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06
베드로후서 3장 16절 [1장 7-8항]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특별히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 성경은 믿음과 삶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이와 관련된 하나님의 전체 뜻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성경이 모든 지혜와 지식을 다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및 인간의 구원, 그리고 믿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혹은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도록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66권으로 된 성경만으로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고백합니다.
성경만으로 완전하고 충분하기 때문에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지, 인간의 전통들에 의해서든지 아무 것도 어느 때에 추가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말씀에 계시되어진 것들로부터 구원을 아는 이해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내적 조명이 필수적임을 인정하는데, 왜냐하면 성경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요, 중생했을지라도 부패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그 말씀에 합당한 삶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성경만으로 완전하고 충분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할 수 없는 일부 측면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성경의 원리를 따라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 규정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신앙고백서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 예배와 교회 정치에 관해서 인간의 행동들 및 사회들과 공통적인 어떤 상황들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항상 준수되어야 할 말씀의 일반 규범들을 따라서 본성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분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제1장 7항과 8장 내용인데, 7항은 성경의 명료성에 대한 것이고, 8항은 성경 원본과 사본, 번역본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7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체적으로 똑같이 명백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명하지도 않습니다(벧후3:16). 그러나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필수적인 것들은 아주 분명하게 성경 곳곳에 제시되어 있고 드러나 있습니다. 배운 자들뿐만 아니라 못 배운 자들도 일상적인 방편의 적합한 사용 안에서 그것들[즉,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필수적인 것들]의 충분한 이해에 이를 수 있습니다(시119:105,130).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6항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및 인간의 구원과 믿음과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뜻은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거나, 선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성경으로부터 유추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항은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체적으로 똑같이 명백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명하지도 않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성경의 내용이 항상 명료하지는 않다는 것이고, 또한 동일한 어떤 본문에 대하여 사람에 따라서도 명료성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본문도 있고, 같은 본문이라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일단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체적으로 똑같이 명백하지 않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인 베드로후서 3장 16절이 분명히 증거 합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에서 자신의 경험보다 성경이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형되신 사건이고, 그 사건은 성경이 기록할 정도로 거짓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그의 영광된 모습을 통해 본 것이고(벧후1:16), 또한 하늘로부터의 음성도 들은 것입니다(벧후1: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성경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예언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옳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덧붙이기를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도 했는데(벧후1:20), 왜냐하면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벧후1:21).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력을 믿고 성경을 마구잡이로 읽고 해석하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 영감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된 성경에 대한 이해는 성령의 조명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에 대하여 오늘 본문은 자신이 편지한 내용과 같은 것을 사도 바울도 동일하게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따라 교회들에게 편지한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말합니다. 기록된 성경에 대한 이해가 성령의 조명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할 때,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5항에서는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만한 이해와 확신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 자체로도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연수도 다르고 또 그 연수에 따른 열심 또한 다를 수 있지만 연수도 되고 열심도 있다고 할 때, 그래서 성경을 늘 가까이 하며 읽고 또 읽는다고 할 때, 뿐만 아니라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바가 있도록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는다고 할 때 성경의 모든 내용이 항상 명백하게 다가오느냐?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 경험이 증명합니다. 모든 본문의 내용 자체가 명료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고백서가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명하지도 않습니다. 같은 본문을 보면서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다르기 때문이고, 기본적인 지식이 다르다는 것은 어떤 본문에 대해서는 본문을 이해하는 수준에 있어서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연수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소위 처음 신앙생활 한 사람과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내용으로 신앙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서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충격적인 사실은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고 하면서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데 있습니다. 억지로 푼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성령의 조명 없이 푼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살피겠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9항에 보면 ‘성경해석의 무오한 규범은 성경 자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 자체로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지만, 성령의 조명하심이 오직 들은 것을 말한다고 할 때(요16:13) 같은 내용의 쉬운 본문으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이라고 해서 어려운 본문을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계시로 알려주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교 연구하여 어려운 본문을 좀 더 쉬운 본문의 내용으로 깨닫게 되는 거기에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억지로 풀다가, 성령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다시 말해 기록된 성경의 내용과 상관없이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미 기록된 성경 내용과 다르게 풀 때, 또한 성경을 통해 알리신 교리와 다르게 풀 때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신앙고백서 1장 5항의 내용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다. 이미 말씀 드린 바가 있지만 이 내용은 결코 가톨릭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권위가 종교회의, 종교회의를 이끌던 교회나 사람에게 근거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가르침의 권위가 더 위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교회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함을 통해 성경이 얼마나 높고 존귀한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신앙고백서로 돌아오면,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체적으로 똑같이 명백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명하지도 않다고 할 때 가톨릭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해석과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 자체만 보면 틀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해석과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할 때 교회만이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은 불명료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오직 교회의 권위 있는 판단과 해석에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곧이어 살피게 될 8항에서 자국어로 번역하는 부분에 대한 고백이 있는데, 한때 가톨릭은 성경 번역에 대해서도 거절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성경이 모든 성도에 의해 읽혀지는 것을 반대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번역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저들 입장에서 미숙한 해석자들에 의해 제시되는, 그래서 자신들의 신학에서 벗어난 신학의 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역사 안에서는 성경을 번역하여 개인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부분은 8항에서 다시 설명할 텐데, 어쨌든 가톨릭에서는 지금도 교회의 해석과 가르침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교도권이 성경 위에 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비록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체적으로 똑같이 명백하지 않다 하더라도, 또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명하지 않다 하더라도,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필수적인 것들은 아주 분명하게 성경 곳곳에 제시되어 있고 드러나 있다고 고백합니다. 성경 그 자체로도 어려운 본문이 있고, 또 사람 개인의 능력에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데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관한 지식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성경 이곳저곳에 제시되어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운 자들뿐만 아니라, 못 배운 자들도 일상적인 방편의 적합한 사용 안에서 그것들, 즉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필수적인 것들의 충분한 이해에 이를 수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비록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을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나간다면 모든 부분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필수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의 지식을 발견한다고 해서 발견한 사람 모두가 믿고 믿음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보면서 기독교의 구원 교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지만 영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지식이 믿음으로, 믿음에 따른 순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성령 하나님의 내적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은 5항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어느 정도 교회의 증거에 의해 성경의 높고 존귀한 가치로 이끌려지고 인도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무오한 진리와 신적 권위에 대한 우리의 충만한 이해와 확신은 우리의 마음 안에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증거 하시는 성령의 내적 역사로부터 나옵니다. 때문에 개인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 구원의 지식을 깨달을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신앙고백서는 시편 119편의 두 구절을 인용 구절로 제시하는데,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는 말씀입니다. 또 130절은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빛으로 비유하는데, 어둠을 비추어 밝힌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어둠 가운데 있었지만, 성경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빛으로 비유하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그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내적으로 역사하여 알게 된 사실을 믿음으로, 또 믿음에 합당한 삶으로까지 순종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부지런히 사용하여 구원을 위해 알고 믿고 준수해야 할 필수적인 것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 기록자의 경우 하나님의 감동으로(딤후3:16),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벧후1:21). 하나님의 감동으로,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연구도 없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벧전1:10) 비록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핀 것이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나, 구약 선지자들도 입만 벌리고서 떠 먹여 주는 것만 먹는 식으로 있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기록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부분에서 이것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복음의 경우 누가는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다고 하면서 그 목적을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라고 밝힙니다(눅1:3-4).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기록한 것이지만 거기에 수고와 노력이 전혀 없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는 없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말씀으로 말미암아 역사하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쉬운 부분만이 아니라 어려운 부분도 읽으면서 깨닫게 해 주시기를 겸손히 기도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8항을 살펴보겠는데, 8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 백성의 자국어인)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과 (기록 시기에 [여러] 나라들에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직접적으로 영감되었고, 하나님의 각별한 보호와 섭리로 말미암아 모든 시대들 안에서 순수하게 지켜졌으므로 진정성이 있습니다(마5:18). 따라서 종교의 모든 논쟁들이 있을 때, 교회는 최종적으로 구약과 신약에 호소하는 것입니다(사8:20, 행15:15, 요5:39,46). 그러나 성경에 대한 권리와 관심을 지닌 자들이면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경을 읽고 살피도록 명령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이 원어들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요5:39), 성경은 그것이 들어간 모든 나라의 민족 언어로 번역되어야 합니다(고전14:6,9,11-12,24,27-28).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안에 충만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 받을만한 방식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골3:16), 그리고 성경의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롬15:4).
일단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는 인간 보편사에 대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되 맨 마지막에 만물의 으뜸인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위에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음으로 불순종하게 되었다는 것, 그 결과 죄가 세상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죄의 가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 홍수로 세상을 한번 심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홍수 심판으로 말미암아 죄가 사라졌는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을 통해 다시금 인류가 번성하게 되었지만, 번성하는 곳곳마다 죄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바벨탑 사건이 나오는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언어가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 민족으로 나뉘게 되면서 흩어지게 됩니다. 이런 인간 보편사 이후 하나님은 많은 사람 가운데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특별역사에 대한 기록을 시작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그의 아들들을 통해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선민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쓰던 언어가 히브리어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몇 장을 제외(렘10:11, 단2:4b-7:28, 스4-7장 일부)하고는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신약은 몇 단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헬라어(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예수님과 사도들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언어는 헬라어가 오늘날 영어처럼 공식 외국어로 있던 때였습니다. 물론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라틴어도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23장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었는데, 요한복음 19장 20절에 의하면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헬라어가 보편 언어로 있었기 때문에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이 히브리어, 신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고 할 때 신앙고백서는 구약 시대의 하나님 백성의 자국어인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과 기록 시기에 여러 나라들에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직접적으로 영감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원본에 한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직접적으로 영감 된 성경만이 오류가 없고, 신앙과 삶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규범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원본 성경이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은 원본이 아니라 원본을 베껴 쓴 사본이고, 심지어 그 사본을 번역한 것들입니다. 김병훈 교수의 글을 참조하면(http://repress.kr/19662/), 어떤 이들은 원본이 아닌 사본들만 있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과 완전성을 말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본들은 결코 무오한 것도 아니며, 또한 서로들 간에 완전히 일치를 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각별한 보호와 섭리로 말미암아 모든 시대들 안에서 순수하게 지켜졌으므로 진정성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비록 사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각별한 보호와 섭리로 말미암아 모든 시대들 안에서 원본 성경이 순수함이 지켜졌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본이라 할지라도 진정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현재 사본들을 통해 구성이 된 성경의 내용이 원본의 원문과 전체적이며 일반적으로 일치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면, 무엇보다 사본들의 수가 원문의 내용을 밝히기에 충분히 많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사본들은 고대의 다른 문서들에 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많다고 합니다. 사본들의 수가 많을수록, 사본들이 원본의 시기에 가까울수록, 그리고 사본들끼리 서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원본의 내용을 정확하게 복구할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비교해서 설명하면 다른 고대 문헌들의 사본의 수는 열 개를 넘어가는 것이 드뭅니다. 더욱이 유명한 호머의 ‘일리어드’는 650개의 사본들을 가지고 있으나, 원본은 주전 800년경인 반면에 그것의 사본들은 주후 2에서 3세기에 된 것으로 원본과 사본의 기록 시기의 차이가 무려 천년이 넘습니다. 반면에 신약 성경의 사본들은 중요한 것들만 헤아려도 2,300여개에 이르며, 전체적으로 5,000여개에 달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본들이 원본 이후 2-3세대 안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P46의 경우는 김영규 교수의 역량 있는 논증으로 그 연대가 1세기 후반, 즉 주후 80년까지 추정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원본에서 가장 가까운 사본이란 것입니다. 아울러 초대 기독교인들이 사도들의 글을 인용하여 쓴 문서들의 것들만 모아도 원문의 내용을 추적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나아가 고대의 그 어떤 원전들도 성경만큼 많은 분량에서뿐 아니라 그만큼 양호한 형태로 존속되어 오지 못했다는 것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이하 믿음의 고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입문 참조). 예를 들어 주후 첫 백 년 어간에 기록된 문서들로서 장차 신약 성경의 정경 안에 포함될 문서들과 공존하였던 신약 교회의 다른 문서들은, 1640년대에 이 신앙고백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단편들로만 존재하거나 혹은 아예 전체가 유실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바나바 서신이나 헤르마스의 목자 같은 저작의 후대 사본을 20세기에 들어설 무렵에야 비로소 발견하였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의 보존 상태와 또 다른 초기 종교 저술들의 보존 상태를 더욱 극명하게 대조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본들 사이에 일치하는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차이가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상의 어떤 중대한 차이를 일으킬 만한 것이 없는 작은 차이들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의 각별한 보호와 섭리로 말미암아 모든 시대들 안에서 순수하게 지켜졌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순수하게 지켜졌기 때문에 진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고백서는 따라서 종교의 모든 논쟁들이 있을 때, 교회는 최종적으로 구약과 신약에 호소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대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라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마5:18)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사용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이룰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르라고 할 때(사8:20) 우리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첫 번째 교회회의가 목표로 삼았던 것처럼, 우리의 생각하는 것들이 확실히 성경 말씀과 부합하게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행15:15). 예수님께서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성경을 상고하고 또 믿어야 합니다(요5:39,46).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고백하는데, 원본에서 사본으로 오는 데 있어 하나님의 각별한 보호와 섭리로 말미암아 모든 시대들 안에서 순수하게 지켜졌다고 할 때, 그리고 종교의 모든 논쟁들이 있을 때 교회는 최종적으로 구약과 신약에 호소한다고 할 때 그 모든 내용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과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에 한해서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과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을 읽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따라서 신약고백서는, 그러나 성경에 대한 권리와 관심을 지닌 자들이면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경을 읽고 살피도록 명령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이 원어들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은 그것이 들어간 모든 나라의 민족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왜 번역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안에 충만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 받을만한 방식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성경의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고백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때 가톨릭은 성경 번역 자체를 거절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로 하여금 성경을 읽도록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고 교만해 질 수 있고, 호기심과 의문으로 교회의 교도권을 가벼이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자신들이 가르치는 신학에서 벗어난 신학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성경 번역 자체를 거절했던 겁니다. 물론 지금은 우리나라만 해도 공동번역 성경이라고 해서 가톨릭에서 성경을 번역하여 내놓습니다.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와 같은 성스러운 언어가 아닌 일반 언어도 전례에 사용할 수 있다고 정했기 때문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참조). 참고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와 같은 언어를 성스럽다고까지 하다고 말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누가복음 23장 38절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히브리어와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요19:20)는 것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통해 성경은 이 3가지 언어로 기록하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다른 번역을 필요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라틴어 번역 성경인 제롬의 벌게이트(Vulgate)를 공인 번역으로 정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은 각 나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성도들 손에 쥐어 주고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가톨릭의 교리를 비판하여 나오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하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안에 충만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받을만한 방식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면에서 가톨릭교회의 성도는 이 부분에 있어 성경으로부터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않는다면 결코 거기서 나올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셋째, 성경의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모든 나라의 민족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할 때 고린도전서 14장에 있는 여러 구절들을 인용 구절로 제시하는데, 먼저 6절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난주에도 고린도전서 14장은 언급했지만 여기서 방언은 외국어로서의 방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방언으로 말한다면,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로서 말한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몇몇 구절들을 더 인용하지만, 27절과 28절로 가면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방언의 은사는 통역이 있어야지만 교회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이때 통역이 없다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하면서 자기와 하나님께 말하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주석합니다. “바울은 ‘그의 은사를 자신만이 마음 속으로 즐기도록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자비로우시게도 자기에게 주신 은사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조용히 감사를 드리고 그것을 공적으로 사용할 기회가 없을 때는 그것을 자신의 사유물인 것처럼 혼자 즐기라는 것이다.”
지금 신앙고백서가 성경을 번역해야 한다고 할 때 이런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 헬라어로 된 신약 성경 자체로는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역된 성경은 원본처럼 무오하다고 는 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안에 충만하게 거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을만한 방식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내와 위로를 통해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각별한 보호와 섭리로 말미암아 모든 시대들 안에서 순수하게 지켜지는 일이 지금도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