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에 국회도서관에서 우연히 접한 오스카 랑게의 책을 보고 무척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경제학자가 되었다는 랑게의 책은 온통 시장에서의 균형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 전해 주었던 소련이 망하기 전 이미 경제학에서는 70년대부터 맑스주의 경제학이 소련아카데미에서 사실상 추방되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사회주의 경제의 신고전파적 발전?
적어도 나에게는 조하나 보크만의 책은 70년대 이후 소련아카데미에서 시장에 관한 논문이 주를 이루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책의 전반부에서 소련의 경제학자들이 서방과의 교류 없이 독자적인 이론적 노력으로 신고전파와 동일한 방법론적 기초를 확보했다는 이야기가 서술되면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 칸트로비치다.
칸트로비치는 소련출신 경제학자로서는 드물게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인데, 선형계획이론으로 서방의 학자와 공동수상을 했다. 이 예를 통해서, 그리고 이후 서술을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전쟁 중이거나, 혹은 전후복구과정이나 투입-산출모델, 즉 자원의 효과적 이용과 관련한 수학자, 경제학자의 노력은 상호 교류없이 동일한 방법론을 창출했고, 이것이 두 개의 상이한 체제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방법론은 애초에 신고전파경제학이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기에 가치이론만을 제외하면 사회주의 경제학자와 신고전파 경제학자가 방법론적 기초에서는 동일한 기반위에 서 있다는 저자의 결론이 가능해진다.
저자는 신고전학파가 완전한 시장을 전제한다면, 완전한 계획경제에서는 선의를 가진 계획가의 존재를 가정하면서 이론을 전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신고전학파는 완벽한 이상적인 계획가가 지휘하는 중앙계획경제가 도달할 수 있는 공급, 수요 균형점을 완전경쟁의 시장에서도 도출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론을 전개하기 때문에 신고전학파는 애초부터 중앙계획경제와 친화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시장사회주의가 모든 경제학의 통합인가?
저자는 신고전학파들이 국제적 교류를 시작하면서 양 체제의 경제학적 중간점을 확보했고, 그것이 바로 시장사회주의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고 있다. 저자의 분류를 따라가면 신고전학파는 협소한 의미의 신고전학파와 넓은 의미의 신고전학파가 있는데, 협소한 부류의 신고전학파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담론을 창출하고, 신고전파 경제학을 마치 자기 것인냥 강탈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반면 80년대부터 시작된 사회주의 진영의 개혁논의는 신고전파에 입각한 시장사회주의 논의를 발전시켰고, 마침내 89년에 이르면 권위적 국가가 붕괴하고 독점이 존재하지 않는 시장과 사회적 소유가 공존하는 시장사회주의가 도래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역사는 시장사회주의가 아니라 동구 여러 나라의 경제고문으로 활동한 제프리 삭스 등이 주도한 급격한 시장으로의 전환과 사적소유로의 전환으로 사회주의가 결정적으로 붕괴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저자는 오히려 동구의 붕괴로부터 신자유주의, 협소한 의미의 신고전파 경제학이 발흥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미래
저자는 비록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지만 비권위적 국가에서 사회적 소유에 기초한 노동자 자주관리나 협동조합 등이 공존하는 시장사회주의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넓은 의미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로 분류한 또 다른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의 인용은 인상적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주의) 실험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이 실험들은 제대로 통제된 실험이라 볼 수는 없는 것들이었기에 우리가 배운 바는 여전히 일정한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정부의 소유가 만병통치약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더욱 실험해볼 여지는 분명히 남아 있다.”
내게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제대로 통제된 실험”이라는 대목이다. 나는 이 문구에서 저자가 비판해 마지않는 동구유럽을 재앙으로 몰고간 제프리 삭스의 성향과 유사한 점을 보게 된다. 저자에게나 혹은 넓은 의미의 신고전파 경제학자에게 사회주의는 사변적인 경제학자, 특히 신고전파 경제학자의 통제된 실험에 불과한 것이다.
사회주의를 단지 기술적 계산의 문제로, 실험의 문제로 접근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자신의 사업이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의 핵심이 사라지면, 그것은 더 이상 사회주의일 수 없다.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것이다. 이것이 부정되면 재앙은 곳곳에서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