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광주문학> 84호 계간평
<수필>과 <산문수필>은 종(種)이 다르다
오 덕 렬(창작에세이작가·평론가)
2017년 11월 24일에는 <현대문학 최초 창작수필 작품인 최남선의 <가을>(1917) 발표, 1백주년 기념> 행사가 서울 ‘뉴국제호텔’에서 있었다. ≪한국 창작에세이 문인협회≫가 주최하고 ≪창작에세이 작가회≫가 주관한 행사였다. 이는 <수필의 현대문학이론화 운동>의 일환으로 <‘붓 가는 대로’를 공개 부정·폐기 선언>(2015.1.28.)에 이은 또 하나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거보(巨步)였다.
한국문인협회 1만 2천 여 회원 중 30%쯤 되는 3,500여 명의 수필분과 회원들도 최남선의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는 잘 알고 있어도 창작수필 「가을」에 대해서는 아마 금시초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라도 수필가라면 ‘으응, 이런 행사도 있었어!’하고 놀라면서 관심을 표명해 주리라 믿는다.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창작수필 「가을」을 찾아 읽고, 장르는 다르지만 한 작가의 두 작품의 문학성을 비교해보는 작업도 뜻있는 일이겠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역사적 의미가 크지만, 「가을」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의 우리 작품을 능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현대문학 1세기 동안 제작된 수필이라는 글들을 현대문학의 창작론적 시각을 가지고 대략적으로나마 검토해본 결과 다음의 네 가지의 뚜렷한 흐름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이관희: 수필문학 이론은 정립되었다 비유, 2010. 126쪽. 「‘산문수필’에 관한 소고」)
그 내용을 간추려 본다. 첫째는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 문학의 맥을 잇는 흐름. 둘째는 우리 고유의 정서를 소재로 한, 찰스 램류의 창작적인 산문수필 작품. 셋째는 창작문학으로 장르적 경향을 띠며 나타나고 있는 창작에세이. 넷째는 학문적으로 분류가 안 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절대다수의 잡문, 혹은 신변잡기 류의 글이다. 이상 ‘네 가지의 뚜렷한 흐름’은 수필의 소장르인 <에세이>·<산문수필(창작적인 에세이)>·<창작에세이>와 일치하고 있다.
여기서 소장르의 명칭에 따른 독자의 혼란을 막기 위해 몇 마디 덧붙일 수밖에 없겠다. 먼저 수필은 에세이의 역어일 뿐이다. 그러므로 ‘수필 = 에세이’라는 등식으로 생각해야 되겠다. 이는 백철 교수의 문학개론에 근거한다.
“隨筆을 말하는데 있어서 먼저 그것을 다른 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에세이>(Essay)의 槪念으로서 說明한다.”(신구문화사, 1956. 353쪽)
다음은 <산문수필>이다. 이 명칭은 김동리 교수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김동리는 poetry를 ‘창작문학’이라 이름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moulton은 prose란 말을 주석하여 ‘討議文學’이라 했지만, 우리말로서는 적합하지 못하니 이것도 ‘散文文學’이라 이름붙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구인환·구창환: 문학개론 삼영사, 63쪽)
또한 ‘시인 소설가들이 일반산문 작품을 써서 책으로 묶어낼 때 ‘수필집’이라 하지 않고 ‘산문집’이라 하는 데서 그 이름을 따라서 <산문수필>이란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이관희)
모두 현대문학 이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명칭들이지만 필자의 견해는 약간 다르다. ‘산문수필’은 수필의 진화 현상을 담아내는 데 미흡하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명칭의 일관된 이미지를 전달하지도 못 한다. 그러므로 <수필> → <창작적인 수필> → <창작수필>로 부르거나, <에세이> → <창작적인 에세이> → <창작에세이>로 불러서 독자들에게 명칭에서 오는 혼란을 막아주고 일관성을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산문수필> = <창작적인 수필> = <창작적인 에세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에세이’ 계열의 이름으로 부를 때의 뉘앙스는 몽테뉴를 시조로 한다는 메시지가 전달되는 이름이겠고, ‘수필’ 계열로 말할 때는 우리 정서에 친근감으로 다가오는 말맛의 이름이겠다.
이번 광주문학 84호 계간평에서는 앞의 두 소장르를 중심으로 얘기하고자 한다. 여태까지는 <창작수필>을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작품 평론은 창작론에 입각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수필 작품을 가지고 수필의 큰 특성인 ‘토의 현장’을 찾아보도록 하자.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임동옥 작가의 「발바닥 지문」을 텍스트로 한다.
<수필>은 이미 있는 것에 관한 토의 형식의 비창작 일반 산문문학이다
“공룡은 6,500만 년 전에 발바닥 지문과 몇 조각의 뼈만 남긴 채 지구별에서 사라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공룡은 1,000종 이상이다. 몸길이는 30cm에서 40m에 이른다. 큰 공룡은 몸무게를 150ton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경남 고성이나 경북 의성과 전남 해남이나 화순에서 발견되었다. 그 족적은 무려 6,500여 개나 되며 닭발같이 세 갈래진 작은 것부터 직경이 150cm되는 큰 것도 있다.”(「발바닥 지문」의 서두)
글의 성격은 맨 먼저 문장에서 나타난다. 위 문장은 ‘공룡’에 대해 이모저모를 설명적 문장을 통하여 토의하고 있는 작품 현장을 보인 것이다. 그렇다면 「발바닥 지문」의 소재는 무엇인가? 물론 ‘지문’이다. 소재에서 길어낸 주제는 무엇일까? ‘지문에 대한 이야기’라 하겠다. 이 수필은 처음 소재로 발견된 ‘지문’으로 글을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개념적으로 접근한 결과물이다. 즉 ‘공룡’ ‘6,500만 년 전’ ‘발바닥 지문’ ‘몇 조각의 뼈’ ‘알려진 공룡은 1,000종 이상’ ‘몸길이’ ‘몸무게’ 등 모두 개념적인 것들이다. 속담에 ‘콩 심는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했다. 소재를 개념적으로 발견하면 개념적인 수필을 쓰고, 형상적으로 발견하면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창작수필을 쓰게 된다.
창작의 기본은 <이것>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저것}이라는 창조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것>은 소재에서 발견한 원관념이라고 한다면, {저것}은 그 원관념, 즉 주제를 형상화해주는 보조관념 역할을 해야 된다. 다시 말하면 창작수필을 쓰려면 <이것>을 다른 것인 {저것}으로 보아야 된다. 왜 그러한가? 모든 예술은 비유이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무엇에 관한’ 생각을 짓는 문학이고, 창작문학은 ‘무엇’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형상화하는 문학이다.”(이관희: 형상과 개념 비유출판사, 2010. 65쪽)
몽테뉴의 <에세이>는 그가 법학과 철학을 전공했던 결과인지 철학적 요소도 많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생활인으로서의 전문성을 살리는 ‘전문적인 에세이’이면 좋겠다. 음악에서 보면 클래식과 세미클래식이 존재하듯이 말이다. 에세이와 창작에세이 문학이 해내야 하는 일은 따로 있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에서 얻은 전문적인 지식, 자기 취향에 따라 오랜 세월 쌓은 전문성, 자기 아이를 교육시키는 일, 회사에 출근하고, 장사를 해야 하는 일 등 자고 깨면 해야 할 일들이 산 너머 산이다. 그것들에 관한 문학이 에세이가 해야 할 일들이라 하겠다.
임동옥 작가의 「발바닥 지문」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전문적인 수필이다. 이런 전문적인 수필을 쓸 수 있는 전문성은 그가 ‘한국 환경생태학회 회장’을 지낸 경력에서도 짐작해낼 수 있다. 글은 아는 만큼 쓸 수 있다. 작가는 이미 수필집 게들의 잔치(2014), 꿈꾸는 굴렁쇠(2017) 등 몇 권의 작품집에서 수필과 창작적인 수필을 써왔다. 그래서일까 사실적 ‘지문’에서 ‘발바닥 지문’이란 행동반경에 대한 비유로 옮겨가려하기도 했다. ‘문득 발바닥 지문에 생각이 꽂힌다.’고 서두에서 소설의 복선처럼 슬그머니 미리 깔아놓고 있다가, 뒤쪽에서 ‘지난 6월 나의 발바닥지문을 들여다본다.’고 하여 창작적인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그렇다고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쓴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발바닥 지문」은 <수필>은 ‘창작적인 변화에 제한을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는 것 같은 작품이 되었다.
수필은 일정한 작법상의 형식이 존재한다. ‘토의 형식’이 그것이다. 토의는 엄격한 형식을 필요로 한다는 얘기다. 산문문학의 가치는 창작문학으로 대신할 수 없는 사실성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위에서 소재의 발견만 예로 들었지만 제목 다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창작수필>을 처음부터 쓰려 했다면 제목을 ‘지문’쯤으로 달았을 것이고, 그 지문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주제를 형상화했을 것이다.
에세이 작품의 비평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에세이에 대한 비평은 꼭 필요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에세이 그 자체가 일종의 비평 행위이기 때문이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현대문학의 비평 행위는 창작문학 작품을 주 비평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세이> → <창작적인 에세이(산문수필)> → <창작에세이>로의 진화 과정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몽테뉴 본래의 에세이를 계속 쓰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쓰던 대로 설명적 문장을 통한 토의적인 <설명으로 이야기하기>를 쓰면 된다. 수필은 ‘이미 있는 것에 관한 사실적 토의’이기 때문에 설명적 문장법을 중심 문장 양식으로 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몽테뉴 에세이의 형식은 몽테뉴 당시의 작품이나 현대의 작품이나 감상에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에세이>와 <창작적 에세이(산문수필)>는 이미 종(種)을 달리하는 길로 들어섰다. 그러므로 몽테뉴 본래 에세이는 비창작 일반산문 문학으로 살려나가야 할 독자적인 문학적 가치와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에세이와 창작적인 에세이는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직능의 차이인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문학에는 두 가지 직능의 문학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는 창작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비창작 일반 산문문학이다.
…… 創作文學(poetry) ……… 시, 소설, 희곡 + 창작수필
문학 ……┊
…… 散文文學(prose) ……… 수필, 평론, 비교문학
위의 도표는 몰톤(Moulton)의 분류를 구인환·구창환 교수가 문학개론(63쪽)에서 수정한 것이다. 거기에다 ‘+ 창작수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평자가 덧붙인 것이다. 산문문학이던 ‘수필’이 찰스 램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산문문학이 아닌 시, 소설, 희곡 등과 같이 창작문학의 반열에 올랐다는 진화 과정을 보인 것이다.
<산문수필>은 <수필> 진화의 첫 번째 변모의 모습이다
현대수필의 개념은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 비창작 일반 산문문학의 대표적 형식이다.(몰톤·조연현) 그렇다면 ‘창작적인 변화가 어떤 것인가’를 찾아내면 ‘<창작적인 수필(산문수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겠다. 여기서 ‘창작적’이란 말은 창작의 세계에 한 발을 들여놓은 것이라는 뜻이다. 올챙이가 개구리로 진화할 때 다리도 가지고 있고 꼬리도 가지고 있는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에세이>의 진화 현상을 <에세이> → <창작적인 에세이(산문수필)> → <창작에세이>’로 파악했다. 여기서 우리는 <창작적인 에세이>이나 <창작에세이>의 원적(原籍)은 몽테뉴의 <에세이> 문학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작법은 어떤가? 작법도 마찬가지로 창작적인 에세이는 에세이의 ‘토의형식’과 창작문학의 상상적 세계의 조화로운 융합에 있겠다는 생각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창작적인 에세이>는 <에세이>와 <창작에세이>의 중간자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수필의 소장르 세 가지를 이론적으로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왜냐 하면 우리가 애써서 쓴 글이 신변잡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신변잡기란 에세이 문장과 창작적인 에세이 문장과 창작에세이의 문장법이 마구 섞여 있는 글을 말한다. 처음부터 밥을 지으려는 것인지 죽을 쑤려는 것인지 모르는 상태의 작법이다. 우리가 현대문학 이론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렇게 계간평을 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일까? 문학 작품에 대한 비평 행위, 그것은 곧 그 문학에 대한 이론 연구이며 이론 공부인 것이다. 이론이 없는 문학은 진정한 문학이 될 수 없다. 뿌리가 없는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그렇다면 이론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일까. 아니다. 이론의 출처는 작품 자체인 것이다. 장성 배나무 밭에서는 지난 12월에 전정(剪定)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전정 행위가 바로 이론 연구요, 이론 공부와 같은 것이다. 전정은 좋은 과일을 얻기 위한 일이 아니겠는가. 배다운 배를 얻기 위한 작업이 전정이듯이 수필다운 수필을 쓰려면 현대문학 이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산문수필은 수필과는 달리 창작적인 기법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창작적인 수필의 소재와 주제는 작가의 정서이기 때문이다. 정서는 밖으로 표출될 때 어떤 형태를 입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달이 꼭 눈썹 같다’는 표현을 했을 때, 이 표현은 느낌이며 정서다. 달에 대한 정서가 눈썹이라는 형태를 입고 표출되는 현장인 것이다. 즉 예술적 표현이라는 뜻이다.
<에세이>는 나와 내 주변의 사사 일을 소재로 한 글이다. 사람이 말하기 위해서는 어떤 ‘느낌’이 있어야 한다. 어떤 느낌이란 인간이 외부 사물을 인식하게 되는 첫 단계인 것이다. 느낌을 가지고 어떤 판단을 하게 된다. 문학하는 사람은 그 느낌을 창작에 적용하게 된다. 그러나 장르마다 ‘느낌’을 작품 창작에 적용하는 방식이 다르다. 시인은 노랫말(시어)을, 소설가는 허구적 인물 사건 이야기를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가는 그 ‘느낌’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생각하겠는가? <정서적 이야기>인 것이다.(이관희)
기존의 수필은 전문성이 없이 쓰기 때문에 외면을 받고 있다. 자비로 출판하여 서명한 후 보내면 겉봉도 뜯지 않고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현실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가정주부 이야기를 쓴다면 가정생활에 대한 전문성을 가져야 하겠다. 생활인으로서 생활 전문성의 글을 써야 기다려지는 글이 될 것이다. 사물을 관찰하지도 않고, 메모도 하지 않고, 느낌이 특별하지도 않고, 상상하지도 않고, 독서도 하지 않고, 주제의 형상화에 고민하지도 않고…. 그냥 쉽게 구성도 없이 소재를 나열하여 사건이 일어난 시간 순서대로 쓰기 때문에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찰스 램류의 창작·창작적인 에세이를 쓰고자 한다면 <형상화로 이야기하기> 문장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형상적 문장 세계는 묘사문과 서사문 중심의 문장법이다. 찰스 램 계열의 창작·창작적 에세이는 창작적인 가치와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작적인 수필 작품에서 ‘창작적인 변화’란 실제로 어떤 것인가? 소론의 편의를 위해서 임인택 작가의 「그리하여 변산에 간다고」를 텍스트로 하여 논의를 계속하겠다.
이 작품의 제목은 산문적이다. 창작은 제목 붙이기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만약 이 수필이 창작에세이라면 제목은 아마 ‘변산반도’쯤으로 붙이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변산반도의 미’를 형상화 했을 것이다.
“변산반도를 찾아가는 길은 옛 친구를 만나려 가는 것처럼 즐거움이 앞선다.”
“다시 돌아봐도 지워지지 않는 바다, 산, 길, 바람, 사람들. 그리하여 나는 다시 변산에 갈 것이다.”
위의 앞 문장은 서두의 첫 문장이고, 뒤 문장이 종결 문장이다. 여기서 미루어 보아도 서두에서부터 끝까지 변산반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창작수필이라면 끝 문장은 은유의 완성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창작수필이 아니고 창작적인 수필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인 것이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온통 비유로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직유법으로는 ‘옛 친구를 만나려 가는 것처럼 즐거움이 앞선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절경/ 꿈결처럼 아득하다/ 노래 마냥/ ‘바람의 비듬 같은 햇살/ 이곳은 동해안처럼 물이 맑고/ 제 집에 드는 한량처럼/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오래인 것처럼’ 등이 쓰였다. 은유법에는 ‘(채석강은)자연이 오랜 세월 공들여 기록한 차곡차곡 쌓인 수만 권의 책들’이다가 있다. 직유와 은유와 같이 같은 비유의 기교 중에 의인법이 있다.(오규원: 현대시 작법 269쪽)
의인법 문장들을 보자.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멋진 길/ 길은 쉽게 앞을 보여주지 않는다/ 30번 국도는 흥겨운 풍경의 음악을 품고 있다/ 외변산 길은 바람모퉁이에서 바다를 만나 곰소항에서 바다를 버린다/ 소금기 먹은 바람이 옷깃을 잡는다/ 한낮 물이 빠진 바다는 부드러운 물살을 그려낸다/ 자 어서와 누워봐 바다는 그렇게 속삭인다/ 수천 만, 아니 수억만 년 기암괴석이 바다와 바람과 파도를 만나 깎이고 닳아 여러 신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거드럭거리는 바다/ 바다는 너의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도 모르지/ 먼저 누운 시간 위로 다시 시간이 눕고/ 오직 바다와 바람과 태양만이 그 세월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는 해가 곰소항의 허리에 반쯤 걸려있다/ 검붉은 구름이 먼 섬과 바다를 감싼다/ 파도는 발밑에서 구성지게 철썩거린다.’ 등 실로 의인법 세상이다. 의인법(personification)은 은유의 특별한 한 종류다. 의인화는 상상력이 없으면 불가능 하다. 의인화의 세계는 본질상 상상력의 세계인 때문이다.
이제 <수필은 창작적인 변화가 용인되는 대표적 산문>이라고 할 때의 ‘창작적인 변화’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그 현장을 보도록 하자.
의인법의 첫 문장,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멋진 길’에서 생각해 보자. ‘길’는 무생물이다. 옆구리가 있을 리 없다.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사람에 빗댄 비유법이다. ‘달리’는 행위는 의지적 행위다. 길에게 사람과 같은 의지가 있을 리 없다. 길이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 난 것을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고 한 것은 사람의 의지적 행위에 빗댄 말이다. 이런 표현은 모두 문학적 상상적·허구적 표현인 것이다.
문학 작품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독자 중에 ‘옆구리 있는 멋진 길이 어딨어’ 하면서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적 진실로 읽기 때문이요, 길의 마음을 사람의 마음에 빗댄 창작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본래 상상적·허구적 세계 창작을 의미한다. 제일 처음 나온 의인법 하나만 예를 들었지만 위의 의인법 문장 모두가 다 이와 같다. 위에 예를 든 비유적 표현은 모두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문학적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상상이 문학에 있어서 중대한 요소가 되어 있는 것만은 명백하고도 확실한 것이다.”(조연현: 문학개론69쪽)
“문학의 세계는 모방의 세계. 곧 허구의 세계이다.”(이상섭: 문학의 이해 34쪽)
“문학의 허구는 현실의 직접적 반영은 아니나 현실에서 완전히 담을 쌓은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닌 것이다.”(이상섭: 문학의 이해 35쪽)
이상의 글을 읽고도 창작수필이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을까? ‘수필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진솔하게 표현한 글’이라고 하는 수필가는 이제 대한민국에 없기를 바란다. 수필의 허구에 대해서 두드러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은 소설의 허구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수필에서 ‘상상은 되고 허구는 안 된다’는 말은 상상과 허구의 관계, 즉 동전의 앞뒤의 관계와 같은 성질을 모르는 사람이다. ‘상상은 표현되지 않은 허구요, 허구는 표현된 상상이다’(이관희)는 말을 생각할 일이다. 만에 하나 지금도 ‘수필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진솔하게 표현한 글’이란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분을 위하여 하나만 더 예를 들겠다.
이 말을 인용하는 이유는 수필이라면 반드시 사실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구상화(具象化)할 필요가 있고 따라서 상징적 우유(寓喩)도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또한 수필의 한 수법이다.(윤오영: 수필문학 입문 관동출판사, 1975. 180쪽)
소설체 문장은 객관적 묘사법이 바탕이 되어 주관적 묘사와 혼용하며 사건이 전개 된다. 소설은 사건적 서사를 서술하는 일이 중심 작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하여 변산에 간다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적 묘사문으로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필은 사건적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이야기>를 서술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주관적 묘사는 그 작가만이 느끼는 감정·정서다. 그러므로 독자에게는 객관적 정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독자에게는 사실의 정보가 될 수 없는 주관적 묘사 세계는 그 자체가 독자에게는 <상상적·허구적 세계>로 감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첫 문장 <변산반도를 찾아가는 길은 옛 친구를 만나려 가는 것처럼 즐거움이 앞선다.>는 어떤 논픽션 정보가 아니다. 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느낌을 묘사한 허구적 표현이다. 작가의 이 같은 주관적 묘사문을 감상하는 독자의 입장은 어떤가? 독자는 작가가 느낀 현장과 떨어져 있다. 따라서 독자들의 감상은 <상상적·허구적 공간>에 대한 느낌이 될 수밖에 없다. 작가가 느낀 대로 똑같은 느낌을 느끼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독자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상상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것이 수필의 창작적인 변화 현상인 것이다.
첫댓글 잘 읽고 공부하고 갑니다. 세상에 이런 수준 높은 강의를 어디서 듣겠습니까.
광주문학을 접하고 있는 분들에게 큰 공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린트해서 몇 번 더 읽어 보겠습니다.
회장님. 공부 잘하고 갑니다.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