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1장 탄생은 깨달음을 위한 것이었다
3. 자연에서 진리를 배운 어린 시절
1919년 2월 8일에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선언되었고, 20여일 후인 3월 1일에 독립만세가 한국의 전 강토를 휩쓸었다. 그 다음 해인 1920년 2월 25일(음력 1월 6일) 대한독립의 염원을 안고 평북 정주군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부모는 이름을 문용명(文龍明)이라 지었다.
본명은 문용명이지만 스스로가 문선명(文鮮明)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文은 무엇이냐 하면 진리예요, 진리. 鮮은 깨끗이 확실히 드러내 비치는 거예요. 확실히 드러내는 거라구요. 鮮 자도 육지하고 바다하고, 그 다음에 明은 뭐예요? 해와 달. 이것이 상대적입니다. 이것을 진리로 묶어야 됩니다. 진리로 바다와 육지를 묶어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겁니다. 이름도 그래서 선명일구요. 선명이라는 말은 맑고 깨끗하고 티가 없으면서 질서적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안팎에 있어서 규범을 따라서 그것을 평할 수 없는 깨끗한 내용을 지닌 것이 선명한 것이다 하는 겁니다."
1920년은 일제에 합병된지 10년이 흐른 뒤로 한국인의 삶은 대부분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일제는 그러한 한국인들은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정치'를 폈는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그러나 강제로 정간되는 일이 빈번했으며, 독립투쟁도 멈추지 않았다. 만주에서 홍범도가 이끄는 봉오동 전투가 일어났고, 우국지사 강우규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斎藤實)를 폭살시키려는 의거가 일어났으며, 12월에 이승만은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초대 주석에 취임했다.
바로 그 파란만장의 시대에 문선명은 고고한 울음과 함께 이 세상에 나왔다. 태어나는 아기의 1/3은 죽는 시절이었기에 그 아기가 훗날 주어진 천수를 다 누릴지,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 예측하거나 소망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6년 후 그 소년이 한국과 세계를 변혁시킬 인물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문선명은 어렸을 때부터 자연과 벗하고 살았으며 호기심이 왕성한 소년이었다. 고향에는 산이 많았는데 "저 산의 이름은 무엇일까? 저 산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했으며 그런 호기심이 들면 반드시 가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또한 동네방네 20리 안팎을 샅샅이 돌아다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환히 알았다. 그러한 호기심은 훗날 일본 유학시절에 한글성경, 영어성경, 일어성경을 놓고 밑줄을 그으면서 탐구하는 정신으로 이어졌다.
활동 범위가 크고 넓어서 보이는 곳은 안 가본 곳이 없고, 산꼭대기 높은 곳도 다 올랐다. 그래야 그곳에 있는 실체가 머리에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이는 수많은 선교사를 세계 각지로 보내고 그 자신이 여러 차례에 걸쳐 세계 순회선교를 떠난 것과 일맥상통한다. 지도만 놓고 탁상공론을 벌이기보다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낯선 이국땅으로 건너가는 것이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그렇게 왕성한 호기심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신앙적인 정서를 길렀으며, 훗날 고향의 중요성에 대해 종종 이야기했다.
"자기의 지난 모든 것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고향의 산하에 있는 모든 동식물에 대한, 자연계에 대한 것을 교재로 삼아 가지고 자기 내적인 인간이 자라는데 있어서의 풍요성을 갖추는 데서 많은 재료를 남기는 곳이 고향이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고향의 산천이 그리워요."
산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꽃도 좋아했다. 그의 말처럼, 꽃이라는 꽃은 안 건드린 게 없었다. 모르는 꽃이 없을 정도였다. 언덕에 올라 자연과 더불어 노느라고 해가 지는 것을 몰랐고, 때로는 풀밭이나 나무 아래에서 엎드려 자기도 했다. 밤 12시가 되어 어머니나 아버지가 찾으러 와서 데리고 갈 때가 많았다. 아버지 등에 업혀 가면서 아무 걱정도 없이 마음이 척 놓이는 기분을 바로 평화라 여겼다. 그렇게 아버지 등에 업혀 평화를 배웠다.
어렸을 때부터 고집이 셌는데 높은 나무가 있으면 꼭 올라가 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동네에서 아무도 못 올라갔던 높은 나무가 있으면 기어이 올라가고야 말았다. 집에 크고 아름다운 밤나무가 있었는데 적어도 200년은 되었다. 소년 선명은 그 나무에 원숭이처럼 오르내렸다. 아마 그가 원숭이 띠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밤송이에 찔리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무 중에서도 특히 잣나무와 대나무를 좋아했다.
"나는 잣나무를 사랑한다구요. 나무에 열매가 없으면 안 되지요. 잣나무는 열매가 있거든요. 이것은 심더라도 얼어 터져야 돼요. 또 오엽송이예요. 이것은 동서남북을 중심삼고 하나의 중앙선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잣나무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 나무는 아주 잘 자라요. 똑바로 올라가거든요. 뿌리도 똑바르고 순도 똑바로 올라갑니다.
또 대나무를 볼 때 참 기분이 좋습니다. 암만 바람이 불어도 대나무는 안 부러집니다. 송죽 같은 뭐라 말할 때… 그거 왜 소나무를 먼저 했을까요? 죽송이라 하지. 소나무는 부러지거든요. 그리고 또 자랄 때 보면, 대나무는 한꺼번에 다 자랍니다. 한꺼번에 자라서 완성하는 것입니다. 조금씩 자라지 않습니다. 한꺼번에 크는 것입니다."
소년 선명은 들판을 자신의 집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아침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뛰쳐나가 온종일 산과 강으로 쏘다녔다. 온갖 새와 동물들이 살고 있는 숲 속을 누비며 풀과 열매를 따먹으면서 배고픔을 잊었다. 그가 숲을 사랑한 것은 그 안에 세상의 모든 평화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 동물을 돌보는 일을 좋아했다. 둥지를 튼 새들이 물을 먹을 수 있도록 웅덩이를 만들어주고 곳간에서 좁쌀을 가져와 마당에 뿌려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도망가던 새들도 소년이 사랑을 주는 사람임을 알아봤는지 차츰 도망가지 않았다. 한번은 물고기를 길러보고 싶어 고기를 잡아다 웅덩이에 넣었다. 먹이를 한 줌 뿌려주었는데 다음 날 일어나보니 다 죽어 있었다. 그 슬픈 모습에 하루 종일 엉엉 울었다.
그는 개구쟁이 기질이 강해서 여럿이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다. 낮에는 윷놀이(그 전통을 이어받아 통일교 신도들은 문선명과 함께 훈독회(訓読会)를 할 때면 윷놀이를 자주했다)나 연날리기 등을 하고 저녁에는 소년임에도 동네 투전판을 들락거렸다. 한 판에 120원을 따는 것이었는데 웬만하면 세 판이면 땄다. 섣달 그믐달이나 정월 대보름은 투전판의 전성기였다. 어른들의 투전판이 벌어지는 곳에 가서 한숨 자고 새벽녘에 딱 세 판만 끼어들었다. 그렇게 딴 돈으로 조청을 사다가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절대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쓰거나 나쁜 짓을 하는데 쓰지 않았다.
청개구리도 많이 잡아 먹었다 한다. 옛날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홍역을 앓거나 병에 걸려 얼굴이 홀쭉해지면 청개구리를 먹였다. 넓적다리에 살이 오른 커다란 청개구리를 서너 마리 잡아다 호박잎에 싸서 구우면 말랑말랑하면서 맛이 있다고 한다. 문선명은 그것을 먹으며 자랐고 꿩고기도 먹었으며 산새알도 많이 구워 먹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선명은 그 누구보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훗날 남미의 판타날, 자르딘, 차코와 미국 알래스카의 코디악 등지에 깊은 정성을 쏟고 오랜시간 머물렀던 이유는 어린 시절의 체험과 추억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사랑 정신은 문선명 성화 후에도 이어졌다. 2015년 세계회장에 취임한 문선진은 '7대 비전'을 밝혔는데 그중 5번은 다음과 같다.
"환경을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관리자가 되자. 자연은 우리의 집이며 정원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자연을 하나님 모시듯 존중해야 한다."
통일교 교세 확장이나 교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연사랑을 7대 비전에 넣은 것은 창시자인 문선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문선명이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농사로 생계를 이어갔기에 농사일도 열심히 했다. 농촌은 예나 지금이나 계절마다 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논갈이도 하고 밭갈이도 하고 모내기도 하고 김도 맸다. 그나마 평안도는 기독교 문물이 일찍 들어간 곳이라 1930~40년대에 이미 농지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어 다른 곳보다 농사짓기가 그나마 수월했다. 그럼에도 농사는 힘든 일이었고 문선명은 논에서 허리가 휠 정도로 일을 했다. 그때 터득한 비결로 훗날 농사철에 모내기만 하고도 학비를 너끈히 벌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