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설(序說)
한국 목공가구의 조형특징은 첫째로 한국 주택양식이 갖는 특이한 환경이 낳아 준 것이다.
한국주택이 지니는 비교적 좁고 낮은 질소(質素)한 온돌방과 여기에 부속된 대청과 주방 등
제한된 공간 속에서의 평좌생활(平坐生活)은, 자연히 가구와 장식물에 이르기까지
중국이나 서구주택의 의자생활 공간과는 매우 다른 규격과 형식차를 낳게 했다.
둘째는 4계절의 챠가 매우 분명하고 한서(寒暑)의 차가 많은 한국의 풍토에 순응하면서 길러진
고지식한 민족의 성정(性情)과 꾸밈새 적은 표현애(表現愛)가 너그럽고 억지가 없는
소직(素直)한 조형기질로 나타난 것이다.
즉 꾸밈새나 잔재주가 적고 은근한 정감이 스며 있으며 순직하고 성실
간소한 기능미(機能)美)를 으뜸으로 삼게 된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목공가구에 표현된 그 적정한 비례와 간명하고도 조촐한 면분할(面分割)이
독창적인 조형은 한국미술 전체의 흐름 속에서도 이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질서가 잡형있다.
더욱이 조선시대 문방가구(文房家具)의 공간구성과 면분할에 나타난 기능과 조형의 조화는,
모두 실내 의장(意匠) 전반에 걸쳐서 계획된 것으로서 하나의 한국적인 미의 질서라고 할 만하다.
특히 사방)탁자(四方卓子)와 문갑류((文匣類)들이 보여주는
간명한 공간구성과 쾌적한 면의 분할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상과 같은 조형미를 뒷받침해 주는 한국 주는 한국 목공예의 감추어진 공정은,
이음새와 짜임새와 짜임새 등 보이지않는 구조의 신실성(信實性)과 그 창의가 뒷받침하고 있다.
즉, 재질과 역학적인 부위에 따라서 구조적인 면과 의장적인 면을 적절하게 조화시키고 있으며,
접착제와 못은 불가피한 부위에만 사용될 뿐 맞짜임·연귀짜임·턱짜임 사개짜임 등
매우 합리적인 결구가 외면 또는 내외 2중으로 견실하게 이루어져 있다.
한국 목공가구가 지니는 또 다른 특장(特長)의 하나는 적재적소주의((適材適所主義)로
매우 다양한 수종을 골라서 쓴 점이다.
말하자면 한국은 4계절이 분명하해서 자라는 수종도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재질이 각기 다르고,
또 그 색감과 목리문도 종류가 많아서 이것을 매우재치있게 목공가구 의장에 동용하고 있다.
소나무·전나무·잣나무·향나무·밤나무·배나무·호도나무·대추나무·감나무·먹감나무·자작나무·피나무·
느티나무·오동나무·대나무 등이 목공가구에 쓰여진 주요한 수종이다.
이들 중에서 힘이 실리는 골재로 흔히 쓰이는것은 야무지고 탄력이 있는 소나무·잣나무·대추나무·
배나무·호도나무·자작나무·느티나무 등이고, 널로[板材〕 쓰이는 것은 오동나무가 가장 많았으며,
잣나무 소나무 느티나무〔槻木〕 등도 잘 쓰이는 재목이다.
한국 목공가구에 있어서 거의 불문율로 지켜진 것은 골재고 판재고 간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
손숩고 값싼 재목을 숨겨 쓰지 않은 점이다.
특히 눈에 띄는 표면에 눈가림으로 얇게 켜서 붙이는 화장재(化粧材)는 특별한 경우,
즉 휘가사나 근재(根材) 등 휘귀재질 또는 죽장과 같은 특이공법이 아니고는 천박한 것으로 여겨 왔으므로,
조선 말기 이후의 것을 제하고는 그 예가 매우 드물다.
목공가구의 구조 보강과 기능적인 필요에 따라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금속 장식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백동·놋쇠·구리 등 동석계(銅錫系) 금속과, 시우쇠 무쇠 등 철계(鐵系) 금속이 많이 쓰여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즐겨서쓴 금속은 놋쇠와 철이었으며, 특히 거명쇠라고 불리는 들기름 그을음 처리를 한
검은 시우장식은 오동·소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문방가구와 귀목반닫이·오동장 등의 장식으로
매우 품위있는 있는 조화를 이루어 왔다.
이것은 조선시대 목공가구 장식의 한 특색이기도 하다.이들 장식은 경접·돌쩌귀·들쇠고리·자물쇠 등
기능적인것과, 국수물림·새발장식·감잡이·앞바탕·귀장식 등 보강구조를 지닌 등 두 계열이 있으며,
이 두 계열의 그 의장이 모두 장식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이 장식성 의장에 나타난 한국적 인 장점은 너무나 정제된 권위에 넘치는 중국 목공가구와는 대조적이다.
말하자면 한국 장식은 소박한 맛과 순정적인 맛이 돋보이며,
특히 거멍쇠장식류의 자연스럽고 조촐한 의장은 그 바탕 재질과 더불어 한국적 취향이 짙다.
대체로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문방가구와 장롱 등 내실(內室) 목공가구류는
그 양식적인 면으로 보아서 17세기 무렵까지는 그 양감과 제식(制式)에 중국 명조양식(明朝樣式)의 여운이 짙었으며,
일부 고려시애 이래의 고격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무렵부터는 순화된 조선적인 고유양식으로 정착화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이 시대의 미술과 문학 전반에도 드러난 현상이었다.
* 사랑방가구
동양의 학문과 예술이 자라난 온상으로서, 그리고 동양적인 깊은 사색과 명상의 샘터로서
동양인들의 문방생활(文房生活)이 지니는 의의는 자못 크다.
중국에서는 이미 중세기에 있어서 이러한 서재(書齋)의 의장과 속기 없는 환경조성을 위한
문방청완(文房淸玩)의 기풍이 틀 잡혔고, 그 실제와 이상을 밝힌 『산가청사((山家淸事)』〈임홍(林洪)〉·
『 부훤야록』 〈권초(權樵)〉『동천청록(洞天靑綠)』〈조희곡(趙希?)〉·『원천매보(苑村梅譜)』
〈범성대(范成大)〉와 같은 귀한 저작들이 연이어 나왔다.
송대(宋代)의 이러한 기풍을 이어 발전시킨 명대(明代) 중국인들의 문방 취미는 한층 세련과 폭넓은 보급을 가져왔다.
따라서, 이에관한 『고반여사(考槃餘事)』〈도륭(屠隆)〉·『격고요론(格古要論)
〈조소(曺昭)〉·『준생팔전(遵生八?)』〈고염(高?)〉·『병사』〈원중랑〉같은 저서들이 연이어 나오게 되었다.
명 시대의 이러한 중국 문방생활의 세련과 유행은 당시 새 문화건설 의욕에 차 있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문방생활을 적지 않게 자극했으리라고 짐작된다.
물론 고려시대 이래로 내려오는 문방취미의 전통이 있었으나 명나라로부터 불어오는
이러한 새 풍조 때문에 조서시대 문방취미와 그 의장은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서재용 가구들의 예를 보면 서안(書案:冊床)·향상(香床)·문갑(文匣)·탁자(卓子)·책탁자(冊卓子)·
책장(冊欌) 등의 일부에 명대 문방가구양식의 여운으로 생각되는 의장요소가 적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 문방가구는 그 규격이나 표현양식에 있어서 명나라 것과
대별되는 이질적인 두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요인 때문이다.
첫째, 중국인들의 의자생활과 한국인들의 온돌방 평좌생활에서 오는 가구의 규격과 형식차, 둘재,
중국미술이 지닌 오랜 전통에서 오는 권위와 존대와 기교로 이루어진 정력적인 표현애에 대조되는
단순하고 질소하며 순정적인 한국미술감각의 차이이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조선시대의 문방가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생산되었고,
또 짙은 민족양식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주로 조선시대 후반기에 이루어진 한국주택건축의 세련과 때를 같이해서 일어난
문방(文房)의 세련과 사랑방 취미의 유행이 큰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 서재용 문방가구의 특색은 꾸밈새 없는 단순한 의장과 질소하면서도
성실한 구조에 그 대본(大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식 없는 단순한 의장과 견실한 구조미는 근대적인 공예미와도 상통되는 아름다움으로서
개개의 조선시대 목공작품에서 볼 수 있는 적정한 비례와 간결한 직선적인 구성미(構成美)는
유례가 없을 만큼 새롭다.
〈일점 속기가 없는 방〉, 이것은 문방미학에 있어서는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말이다.
문방은 언제나 밝고 조용하고 정갈해야 하며 그다지 넓을 것도 호사스러울 것도 없는
담담한 분위기를 위하여는 문방가구들이 간결한 질서를 잡아 주어야만 된다.
창 밑으로는 길찍한 문갑 한 쌍이 놓이고 간결한 사방탁자 한둘, 그리고 간격을 두고 책장·책탁자 들을
보기좋게 둘러놓고 기름하고 소박한 서안(書案)과 연상(硯床)과 다탁(茶卓)이 하나쯤 있으면
서재의 목공가구는 구태여 더 탐낼 것이 없어진다.
따지고 보면, 조선시대 문방가구로서 가장 멋진 것은 탁자류의 의장이다.
2층, 3층,4층, 때로는 그 이상 다층(多層)으로 돈 이 탁자류는 넓지 않은 한국 사랑방이나 서재의
공간을 적절하게 살려내는 가구이며, 책을 쌓기 위한 책탁자와 문방애완품(文房愛玩品)을 장식하는
감상용 진열탁자의 종류로 분류된다.
이러한 용도에 따르는 기능과 질서를 위하여서 탁자의 구조는 그 비례의 아름다움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비례의 아름다움에서 풍기는 미의 질서는 거의 실내 전반의 조형질서를 주름잡는다고 할 수 있다.
장식용 사방탁자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
이러한 용도에 따르는 기능과 질서를 위하여서 탁자의 구조는 그 비례의 아름다움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비례의 아름다움에서 풍기는 미의 질서는 거의 실내 전반의 조형질서를 주름잡는다고 할 수 있다.
장식용 사방탁자의 경우는 전부 골격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많고 때로는 아래 한 층만을 둘러막거나
중간 한 층을 둘러막아서 조그만 장 구실을 하도록 된 것이 있으나 언제나 각층 비례의 적정은
항상 그 탁자들이 지니는 조형의 성패를 판가름해 주고 있다.
이 조선시대 탁자류의 공간미는 거의 독보적인 조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직도 새로운 근대적인 입체감각과 질소 간명한 감각이 높이 평가된다.
이러한 탁자류의 공간적 아름다움에 배설(配設)되는 문방가구 중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문갑류이다.
이 문갑은 탁자류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기능 위주의 가구로서 문방주인공이 필요한 지향류(紙香類),
그 밖에 소품들을 넣어두는 서랍이 마련되어 있다.
때로는 이들 서랍이나 선반을 두껍닫이로 감추어 주는 의장도 있으며,
그 반대로 이것들을 노출시켜서 그 비례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마련한 것도 있다.
문갑은 한국의 평좌생활(平坐生活)에 알맞은 책상높이를 기준으로 하고,
대개는 한 쌍을 나란히 놓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문갑은 문방주인공의 좌우(座右)에 있어서 늘 주인공의 손이 갈뿐더러
문갑의 긴개판 위에는 필통·지통·연적·수석(壽石)등을 늘어놓는 진열대의 구실도 하게 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문방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그다지 넓고 큰 방은 없다.
따라서 많은 가구가 놓이면 번잡스럽고 답답해져서 속기가 물드는 것이다.
문갑 한두 쌍과 탁자류 몇 개에 늘 필요한 책이나 서화를 넣어 둘 책장이 한둘,
그리고 서안과 연상이 적당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책장들은 서재 안에 자리잡은 어느 가구보다도 소직(素直)하고 장식이 없는 것이 숭상된다.
따라서, 번잡스러운 백동 장식이나 조각이 들어가기보다는 조촐한 목리문(木理紋)을 길들이고
경첩이나 장식은 모두 무쇠로 만든 것을 최소한 장식한 것이 격이 높다.
흔히 중국 책장류의 의장은 하부 쪽으로 장의 넓이를 약간 넓혀서 안정감이나 권위적인
조형감을 낸 것이 많으나, 한국의 이러한 입체적 가구의 표현은 늘 단순하고 정직한 설계이며,
가식이나 작위적인 의도가 없는 것이 마음 편하다.
이들 조선시대의 책장류는 옹이가 없는 송재(松材) 또는 오동재(吾東材)나 목리(木理)가 있는
잡목들을 쓴 것이 격이 있으며 때로는 4면을 모두 한지(韓紙)로 바른 지장(紙欌)으로 된 것도 있다.
이상, 탁자·문갑·책장 등 서재의 벽 둘레에 놓이는 가구들 사이에 벽면 공간을 장식하는
벽걸이 가구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비이다.
이 고비라는 것은 납작한 목조 벽걸이의 측면에 문서나 편지를 꽂을 수 있도록 칸막이를 한 것으로서,
실내벽면 공간의 적소를 잘 포착해서 걸어 놓으면 입체적인 탁자류와 책장 사이의 공간에
점정(點睛)하는 포치(布置)의 묘를 발휘할 수 있는 가구이다.
문방의 벽 둘레에 놓이는 몇 가지 목공가구들을 놓고 나면 다음은 실내의 방바닥 공간을 메우는
책상·향상·연상 등 얕은 목공가구들이 놓여진다.
책상은 문방 평면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가구로서 조그마하고 얕은 것이 그 특색이다.
경우에 따라서 서랍이 한두 개 또는 선반이 하나쯤 마련된 조그마한 책상은
서안이라고도 불리어지는 것으로서 책 한두 권을 펴 놓으면 족한 것이다.
대개는 양측에 판족(板足)을 붙이고 거기에 간소한 풍혈(風穴) 하나씩이 둘려 있는 정도의
소박한 장식으로 족한 것이며,서랍의 고달이 장식은 고작해야 백동이나 무쇠로 된 작은 고리나
달개지쇠 하나씩이 장식될 뿐이다.
조선시대 문방책상이 크고 높지 안은 것은 방이 과히 크지 않다는 것과,
또 평좌생활의 이편(利便)이 계산된 것으로서 소반만한 크기를 넘는 것은 흔하지 않다.
향상(香床)은 책상을 닮은 것으로서 문방에 자기가 즐기는 향을 피우기에 족한 조촐한 것이며,
연상(硯床)은 일상필기와 한묵(翰墨)에 쓰이는 벼루와 벅. 붓을 놓고 쓰는 가구이다.
이 연상의 하반부는 4주(四主)만 세워서 공간을 이룬 작품이 보편적인 것이며,
상반부는 두껑이 하나 또 두 짝으로 덮이어 벼룻물을 마르지 않게 하고 먼지를 막는 구실을 하도록 되어 있다 .
그러나 빈번하게 쓰이고 또 견고해야 되는 까닭에, 치밀한 이재(梨材)나 시재(枾材) 또는 잡목 등이 많이 쓰여진다.
* 안방가구
장(欌)과 농(籠)은 주로 의류를 넣어 두는 안방가구로서 부인들의 방치레에는 가장 비중이 큰 조도품(調度品)이다.
따라서, 장롱은 신부들이 시집올 때 친정에서 가지고 오는 가장 눈에 띄는 혼인조도품(婚姻調度品)의 하나였고,
또 시가에서 주는 예물로서도 매우 정성어린 것일 경우가 많았다.
대개 과거의 여유 있는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나이 들기 전에 미리 장롱감이 될 좋은 재목들을 택해서
여러 해를 앞서서 치목(治木)해 두었었다.
이렇게 주의깊게 마련된 좋은 재료를 가지고 그 집안 단골 공장으로 하여금 정성들여 만들게 한 작품일수록,
각기 그 어버이의 취향과 그 잡안 가도(家道)가 잘 반영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장롱의 좋은 전통을 걽는 데,
매우 좋은 밑거름이 되어 준 것이다.
서울은 물론 시골의 시중에는 장전(欌廛)이 있어서 일반서민의 수요를 채워 주었고,
또 왕가나 관수(官需)를 위하여는 서울에 도공장(都工匠). 지방에 외공장(外工匠) 등의
관장(官匠)을 두어 필요한 목공품을 만들었었다.
그러나 높은 교양과 세련된 안목을 지닌 지식인들이 손이 맞는 사장(私匠)들을 시켜서 만든
작품들의 순수한 경지를 따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의 이러한 좋은 장롱들이 서울을 중심해서 많이 생산되었던 것은,
지금 그 주요한 요품들이 서울 시내의 구가(舊家)에서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짐작이 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개성(開城)에 특색있는 좋은 장롱들이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개성 사람들의 안정된 경제력 위에 고려시대 이래의 목공예의 전통이 뿌리를 잘 내렸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장롱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의 장롱이 차지하는 물질적, 정신적 의의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선 한국의 장롱은 그 주택의 구조양식 때문에 가구로서 지닌 효용성이 특이하고도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한국 부인들이 장롱에 쏟는 정애는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물질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欌)이라 함은 내실에 놓여지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서, 2층 또는 3층을
하나로 이어서 만들어진 것과 독립된 단층장 종류를 의미한다.
그 층수에 따라서 머릿장〔單層〕·2층장· 3층장으로도 불리고,
또 그 용도와 구조에 따라서 의걸이장·실장〔絲欌〕버선장·이불장·솜장등 특수장 종류로 분류되기도 한다.
머릿장과 2층, 3층 장들은 장롱 종류 중에서도 가장 주되는 것으로서 저고리·치마 등
부인들의 웃옷을 비롯해서 주요한 의복 종류를 넣어 두는 그릇이다.
의걸이장은 장 정면에 있는 큰 두짝 문을 열면 높은 곳에 횃대가 가로질러 있어서
두루마기 종류나 긴 옷을 걸어 두게 마련되어 있으며, 이것은 마치 요사이 양식(洋式)으로 된 양복장과
흡사한 내부장치가 되어 있다.
의걸이장도 외관의장에 따라 만살의걸이, 평의걸이 또는 지장의걸이로 나뉘인다.
만살의걸이라 함은 두 문짝을 마치 미닫이 창살처럼 살창으로 만들고 창살을 사(紗)나 색종이로
바른 것을 의미하며, 평의걸이는 살창이 없는 단순한 의장을 의미한다.
또, 지장의걸이는 사랑방이나 서재에서도 쓰이는 것이며,
의장이 매우 단순하고 소박한 것을 상품(上品)으로 친다.
실장은 수실과 바느질실 등을 넣어 두는 조그마한 장으로서, 버선장과 함께 대개 2층으로 된
아기자기한 귀여운 장이며, 조선시대의 실내의장에 순정적인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작품들이다.
이불장은 금침과 베개들을 겹겹이 쌓아두는 장으로서 대게 2층으로 된 것이 많다.
이 이불장과 솜장은 대개 안방에 놓여지지는 않으며, 둘째 방이나 셋째 방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이 밖에 탁자장이라는 것이 있어 어느 한 층의 공간을 애완물이나 장식품을 진열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는데,
이러한 장은 폭과 두께가 좁고 높아서 방의 어느 한구석에 놓으면 사방탁자와 작은 장을 겸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또, 이들 장에 붙은 장식무늬에 따라서 원앙새삼층장·나비삼층장 등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장의 주요 의장 재료에 따라서 지장(紙欌)·비단장·수장(繡欌)·삿자리장·죽장(竹欌)·자개장·
주칠장(朱漆欌)·화류장(樺榴欌) 등으로 분류된다.
일반 속어에서는〈장롱〉이라는 한 단어로써 장과 농을 그대로 얼버무려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장과 농는 원래 분별해야 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즉, 농(籠)이라 함은 한 층 한 층 따로 된 같은 크기의 것을
2층 또는 3층으로 포개 놓도록 설계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포개 놓고 보면 장처럼 보이지만, 농에는 대개 상층 상변에
개판(蓋板 : 몸체보다 약간 넓게 지붕 씌워진 것)이 없는 것이 다르며,
특별히 개판이 있는 농일 경우에는 따로〈개판농〉이라고 불린다.
농의 종류는 농·수농·칠롱·자개장롱·죽롱(竹籠)· 함롱·실롱·버선롱 등이 있고, 종류별 기법 재료는
장부(欌部)에서 해설한 바와 같으나, 대개 장의 경우보다 규모가 작고 농다리를 따로 만들어서
받쳐 놓도록 되어 있다.
다만 함농(函籠)이라 하는 종류는 농처럼 문짝이 정면에 달려 있지 않으며,
뚜껑을 일반 함처럼 위로 젖혀 열게 되어 있다.
따라서, 농짝만한 크기의 발이 없는 함을 2중 또는 3중으로 포개어 놓게 마련된 것을 함농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함농 종류는 오동재(吾東材)로 만든 것에 간결한 백동 장식을 붙인 것이많으며,
포개어 놓고 보면 정면에는 각 층마다 둥근 앞바탕 장식에 비녀 자물쇠를 걸어놓고
거기에 5색 비단 매듭술이 달린 열쇠를 걸어 두으로 소박하면서도 운치 있는 오동재의 목리문(木理紋)을
배경으로 해서 매우 조화된 아름다움을 보이게 마련이다.
이 밖에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농 종류 중에는 나전칠기로 된 것이 적지 않다.
특히 왕실과 귀족사회에서 호상(好尙)하던 주칠나전롱(朱漆螺鈿籠)은 일반적인 보급은 없었지만
가작(佳作)이 남겨져 있다.
대체로 내실용 장롱은 문방가구나 사랑방가구에 비해 보면 희박하긴 하지만
약간의 색채들이 도입되어 있는 절이 다르다.
이것은 부녀자들의 거실로서, 그리고 어린이들이 자라나는 방으로서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색채의 도입마저 매우 국한된 부분과 경우에 한정되어 있음은 주의할 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금색(金色)이 나는 주석장식 보다는 은색(銀色)이 나는 백동장식을 격이 있는 것으로 치며,
백동보다는 거멀장식이 더 어울리는 환경이 우리 가정에는 있는데,
이러한 특색들이 우리 목공예의 아름다움을 성격짓는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장롱의 금속장식 도안도 살펴보면 복잡한 것일수록 중국목공예 장식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고,
간소한 것일수록 한국적인 멋이 풍기는 것은 숨길 수 없는 본연의 체질이다.
말하자면, 장롱에 흔히 쓰이는 경첩도 칠보(七寶)경첩·박쥐경첩·제비초리경첩·평나비경첩·
돋을나비경첩·줄완자경첩·호패경첩·도인경첩·망두경첩·약과경첩 등 종류가 많지만,
백동으로 된 약과경첩·동그래경첩· 호패경첩 같은 단순 간결한 것이 소박한 한국 장롱에 가장 잘 어울린다.
나전칠기 같은 비교적 화사스럽고 다양한 도안이 들어 있는 바탕에도
역시 이들 단순한 경첩이 잘 들어맞는 것은 오히려 신기로울 지경이다.
장롱에 흔히 쓰이는 앞바탕 장식의 종류는 둥근앞바탕·팔괘(八卦) 앞바탕 8봉(八奉)앞탕·칠보앞바탕·
나비앞바탕·네모앞바탕 박쥐앞바탕 등이 있고, 자물쇠의 종류는 비녀자물쇠·옆트기자물쇠·붕어자물쇠·
안꽂이 나비자물쇠·용자물쇠·선자물쇠·초롱자물쇠· 약과자물쇠 등이 쓰인다
조선시대 장롱에 가장 흔하게 쓰인 목재는 비교적 조직이 치밀한 배나무· 감나무·호두나무 괴목나무 등이
뼈대로 쓰이고, 소나무, 오동나무 같은 목리(木理)가 좋고 부드러운 재료들은
판재(板材)로 쓰인 경우가 많으며, 이 소나무나 오동나무로 된 장롱은 그 고담(枯淡)한 맛이 평가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 보통 거멍쇠장식이 여기에 잘 어울린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밖에도 안방가구는 장롱 외에 함(函) 종류와 궤(櫃) 종류가 있다.
조선시대의 궤 종류에서도 중후한 맛과 견고·성실한 의장으로 한국적인 독특한
조형양식을 보여 주는 것은 반닫이들이다.
특히 거멍쇠장식의 구도와 듬직한 형태로서 인기다
높은 것은 크고 작은 강화(江華)반닫이·개성(開城)반닫이 들이 두드러지며, 박천(博川)궤를 비롯한
평안도 반닫이·경상도 반닫이·전라도 반닫이 등은 약간 기법이 거친 듯하나
쑹쑹이로 불리는 박천거멍쇠장식 등 토속적인 취향이 매우 짙다.
이러한 반닫이들은 19세기 것에 가작이 많으며, 개화 후로는〈수장궤〉라 해서 주석장식이나
백동장식이 수다스럽게 장식된 반닫이들이 유행했으나, 이로써 한국 반닫이의
높은 격조는 매우 속화(俗化)된 느낌을 금할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