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하엘 하우스 켈러
윤리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우리는 누구이고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를 탐구하는 독일학자
"나는 밤마다 죽음을 쓸었다"
쇼펜하우어부터 카뮈까지 인생이라는 거대한 질문을 파헤친 통찰
"어두워질수록 더욱 깊어지는 삶에 대한 질문들"
1. 아르투어 쇼펜하우어(1788~1860)
모든 일을 괜찮다고 하는 자들을 혐오하고 인간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계는 지극히 나쁜 것이며 그렇다고 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고통과 고난은 살면서 부딪히는 우연적 특성이 아니고 삶 곳곳에 만연하며
삶 본질 가운데 속한다.
질병,죽음,자연재해,궁핍등을 겪지않을 만큼 운이 좋다고 하더라도 남들보다 조금 나을 뿐이다.
그래서 모든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 그 자체인데 욕구와 욕망이라는 역할이 인간을 구조적으로 쉼없이 분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갈구한다. 산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것이고 모든 욕망은 부재를 전재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갈구한다. 욕망을 하면 할수록 고통은 더 커진다.
하지만 욕망하지 않는 것 역시 실행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첫째, 특정한 욕망의 부재 역시 나름의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욕망할 것이 없다면 권태가 시작된다.
권태는 욕망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권태는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공허함을 경험하게 하며 이는 견딜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그져 존재하기를 계속해서 갈구하지만 마침내 존재를 온전히 확보하여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게 되면 자기 존재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알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는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위해 다른 거를 찾아 시간을 떼우려고 애쓴다.
권태는 손쉽게 절망케 하고 사는 의미를 잃게 한다.
욕망이란 고통과 권태라는 고통의 사이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뚜렷한 고통으로부터 일시적이나마
벗어나는 것이고 이를 가리켜 우리는 행복이라 부른다.
삶이란 부존재에 맞선 끝없는 투쟁이다. 결국은 부존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목적이란 게 있다면 행복보다도 고통을 겪다 죽는 것이 훨씬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행복을 찾는 이유가 고통이나 권태가 삶 전체에 깔려있고 그 것을 벗어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만약 쇼팬하우어가 행복했다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대표작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계는 우리에게 결코 실제 존재 그대로 나타나지 않으며 항상 중재된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과 절대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않는데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은 우리의 지각과
인식의 작동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사물의 본성을 반영하는 만큼이나 우리의 본성을 반영하게 된다.
우리가 세계에 관한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세계가 우리에게 어떤식으로던가 나타나야 하므로 우리가 지각하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나타난 대로의 세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상 너머의 세계가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 절대 알 수 없다.
그저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만을 알 수 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는 모든 살아있는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에 적용되는 진리다.
오직 인간만이 이를 반성적으로 추상적으로 떠올릴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인간은 철학적인 지혜를
획득한 것이다. 이 때 그 인간은 태양과 대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태양을 보는 눈과 대지를 느끼는 손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오직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사실, 다시말해
세계가 다른 무언가 즉 표상하는 자인 인간 자신과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계란 의지와 표상이며 세계의 내적 본질은 의지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벌어지는 일은 종합적인 계획이 있는게 아니다. 그 대신 세계의 중심에는 맹목적이고 강력하지만
우둔하고 목적도 없는 분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 외에는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체 하염없이 바라기만 하는게 우리가 아는 세계다.
이 것의 의미는 세계는 의지이고 나는 의지다.
모든 고통은 의지가 의지를 발현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 의지는 아무 이유도 없이 쉬지도 않고 만족할 줄도
모르는 체 생존과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과 싸운다.
그래서 우리 존재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우리 존재는 어떤 고등한 목표도 수행하지 않는다.
목적지도 없이 그냥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의지가 의지를 발휘하기 때문에 우리는 수 많은 표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즉, 의지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한가지 방식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 그 걸로 끝이다.
---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정리
삶에서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삶은 본질부터가 무의미하며 왜 세계가 지금과 같은 상태인지 설명해 준다
하지만 바로 이 존재의 무의미함으로부터 갑자기 의지가 생겨난다.
세계는 지옥일지 모르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해야할 중요한 일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로 향한 결국 구원으로 향한 길을 앞서 나감으로서 말 그대로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는 우리를 옳은 방향으로 부단히 밀어붙힘으로서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달성하도록 돕고 있다.
우리는 세계가 이처럼 악이 만연함에도 우리가 어떻게 세계가 구성된 방식에 그리고 세계 속에 위치한 우리의
존재에 목적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고수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
이제 우리는 그 의문에 답을 하나 얻었다. 고통이 곧 목적이다.
우리가 겪눈 고통이 누군가의 유익이 된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고통이 충분히 가해진다면 우리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서 경계까지 내몰리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 아닌 것은 명백하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근본적인 판단의 오류일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고통을 초래한다.
우리가 행복해 지는 데 실패하고 나면 우리는 삶의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고 느끼게 되며 그 만큼 더 불행해 지기 때문이다.
단언컨데 삶의 모든 요소는 우리를 바로 그 초기의 오류로 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데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는 데 촛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가 삶을 더 자세히 편견없이 들여다 본다면 삶은 대놓고 우리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도록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
삶의 구성 곳곳에 우리가 역겨워할 만한 그리고 실수라고 격하할 만한 것이 특징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의 마음은 쾌락충동으로부터 그리고 삶 중독으로부터 치유되며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
책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내용은 삶의 목적을 다루고 있다. 결국 죽음을 주제로 한 글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 책은 죽음을 다루는 책이지만 동시에 삶을 찬미하는 책이기도 하다.
최근에 우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지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삶과 죽음에 대한 욕심과 미련이 오그라져드는 느낌이
들던 터였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지금까지 인류가 우주로 쏘아 올린 망원경이 7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중 대표적으로 허블우주망원경과 케플러우주망원이 있다. 그동안 지구에서 촬영된 우주의 모습은 안개와 같은
희뿌연 장막 때문에 선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우주망원경들이 보내온 우주의 모습들은 더욱 선명하고 다양한 미지의 세계가 담겨 있다.
어느 날 광화문 거리에서 쪼그리고 앉아 기도하고 있는 사랑**교회 신도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를 구원해 줄 존재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애석하게도 수천만 광년의 우주 속 그 어디에서도 그런 존재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과학은 그런 존재가 있을 만한 흔적은 커녕 오히려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우주에 숙연해지고 만다.
지난날 수많은 성직자들과 정치인들은 대중을 상대로 확인되지 않은 믿음을 강요해 왔다.
오직 신(神)과 권력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개미처럼 일을 해야만 구원을 받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살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신(神)이 개입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와 개소리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모두 기독교 문화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어떤 이는 목회자의 아들(니체의 아버지는 목사였다.)이었다.
철학과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던 대문호들은 전지전능한 절대자에 관해서 어떤 의문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을 했을까?
이 책에서 언급하는 학자들 외에도 많은 학자들은 신(神)을 믿으면서도 왜 세상 자체가 불공정하고 온갖 끔찍한 일들로
가득 차 있는지 궁금해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신(神)을 믿는다면 최소한 신(神)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윤택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매일 혹은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기도를 하는 사람들일텐데 말이다.
국민의 80% 이상이 기독교를 믿고 있는 중, 남미 국가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마약과 강도 같은 강력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적어도 국민의 80% 이상이 아브라함의 종교(기독교나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분쟁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심지어 에이즈와 지카 바이러스 같은 병에 걸려 수많은 임산부와 아이들까지 죽음을
맞이해야먀 한다.
모기는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닌가?
기도로부터 모기 한 마리 막을 수 없는 것인가?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국민의 절반이 넘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같은 선진국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수십만 명씩 목숨을 잃었다.
하나님은 저들의 기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모기와 바이러스는 자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째서 하나님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말인가?
혹시 이번에도 욥기 때처럼 악마와 도박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
화재와 같은 수많은 자연재해에서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은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은 과연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하다.
이 모두가 신의 계획이라고 생각하는가?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갑작스럽게 하나님이 필요해서 하늘로 데려갔을 것(아이들과 갓난 아기의 죽음까지)이라고
생각하는가? 왕따와 성폭행 등으로 자살을 선택해야만 했던 가족들에게 이 말이 진정 위안이 되는 말인지 되묻고 싶다.
과학의 시대에 좀 더 냉철하고 현실적인 판단이 필요하지 않을까?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2천 년 전 고대인의 조잡함이 거짓과 사기였음이 드러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주선을 날리지 못하고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많은 지식인들조차 신(神)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된 것처럼 밤하늘의 은하수(우리 은하의 별들)가 별(태양과 같이 스스로 빛을 내는)을 약 4천억 개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더군다나 우리 은하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약 250만 광년)에 있는 안드로메다은하(밤하늘에 별처럼 유관으로도 보임)는
별을 약 1조 개씩이나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욱 놀랄 것이다.
물론 현재까지 우주 과학자들이 밝힌 우주에는 약 1천억 개 이상의 별을 가진 은하가 수조 개는 될 것이라고 하니,
옛날 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저서를 수정하거나 불태울 것이 뻔하다. 그나마 신(神)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던
일부 천재 학자들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했던 자신들의 용기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책 《왜 살아야 하는가》는 그러한 천재 지식인들이 던지는 삶에 대한 화두가 아닐까 싶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학자들 작품은 한 두 권정도 읽었었기에 무척이나 반갑기도 했다.
더불어 이 책은 당시 비루했던 나의 독서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 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울러 내가 아직 읽지 않았던 작가들의 다른 저서에도 관심을 갖게 해 주는 좋은 길잡이 역할까지 한다.
여기에는 책 1장에 나오는 쇼펜하우어의 내용을 짧게나마 요약해 볼까 한다.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758~1860
삶의 참을 수 없는 비참함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본성은 무엇일까? 세계는 본질적으로 좋은 곳일까, 나쁜 곳일까? 우리에게 친절한 곳일까, 적대적인 곳일까?
(...)
세계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어떤 식으로인가, 물론 늘 좋은 의미에서,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세계 밖에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존재한다. 일종의 우주적 차원의 인도자나 각본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의 역사'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일 수도, 세계 정신일 수도, 세계를 구축하는 순수하고도 초월적인 자아, 즉 '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리도 많은 역경과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끔찍한 질병과 전염병과 자연재해가 왜 이리도 자주 일어나서 무고하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쳐 놓는 것일까?
(...)
간단히 말해 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세계에는 왜 이리도 많은 악이 존재하는 것이며 어떻게 이런 세계에 일반적인 목적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치는 《변신론》(1710)에서 신이 정말 전능하고 지선하다면 세계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악할 리가 없다는 꽤나 합리적인 비난에 대응하여 신이 능력의 한계가 없는 자애로운 존재라는 일반적인 신학 개념을 변호한다.
(...)
볼테르는 1762년에 소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발표했다. (...) 《캉디드》는 더 큰 선, 가장 큰 선을 실현하기 위해 악이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악의 사악함을 합리화하려는 라이프니츠의 노력을 가차 없이 풍자한다. 볼테르가 생각하기에 세계가 본질적으로 괜찮은 상태라고 믿는 것은 터무니없고 위험하기까지 한 태도이며 세계가 이보다 더 괜찮아질 수 없다고 믿는 것은 그보다도 더 터무니없고 위험한 태도다. 그러한 믿음은 안주하는 태도를 불러올 뿐이고, 악의 존재가 필수적이며 따라서 바꿀 수 없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악과 공모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볼테르는 세계가 지금 상태보다 더 나아질 수 없다고 믿기를 거부한다. 그 대신 개선의 가능성과 바람직성을,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믿는다.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볼테르 역시 낙관주의자다.
반면 우리가 지금부터 살펴볼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라고 주장한 라이프니츠든 피히테, 셸링, 헤겔 등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이성이 실재하고 작용한다고 생각했던 칸트 이후의 독일 이상주의자들이든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괜찮다고 설득하려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또 혐오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볼테르와 달리 인간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세계는 지극히 나쁜 곳이며 그렇다고 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
우리가 살면서 커다란 재앙을 피해 갈 만큼 운이 좋다고 하더라도, 즉 우리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겪는 질병,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자연재해, 착취, 궁핍 등을 겪지 않을 만큼 운이 좋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을 뿐이다. 삶은 회피 가능한 범위 내에서 우연히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필수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모든 삶은 본질적으로 고통 그 자체다. 욕구와 욕망이라는 역학이 인간을 구조적으로 쉼 없이 분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갈구한다. 산다는 것은 욕망한다는 것이고 모든 욕망은 부재(혹은 부재한다고 느끼는 것)를 전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한 부재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원하는 것을 얻으면 다시 무언가를 갈구한다.
(...)
권태는 욕망하는 상태보다도 훨씬 끔찍하다. 권태는 손쉽게 우리를 절망에 이르게 하며 심지어 목숨을 끊도록 만들기도 한다. 욕망이라는 고통과 권태라는 고통 사이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뚜렷한 수준의 고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매우 짧게나마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일시적인 고통의 유예를 가리켜 '행복'이라 부른다. 결국 행복이란 잠깐이나마 고통이 상대적으로 부재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이와 같다면 세계는 참으로 끔찍한 곳이다. 세계는, 라이프니츠가 설득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이기는커녕,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인간의 삶에 목적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한 한 고통을 겪다 죽는 것이라고 하는 쪽이 훨씬 그럴듯하며 우리의 개인적인 인생 경험 및 지식에도 부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느냐는 것이다.
끔찍한 소음이 들리는 철학
열일곱 살에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않은 나는 부처가 어린 시절에 질병, 늙음, 고통, 죽음을 목격했을 때처럼 고통에 깊이 매료되었다. 세계가 나에게 명백히 밝혀준 진리 덕분에 나는 이윽고 내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던 유대교 교리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세계가 무한히 선한 어떤 존재의 작품이 아니라 피조물이 고통을 겪는 광경을 한껏 즐기기 위해 피조물을 세상에 존재하게 한 악마의 작품임에 틀림없다고 결론 내렸다.
(...)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진정한 철학이란 인간의 필멸성을 이해하고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고통을 경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행복한 사람들, 다시 말해 삶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고 세상에 만연한 온갖 고통과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철학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세계가 왜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지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삶에 관해 딱히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
따라서 철학적 궁금증이란 단지 지적 호기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분노에 해당한다.
(...)
세계의 진정한 본성과 우리 존재의 핵심
쇼펜하우어는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과 칸트의 사상 중 가장 근원적이라고 생각되는 통찰을 지지함으로써 세계의 본성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 통찰이란 바로 세계가 우리에게 결코 실제 존재하는 그대로 나타나지 않으며 항상 중재된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
우리의 몸은 여러 사물들 중 하나의 사물로서 인식될 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가 머무는 자리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 우리는 다양한 욕구와 충동에 따라 모든 행동을 수행하고자 하는 존재다. 그런 욕구와 충동 가운데 배고픔과 목마름과 욕정이, 두려움과 희망이, 애착과 싫증이, 사랑과 혐오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 마지막으로 특히 가능한 한 오래 생명을 유지하고 죽음을 연기함으로써 그저 존재하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이 있다.
(...)
쇼펜하우어는 이를 "생의지 will to life" 혹은 "의지 will"라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표상 세계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욱 근본적으로는 '의지'이기도 하다. 몸은 의지의 외적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
고통과 죽음 속에서 신뢰할 만한 위상
(...)
세상에 벌어지는 일에는 어떤 종합적인 계획이나 합리적인 구상도 반영돼 있거나 실현돼 있지 않다. 그 대신 세계의 중심에는 맹목적이고 강력하지만 전적으로 우둔하고 목적도 없는 분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 외에는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르는 채 하염없이 바라기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세계에는 이런 사실만이 반영돼 있다.
이 가설은 우리의 삶이 흘러가는 방식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면에서 탁월하다.
(...)
마치 정신 나간 개가 자기 꼬리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 존재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우리 존재는 어떤 고등한 목표도 수행하지 않는다. 목적지도 없이 그냥 존재한다.
(...)
하지만 세계가 왜 이토록 불합리한 것인지, 세계가 불행히도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왜 이토록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답을 얻었음에도 세상 상태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도덕적 분노'는 달래지지 않는다. (...) 세상 상태가 왜 이러한지 혹은 세상 상태가 왜 이래 보이는지 그럴듯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의지 가설이 그런 설명을 제공하기는 한다(지혜롭고 자애로운 창조자나 합리적인 세계 이성이 존재한다는 가설은 그런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
(...)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철학이란, 더 정확히는 형이상학(세계의 진정한 본성이 무엇인지 다루는 철학의 한 분야)이란, 세계를 완벽히 기술하는 것 이상과 관련돼 있다. 형이상학의 역할은 이론을 다루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어쩌면 중요한 것으로 '실용성'을 확보해야 한다. 형이상학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공해야 하고 "고통과 죽음 속에 신뢰할 만한 위안"을 제공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형이상학은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종교는 거짓을 말함으로써 위안을 제공하며 따라서 신뢰할 만하지 않은 반면 형이상학은 훨씬 견고한 무언가를 통해, 즉 진리라는 "부서지지 않는 다이아몬드"를 통해 우리의 존재론적 불안을 달랜다는 점에서 더 신뢰할 만하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이유
형이상학적 진리가 정확히 어떻게 우리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준다는 말일까? 우선 형이상학적 진리는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두려워하며 따라서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죽음이 실재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만약 죽음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시간 없이는 죽음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다.
(...)
우리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틀림없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진정으로 우리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다. 세계가 우리의 표상이라면 우리의 존재가 소멸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세계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죽고 난 후에도 세계가 지속되리라는 사실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역시 지속될 것이다.
(...)
모든 형태의 생의지를 온전히 긍정하는 태도, 좋든 나쁘든 삶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포함해 영원히 반복되는 삶을 망설임 없이 기꺼이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태도인 셈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 입장에서 그처럼 삶을 온전히 긍정하기 위해서는 모든 삶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고통이며 따라서 삶이 궁극적으로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진리를 억눌러야만 한다.
(...)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법
(...)
하지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야 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다. 애초에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엄밀히는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으로 죽음은 우리의 부존재를 초래하지 않는다. 설령 죽음이 부존재를 초래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
최악인 동시에 최선인 세계
(...)
윤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만족스러운 형이상학을 원하는 우리의 요구에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첫 번째 대답은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오히려 삶은 본질부터가 완전히 무의미하며 이는 왜 세계가 지금과 같은 상태인지 설명해 준다. 하지만 바로 이 존재의 무의미함으로부터 갑자기 '의미'가 생겨난다. 세계는 지옥 같은 장소일지 모르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 아닌 것은 매우 명백하다.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었다면 세계는 지금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근본적인 판단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더 많은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우리가 (필연적으로) 행복해진 데 실패하고 나면 우리는 우리가 삶의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고 느끼게 되며 그만큼 더 불행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2권의 끝에서 두 번째 장에는 "구원의 절차"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바로 여기서 무신론자이자 반이성주의자이자 의지의 형이상학자 쇼펜하우어는 세계가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라는 자신의 세계관을 유사 목적론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 최종 결론으로 이끈다.
단언컨대 삶의 모든 요소는 우리를 바로 그 초기 오류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데 그리고 우리에게 우리 존재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하는 데 맞춰져 있다. 우리가 삶을 더 자세히 그리고 편견 없이 들여다본다면 삶은 대놓고 우리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 삶의 구성 곳곳에 우리가 역겨워 할 만한 그리고 실수라고 격하할 만한 것이 특징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의 마음은 쾌락 중독으로부터, 결국 삶 중독으로부터 치유되며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
-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 나의 기쁨은 현재에 있다. 내 인생은 현재에 있다
[출처] 책 '왜 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