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기 기념관
‘劉少奇故里’라 쓰인 문루를 들어서면 거대한 유소기 동상이 보인다. 동상은 1988년 유소기 탄생 90주년을 기념하여 유소기기념관과 함께 건립되었다. 동상은 기단을 합하여 높이가 7.1미터인데 이는 중국공산당 창건일 7월1일과 유소기의 향년 71세를 상징한다고 한다. 기단에는 강택민이 쓴 ‘유소기동지’ 다섯글자가 새겨져 있다.
동상에서 앞으로 나아가면 우측에 유소기기념관과 유소기문물관이 있다. 기념관 정문 위의 ‘유소기동지기념관’ 편액 역시 등소평이 1987년에 쓴 것이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유소기 소상이 있는데 그 밑에 새겨진 유소기의 다음과 같은 글귀가 눈길을 끈다. “내가 죽은 후 엥겔스처럼 나의 유골은 큰 바다에 뿌려달라. 큰 바다는 오대양과 접해 있으니 나는 전세계가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보려고 한다.” 이처럼 그는 철저한 사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정주의자로 몰려 죽었으니 이를 운명이라 해야 할까?
8개의 전람실로 구성된 기념관에는 유소기의 일생과 업적이 사전, 도표, 밀납 인형, 영상물 등을 통해 잘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기념관은 유소기와 관련된 800여점의 문물자료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 기념관은 천편일율적인 전시 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전시 기법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여 ‘국가 1급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물관에는 그의 부인이자 평생의 혁명동지였던 왕광미의 평생 업적이 전시되어 있다.
화명루와 일엽호
동상 앞쪽 좌측에 5층으로 된 33미터 높이의 화명루가 있다. 화명루는 1998년 유소기 탄생 100주년에 즈음해서 세운 건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어떤 학자가 이곳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두 아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매년 봄이면 주위에 버드나무가 짙고 꽃이 만발하여 마치 남송의 시인 육유(陸游)의 <유산서촌(遊山西村)>의 한 구절인
산이 겹겹 물도 겹겹 길이 없나 싶더니
버들 짙고 꽃 밝은 곳에 또 하나 마을 있네
山重水复疑无路,柳暗花明又一村
shān chóng shuǐ fù yí wú lù, liǔ àn huā míng yòu yī cūn
를 연상케 해서 집 이름을 ‘화명루’로 지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조그마한 집이었지만 이곳의 지명을 ‘화명루진’으로 이름하게 된 근거가 되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신축된 건물 안에는 영향십경과 이 고장에서 출토된 청동기, 호남의 문화명인과 청년 유소기의 소상 등이 전시되고 있다.
화명루 앞에 일엽호가 있는데 이름이 특이하다. 이것은 청나라 때 이른바 ‘양주팔괴’의 한 사람인 정판교(鄭板橋)가 포괄에게 풍죽(風竹) 한 폭을 그려주면서 쓴 제화시(題畵詩)에서 따온 명칭이다.
관하에 누워 대 흔들리는 소리 듣노라니
백성들 고통 속에 신음하는 소리 이 아닌가
우리야 지방의 말단관리이지만
가지 하나 잎새 하나 모두에 관심 두네
郑板桥 / 竹图题诗
衙斋卧听萧萧竹,疑是民间疾苦声
yá zhāi wò tīng xiāo xiāo zhú, yí shì mín jiān jí kǔ shēng
些小吾曹州县吏,一枝一叶总关情
xiē xiǎo wú cáo zhōu xiàn lì, yì zhī yí yè zǒng guān qíng
정판교가 산동성 탄현의 현령으로 있을 때의 작품으로, 대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고통받는 백성들의 신음소리 같다고 했다. 그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은 것이다. 그래서 ‘가지 하나 잎새 하나 모두에 관심을 둔다’고 말함으로써 크고 작은 백성들의 모든 생활을 염려하고 있다는 심경을 토로한 시이다. 유소기를 기념하기 위해서 조성된 이곳의 연못에 정판교의 시 구절에서 따온 ‘일엽’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유소기도 정판교와 마찬가지로 국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후세인들이 유소기를 얼마나 숭배하는지를 알만하다.
송재소(2020), 중국인문기행3 –호남성편-, 창비: 파주, pp.163-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