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오행에 의하면 북한산은 살기(殺氣)를 품고
있고, 관악산은 화기(火氣)를 품고
있다고 해석하였는데, 관악산의 강한 화기는 한강과 목멱산이 가로막아 이를 약화시키고, 숭례문의 불을 불로 막는 현판(새로 현판)과 숭례문 인근의 큰 연못인 남지(南池)를 파서
어느 정도 화기를 갈아 앉힐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한양의 풍수지리상 취약점은, 주산인 북악산과 진산인 북한산의 거리가 불과 60리(24km)로 너무 가까워 진산(북한산)의 험한 살기가 정제ㆍ순화 되지 못한 채 한양 영역에 도달하여
퍼져 나간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한양의 지세는 험한 살기에 빠져들어, 1ㆍ2차 왕자의 난, 세조의
계유정난, 임진왜란, 연산군과 광해군의 폭정과 살상, 병자호란, 각종 사화 등 피비린내 나는 전란과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또 다른 풍수지리 전문가는 풀이한다.
또한 풍수지리상
동쪽은 해(밝음)와 봄, 생(生-창생)과 시작을 뜻하고, 서쪽은 달(어둠)과 가을, 사(死-소멸)와 끝을 뜻하며, 동쪽의 좌청룡은 남자와 적장자(嫡長子)
등 주손(主孫)을 관장하고, 서쪽의 우백호는 여자와 차자(次子–서자) 등 지손(支孫)을 관장하는데, 한양은 좌청룡(낙산)이 우백호(인왕산)와 안산(남산)에 비해
산세가 낮고 규모가 극히 허약하기 때문에 조선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장자(長子) 등 주손(主孫)보다는 차자(次子)와 여인 등 지손(支孫)들이 훨씬 활발하게 움직였고, 여인들과 외척의
발호가 드세었다.
또한 동쪽
방향은 외부세력의 침입에도 취약하여 왜적(倭敵)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풍수전문가(風水專門家)들은 지적하고, 동쪽에 대한 경계는 향후에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풍수지리상의 해석이었다.
풍수지리의 대가인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궁궐의 주산을 어디로 하느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렸는데, 왕궁의 뒷심이 되는 주산이 백악산인가,
아니면 인왕산인가
하는 주장은 조선왕조 519년 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7469C35532BD2D91F)
두 팔로 하늘을 받드는 전각의 위용
경복궁(景福宮)은 백악산의
주봉을 배경으로 정남향의 조산인 관악산을 바라보며 일직선상에 전조후침(前朝後寢–궁궐 내 앞쪽에 정무건물, 뒤쪽에 휴식건물을 배치)의 전각(殿閣)을 앞뒤좌우로
대칭을 이루어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궁궐 전각의 형태는 유교 사상이 추구하는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정신”을 적용하였는데, 건물 바닥은 땅(백성)을 표현하여 네모(地方)를
이루고, 건물의 지붕은 하늘(신)을 표현하여 원형(天圓)을
이루는 천원지방사상(天圓地方思想)을 기본으로 설계하였으며, 전각 하나하나가 하늘을 향해 우러러 받드는 형상를 취했다.
임금은 하늘(신)과 땅(백성)의 중간에
위치하여 하늘의 소명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안위를 하늘에 소청하는 하늘과 땅을 중간에서 소통하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신분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경복궁 근정전의 정면 계단(답도) 중간에는 봉황새 두 마리가 구름 위를 나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임금을 상징하는 근정전이 하늘에 떠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의 백성들은 임금이 하늘로부터 임명 받은 존재라고 믿었다. 조선의 창업자
이성계는 하늘의 아들인 단군왕검의 직계 자손이며, 따라서
임금은 하늘의 신과
땅의 백성을 중간에서 이어주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로 신성시 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153E539532BD3CD2B)
첫댓글 인왕산 자락의 궁궐은 중건되지 못하고, 백악산 자락의 궁궐은 법궁으로 남아있되 그 모습을 찾고 있으니
풍수지리 상의 주산 논쟁의 효과가 있는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