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섭리에내맡김(韓) Re:하느님 섭리에 내맡김 새번역-서문(1)텍스트의 역사 / 정적주의(Quietism)
지도사제 20.11.09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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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사제 20.11.09 19:26
< 몰리노스는 교회의 판단에 즉시 승복하고 자신의 오류를 공식적으로 철회했으며, 물의를 일으킨 윤리적인 죄를 인정하고 여생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몰리노스의 저서에 나오는 단죄된 주장이
불명확하고 실체가 없다고 새롭게 평가하고 있지만, ...............................................................................
그 당시 몰리노스의 주장은 프랑스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이단인 정적주의가 출현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가 우리 시대에 선사한 8 가지 선물 1
지도사제 18.09.08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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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사제 18.09.08 10:35
<십자가의 요한이 자신의 시에 붙인 주석이 그 시에 담긴 진리를 다 드러내지 못하는 것처럼 힐데가르트가 자신이 받은 조명에 대해 붙인 주석도 그 조명의 이미지와 상징성의 깊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입니다. 만일 힐데가르트, 에크하르트 등의 신비주의자들이 그들의 말을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달했다면?
그들은 즉시 종교재판에 넘겨져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으로 교회의 역사는 아니러니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한 이들이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한 이들을 심판해왔고 그것은 앞으로도 아니 이 세상 끝날까지도 그러할 것입니다.
<마태 13>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
<오늘날 학자들은 몰리노스의 저서에 나오는 단죄된 주장이
불명확하고 실체가 없다고 새롭게 평가하고 있지만, >
거룩한내맡김영성도 마찬가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2014년말부터 2018년 8월 서울대교구로부터 승인받기 전까지 거내영을 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다 <아버지의 섭리>였습니다.
오, 지극히 흠숭하올 하느님의 뜻이여!
거룩하시고 놀라우신 하느님의 뜻에 거룩한내맡김영성을 맡깁니다!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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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ㆍ대림피정 Re: 사순피정 특강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ㅣ 서론(1) ㅣ 정적주의
지도사제 24.02.20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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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사제 24.02.20 01:20
< 이러한 것들이 코사드에 대해 밝힐 수 있는 전부이다. 한 가지 사실이 더 있다면, 그가 한 권의 책을 익명으로 발행했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은 『★ 모(Meaux)주교, 보수에 ★의 가르침에 의거한 여러 가지 기도 방법에 관한 영적인 지침들. 예수회의 한 신부』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어떤 면에서 뛰어난 작품은 아니다.
이 책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0년이나 지난 다음에서야 출간된
그의 두 번째 저서인 ★『하느님섭리에 내맡김』(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 이 아니었던들 이미 오래전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이 두 번째 책을 썼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 이것은 하나의 신비스런 이야기 ★이다. > ( 하섭내ㅣ서론ㅣpp17~18)
사랑하는 식구 여러분, 다시 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보쉬에
보쉬에(Bossuet, 1627~1704) 는 7년간 메쓰의 참사원, 10년간 파리에서 설교사, 10년간 왕태자의 사부(師傅)를 지낸 뒤 *모(Meaux)의 주교*가 되었고,
1681년의 성직자 회의에서는 프랑스 교회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오직 자기의 신앙에만 몸을 바쳐 살아온 전형적인 성직자로, 평생 가톨릭교를 설교하고, 신교도며 정적(靜寂)주의자(페늘롱과의 논쟁)며 훈고(訓詁)학자들에 대해서 가톨릭교를 옹호했다.
그의 연설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설교집(약 2007개의 설교),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662년 어전에서 행한 루브르의 사순절 설교인데,
이것은 '죽을 때까지도 회개치 않음', '섭리', '야심', '죽음' 등에 관한 설교이다.
송사(頌辭) 및 조사(弔辭)(조사에는 12개가 있다). 이것들도 사실은 설교에 지나지 않는데, 거기서는 한 인간의 생애가 교훈의 본보기로서 제시되어 있다.
예컨대 '성 베르나르 송사'(1653), '왕제비(王弟妃) 추도사'(1670), '콩데 공작 추도사'(1687).
사부로서의 필요상 그는 역사가가 되었다.
그는 〈세계사 논설〉(1681)을 썼는데, 이것은 이승의 사건들에 있어서의 섭리의 절대적 역할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종합적인 역사의 첫 시도이다.
그는 또한 왕태자를 위해 〈성서에 입각한 정치학〉(미완성)을 쓰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는 현실적인 폭넓은 견해를 보였다.
그의 견해는 프랑스의 현상이 군주제이므로 군주 정치주의자의 입장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보수주의자의 태도를 보였다.
그의 논쟁적 작품들 중 주요한 것은 〈개신교회 변동사〉(1688) 인데, 이는 가톨릭 교회의 불변성에 대해서 개혁파의 변동성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면밀히 검토된 자료에 입각하여 제작된 이 작품은 비상한 생기를 띠고 있다.
보쉬에의 모든 논쟁적 작품들은 유일한 적, 즉 개인의 독자적 양심 또는 자유 검토의 정신을 무찌르기 위해 씌어진 것으로, 가지각색 형태(개신교, 정적주의, 데카르트 철학) 아래 존재하는 적의 탈을 벗기는 데 그는 뛰어나다.
만년에 보쉬에는 자기 교구의 수녀들을 위해 〈복음서에 관한 명상록〉과 〈비의(秘義)에 관한 감사 기도〉(1695)를 썼는데,
이 작품들 속에는 이제까지 논의의 필요상 표면에 나타내지 않았던 두 가지 특성, 즉 그의 깊은 상상력과 열렬한 애정이 신비로운 토로 속에 펼쳐져 있다.
보쉬에의 문체는 바로 다음의 3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즉 용어와 표현들의 엄밀한 정확성으로 떠받쳐진 논법의 강력함, 억제된 감동, 웅대한 상상력.
[네이버 지식백과] 보쉬에 (랑송불문학사, 1997. 3. 20., G.랑송, P.튀프로, 정기수) ]
인노첸시오 12세 [ Innocentius XII ]
요약 제242대 교황(재위 1691. 7. 12∼1700. 9. 27).
루이 14세에게 황권으로부터 프랑스 교회의 독립적 입장을 주장하는 갈리카니즘 4개 조항을 철회하도록 하여 프랑스와 교황청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루이 14세의 말에 따라 페넬롱의 《성인들의 격언》을 단죄했다.
1615. 3. 13 ~ 1700. 9. 27
재위기간 1691년 ~ 1700년
본명 안토니오 피그나텔리(Antonio Pignatelli)
출생지 나폴리 근처 스피나졸라(Spinazzolo) 출신이다. 로마(Rome)에서 교육을 받았고, 교황 우르바노 8세(Urbanus VIII) 때 20세로 교황청에 들어갔다.
비테르보(Viterbo)에서 행정관을 맡았으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Innecentius X)의 사절로 토스카나(Tuscany)에 파견되었다.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는 그를 폴란드 사절로 보냈다. 1668년에 교황 사절로 빈(Wein)에 머물렀다.
1682년 교황 인노첸시오 11세(Innocentius XI)는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1682년에 파엔차(Faenza)의 주교, 1682년에 나폴리(Napoli)의 대주교를 맡았다.
교황 알렉산데르 8세(Alexander VIII)가 죽은 후, 1691년 7월 12일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Louis XIV)는 1682에 교황권과 세속권을 구별하고 프랑스 교회의 독립적 입장을 주장하는 갈리카니슴 4개 조항을 공표한 상태였다.
1693년에 인노첸시오 12세는 루이 14세에게 비어 있는 주교 자리를 주는 대가로 그 조항을 철회하도록 설득하여 프랑스와 교황청의 적대적인 상황을 해소하였다.
프랑스 캉브레(Cambrai)의 대주교인 페넬롱(Fenelon)이 《성인들의 격언(Maximes des saints)》이라는 책에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자
★ 그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루이 14세는 책을 단죄하도록 교황에게 압력을 가하였다. ★
결국 ★★ 1699년에 인노첸시오 12세는 그 책을 단죄하였고 페넬롱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
[네이버 지식백과] 인노첸시오 12세 [Innocentius XII]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세상 권력의 입맛에 따라 뒤바뀌는 중세교회의 신학, < 어제와 오늘 >의 차이는?
제가 그래서 가끔가끔, < 거내영을 받아들이는 주교님(교회 권력) 한 분만 출현하면?
거내영은 그만 X고생 끝이다. >라고 말씀드려왔던 것입니당! HaHaHa~~~ ^ ^
몰리노스 [ Miguel de Molinos ]
출생 - 사망 1628년 ~ 1696년
신비사상가
저서 영의 인도(1675년)
스페인의 신비가.
로마에 파견되어서, 설교나 저작에 임했다. 내적인 기도를 신앙의 핵심에 두는 그의 정숙주의의 사고방식은 주 저서 『영의 인도』(1675)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교황 인노첸시오 11세가 부인하는 바가 되어서, 그는 옥중에서 생애를 끝마치게 되었는데, 그의 사상은 프랑스의 귀용 부인이나 페눌롱에게 계승되었다고 한다.
신앙을 심화시키려는 그는 명상에서, 나아가서 감각이나 이성에 의하지 않고 무사(無私)의 온화함으로써 마음의 중심에 숨어있는 관상으로 향하여야 한다고 하고, 그곳이야말로 내적인 기도와 신의 은혜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다시 길을 나아가면, 모든 것이 어둠에 둘러싸여서 사라진 것 같은 고통을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인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시키고(순수화),
어떤 지지도 가지지 않는 자유로운 수동적 관상에 이르는 시련이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몰리노스 [Miguel de Molinos]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귀용 [ Jeanne-Marie Bouvier de la Motte-Guyon ]
출생 - 사망 1648년 ~ 1717년
출생지 프랑스
유파 경건주의
별칭 귀용 부인(Madame Guyon)
신비사상가
저서 기도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1685년)
프랑스의 가톨릭계의 신비가. <귀용 부인(Madame Guyon)>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된다. 병약하며 정신적으로 불행한 소녀 시대를 보낸 후, 열심히 신을 구해서 경건한 심신생활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녀는 ①기도를 통해서 혼을 정화할 것,
②신의 앞에서는 모두 동등한 자기의 있는 대로의 모습을 응시하고,
자기애를 완전히 버리고,
신의 내적인 진실에 자유롭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한 점,
③그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신에게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때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열렬한 신봉자를 획득했으나, 그녀가 주장하는 신앙의 순수함이 너무나 과격하였기 때문에
얼마되지 않아 가톨릭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아서 파리에서 추방당했다.
아르노르트나 그녀의 전집을 편찬한 푸아레(P. Poiret) 등 경건주의계 프로테스탄트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녀는 페누론과 보슈에의 정숙주의 논쟁의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특히 유명하다.
당시 널리 읽혀진 『기도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1685)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귀용 [Jeanne-Marie Bouvier de la Motte-Guyon]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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