 융자를 받는 것을 본 장달호는 미적거리던 태도를 바꾸어 집을 잡히고 융자를 받기로 결심하였다. 당장 급한 대로 어음도 결제하고 기계도 한 대 더 들여 놓을 기회를 잡게 되었다. 김동채의 처 박연지 명의의 편의점 개설자금으로 1,600만원을 융자 받아 800만원씩 나누어 쓰면 K은행에서 빌린 300만원을 갚고도 500만원의 여유자금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마침 K은행에서도 대출기간이 만기가 되었다고 통보가 온 상황이라 이참에 은행을 바꾸면 대출기간 연장을 위해서 어려운 부탁 할 필요도 없고 별도 사례금을 줄 필요도 없으므로 이중으로 이득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웃에서 친하게 지내는 전태영의 아내가 급전을 소개해 주어 K은행의 300만원을 갚고 근저당설정을 말소함과 동시에 차주 박연지명의의 대출에 근저당 설정을 해 주었다.
마침내 김동채는 아내 박연지 명의로 1,600만원의 은행대출을 받아 장달호에게 800만원을 주고 자기도 800만원
을 손에 쥐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이 은행대출서류에는 없다. 장달호는 아내 정수자의 집을 잡히고 김동채는 아내 박연지의 명의로 대출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동채 부부는 두 곳의 편의점을 간신히 개점하여 처음 몇 달 동안은 그런대로 잘 운영하였으나 점차 사정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주)BE글로벌이 독점적으로 수입하던 식품들도 수입 자유화가 되어 특혜가 사라지고 전국에 공장과 농장이 늘어나서 공산품이고 식품이고 할 것 없이 많은 물량이 쏟아져 나오니 주변에 온갖 유사 상점들이 앞을 다투어 들어서고 저가 경쟁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경영이 어려워 졌다.
두곳 영업장을 운영하기 위해서 부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동분서주 움직여야 했다. 그러자니 중고등학생인 세 자녀는 돌볼 틈이 없었다. 그러고도 인력이 모자라 아르바이트생을 들여 점포를 보게 하였으나 차차 그들의 임금 계산하기도 어려워져 갔다.
점주나 종업원이나 모두 사업경험이 부족한데다 손님들의 취향을 몰라 상품의 구색을 갖추지 못하고 재고만 쌓여 갔다.
김동채는 정수자에게 화곡동 편의점을 인수 받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수자 역시 장사를 해 본 경험이 없으니 선뜻 인수 받지 못하고 짜증을 내면서 융자금부터 갚으라고 재촉하였다.
진퇴양난, 궁지에 몰린 김동채는 자금 여력이 있는 아내의 먼 친척 언니 박순실에게 편의점을 넘겼다. 박순실은 융자금을 안고 점포를 인수 받아 재고품을 정리하고 추가 자금을 투입하여 새 상품을 대폭 들여 놓았다. 일단 점포를 살리고 박연지로 하여금 가게 일을 돕게 하였다.
김동채의 봉천동 편의점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윤건중이 몸이 달아 매일 같이 연체이자를 불입하라고 김동채를 몰아 세웠지만 김동채는 이자를 낼 여력이 없고 결국 점포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장달호는 사업자금을 융자받아 급한 대로 어음도 막고 회사를 키우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 김동채가 저질러 놓은 큰 짐을 지게 생겼다. 김동채가 쓴 대출금은 이자가 밀려 매일같이 원리금이 불어나고 있었다. 김동채에게 대출금과 이자를 갚으라고 독촉하는 한 편, 전태영을 만나 하소연하였다.
“전부장, 큰일 났어. 김동채가 사업이 안 되고 이자도 못 내어 연체가 되는 모양이야. 어쩌면 좋지?”
“글세, 그 친구 착실한 줄 알았는데 그까짓 콧구멍만 한 점포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이자도 못 내는 얼간이란 말이야?”
“내 이럴 때를 대비해서 혹시나 하고 미리 받아 놓은 서류가 하나 있는데 자네가 힘 좀 써 주어야겠어.” 하면서 양도증.1을 내어 놓았다. 전태영이 화곡동 편의점을 양도받아 대출금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이다. 장달호는 양도증.1을 받아 놓았다는 사실조차 숨기고 있다가 이제야 내어 놓고 전태영의 협조를 부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동채가 편의점을 직접 인수 받으라고 할 때 인수받지 않았고 지금은 박순실이 운영하고 있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다. 거의 안 될 줄 알지만 전태영의 힘을 최대한 이용해 보려는 속셈이다.
“이건 언제 받은 서류야? 나도 한 장 받아 놓은 것이 있는데 뭐가 잘 안되면 제 동생 김우채의 점포를 넘겨주겠다는 것이야.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집에 놓고 갔어... 알다시피 나는 회사 간부로서 편의점의 개인적 일에 끼어들 위치가 아니야. 직접 관여할 수 없쟎아? 잘 읽어 보고 써 먹을 수 있으면 자네가 이용해 보라고...”
전태영은 양도증.1과 양도증.2의 양수인이 자기로 되어 있지만 모두 자기의 의사와 관계없이 제 3자들이 작성한 것이므로 아무런 책임이 없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남의 채권채무관계에 개입할 필요가 없고 회사일이 바쁜데 그런 일에 시간을 낼 수도 없었다. 양도증.2를 내어 주면서 장달호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한 것이다.
김동채는 차일피일 핑계를 대고 피해 다니다가 요사이는 전화도 안 받는다. 설사 그를 잡아서 추궁하더라도 단돈 5만원 받아 내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김동채로부터 받아 놓은 양도증.1은 화곡동 편의점이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다음이라 아무리 뜯어 봐도 쓸모가 없는 휴지장에 불과한데, 양도증.2는 잘하면 피해액을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지도 않은 서류가 나왔으니 장달호는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서류를 가지고 윤건중과 의논하였다.
그 무렵 윤건중도 공증을 받아 놓은 김동채의 주택 전세계약서와 점포 임대차계약서도 이미 쓸모없게 되어 있던 차에 장달호가 가지고 온 양도증.2를 자세히 보니 ‘형이 융자금을 기한 내에 상환치 못할 때’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정수자의 대출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대출에 일치하는 서류가 아닌가? 정수자의 경우는 ‘차주 박연지 금액 800만원’인데, 윤건중의 경우는 ‘차주 김동채 금액 700만원’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연구한 끝에 일단 윤건중 대출에 관련하여 소송을 내기고 합의하였다. 윤건중은 김우채가 점포를 남에게 넘겨버리면 헛 공사가 되니 먼저 점포의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신청’을 하였다. 신청인을 전태영으로 하고 막도장을 새겨 찍었다. 이런 사실을 전태영에게는 알려 주지도 않았다. 전태영이 양도증.2를 장달호에게 주었는데 제3자인 윤건중이 법적 소송을 시작한 것이다. 서류가 법원에 접수되고 김우채에게 송달될 즈음 시기에 맞추어 윤건중이 전화를 걸었다.
“김우채씨요? 나 윤건중이라는 사람인데 형 김동채씨가 은행대출을 받을 때 그를 보증하기 위해서 양도증.2를 써 준 일이 있지요? 지금 은행에 돈을 갚지 않아 내 집이 경매에 들어가게 생겼으니 당신 점포를 내게 넘기시오.”
김우채는 머리를 방망이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느닷없이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가게를 내어 놓으라고 한다. 수 십 년간 시장바닥에서 일 밖에 모르고 사는 순박한 사람이라 법 없이 살아 왔는데 이게 무슨 날 벼락인가? 형 김동채가 은행 융자를 받는데 도와 달라고 해서 양도증.2에 도장을 찍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 밖에 없는 생활터전인 참기름가게를 내어 놓으라니... 서류 내용은 읽어 보지도 않고 형의 말만 듣고 도장을 찍어 준 것밖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벌이가 시원찮은 형이 모처럼 기회를 잡아 큰 사업을 한다기에 ‘잘 됐다’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무심코 날인해 주긴 했지만 후일 뭐가 잘 못 되어도 자기 점포가 날아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법원에서 등기 우편이 날아 왔다. ‘점유이전금지 가처분’?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평소 참깨 자루나 참기름병을 든 사람들만 들낙날락 하는 찌들은 가게에 이상하게도 우편가방을 멘 집배원이 와서 뭔가 전해주고 도장을 받아 가는 것을 본 이웃점포 아저씨가 눈을 박고 쳐다본다.
“무슨 일이야?”
“글세, 모르겠는데요.”
이튿날 시장바닥에 소문이 쫙 퍼졌다. 참기름집이 망해서 남의 손에 넘어 간다고. “며칠 전 양복 정장을 한 신사가 근처에 왔다 갔다 하더라.” “어제는 참기름집에 우편집배원이 다녀갔다.” “이상하다. 무슨 편지일까?” “법원 등기우편이란다.”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으로 큰 빚이 있어 빚 독촉하는 내용증명서류인가?” “가게가 넘어 가는 거 아냐?” “망해서 가게가 넘어간대.” 남의 일이라 입에서 입으로 건너가면서 완전히 망한 것으로 굳혀졌다. 큰일 났다. 이러다간 정말 손님 다 떨어지고 망하겠다.
김우채는 형을 찾아가 울상을 지으니 형도 고개를 떨구고 ‘미안하다. 미안하다.’를 연발하면서 어떻게든지 가게가 넘어가지 않도록 해 보겠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이튿날 김동채는 윤건중을 찾아가 싹싹 빌면서 빠른 시일 내에 밀린 은행 이자를 갚고 당신에게 피해가 없도록 각서를 써 줄 터이니 제발 동생 가게는 손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 각서
본인 김동채는 담보제공자 윤건중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0월 0일까지 은행대출금을 상환하겠으며 이를 이행치 못할 때에는 보증인 전태영의 아량에 맡겨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년 월 일
김동채 (서명)
윤건중 귀하 』
급한 김에 전태영을 끌어 들여 그가 보증 섰다고 하면서 일단 안심시키고 시간을 끌어 보려는 속셈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대출금을 갚겠다는 것은 전혀 가망이 없는 약속이고 전태영이 보증인이라는 문구도 물론 거짓이었다.
윤건중이 각서를 받아 쥐기는 했으나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가처분신청서 한 장에 김동채가 벌벌 떠는 것을 보니 의기양양해서 더욱 독촉의 고삐를 죄었다. 죄 없는 김우채에게 매질을 가하였다. ‘당신이 양도증.2에 도장을 찍어 주어 내가 집을 잡히게 되었으니 가게를 양도하지 않으려면 형 대신 빨리 은행 빚을 갚으라’고 하였다.
김우채는 난생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둥지둥하였다. 망했다는 소문이 더 퍼지기전에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윤건중에게 우선 은행 이자라도 일부 갚겠다고 하였다. 윤건중은 대출금 전부를 갚던지 점포를 내어 놓던지 하라고 다그쳤다. 옥시각신 하던 끝에 김우채는 생돈 220만원을 내기로 하고 윤건중은 가처분신청을 취하해 주기로 합의하였다.
그 후 다시 해가 바뀌고 이번에는 정수자의 집에 경매개시 결정문이 날아 왔다. 대출 받은지 3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김동채는 한 번도 이자를 내지 않았으니 이자에 이자가 붙어 원리금이 1.400만원이나 되었다. 연체금리가 복리로 새끼를 치니 원리금이 무서운 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정수자 부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부랴부랴 급전을 내어 김동채의 밀린 원리금 1,400만원을 내어 급한 불을 끄고는 역시 김우채에게 양도증.2를 들이밀면서 참기름 가게 점포를 내어 놓으라고 하였다. 점포를 순순히 내어 놓지 않으면 명도소송을 하겠다는 전태영 명의의 최고장까지 위조 작성하여 내용증명으로 보냈다. 그런 다음 H사법서사에게 부탁하여 ‘점포명도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 물론 형식상 원고는 전태영 이다. 김우채는 기가 막혔다. 도장은 하나 찍어 주었는데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덤빈다. 형이 저질러 놓은 일이 괘씸하기도 하였지만 서류 한 장으로 두 사람이 써먹으려는 심보가 더 미웠다.
김우채도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옆집 반찬가게 아줌마의 아들이 법대 4학년이다. 고시공부를 하느라고 얼굴에 핏기가 없고 비쩍 말라있다. 인삼 1박스를 사들고 집으로 찾아 가서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고 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예비판사는 찬찬히 서류를 검토하더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양도증.2에는 ‘김동채가 은행으로부터 700만원을 융자받을 때’라고 되어 있고 정수자의 대출은 ‘박연지가 800만원을 대출 받을 때’ 담보를 제공한 것이 아닌가? 차주도 다르고 금액도 다르다. 뿐만 아니라 양수인 전태영의 명의로 최고장을 위조 발송하고 소장을 대신 작성하어 전태영 몰래 막도장을 새겨 찍은 것이 명백히 드러나 있으니 더 이상 괴롭히면 사문서위조죄로 고소하면 된다고 하면서 그냥 시침이 떼고 있으라고 하였다.
소장이 날아갔는데도 불구하고 김우채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고 시일만 한없이 지나가고 있으니 정수자는 몸이 달았다. 차주와 금액이 다른데 법원이 승소판결 해 줄 리도 없고 전태영 명의의 최고장까지 위조한 것을 김우채가 알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 같았다. 더 끌어 봤자 헛고생만 하겠다. 할 수 없이 소를 취하해 버리고 다시 고민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 때 까지도 전태영은 자기를 가운데 두고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장달호 부부는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1년 반을 고민하던 끝에 다시 양도증.2를 만지작거리며 변호사 C를 찾아가서 김우채의 봉천동 점포를 압류하고 양도 받을 수 없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변호사는 전태영의 보증사실만 입증하면 될 것 같다고 하였다. 전태영이 김동채(차주:박연지)의 채무를 보증하였으니 김우채는 전태영에게 점포를 양도해야 하며 대출금을 대위변제한 정수자가 전태영을 대신해서 양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출서류에 김동채의 이름은 없지만 차주 박연지의 남편이라는 사실만 입증하면 그건 문제없을 거라면서 변호사는 보증확인서를 대강 작성해 주고 도장을 받아 오라고 하였다.
『 보증확인서
본인은 김동채(차주:박연지)가 은행대출을 받을 때 융자금에 대하여 연대보증 하였음을 확인합니다.
년 월 일
전태영(인)
담보제공자 정수자 귀하 』
전태영이 얼핏 보니 별거 아닌 것 같다. 은행 대출서류에 직접 연대 보증한 것도 아니고 장달호가 김동채나 그의 동생 김우채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데 필요한 자료에 불과하므로 확인해 주어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종이 쪽지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김동채를 보증한 사실이 없는데 보증하였다는 허위 사실을 문서화 하는 것이 껄끄럽고 만에 하나 나중에 장달호가 김우채의 점포를 양도받지 못하고 자기에게 보증책임을 지워 피해액을 물어내라고 하면 꼼짝없이 당할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이다. 지금은 장달호와 아주 친하게 지내기 때문에 그가 배신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나중에 장달호가 몹시 어렵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얼핏 떠오른다. 전태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증책임을 져야할 근거를 남기면 안 되겠다고 야무지게 마음을 먹고 장달호의 요청을 점잖게 거절하였다.
“장사장, 자네 입장은 잘 알지만 없던 서류를 소급해서 새로 만드는 것은 비양심적이고 법적으로도 위법이야. 있는 서류로 어떻게든지 해 보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달호는 벌컥 화를 내며 큰 소리를 내질렀다.
“이봐! 전부장, 자네 믿고 집을 잡혔다가 큰 손해를 봤는데 이제 와서 모른 체 하는 거야?”
“장사장, 내가 김동채를 소개해 준 것은 자네가 부도위기에 몰렸을 때 대출을 못 받아 목이 바짝바짝 타 들어 간다고 하기에 옆집에서 그냥 보기 어려워 도와주려고 그 놈을 소개해 준 것이지, 땡전 한 푼 내가 덕을 보자고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잘 알면서 그래?”
“그래도 그렇지, 내 집이 날아가게 생겨 큰 빚을 얻어 급한 불을 껐는데 이까짓 쪽지에 도장하나 찍어주는 것이 뭐가 어려워 못하겠다는 거야? 당장 책임지라는 것도 아니고...그놈들 상대로 소송을 하려는 것뿐인데...”
“소송도 좋지만 허위 사실을 문서로 만들 수는 없쟎아? 사문서 위조죄로 걸리는데...”
“사문서 위조죄는 얼어 죽을 위조죄야? 우리 둘만 입 딱 다물고 실제로 보증했다고 만들어 놓으면 그만인데?”
“그래도 안 되겠어. 내가 직접 보증을 선 것이 아니쟎아?”
전태영을 끌어들여 소송을 제기하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장달호는 돌변하여 안면을 몰수하고 전태영에게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당신이 짜고 김동채를 소개해 주고 연대 보증까지 해서 대출을 빼 먹은 것을 고발해야겠어, 민사, 형사 다 걸려.”
“나는 한 푼도 얻어먹은 것이 없고 보증선 일도 없어. 민사고 형사고 나는 상관없어.”
“판사 검사 다 해 먹어라”
장달호가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내 뱉고 말았다.
2. 형사 사건
전태영은 ‘저 친구가 아무래도 그냥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민사 형사 걸고 나오면 골치 아프겠어. 뭔가 미리 준비 해 두어야겠는데...’하고 여러 모로 곰곰이 생각을 한 끝에 녹음이라도 해 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녹음기를 전화통에 장착하고 장달호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장달호는 아직 퇴근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현이 엄마요? 현이 엄마도 잘 알다시피 장사장이 돈을 못 구해서 쩔쩔 매는 것을 보고...내가 보기가 딱해서 대출받는 사람을 소개해 준 것인데... 이제 와서 나를 원망하면 되겠어요? 잘 알다시피 한번 부도가 나면 회사가 망하지 않아요? 회사가 망한 다음에 땅을 치고 통곡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안 할 말로 그까짓 돈 몇 백만 원 날렸다 쳐도 회사가 망해 거지가 되는 것 보다는 낫지 않았어요? 그 돈으로 회사를 살려 지금은 회사가 잘 돌아가고 그 동안 돈도 많이 벌었쟎아요? 장사장이 쓸데없이 소송을 벌려 서로 골치 아프게 하지 않도록 잘 말해줘요.”
“전부장님이야 사기꾼을 소개해 준 것밖에 잘못이 없지만 우리는 그 사기꾼 땜에 1,400만원이나 날렸으니 어쩌겠어요? 원금과 이자를 한 푼도 갚지 않아 1,400만원이나 된단 말이예요. 제가 그만 두라고 한들 현이 아빠가 그만 둘 리도 없고요...”
“그래도 그렇지, 소송에 휘말리면 변호사만 좋은 일 시키지.., 우리는 서로가 피를 흘리게 되어요. 장사장도 잃은 돈보다 더 큰 돈을 잃게 될 거요. 소송이 한두 푼 하는 장난인줄 아세요?”
사실 사업이라는 것이 그렇다. 이리저리 어음을 주고받다가 작은 어음이라도 막지 못하고 부도가 나면 여간 큰 사업체도 하루아침에 쫄딱 망한다. 부도났다는 소문만 들으면 채무자는 그 회사에 갚을 돈을 안 갚고 하루라도 늦추면서 눈치만 본다. 어차피 망할 회사에 돈 갚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채권자들은 내 돈 떼일까봐 시간을 다투어 몰려와서 서로 자기 돈부터 갚으라고 아우성을 친다. 사장은 우선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다. 사원들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엄청난 자금이 하늘에서 떨어져 그 많은 채권자(원자재 납품자, 어음소지자 등)들에게 돈을 확 풀어 주기 전에는 회사가 망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그래서 작은 금액이라도 부도가 무서운 것이다. 마누라라도 팔아서 부도를 막아야 한다.
“전 부장님, 전화가 왔어요. K경찰서라는데요?”
회사 여직원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화를 받으라고 한다. 전태영은 가슴이 뜨끔하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앞자리에 있는 김 대리에게 사정을 대강 얘기해 주고 오후에 K경찰서로 갔다.
눈이 삼각형으로 생긴 경장 P와 마주 앉았다. 고소인은 생각지도 않은 윤건중과 정수자였다. 전태영은 장달호가 고소한 줄 알았는데 장달호는 쑥 빠지고 동서 윤건중과 아내 정수자가 고소한 것이다. 알고 보니 그들이 담보제공자였기 때문이다. 윤건중이 고소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사실 5년 전 대출당시 장달호와 김동채를 서로 소개시켜주었을 뿐, 윤건중은 알지도 못했는데, 어느 날 김동채가 데리고 와서 보증을 서달라고 하기에 보증은 안 된다고 하면서 각서에 입회인으로 날인해 준 것 밖에는 거의 기억이 없지 않은가? 그들이 얼마를 대출받았는지, 그 후 그들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알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전태영이 김동채를 도와주려고 자기들에게 소개를 하고 온갖 수단을 써서 집을 잡히도록 하여 은행돈을 빼 먹었다고 하면서 김동채 박연지 부부와 전태영을 사기, 배임, 알선수재 등의 죄로 고소한 것이다.
“양도증.2에 전태영 씨가 양수인으로 되어 있는데 언제 어디서 왜 받았는가요?”
경장 P가 타이프를 치면서 묻기 시작한다.
“김동채와 정수자가 은행융자를 받기 며칠 전에 김동채가 집으로 찾아와서 정수자가 담보물을 제공하도록 잘 말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놓고 갔습니다. 본인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써 가지고 와서 만약 정수자에게 피해가 생길 때에는 김우채의 가게를 양도해 주겠다고 하였어요. 내용을 읽어 보지도 않고 그냥 받아 두기는 했지만 그들이 얼마를 대출받아 얼마씩을 나누어 쓰기로 했는지 금액도 모르고 알 필요도 없었어요. 그들은 모두 사업하는 사람들이라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는가 생각하면서 그저 서로 협조하여 대출을 잘 받기만 바랬지요. 약 1년쯤 후에 정수자의 남편 장달호가 울상이 되어 찾아 와서 김동채의 편의점이 잘 되지 않고 대출금 이자도 제대로 내지 않아 담보제공한 집이 날아가게 생겼다고 하길래 김우채의 가게라도 잡아 보라고 하면서 받아 두었던 양도증.2를 내 주었어요.”
“피의자는 정수자가 융자를 받도록 알선해 준 대가로 금 10만원을 받은 사실이 있지요?”
“없습니다.”
“정수자가 주었다는 수표 사본이 여기 있는데요?”
“정수자는 K은행에 잡혀있는 근저당을 해제할 때 아내가 빌려준 300만원에 대하여 이자라도 주어야 한다면서 집으로 찾아와서 억지로 방석 밑에 두고 간 것입니다.”
“정수자의 피해사실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나요?”
“피해를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서 양도증.2를 내어 주었으나 그나마 잘 되지 않고 점포를 양도 받지 못하여 미안한 생각입니다. 괜히 소개해 주었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김동채에게 묻고 김동채가 대답한다.
“양도증.2를 전태영에게 어찌하라고 주었는가요?”
“본인의 융자금에 대하여 동생 김우채가 보증하므로 만약 융자금을 본인이 갚지 못할 때에는 전태영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준 것입니다.”
“왜 양수인이 전태영인가요?”
“그 당시 정수자는 잘 모르는 상태이고 전태영이 소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정수자를 잘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정수자의 남편 장달호와 여러 번 만나 대출을 협의 한 후였는데 거짓말을 하고 있다. 대출을 꼭 받아야 하는 다급한 입장에서 정수자에게는 양도증.1을 써 주고 전태영에게는 양도증.2를 억지로 맡겨 놓은 사실을 감추고 있다. 두 양도증은 모두 본사 영업부장인 전태영을 개입시켜 정수자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박순실에게 어떤 조건으로 점포를 넘겼나요?”
“융자금 800만원과 이자를 안고 정수자에게 갚아 주라는 조건으로 넘겼습니다.”
“윤건중에게 집의 전세 보증금과 봉천동 가게의 임차 보증금을 잡히겠다고 하면서 주택의 전세계약서와 점포 임대차계약서를 공증까지 해 주고서 왜 그대로 하지 않았나요?“
“전세보증금은 아직 전세계약 기간이 만료되지 않아 보증금을 찾을 수 없고 봉천동가게의 임차보증금은 같이 동업하던 H씨가 빚에 몰려 다른 채권자에게 대부분을 빼앗기고 본인에게는 60만원만 돌려주었습니다.”
“돌려받은 60만원을 윤건중에게 주지 않고 왜 피의자가 써 버렸나요?”
“생활비가 모자라 썼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정수자에게 묻고 정수자가 대답한다.
“김동채의 말이 맞는가요?”
“예, 대강 맞습니다.”
“그런데 왜 돈을 못 받았나요?”
“박순실에게 갔더니 자기는 김동채와의 관계이지 내게 돈을 줄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3자가 같이 만나자고 하여 김동채를 불러냈는데 김동채가 나오지 않아 허탕을 쳤고, 그 후 박순실이 다른 사건으로 형무소에 가버려 못 받았습니다.”
“점포를 인수하라고 할 때 인수하지 않은 것은 본인이 재산관리를 잘 못한 것이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전태영이 김동채를 믿으라고 하면서 사기 친 것도 사실이지요.”
두세 시간에 걸쳐 온갖 있을 법한 사항들을 상상을 동원해 가며 꼬지꼬지 캐묻고 이에 대답하고 형사가 독수리 타법으로 타이핑하느라고 진땀을 뺀다. 조사가 끝나자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여 읽어보고 확인 도장을 찍으라고 하였다.
“도장이 없는데요?”
“지장이라도 찍어요.”
이윽고 옆방 작은 문이 열리더니 전태영의 아내가 나온다. 전태영은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것들이 아내까지 끌어 들여 조사를 받게 했나? 아니면 아내도 고소당한 것인가? 속으로 화가 났지만 꾹 참았다.
“아주머니는 가도 좋아요. 전태영씨는 따라 오세요.” 하면서 옆방 유치장으로 안내한다. 조사결과를 윗선에 보고하고 검찰 송치여부를 결재 받아야 하므로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허리띠를 풀어요!”
형사가 명령조로 말한다. 유치장에는 온갖 잡범들이 잠시 왔다가는 곳이라 밤사이에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니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소지품을 회수하고 허리띠까지 풀어 문밖에 내어 놓으라고 한다. 허리띠로 목매달아 자살이라도 할까봐? 헐렁한 옷으로 몸만 가리게 하고 하루 밤 재우는 것이다. 규칙이다.
“채 형사새끼! 벼락 맞아 죽을 놈. 멀쩡한 사람 잡아다 놓고 잘 되는가 봐라. 너는 마누라도 없고 새끼도 없냐?”
갑자기 고막을 찢는 여자 목소리가 나고 유치장 밖이 시끄럽다. 유치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시선을 모은다. 노란 머리가 얼굴을 가리고 흐트러져 있으나 비교적 몸매와 얼굴이 잘 생긴 젊은 여자이다. 아주 세련된 옷을 입고 있다. 전태영은 순간적으로 근처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여자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서 유치장.
꿈에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전태영은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다. 잠이 올 리가 없다. 옆에서는 노랑머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채 형사 욕을 하다가 흑! 흑! 울기를 반복 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조용히 하라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전태영은 거의 뜬눈으로 앉아서 밤을 새웠다.
이튿날 경장 P는 경미한 부분을 몇 마디 더 물어 보고 수사결과 보고서를 작성하여 결재를 받아 검찰에 송치하였다.
『피의자 김동채의 사기 부분은 처음에는 사업이 잘 되었으나 수입자유화로 사업이 실패하여 점포의 시설 등을 약속대로 양도하여 주려고 하였으나 고소인들이 재산권행사를 태만히 하여 피해가 생긴 것으로 혐의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움으로 불기소에, 배임부분은 공증까지 해 준 점포를 제대로 양도해 주지 못하고 일부 편취한 사실이 인증됨으로 기소하고,
피의자 박연지의 사기 및 배임부분은 혐의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 불기소에,
피의자 전태영의 알선수재부분은 범증이 인정되나 처벌 법규가 없어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합니다.』
전태영이 집에 와서 어제 경찰에서 무엇을 묻더냐고 하니 아내는 ‘김동채를 아느냐? 남편이 뭐라고 하더냐?’ 등을 물어서 ‘나는 바깥일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해 주었다.
N지검 Y검사실이다.
“웃어? 검사 말이 말 같지 않아요?”
젊은 검사가 괜히 트집을 잡는다. 전태영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어이가 없어 자기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은 모양이다. 얼토당토않은 허위사실을 이리저리 엮어서 사기죄로 고발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전태영은 김동채와 장달호 두 사람을 도와주려고 했을 뿐 아무런 이득을 보지 않았다고 경찰에서 한 말을 되풀이 하였다. 장달호의 처와 나눈 대화의 녹취록을 증거물로 제시하였다. 이럴 줄 알고 영등포시장 근처에 있는 속기사 사무실을 수소문하여 대화를 녹취해 두었던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했다.
김동채는 정상적으로 편의점을 창업하여 운영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사업이 제대로 안되어 부득이 대출금을 갚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지 사기를 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장달호의 피해는 형편이 되는대로 갚겠다고 하였다.
검사는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는 정수자를 들어오라고 하고는
“전태영과 김동채가 짜고 사기를 쳤다고 했는데 확실한 증거가 있어요? 증거도 없이 형사고소하면 무고죄로 걸릴 수도 있어요.” 한다.
“전태영은 김동채가 상환능력이 없는 줄 알면서 보증까지 서 주면서 대출을 받게 해 주었으니 짜고 사기 친 것이지요. 보증 선 증거가 양도증.2에 나와 있어요.”
정수자의 대답이다.
“양도증.2는 전태영이 만든 문서가 아니고 제 3자인 김우채가 임의로 작성한 문서이므로 전태영이 보증 섰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아요?”
“-----”
“김동채가 상환능력이 없는 줄을 전태영이 알았다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
“두 사람이 사기 치려고 짰다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저의 집이 다른 은행에 300만원 잡혀 있는데 전태영의 아내가 급전까지 소개해 주면서 그 돈을 갚고 새로 대출을 받도록 해 준 것을 보면 그들이 짜고 한 것이지요.”
“그것은 당시 친하게 지내던 이웃 간에 도와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던가요?”
“-----”
“전태영이 대출을 받도록 해 주고 얻은 이득은 무엇인가요?”
“제가 사례금 10만원을 주었습니다.”
“겨우 사례금 10만원을 목적으로 짰다고 볼 수 있나요?”
“-----”
“2년 전에 전태영의 명의로 김우채의 점포 명도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가 취하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양도증.2가 전태영의 이름으로 되어있는데 취하를 해 주지 않으면 김동채가 언제 와서 보복을 할지 모른다고 하여 취하해 준 것입니다.”
이것도 거짓말이다. 양도증.2로 승소판결을 받을 가망도 없고 전태영 명의의 최고장까지 위조한 것을 김우채가 알면 일이 커질 것 같아 취소해 버린 것이었다.
검사는 윤건중를 불러 사기죄의 핵심부분을 묻는다.
“전태영은 김동채가 은행대출금을 갚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사기를 쳤다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대출금을 갚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양도증.2를 받아 놓은 것입니다.”
“실제로 대출 받은 경위를 말하시오.”
“전태영이 저의 처형 정수자에게 은행대출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처형 대신 제가 대출받기 위하여 저의 집을 담보하는 서류를 구비하여 전태영에게 직접 주었고 그 자리에 나와 있던 김동채가 받아가지고 가서 전태영의 친구인 은행직원 S로부터 대출을 받은 것입니다.”
대출서류를 전태영이 직접 받은 것도 아니고 S는 전태영이 모르는 사람인데 윤건중은 거짓말을 꾸며 전태영을 끌어 들이고 있다.
“전태영의 말을 직접 듣고 대출 받게 된 것인가요?”
“정수자의 말을 듣고 대출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전태영이 사기 친 것이 아니지 않아요?”
“-----”
며칠 후 검사실 입회서기 K로부터 전태영에게 전화가 왔다. 일요일에 잠깐 만나자고 하였다. 일요일에 사적으로 만나자고 하니 전태영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고 현금 20만원이 든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고 검찰청 앞 약속한 장소에 나갔다. 사기죄가 명백하게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죄가 없어도 걸고넘어지면 불의의 화를 당할 염려가 있으니 손을 써 두어야 할 것 같았다. 티끌만 잡으면 죄를 만들어 돈을 뜯어 먹으려는 세상이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K는 사건이 지금 기소 직전에 있는데 검사가 약간 망설이고 있으니 잘 부탁하면 기소유예가 될 수도 있다고 하면서 당신이 억울한 것 같아 귀 띰을 해 주는 것이니 잘 생각해 보라고 하면서 은근히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다. ‘알았다’ 전태영은 ‘혹시나?’가 ‘역시나’구나라고 직감하고 바로 봉투를 꺼내어 주면서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한 달이 지난 후 불기소처분 통보가 왔다. 20만원이 든 봉투가 검사에게 전달됐는지 K가 검사 몰래 장난 치고 혼자 꿀꺽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처음부터 사기죄가 성립될 만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3. 고전
형사사건이 불기소처분으로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법원에서 등기 우편이 왔다. 가슴이 덜컹했다. 또 무슨 일인가? 사건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인가? 봉투를 뜯어보니 전태영의 집을 가압류한다는 통지서였다. 아, 이제는 민사로 걸고넘어지는구나. 예상했던 일이다. 정수자와 윤건중은 공동으로 우선 전태영의 집을 가압류하여 팔지 못하게 묶어 놓았다. 전태영이 집을 팔아버리면 소송에 이기더라도 헛 공사가 될 것이므로 집이라도 묶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편, 소송이 끝나기 전이라도 전태영이 마음을 돌려 협상을 해 오도록 심리적인 압박을 가해 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어서 소장이 날아 왔다.
『 소장
원고: 정수자, 소송대리인: 변호사C
피고: 전태영
피고: 김우채
피고: 김동채
구상금 청구의 소
청구취지 : 피고등은 연대하여 원고에게 금 1,400만원을 지급하라
청구원인 : 1, 2, 3...
입증방법 : 양도증.2 』
장달호는 김동채로부터 받은 양도증.1은 무용지물이니 쓰레기통에 버리고, 실오라기 같은 증거물인 김우채의 양도증.2에 목을 매달면서 전태영에게 연대보증책임을 물은 것이다. 김동채는 무일푼의 털털이로 연락도 잘 되지 아니하고 김우채의 점포는 2년 전에 명도 청구를 했다가 취하해 버렸으니 남은 것은 되든 안 되든 전태영을 족치는 수밖에 없다. 몇 달 전 형사 고소를 하기 전에 전태영에게 <보증확인서>를 작성해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는데 그 분풀이도 해야겠다.
“전태영, 괘씸한 놈! 어디 한 번 견뎌 봐라.”
보증확인서가 없어도 양도증.2에 ‘귀하가 연대 보증한 건에 관하여’라는 문구가 있으니 보증을 주장해도 될 것 같다.
전태영은 아찔하였다. 만약 그때 장달호의 요구대로 <보증확인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더라면 오늘은 꼼짝없이 장달호의 피해액 1,400만원을 물어 주어야할 처지가 아닌가? 그 큰돈을 물어 주려면 집을 팔아야 하는데? 그때 눈 딱 감고 거절하기를 정말 잘 했구나! 전태영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대수롭지 않게 김동채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 말과 장달호가 모르는 양도증.2의 존재를 노출시킨 것이 화근이 되어 전태영은 지루한 민사소송의 늪에 빠져들게 되었다. 특히 장달호를 도와주려고 건네 준 양도증.2는 비수가 되어 돌아 온 것이다.
전태영은 소장을 받아 들고 회사의 고문변호사를 찾아 갔다. 고문변호사는 회사 또는 임직원이 업무상 소송이 필요하거나 소송을 당하면 소송대리인이 되기도 하고 소송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임직원의 법률적인 자문에 응해 주는 위치에 있고, 매년 정액의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전태영의 소송은 직접적으로 회사의 업무에 관련하여 발생한 사건이 아니므로 자문을 해 줄 의무가 없었다. 변호사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반대로 전태영의 속만 긁어 놓았다.
“회사의 임직원이 타인의 대출에 보증을 서거나 보증사건에 말려드는 것은 회사의 업무와 관계없는 개인적인 일이며, 이는 회사의 이미지를 손상시킨 행위이므로 회사가 알면 문책감이지요.”
혹 떼려다 혹 붙이겠다. 보증을 선 것이 아닌데 보증 섰다고 하는 억지 주장을 반격해달라고 찾아 갔는데 도움을 주기는커녕 매질을 가하고 있다. 고문변호사로서 자문을 해 줄 범위를 벗어난 사건이기는 해도 자기 거래처의 임직원인데 인간적인 관계만으로도 따듯하게 위로를 해 주고 법망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면 어디가 탈나는가? 예끼, 돈만 아는 나쁜 인간아! 잘 먹고 잘살아라. 전태영은 실망하여 침을 뱉고 돌아섰다.
안절부절 못하는 전태영은 헛일인줄 알면서 혹시나? 하고 원고 정수자의 소송대리인 변호사를 찾아 갔다. 자기는 보증선 사실이 없고 장달호를 도와주려고 소개해 준 것밖에 없는데 소송을 걸어 왔으니 억울하다면서 월급 쥐꼬리만큼 받는 가난한 월급쟁이로 소송할 돈도 없고 생활이 파탄에 빠지게 되었으니 불쌍히 여겨서 소송을 취하해 줄 수 없겠느냐고 호소하였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들어 줄 리가 없다. 입에 물린 먹이를 놓아줄 리가 없다. 놓아 주고 싶어도 장달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고 장달호가 허락을 해도 놓아주지 말자고 할 판인데 피고가 애걸복걸하다니...염치가 없다.
“보증을 섰으면 책임을 져야지...”
변호사는 싸늘했다. 두말도 하기 싫으니 나가라고 한다.
“변호사 악마한테 걸렸군. 변호사들은 사건을 만들어서 사람을 괴롭히는 악마들이야.”
자초지종 사정을 듣고 있던 회사 동료 L부장은 딱하다는 둣이 한마디 하였다.
전태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하고 다급했다. 변호사를 구해야겠는데 아는 사람이 없으니 누구를 찾아가나? 밤새도록 궁리한 끝에 그나마 법률계통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전에 20만원 돈 봉투를 건네 준 검찰서기 K뿐이니 그에게 물어봐야겠다고 하면서 이튿날 전화를 걸었다.
“K씨요? 나, 전에 만났던 전태영이요. 정수자가 고소한 사기사건 피의자였던... ”
“아, 전태영씨. 그 동안 잘 지냈어요? 근데 무슨 일이요?”
K는 의외로 공손하고 친절했다.
“다름이 아니고 좀 뵈었으면 해서요.”
이번에는 K가 가슴이 덜컹했다. 전에 돈 먹은 것을 가지고 이 친구가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사건이 끝났으니 잊을 만도 한데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오다니... 어찌됐던 만나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
“예, 그러지요.”
전태영과 약속한 다방에 나갔다.
“정수자가 민사소송을 걸어 왔어요. 혹시 아는 변호사 있어요? 착실하고 소송 잘하는 사람말이요.”
K는 그 사건이 그냥 있어도 기소가 되지 못할 정도의 경미하고 증거도 불충분한 사건인지라, 혹시나 이 친구가 그 후에 다른데 알아보고 뇌물로 준 돈 20만원이 아까워서 도로 게워내라 하지 않을지... 아니면 뇌물을 받아먹은 죄를 물어 모가지를 떼겠다고 공갈을 치지 않을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지 몰라 조마조마 하던 차에 민사소송이야기를 하니 기분이 확 풀려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큰 소리로 우쭐대었다.
“아, 있고말고요.”
이내 목소리를 푹 낮추어 귀에 대고 말한다.
“몇 달 전에 부장판사를 하다가 퇴직한 P변호사를 잘 알지요. 우리 고향 사람인데... 퇴직한지 얼마 안 되어 어느 판사든지 전관예우를 안 해 줄 수 없는 거물급 변호사요. 어떤 사건이든 승소 확률이 100%지요. 수임료는 조금 비싸겠지만... ”
“예, 고맙습니다. 잘 좀 부탁해 주세요. 승소하면 한 턱 낼께요.”
K는 기분이 좋았다. P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을 끌어다 준 생색을 내고 그의 사무장한테서 점심 얻어먹고 승소하면 전태영으로부터 사례금도 받고... 꿩 먹고 알 먹고..땅 짚고 헤엄치고... 호박이 굴러 떨어졌다.
전태영은 모처럼 구세주를 만난 듯이 P변호사를 찾아 갔다.
눈알이 부리부리하고 대머리가 훤한 P변호사가 엄숙하게 앉아 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건의 내용을 듣고 소장을 대강 읽어 본 끝에 대머리가 한다는 말이 가관이다.
“거 양도증.2를 왜 내 주었어요?”
어이가 없다. 양도증.2를 내어 주었기 때문에 소송이 걸려왔고 소송이 걸려 왔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자기를 찾아 온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피의자 다루듯이 양도증.2를 내어준 행위를 꾸짖는다. 이 무슨 논리인가? 모순 아닌가? 자가당착 아닌가? 소송을 처음해 보는 전태영은 당황했지만 변호사들은 의례 그러려니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봐! 당신, 변호사면 다야? 손님한테 그 무슨 망발이야? 양도증.2를 내어주지 않았더라면 소송도 없고 이 자리에 당신과 마주 앉아 있을 일도 없을 것 아냐? 그러고 내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내게 호통을 치고 뭐하는 짓이야. 당장 착수금 돌려줘. 내 참 더러워서...”라고 내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사무장에게 착수금을 내고 본격적으로 사건을 다루는 첫날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N지방법원 법정이다.
원고 정수자의 변호사 C가 정수자의 매제인 윤건중을 증인으로 세워 놓고 묻는다.
“증인은 양도증.1과 양도증.2를 알고 있나요?”
“예, 원고 정수자가 은행대출을 받을 때 피고 김동채가 대출금을 갚지 못하면 편의점 점포의 임대보증금과 동생 김우채 소유의 참기름가게를 연대보증을 선 피고 전태영에게 양도하겠다고 써 준 양도증들입니다.”
윤건중이 ‘연대보증’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이어서 전태영의 변호사 P가
“증인은 피고 전태영이 대출금에 관하여 책임지겠다고 말한 것을 직접 들었나요?”
‘직접’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물었다.
“직접 들은 것은 아닙니다.”
“양도증.1과 2를 작성해서 교부하는 것을 직접 보았나요?”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처형인 원고로부터 그 전에 상의를 받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증인도 김동채가 자기 이름으로 편의점을 낼 때 담보를 제공하고 대출금을 받아 쓴 적이 있지요?”
“예.”
“양도증.2는 그 때 증인의 대출에 관련하여 작성된 것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저는 그런 서류를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판사가 보충 신문을 하였다.
“원고가 피고 김동채의 처 박연지에게 담보를 제공한 것은 피고 전태영을 믿고 제공한 것이며, 피고 전태영은 변제담보조로 김동채로부터 양도증.2를 받아 두었다가 원고에게 준 것이라고 알고 있는가요?”
“예.”
증인 신문이 끝났다.
녹음테이프를 검증하는 날이 왔다. 원고측 변호사 C와 피고 전태영의 변호사 P가 민사 1부 판사실에서 녹취록을 보면서 원고와 피고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다. 전태영이 미리 녹음하여 두었다가 형사 고발이 되자마자 경찰에 제출하였던 녹취록이다. 영등포에 있는 속기사에게 의뢰하여 작성해 두기를 잘 했지. 현이 엄마인 원고 정수자의 음성이 또렷이 들린다.
“전부장님이야 사기꾼을 소개해 준 것밖에 잘못이 없지만 우리는 그 사기꾼 땜에 1,400만원이나 날렸으니 어쩌겠어요? 원금과 이자를 한 푼도 갚지 않아 1,400만원이나 된단 말이예요. 제가 그만 두라고 한들 남편이 그만 둘 리도 없고요...”
쌍방의 대리인들은 이 전화 대화의 육성이 원고의 육성인 점이 틀림없다고 확인하였다.
“불기소처분으로 결말 난 형사사건에서도 제가 소개만 하여 주었을 뿐 보증선 것이 아니며 김동채와 짜고 사기를 친 것이 아니라고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것도 증거로 내 놔 봐야 되지 않겠어요?”
전태영은 형사사건 기록의 서증조사까지 신청해 보라고 변호사 P에게 요구했다. 몇 달 전 부장판사로 있다가 퇴직한 P는 자기가 전관예우를 받고 있어 자존심이 상했는지 거기까지는 안 해도 된다고 짜증을 내었다. 그러나 전태영은 달랐다. 저러다가 패소가 되면 어쩌려고 매사 일을 게을리 하는가? 사건 의뢰인에게 친절미라고는 터럭만큼도 없고 성의 없는 답변서를 피동적으로 끄적거려 내고 있으니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전태영의 거듭된 성화에 마지못해서 서증조사까지 하긴 했지만 얼마나 성의 있게 임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엎치락뒤치락 10개월의 공판 끝에 1심 판결이 떨어졌다.
『판결주문:
1.피고 전태영 김동채 등은 연대하여 원고에게 금 1,400만원과 이에 대하여 완제에 이르기까지의 이자를 지급하라.
2.제 1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이유: 변론의 전 취지를 종합하면 피고 김동채의 채무를 피고 전태영이 연대보증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이에 반하는 형사사건 조서, 녹취록 등은 위 인증에 방해가 되지 아니하고 그 외에 움직일 자료가 없다.』
김동채가 먹고 떨어진 원금은 800만원에 불과하지만 그 동안의 이자와 비용 등 원고의 피해액은 1,400만원이나 되었다.
변호사 P의 자만심과 성의 없는 변론이 철퇴를 맞은 것이다.
전태영은 앞이 캄캄하였다. P의 거만하고 성의 없는 태도가 처음부터 못마땅하였지만 설마 엊그제같이 부장판사로 있던 변호사라고 하니 전관예우로라도 전액 패소까지야 되겠는가? 믿어 보자 하였던 것이 청천벽력 같이 전액 패소의 현실로 떨어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이 아득하다.
“아니, 변론을 어떻게 했길래 완전 패소 당했어요? 보증한 사실이 없는데 보증 책임이 떨어지다니 말이나 돼요?”
지금까지 불친절하고 성의 없이 대하던 P를 생각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소송이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거만한 P놈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이 능청스럽게 한마디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눈은 창밖을 내다보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머리통을 무쇠방망이로 퍽! 내리 치고 싶다.
방문을 “꽝” 닫고 나오니 사무장과 여직원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미안해하고 있다. 그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정수자는 판결문이 떨어지자 얼씨구나! 하면서 바로 가압류한 전태영의 집에 대하여 강제경매 신청을 하였다. 전태영이 항소하여 판결이 뒤집히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잃은 금액을 찾고 보자는 심사였다. 또한 전태영에 대한 화풀이도 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이었다.
『 부동산 강제 경매 개시 결정
청구금액 1,400만원의 변제에 충당하기 위하여 구상금 청구사건의 집행력있는 정본에 의한 채권자의 신청이 있으므로 채무자 소유의 부동산에 대한 강제 경매 절차를 개시하고 이를 압류한다. 』
경매사건은 본안소송과는 달리 별도의 경매법정에서 별도의 방법으로 진행된다. 대상 물건을 감정하여 최저경매가격과 경매기일을 공고하고 쌍방 당사자에게 통지한다. 경매법정은 시장바닥이다. 빚에 몰려 지키지 못하고 내 버려진 부동산이 강변의 자갈처럼 널려 있다. 헐값에 남의 재산을 손에 넣으려는 사람들이 아귀다툼하는 전투장이다. 피땀 흘려 마련한 소중한 재산이 헐값에 팔려나가는 장면을 보는 채무자들의 쓰라린 심정은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한 푼이라도 더 싸게 사려는 하이에나들이 으르렁거리며 다투고 있다. 채무자들의 내장을 파먹고 있다.
경매개시 6개월 만에 전태영의 집이 경락되었다.
“아니, 웬 일이야?”
경매기일통지서에 기재되어 있는 가격으로 낙찰된 것이 아니고 그보다 20% 낮은 가격으로 낙찰된 것이다. 보통 최초의 가격으로 낙찰이 되지 않으면 두 번째부터는 20%씩 감액하여 최저경매가격을 통지하는데 이번은 3회 차 경매이므로 40% 감액이 맞다. 그런데 법원 실무자가 실수하여 20%가 감액된 지난번 가격으로 통지해 왔으니 법원 실무를 알지 못하는 일반인은 그 가격을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전태영은 그 가격으로는 경락될 가능성이 전혀 없으므로 안심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40%가 감액된 가격으로 낙찰이 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경매가 끝나면 강제집행정지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공탁금까지 준비해 두고 있던 차에 경락을 당했으니 어이가 없다. 옆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바로 이의신청을 하였다. 법원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의신청을 받아들여 경락허가를 보류하고 1,500만원을 공탁하는 조건으로 항소심이 끝날 때 까지 강제집행을 정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전태영은 본안 소송에 진이 빠져 죽을 지경인데 재수가 없으려니 원! 생각지도 않은 법원 말단 공무원 나부랭이까지 사람을 괴롭힌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 일로 몇 번을 더 법원에 들락거려야 했다.
4. 반전
“이거 금액이 틀리지 않아? 김동채가 정수자 집을 잡히고 대출받아 쓴 것은 800만원인데 양도증.2에는 ‘700만원을 융자 받을 때’라고 되어 있으니 이 건 다른 대출에 관한 것이야.”
전태영은 깜짝 놀랐다.
패소당하여 안절부절못하던 참이라 머리도 식힐 겸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어라. 속상한데 쐬주나 한 잔 해야지’ 하며 시청에 근무하는 불알친구 영수를 불러내어 북창동 대포집에서 한 잔 하던 중이었다. 장달호와의 관계를 소상히 얘기하고 정수자와의 소송서류를 보여 주었는데 대강 훑어보던 영수가 느닷없이 하는 말이었다.
“아니 정말 금액이 다르네?”
금액이 다를 뿐만 아니라 다시 보니 차주도 다르다. 실제로는 ‘차주 박연지, 금액 800만원’인데 양도증.2에는 ‘차주 김동채, 금액 700만원’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정수자와 싸운 것은 룰에 맞지 않은 게임이었다. 정수자는 남의 창을 가지고 공격해 왔는데 전태영은 그것도 모르고 허술한 방패를 들고 밤새도록 고전을 한 것이다.
그 잘난 변호사 P도 몰랐고 정수자도 금액까지는 보지를 않고 양도증.2에 있는 전태영이란 이름만 물고 늘어진 것이었다. 소송은 증거 서류가 말하는 것이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서류가 어떻게 작성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서류에 적힌 내용대로 판결하는 것이다. 양도증.2는 정수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차주와 금액은 윤건중 대출에 일치한다. 전태영은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아니다. 무조건 소송에 이겨야 한다.
“당장 항소해야지.”
전태영은 술이 확 깨면서 날아 갈 듯이 기뻤다.
“야, 영수야 고맙다. 네가 변호사보다 훨씬 낫구나. 술은 실컷 마셔라. 오늘 술값은 아무리 많아도 내가 쏜다.”
영수도 우쭐하였다. 술 먹다가 대수롭지 않게 발견한 금액인데 상황을 확 바꾸어 놓은 것이다. 바둑 명인이 아무리 머리를 짜 내도 발견하지 못하는 묘수를 옆에서 관전하던 하수가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다. 훈수는 뺨 맞아가며 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두면 모르지만 옆에서 관전하면 수가 잘 보이게 마련이다.
넥타이를 좌우로 흔들어 바로 잡은 전태영은 사무장의 뒤를 따라 L변호사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영수가 직장동료로부터 소송 잘 하는 변호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전태영에게 가보라고 하여 찾아 온 것이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희멀건 얼굴에 품위 있게 안경을 눌러 썬 L변호사는 50대 초반의 한참 나이였다. 반갑게 인사하는 것부터가 1심에서 함께 했던 P와는 달랐다. 친절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니 반가운 것은 당연하지만 그냥 당연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층 높이 보였다.
“1심에서 패소한 것을 항소심에서 뒤집기는 어렵습니다마는 보증을 섰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해 볼만 합니다. 같이 힘을 합쳐 최선을 다해 봅시다. 사소한 것이라도 달리 자료가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말해 주세요.”
사건기록을 대강 훑어 보고나서 차분하게 소감을 얘기한다.
말만 들어도 고맙다. 이래야지. 변호사도 인간인데 따뜻한 맛이 있어야지 전에 만난 P놈은 변호사도 아니야. 변호사이기 전에 인간이 먼저 되어야지. 전태영은 이미 승소한 기분이었다.
『 항소장
원고 정수자,
피고 전태영
항소취지 : 피고의 패소부분을 취소하고 소송비용은 1,2심 모두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
항소이유 : 양도증.2는 본 건 대출에 앞서 소외 윤건중의 담보물로 김동채가 대출을 받을 때 그 대출에 관련하여 작성한 문서인데 원심은 본 건 증거로 채택함으로서 사실인증을 잘못하였음. 』
L변호사가 작성한 항소장을 보고 전태영은 속이 시원하였다. 지난 1년간 가슴을 꽉 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덩이를 들어낸 것 같고 가려워 긁고 싶었던 곳을 꼭 집어서 긁어 주니 날아 갈 것 같았다.
이어서 재판기일이 잡히자 L변호사는 준비서면을 날렸다.
『정수자는 형사고발을 할 때 ‘전태영은 김동채가 상환능력이 없음을 알면서도 둘이서 짜고 사기를 쳤다’고 해 놓고, 이번에는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을 연대보증 했다’고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을 빚보증할 바보가 어디 있는가?』
L변호사의 논리가 명백하고 단단하다. 누구도 다른 자료 없이는 이 논리를 깨트릴 수가 없다. 그러나 실은 형사사건에서 정수자는 ‘전태영은 김동채가 상환능력이 없는 줄 알면서 보증까지 서 주었다.’고 하였는데 L변호사는 이를 역으로 이용하였다. 정수자가 사기죄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사리에 맞지 않는 억지 논리를 주장한데 대하여 L변호사는 그 억지를 깨트리면서 보증과 사기죄를 무산시켜버린 것이다. 소송은 일종의 기술이다. 있는 사실은 감추어 두고 없는 사실은 만들어 내고... 창을 어떻게 휘두르느냐 방패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싸움이다. 그 후 몇 달 동안의 재판을 거치면서 L변호사는 준비서면을 2번이나 더 내었다.
『5년전 정수자가 피고로부터 양도증.2를 처음 받아 소외 윤건중에게 넘겨주고 윤건중은 자기의 대출건에 관련하여 양도증.2를 이용하여 ‘부동산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신청을 하여 금 220만원을 받아 내고 취하해 준 사실이 있고 그 후 원고 정수자도 피고의 명의를 사용하여 김우채를 상대로 ‘점포 명도 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가 피고의 보증사실을 입증할 수 없어 취하한 사실이 있다. 이런 사실들을 보더라도 양도증.2는 본건 소송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소외 윤건중의 대출에 관련된 문서임이 명백하다.』
『양도증.2는 문자 그대로 700만원에 관한 문서이지 본건 원고의 800만원과는 숫자가 맞지 않다. 700만원은 소외 윤건중의 대출 때 김동채가 쓴 금액이다. 윤건중이 자기의 융자 건에 관련하여 자필로 작성하여 가지고 와서 김동채에게 강요함으로 김동채는 동생 김우채의 날인을 받아다 준 것에 불과하며 전태영이 책임지겠다는 내용은커녕 개입한 흔적도 없다.』
또한 L변호사는 김동채의 진술서를 받아 재판부에 제출하고 쐐기를 박았다.
『 진술서
본인은 윤건중 소유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하고 은행으로부터 1,700만원을 융자받아 그 중 1,000만원은 윤건중이 쓰고 나머지 700만원을 본인이 사용한 사실이 있는데 융자에 앞서 전태영에게 본인의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하니 전태영이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라고 하면서 한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면 입회인이라도 되어 달라고 간청하니 전태영이 각서를 대필 작성하면서 입회인으로 날인하여 주었습니다. 융자 후 윤건중은 무엇이라도 믿을 만한 물건을 제공해 달라고 요구하므로 본인은 봉천동 점포와 동생 김우채의 참기름가게 점포를 제공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윤건중이 양도증.1과 양도증.2를 써 가지고 와서 날인해 달라고 하여 본인과 동생이 날인하여 주었습니다. 피고 전태영은 본인을 위하여 보증한 사실이 없고, 보증할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후 본인의 처 박연지 명의로 대출을 받을 때 정수자 소유의 부동산을 담보로 제공하고 1,600만원을 융자 받아 각각 800만원씩 나누어 가졌는데, 그 때는 전태영과 의논한 사실조차 없으므로 전태영이 보증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양도증.1과 양도증.2는 정수자 대출과는 무관한 서류입니다.
진술인 김동채 (인) 』
양도증.1과 양도증.2는 김동채가 직접 자필로 작성하여 정수자와 전태영에게 준 것인데 지금은 윤건중이 작성했다고 진술한다. 김동채는 융자가 급한 나머지 깊이 생각지도 않고 닥치는 대로 작성하여 주었던 자기의 입장을 변호라도 하듯이 윤건중에게 뒤집어씌우는가 하면 신세를 진 전태영을 유리하게 해 주고 싶어 한 것이다. 전태영도 양도증.2가 작성된 경위를 따질 필요가 없다. 무조건 유리한 쪽으로 가는 것이 옳다.
항소심은 14개월 만에 종결되어 판결이 떨어졌다.
『주문:
1.원심판결중 피고의 패소부분을 취소하고
2.소송비용은 1,2심 모두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
이유: 변론의 전 취지를 종합하면 피고 김동채의 채무를 피고 전태영이 연대보증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원고가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믿기 어렵고 원고의 주장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
전태영은 법정을 나서는 L변호사의 두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면서 “수고 하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를 연발하였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고통이 심할수록 승리의 기쁨은 몇 배로 증폭하기 마련이다. 오늘의 기쁨이 있기 위하여 지난 2년간 그렇게도 머리를 할퀴고 쥐어뜯는 아픔이 있었던가?
바로 영수를 불러내어 한잔 해야지...
“야, 너 오늘 집에 가지 말고 당장 이리로 와!”
“지금 근무 중인데... 무슨 일이야?”
“아, 퇴근시간 다 됐쟎아? 와 보면 알아...”
영수와 한잔 하는 것이 이다지도 즐거울 줄은 몰랐다. 영수가 아니었다면 2심에서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날 저녁 영수와 함께 코가 비틀어지게 마시고 새벽 1시가 넘어 영수를 택시에 태워 보내주고 집에 온 전태영은 오랜만에 꿀 같은 잠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승리에 도취되어 기뻐하는 것도 잠시, 아직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 정수자가 B변호사를 내세워 대법원에 상고 허가를 신청한 것이었다. B변호사는 몇 달 전 까지 대법원판사로 있던 사람이다.
“법에 관한 일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거물급 법호사인데...이분한테 사건을 맡길 정도면 수임료는 1,000만 원쯤 들었을 거야. 골치 아프게 생겼는데... ”
L변호사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흥, 두고 보아야지... 대법원판사고 뭐고... 전관예우 한번 받아 보라지... ”
전태영은 오히려 태연하였다. 재판은 1심에서 2심까지는 사실관계를 따지는 사실심이고 3심은 법리만 따지는 법률심이기 때문에 2심에서 끝난 사실관계를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소송을 당하여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공부하고 생각한 결과 나름대로 얼치기 변호사쯤은 되었다고 자부하게 되었으니 ‘까짓것! 대법원판사하고 한번 붙어 보자’고 생각하며 용기가 솟구쳤다. 1심에서 패소한 것을 2심에서 뒤집기는 10~20%의 확률밖에 없는데 이것을 이겼으니 3심은 90~100%의 승소확률이 있지 아니한가?
『 상고 허가 신청서
신청인(원고) 정수자
피신청인(피고) 전태영
신청취지 : 상고를 허가하고 소송비용은 모두 피고의 부담으로 한다.
신청이유 : 양도증.2로 보아 김동채가 융자금을 갚지 못하여 정수자가 대위변제하고 구상권을 획득하는 경우, 전태영이 구상금채무를 이행하기로 하는 보증계약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소외 윤건중의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이를 믿기 어렵다고 하였음으로 이는 채증법에 반한다. 』
B변호사의 상소이유가 웃긴다. 원고의 매제인 윤건중이 증인으로 나와서 한 말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아 채증법칙에 반한다고? 양도증.2를 작성하는 것은 물론, 건네주는 것도 본 적이 없고 그나마 몇 년 후에 원고로부터 들어서 안다고 하였는데, 그 증언을 증거로 채택했어야 옳은가? 이해당사자가 하는 증언은 증거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나마 들어서 아는 사실을 증거로 채택할 수 있는가? 일반 상식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은 주장을 전직 대법원판사라는 사람이 하고 있다.
돈만 아는 변호사! 대법원판사 했던 사람도 별수 없구나. 사리에 맞지 않고 이길 승산이 없으면 사건을 맡지 말아야지... 안 될 줄 뻔히 알면서...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작자 같으니라고...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하는 줄 모르고...
전태영은 즉시 답변서를 썼다.
<양도증.2는 이 소송에 앞서 증인 윤건중이 자기의 대출건에 관련하여 사용한 서류이다. 피고의 명의를 도용하여 소외 김우채를 상대로 ‘부동산 이전금지 가처분신청’을 하여 금 220만원을 받아내고 취하해 준 사실이 있다. 또한 원고 정수자도 이 양도증.2를 이용하여 김우채를 상대로 ‘부동산 명도 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가 피고의 보증사실을 입증할 수 없어 취하한 사실이 있다. 이 서류는 본건 소송과는 관계가 없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이 서류로는 피고의 보증사실을 증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당사자인 윤건중의 증언도 증거가 될 수 없다.>
한 달 만에 대법원 결정이 나왔다.
『주문 ; 상고허가 신청을 기각한다.』
전직 대법원판사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긴 전태영이지만 2심에서 이겼을 때보다 감격스럽지 않았다. 이길 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삐리리링”
“여보세요?”
“야, 태영아! 어찌됐어?”
“어찌되긴... 당연히 이겼지... ”
“축하한다! 전직 대법원판사를 꺾었으니 너도 대법원판사야! 승소 기념으로 내일 등산이나 가자!”
영수도 몹시 기뻐한다. 역시 죽마고우다.
이튿날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만나 발걸음도 가볍게 백운대로 향했다. 2월 중순 코발트색 하늘은 호수 같이 깊고 잔잔하다. 그 속으로 온 몸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사박사박 눈 밟는 소리만 적막을 깨고 매우 춥다. 하루재에 오르니 칼바람이 코를 싹둑 베고 산새 한 마리가 휙 날아가며 길을 안내한다. 인수봉이 하얀 눈에 덮혀 있다. 눈이 아니라도 인수봉은 언제나 하얀 바위 한 덩어리로 된 크고 아름다운 암봉이다. 코끝이 시리지만 몸은 벌써 땀으로 젖어 있다. 싸늘한 공기를 깊게 들이 마시면서 오랫동안 억눌렸던 기분을 확 풀어 본다. 이 좋은 산과 자연을 지척에 두고 뭐가 모자라 사람들은 서로 아웅다웅하며 싸우는지...소송이 뭔지...
“태영아, 여기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가자”
“지금부터 백운대까지는 험한 바위길이고... 눈이랑 얼음이랑 완전히 덮혀 있어... 미끄럽겠지?”
“너, 작년에 발 삐인거...괜찮나?”
“몇 달 침 맞고 다 나았다. 그 장달호 놈한테 당한 것도 이기고 발도 나았고...다 네 덕분이다.”
백운산장에 도착하니 몇몇 등산객이 뜨거운 라면을 후룩후룩 먹고 있다.
컴컴한 실내에 여러 가지 기념물들이 걸려 있고 벽과 바닥이 돌이라 아무리 많은 등산객이 왔다가도 닳지 않고 몇 백 년은 가겠다. 이 산장은 1924년에 터를 잡았는데 6.25때 파손되었다가 1960년에 재건축한 유서 깊은 산장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깃든 정다운 휴식처이며 춘하추동 탐방객의 발길이 끊길 날이 없는 산악인들의 메카이다.
가파른 바위를 기어가듯이 10여분 올라가면 위문이 뻥 뚫려 있다. 허공에 전신 실루엣을 일렁이며 문을 통과하여 조금 내려가면 하산길이 두 갈래로 나 있는데 직진하여 산성입구로 갈 수도 있고 왼쪽으로 돌아 만경대 밑을 파고 나가 노적봉, 용암문을 지나 대동문으로 나갈 수 있다. 위문을 통과하지 않고 성벽 밑으로 우회전하여 바위를 20여분 더 올라가면 마침내 백운대 꼭지 점에 이른다. 쇠줄을 잡고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어 오를 때에는 헐떡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산행은 고될수록 산행후의 쾌감은 배가한다. 힘이 들어야 제 맛이다.
백운대 정상에 서면 인수봉과 만경대가 백운대와 3각을 이루며 키 재기를 하고 그 사이로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만경대를 왼쪽으로 밀어 놓고 노적봉과 멀리 의상봉능선을 끌어당겨 본다. 의상봉능선은 천천히 산성입구로 내려서는데 백운대 발밑 염초암릉과 원효봉은 가파르게 미끄러져 산성입구에 머리를 박는다. 그 장쾌한 파노라마를 보면 누구나 치솟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렵다.
“저~ 실례지만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태영이 돌아보니 예쁜 외국인 아가씨가 카메라를 건네준다. 말만 들으면 외국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한국말을 잘한다. 2명이 인수봉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고 쌩긋 웃는다.
“어디서 오셨어요?”
“벨기에에서 왔는데 내일 홍콩으로 떠나요.”
영수와 태영이도 동서남북으로 사진을 찍으며 모든 시름을 날려 버렸다.
이제 강제경매사건도 자동적으로 끝났으니 공탁금을 찾고 소송비용을 받아 내야겠다.
확정증명을 받아 붙이고 1,500만원 공탁금에 대하여 담보취소 신청을 하니 이튿날 결정이 났다. 담보취소 확정증명을 받아 10개월 동안 잠겨있던 공탁금을 은행에서 찾았다. 강제경매개시 등기도 말소해야 한다. 15개월간 집 등기부에 거머리같이 붙어 있던 흉물을 떼어내야 한다.
『별지목록 기재 부동산에 대한 경매개시결정을 취소한다.』는 주문이 있는 결정문을 받아 들고 등기소에 가니 이 또한 무슨 변고인가? 당연히 붙어 있어야 할 별지 목록이 없다. 다시 법원에 가서 <결정 경정 신청>을 내었다. 별지 목록을 삽입해 달라는 신청이다. 『신청인의 경정신청은 그 이유가 있으므로 원 결정에 별지 목록을 첨부한다.』라는 결정문을 받았다. 별지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이 우라질 놈들! 월급 받고 밥 쳐 먹는 놈들이 이렇게 사람을 골탕 먹여?’ 원고 정수자보다 이 첨부물을 붙이지 않고 결정문을 준 법원 서기나 판사 놈이 더 밉다. 정수자는 큰돈을 잃었으니 악착같이 대 들어도 이해가 가지만 이 썩은 공무원들은 직무를 소홀히 하여 국민을 욕보이고도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이 뭐 해오라 뭐가 잘못됐다 하면서 골탕을 먹이고 있다. 한 번에 끝날 일을 두 번 세 번 오게 한다. 사리에 밝고 온화한 성격의 전태영이지만 저절로 욕이 나오고 치가 떨렸다. 오랜 소송으로 성격이 거칠어진 것인가?
<소송비용액 확정결정 신청>을 내었다. 변호사보수액, 각종 인지대, 서증조사비용, 녹음테이프 작성 및 검정비용, 증인출석 비용 등 400만원이 넘었다. 정수자는 소송비용이 과다 청구되었다는 답변서를 보내면서 시간을 끌고 있어 순순히 내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면 할 수 없지.”
전태영은 정수자의 집에 대하여 <부동산 가압류 신청>을 내었다. 2년 전에 윤건중과 공동으로 자기 집을 가압류한 것과 꼭 같이 한 것이다. 이번에는 작은 금액이지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니 즐거우면서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닌가? 소송비용이 확정되면 바로 강제경매신청을 할 참이다. 여러 해 법정투쟁을 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성질까지 알게 된 입장이라 정수자도 달리 도리가 없음을 알고 소송비용을 공탁해버리고 꼬리를 감추었다.
전태영은 정수자를 완전 KO시키고 떠내려가던 집을 건져내어 공탁금도 찾고 경매개시 등기도 말소시켰다. 소송비용도 받아 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집은 가압류상태에 있다. 정수자가 윤건중과 공동으로 가압류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윤건중에게 제소명령을 해 달라고 법원에 <제소명령신청서>를 내었다.
5. 겹친 파도
윤건중과 정수자는 김동채 부부의 대출에 담보제공자로 걸려들어 각각 1,500만원과 1,400만원을 날렸으니 분하여 이가 갈렸다. 정수자는 제부인 윤건중이 서슴지 않고 먼저 대출을 받아쓰는 것을 보고 덩달아 담보제공을 하였다가 걸려들었지 않은가? 그들이 도매금으로 한 줄에 꿰어 피해를 보게 된 것이 벌써 6년 전의 일이 되었다. 그동안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서고 최근 정수자의 소송마저도 2년여의 법정투쟁 끝에 패소하였다. 윤건중은 한참 때 여기저기 자신 있게 돈을 끌어 들여 사업을 잘 해 왔으나 김동채에 관해서 만은 큰 손해를 보게 되었고 처형인 정수자 마저 자기를 믿고 따라하다가 역시 큰 손해를 보게 되었으니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윤건중은 앞으로 아무리 더 큰 손해를 볼지언정 여기서 물러 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전태영이 제소명령신청을 해 온 터라 빨리 제소하지 않으면 가압류한 전태영의 집이 자동으로 풀려 버릴 것 같다.
“에~라, 이왕 내킨 김에 끝까지 가 보자.”
전태영의 집을 그냥 풀어주기에는 그동안 버린 돈과 시간이 아까웠다. 정수자의 분풀이를 해 주기 위해서라도 소송을 걸어야겠다. 아무 실익이 없는 김동채 형제는 빼고 오직 전태영의 보증채무만 물고 늘어지기로 했다.
『 소장
원고: 윤건중, 소송대리인: 변호사 K
피고: 전태영
보증채무금 청구의 소
청구취지 : 1. 피고는 원고에게 금 1,500만원과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
2. 소송비용은 피고의 부담으로 한다.
3. 위 1항에 대하여 가집행 할 수 있다.
청구원인 : 원고는 차주 김동채를 만나거나 인사한 사실도 없이 피고의 말만 믿고 담보제공을 하여 1,700만원을 대출받아 원고가 1,000만원, 김동채가 700만원을 썼다. 김동채의 700만원에 대하여 이자 800만원이 발생하여 원고는 총 1,500만원을 대위변제하여 손해를 보게 되었다. 이 대출에 관련하여 피고 전태영은 김동채의 원금 700만원을 보증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차주 김동채의 동생 김우채의 양도증.2를 받아 두었다. 그 후 피고는 양도증.2를 근거로 김우채를 피고로 하여 ‘부동산 이전금지 가처분신청’과 ‘부동산 명도 청구의 소’를 제기한 사실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피고의 보증사실은 명백하다.
입증방법 : 양도증.2 』
기가 찰 노릇이다. 양도증.2를 근거로 김우채를 피고로 하여 ‘부동산 이전금지 가처분신청’을 한 것은 피고의 이름을 빌려 자기가 신청한 것이며 금 220만원을 받아 내고 취하했던 것인데 철면피하게도 이를 피고가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피고의 보증 책임을 입증하는데 써 먹고 있다. 또한 ‘부동산 명도 청구의 소’는 처형인 정수자가 역시 피고의 이름으로 김우채의 점포를 탈취하려고 하였다가 취하한 사건인데 이것도 피고가 했다고 하면서 피고의 보증을 입증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전태영은 그들이 손해는 보았으나 재력은 튼튼하니 이를 갈고 끝까지 공격해 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다만, 하나뿐인 증거물 양도증.2를 동시에 써 먹을 수는 없으니 먼저 정수자가 쓰게 된 것 뿐이다.
전태영도 할 수 없이 다시 L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했다.
이번 윤건중 소송에는 정수자가 증인으로 나섰다. 정수자의 소송에서는 윤건중이 증인으로 나오고 윤건중 소송에서는 정수자가 나온 것이다. 유일한 증거물인 양도증.2를 이용하여 처형과 제부가 교대로 소송을 내고 서로 바꾸어 증인으로 나섰다. 양도증.2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는 것이다.
“좋다, 엉터리 증거물로 여기 걸었다 저기 걸었다 하는데 귀걸이도 아니고 코걸이도 아닌걸 보여 주겠다.”
전태영도 독해졌다. 그 동안 몇 년의 소송 와중에서 알만치 알았고 강해질 만치 강해졌다. 변호사와 함께 머리를 짜 내어 증인 정수자에 대한 반대신문사항을 작성하고 변호사는 차분하게 신문하였다. 정수자는 윤건중의 변호사가 묻는 말에는 마음 놓고 “예”라고 답해도 좋으나 전태영측의 반대 신문에는 함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만약 거짓말을 하면 위증죄로 고발을 당하게 되니 몹시 신경이 쓰였다.
<1. 증인은 제부인 원고를 김동채에게 소개하여 대출을 받게 하였는가?
“예.”
2. 대출당시 증인과 원고는 양도증.2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 서류는 원고 윤건중의 필적이 아닌가?
“그 당시는 양도증.2의 존재를 몰랐고 필적은 지금도 모릅니다.”
3. 원고는 피고의 이름을 빌려 소외 김우채를 상대로 ‘점유이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여 금 220만원을 받아낸 사실이 있고, 증인도 피고의 이름을 빌려 ‘점포명도소송’을 제기하였다가 취하한 사실이 있다는데 그런가?
“예.”
4. 그렇다면 양도증.2를 가지고 증인과 원고가 번갈아 가면서 자기의 대출에 관한 서류라고 하면서 이용한 것이 아닌가? -
“-----”
5. 그 후 다시 원고가 이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증인이 먼저 양도증.2를 가지고 피고를 상대로 ‘구상금청구소송’을 하였다가 대법원까지 가서 패소한 사실이 있다는데 그런가?
“예.”
6. 그렇다면 양도증.2는 증인의 대출에 관한 서류라고 주장한 것이 확실한데 오늘 이 소송에서는 원고 윤건중에 관한 서류라고 증언하는 것은 거짓증언이 아닌가? -
“-----”
7. 원고 윤건중도 오늘 이 소송에서 양도증.2는 자기에 관한 서류라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증인의 소송에서 증인의 융자건에 관한 서류라고 증언한 것은 거짓 증언이 아닌가?
“-----” >
정수자는 할 말을 잃고 궁지에 몰렸다. 양도증.2가 윤건중에 관한 서류라고 해도 안 되고 자기의 대출에 관한 서류라고해도 안 되는 상황이다. 자기에 관한 서류라고 소송까지 했던 사람이 윤건중에 관한 서류라고 증언하러 나왔으니 그 자체가 모순이다. 윤건중도 남의 대출에 관한 서류라고 증언했던 사람이 이제 자기에 관한 서류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 또한 모순이다. 윤건중과 정수자는 양도증.2를 각자 자기의 대출에 관한 서류라고 주장하였다가 각자 남의 대출에 관한 서류라고 증언한 결과가 되었다.
전태영과 L변호사는 준비서면으로 다시 반격을 가했다.
<1. 원고는 차주 김동채를 만나거나 인사한 사실도 없이 피고의 말만 믿고 담보제공 하였다고 하는데 초면인 사람을 믿고 거액 대출에 담보를 제공하였다는 말인가?
2. 원고는 처형 정숙자와 공동으로 고발한 형사사건에서 피고는 김동채가 상환능력도 없는 것을 알면서 짜고 사기를 쳤다고 하고서, 이 사건에서는 피고가 김동채의 보증을 섰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피고는 상환능력이 없는 것을 알면서 보증을 섰다는 주장이다.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의 보증을 서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3. 원고는 이 사건 융자당시는 양도증.2가 작성된 것을 몰랐다고 정수자소송에서 증언한 바 있는데 이 사건에서는 자기에 관련된 서류라고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
윤건중과 변호사K도 준비서면을 날렸다.
<1. 원고 윤건중은 피고의 이름을 빌려 소외 김우채를 상대로 ‘점유이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여 금 220만원을 받아낸 사실이 있고, 증인 정수자도 피고의 이름을 빌려 ‘점포명도소송’을 제기하였다가 취하한 사실이 있지만, 2건 모두 원고가 피고에게 보증인으로서 책임질 것을 추궁하자 피고가 자기의 이름으로 소송을 해 보라고 해서 이루어진 사건이므로 피고가 스스로 직접 소송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피고가 보증사실을 인정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2. 피고가 김우채로부터 금 220만원을 받아 원고에게 주었으므로 피고의 보증사실은 확실하다.
3. 피고는 이 사건과 같이 채무자와 담보제공자를 연결하여주고 코미션을 받는데 재미를 붙여왔다. 이 사건에서도 20만원의 사례금을 챙겼다.>
피고 전태영은 자기의 이름으로 김우채 점포의 ‘이전금지 가처분신청’과 ‘명도소송’을 하는 것을 묵인하기는 하였으나 묵인한 것이 보증사실을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또한 금 220만원을 받아 원고에게 전달하기는커녕 김우채로부터 받아낸 사실도 몰랐다고 항변하였다. 판사는 확실한 진실을 가리기 어렵게 되었다. 가장 핵심적인 양도증.2의 작성자와 전달된 경위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양측 주장이 엇갈렸다. 윤건중과 정수자는 처음에는 양도증.2의 존재 자체를 몰랐는데 전태영이 김동채로부터 보증한 근거로 받아 두었다가 노출시켜 전태영→정수자→윤건중의 경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전태영은 김동채의 자필 진술서에 의거하여 양도증.2는 윤건중의 필적으로 윤건중이 작성하여 윤건중→김동채→전태영→정수자→윤건중의 경로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김동채는 정수자 소송의 항소심에서 윤건중이 양도증.2를 작성해 가지고 와서 김우채의 도장을 받아 달라고 해서 받아다 준 것이라는 내용의 진술서를 제출한 바 있다. 판사는 원고측 주장에 무게를 두고 양도증.2가 김동채의 필적으로 작성되어 전태영에게 교부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전태영과 L변호사는 김우채를 증인 신청하였다.
김우채는 자기가 아는 것을 사실대로 말하겠다고 선서를 하고 증언하였다. 원고 대리인과 피고 대리인이 교대로 신문하고 법원은 증언내용을 <증인신문조서>로 확정하였다.
『1. 피고는 소외 정수자에게 김동채를 소개하여 주었고 정수자는 다시 제부인 원고에게 김동채를 소개하여 주었다.
2. 피고는 김동채를 위하여 보증한 사실이 없고 보증을 설 이유도 없었다.
3. 양도증.2는 김동채가 융자를 받은 후 담보제공자의 요구로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날인하여 달라고 하여 증인이 날인하여 주었다. 연대보증이라는 문구가 있으나 그것은 담보제공자측에서 임의로 작성한 것일 뿐 피고나 증인이 보증을 한다는 문서가 아니며 다만 증인은 양도인, 피고는 양수인으로 되어있을 뿐이다. 김동채의 말에 의하면 양도증.2를 실제로 작성한 사람은 원고 윤건중이며 그의 필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4. 그 후 원고가 피고에게 보증 책임을 지라고 하자 피고는 증인의 점포에 대하여 ‘점유 이전금지 가처분신청’을 한 것이다.』
가처분신청은 피고의 묵인아래 원고가 한 것인데 법원은 피고가 직접 한 것으로 조서를 잘못 작성하였다.
윤건중과 변호사K도 피고 전태영을 증인석으로 불러내어 추궁하였다.
<1. 피고는 원고가 은행으로부터 융자 받도록 직접 주선한 사실이 있지요?
“아니요”
2. 피고는 김동채를 원고에게 소개시켜준 사실이 있지요?
“아니요.”
3. 피고는 양도증.2를 김우채로부터 직접 받았지요?
“아니요. 김동채한테서 받았어요.” >
전태영은 어이가 없고 짜증이 났다. 전혀 있지도 않은 사실 20여개를 소설 쓰듯이 엮어서 너저분하게 물어 왔기 때문이다.
지방법원 합의부는 1년의 재판 끝에 판결문을 썼다.
『 판결
주문:
1. 피고는 원고에게 금 1,280만원과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
2. 소송비용은 피고의 부담으로 한다.
3. 위 1항에 대하여 가집행 할 수 있다.
이유:
변론의 전 취지를 종합하면, 피고는 김동채의 대출에 연대보증하였으므로 양도증.1과 양도증.2를 받아 두었다가 양도증.2를 원고 윤건중에게 주면서 대신 소송을 하도록 일임하였다. 원고는 220만원을 받아내어 채무의 일부 변제에 충당하였으므로 나머지 금액을 피고가 책임져야한다. 』
판사는 사실을 오인하고 있다. 양도증.2는 피고 전태영이 받아 두었다가 정수자에게 주었고 양도증.1은 김동채가 정수자에게 직접 준 것인데 판결문에서는 양도증.1과 양도증.2를 모두 피고가 받아 가지고 있다가 원고에게 주었다고 한다. 또한 양도증.2는 윤건중이 임의로 사용한 것을 묵인 것뿐인데 이를 마치 보증을 섰기 때문에 묵인한 것인 양 오인하였다. 소송을 하는 것을 묵인한 것과 보증사실을 묵인한 것을 혼동하고 있다. 양도증.2의 점포 소유자인 김우채가 형의 간청에 못 이겨 양도증에 날인해 주었고 그 잘못으로 220만원을 주면서 타협한 것인데 판사는 이를 피고 전태영 보증의 증거로 삼은 것이다. 전태영의 서명날인은커녕 필적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서류를 가지고 전태영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전태영은 승복할 이유가 없었다.
전태영과 L변호사는 바로 항소장을 쓰고 재판기일이 잡히자 준비서면을 제출하였다.
< 1. 원심은 채증법칙 내지는 경험칙에 위배하고 이유 불비를 범함으로서 피고가 보증한 양 사실을 오인하였다. 즉 원고는 피고가 보증에 관한 문서를 작성한 사실은 없다고 하면서 구두 보증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는데 구두 보증한 일시, 장소를 분명히 대지 못하고 있다. 거액의 대출 보증을 문서가 아닌 구두로 하였다는 상식에 어긋난 주장을 하고 있어 경험칙에 맞지 않다. 한편 양도증.2는 재산을 양도한다는 내용이지 피고가 보증을 선다는 내용이 아니므로 채증법칙에 어긋난다. 또한 원고는 정수자 소송에서 자기의 대출시에는 양도증.2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따라서 양도증.2는 이 소송에 관한 문서가 아님을 원고가 자인하였다.
2. 양도증.2는 당사자가 아닌 제 3자가 작성한 문서인데 그 문언에 따라 보증채무를 져야 한다는 원심판결은 이유불비의 위법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3. 원고가 차주인 김동채의 채무 1,500만원을 전부 대위 변제하였다고 하는데 변제 금액이 얼마인지 그에 관한 증거 서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고의 주장 금액을 전부 인증함으로서 판결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을 범하였다. >
민사소송은 1심에서 이기면 항소심에서 뒤집히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하지만 윤건중은 정수자가 2심에서 패소하는 것을 보고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강력한 N법무법인에 소송을 맡기고 준비서면을 내었다.
<1. 원심이 인증한 제반 사실은 적법하게 채용하여 조사한 서증 및 증인들의 증언과 피고 본인 신문결과에 의하여 명백하며, 양도증.1과 양도증.2의 작성자와 문면에 관한 해석은 법관의 전권에 속하는 사항이므로, 원심의 판결이 채증법칙 내지는 경험칙에 위배하거나 이유 불비의 위법을 범하였다고 볼 수 없다.>
전태영의 L변호사는 반박하는 준비서면을 내었다.
< 1. 양도증.1과 양도증.2는 소외 김동채가 원고의 융자 후에 불안을 느낀 원고의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작성한 문서이다. 그 중 양도증.1은 피고가 본 적도 없고 그런 문서가 있는지도 몰랐다. 양도증.2는 피고 앞으로 작성된 문서이기는 하지만 피고의 의사와 관계없이 제 3의 장소에서 제 3자인 김우채 명의로 작성된 문서이며 ‘귀하가 연대 보증한 건에 관하여’라는 문구가 있으나 역시 피고의 의사와 관계없이 삽입된 문구이므로 법관이 임의로 해석할 법관의 전권에 속하는 사항이 아니다. 따라서 채증법칙에 위배되고 이유 불비의 위법을 범하였다고 아니할 수 없다.
2. 원고와 정수자가 고소한 형사사건에서 피의자 김동채, 박연지 및 피고에 대한 신문조서는 물론 고소인들의 진술서 어디에도 보증에 관한 언급이 없다. >
양도증.2는 애초에 김동채 자필로 작성하고 김우채가 도장을 찍어서 완성된 문서이기는 하지만 이 문서가 윤건중 대출에 관한 것인지 정수자 대출에 관한 것인지조차 불분명하다. 작성자인 김동채 마저도 누구의 대출에 관련해서 작성했다고 딱 불어지게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한 시점에 애매하게 작성했기 때문이다. 두 대출의 중간 시점에서 작성된 것은 분명한데 내용상으로는 금액이 700만원으로 되어 있어 이미 700만원을 받은 윤건중 건에 관련하여 작성했다고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앞으로 받을 정수자 대출에서 정수자를 안심시킬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정수자 대출을 위해서 전태영에게 주었던 것이다. 어디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급한 김에 얼렁뚱땅 작성해서 전태영에게 주고 윤건중과 정수자에게는 온갖 감언이설로 전태영이 보증섰으니 믿으라고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태생부터 애매한 서류 1장이 장장 10년 동안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되어 이 사람의 귀에 붙어 귀걸이가 되었다가 저 사람의 코에 붙어 코걸이가 되었다가 하면서 기쁨을 주는 보물이 되기도 하고 괴로움을 주는 흉기가 되기도 하였다.
윤건중 소송의 항소심은 5개월 만에 쉽게 판결이 났다. 정수자의 1,2,3심 소송과 윤건중의 1심 소송을 거치는 동안 쌍방의 주장과 준비서면, 증인 신문, 민·형사기록 등이 전부 백일하에 드러났고 더 이상 보충할 자료가 없음으로 재판부는 결심을 늦출 필요가 없게 되었다.
『 판결
주문: 1. 원판결중 피고의 패소부분을 취소하고, 그 부분에 해당하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2. 소송비용은 1,2심 모두 원고의 부담으로 한다.
이유: 피고가 소외 김동채의 구상금채무에 대하여 보증한 사실이 있는지 살피건대, 성립에 다툼이 없는 형사사건의 고소인 윤건중과 정수자의 진술조서, 피의자 김동채, 박연지 및 피고에 대한 신문조서, 이 소송의 원고 윤건중에게 제공한 김동채의 각서, 원심증인 김우채의 진술서와 증언, 피고 신문조서 등의 전 취지를 모아 보면,
피고가 차주 김동채를 정수자에게 소개하였고, 정수자는 그를 제부인 원고 윤건중에게 소개하였다. 윤건중이 담보를 제공하고 김동채가 대출을 받았는데 담보제공 조건으로 후일을 위하여 김동채의 주택 전세보증금과 봉천동 편의점을 인수한다는 공증까지 받아 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윤건중은 김동채의 각서를 징구하였다. 그 때 피고에게 김동채의 보증인이 되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피고는 이를 거절하고 입회인으로 날인해 주었다. 양도증.2는 피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작성된 문서이며 보증문서가 아니다. 따라서 피고의 보증사실이 없음으로 원판결은 부당하다. 』
윤건중은 승소한 1심판결이 항소심에서 뒤집히자 악이 바쳐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더 이상 안 될 줄 알면서 상고허가 신청서를 내었다. 이번에는 변호사 선임 없이 직접 ‘신청 이유서’를 썼다. 처형인 정수자가 3심에서 대법원판사 출신의 거물급 변호사를 샀는데도 별수 없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뭔가 깨달은 모양이다.
『 상고허가 신청 이유서
1. 원고는 차주 김동채를 본적도 없는데 피고가 소개를 하여 알게 되었고 피고의 구두보증 약속만 믿고 담보를 제공하였다. 피고는 원고가 융자를 받은 지 한 달 후에 김동채의 화곡동 편의점을 양도한다는 양도증.1과 동생 김우채의 점포를 양도한다는 양도증.2를 받아 놓았는데 이는 보증하였기 때문에 후일을 위해서 받아 놓은 것이다.
2. 원고는 차주 김동채가 대출금을 전혀 변제치 않아 보증인인 피고에게 수차례 책임을 추궁하였는데, 피고는 돈을 받아 줄 테니 나오라고 하여 나갔더니 잘 아는 변호사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김우채 점포의 점유이전금지 가처분 신청을 의뢰하였다. 그러고 그 자리에서 양도증.2를 원고에게 주면서 정수자 건도 이 양도증.2로 해결해 보라고 하였다.
3. 원심은 이와 같은 양도증.2의 작성경위와 원고가 수령하게 된 경위를 면밀히 살피지 아니한 허물이 있어 상고허가를 신청한다. 』
윤건중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모든 자료에서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믿거나 말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써 갈기고 있다.
이에 질세라 전태영도 변호사 선임 없이 직접 <답변서>를 썼다. 지난번 정수자 소송에서 대법원판사 출신 변호사와의 대결에서도 통쾌하게 한 주먹에 날렸는데 이번에 윤건중 쯤이야... 홀가분하였다.
『 답변서
1. 당초 정수자(원고의 처형)가 피고를 통하여 소외 김동채를 소개 받아 자기 소유의 가옥을 담보 제공하여 돈을 융통해 보려고 감정을 시켜 본 결과 이미 다른 은행에 대출이 되어있고 평가액이 적어 포기하고, 대신 제부인 원고를 김동채에게 소개하였다.
2. 원고가 쉽게 융자를 받는 것을 본 정수자는 이미 300만원의 대출이 있는 K은행대출을 급전을 내어 상환하고 김동채의 처 박연지를 차주로 하는 대출에 담보를 제공하여 800만원의 대출을 받아 500만원의 여유자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3. 그 후 1년이 지나 김동채 부부의 편의점이 모두 도산하고 원리금상환이 연체되어 담보물이 경매에 들어가자 원고 등은 당황하여 자기들이 받아 두었던 각서, 양도증.1, 약속어음, 전세계약서 사본, 점포임대차계약서 사본, 공증서 등 각종 서류를 동원하여 피해액을 보충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4. 원고와 정수자는 피고가 준 양도증.2로 김우채의 점포를 양도받으려 하였으나 그마저 실패하자 피고에게 화살을 돌려 피고를 사기죄로 형사 고발하였는데 피고가 무혐의 불기소처분 되자 피고가 건네 준 양도증.2를 서로 번갈아 사용하면서 피고의 보증 책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5. 먼저 정수자 소송에서 피고의 보증 책임이 없음이 확인되자 원고가 배턴을 이어받아 이 소송을 끌고 와서 2심에서 패소하였다.
6. 원고의 상고허가신청 이유서의 기재사항은 모두 허위 날조된 사실들이며 이는 이미 끝난 여러 재판과정에서 허위임이 확인되었다.
7. 원고가 주장하는 핵심은 피고가 구두보증을 했다는 것인데 정작 구두보증을 선 일시, 장소 등에 대해서는 이 시각까지도 석명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융자 직전에 원고, 피고, 김동채 3인이 한자리에서 작성 날인한 김동채의 각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그 각서는 3인의 관계가 가장 확실하게 표현된 움직일 수 없는 물적 증거인 것이다. 』
10일 후 대법원의 결정이 떨어졌다.
『 주문: 상고허가신청을 기각한다. 』
3인의 대법관이 서명한 결정문이다.
“어? 대법관? 작년까지만 해도 대법원판사라고 했는데 이제 대법관으로 바뀌었나?”
전태영은 의아해 하면서도 대법원판사보다는 대법관이 더욱 권위가 있어 보여 기분이 좋았다.
윤건중 정수자의 합동 형사고소 사건과 정수자의 1, 2, 3심, 윤건중의 1, 2, 3심 민사소송의 대 단원이 막을 내린 것이다. 만 5년에 걸친 지루한 법정 공방이 마침표를 찍고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판사 검사 다 해 먹어라’하던 장달호의 목소리가 아직도 전태영의 귀에 쟁쟁한데 그렇게도 무겁던 양도증.2는 깃털보다 가벼운 쓰레기가 되어 가물가물 머~ㄴ 먼 역사 속으로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