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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여행기
모스크바까지 장거리 여행이라 지루해서, 기내 안내양에게 실내화가 찢어져, 하나 더 달라고 해도 바빠서인지 안주기에 이름을 불러주며 자주 달라고 하니, 그 예쁜 러시아 아가씨는 자기에게 관심의 표현인줄 알고, 기쁘게 두 켤레를 더 줬다.
러시아 현지 가이드가 질문하라 해서, 푸틴대통령 딸과 한국청년이 사귄다던데, 어떻게 됐냐고 물으니, 그건 참 안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 청년과 잘 아는 사이라, 그 관계를 잘 아는데, 우리나라 언론에서 너무 일찍 떠들어 연인 사이에서, 친구사이로 바뀌었다고 한다. 내가 생생히 기억이 났다. 우리나라 해군장성이 “아들과 푸틴 딸이 사귀고 있는데 아직은 뉴스에 방송하지 말라”고 했다고 대대적으로 특종이라고 나왔다. 방송하지 말라 했으면 말아야지, 말라는 말까지 내보내는 우리 언론의 저급함, 특종에 목마른 기자들은, 개인의 사생활 침해는 안중에도 없는듯하다.
그 후에 한국에 와서 살고 있어서, 푸틴 딸 경호 하느라 KGB 두 명이 경호차, 한국에 같이 와서, 산다는 둥 그런 소문만 믿고 있다가, 나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다.
그 후 그 청년은 ‘누군가’의 후원으로, 외국인은 들어가기 힘든, 어떤 러시아 좋은 기업에 들어갔고, “한국인이 싫다”고 했다 한다.
“특종에 목마른 기자님들, 남의 사생활보호 하지 못한 책임은 누가 질 겁니까?”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늘 경호원 따라다니는 여자보다 평범한 여자가 더 마누라로는,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그 청년을 위로해 주고 싶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구경하며, 소련시절 개방이 안 되었을 때, 사할린 근처를 지나는 우리나라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해서, 세계여론의 뭇매를 맞던 시기 서독 청년이 작은 비행기를 몰고 수많은 미사일이 노려보는 하늘을 뚫고 날아와, 붉은 광장에 착륙해 평화의 메시지 전단을 뿌린 일이 생각났다. 자가용 비행기는 고위급만 타던 시기라 소련군들은 대단한 소련거물(VIP)인줄 알고, 또 우리 여객기를 격추시켜서 세계여론의 비난을 받은 뒤라, 전투기가 출동해서 보고도, 모두 머뭇거리다 격추하지 못해 착륙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서방언론이 그 많은 미사일이 무슨 소용이냐고 조롱하자, 소련 측은 대한항공기는 격추했다고 욕하고, 이번에는 격추 못 했다고 왜 욕 하냐고 항의했다던 일이 기억이 났다. 그 청년은 애인에게 상처입고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왔다지만, 광장을 보니 특별히 잘 닦여진 활주로도 없는 듯 한데 어디에 내렸는지 착륙실력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그 후 개방정책을 펴던 고르바초프가 개방을 반대하는 군부들을 문책성 인사를 하니, 개방정책에 걸림돌인 거물들을 제거하기 위한 꼼수라고 비난했다지만, 내 생각은 19세정도 청년이 그런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우리나라 여객기 폭파는 소련 이 미국과 첩보전의 희생이지만, 소련 개방에 일조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모스크바는 강이 뱀처럼 도심을 통과해, 여러 강다리를 지나지만 다 모스크바 강이라 한다.
다음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비행기는, 집사람과 떨어져 앉게 좌석이 잡혔다. 먼저 창가에 앉은 아가씨에게, 집사람과 자리 좀 바꿔 줄 수 없냐고 물으니 창가가 좋은지 싫다고 했다. 서운했지만, 속으로 ‘나도 귀여운 네가 싫지는 않아!’그 다음에 복도 쪽, 내 옆에 앉는 러시아 청년에게 정중히 부탁하니 쾌히 승낙한다. 이렇게 친절한 러시아 사람들인데, 그동안 미국 첩보영화를 많이 본 나는 러시아인에게 안 좋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리면서 그 청년에게 고맙다고 하니, 괜찮다(노 프러블럼)고 한다. 하지만 아담한 집사람이 가운데에 앉았다가, 거구의 청년과 바꿔 앉았으니, 그쪽 남자 두 사람은 조금 불편 했을 것 같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보니 모스크바처럼 고층빌딩이 별로 없었다. 땅이 넓어서 고층이 필요 없기도 하지만, 옛날 왕정시절 궁궐보다 높이 지으면 안 된다는 의식 때문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다. 전기기사인 형님 눈에는 전봇대가 없고, 가로등도 건물지붕과 건물지붕끼리 강선을 연결하여, 가로등이 6차선 도로 한가운데 공중에 선에 매달려 있는 게 특이하다고 한다. 레닌이 공산당혁명 성공 후 도시명‘상트페테르부르크’를 ‘레닌그라드’로 바꾼 후에, 개방 후에는 도시이름을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바꿨다. 페테르(peter) 대제가 지은 궁전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반해서, 그대로 모방해서, 중세 유럽 왕궁 건축 화려함의, 극치를 맛 볼 수 있었다.
육 개월 동안 낮이 길고 육 개월 동안은 밤이긴 도시, 추워서 밖에 나가기가 힘드니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예술인 음악, 미술, 발레 등이 발달할 수 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유럽 보다는 물가가 저렴하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벼운 선물을 많이 샀고 술 같이 무게가 나가는 것은 출발 전날 배에 있는 면세점에서 샀다.
러시아도 해가 그리워, 햇볕이 많은 따뜻한 유월에는, 전부 나체로 잔디에 누워있다는데, 우리는 사월이라 그런 진풍경은 볼 수 없었다.
핀란드에서는 시벨리우스가 강대국에 서러움 받는 조국 핀란드를 걱정하며 작곡한, ‘핀란디아’라는 곡 등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작곡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시벨리우스 조각공원은 스테인리스 파이프를 파이프 오르간을 형상화해서, 만든 설치미술 작품이 있었다. 그 밑에서 카메라를 하늘로 향하게 찍으면 멋있게 나온다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서, 그렇게 찍었는데 과연 명작이 나왔다.
교회는 많은데 관광객들이나 구경 오고, 북 유럽인들은 대부분 일생에 세 번 교회를 간다 해서 깜짝 놀랐다. 출생할 때 한번 결혼식 때 한번 사망했을 때 한번 간다니 믿을 수 가 없었다, 그러나 종교 세금을 2-3% 걷어서, 종교 사업들을 한다 했다. 로마는 천년이나 이천년 된 건물이 많은데, 북유럽은 도시 역사가 짧아서 80년 정도 된 건물 나이가 많다고 한다. 건물 벽이 특이했는데 추워서인지 단열재가 발달 안 되어서인지 벽 두께가 1미터로 창문넓이와 비슷한 게, 전쟁대비로 포탄을 맞아도 견디게 지었다는 등 학설이 분분하다.
도시건물은 멋있고 튼튼하게 보이지만, 스웨덴 교외에 드문드문 설경 속에 한 채씩 있는 건물들을 보며 전기기사인 형님은, 저들은 전봇대가 없는 것을 보니 전기는 어떻게 쓸까? 상하수도 시설은 어떻게 할까?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들이니, 자가 발전기 돌려서 쓸까? 지하수 파서 식수는 쓴다 해도, 추운날씨에 하수도관이 얼어서 배수는 잘 안되지 않을까? 등 걱정을 해주었다. 농대교수인 형님은 저들은 주변에 논도 없지, 밭도 없지 목장도 없지, 무엇해서 먹고 살까? 하고 궁금해 하셨다. 옛날에는 바이킹이라고, 해적질이라도 해서 먹고 살았는데, 공업이 발달되어 무슨 제품을 만들어서, 지금은 먹고 산다 해도, 나도 정말 궁금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잘 모른다 하고, 난방은 아직 장작이라고 한다.
덴마크로 가는 실자라인 배에서 깜짝 놀란 것은, 춤추는 사람들이 전부 중년이상 노인부부였다는 점이다.‘애들은 오지마라’라고 한 것도 아닐 터인데, 젊은이는 사회 보는 아가씨뿐이었다. 어찌나 춤들도 멋있게 잘 추는지, 촌사람처럼 나는 주눅 들어, 구경만 하고 있자니 집사람과 춤추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은데, 집사람은 배 멀미 비행기 멀미 하느라‘건들지 말라’고 지엄한 명령을 내리고 주무시니!?
자다 일어나 물 한 병 사러 넓은 배를 헤맬 때, 어느 스웨덴 사람인지 노신사가 묻기에, 코리아에서 왔다하니, 두 팔을 벌리며 “코리아” 하며 뭐라 하더니, 마지막에 양팔을 벌리며 “즐겁게 오입하자”(펀 섹스하자) 하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지만 같이 온 일행, 여자들이 얼른 승강기에 데리고 올라탔다. 코리아에 대한 이미지가 나쁘지는 않게 보고, 포옹력이 있고 유머러스하게 나를 대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지? 동양인인 나를 무시한 농담인지 모르지만, 속으로 “나도 열 번은 찍어줘야 넘어갈까 말까한 자만심 강한 사람이다.” 고 나를 위로하며 물 사러 식당에 갔다가, 닫혀있어 되돌아 나오는데 저쪽에서 남녀 커플이 오는데, 큰 키의 미녀가 콜라병 몸매를 자랑하며, 마주 오는 잠옷대용 추리닝 바람인 나를 의식하여, 자기 옷차림을 신경 쓰며 걸어오는데, 총각이라면 유혹당할 만하게, 잔잔한 매력 있어 보였다.
그 배 안에서 스웨덴 어린 학생들이 귀여워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아이들 중 한명이 동양인이 내가 새로운 듯 말을 걸어왔다. “몇 살이니?”하고 물으니“열세 살”이라 했다. 내가 코리아에서 왔다하니,“남한이냐 북한이냐?”라고 물어 본다. 속으로‘어서 통일되어 이런 질문을 안 받았으면’하며,“이전에 북한 사람 여행객 만난 적 있니?”라고 조금 빨리 말했는데, 모두 금방 알아듣고 “전혀 본적 없어요(no, never)."라고 바로 대답했다.
발트 삼국 사람들은 영어를 다 잘한다더니, 애들도 이렇게 잘할 줄이야! 내심 놀라면서, “다음에 기회 있으면 한국 놀러오면 환영하겠다.”라며 명함을 주었더니, 서로 달라고 한다. 영어, 한문과 한글로 써진 내 명함이 재미있는지, 내 가족들 자리로 왔는데도 못 받은 어느 학생이 친구와 같이 와서 달라하여 귀여워서 또 주었다.
여행 중 반가운 것은 국산품 보는 것이다. 공항 안내 전광판 가전제품과, 주차료가 비싸 자전거를 많이 이용하는데, 여기는 불법 주차는 과태료 용지 붙이는 것이 아니라, 차를 들어서 실고 가는데, 위반되어 실고 있는 차가,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차였다.
스톡홀름 시청에서 나는 같은 공무원 시각으로, 북유럽의 공무원들은 어떻게 근무하나 보고 싶었으나, 테러 대비로, 현관에서부터 노트 크기 이상 가방은 반입금지고, 금속 탐지기로 몸을 수색하며, 입장하고 각 사무실 입구마다, 번호 열쇠가 있어 비밀번호를 알아야만 들어 갈 수 있었고, 시청 민원실도 없이 국세청에선가 한곳에서만 여권 업무고, 모든 민원을 다 해결한다고 했다. 한국은 어느 시군에서나 여권 발급하고, 어떤 사무실이고 잡상인까지 자유자재로 들락거리며, 물건도 팔고 다니는데 부러운 모습이었다.
잘사는 나라들이라 인권이 강조되어 스톡홀름 시청 강당의 노벨상 타는 곳에 웬 나체 여인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어 해설을 들어보니, 스웨덴 왕자가 나체여자 노예를 구하려다 노예 사냥꾼에게 화살 세 대를 맞은 장면의 그림이라고 했다. 화살 세 개를 든 남자 그림이 그 왕자라며 노예의 인권을 지키려다 왕자가 죽은, 숭고한 나라라는 것을 표현한 그림이라고 했다.
남편에게 맞는 여인보호소도 있지만, 아내에게 맞는 남자보호소도 있다기에 “내가 거기 가야겠네!”하고 농담했다가 마누라에게 잔소리 들었다.
점심때 레스토랑에서는 가수가 노래를 불러주는데, 풍부한 몸매에서 우러나는 성숙한 발성으로 노래를 불러주어, 우리 팀은 돌아가며 팁을 주었다. 나는 지나다 심심해서 손잡고 스탭을 조금 맞춰 주었는데 그 가수가“땡큐”라고 해주어 나도“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으로 기억 될 것이다.” “주님의 축복을 빈다.” 등 덕담을 해주니, 그 가수도 "우리의 여행이 즐겁고 행복하길 빈다." 라고 덕담을 해주었다.
노르웨이에서 케이블카와 레일열차의 장점을 합한 플레인 케이블카를 탔는데, 레일이 한줄 뿐인데 신기하게 차가 왕복 두 대로 운행되었다. 공학 박사들인, 형님들 설명을 들으니, 엘리베이터 원리로(엘리베이터무게와 같은 무게 추를 반대편에 걸어, 탑승인 무게만 부하(부담을 주는 하중)를 주는, 같은 무게의 열차를 산 정상에 도르래를 두고 운행하면, 열차 무게를 절감하고 사람숫자도 비슷하게 타주면, 차이 나는 인원무게만 부하를 주는 방식으로, 가장 에너지 절감되는, 효율적인 시스템이며, 철로 레일도 산 중간 즈음에, 열차가 만나 교차되는 부분만 복선을 깔아, 충돌되지 않게 만든 자연보호와 레일도 절감한, 아주 현명한 시스템이라는 형님들 해설이 재미있었다.
소변기도 우리나라는 아이만한 도자기 제품을 설치하는데, 요강보다 조금 큰 디자인을 설치한곳이 대부분이다 (크게 만들려면 연료소모를 많이 하고, 철거시 오염을 고려해서) 터널도 우리는 벽 전체를 미장하는데, 바위로 튼튼해서 무너질 염려가 없는 구간은 바위 그대로 둔 터널이 대부분이라, 무너질까 무섭기 도하고, 자연스럽게 동굴 맛이 나기도 해서, 이채를 띠었다.
바이킹코스 유람선을 탈 때 배에 전기 충전하는 것을 보고, 전기기사인 형님이 “이 배 전기로 가는 거냐?” 고 물으니 “그렇다”라고 대답해서 탔다. 그런데 진동도, 시동소리도 커서 다시 “오직 전기로만 가냐?”라고 물으니, “처음시동은 디젤기관을 쓰고, 탄력을 받으면 전기를 쓰는 하이브리드 배다.”라고 말해 이렇게 큰 배도 하이브리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만 본 나는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가 적어 환경이 깨끗한 나라인데도 환경을 이렇게 신경 쓰다니, 차창 밖 풍경을 아무리 봐도, 넓은 들과 산을 전부 깔끔히 정비하여 깨끗한 환경을 관광자원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배울 점으로 보였다.
2017년 어느 꿈같은 봄날에
웨이하이(위해威海)여행기
시청 고등학교 동창계에서 중국여행을 가기로 결정하자 처음에는 10명이 간다고 했다가,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정의 중추적인 간부 위치들인지라, 결국에는 5명으로 줄어 시작 부터 아쉬운 감이 드는 여행이 되었다.
위해 공항에 도착하자 오른 쪽 비행기 창문을 닫으라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 중국공산당 전당대회 기간이라, 노래방에 아가씨 도우미도 부를 수가 없다 하여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직도 감추고 싶은 것이 있는 나라인지, 은근한 공포 정치인지 알 수 없었다. 시진핑이 장기 집권하려, 은근히 겁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고 묻자, 아니라고 하며 시진핑 인기가 좋다한다.
사회주의의 통치로 엘이디(LED) 전광판 가게 간판마다, 똑같은 글씨가 줄지어 기차처럼 지나가 읽어보니, 부강, 민주, 문명, 화해, 자유, 평등, 공정, 법치, 애국, 경업, 성신, 우선 (富强, 民主, 文明, 和諧, 自由, 平等, 公正, 法治, 愛國, 敬業, 誠信, 友善 ) 글이 간자체로 지나가 저 식당들이 뭘 팔기에, 가게마다 똑같은 메뉴를 파는가? 이상하여 안내원 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아니 조금 자랑스러운듯 ‘사회주의 핵심가치’ 라고 모든 인민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외우라고 하여, 식당 종업원에게도 물어보니 줄줄 웃으며 외우고 있었다.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천안문(톈안먼) 사건, 1989년 6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난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정부의 정치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정부가 군사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과잉 진압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민주라는 글을 넣었나? 어쨌든 그 후 민주화가 조금 더 된 것 같다.
허나 변방 티베트 지방의 장족들이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자치와 독립을 외치지만, 모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무력으로 침공을 당해 강제로 주권을 빼앗고, 우리나라는 사드배치를 문제 삼고 다방면으로 보복을 하면서 대국(大國)이 소국(小國)같은 면모를 보이며 화해(和諧) 하라는 글자는 좀 안 맞는 것 같다.
한국은 50 여년 전 일이다. 우리도 일본 제국주의시절 메이지유신을 본 따라, 유신정부 때 초중고 학생들에게 ‘국민교육헌장’ 393자를 반 강제로 외우라하여 고생한 적이 있었었다. 24자 밖에 안 되니 인민들이 즐겁게 외우고 있는 것이, 후진국 같아 그 정책이 귀엽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머리가 좋아 393자를 외우라하고, 중국은 함축해서 딱 24자로 맞춘 것이 하루 24시간 내내 잊지 말고 외워라 하는 의미도 있어 보인다. 그런다고 꼭 관청(官廳)이 위압적이지만은 아닌 모양이다. 인민이 관청에 가서 따질 수도 있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보니 4성급 호텔인데, 서비스가 너무나 잘되어 있었다.
잘 드는 1회용 면도기, 세면도구, 모기향, 필기구, 콘돔 등 서비스제공 물품과, 파는 물건들은 가격표를 써 붙여 놓았다. 남녀 팬티, 양말, 음료수, 우산, 헤어드라이기 등 불편한 것이 전혀 없이 준비해 놓고도, 불편한 점이나 건의 사항 있으면 써주라는 설문 조사표까지 있었다.
인터넷선도 빼놓아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게 했고, 가위, 자 화장지 풀 등 출장 와서 사무 보는데 불편 한 것이 없고, 탁상시계도 밤에 전등 끄고 잘 경우를 대비해, 손대면 작은 시계 안 불이 껴져 옆 사람 수면을 방해하지 않고 시간을 볼 수 있게,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방식이었다.
‘취침등’ 이라고 스위치에 써 있기에 켜보니, 화장실 세면대 밑에 불을 켜서, 화장실 문을 조금 열고 자면, 잠결에 불 켜지 않고서도, 눈이 부시지 않고 화장실을 찾을 수 있게 세심한 배려를 해놓아, 감탄의 연속 이었다.
그리하여 아침에 나가며 팁을 10위안(1700원) 놓고 저녁에 와보니, 웬 쪽지가 있어서 보니, “친애하는 손님 안녕하세요? 제가 당신 방청소하고, 특별히 커피와 박하사탕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당신이 좋아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매일 행복하고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방 관리인. ( Dear guest how are you? I cleaned your room I specially prepared some coffee and mint sugar. I hope you will like them at the same time also wish you have a good luck and happy every day! room attendant. )
팁 놓는 것은 미국문화라, 나를 미국인으로 알았는지, 아니면 한국인인지 알았어도 한국말을 모르니, 영어로 썼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아는 영어선생에게 물었더니, 훌륭한 문장이라 했다.
방청소하는 사람 영어실력이 이렇게 대단하다니 깜짝 놀랐다.
다른 날보다 특별히 준 것이, 중국에서 보면 선진국인 한국산 일회용 봉지 맥심 커피라 반가워 미소가 지어졌고, 바나나도 한 개 이었다.
친구에게 말하니 우리나라호텔도 대부분 이정도 서비스는 한다고 했지만, 후진국으로만 알았던 나는 감동적이었다.
해적들을 소탕하여 무역을 활성화 시킨, 우리나라 사람인 ‘장보고’를 해신(海神) 으로 모시는 기념관이 있었다. 우리나라 관광객 유혹하려는 장사 속 아닌가? 하고 질문했는데 개방 전부터 있었다 해서,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웠다.
관광 산업으로 여기저기 볼거리를 만들었는데, 적산명신(赤山明神) 이라는 좌불(座佛) 비슷한 석상(石象)이, 우리나라 웬만한 아파트만이나 해서, 크기로는 분위기를 압도 하였지만 세련미는 없어보였다.
적산 법화원의 극락보살 분수는 하루에 두 번씩 쇼를 하는데 마침 가서 조금 기다렸더니 쇼를 하는데, 커다란 여성모습 보살 무릎 밑(膝下)에서 동자들이 빈 쟁반을 우산처럼 머리 위에 들고, 분수 물줄기를 받으면서 사면에서 천천히 음악과 함께 나오는 모습이, 여성이 아이 낳는 것을 표현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밑에는 사천왕상 입에서 불을 품어내는 모습을 연출하여, 관광객들을 위한 볼거리 제공에 심혈을 기울인 내공이 느껴졌다.
밤에는 해변공원을 구경 갔는데, 산책하는데 사람들이 많았다. 로마에 케사르 (=시이저)가 정복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기 위해 만든 개선문을 보고, 모방해서 파리에 나폴레옹 승리를 환영하는 에뜨왈 개선문을 만들었고, 또 그걸 모방해서 우리는 독립문을 만들었다.
‘위해’시는 그런 것을 모방해서 바닷가 공원에 행복문(幸福門) 이라고, 대륙 스케일로 크게 문(門) 디자인으로 빌딩 비슷하게 만들어 제일 위층에는 식당이 있는 듯 했다.
밤에 엘이디 조명을 켜 화려함을 자랑하는데, 마치 앞으로 “우리보다 더 크게 만들려면 만들어봐라!” 하고 전 세계에 외치는 듯하였다.
중국에서 최근에 만드는 관광객들을 위한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예술성 보다는 세계에서 제일 크거나, 제일 많거나에 초점을 맞추느라 세련된 예술성에는 미흡해 보였다.
세련된 예술품 대부분은 장개석이 대만으로 다 가져가, 대만 박물관에 역사적 유물과 섬세한 유물이 많았다.
가이드를 보내고 오는 길이라 호텔을 잘 못 찾아 지나는 여학생에게 길을 물으니, 그녀도 잘 모르는지 휴대폰을 꺼내 검색을 해서 화면을 보여주며 친절히 알려 주는데, 휴대폰 사용실력에 또 한번 감동을 주었다. 몇 년을 주기로 중국에 올 때 마다 무섭게 발전하며 한국을 추격하는 속도에 긴장감을 갖게 한다.
다음날에는 위공도(劉公島)에 갔다.
위공도는 중국군이 예산이 부족한 때 그 섬주민 위공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중국해군이 “이 은혜를 어떻게 답례를 해드리면 좋을까요?” 라고 물으니 “나를 그냥 유공(劉公) 이라고만 불러주라” 하여 그 섬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은 조선에서는 우암 송시열만 송공(公)이라 칭한다고 했으니, 중국에서는 공자를 붙여 주는 게 서양에서의 기사 작위를 주는 것 보다 더 큰 영예라 할 수 있겠다.
중국의 군사적 전략요충지인데, 해군에 써야 할 군자금을 ‘이화원’을 지어 서태후에게 선물로 바치느라, 무기가 부실하여 청일 전쟁에 져서, 일본에게 배상금 이억 냥을 지불하고 땅도 뺐긴, 치욕적인 불망(不忘)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섬이다.
그 시기가 우리나라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때라,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그때 중국이 이겨주었더라면 우리 역사가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세계의 중심 대국(大國)이라는, 자만에 빠져, 조공이나 바치던 일본이 감히 덤빌 줄이야, 또 그 조그만 일본과 영국에 질 줄이야 꿈에도 상상을 못했으리라.
조선족 가이드의 중국식 발음이 섞인 한국말 해설이라, 나는 좀 이해가 어려워서, 친구의 통역을 가끔 들어야 했다.
옛날 백제가 지배했던 땅 ‘산동성’ 우리나라와 위도가 같아서 기후가 비슷하고, 예부터 중국에서 이지역도 동이족이라 해서 인지, 중국 다른 지방 보다 인물들이 깔끔하고 체격들도 비교적 우리만큼 커서 정감이 가는 것은 나만 느끼는 감정일까?
십여 년 전에는 후진국이다 하고 느꼈지만, 이제 스타벅스 커피 집에서 파는 커피 값이, 한국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데, 그걸 즐기는 중국인들이 많은데 놀랐다.
관광산업을 위해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볼거리를 만들려는 노력들이 깊은 감동을 주어, 우리가 이제 중국에서 관광산업에 투자하여 볼거리를 만드는 것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읍시는 세계에서 제일 멋진 호텔을 정읍사 여인상 모습 디자인으로 지어 볼거리를 제공하고, 오랜 역사의 궁중음악 수제천등 다양한 이야기 거리를 지니는 명품 건물이라 좋은 스토리텔링 거리가 많은 것 같은데? 이렇게 좋은 아이템이 있는 곳이 드문데, 투자자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2017. 어느 가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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