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소개
柳得恭/1749~1807)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北學派), 4검서(檢書)의 한 사람. 한문학사(漢文學史)에서도 4가(家)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다. 본관 문화(文化). 자 혜풍(惠風)․혜보(惠甫). 호 영재(泠齋)․영암(泠菴)․가상루(歌商樓)․고운당(古芸堂)․고운거사(古芸居士)․은휘당(恩暉堂) 등이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모친 아래에서 자랐고, 18,9세에 숙부인 유련(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짓기를 배웠으며, 20세를 지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와 같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774년(영조 5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정조가 즉위하여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한 뒤인 79년(정조 3)에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됨으로써 32세에 비로소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포천현감(抱川縣監)․양근군수(楊根郡守)․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사도시(司寺)주부․가평군수(加平郡守)․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를 역임하였고, 그를 아끼던 정조가 돌아가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년(순조 7)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는 개성․평양․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으니, 이 경험을 토대로 문학과 역사 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첫째, 시문과 관련된 것으로서 자신의 시문을 모은 《영재집(泠齋集)》과 한국의 역대 시문을 엮은 《동시맹(東詩萌)》(1772)이 있다.
둘째, 중국 여행과 관련된 것으로서 청나라 문사들의 시문을 모은 《중주십일가시선(中州十一家詩選)》이 있으니, 나중에 《병세집(竝世集)》으로 완성되었다. 연행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서 《열하기행시주(熱河紀行詩註)》 《연대재유록(燕臺再游錄)》이 있고, 연행할 때의 단상(斷想)들을 모아 놓은 《금대억어(金臺臆語)》가 《후운록(後雲錄)》에 수록되어 있다.
셋째, 신변 잡사와 단상들을 연대순으로 써내려간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와 한국의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한 《경도잡지(京都雜志)》가 있다. 《경도잡지》는 뒤에 김매순(金邁淳)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홍석모(洪錫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넷째, 역사서로서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가 있다. 그는 역사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으므로, 그의 역사인식은 문학론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북학파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시를 짓기 위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학작품들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에 따라 중국 서적을 다양하게 섭렵하였고, 한국역사에도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몽골․회회(回回)․안남(安南:베트남)․남장(南掌:라오스)․면전(緬甸:미얀마)․타이완․일본․류큐[琉球] 및 서양의 홍모번(紅毛番:영국)․아란타(阿蘭陀:네덜란드)에도 관심을 가짐으로써 중국 일변도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역사관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없지만, 처음에 남방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출발하여 점차로 북방 중심으로 변모해갔고, 그 결과 《발해고》 《사군지》를 저술하여 한국사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발해고》를 통하여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하였고, 《사군지》에서는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특히 《발해고》 머리말에서 고려가 발해 역사까지 포함된 ‘남북국사(南北國史)’를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고 비판한 뒤에, 발해를 세운 대씨(大氏)가 고구려인이었고 발해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론’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역사 인식은 나중에 정약용(丁若鏞)․한치윤(韓致奫) 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서문:성해응:成海應(1760~1839)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 본관 창녕(昌寧). 자 용여(龍汝). 호 연경재(硏經齋). 1783년(정조 7) 진사가 된 후, 88년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으로 기용되었다. 벼슬은 부사(府使)에 그쳤으나 영조․정조 시대의 대표적 실학자로서 경학(經學)에 정통했다.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과 친교를 맺었다. 저서에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 《주한잡사고(周漢雜事攷)》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가 있다. 본집․외집․별집으로 구성된 《연경재전집》을 남겼다.
서문: 박제가朴齊家(1750~1805)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 밀양(密陽). 자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 초정(楚亭)․정유(貞)․위항도인(葦杭道人). 19세 때 박지원(朴趾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1776년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합작한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청나라에 소개되어 조선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78년(정조 2)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북학의(北學議)》 <내외편(內外篇)>을 저술, 이듬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그 뒤 진하사(進賀使)․동지사(冬至使)를 수행, 두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94년 춘당대(春塘臺) 무과에 장원하여 오위장(五衛將)에 오르고, 이듬해 영평현감(永平縣監)으로 나갔다. 98년 《북학의》 진소본(進疏本)을 작성하고, 1801년(순조 1) 사은사를 수행,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사돈 윤가기(尹可基)가 주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鐘城)에 유배되었다가 4년 만에 풀려났다. 저서에 《명농초고(明農草藁)》 《정유시고(貞詩稿)》 《유정집(亭集)》이 있다.
발해고 서문(성해응)
영재(泠齊) 유해보(柳惠甫)가 일찍이 궁중 서적들을 살피다가 발해에 관한 사실을 얻게 되어, 왕의 계보와 인물, 전기 및 지리 등을 『新唐書』『渤海傳』보다 더 상세하게 엮어 한권으로 만들었다.
발해태씨(渤海太氏)는 속말수(粟末水)에서 일어났으니, 속말수는 지금의 혼동강(混同江)이다. 태씨(太氏)가 흩어진 무리를 수습하여 동북지방에서 세력을 크게 떨치면서 이웃 나라들과 사신을 교환하였고, 문장도 찬연히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또한 관직제도, 관품 및 복장제도, 그리고 주(州) 부(府)와 같은 지방제도를 마련하면서 당(唐)나라 제도를 많이 본받았다. 5경 15주 가운데,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는 지금의 관남(關南)지방에 있었고, 동경책성부(東京柵城府)는 지금의 북관(北關)지방에 있었고,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는 관서(關西) 지방의 북쪽 경계에 있었으며, 나머지 2경 15는 모두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밖으로 우리 땅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하자 당(唐)나라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이를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서 다스리기가 어려워 많은 고구려인들을 양자강과 회수(淮水)로 이주 시킨 결과, 그곳은 빈 땅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발해(渤海)가 점차 세력을 키워 수백 년을 유지하다가 거란(契丹)에게 멸망당하였다.
무릇 숙신(肅愼) 이후로 물길(勿吉)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말갈(靺鞨)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발해(渤海)라 불리기도 하였으나, 그 부락의 흥망성쇠를 논할만한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지만, 사나운 우두머리들이 체력과 호기를 믿고 산림 속에 집결하여 서로 다투어 배앗으며 방자히 뛰어 돌아다닌 사실은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으므로, 그들이 얻거나 잃은 자취와 영토의 변천 및 산천의 지세에 대해서는 국가의 큰 일을 꾀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헤아려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가탐이 지은 『郡國志』는 소략하여 제대로 갖추어지지않았고, 탈탈이 지은 『遼史』도 오류가 많고, 『金史』는 상세하지만 산 이름과 물 이름이 애매하여 근거로 삼기 어렵다. 혜보가 본디 지리학에 밝아서 그가 인용하고 고증한 것이 모두 정연하고 사리에 맞으니, 남해부(南海府)를 함흥(咸興)에 비정하고, 책성부(柵城府)를 경성(鏡城)에 비정한 것이 그런 예이다. 다만, 압록부가 강계에서 동북쪽으로 2백 리 떨어진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내가 압록부 관할에 있던 신주(神州) 환주(桓州) 등을 살펴보니, 압록강 남쪽에 있었지 강 북쪽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께서 정력을 쏟아 고증하고 연구하여 이 책을 지은 것은, 본디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성장에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자세히 검토하여 국가를 세워 운영해갔던 뜻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정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터인데, 이를 알아주
는 사람이 극히 적어 함부로 버려지게 되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발해고 서문(박제가)
내가 일찍이 서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애양(靉陽)을 지나 요양(遼陽)에 이른 적이 있는데, 그 사이 오륙백 리 길이 대개 큰 산과 깊은 골짜기였다. 낭자산을 나오면서 비로소 끝없는 평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해와 달과 나는 새가 들판의 안개 속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시 동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뭇 산들이 뭇 산들이 하늘을 두르고 땅을 막아서면서 마치 일(一)자를 그은 것처럼 가지런히 뻗어 있었으니, 앞서 큰 산과 깊은 골짜기라 한 곳이 바로 요동 1천리의 바깥 울타리였던 셈이다. 이에 한 숨을 지으면서 “여기가 하늘의 끝이로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무릇 요동은 천하의 한 귀퉁이이지만, 영웅과 제왕이 이보다 더 많이 일어났던 곳이 없으니, 대개 그 땅이 여과 제 지방에 인접해 있어서 쉽게 중국의 형세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발해대씨(渤海大氏)가 이미 흩어져 미약해진 유민을 이끌고, 더구나 산외지방을 잘라 포기하였으면서도, 한 귀퉁이에 웅거하고 천하와 겨룰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高麗) 왕씨(王氏)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다고 하지만, 압록강을 한 발자국도 끝내 넘어서지 못하였으니, 산천의 할거와 득실에 관한 자취를 대체로 여기서 찾아복 수 있다.
무릇 부녀자가 보고 듣는 것은 용마루를 넘지 못하고, 어린아이가 노는 곳은 겨우 문지방에 미칠 뿐이니, 담장 밖의 일을 말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우리 나라 선비들이 신라 영토 안에서 태어나 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툴어먹아 버리고, 또한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송(宋)나라, 명(明)나라의 흥망과 전쟁에 관한 일도 알지 못하니, 어찌 발해의 역사를 알 수 있겠는가?
내 친구 유혜풍(柳惠風)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으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십일도사주』를 지어 우리 나라의 볼 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渤海考』한권을 지어서 인물(人物), 군현(郡縣), 왕계보(王系譜), 연혁(沿革)을 아주 미세한 것까지 세세히 엮어서 종합해 놓았으니, 가히 기쁜 일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高麗) 왕씨(王氏)가 고구려(高句麗) 영토를 회복하지 목하였음을 한탄하는 것이니, 왕씨가 옛 땅을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계림과 낙랑의 터전이 마침내 애매모호해지고 스스로 천하와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에 내가 전에 검토한 바와 서로 부합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왕도와 패도의 지략을 엿보 수 있는 유혜풍의 재능에 감타하였다. 또한 이 책이 어찌 일개 국가의 문헌으로만 가치를 논하겠는가, 중국의 마령이 지은 책과 그 장단점을 함께 비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서문을 지어 논한다.
정조(正祖) 9년(1785) 가을
발해고 자기 서문(유득공)
고려(高麗)는 발해(渤海)를 짓지 않았다. 이로써 고려(高麗)가 부진(不振)했음을 알겠다. 옛날에 고씨(高氏)가 북쪽에 있었으니 고구려(高句麗)요, 부여씨(扶餘氏)가 서남쪽에 있었으니 백제(百濟)요, 박(朴) 석(昔) 김씨(金氏)가 동남쪽에 있었으니 신라(新羅)다. 이것이 삼국(三國)이니 마땅히 삼국사(三國史)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高麗)가 이것을 지었으니 옳다. 부여씨(扶餘氏)가 망(亡)하고 고씨(高氏)가 망(亡)함에 이르러 김씨(金氏)가 그 남쪽을 차지했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차지했으니 발해(渤海)다. 이것을 남북국(南北國)이라 하는데 당연히 남북국싸(南北國史)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高麗)가 이를 짓지 않았으니 잘못이다.
무릇 대씨(大氏)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高句麗)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무슨 땅인가. 바로 고구려(高句麗) 땅이다. 그런데 동쪽 서쪽 그리고 북쪽을 물리쳐서 크게 했을 뿐이다. 무릇 김씨(金氏)가 망(亡)하고 대씨(大氏)가 망(亡)함에 이르러서 왕씨(王氏)가 이를 통합하여 차지했으니 고려(高麗)다. 그 남쪽의 김씨의 땅은 모두 소유했으나 그 북쪽 대씨(大氏)의 땅은 완전히 차지하지 못했다. 어떤 것은 여진(女眞)으로 들어갔고 어떤 것은 거란(契丹)에게 들어갔다.
어떤 사람은 “발해(渤海)가 요(遼)나라한테 멸망(滅亡)되었는데 고려(高麗)가 무엇으로 그 역사를 쓸것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그렇지 않다. 발해(渤海)는 중국(中國)을 본받았으므로 반드시 사관(士官)을 두었을 것이다. 그 홀한성(忽汗城)이 함락(陷落)될 때에 세자(世子) 이하 고려(高麗)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십여만 명이었다. 그중에 사관(士官)이 없었으면 사서(史書)는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사관(士官)도 사서(史書)도 없었다면 세자(世子)에게 물으면 세계(世系)를 알 수 있었다. 은계종 한데 물그 예(禮)를 알 수 있었다. 십여만 명의 사람에게 물었으면 모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渤海國史>으면 를 지었다. 그런데 고려(高麗) 사람으로서 유독 발해사(渤海史)를 쓸 장건장(張健章)은 수 없었을까.
正祖八年(甲辰:(1784) 閏三月 二五日 柳得恭 정조 8년(갑진:(1784) 윤삼월 이오일 유득공
震國公(진국공)
震國公姓大氏 名乞乞仲像 粟末靺鞨人也 粟末靺鞨者 臣於高句麗者也 或言大氏 出自大庭氏 東夷之有大氏自大連始也
진국공은 성은 대씨이고 이름은 걸걸중상으로 속말말갈사람이다. 속말말갈인으로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혹 말하길 대씨는 대정씨에서 나왔는데, 동이족의 대씨는 대련을 시조로 한다고 했다.
당고종 총장 원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중상과 아들 조영이 함께, 가솔을 이끌고 영주에 거처를 옮기었다. 사리라 칭하였는데, 사리라는 것은 거란말로 장관이라는 것이다. 무후만세통천이년에 거란송막도독 이진충, 성주자사손만영이 돌아와 당에 반란하자 영주가 무너졌다. 도독 조문홰를 죽이자 중상이 두려워하여, 말갈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의 깨진 부와 함께 동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쪽에서 보존하였다. 오루하가 험하고, 나무의 벽이되어 견고했다. 무후가 중상을 진국공에 봉하고 비우를 허국공에 봉하였다. 비우가 명을 받들지 않자, 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로 비우를 베니 이때 중상도 죽었다.
고왕의 이름은 조영이다. 진국공의 아들로 일찍이 고구려의 장수로 날래고, 용감하며 말타고, 궁술에 능하였다. 진국공이 죽고, 걸사비우가 패하여 죽자, 조영이 달아났다. 이해고가 끝까지 쫓아와 천문령을 넘자, 조영이 고구려와 말갈병사를 이끌고 이를 크게 깨뜨렸다. 해고는 겨우 몸만 살았다. 조영이 곧 비우의 무리를 아우르고 읍루의 동모산에 의거하여 일어나자 말갈과 고구려의 옛 백성들이 모두 돌아왔다. 사신을 돌궐로 파견하여, 사귀었다. 부여, 옥저, 조선, 변한등 바다 북쪽 십여국을 다스렸는데, 동으로 바다에 닿고, 서로는 거란, 남으로는 신라에 접하여 니하를 경계로 삼았다. 사방 오천리이고 호수는 십여만호이고 병사는 수만으로, 책을보고 익히고 공부하였다. 풍속은 고구려와 거란과 한가지이다. 중국에서 진(震)이라 하는데, 신당서에는 진(振)이고 하였다. 문헌을 갖추어 곰곰히 생각해보니, 진(震)이다. 스스로 진국왕이라 하고 홀한성을 쌓고 거하였는데, 영주에서 동쪽으로 이천리이다. 이때에 거란이 모두 당을 배반하여 도로가 끊어지고, 험하여 무후가 능히 정벌하지 못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시어사 장행급을 파견하여 이에 위로 하였다. 왕 역시 아들 입시를 파견하였다. 현종 선천 이년 낭장 최흔을 파견하여 좌효위대장군발해군왕을 책봉하고 홀한주로 하니, 홀한주도독이 처음 말갈이라 부르고 떠났던 곳이니, 오로지 발해라 칭하였다. 그 후에 당에 조헌하고 유주 절도부를 찾아가 아뢰어 부여부의 날랜 병사로 거란에 대비한다 하였다. 현종 개원 칠년 왕이 죽자, 3월 병진년에 당에 알렸다.
무왕의 이름은 무예로 고왕의 아들이다. 처음 계루군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개원 칠년 유월 정유에 당이 좌감문 오사겸과 섭홍려향을 이끌고 조례하고 왕을 좌효위대장군홀한서도독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이 개원하여 인안이라 하고, 땅과 집을 개척하였다. 풍속에 관역을 세우지 않아, 촌락에 거하였다. 말갈을 백성으로 삼고, 큰 촌은 도독을 두고, 다음은 제사, 그 아래에 수령을 두었다. 동북의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이를 신하로 삼았다. 개원 십년, 흑수말갈사자가 입조하였다. 당현종이 그 땅에 흑수주를 세우고 장사를 두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모아 놓고 의논하여 말하길, 흑수가 처음 길을 빌려 당과 통하고, 이 때에 돌궐이 군사를 내니 모두 먼저 나에게 고하니 나와 함께하여 갔다. 이제는 당에게 청하고 나에게는 알지지 않으니 이것은 필시 당과 모반하려 하여, 앞뒤로 나를 공격하려 함이다. 이에 동생 문예와 구아아상을 보내어 병사로 흑수를 공격하였다. 문예가 간하여 쫓지 않으니, 당으로 달아났다. 이는 당이 두마음을 품은 것이다. 개원 이십년에 대장 장문휴를 파견하여, 해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등주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을 죽이니 이를 ‘설선왕의 치’라 한다.
그 문예의 일로 후회가 가득하니 현종이 크게 노하여 우령군장군 갈복순에게 명하여 병사로 이를 쳤다. 이십일년 또 문예를 파견하여, 유주를 공격하자, 내사고푼 하해성과 태업원외랑 김사란을 파견하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왕 김흥광을 개부의동삼사지절윤령해군사계립주대도독을 수여하고, 밝혀 말하길, 발해의 바깥을 번한이라고 칭하는데 마음에 교활함을 품고 잇어 이제 병사를 내어 죄를 묻고자 하니 경도 역시 병사를 내어 남쪽으로 공격하라. 또한 조칙을 내려 신라의 이름있는 장군인 김유신의 손자 윤중을 장군으로 삼고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시라왕이 윤중등 네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병사를 모아 쳤는데, 큰 눈이 일장이나 와서 산길이 험예지고, 병사들이 얼어죽은 자가 반을 넘어, 모두 그만두고 돌아 왔다. 다음해 신라인 김충신이 당나라에 상서 하여 발해를 치러갈 때 받들기를 청하자 현종이 이를 허락하였으나 끝내 공이 없었다. 흑수의 땅이 모두 발해에 복속을 하게 되고,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안부를 묻자, 일본도 신하 충마여래를 보냈다. 개원 이십육년 구당서에는 이십오년 왕이 죽고, 팔월 신사에 당에 알렸다.
문왕의 이름은 흠무이고, 무왕의 아들이다. 개원하여 대흥이라 하니 개원 이십육년이다. 당이 내사 단수간을 파견하여, 왕을 좌효위대장군홀한주도독발해군왕으로 책봉하자, 왕이받들고 용서함을 고하였다. 사신 수수간을 파견하여 알현하자, 현종이 왕을 좌슴오대장군을 수여하였다. 천보중에 특진태자첨사빈객을 더하였다.(??) 천보말에 상경으로 천도하고 현종때까지 이십구번이나 당에 알현하였다. 숙종 지덕 원년에 평로에 머무르다 나중에 천천히 돌아갔다. 과의도위행유성현사부경략판관 장원간을 파견하여 말하길, 올 시월에 안록산의 공격을 당하여 왕이 마땅히 병사 사만을 보내어 적을 평정하라고 보냈는데, 왕이 여기에 머물러 있음을 의심하여, 십이월 병오에
과짐(?) 유정신과 북평으로 돌아갔다. 녹산과, 유주절도사 사사명이 통하여 당에 모반하려고 숨었는데, 안동도호왕 지현이 그 모반을 알고 정병 육천명을 이끌고 유성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돌아가는 길을 베니 스스로 평로절도라 칭하였다. 북평으로 나아가 진을 쳤다. 사년사월에 지현이 장군 왕진의를 파견하여 말하길, 천자는 이미 서경으로 돌아 왔다. 임금을 맞이하여 축의 별궁에 머므르니, 적들은 모두 패주하였다. 고로 신하를 보내어 알리는 것이다 왕이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워 진의를 머물게 하였 따고 사신 양문을 파견하였다. 숙종이 칙서 한권을 하사하니, 보응 원년 조서에 발해를 나라로 삼으니 발해국왕에 봉하고, 검교태위를 수여하였다. 대종대력 이년에서 십년까지 혹은 그사이거나 그 안쪽에 당에 이삼번 알현하였다. 십이년 정월 왕이 일본무녀 열명을 보내니, 또 방물을 당에 받치니, 사월과 십이월에 또 당에 알현하였다. 사공태위 벼슬을 더 하였다. 덕종 건중 삼년 오월, 정원 칠년 오월 팔월 십년 정월, 사신을 보내어 당에 알현하였다. 왕이 열번이나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니 일본도 조신전계, 기촌전성, 양후사령구, 연익마려, 무생오수, 조신전계가 왔다. 태흥오십칠년 삼월 사일 왕이 죽었다. 즉 정원 십년이다.
廢 王(폐 왕)
廢王諱元義 文王族弟也 文王子宏臨早卒 元義立一歲猜虐 國人弑之
폐왕의 이름은 원의로 문왕의 동생이다. 문왕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자, 원의가 섰는데, 그 해에 의심하고 사나워 나라사람들이 죽였다.
成 王(성 왕)
成王諱華璵 宏臨子也 國人弑元義推立王 改元中興 還上京
성왕의 이름은 화옥으로 굉림의 아들이다. 나라사람들이원의를 죽이고, 왕으로 추대하니 연호를 중흥이라 하고 상경으로 천도하였다.
강왕의 이름은 숭린으로 문왕의 작은 아들이다. 연호를 정력이라 하니 정원 십일년 이월 을사이다. 당이 내상시 은지삼을 파견하여 왕을 우호위대장군홀한주도독발해군왕에 책봉하였다. 십사년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부왕의 등급의 이치를 밝히니 당이 왕에게 은청광록대부검교사공을 더하고 국왕에 책봉하였다. 이십일년 당에 알현하고 정원중에 네 번 당에 알현하였다. 순종이 금자광록대부를 더하고, 혜종 원화 원년 시월에 검교태위를 더하였다. 십이월 당에 알현하고 두 번 일본을 방문하였다. 일본에서 진인광악, 숙미하무, 숙미선백, 이 왔다. 원화 사년 왕이 죽자 정울에 당에 알렸다.
희왕의 이름은 언의로 정왕의 동생이다. 연호를 주작이라 하였다. 정왕이 죽었을 때 왕이 잘 판단하여 나라의 일에 힘써야 함을 알았다. 원화 팔년정월 경자에 당이 내시 이중민을 파견하여 왕을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簡 王(간 왕)
簡王諱明忠 僖王弟也 改元太始 立一歲薨
간왕의 이름은 명충으로 희왕의 동생이다. 연호를 태시라 하였는데, 선지 일년만에 죽었다.
宣 王(간 왕)
宣王諱仁秀 簡王從父 高王弟野勃四世孫也 改元建興 簡王薨 王權知國務 元和十三年正月乙巳 遣使告喪于唐 五月唐冊王銀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 王南征新羅 北略諸部 開大境宇 十五年閏正月 遣使朝唐 唐加王金紫光祿大夫檢校司空 十二月又遣使朝唐 元和中凡十六朝唐 穆宗長慶二年正月 四年二月皆遣使朝唐 長慶中凡四朝唐 敬宗寶曆中二朝唐 文宗太和元年遣使朝唐 四年又遣使朝唐 是年 舊唐書五年 王薨
선왕의 이름은 인수로 간왕이 아버지와 형제가 된다. 고왕의 아들 야발의 사세손이다. 연호를 건흥이라 하고 간왕이 죽자, 왕이 잘 판단하여 나라의 일에 힘써야 함을 알았다. 원화 십삼년 정월 을사에 사신을 보내어 당에 상당함을 알렸다. 오월 당이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을 책봉하였다. 왕이 남으로 신라를 정벌하고, 북으로 여러 부를 다스려 크게 지경을 넓히였다. 십오년 윤정월에 당에 알현하자 금자광록대부검교사공을 더하였다. 십이월 또 당에 알현을 하였다. 원화중에 열여섯번 당에 알현을 하고, 목종 장경 이년 정월, 사년 이월에 당에 알현을 하였다. 장경중에 무른 네 번이다. 경종 보력중에 두 번 알현을 하고 문종 태화 원년에 알현을 하고, 사년에 알현을 하였는데, 이해에, 구당서에는 5년에 왕이 죽었다.
王彛震(이진왕)
宣孫王也 父新德卒 王立改元咸和 大和五年 唐冊王銀靑光祿大夫檢校秘書監忽汗州都督渤海國王 六年遣使朝唐 七年正月二月皆遣使朝唐 訖文宗之世 凡十二朝唐 武宗會昌中四朝唐 宣宗太中十二年王薨 二月赴唐
선왕의 손자로 아버지 신덕이 죽자 왕위에 오르고 연호를 함화라 하였다. 대화오년 당이 은청광록대부검교비서감홀한주도독발해국왕에 책복하였다. 육년 당에 알현하고 칠년 정월 이월에 알현하고, 문종에 이르기 까지 열두번 알현하였다. 무종 회창중에 4번 알현하고 선종 태중 십이년에 왕이 죽자 이월에 당에 알렸다.
王虔晃(건황왕)
彛震弟也 太中十二年二月癸未 唐詔襲王
이진의 동생이으로 태중 십이년 이월 계미에 당에 알리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王玄錫(현석왕)
虔晃子也 懿宗咸通中 三遣使朝唐
견황의 아들로 의종 함통중에 세 번 당에 알현하였다.
王諲譔(인선왕)
史失系 梁太祖朱全忠開平元年 王遣王子朝梁 獻方物 二年三年及乾和二年 又遣使朝梁 後唐莊宗同光二年 遣王子朝唐 又遣王侄 明宗天成元年 遣使朝唐 進兒口女口 渤海自唐世數 遣諸生詣京師太學 習識古今制度 稱爲海東盛國 及至朱梁後唐三十年間 貢士登科者十數人 學士彬彬焉 遼太祖耶律阿保機神冊二年 王遣使聘遼 四年遼修遼陽故城 掠渤海戶實之 天贊三年 王遣兵攻遼 殺遼州刺史張秀實 掠其民而歸 四年十二月乙亥 遼主詔其國中曰 所謂二事 一事已畢 惟渤海世讎未雪 豈宜安住 遂擧兵來寇 皇后及太子培大元帥堯骨從 閏十二月壬辰 遼主祠木葉山 壬寅以靑牛白馬祭天地 己酉次撤葛山射鬼箭 丁巳次高嶺 是夜遼兵圍扶餘府 天顯元年正月己未 白氣貫日 庚申扶餘城陷 守將死之 遼又別攻東平府破之 丙寅老相兵敗 是夜遼太子培 大元帥堯骨 南部宰相蘇 北院夷离菫斜涅赤 南院夷离菫迭里等 圍忽汗城 己巳王請降 庚午遼主駐軍忽汗城南 辛未王素服藁索牽羊 率臣僚三百餘人出降 遼主禮以遣之 丙子遼主使其近侍康末怛等十三人 入請罪馬前 遼主以兵衛王及王族以出 二月丙午遼改渤海國爲東丹 忽汗城爲天福 封其太子倍爲人皇王以主之 乙酉 遼主以王及王族歸 築城于臨潢之西 使王居之 賜王名曰烏魯古 王后名曰阿里只 烏魯古阿里只者 遼主及皇后受王降時 所乘二馬名也 因以其馬賜王及后
역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양나라 태조 조전충 개평 원년에 왕이 왕자를 보내어 양에 알현을 하고 방물을 받쳤다. 이년 삼년에서 건화 이년에 또 양에 알현을 하고 후당 장종 동광 이년에 왕자를 보내어 당에 알현하고 또 왕질을 보내었다. 명종 천성 원년 당에 알현하고, 나아가 발해가 당의 세수를 받고, 학문이 뛰어난 여러 스승들을 보내어 고금의 여러 제도를 익히니, 칭하여 해동성국이라 하였다. 주양에서 후당 삼십년 사이에 등과에 오른 선비들이 십수명이고, 학사들은 뛰어났다.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 신책 이년에 왕이 사신을 보내어 요를 찾아가고, 사년 요가 요양의 옛성을 수리하고 발해의 호실을 노략질 하였다. 천찬 삼년에 왕이 병사로 요를 공격하고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그 백성을 노략질 하고 돌아왔다. 사년 십이월 을해에 요나라 주인이 그 나라가운데에서 고하길, 두 가지 일이 있으니, 하나는 이미 했다. 발해를 꾀함에 아직 깨끗치가 않아 마땅히 편히 정주 할 수가 없어, 병사를 일으켜 황후의 태자 배와 대원사 요골로 나아가 도둑을 쳤다. 윤 십이월 임진에 요주가 목엽산에 제사 지내고 임인에 푸른 소와 흰 말로 천지에 제사 지냈다. 기유에는 철갈산 사귀전에 정사에는 고령에 제사 지내고 그밤에 요나라 병사가 부여부를 포위하였다. 천현 원년 정월 기미에 흰 기운이 해를 꽤 뚫었다. 경신 부여성이 함락되고, 지키던 장수가 죽었다. 요는 또 따로 동평부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 병인 노상병이 무너지고, 이 밤에 요태자 배와 대원사 요골, 남부재상 소, 북원이리근 사열적, 남원이리근 질리 등과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기사 왕이 항복하길 청하였다. 경오 요주의 군사가 홀한성 남쪽에 머물렀다. 신미 왕이 흰옷을 입고 짚으로 세끼를 꼬아 양을 끌고, 신하와 벼슬아치 삼백여명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요주가 예로 이를 보내 주었다. 병자 요주가 근시 강말달 등 십사명이 말 앞에서 죄를 청하였다. 요주가 병사로 왕과 왕족을 지키어 내 보냈다. 이월 병오 요가 발해국을 동단으로 고치고 홀한성을 천복이라 하였다. 그 태자 배를 인황왕에 봉하고, 주인으로 하였다. 을유 요주가 왕과 왕족이 돌아오자 임황의 서쪽에 성을 쌓고 왕이 거하게 하고 왕이름을 하사하니 오노고라 하고, 왕후의 이름을 아리지라 하였다. 오노고와 아리지라는 것은 요주와 황후가 왕이 항복할 때 받았던 타고 있던 두 마리의 말이름이다. 그리하여 말로 왕과 후의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興遼王(흥요왕)
名延琳 高王七代孫也 仕遼爲東京舍利軍詳穩 初東遼之地 自神丹中附 遼末有榷沽鹽麴之法 關市之征亦寬弛 及馮延休韓紹勳等 相繼爲戶部使 以燕山平地之法繩之 民不堪命 燕又仍歲大饑 副使王嘉獻計造船 使其民諳海事者 漕粟以賑燕 水路艱險多覆沒 雖言不信鞭楚榜掠 民怨思亂 遼聖宗大平九年八月丁丑 延琳殺紹勳及嘉 以快其衆 復殺四捷軍都指揮使蕭頗得 囚留守駙馬都尉蕭孝先 國號興遼擧位號 改元天慶 高麗史曰天興 選智勇之士置左右 於是諸部響應 南北女眞皆附 而高麗與遼絶 先是延琳與副留守王道平謀擧事 又召黃翩於黃龍府 道平夜踰城 走與黃翩俱上變 遼主徵諸道兵攻之 渤海太保夏行美渤海人也 時主兵戌保州 延琳馳書 使圖統帥耶律蒲古 行美以實告蒲古 殺渤海兵八百人 而斷其東路 黃龍保州旣皆不附 國舅詳穩蕭匹敵 又率兵斷西路 延琳遂分兵攻瀋州 節度副使張傑聲言欲降 故不急攻 知其詐而已有備 攻之不克而還 遼兵大集 十月遼以南京留守燕王蕭孝穆爲都統 蕭匹敵爲副 部署六部大王蕭蒲奴爲都監 與戰蒲水中 遼兵卻匹敵蒲奴張左右翼擊之 延琳兵潰 又戰于手山敗走 入城固守 孝穆築重城起樓櫓 內外不相通 城中撤屋以爨 蒲奴先據高麗女眞要衝 故無救兵 十年八月丙午 延琳將楊詳世 密送款於遼 夜開門納遼師 延琳被執 是時諸部豪傑吼山等兵蜂起 尋皆敗滅 獨南海城守堅守經年始降
이름은 연림으로 고왕의 칠대손이다. 요에서 동경사리군상온 벼슬을 하였는데, 처음 동요의 땅이다. 스스로 신단중부 하였다. 요말에 각고염국의 법이 있었는데, 관시를 정벌하고 또한 너그러이 대하였다. 풍연휴와 한소훈등을 호부사로 삼아, 연산 평지에서 이를 다스리니, 백성들이 그 명을 견디지 못하였다. 연이 그해에 크게 굶주리니 부사왕 가가 계책을 내어 배를 만들어, 그 백성이 바다에서 일하게 하여 쌀을 실어 날아 연을 구제하였다. 뱃길이 험하여 많이 가라앉았는데, 그 말을 믿지 못하여 심히 매질하니 백성들이 원망하고, 어지러왔다. 요 성종 태평 구년 팔월 정축 연림이 소훈과 가를 죽이니 그 무리를 기뻐하였다. 다시 사첩군도지휘사 소파득을 죽이고, 유수부마도위 소효선을 죽이니, 나라를 흥여라 하고 제위에 올라 연호를 천경이라 하였다. 고려사에는 천흥이라고 하였다. 지혜롭고 용맹한 선비를 가려 좌우에 두고, 여러 부의 소리에 응하니 남북 여진의 모든 부와 고려와 요를 끊었다. 먼저 연림이 부유수 왕도평과 모반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또한 황룡부 소황편과 도평이 밤에 성을 넘어, 황편과 함께 임금이 되니(?)요주가 여러 병사로 공격해 왔다. 발해태보 하행미는 발해 사람으로 이때에 병사로 주를 지키고, 연림에서 함께 한다는 글을 올렸다. 도통사 야율포고가가 행미가 포고에서 알리자 발해병사 팔백명을 죽이고 그 동쪽길을 끊었다. 황룡보주의 모두 따르지 않아, 국구상흔 소필적이 또한 평사로 서쪽길을 끊었다. 연림이 병사를 나누어 심주를 공격하자, 절도부사 장걸성언이 항복하고자 하니 급히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을때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길수 없어 돌아 왔다. 요의 병사들이 크게 모이자, 시월 요가 남경유수연왕 소효문을 도통으로 삼고 소필적을 부로 삼고, 부서육부대왕 소포노를 도감으로 삼아, 포수중에서 전투를 벌이니 요병사들이 필적과 포노가 좌우의 날개로써 벌려서 공격하니 연림의 병사는 무너졌다. 또 우수산에서 전투하여 패하니 달아나, 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었다. 효목이 성을 쌓고, 망루를 세워, 안팎에 서로 통하게 하지 못하게 하니 성안에서느느 집을 부셔 불을 땠다. 포노가 먼저 고려와 여진의 병사로 쳤으나 살아남은 병사가 없었다. 십년 팔월 병오 연림의 장수 양상세가 비밀히 요에게 밀사를 보내어 밤에 문을 열어 놓으니 들어dkh서 연림을 잡았다. 이때 여러부의 호걸 후산등이 병사를 일으켰지만 모두 패하여 멸하고 홀로 남해성수견이 지키다가 이해 초에 항복하였다.
烏舍城浮渝府琰府王(오사성부투부염부왕)
史失名 宋太宗太平興國六年 賜王詔曰 朕簒紹丕基 奄有四海 普天之下罔有率俾 矧太原封域 國之保障 頃因竊據 遂相承襲 倚遼爲援 歷世逋誅 朕前歲親提銳旅 盡護諸將 拔並門之孤壘 斷凶奴之右臂 眷言吊伐 以蘇黔黎 蠢玆北戎 非理搆怨 輒肆荐食 犯我封界 日昨出師逆擊 斬獲甚衆 今欲鼓行深入 席卷長驅 焚其龍庭 大殲醜類 素聞爾國密邇寇讎 迫於呑幷 力不能制 因而服屬 困於率割 當靈旗破賊之際 是隣邦雪憤之日 所宜盡出族帳 佐予兵鋒 俟其剪滅 沛然封賞 幽薊土宇 復歸中朝 朔漠之外 悉以相與 勗乃協乃 朕不食言 是時宋欲大擧伐遼 故有是詔
역사에는 잃어버린 이름이다. 송태종태평흥국 육년 왕을 하사하며 고하며 말하길 짐이 큰 터전을 뺏앗는데 도움을 주니 사해를 덥는다. 널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있어 태원지역에 봉하니, 나라를 지킴에 있어, 요사이 도둑이 일어나, 서로 계승하니, 요에 의지해 취하게 되었다.(??) 짐이 전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제후들을 보호하고자, 보문의 고루를 빼앗고, 흉노의 우비를 죽이고, 소검려를 쳤다. 북융이 점점 일어나니, 그 원망함을 다스리지 못하여 방자함이 극에 달아 나의 영토를 범하게 되니, 일찍이 나아가 공격하여 많은 무리를 죽이고, 사로 잡았다. 이제 깊이 나아가고자 하니, 쇠뇌를 배치하고 말을 몰아 그 임금의 수도를 불태우고 나쁜 무리를 다 죽였다. 당신의 나라가 도둑들과 매우 가깝다는 소릴 듣고, 궁색하여, 함께 어울리니, 힘으로 능히 제도할 수가 없어 속하게 된 것이다. 분한을 나누어, 그 영기로 대적하여 적을 깨뜨릴때가 이웃나라의 분풀이 할 때이니 마땅히 모든 족장이 나아가, 내 병사를 도와 무리지어, 그를 베고, 멸하여야 한다. 감동하여 유주와 계주의 땅과 집을 상으로 줄 것이다. 돌아와 알현을 하면, 삭막(고비사막)의 바깥은 모두 서로 한 무리가 되어, 당신은 잠에서 깨고, 화합할 것이다. 짐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이때에 송은 크게 일어나 요를 치고하 하니, 고도 이렇게 고함이 있다.
按忽汗城之破 在遼太祖天顯元年 後唐明宗天成元年 人謂是時渤海已亡 然而遼史稱太祖有君人之德 以其不滅渤海族帳也 聖宗統和十四年 蕭韓家奴奏曰 渤海高麗女眞 合從連衡 二十一年 渤海來貢 開泰中 南部宰相大康乂言 蒲蘆毛朶界多渤海人 乞取之 詔從之 領兵至大石河馳準城 掠數百戶而歸 又親征渤海黃皮室軍 五代史云 訖周世宗顯德 渤海使常來 宋史宋琪傳 琪論邊事曰 渤海兵馬土地 盛於奚帳 雖勉事契丹 俱懷殺主破國之怨 文獻通考云 阿保機 攻扶餘城下之 爲東丹府 阿保機死 諲譔命其弟 率兵攻扶餘城 不克而還 天成四年 長興二年三年四年 淸泰二年三年 俱遣使貢方物 宋太宗淳化二年冬 以渤海不通朝貢 詔女眞攻之 胡三省云 渤海更五代至於宋 耶律數數加兵不能服也 以此觀之 渤海未嘗亡也 其浮渝府琰府王 雖不言姓名 見太宗詔 可知其爲大氏之裔也 然渤海之亡在何時 未可考
홀한성이 깨어지니, 요태조 천현 원년이요, 후당 명종천성원년이다. 사람들이 이때에 발해가 멸망했다고 하니, 요사에서 칭하길 태도가 왕으로의 덕이 있으나, 발해의 족장마저 멸망한 것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성종 통화 십사년 소한가노가 아뢰길, 발해고려여진이 합하여 계속 이어져 있다. 이십일년 합래가 공물을 받쳤다. 개태중에 남부재상 대강예가 말하길 포로모내의 경계에 발해인이 많아 이를 취하고 알린다. 열병이 대석하의 추준성에 이르러 수백호를 빼앗아 돌아왔다. 또 친히 발해의 황피실 군을 정벌하였다. 오대사에 말하길, 세종 현덕에 이르기까지 두루 발해의 사신이 항상 왔다. 송사 송기전에는 기가 변방의 일을 말하길 발해의 군사와 땅으로 어떤 장수가 있는데 비록 거란과 함께 일한다지만 주인을 죽이고 나라를 깨뜨린 원망을 품고 있고 있다. 문헌통고에는 아보기가 부여성을 공격하여 아래에 두고 동단부라 하였는데 아보기가 죽자 인선이 그 동생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부여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천성 사년 장흥 이년 삼년 사년 청태 이년 삼년에 함께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받쳤다. 송태종순화이년 겨울에 발해가 조공을 하지 않자 여진에게 고하여 이를 공격하게 하였다. 호삼성에 이르길, 발해가 오대를 이어 송에 이르러 야율수수가 병사를 더하였으나 능히 복속시킬수 없어 이렇게 보는 것이다. 발해는 하직 망하지 않았다. 그 부투부염부왕이 비록 성과 이름을 말하지 않았으나, 태종이 보고 고하길 가히 그가 대씨의 후손임을 알겠다. 그렇다면 발해가 멸망한때가 언제인지 가히 알수가 없겠다.
臣 考(신 고)
大門藝(대문예) 大壹夏(대일하) 馬文軌(마문궤) 蔥勿雅(총물아)
門藝武王弟也 武王使門藝擊黑水靺鞨 門藝嘗質於唐智利害 謂王曰 黑水請吏而我擊之 是背唐也 唐大國 兵萬倍我 與之産怨我且亡 昔高句麗盛時 士三十萬 抗唐爲敵 可謂雄强 唐兵一臨 掃地盡矣 今我衆比高句麗三之一 王將違之不可 王不從强遣之 兵至黑水境 又以固謙 王怒遣從兄壹夏代將 召門藝將殺之 門藝懼 棄其衆儳路奔唐 玄宗拜爲右驍衛將軍 王遣馬文軌蔥勿雅 上書極言門藝罪狀 請殺之 唐處門藝安西 好報曰 門藝窮來歸我 誼不可殺 已投之嶺南矣 幷留文軌物雅 別遣鴻臚少卿李道邃源復諭旨 王知之 上書言大國示人以信 豈有欺誑之理 今聞門藝不向嶺南 伏請依前殺却 玄宗怒道邃復 不能督察官屬 致有漏泄 左除道邃曹州刺史 復同州刺史 暫遣門藝詣嶺南以報之 王望門藝不已 密遣使入東都募客 刺門藝於天津橋南 門藝格之得不死 玄宗勅河南 捕刺客悉殺之
문예는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문예에게 흑수말갈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문예는 일찍이 본질적으로 당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알아, 왕에게 고하여 말하길, 흑수의 벼슬아치를 청하여 내가 이를 공격하는 것은 당에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은 대국으로 병사가 우리의 만배이고, 이것이 원망을 사 우리가 망할까 두렵습니다. 옛날 고구려가 성할 때, 삼십만으로 당의 적에게 항거하였는데, 가히 강한 당병 한무리가 땅에서 쓸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의 무리는 고구려의 3분의 1이니 왕께서 장차 떠나려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했다. 왕이 강하게 쫓지 않고, 파견하여 병사가 흑수의 지경에 이르러, 굳걷히 수비하였다. 왕이 노하여 형 일하를 보내어 이를 대신하게 하고, 문예를 불러들여 줄일려고 하니, 문예가 두려워 하여 무리를 버리고, 당으로 도망하였다. 현종이 우효위장군으로 삼자, 왕이 마문궤와 총물아를 보내어, 상서하여 문예를 죄상을 말하여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당은 문예를 안서에 거하게 하였다. 호보가 말하길, 문예가 궁하여 우리에게 돌아왔으니 죽이지 않은 것이 옳은 것이고, 이미 영남으로 떠났습니다. 문궤와 물아가 머뭇거리자, 홍려소경 이도수원과 복유지를 보내었다. 왕이 이를 알고, 대국에 상서하여 사람을 봄에 믿음으로 하니 어찌 속임이 있겠습니까?, 이제 문예가 영남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고 들으니, 엎드려 청하건데 앞서 죽임을 물릅니다. 현종이 도수와 복에게 노하여, 능히 벼슬을 살피지 못하여 좌제도수조주자사 복동주자사가 비밀이 누설하니 문예를 보내어 영남에 이르러 이를 알렸다. 왕이 문예를 버리지 않음을 바라여, 비밀히 동도모객을 보내어 문예를 천진교남쪽에서 찌르니 문예가 대적하여 죽지 않고, 현종이 하남에 칙서를 내려 자객을 모두 잡아 이를 죽였다.
大明俊(대명준) 高寶英(고보영) 大先晟(대선성)
明俊彛震時王子也 大和六年 王遣明俊等朝唐 寶英官同中書右平章事 大和七年正月 王遣朝唐 謝冊命 因遣學生三人 請赴上都學問 先遣學生三人 事業稍成請歸本國 唐許之 先晟亦彛震時王子也 是年二月 王遣先晟等六人朝唐 唐詩人溫庭筠送渤海王子歸本國詩曰 疆理雖重海 車書本一家 盛勳歸舊國 佳句在中華 定界分秋漲 開帆到曙霞 九門風月好 回首是天涯
명준은 이진때의 왕자이다. 대화육년 옹이 명준등을 당에 파견하였다. 보영은 관동중서우평장사이다. 대화칠년정월 왕이 당에 파견하여, 책명을 구하며 학생세명을 보내어, 상도에서 나아가 배울수 있도록 청하여 먼저 학생 세명을 보내었다. 일이 점점 이루어지자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당이 이를 허락하였다. 선성은 역시 이진때의 왕자이고 이해 이월 왕이 선성등 육명을 당에 파견하니 당시인 온정균이 발해왕자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시를 보내니 말하길, 지경을 다스림이 중하여 수레에 책을 싣고 본래의 집 옛 나라로 돌아가나, 아름다운 글귀 중화에 있다. 반드시 번성하리니 돗을 달아 새벽인데 이미 멀어져지네, 바람에 달은 좋아 머릴 돌리니 하늘의 끝이네.
高元固(고원고)
元固訪唐進士徐寅於閩中 爲道本國人 以金書寅斬蛇劒御溝水人生幾何三賦 列爲屛障 寅喜而贈詩 稱爲渤海賓貢高元固先輩 其詩曰 折桂何年下月中 閩山來問我雕蟲 宜銷金翠書屛上 誰把蒭蕘過日東 剡子昔時遭孔聖 由余往代諷秦宮 嗟嗟大國金門土 幾箇人能振素風 其曰先輩曰折桂 已成進士之稱也 徐寅中乾寧進士 時依王審 知元固當諲譔詩人
고원은 당으로 가 민중에서 진사서인 벼슬을 하였는데 본래 본국인이다. (??) 인희가 시를 보내었는데, 발해빈공 고원고 선배라 칭하였다. 그 시에 몇해전에 달의 가운데에서 계수나무를 꺽었네. 민산에서 와서 내가 독수리임을 물었는데 마땅히 황금새를 녹여 병풍위에 새기니 천한사람의 손을 잡고 해의 동쪽을 지나 섬자는 옛날에 공자를 만났다. 나와 인연이 있어 풍진궁에 나아가니, 아~ 대국의 금문토라. 기개인이 능히 흰 바람을 떨치었다. 그 말에 선배가 계수나무를 꺽었다고 했는데, 이미 진사라 칭했다는 것으로 서인중건령진사이다. 때를 보아 왕을 보필하는 것으로 원고는 인선의 시에 대답함을 알았다.
大元兼(대원겸)
諲譔侄也 官學堂親衛 後唐同光二年 王遣朝唐 試國子監丞
인선이 어리석어 관학당친위를 하고 후에 당 동광이년에 왕이 당에 사신으로 보내니 국자감승 시험을 보았다.
高仁義 德周 舍那婁 高齋德( 고인의 덕주 사나루 고재덕)
仁義官寧遠將軍郎將 德周游將軍果毅都尉 舍那婁別將 齋德首領 武王時同使日本 着蝦夷境 仁義以下十六人被殺害 齋德與八人走出羽國僅免 致國書 與其使朝臣蟲麻呂俱來 獻綵帛一十疋綾一十疋絁二十疋 絲一百鉤綿一百屯
인의는 영원장군랑장이고 덕주는 부장군과의도위이고 사나루는 별장, 재덕은 수령이다. 무왕때에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착하이 지역에서 인선과 아래 십육명이 살해를 당하였는데, 재덕과 팔명은 출우국으로 도망하여 겨우 살았다. 국서를 받치고 사신 충마여구와 함께 돌아 왔다. 비단 열필과 비단(무늬가 있는)열필 시 이십필 실 일백구 면 일백둔을 받쳤다.
胥婁德 已珍蒙 已閼棄蒙( 서루덕 이진몽 이알기몽)
婁德官若忽州都督忠武大將軍 珍蒙雲麾將軍 棄蒙首領 文王時同使日本 婁德船覆 與棄蒙等四十人俱死 倭皇御太極殿 觀珍蒙射 又御中宮 使珍蒙奏本國樂聽之 附獻美濃絁三十疋絹十疋絲一百五十鉤 調綿二百屯 初日本人朝臣廣成等朝唐回 從蘇州入海 漂着崐崙國 多被殺執 廣成與八人 僅免復歸唐 從登州入海 到渤海界 王令隨婁德等歸國
누덕은 약홀주도독충무대장군이고 진몽은 운휘장군이고 기몽은 수령이다. 문왕대 일본으로 사신으로 갔다. 누덕은 배가 뒤집히어 기몽등 사십여명이 함께 죽었다. 왜황이 태득전에서 진몽의 궁술을 보았고, 또 중궁에서 진몽이 본국의 음악을 아뢰었다. 미농시 30필, 명주 열필, 실 백오십구, 조면 이백둔을 받쳤다. 처음 일본인 신하 광성등이 당에 알현하고 돌아오다 소주에서 바다에 들어갔는데 떠돌다 곤륜국에 들어가 많이 죽고 잡히었다. 광성과 팔명이 겨우 살아 당으로 돌아갔다. 등주에서 바다로 들어갔는데 발해의 지역에 이르르니, 왕이 누덕등과 함께 돌아가게 했다.
慕施蒙(모시몽)
官輔國大將軍 文王時 率七十五人使日本 以王旨問十餘年無使之故 倭皇答書援高句麗舊記 責國書違例
관직은 보국대장군이로 문왕때에 칠십오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가서 왕이 시벼년동안 사신없음을 물으니, 왜황이 답서에 고구려라 기록하니, 국서에 예가 없다 책하였다.
楊承慶 楊泰師 馮方禮(양승경 양태사 풍방례)
承慶官輔國將軍 泰師歸德將軍 方禮判官 文王時同使日本 初日本使朝臣田受等 來問大唐消息 歸言於倭皇曰 天寶十四載歲次乙未十一月九日 御史大夫兼范陽節度使安祿山 擧兵作亂 自稱大燕聖武皇帝 改范陽爲靈武郡 其宅爲潛龍宮 年號聖武 留其子安卿緖 知范陽郡事 自將精騎二十餘萬南下 直入洛陽 署置百官 天子遣安西節度使哥舒翰 將三十萬衆 守潼津關 使大將封常淸 將十五萬衆 別圍洛陽 天寶十五載 祿山遣將軍孫孝哲等 率二萬騎攻潼津關 哥舒翰壞潼津岸墜黃河 絶其通路而歸 孝哲鑿山開路引兵入至新豐 六月六日天子游于劒南 七月甲子 皇太子璵 卽皇帝位于靈武都督府 改元至德矣 並言安東都護王志玄 聘渤海 天子賜渤海勅勅書事 倭皇下令于太宰府曰 安祿山者是狂胡狡竪也 違天起逆 事必不利 疑其不能西 必還掠海東 大貳吉備朝臣眞備 俱是碩學 委以重任 宜知此狀 預設奇謀 縱使不來 儲備無悔 其所謀上策及應備襍事 一一俱錄報來 至是承慶等至日本 倭皇授承慶正三位 泰師從三位 方禮從五位 下賜錄事以下十九人 仍使忌村全成 隨承慶來 欲自渤海迎其入唐大使朝臣河淸 獻絹三十疋美濃絁三十疋絲二百鉤綿三百屯錦四疋兩面二疋 纈羅四疋白羅十疋綵百三十疋白錦一百帖
승경은 보국장군이고 태사는 귀덕장군 방례는 판관이다. 문왕때에 함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 처음 일본사신 전수등이 와서 당이 쇠하고 있음을 물으니 돌아가는 길에 왜왕에 말하길, 천보 십사년에서 다음 을미 십일월 9일에까지 어사대부 와 범양절도사인 안록산이 병사로 난을 일으켜서
스스로 대연성무황제라 칭하고 범양을 영무군으로 고치고, 집을 잠용궁으로 삼고 년호를 성무라 하니, 그 아들 안경서가 버양군의 일을 알고 스스로 기병 이십여만으로 남하하여 직접 낙양에 들어와 관청과 신하를 두니 천자가 안서절도사 가서한에게 삼십만을 주어 파견하여 동진관을 지키게 하고 대장을 상청에 봉하고 십오만으로 낙양을 따로 지키게 하였다. 천보 십오년에 녹산이 장군 손효철등으로 이만기병으로 동진관을 공격하니 가서한이 동진의 언덕에서 패하고 황하가 떨어졌다. 그 통로가 끊어져 돌아오니 효철이 산을 뚫어 길을 내어 병사가 등어와 신풍에 이르니 유월육일 천자가 검남으로 달아났다. 칠월 갑자 황태자 여가 영무도독부에서 황제자리에 올라 연호를 지덕이라 하였다. 안동도호 왕지현이 발해를 찾아와 말하길 천자가 발해에 칙서를 보내었다. 왕황제 하령 태행부가 말하길, 안녹산이 지금 미치고 교활하다. 하늘의 뜻을 어기고 일어나니 일은 반드시 불리하다. 의심하건데 능히 서쪽이 아니면 반드시 바다 건너 동쪽을 노략질 할 것이다. 대이길비와 사신 진비가 함께 석학이니 중임을 맡긴다. 마땅히 이 상태를 알아 미리 기이한 계략을 만들어, 오지 않도록 준비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 상책을 꾀하고 여러 가지 일을 준비하여 응하도록 하게 했다. 함께 기록함을 알이러 오니 이에 승경등이 일본에 이르러 왜황제가 승경에게 정삼위를 주고 태사에게 종삼위 방례에게 종 오위, 그리고 아래 십구명에게 녹사를 하사하였다. 이에 사신 기촌전성이 승겸을 따라 와서 발해로 해서 당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신하 하청이 명주 삼십필과 미농사 삼실필 사 이백구, 면 삼백둔, 비단 사필, 양면 두필, 힐라 네필, 백라 열필, 채 백삼십필, 백금 일백점을 받쳤다.
高南甲 高興福 李能本 安貴寶(고남갑 고흥복 이능본 안귀보)
南甲官輔國大將軍兼將軍玄菟州刺史兼押衛官開國公 興福副使 能本判官 貴寶解臂 文王時同使日本 以中臺牒報曰 迎藤原河淸使總九十九人 大唐祿山思明 前後作亂 內外騷荒 恐被害殘 只遣頭首高元度等十一人 往迎河淸 卽差此使同爲發遣 南甲等與其使陽侯史玲璆俱來 獻絁三十疋美濃絁三十疋絲一百鉤 綿三百屯 能本後爲王新福副 再使日本
남감의 관직은 보국대장군과 장군현토주자사 압위관개국공을 겸하고 있다. 흥복은 부사이고 능본은 판관, 귀보는 해비이다. 문왕때 함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 중대첩보가 말하길 등원하청이 99명을 거느리고 와서 맞이하였는데 당의 녹산을 생각하니 앞뒤가 어지럽고 내외가 거칠어 해를 당할까 두려워 단지 두수 고원도등 열한명만 보냈다. 하청이 가서 맞이하니 독 함께 보낼것입니다. 남갑등이 양후사와 령구구와 오니 시 삼실필, 미농포 삼심필 사 일백구 면 삼백둔을 받칩니다. 능본이 후에 왕신복이 다음으로 다시 일본에 갔다.
楊方慶(양방경)
文王時 以賀正使朝唐 日本迎河淸使高元度隨往
문왕때 하례하기 위해 당에 사신으로 갔다. 일본 하청을 맞이하여 고원도를 따라 갔다.
王新福 楊懷珍 達能信(왕신복 양회진 달능신)
新福官紫綬大夫行政堂左允開國男 懷珍判官 能信品官著緋 文王時率二十三人 同使日本 新福爲倭皇言唐事曰 李家太上少帝幷崩 廣平王攝政 年穀不登 人民相食 史家朝議稱聖武皇帝 性有仁恕 人物多附 兵鋒甚强 無敢當者 鄧州襄陽已屬史家 李家獨有蘇州 朝參之路固未易通 是行也李能本爲副
신복은 자수대부로 신정당좌윤개국남이다. 회진는 판관이고 능신은 품관저비이다. 문왕때 이십삼명을 거느리고 일본에 함께 갔다. 신복이 왜황에게 당의 일을 말하길 이씨집안의 태상과 소제가 함께 죽어 광평왕이 섭정을 하고 있다. 이해 곡식이 익지 않아 백성이 서로 잡아는다. 사가들이 조정에서 의논하길 성무황제라 칭하니 성품이 인자하고 서하며 인물들이 몰려들고 병사들은 강하니 당할자가 없다 등주 양양이 이미 속하니 이가는 홀로 소주에 있다. 알현하는 길이 힘들어 쉽게 통하지 않으니 이능본를 부로 하여 갔다.
壹萬福 慕昌拜(일만복 모창배)
萬福官靑綬大夫 昌拜副使 文王時率三百二十五人 駕船七十隻 同史日本 着出羽國 倭皇以國書違例 幷信物不受 萬福再拜據地而泣曰 君者彼此一也 臣等貴國 必當有罪 遂改修國書 代王申謝 倭皇授萬福從三位 與王書曰 今者來書頓改文道 日下不註官品姓名 書尾虛陳天孫僭號 且高氏之世 兵亂無休 爲假朝威 彼稱兄弟 今王曾無事故而稱甥 於禮失矣 後歲之使不可更然 獻美濃絁三十疋絹三十疋絲一百鉤調綿二百屯 昌拜卒於日本 萬福與其使武生鳥守俱來 遭風漂着能登國 客主僅免 日本遣渤海船名能登 以禱于船神有驗 授其船從五位下賜錦冠 其冠錦表絁裏 紫組纓
만복은 청수대부고 창배는 부사이다. 문왕때 325명을 거느리고 70척의 배를 타고 함께 일본으로 갔다. 출우국에 도착하였는데, 왜황의 국서가 예에 벗어났다고 하여 신물을 받지 않았다. 만복이 다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울며 말하길 임금이라는 것은 이것과 저것이 하나입니다. 신등은 귀국에 반드시 죄가 있으니, 국서를 고치겠습니다. 왕을 대신하여 사죄합니다.
왜황이 만복에게 종삼위를 내리고 왕의 서에 말하길 이자가 서를 가지고 와서 글을 고쳤다. 이제부터는 관품성명을 주하지 말라. 서의 끝에 천손임을 참람되게 늘어 놓지 말라. 또 고씨의 세상에는 병란이 끝이지 않았는데 거짓으로 알현하여 협박하였는데, 이를 형제라 칭하니 이제 왕이 옛일로 생질이라 칭하지 말아라. 이는 예에 어긋나는 것이다. 후세의 사신부터는 가히 고치지 말아라. 미농시 삼십필과 명주 삼십필 사 일백구 조면 이백둔을 받친다. 창배가 일본에서 죽었다. 만복이 그 사신 무생조수오 함께 왔는데, 바람을 만나 떠돌다 능등국에 도착하여 겨우 손님으로 주인에게 의탁하였다. 일본이 보낸 발해의 배 이름이 능등이었다. 배의 신에게 효염이 있어 빌었는데 배에 오위의 벼슬을 하사하고 금관을 주었다. 그 관은 겉은 금이고 속은 시이고 자주색 끈이로 되어 있다.
烏須弗(오수불)
文王時使日本 着能登國 國司問故 受拂以書報曰 渤海日本久未好隣 往來朝聘如兄如弟 近年日本內雄等住渤海國 學問音聲 却返本國 今經十年 未報安否 由是差大使壹萬福等 遣向日本國 擬於朝參 稍經四年未返本國 更差大使烏須弗等四十人 面奉詔旨 更無餘事 所附進物及來書 並在船內 大政官以表函違例不受 又曰渤海使取此道而來 前有禁斷 自今以後宜依舊例 從筑紫道來
문왕때의 일본 사신이다. 능히 나라의 높은 벼슬에 오르니, 국사가 옛일을 물었다. 수불이 書로써 대답하여 말하길, 발해와 일본은 오래 되었지만 좋은 이웃국가는 아니다. 오고가고 알현하고 찾아감이 형과 같고, 아우와 같아 근년에는 일본 내웅등이 발해국에 거주하면서 음악을 배우다 본국으로 돌아갔다. 십년동안 안부를 전하지 못하여 이로 말이암아 차대사 일만복등을 일본국에 파견하여, 알현하라고 했는데, 사년동안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아, 다시 차대사 오수불등 사십명으로 받들어 고하여, 다시 남은 일이 없어 나아가는 무리에게 서를 붙여 배안에 함께 있으니, 대정관의 상자로써, 받지 않으면 예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또한 말하길 발해의 사신이 이길을 취하여 오니 전에는 끊어짐이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옛 법에 의지함이 마땅하니, 축자도(?)를 쫓아 나아갑니다.
史都蒙 高祿思 高鬱琳 高淑源 史道仙 高珪宣(사도몽 고록사 고울림 고숙원 사도선 고규선)
都蒙官獻可大夫司賓少令開國男 祿思大判官 鬱琳少判官 淑源判官 導線大錄事 珪宣少錄事 文王時率一百八十七人 同使日本 赴王妃喪 兼賀倭皇卽位 遭風漂沒 僅存四十六人 淑源及少錄事一人亦死 日本人問烏須弗歸時 大政官處分 渤海使宜依舊例向太宰府 不得取此路而來 今違約束 其事如何 都蒙等對曰 實承此旨 故都蒙等發自獘邑南府吐號浦 西指對馬島竹實之律 疑卽津 而海中遭風 着此禁境 失約之罪更無所避 日本又欲以十六人別留海岸 都蒙曰 此猶割一身而分背 失四體而蒲伏 日本乃聽同入 倭皇御重閣 觀騎射 都蒙與焉 與其使朝臣殿繼俱來 獻絹五十疋絲二百鉤綿三百屯 都蒙請加附 又獻黃金小一百兩水銀大一百兩 金漆一缶漆一缶海石榴油一缶 水精念珠四貫 檳櫛扇十枚 賻王后絹二十疋絁二百疋綿二百屯
도몽은 대부사빈소령개국남의 벼슬이고, 록사는 대판관이고, 울림은 소판관, 숙원은 판관, 도선은 대록사, 규선은 소록사이다. 문왕때에 백팔십칠명을 거느리고 함께 일본의 사신으로 가서 왕비의 죽음을 알리고, 겸하여 왜황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풍랑을 만나 침몰하여 겨우 사십육명만 살아남았는데, 숙원과 소록사 한명도 역시 죽었다. 일본사람이 묻기를 오수불이 돌아갈 때 대정관에 나누어어 발해의 사신이 옛법대로 태제부를 향하여 이길로 오지 않으니 이제 약속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일을 어찌된 것입니까? 도몽등이 대답하여 말하길, 받들겠습니다. 고로 도몽등이 폐읍 남부 토호포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대마도 죽실율(율이 진일까 의심한다.)로 가다가 바다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나, 이 금지된 지역에 오니, 약속을 어긴 죄는 피할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또한 열여섯 사람을 나누어 해안에 머물게 하고자 하니, 도몽이 말하길, 이것은 마치 몸을 나누고, 등을 쪼개고 사지를 잃어버려 업드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일본이 이 말을 듣고 함께 들어오게 하니 왜황이 문설주에 기대어 말탄 궁병을 보았다. 도몽이 그 알현하는 신하 전계와 함께 나아가 명주 오십필, 실 이백구, 면 삼백둔을 받쳤다. 도몽이 더있음을 고하고, 또한 황금작은거 일백량, 수은 큰 것 일백량, 금칠(옻) 일부, 칠 일부, 해석류유 일부, 수정염주 네관, 빈즐선 십매, 왕후의 부의에 명주 이십필, 시 이백필, 면 이백둔을 받쳤다.
張仙壽(장선수)
官獻可大夫司賓少令 文王時使日本 以王旨言朝臣殿繼等失路 漂着遠夷之境 船破 爲造船二艘領歸 倭皇內射 先壽與焉
관직은 대부사빈소령이고, 문왕때의 일본 사신이다. 왕지언과 조신전계등과 길을 읺고 먼 오랑캐의 지경에 다았다. 배가 깨져 배 두척을 만들어 돌아왔다. 왜황의 궁에 선수가 함께 했다.
高伴粥 高說昌(고반죽 고설창)
伴粥押領 說昌通使 文王時同使日本 以國書違例不受 又責不由筑紫道 銕利官人爭坐說昌之上 大政官爲異其班位 伴粥船破 日本給船九隻以歸
반죽은 압령이고, 설창은 통사이다. 문왕대에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국서로써 받아들이지 않음은 법칙을 어기는 것이다 하고, 또한 축자도를 따르지 않음을 꾸짓었다. 철리관의 사람들이 다투자 설창을 위에 올리고, 대정관을 달리 하여 그 위치를 나누었다. 반죽의 배가 깨지가 일본이 배 구척을 보태어 돌아왔다.
呂定琳(여정림)
官庭諫大夫工部郎中 康王時率六十人使日本 漂着夷地志理波村被掠 人多散亡 出羽國言狀 倭皇置越後國供給 定琳置在堂學問日本僧永忠書於倭皇 倭皇附答書
벼슬은 대부공부랑중이다. 강왕때에 일본사신으로 육십명을 거느렸다. 표류하다 오랑캐땅에 이르러 지리파촌을 지나다 사람들이 많이 흩어지고, 망하였다. 출우국말에 왜황이 월을 두고 후국에 도움을 주었는데 정림이 집에 있어 일본의 중 영충이 왜황의 글로 학문을 물었다. 왜황이 답서를 썼다.
大昌泰(문창태)
官慰 疑卽衛 軍大將軍左熊衛都將上柱國開國子 康王時使日本 倭皇御太極殿引見 爲减四拜爲二拜不拍手 又構綵殿以享之 渤海使舶 多着能登國 倭修飾其停宿之處
관직은 위군(慰는 곧 衛로 의심된다.)으로 대장군좌웅위도장상주국개국자이다. 강왕때의 일본 사신으로 왜황이 태극전으로 불러서 보았다. 네 번절하는 것을 덜어 두 번 절하고 박수치지 않도록 하고, 또한 구채전에서 이에 제사지냈다. 발해의 상선이 능등국에 많이 오니 왜국에서 그 머무는 곳을 정하여 꾸미었다.
高南容 高多佛 此下七人不知何王時(고남창, 고다불, 이하 일곱명은 어느 왕때인가를 알지 못한다.)
南容再使日本 其國或宴於鴻臚館 或宴於朝集院 與其使宿彌東人俱來 東人以國書不據 棄之而去 多不以酋領隨 南容脫留越前國 倭置之越中國給食 使習語生等學渤海語
남창은 두 번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그 나라는 홍려관에서 연회를 하거나, 혹은 조집원에서 연회를 하였다. 그 사신 숙니동인과 함께 돌아왔다. 동인이 국서를 가지지 않고 이를 버려, 잃어버리자 다불이 수행하여 갔다. 남창이 월전국에 머무르자, 왜국에서 월중국에 식량을 더하여, 두니 사신이 말을 익히고 아이를 낳아고, 발해말을 익혔다.
王孝廉 高景秀 高莫善 王昇基(왕효렴 고경수 고막선 왕승기)
孝廉大使 景秀副使 莫善昇基判官 同使日本 倭皇授孝廉從三位 景秀正四位下 莫善昇基正五位下 又賜錄事以下祿 唐越州人周光翰言升則等 自日本隨使者來
효렴은 대사이고 경수는 부사, 막선과 승기 판관으로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왜황이 효렴을 종삼위를 하사하고, 경수를 정사위, 막선과 승기를 정오위를 하사하였다. 또한 녹상에게 녹봉을 하사하였다. 당의 월주인 주광한과 언승칙등이 일본의 사신을 따라 왔다.
王文矩(왕문구)
使日本 倭皇於豐樂殿 宴五位以上 文矩爲擊毬 倭皇賜綿二百屯
일본의 사신이다. 왜황이 풍락전에서 연회를 하고 오위를 내렸다.(?) 문구가 격구를 하자 왜황이 면 이백둔을 내렸다.
衛鈞(위균)
官銕州刺史 遼天顯元年正月 忽汗城破 七月鈞城守 遼大元帥堯骨帥師來攻 乙丑城陷
관직은 철주자사이다. 요 천현원년 정월, 홀한성이 깨지고, 칠월 균이 성을 지켰다. 요대원수 요골수사가 공격하여 을축에 성이 함락되었다.
大素賢(대소현)
官司徒 忽汗城破 素賢降遼 遼拜爲東丹國次相 太宗會同三年 東京宰相耶律羽之 言其貪墨見黜
관직은 사도이다. 홀한성이 깨지자 소현이 요에 항복하였다. 요의 배가 동단국 차상에 삼았다. 태종회동삼년 동경의 재상 야율우가 그 탐함을 말하니, 묵형을 받고, 쫓겨났다.
高模翰(고모한)
一名松 有膂力善騎射 好讀兵 忽汗城破 避地高麗 高麗王妻以女 因罪亡歸遼 屢立戰功 官至中臺省左相 封悊郡開國公 遼史自有傳
일명 송이다. 힘이 있고, 기사에 능하고, 병사를 잘 다루었다. 홀한성이 깨지자 고려땅으로 도망하여 고려왕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죄를 용서받아 요로 돌아가 전공을 세워 중대성좌상의 관직에 오르고 철군개국공을 봉함을 받았다고 요사에서 전한다.
諲譔諸臣史失名者(인선의 여러 신하로 역사에서 이름을 잃어버린자,)
遼天顯元年正月庚申 扶餘城陷 守將死之
遼天顯元年正月丙寅 王使老相統兵三萬禦遼 遼先鋒惕隱安端 北部宰相蕭阿古只將萬騎至 老相戰敗降于遼 遼拜爲東丹國右大相
遼天顯元年二月庚寅 安邊鄚頡南海定理四府節度使 皆降于遼
遼天顯元年三月 安邊鄚頡定理三府復城守 遼惕穩安端帥師來攻 丁丑三府皆敗 壬午安邊將二人死之
遼天顯元年五月 南海定理二府復城守 遼大元帥堯骨帥師來攻 六月丁酉 二府皆敗
長嶺府 自忽汗城始破時 城守不下 遼天顯元年三月戊午 遼夷离畢康黙記左僕射韓延徽 帥師來攻 至七月辛巳遼主殂 述律后決軍國事 八月辛卯城陷
忽汗城破後 已降郡縣復城守 諸部蜂起 遼阿古只與康黙記討之 有遊騎七千自鴨綠府來 勢張甚 阿古只一戰克之 斬二千餘級 進軍破回跋城
요천현원년정월 경신 부여성이 함락되자 지키던 장수를 죽였다.
요천현원년정월 병인 왕이 노상에게 병사 삼만으로 요에 맞서게 하였다. 요의 선봉은 척은안단으로, 북부재상 소아고지가 장차 기병만명으로 이르러 노상이 전투에 패하여 요에 항복하였다. 요의 배가 동단국 우대상에 삼았다.
요천현원년 이월 경인 안변, 막힐, 남해, 정리 사부의 절도사가 모두 요에 항복하였다.
요천현원년 삼월 안변 막힐 정리의 삼부가 다시 성을 지키니, 요의 척은안단수사가 공격해 왔다. 정축 삼부가 모두 패하고, 임오 안변장수 두명을 죽였다.
요천현원년 오월 남해, 정리 이두가 성을 지키자 요의 대원사 요골사사가 공격하여 유월 정유에 두부가 모두 패하였다.
장령부는 홀한성이 처음 깨졌을 때 성을 지키어, 함락되지 않았는데 요천현원년삼월 술오에 요의 이리필 강묵기, 좌복사 한연휘장수가 공격하였다. 칠월 신사에 이르러, 요의 주인이 죽자 술율후가 군국사를 이었다. 팔월 신묘에 성이 함락되었다.
홀한성이 깨진 후에 이미 항복한 군형들이 성을 지키자 여러 부들이 일어났다. 요의 아고지가 강목기와 함께 이를 토벌하였다. 유가 기병 칠쳔으로 압록부에 와서 그 세가 성하였는데, 아고지가 한번의 전투로 이를 이기고 이천여급을 베니, 나아가던 군사들이 깨어져 발성으로 되돌아 갔다.
冒豆干 朴漁(모두간 박어)
冒豆干官左首衛小將 漁官檢校開國男 高麗太祖八年十二月戊子 率民百戶奔高麗
도두간은 좌수위소장이고 어는 검교개국남이다. 고려태조팔년 십이월 술자에 백성 백호를 거느리고 고려에 도망왔다.
吳興 僧載雄(오흥 승재웅)
興官工部卿 高麗太祖十年三月甲寅 與其屬五千人奔高麗 載雄亦與其徒六十人 隨興奔高麗
흥은 공부경이고 고려태조십년 삼월 갑인에 그 무리 오천명과 함께 고려에 도망왔고, 재웅도 역시 무리 육십명과 함께 흥을 따라 고려에 도망왔다.
金神(금신)
高麗太祖十日年三月戊申 率六千戶奔高麗
고려태조십일년 삼월 술신에 육천호를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大儒範(대유범)
高麗太祖十一年七月辛亥 率民奔高麗
고려태조 십일년 칠월 신해 백성들을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隱繼宗(은계종)
高麗太祖十一年九月丁酉 與其屬奔高麗 太祖引見於天德殿 繼宗等三拜 人謂失禮 太相含弘曰 失土人三拜 古之禮也
고려태조십일년 구월 정유 그 무리와 함께 고려에 도망왔다. 태조가 천덕전에서 이끌어 보시니, 계종등이 삼배를 하자 사람이 예를 잃어버렸다고 일컷자, 태상 함홍이 말하길,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이 삼배하는 것은 예로부터의 예입니다. 하였다.
洪見(홍견)
高麗太祖十二年六月庚申 以船二十艘載人物奔高麗
고려태조 십이년 유월 경신 배 이십소에 사람과 물건을 싣고 고려에 도망왔다.
大光顯(대광현)
光顯子道秀 顯宗時爲大將 後孫金就 高宗時爲大將 伐蒙古有功 封永順君 遂爲永順太氏 其以大爲太 未知在何時
광현의 아들은 도수이다. 현종때의 대장이고 후손은 금취로, 고종때의 대장이다. 몽고를 친 공이 있어 영순군에 봉함을 받아 영순태씨를 이루었다. 대를 태로 한 것을 이때인줄 어찌 알겠는가?
諲譔世子也 高麗太祖十七年七月 率衆數萬奔高麗 太祖賜姓名王繼 附之宗籍 特授元甫守白州 以奉其祀 賜僚佐爵軍士田宅有差 其後遼遣使 遣高麗太祖駱駝五十匹 太祖以契丹與渤海嘗連和 忽生疑貳 不顧舊盟 一朝殄滅 此爲無道之甚 不足遠結爲隣 絶其交聘 流其使三十人于海島 繁駱駝萬夫橋下 皆餓死
인선의 세자로 고려 태조 십칠년 칠월 무리 수만을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태조가 성명을 주어 왕계라 하니, 종적에 붙이었다. 특별히 원보수백주를 하사하니 이에 받들어 제사지냈다. 요좌작군사와 밭과 집을 차이를 두어 하사하였다. 그 후에 요가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 태조에게 낙타오십필을 보냈다. 태조가 거란고 발해는 일찍이 연결되어 화합하였는데, 갑자기 두마음으로 의심하여 옛맹세를 돌아보지 않아 하루아침에 멸하게 되었다. 이것은 무도함이 성한 것이니, 멀이 있는 이웃나라로 족하지 않으니, 그 사귐을 끊는다. 그 사신 삼십명을 해도로 보내니 낙타가 만부교 아래에서 번성하다가 모두 굶어 죽었다.
陳林(진림)
高麗太祖十七年十二月 與其其屬一百六十人奔高麗
고려 태조 십칠년 십이월 무리 일백육십명과 고려에 도망왔다.
朴昇(박승)
高麗太祖二十一年 率三千餘戶奔高麗
고려태조이십일년 삽천여호를 이끌고 고려에 도망왔다.
崔烏斯 文獻通考曰 烏斯羅(최오사 문헌통고에는 오사라라고 한다.)
周世宗顯德初 烏斯與其屬三十人歸周 蓋其酋豪也
주나라 세종현덕초에 오사가 무리 삼십명과 주에 돌아왔는데, 그 두목이 호걸스러웠다.
大鸞河 李勛(대난하 이훈)
宋太祖太平興國四年 平晉陽 移兵幽州 鸞河率小校李勛等十六人 部族三百騎投降 太宗以爲渤海都指揮使 九年春 太宗宴大明殿 召鸞河慰撫久之 謂殿前都校劉延翰曰 鸞河渤海豪帥 束身歸我 嘉其忠順 夫夷落之俗 以馳聘爲樂 俟高秋戒侯 當與駿馬數十疋 令出郊遊獵 以遂其性 因以緡錢十萬並酒賜之
송태조태평흥국 사년 평진양이 병사를 유주로 옮길 때 난하가 소교 이훈등 십육명과 부족 삼백기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태종이 발해도지휘사로 삼았다. 구년 봄 태종이 대명전에서 잔치를 베풀며 난하를 불러 오랫동안 위로 하였다. 대전 앞에서 일도교유연한이 말하길, 난하는 발해의 호걸 장수로 몸이 묶이어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그 충성스런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오랑캐의 풍속에 말을 달리며 즐기니, 고추계후를 내리어, 마땅히 준마 십여필을 내리고, 성밖에서 사냥하여 그 성품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돈 십만과 술을 내려주십시오. 했다.
右見新唐書稱六十二州 而只列六十州 淸一統志有郭州 而今不載 知唐書之有遺也 其五京之制 上京龍泉府者 今之寧古塔也 中京顯德府者 今之吉林也 東京龍原府者 今之鳳凰城也 南京南海府者 今之海城縣也 西京鴨淥府者 今未可考 而當在鴨綠江近處 然則以龍原爲東京 以鴨綠爲西京者可疑 豈鳳凰城以西 復有一鴨綠江 如遼陽之浿水歟 置朝貢道於鴨綠者 以海路通唐也 考諸日本逸史 鄧州襄陽爲朝叅之路良然 南海府之爲新羅道 亦以海路通新羅也 文獻通考及淸一統志 以鴨綠爲朝鮮道 是時無朝鮮 當從新唐書
신당서를 보면 62주를 칭하는데 단지 60주만 보였다. 청일총지에는 곽주가 있으나, 여기에는 실지 않으니 당서는 그 빠진 것을 알고 있다. 오경의 제도가 있으니 상경용천부로 지금의 영고탑이고 중경현덕부는 지금의 길림이고 동경용원부는 지금의 봉황성이며, 남경남해부는 지금의 해성현이고, 서경압록부는 지금 알지 못하는데 마땅히 압록강근처일 것이다. 그러한즉 용경을 동경으로 삼으니 압록이 서경임이 의심스러워 어찌 봉황성의 서쪽인가? 다시 압록강을 요양의 패수로 하면 고공도를 압록에 두어 해로로 당과 통한 것이다. 일본일사를 고찰해 보면, 등주 양양을 조삼하는 길로 함이 마땅하고 남해부를 신라도로 하니, 역시 해로로 신라와 통한 것이다. 문헌통고와 청일통지에 압록은 조선도이다 하니, 이때는 조선이 없으니, 마땅히 신당서를 따른다.
顯德府 本朝鮮之地 卽平壤城 周武王以封箕子 漢末爲公孫度所據 晉時陷於高句麗 唐置安東都護 爲大氏所有 中宗時賜名忽汗州
현덕부는 본래 조선의 땅으로 곧 평양성이다. 주 무왕이 기자를 봉하고, 한 말에 공손도가 일어난 곳이고, 진때에 고구려에 떨어지고, 당이 안동도호를 두고 대씨가 이를 둔 것이다. 중종때에 이름을 홀한주라 명하였다.
龍原府 東南濱海 高句麗慶州疊石爲城 周圍二十里 唐薛仁貴伐高句麗 擒善射於石城 卽此
용원부는 동남이 바다에 임하니, 고구려 경주 첩석이 성으로 하고, 주위가 이십리이다. 당의 설인귀가 고구려를 치니 활을 쏘기에 적당한 석성으로 이것인 것이다.
鴨綠府 高句麗故國城 高三丈 廣輪二十里
압록부는 고구려의 옛성으로 높이가 삼장이고, 둘레가 이십리이다.
東平府 唐李世勣征高句麗拔遼城 程明振蘇正方 大破高句麗兵於新城 皆此地 有遼河羊腸河錐子河蛇山狼山黑山巾子山
동평부는 당의 이세적이 고구려르 정벌하여 요성을 빼앗은 정명진소정방(??)이다. 고구려병사를 신성에서 크게 격파하니 모두 이 땅이다. 요하와 양양하 추자하 사산 낭산 흑산, 건자산이 있다.
銕州 漢安市縣 高句麗安市城 唐太宗攻之不下 薛仁貴白衣登城 卽此
철주는 한의 안시현으로 고구려 안시성이다. 당 태종이 공격하여 얻지 못하니, 설인귀가 백의등선한 곳으로 이곳이다.
湯州 漢襄平縣
탕주는 한의 양평현이다.
興州 漢海平縣
흥주는 한의 해평현이다.
慶州 太保山黑河之地
경주 태보산과 흑하의땅이다.
桓州 高句麗中都城 創立宮闕 謂之新國 王釗爲慕容皝所敗 宮室焚蕩 卽此
환주는 고구려 중도성으로 궁궐이 서니 신국이라 하였다. 왕 쇠가 모용황에게 깨진 곳이고, 궁실은 모두 불타니 이곳이다.
蓋州 後改辰州 以辰韓得名 井邑騈列最爲衝會 卽高句麗蓋牟城 唐太宗會李世勣 攻破之是也
개주는 후에 개진주로 진한때 얻은 이름이다. 우물과 읍락이 나란히 늘어서 있어 가장 공격하고 모이기 좋은 곳이니 즉 고구려의 개모성으로 탕태종 이세적이 공격하고 깨뜨렸다.
涑州 有涑沫江 卽曰涑沫水 涑沫 靺鞨所據
속주는 속말강이 있으니 즉 속말수로 속말은 말갈이 일어난 곳이다.
顯德府郡一 杉盧 或稱縣隸盧州
현덕부 1군 삼노로 혹 노주에 속해 있다 한다.
龍原府郡三 龍河 或稱縣隸鹽州 會農 或稱縣隸穆州 吉理 或稱縣隸賀州
용원부 3군 용하는 치주에 속하고, 회농은 목주에, 길리는 하주에 속한다.
鴨綠府郡二 盤安 隸豐州 沸流 隸正州 沸流王古地 有沸流水 爲公孫康小並
압록부 2군 반안은 풍주에 비류는 정주에 속하는데 비류왕의 고지고 비류수가 있으니 공손강이 아울렀다.
銕利府郡一 銕利 隸州未詳 漢襄平地 高句麗當山縣
철리부 1군 철리는 상세하지 못하나 한의 양평땅이라 하니 고구려 당산현이다.
府州未詳郡三 安定 銅山 高句麗東山縣 在龍泉府南 漢侯城縣 北多山險 安寧 藁離國古地
부와주가 상세하지 않은 3군 정안 동산은 고구려 동산현이고 용천부 남쪽에 있다. 한의 후성현이고 북쪽은 산이 험하다. 안녕은 고리국의 옛땅이다.
龍泉府縣五 富利 長平 幷隸龍州 貢珍 隸渤州 肅愼 佐慕 幷隸州未詳
용천부 5현 부리 장평은 용주에 속하고 공진은 발주에 속하고 숙신 좌모는 상세치 않다.
顯德府縣二十六(현덕부 26현)
山陽 漢陽 白巖 霜巖 古陴離郡地 漢屬險瀆縣 幷隸盧州 永豐 隸顯州 神仙傳仙人白仲理 能煉神丹 點黃金以救百姓 卽此地 漢遼隊縣 位城 河瑞 蒼山 龍珍 幷隸銕州 靈巖 常豐 白石 均谷 嘉利 幷隸湯州 盛吉 蒜山 銕山 幷隸興州 長寧 金德 或稱常樂 漢浿水縣高句麗縣 鷄山 漢居就縣 昔丁令威家此 去家千年化鶴來歸 集於華表柱 以咮畵表云 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來歸 城郭雖是人民非 何不學仙塚累累 花山 漢望平縣 紫蒙 漢鏤芳縣 拂涅國置東平府於此 崇山 潙水 綠城 奉集 幷隸州未詳
산양 한양 백암 상암은 옛날 비리군의 땅으로 한의 험독현에 속했다. 아울러 노주에 속한다. 영풍은 현주에 속하고 신선전에 선인 백중리가 능히 신단을 제련하여 황금으로 백성을 구하니 곧 이땅이다. 한의 요대현이다. 위성 하서 창산 용진은 철주이다. 영암 상풍 백석 균곡 가리는 탕주이다. 성길 산산 철산은 흥주이다. 장령 금덕(혹 상락)은 한의 패수현과 고구려현이다. 계산은 한의 거취현이다. 옛날 정령위가가 이것이다. 집을 떠나 천년 뒤 학이 돌아와 모이면 기둥에 꽃이 핀다 주화표에 이르길 새가 있네 새가 정령위에 있네 집떠나 천년 이제 돌아와 성곽에 비록 사람이 없어니 어찌 선총에 겹겹이 배우랴(??) 화산은 한의 망평현이다. 자몽은 한의 누방현이다. 불열국 동평부가 이 곳이다. 숭산 위수 녹성 봉집은 상세치 않다.
龍原府縣十五(용원부 15현)
龍原 永安 烏山 壁谷 熊山 薛仁貴征高句麗 與其將溫沙문 戰熊山卽此 白陽 幷隸慶州 海陽 接海 格川 幷隸鹽州 水歧 順化 美縣 幷隸穆州 洪賀 送誠 石山 幷隸賀州
용원 영안 오산 벽곡 능산은 설인귀가 고구려를 정벌하고, 그 장수 온사문과 전투한 웅산이 이곳이다. 백양은 경주에 속하고 해양 안해 낙천은 치주에 속한다. 수기 순화 미현은 목주에 속하고 홍하 송성 석산은 하주에 속한다.
右見遼史 太祖東幷渤海 得城邑之居百有三云 而郡縣名可考者 今爲百十三 可疑
五京十五府六十二州 多在今吉林烏喇寧古塔及朝鮮界 其遼東古地 雖入渤海 建置無聞 地理志賈耽所記可考 遼時東京州縣多襲其名號 非復古地 遼史謂皆渤海之舊 其實未盡然也
요사를 보면 태조 동쪽 발해를 아울르고 성읍을 얻으니 103개에 이르렀다. 군현의 이름이 가히 고찰해 보니 이제 113개에 이르고 가히 의심스럽다.
龍泉府 漢三國晉時 挹婁國地 後魏齊周時 勿吉國地 隋時靺鞨國地 唐時入渤海爲龍泉府 金時上京會寧府地 元時合蘭府水達達等路 明時建州毛隣衛等地 今寧古塔
용천부는 한나라 삼국 진때에 읍루국의 땅이다. 후에 위제조때 물길국땅이고 수때에는 말갈국땅이고 당나라때에 발해가 들어와 용천부라 하였다. 금때에는 상경회령부 땅이고 원 나라때에는 합란부 수달달등로이고 명때에는 건주 모린위등의 땅이다. 이제는 영고탑이다.
顯德府 今在吉林烏喇城東南 地理志自鴨綠江口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東北三十里 至泊汋口 得渤海之境 又溯流五百里 至九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爲寶中王所都 按顯州卽顯德府 唐先天二年 賜名忽汗州是也 遼史謂卽平壤城 又以遼所置東京之顯州 爲本顯德府地 皆誤也
현덕부는 이제는 길림 오나성 동남쪽이다. 지리지에 압록강 어귀에서 배로 백여일을 가니 이에 작은 배로 소류 동북 30리로 박작구에 이르러, 발해의 지경에 이른다. 또한 소류 오백리에 구도현성에 이르는데 옛날 고려왕도이다. 또한 동북 소류 이백리에 신주에 이르르고 육지로 4백리를 가면 현주에 이르러 조중왕때의 도읍이다. 현주는 곧 현덕부로 당의 선천 이년 혼한주명을 받은 것이 이것이다. 요사에 곧 평양성이라 하고 또한 요에서 동경의 현주를 두니 본래 현덕부 땅으로 모두 잘못이다.
龍原府 漢時玄菟郡地 晉時屬平州 隋時高句麗慶州地 唐時屬安東都護府 入渤海爲龍原府 遼時開州鎭國軍 金時石城縣 元時屬東寧路鳳凰城 金鳳凰城
용원부는 한때에 현토군의 땅이다 진때에 평주에 속하고 수때에 고구려 경주의 땅이고 당나라때에 안동도호부에 속하여 발해에 들어 용원부로 하였다. 요 때에 개주지국군이고 금때에 석성현이고 원나라때에는 동녕로 봉황성에 속하고 금때에는 봉황성이었다.
南海府 漢時玄菟郡地 後屬樂浪都尉 東漢時封沃沮 三國時平州地 晉以後高句麗沙卑城 唐置蓋州 入渤海爲南海府 遼時海州南海軍 金時澄州南海郡 元時省入遼陽路 明時海州衛 今海城縣也
남해부는 한나라때에는 현토국군의 땅이다. 후에 낙랑도위에 속하고 동한때에는 옥저에 봉함을 주었고 삼국때에 평주띵에 속하고 진나라때에 후로는 고구려 사비성에 속하였다. 당에서 개주르 두었고 발해에 들어와 남해부라 하고 요때에 해주남해군이고 금때에는 등주 남해군 원때에는 성입요양로이고 명때에는 해주위이니 이제 해성현이다.
夫餘府 漢時扶餘國地 唐置黑水都督府 入渤海爲扶餘府 又爲龍泉府 遼隸東京 金時會寧府陞上上京 元時開元路 明時三萬衛 今開元縣
부여부는 한나라때에 부여국땅이다 당이 흑수도독부를 두고 발해에 들어와 부여부라 하니 또한 용천부라고 하였다. 요때에는 동경에 속하고 금때에는 회령부승상상경이고, 원때에는 개원로 명때에는 삼만위니 이제는 개원현이다.
蓋州 漢時西盖馬縣 三國時平州地 晉以後高句麗地 唐時高句麗盖牟城 太宗取其地置盖州 入渤海仍置盖州 後改辰州 遼時辰州奉國軍 金時盖州奉國軍 元時盖州 明時盖州衛 今革平縣
개주는 한때에 서개마현이다. 삼국때에 평주땅이고 진때 후로는 고구려땅이다. 당때에는 고구려 개모성이고 태종이 이 땅을 취하여 개주룰 두니 발해에 들어와 개주를 두고 후에 개진주라 하니 요때에 진주봉국군, 금때에는 개주봉국군 원때엔느 개주 명때에는 개주위 이니 이제는 혁평현이다.
富州 漢時挹婁國地 隋時越喜國地 唐時入渤海爲富州 屬懷遠府 遼時銀州富國軍 金時新興縣 元時省 明時銕嶺衛 今銕嶺縣
부주는 한때에 읍루국땅이다. 수때에는 월희국 땅으로 당때에는 발해에 들어와 부주를 두니 회원부에 속하고 요때에는 은주부국군 금때에는 신흥현 원때에는 성 명때에는 철령위니 이제는 철령현이다.
杉盧郡 漢時玄菟郡地 晉以後高句麗地 唐時置金州 入渤海爲杉盧郡 遼時化成縣 金時蘇州安復郡 元時屬盖州路 明時金州衛 今寧海縣
삼노군은 한때에 현토군의 땅이고 진때 후로는 고구려땅으로 당때에는 금주를 두니 발해에 들어 삼노군이라 하였다. 요때에 화성현이고 금때에는 소조안복군 원때에는 개주로에 속하고 명때에는 금주위 이니 이제는 령해현이다.
忽汗河 今名虎爾哈河 源出吉林烏喇界 東北流經古會寧城北 又九十餘里 繞寧古塔城南 復折而北流七百餘里 入混同江 唐時謂之忽汗河 大氏置忽汗州 新唐志云 渤海王城臨忽汗海 金時名金水 俗謂金爲按出 亦稱按出虎水 是爲金源 明一統志忽兒海河 北流入松花江 是也
홀한하는 지금의 이름이 호이합하로 근원은 길림 오나경계에서 나오는 동북으로 흘러 옛날 회령성북쪽으로 90여리이다. 영고탑성남을 돌아 들어와 북으로 700여리를 흘러 혼동강으로 들어간다. 당나라때에는 홀한하라 하고 대씨가 홀한주를 두니 신당지에 발해왕성이 홀한해에 임해있다. 금나라때에는 금수라 하는데 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칭하여 호수라 하니 이것은 금에서 기원하니 명일통지에 홀아해하라 하니 북으로 흘러 송화강에 들어가니 이것이다.
上京城 在今寧古塔城西南 唐書曰 天寶末大武藝 徙上京 直舊國三百里忽汗河之東 賈耽曰 自安東都護府東北 經古蓋牟新城 又經渤海之長嶺府千五百里 至渤海王城 以此考之 當在寧古塔西南境 與上京相近 明一統志 今滅遼 設都於渤海上京 是也
상경성은 지금 영고탑성 서남에 있다 당서에 말하길 천보말에 대무예에 상경으로 천도하니 옛나라에서 곧바로 300리로 홀한하의 동쪽이다. 고탐이 말하길 안동도호부 동북쪽으로 옛날 개모신성이다 또한 발해의 장령부 천오백리로 발해왕성에 이르르는데 이것을 생각해 보니 마땅히 령고탑 서남방에 있다. 상경은 서로 가까우니 명일통지에 이제 요에 멸망하여 도에 발해상경을 만드니 이것이다.
平壤 漢樂浪郡 後爲高句麗王所都 亦曰長安城 一名王儉城 唐平高句麗 置安東都護府於此 後沒於渤海 在今朝鮮界內
평양은 한나라때에 낙랑이고 후에 고구려왕의 수도로 장안성이니 일명 왕검성이다. 당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안동도호부를 이곳에 두니 후에 발해가 멸망하니 지금 조선의 경계내에 있다.
郭州 唐置郭州 渤海因之 後屬於遼 載記遼以鴨綠江北與高麗 高麗築興銕通龍龜郭六城 今在朝鮮界內
곽주는 당이 곽주를 두고 발해에서 인하니 후에 요에 속하였다. 요에 기록되길 압록강 북쪽 고려이다. 고려가 흥,철, 통 용 귀 육성을 쌓으니 이제 조선의 경계내에 있다.
慕州城 本渤海安遠府 在淥州西二百里 淥州卽鴨綠府 在今朝鮮界內
모주성은 본래 발해안원부로 녹주서쪽 이백리로 녹주는 압록부니 지금 조선의 경계내에 있다.
右見淸一統志 得渤海之地於我國境內者三 曰平壤曰郭州曰慕州 而謂郭州在鴨綠之北 慕州在鴨綠之西 則亦可疑也 按新羅統合後 東北以泉井郡爲界 今德源郡也 西北以唐岳縣爲界 今中和府也 自中和以東祥原遂安谷山 以抵于德源 皆其邊塞也 以外咸鏡平安二道之地 皆爲渤海有矣 及新羅之衰 弓裔始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黔及甑城赤衣黃衣賊明貴等皆降 是時渤海與契丹 未及交兵 而已失其南鄙於弓裔也 及契丹破渤海 所經理者只鴨綠以北 故鴨綠以南渤海郡縣沿革 遼史闕焉 無以考也 唐書云 渤海南接新羅 以泥河爲界 文獻備考曰 泥河當在德源界內者 非也 以遼史考之浿水一名泥河 生蓒芋草 故亦稱蓒芋濼水 此指遼東京之水也 遼東京者 卽今遼陽縣也 遼史以東京 謂卽渤海中京顯德府 本箕子所封平壤城也 淸一統志辨定甚詳 盖遼史以東京爲平壤 故又載浿水焉 其所謂一名泥河之浿水 乃我國平壤之浿水 今大同江也 新羅渤海分界處 正在大同一帶耳
청일통지를 보건데 발해의 땅을 얻어 나의 나라에 3개가 있는데 평양 곽주 모주이다. 곽주는 압록의 북쪽이고 모주는 압록의 서쪽이니 조금 의심스럽다. 신라가 통합한 후에 동북이 천장군과 경계하니 지금의 덕원군이다. 서북은 당악현과 경계이니 지금의 중화부이다. 중화는 동으로 상원과 안곡산에 이르르니, 덕원과 만나, 이것은 모두 변방으로 함경과 평안 이도의 땅 밖이다. 모두 발해에 있다. 신라가 약해지고, 궁예가 처음 패강 서쪽 열셋을 진압하니 평양성주 현, 증성주 적의, 황의 적명귀 등이 모두 항복하니 이때에 발해가 거란과 함께 병사를 일으겼으나 그 남쪽을 궁예에게 이미 잃었다. 거란이 발해를 깨뜨리니 경계가 단지 압록의 북쪽이니, 옛날 압록의 남쪽 발해의 군현이 따랐다. 요의 궁궐이니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당서에 말하길 발해남쪽은 신라와 접했는데 니하가 경계이다. 문헌비고에는 니하는 마땅히 덕원의 경계내에 있다는 것은 잘못이다. 요사고에 패수가 일명 니하라 하니, 한우초가 난다. 역시 한우를 낙수라 칭하니 이것은 요의 동경의 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의 동경은 지금의 요양현이니 요사의 동경은 곧 발해의 중경 현덕부로 본래 기자의 평양성을 봉함받은 곳이다. 청일통지에 변별하여 상세히 정하니 요사의 동경은 평양으로 고로 패수이다 소위 나하가 패하인 것이니 우리나라의 평양의 패수이다 이제는 대동강인 것이니 신라 발해를 나누는 경계로 대동은 귀모양의 띠인 것이 옳다.
職官考(직관고)
文 職(문직)
宣詔省 左相 左平章事 侍中 左常侍 諫議 中臺省 右相 右平章事 內史 詔誥舍人 政臺省 內閣相 居左右相上 左司政 右司政 比僕射居左右平章事之下 左允 右允 比二丞
선조성에는 좌상과 좌평장사, 시중, 좌상시가 있어 의논하여 간하고, 중대성에는 우상, 우평장사, 내사가 있어 궁궐의 일을 고하며, 정대성에는 내각상이 있어 좌우상위에 거하고, 좌사정과 우사정이 있어 복사에 비교되는데 좌우평장사의 아래이다. 좌윤과 우윤이 있는데 승상과 같은 것이다.
忠部 卿 居司政下
충부의 경은 사정의 아래에 있다
仁部 卿
인부 경
三秩以上 紫衣牙笏金魚
3질 이상은 자주색 옷에 상아 홀(허리에 끼우거나 들고 다니는 조그만 판 같은 것), 금 어(허리에 차는 장식품)를 한다.
五秩以上 緋衣牙笏銀魚
5질 이상은 붉은 옷에 상아 홀, 은 어를 한다.
六秩以上 淺緋衣木笏
6질 이상은 엷은 붉은 옷에 나무 홀을 한다.
八秩 綠衣木笏
8질 이상은 녹색 옷에 나무 홀을 한다.
遼天顯四年 太宗幸遼陽 使人皇王 備乘輿羽衛以迎 乾享五年 聖宗巡東京 留守具儀衛迎車駕 盖故渤海儀衛云
요 천현 사년 태종이 요양으로 가 인황왕을 시켜 깃털달린 수레를 같추어 호위하여 맞이하고, 건순 오년 성종이 동경으로 가 예를 갖추어 호위하며 수레를 맞이하는 것은 모두 옛날 발해의 예의인 것이다.
按宋史 太祖問趙普 拜禮何以男子蛫 以婦人不蛫 普問禮官不能對 王溥孫貽孫以練達稱曰 自唐太后朝 婦人始拜而不蛫 大和中幽州從事張建章 著渤海國記 備言其事 普大稱之 意其書多載渤海儀文 而東國不傳 唐藝文志 張建章渤海國記三卷
송사에 태조가 조보에게 물었다. 절하는 예에 남자는 어찌 궤와 같이 하는데 부인은 그러지 아니한가? 보가 물음에 예관을 능히 알지 못하니, 왕보손이 손자에게 남긴 연달에 말하길(??) 당태후때에 부인도 절하기 시작했는데 궤가 아니었다. 대화중에 유주종사 장건장이 발해국기를 썼는데 그 말과 일에서 이를 칭하길 그 책에는 발해의 예의가 문장이 많이 실려 있는데, 동국에 전하지 않는다. 당 예문지에 장건장발해국기 삼권이 있다.
王曰可毒夫 曰聖王 曰基下 命曰敎 王之父老王 母曰太妃 妻曰貴妃 長子曰父王 諸子曰王子 官品曰迭
왕을 가독부 성왕 기하라 하고, 명을 교, 왕의 아버지를 노왕, 어머니를 태비, 처를 귀비, 장자를 부왕, 여러 아들을 왕자, 관품을 질이라 하였다.
國書考(국서고)
武王與日本國聖武天皇書
武王啓 山河異域 國土不同 延聽風猷 但增頃仰 伏惟大王 天朝受命 日本開基 奕葉重光 本支百世 武藝忝當列國 濫總諸藩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但以天涯路阻 海漢悠悠 音耗未通 吉凶絶聞 親仁結援 庶叶前經 通使聘隣 始乎今日 謹遣寧遠將軍郎將高仁義 游將軍果毅都尉德周 別將舍那婁二十四人 ꥍ狀 幷附貂皮三百張奉送 土宜雖賤 用表獻芹之誠 皮幣非珍 環慚掩口之誚 主理有限 披膳未期 時嗣音徵 永敦隣好
무예가 아룁니다. 산과 물이 다르고 나라 땅이 다르지만, 천황의 풍모와 지략을 오래 전부터 들어와서, 고개 숙여 우러르는 마음이 더할뿐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천황의 나라는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일본이 건국된 이래, 훌륭한 임금이 이어지고, 자손이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무예는 욕되게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외람되게 여러 번국(藩國)을 아우르게 되어,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멀리 하늘 끝에 있어 길이 막히고, 큰 바다마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어서, 지금껏 소식을 통하지 못하고, 좋은 일과 불행한 일에 제대로 축하하고 위문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진 나라와 가까이 하여 서로 돕고 의지하는 일은 옛날의 가르침에 따르고자 하였지만, 사신을 보내 이웃 나라를 방문하는 일이 오늘에야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삼가 영원장군. 낭장 고인의. 유장군. 과의도위 덕주. 별장 사나루등 24인으로 하여금 서장(書狀)을 지니고, 아울러 담비 가죽 300장을 받들어 가져가도록 하였습니다. 보내는 토산물이 비록 천한 것이지만 변변치 못한 물건을 바차는 정성이나마 나타내고자 하며, 가죽 예물이 진귀한 것이 못 되어 말없는 꾸짖음이 있으실 것 같아 부끄러울 짜름임니다. 이치데로 일을 주관하고자 하나 한계가 있고, 우러러 뵙고자 하나 기약이 없지만, 때때로 소식을 받들며 영원히 이웃나라와 돈둑히 지내고자 합니다.
文王與日本國聖武天皇書
欽茂啓 山河杳絶 國土敻遠 仰望風猷 惟增傾仰 伏惟天皇聖殿 至德遐暢 奕葉重光 澤流萬姓 欽茂忝係朝業 濫總如始 義洽淸深 每修隣好 今彼國使朝臣廣業等 風潮失便 漂落投此 每加優賞 欲待來春放廻 使等貪前苦請乃年歸去 祈辭至重 隣義非輕 因備行資 卽爲發遣 仍差若忽州都督胥要德等 充使領廣業等 今送彼國 幷附大蟲皮羆皮各七張 貂皮六張 人蔘三十斤 蜜三斛 進上至彼 請檢領
문왕이 일본국 성무선황에 보내는 서
흠무가 아룁오니, 산과물이 아득히 멀고, 나라 땅이 멀ᄅ기 떨어져 있지만, 우두커니 천황의 풍모와 지략을 바라보며, 고개 숙여 우러르는 마음만 더할 뿐ᄂ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데, 천황의 성스러운 예지로 지극한 가르침이 멀리까지 퍼짐으로써, 대대로 훌륭한 임금이 이어지고, 으혜가 만백성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흠무는 과분하게 선조의 대업을 이어받아 외람되게 국내 일을 총괄함이 처음 그대로입니다. 아울러 의로움이 두루 미치고 정이 두텁게 되도록 매번 이웃 나라와 돈둑히 지내고자 합니다.
지금 그쪽 나라의 사신 평군조신광업 등이 충파에 휩쓸려 길을 잃고 이 곳에 표류해 왔는데, 매번 후한 상을 주면서 명년 봄에 돌려보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신들이 앞서 겪은 고통을 호소하여 금년에 들어갈 것을 요청하였는데, 간청하는 말이 진중하고 또 이웃 나라와의 의리도 가벼히 여길 수 없어, 채비를 하는 데로 즉시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이에 약홀주도독 서요덕 등을 사신으로 삼아 과업 등을 그쪽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시켰습니다. 아울러 범가죽과 큰곰가죽 7장, 표범가죽 6장, 인삼 30근, 꿀 3곡을 진상하오니, 그곳에 도착하면 잘 살펴 받아주십시요.
부음에 관한 일은 따로 보내는 편지에 갖추어 아룁니다. 엎드려 생각건데, 천황폐하께서 모든 일에 만복하시고 침시에도 항상 건승하시길 빕니다.
숭린이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다가 갑자기 상을 당하여 왕위에 오르니, 관료들이 의로움에 감복하여 뜻을 바꾸고 감정을 억제하였습니다. 이에 국가 기틀을 다시 지속시키고, 선왕들의 업적을 삼가 따를 수 있게 되어, 마침내 조정의 기강이 옛날과 같이 되고, 영토도 처음과 같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보니 실로 천황의 은혜를 크게 입었지만, 검푸른 바다가 땅을 뒤흔들고 파도가 하늘까지 넘쳐서, 선물을 받들어 올리고자 하나 어쩔 도리없이 헛되이 고개 숙여 우러르는 마음만 더하였을 따름이였습니다.
이에 삼가 광간대부. 공부낭중 여정림 등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인사를 드리고, 아울러 옛날의 우호를 다지도록 하였습니다. 많지 않은 토산물을 보내드리며, 구체적인 내역은 EK로 보내는 서장에 밝혀 놓았습니다. 글이 거칠고 혼란스럽지만 이만 줄입니다.
하늘에서 화를 내리시어 할아버지 대행대왕께서 대흥 57년(793) 3월 4일 훙서(薨逝)하셨습니다.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고자 한다면 좋은 일과 불행한 일을 반드시 알려야 할 것 이지만, 검푸른 바다가 가로놓여 늦게야 알리게 되었습니다.
숭린은 불초의 자식으로서 상을 당하는 화를 불러들었는 데에도 스스로 죽지 못하였으니, 불효를 저지른 죄과로써 엄중한 벌로 고통을 받아 마땅합니다. 삼가 서장을 올려 받들어 아룁니다. 글이 거칠고 혼란스럽지만 이만 줄이옵니다. 고손 대숭린이 고개 숙여 아룁니다.
二
崇璘啓 差使奔波 貴申情禮 佇承殊眷 瞻望徒勞 天皇頓降敦私 貺之使命 佳問盈耳 珍奇溢目 俯仰自欣 伏增慰悅 其定琳等 不料邊虞 被陷賊場 俯垂恤存 生還本國 奉惟大造 去留同賴 崇璘 猥以冥德 幸屬時來 官承先爵 土統舊封 制命策書 冬中錫及 金印紫緩 遼外光耀 思欲修禮勝邦 結交貴國 歲時朝覲 위帆相望 而去木掄材 土之難長 小船泛海 不波則危 或引海不謹 遭罹利害 雖慕盛化 如艱阻何 倘長尋舊好 幸許來往 則送使雖不過二年 以玆爲限 式作永規 其隔年多少 任廳被裁 裁定之使 望於來秋許以往期 則德隣常在 事與望則異 足表不依 其所寄絹二十疋絁二十疋絲二百鉤綿二百屯 依數領足 今廣岳等使事略畢 情求迨時便欲差人 送使奉諭新命之恩 使等辭以未奉本朝之旨 故致淹滯隨意依心 謹因回次 奉附土物 具在別狀 自知鄙薄 不勝羞愧
숭린이 아룁니다. 사신을 분주히 보내서 인정과 예의를 펼쳐주시는데, 우두커니 따뜻한 보살핌응 받들어 한갓 우러러 뵙기만 할 뿐입니다.
천황께서 갑자기 두터운 은혜를 내리시어 사신을 보내주시니, 아름다운 안부 말씀이 귀에 가득 차고, 진기한 선물 모습이 눈에 흘러 넘칩니다. 이에 내려 보고 올려 보며 스스로 즐거워니, 엎드려 위로되고 기뻐함이 더할 뿐입니다.
우리 사신 일행 여정림 등이 변방의 오랑캐를 미처 예상치 못하여 도적의 땅에 떨어지제 되었는데, 천황께서 이들을 구제하여 본국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게 해주셨으니 생각건데 사신의 왕래가 모두 천황의 은덕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숭린은 외림되게 부덕한 몸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다행히 좋은 시운을 타게 되어, 앞 시데의 관작을 그대로 계승하고, 과거의 영토도 그대로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황제의 명에 따른 임명장이 한겨울에도 다다랐고, 금으로 만든 도장과 자줏빛 도장 끈이 요하 밖에서도 빛을 발하였습니다.
훌륭한 나라와 예의를 닦으며 귀국과도 교분을 맺어, 철마다 천황을 배알하는 배들이 돛이나 돛대를 서로 마주 대할 수 있을 만큼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려고 생각하지만, 배를 만들 큰 나무의 재목을 고르려 하나 우리 땅에서는 나는 것이 없고, 작은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면 침몰되거니 그렇지 않으면 위험에 빠지곤 하옵니다. 또 때로는 바닷길을 잘 못 인도하여 오랑캐에게 해를 당하기도 하니, 비록 천황의 성대한 교화를 사모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난관들을 어찌 하겠습니까
만일 과가의 우호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고자 일본에 왕래하는 것을 다행히 허락해 주신다면, 파견하는 사신 숫자를 20명을 넘지 않게 하고, 이를 한계로 하여 영원한 규정을 삼고자 합니다. 다만, 몇 해를 걸려서 파견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 쪽에서 재가를 맡기고자 하오니, 결정 사항을 전하는 사신을 내년 가을에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그곳으로 건너가는 기한에 대해서 허락하시는 바가 있으면 덕을 함께 하는 이웃으로 항상 남아있을 것입니다. 또 일이 바라던 것과 다르게 처리되면 동의하지 않는 사실을 충분히 표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보내주신 견20필, 시20필, 명주실100구, 면200순은 수량데로 잘 받았습니다.
이제 어장진인광악 등이 사신 업무를 대략 끝마쳤으므로 귀국시킬 적당한 날짜를 정성껏 정하고자 하였고, 그 길에 사람을 뽑아 귀국 사신들을 전송해 드리고 아울러 새로 하명하실 은혜에 감사 드리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신들이 본국에 뜻을 미처 받지 못하였다고 하여 사양하였고, 또 감히 지체를 시킬 수도 없어서 그들의 뜻에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삼가 귀국하는 사신편에 토산물을 받들어 보내드리며, 구체적인 것은 함께 보내는 다른 편지에 적어 놓은 대로입니다. 보내드리는 물건이 비루하고 천박한 것은 스스로 알고 있기를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三
崇璘啓 使賀萬 卽賀茂也 等至 所貺之書及信物 絹絁各三十疋絲二百鉤綿三百屯 依數領足 慰悅實深 雖復巨海漫天 滄浪浴日 路無倪限 望斷雲霞 而巽氣送帆 指期舊浦 軋涯斥候 無闕糇糧 豈非彼此契齊 暗符人道 南北義感 特叶天心者哉 崇璘 菈有舊封 纘承先業 遠蒙善獎 聿修如常 天皇遙降德音 重貺使命 恩從懷抱 慰諭慇勤 况復俯記片書 眷依前請 不遺信物 許以年期 書疏之間 喜免瑕類 庇廕之顧識異他時 而一葦難航 奉知實諭 六年爲限 窃憚其遲 請更貺嘉圖 幷廻通鑑 從其期限 傍合素懷 然則向風之趣 自不倦於寡情 慕化之勤 可尋蹤於高氏 又書中所許 雖不限多少 聊依使者之情 省給行人之數 謹差衛軍大將軍左熊衛都將上柱國開國子大昌泰 充使送國 兼封附信物如別狀 土無奇異 自知差惡
숭린이 아룁니다. 사신 내장하만 등이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고, 내려주신 서장과 선뭉 견.시 각 30필, 명주실 200구. 면 300둔을 수량대로 잘 받았으니, 실로 기쁘고 위로됨이 그지없습니다.
비록 다시 큰 바다가 하늘까지 넘쳐흐르고 푸른 파도가 태양을 적시어, 길이 끝간 데 없이 멀고, 저 멀리 하늘에 구름과 노을만 바라보인다 해도 동남쪽 바람에 돛단배를 띄워보내 고향 포구로 기일에 맞춰 돌려보내고 북서쪽 하늘 끝의 날씨를 헤아려 식량에 부족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곳과 이 곳이 서로 합티되어 의도하지 않아도 인간 도리에 부힙되고, 남쪽과 북쪽에서 서로 의로움에 감복되니, 특히 하늘의 마음에 합당한 일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숭린은 과가의 영토를 물려받고 선왕들의 위업을 이어받아, 멀리서 훌륭한 가르침을 받으며 조상들의 업적을 항상 갈고 닦고 있습니다. 천황께서 멀리 멀리 윤음을 내려서 거듭 사신을 보내시며, 가슴에 품어 둘만한 두터운 은혜를 베푸시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간절한 위로와 깨우침을 내려주셨습니다. 하물며 다시 글을 내리시어 전에 요청한 것을 헤아려주시고, 아울러 선물도 빠트리지 않으시며, 파견 연한 문제를 결정하여 왕래를 허락해 주셨으니, 오가는 서장에 다행히 허물을 피할 수 있게 되었고, 돌아보아 비호해 주심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특별한 것을 알겠습니다.
그런데, 작은 배로 큰 바다를 항해하기가 어렵다고 깨우쳐 주신 일은 받들어 잘 알겠지만, 6년을 기한으로 하라는 말씀은 사신 파견이 너무 늦어질까 적이 꺼려집니다. 청컨대 다시 좋은 계획을 내려시고, 아울러 두루 귀감이 될 만한 답장을 보내시길 바라오니, 파견 기한을 줄여서 처음에 건의하였던 대로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천황의 풍모를 향한 정성을 저 스스로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부리런히 교화를 사모하는 태도는 고구려의 발자취를 뒤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편지에서 허락하신 바와같이 숫자는 제한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사신 왕래의 실정을 헤아려 파견 인원을 줄입니다.
삼가 위군대장군. 좌옹위도장. 상주국. 개국자 대창태 등을 사신으로 삼아 파견합니다. 아울러 선물을 보내드리니, 구체적인 것은 함께 보내는 다른 서장에 적어 놓은 대로입니다. 토산물에 특별한 것인 없어서 스스로 부끄러운 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숭린이 아룁니다. 사신 자야선대 등이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는데, 천황께서 몸소 안부를 물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선물로 견 30필. 명주실 200구. 면 300둔을 보내주시어 수량대로 잘 받았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이 진실로 깊고, 후히 내려주시는 두터운 인정이 거듭되는 것을 엎드려 깨닫겠습니다.
연전에 보내드린 서장에 사신 왕래의 연한을 정해주시기를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작년에 서장을 받아보니 6년을 기한으로 정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숭린은 멀서도 천황을 진실로 사모하는 마음을 부지런히 전하며 기한을 단축시켜 주시도록 다시 요청하오니, 천황께서 자신의 생각을 버리시고 남의 견해에 따라 제가 요청한 대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보내드리는 예물은 진기한 것이 없어서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였지만, 윤허해주신 은덕을 각별히 입게 된 그 기쁨은 망극하기 그지없습니다.
근래에 천황께서 서장을 써서 명령을 내리시고, 이에 전하는 칙사가 조정에 도달하니, 아름다운 명려은 두터움을 더하고, 총애하는 징표들이 온통 빛을 발하였습니다. 재상 지위에 해당하는 은혜를 입고, 역시 재상 서열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니, 다만 제가 덕이 부족한 데에도 이렇게 각별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사신 대창태 등은 일을 홀로 처리하기에 재주가 부족하고 명령을 받들기에도 능력이 없었습니다만, 이들을 너그러이 받아주셨으니 기쁘고 위로됨이 갑절로 더하였습니다.
이제 가을 햇살이 잦아들어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돌아와, 먼 나라에서 온 손님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그 날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적당한 시기가 오면 지체없이 배를 돌려보내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하도록 이미 허락하였습니다. 마땅히 이들을 바래다주는 것이 도리이지만, 정해진 기일이 아직 되지 않아서 우리 사신을 동행시키지 못합니다.
삼가 돌아가는 사신 편에 보장 것 없는 물건을 보내드리오니, 구체적인 것은 함RP 보내는 다른 서장에 적어 놓은 대로입니다.
屬國考(속국고)
定安國本馬韓之種 爲契丹所破 保其西鄙 宋太祖開寶三年 其王烈萬華 因女眞使上表獻裘 太宗太平興國六年 又因女眞使上表云 定安國王臣烏玄明言 伏遇聖主 洽天地之恩 撫夷貊之俗 臣玄明誠喜誠忭頓首頓首 臣本以高句麗舊壤 渤海遺黎 保據方隅 涉歷星紀 仰覆露鴻鈞之德 被侵漬無外之澤 各得其所 以遂本性 而頃歲契丹恃其强暴 入寇境上 攻破城砦俘略人民 臣祖考 守節不降 與衆避地 僅存生聚 以迄于今 而又扶餘府 昨背契丹幷歸本國 災禍將至 無大於此 所宜受天朝之密書 率勝兵而助討 必欲報敵不敢違命 臣玄明 誠懇誠願頓首頓首 元興六年十月日 定安國王臣玄明 表上聖皇帝前 太宗優詔答之 是時宋欲討契丹故也 端拱二年 其王子因女眞使 獻馬雕羽鳴鏑 淳化二年 其王子太元 因女眞使上表 其後不至 高麗顯宗九年 定安國人骨須來奔
渤海考 終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로 거란에게 깨졌는데, 그 서쪽을 지키어 송태조 개보 삼년에 그 왕 열만화가 여진의 사신으로 하여금 표를 올리고 가죽옷을 받쳤다. 태종 태평흥국 육년 또 여진의 사신에게 표를 올려 말하길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말합니다. 성스런군주께 업드리니 천지의 은혜로 윤택하고 이맥의 풍속을 어루만지시니, 신 현명은 진실로 기뻐하며 머릴 조아립니다. 신은 본래는 고구려의 옛땅으로 발해의 남은 무리로 한 구석에 의거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세월을 보냄에 태평성대을 우러르나, 침략함을 당하여 밖은 윤택하지 못합니다. 각각 그 본성대로 있는 곳을 얻는 것이데 요즘 거란이 그 강폭함으로 폐하의 지경을 도둑질 하고 성채를 공격하여 깨뜨려 백성을 사로잡습니다. 신이 조상대를 생각하니 절도를지키어 항복하지 말하하여 무리와 함께 이땅에 피하여 겨우 모여 살고 있음이 이와 같습니다. 또한 부여부에서 앞서 거란이 배반하여 본국을 아우르니 재화가 장차 이에 이르니 큰 것이 아닌데도 이와 같습니다. 이에 마땅히 천조의 밀서를 받으니, 승병을 거느리고 토벌함을 도우니, 반드니 복수를 하고 명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신 현명 정성으로 원하며 머릴 조아립니다. 원흥육년 시월에 정안국왕 신현명이 표를 성황제앞에 올리니 태종이 조서로 이에 답하니, 이제 송이 거란을 치고자 한다. 단공 이년 그 왕의 아들이 여진의 사신으로 하여금 말과 독수리 깃털, 우는 화살을 받쳤다. 순화 이년 그 왕자 태원이 여진의 사신으로 하여금 표를 올린후에는 오지 않았다. 고려 현종 9년 정안국사람 골수가 달아나 왔다.
발해고 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