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말라기 3장 6절
불변하신 하나님(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했을 때 하나님은 누군가에 의해 피조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사실, 그리고 다른 신들 중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살폈습니다. 또한 그분은 영으로 계시며, 무한하신 분임을 살폈습니다.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시며,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지만 분명 살아 계신 분이라는 사실, 나아가 아니 계신 곳이 없을 정도로 광대하신 분,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분,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울 내용은 불변하신 하나님에 대해서입니다. 이미 영이신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드릴 때 하나님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 외에도 하나님은 단순하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단순하다는 것은 복합적이지 않다는 것이요, 때문에 하나님 안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영으로서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제사장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말씀 뒤에 여호와의 사자를 보낼 것이라는 말씀 가운데 있는 내용입니다. 일단 오늘 본문 앞에 있는 말라기 2장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쉽게 말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 불만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평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악을 행하는 자를 더 좋게 보시고, 기뻐하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분명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데, 그런 하나님이 지금 어디 있느냐?”라고 말했습니다. 말라기 1장에 있는 말씀을 빗대어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처럼 그렇게 불평하고 또 불평했던 겁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어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그 뜻을 실행하는 방식에 있어 우리가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실로 유한은 무한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들, 즉 이방인들을 곧바로 처벌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을 선하게 보신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변하셨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잘못이 있지 자신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들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백성답지 못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것은 구약의 역사가 다 증거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경우 앗수르에 의해 망하게 되었고, 남유다의 경우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선지자를 통하여 끊임없이 회개할 것을 말씀하셨지만, 거기에 귀를 기울인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의 말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여기에만 귀를 기울였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참된 선지자들에 대하여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박해를 하기도 하는 그런 모습 가운데 있었습니다. 말라기서만 보더라도 종교지도자로서 가장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모습이었느냐?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자로 있었습니다. 말라기 1장 7절을 보시면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13절도 보시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 2장으로 가시면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11절입니다.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오늘날로 말하자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성령과 진리의 예배이기보다는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그들의 삶 역시 하나님의 법 안에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더란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는 말은 무엇인가? 우리가 여호와를 괴롭게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따지기를 “하나님! 이 땅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가 공의롭다고 하시면서도 어떻게 해서 불의한 이방인들이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까?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이 맞습니까?” 이렇게 불평, 불만을 쏟아내더란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말라기 3장 1절 이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기대했던 하나님께로부터 속았거나 버려졌다고 사악하게 선언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칼빈주석) 비록 하나님의 교회가 타락하고 더렵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 즉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은 깨끗케 하셔서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나오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보았던 말씀입니다. 6절을 보시면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소멸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상 한번 정하신 일에 대해서는 결코 변경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전 모든 일에 대하여 작정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작정을 위해 뜻을 세우십니다. 순서로 하자면 뜻이 앞서고, 삼위 하나님의 의논, 그리고 작정, 예정, 실행 이 순서입니다(엡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의논번역수정>대로 일<역사>하시는 이의 계획<작정번역수정>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뜻, 의논, 작정, 예정의 경우 영원 전 하나님 안에 있었던 일이라면, 그런 작정의 실행으로서 창조와 섭리가 시간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불변하다고 말할 때는 단순히 그분의 존재만이 불변하다는 게 아니라, 그가 가지고 계신 모든 계획 그리고 목적, 약속하신 것에 대하여 불변하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의 경우도 보면 계획을 세웁니다. 예를 들어 새해가 되면 “올해는 적어도 이것만큼은 하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작심삼일! 계획을 세워도 삼일 안에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거나 혹은 변경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어릴 때보면 경찰차가 멋있어 경찰이 되고 싶어 합니다. 군인이 멋있으면 군인이 되고 싶어 하고, 간호사가 예뻐 보이면 간호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자꾸만 바뀌게 됩니다. 아니 인간 자체만 생각해 보더라도 변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많아지거나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많아지거나 적어지는 존재는 다 변화가 있다는 것이요, 그것은 피조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 전에, 그러니까 이 땅이 생기기도 전에 그리고 시간이란 개념이 생기기도 전에 뜻을 정하셨는데, 그 뜻이 결코 변화가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 자체가 불변하신 분이시오, 불변하신 분으로서 그분의 뜻도 변화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번 작정하셨다면 그대로 실행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서 반드시 정하신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실 때 인격적인 피조물과 관련하여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와 버리신 자가 있다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로마서 9장 11절 이하에 보시면 에서와 야곱에 대한 설명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1-13) 사실 이런 말씀을 접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래서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말할 정도로 싫어합니다. 아니 안 믿는 사람들만 싫어하는 게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 말씀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은 너무 독선적인 하나님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경우 성경에 버젓이 있는 말씀을 말하지 않거나 왜곡해서 말하는 경우가 있고, 또 이것을 신앙의 고백으로 작성한 내용들을 수정하거나 삭제하기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면, 그리고 성경의 참된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성도들에게 주셨다면 그것은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딤후3:16).
이 말씀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의 사실 그대로를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그러니까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 안에서는 이미 택하실 자와 버리실 자를 정하셨습니다. 마치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한 사람은 사랑하고 한 사람은 미워하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 왜 이렇게 독선적이십니까?”란 반응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이구나!” 이렇게 반응해야 옳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해야 할 의무,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야 할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에게는 불의함이 전혀 없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누구를 버리셨다고 해서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우리 편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성경은 전혀 불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로마서 9장 14절을 보시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시기로 하셨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 22절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9:22-23) 그러니까 한편은 하나님의 진노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함을 알게 하고자 하신 목적이 있다면, 한편은 긍휼을 통해 그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 알게 하시 위한 목적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말씀과 관련하여 쭉 이야기하다가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두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33절 이하를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11:33-35)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유기하셨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시고 어떤 사람은 미워하셨다고 할 때 ‘왜’라는 이유에 대한 답은 사실 우리가 다 찾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셨는가? 여기에 대해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답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라는 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이 되는가? 믿음 안에서는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보자면 결국 저들은 저들의 죄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복을 누리는 자로 있음을 확인하게 될 뿐입니다. 버리셨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 죄는 하나님 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부터 나왔기 때문에 결국 정죄를 받는 것은 인간이 원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의 명제 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지만, 정죄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다. 좀 어려울 수 있지만 이 부분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원 전에 선택하실 자와 버리실 자를 정하셨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정해진 이상 하나님이 불변하시기 때문에 그 뜻에 변화는 결코 없습니다. 한번 택자로 삼으신 이상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구원하시고야 마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택함을 입은 자, 그들은 이 땅에서 죄를 짓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도,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다윗 왕도 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괜찮다고 여기시는가? 그럴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상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셨지(엡1:4) 단순히 천국에만 가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징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이 징계에 대하여 성경은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다윗 언약과 관계된 말씀인데, 사무엘하 7장입니다. 14절과 15절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여기 보면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은혜언약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이 은혜언약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언약 안에 있는 자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아니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구원은 최종적인 완성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징계를 하실 수밖에 없는데, 그 징계의 대표적인 성격이 뭐냐? 사람의 매, 인생 채찍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매를 들고,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를 하시지만 다윗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빼앗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취소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징계는 할지언정 구원을 취소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말씀인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자손들을 결코 소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너희를 구원하리라.
물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 이런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 6절에서 8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참된 이스라엘, 영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무엇이 그들의 자랑이었나? 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 있던 그것 자체가 그들의 자랑이었습니다. 선택된 민족이라고 자부했고, 그리고 그것 자체가 구원의 길을 다 열어놓은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을 따라 삶을 살아갔는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실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버리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변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시고, 불변하신 그분이 뜻을 따라 작정하셨다면 그 작정 역시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좀 어려울 수 있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종교적인 열심만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선택하셔서 부르셨지만 그때 선택하신 것은 그저 외적으로 부르시는 부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구약 당시 이방인들은 한 사람도 구원을 못 받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만 해도 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외적인 소명이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은 누군가? 내적으로 소명을 받은 자들, 그들이 참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럼 참 이스라엘은 죄와 상관없이 살아갔는가?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저들과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뭐냐? 그럴지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에게만큼은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으로 너희를 돌이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 2절과 3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할 뿐 아니라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여 이전에는 더러운 제물을 가지고 왔지만 이제는 공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겠다고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신학 용어로 하자면 칭의도 그분이 주신다는 것이고, 거룩도 그분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죄악이 우리 삶 가운데 끊임없이 나타나겠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을 줘서 결국에는 완성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뜻으로 있는 겁니다. 전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분 자체도 변함이 없으시지만, 한번 뜻을 세우시고 정하셨다면 그 뜻에 대해서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사람은 어떻습니까? 변화가 있습니다.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미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하는 것 자체가 피조물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말씀하신 바를 실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 앞에 성도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약속에 있어서도 결코 변함이 없다는 걸 확신하셔야 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변화가 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변화가 심한 존재입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어도 감정의 조절이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분으로 계시다고 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어느 누구도 구원 받을만한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조차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창조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성경에 따르면 죄는 인간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은 반드시 인간이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냐?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로 하셨다면 그 사랑에 있어 변함이 없기 때문에 가능하더란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가 죽을 자리에 누구를 죽게 하셨는가? 아들까지 죽게 하셨습니다. 사랑이라는 것 때문에 공의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과 동시에 공의도 만족시키시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받은 자는 이런 의미에서 감사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인 겁니다. 그리고 그 감사 안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죄 가운데 살면서 죄의 유혹과 실제로 죄를 짓기는 하지만, 유효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와 무엇이 다른가? 적어도 이 땅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더하여 주신다는 것에 있어서는 다른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변하신 것처럼 표현하는 구절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적응하여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해서 실제로 하나님 안에 어떤 변화가 있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버리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만큼 죄를 싫어하신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택했다면 너희는 결코 그렇게 살아선 안 된다는 뜻을 나타내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속히 돌이키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참 이스라엘은 그런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분리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그 외 다양한 교훈을 위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도 그렇게 봐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그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해석이 되고 있느냐? 단순히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켜서라도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속성을 파괴하는 해석이기 때문에 그 본문으로 하자면 아주 위험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오늘 이 부분까지는 다루지 않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본래 하나님 안에는 15년 더 살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으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뭘 교훈하시는가? 모든 일에 있어, 특별히 어려운 일에 있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걸 교훈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도 응답, 즉 하나님께로부터 선한 것을 받았지만 이후 내용들을 보면 인간이 선한 결과를 남기느냐? 그렇지 못하다는 것도 교훈으로 주십니다. 병이 나음으로 교만해졌고, 또한 15년 더 살면서 므낫세라는 왕은 나은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인간은 어떤 선도 내놓을 수 없다는 것도 교훈하시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사건은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는 걸 말하기 위함이 아닌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십니다. 히스기야와 같은 말씀이 있다고 해서, 또한 하나님께서 돌이키셨다는 말씀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데, 하나님께 변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하나님은 참 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변치 않는 분이라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면 그리고 나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고 계시다면 우리의 못난 모습 때문에 결코 좌절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번 우리의 구원을 확증한 이상 우리의 구원은 취소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은 분명한 믿음의 내용으로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이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앞에는 사람의 매와 인생 채찍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의 목적은 반드시 하나님을 닮아가는 방향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으로서 그분의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때문에 약속하신 말씀에 대하여 반드시 믿어 의심하지 않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특히 여러분의 구원의 확신을 여러분에게서 찾지 마시고, 하나님께만 그 근거를 두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번 구원하시로 하셨다면 반드시 그 구원을 이루시고야 마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