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과 머리가 열리는 만남
한비야의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해설 할 때마다 곱씹어 보곤 한다. 만남의 현장 속에 있는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번 답사는 기다리는 만남이 아니라 찾아가는 만남으로 당연 기대만발, 해설사로 입문하고 제천시 관계자와 처음으로 떠나는 이번 만남은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영주』와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으로 조선시대의 유교문화가 잘 어우러진 경상도 북부지역이라 만남에 대한 기대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출발하기 전 하룻밤을 비워야 한다는 부담감에 가족들의 먹거리를 챙기고 잡다한 정리를 하면서도 마음은 사뭇 들떠 있었던게 사실이라 ‘놀러 갔다 올 생각을 하니 좋지?’ 라는 남편의 뉘앙스 있는 질문도 좋게 받아 넘기며 편하게 다녀오라고 사준 신발과 웃옷은 더 없는 고마움으로 와 닿았다.
출발당일 날씨는 쌀쌀한 바람과 낮은 기온으로 시샘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시샘쯤은 마음가득 기대의 열정으로 녹여 버리고 신나는 만남의 여행 속으로 빠져 들었고 시청에서 제공해준 버스는 32인승이라 여유 있는 공간으로 쾌적하게 해 주었다.
고속도로를 거쳐 첫 번째 목적지인 영주시 소수서원, 선비촌, 소수박물관이 한꺼번에 묶여진 관광지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 답게 잘 다듬어지고 정렬된 주변 환경과 운치 가득한 소나무로 먼저 반기며 자부심과 역사성의 위용을 보여준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윤은희 해설사님이 나와 보물 제59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시대 숙수사지 당간지주 설명을 시작으로 소수서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찰입구에 세워지는 당간지주는 사찰의 위치를 알리는 것으로 사찰이 평지에 많이 세워질때 위치를 알리기 위해 세우는 것으로 소수서원이 만들어 지기 전 이곳이 사찰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물이다. 당간지주를 지나 호수 먼발치 백운동 경자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주세붕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 것으로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의 머릿글자 라고 한다. 취한대와 마주한 성생단은 제향 때 올리는 재물의 흠을 판별하던 장소라고 하는데 4면을 골고루 바라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소수서원 안으로 들어서니 강학당 전사청 장서각 등의 공간배치가 산만 스러우며 규칙적이지 않은 것이 최초의 서원임을 다시 한번 말해준다. 빠르게 둘러보고 걸음을 재촉하며 작은 다리를 건너 박물관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윤은희해설사님이 우리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멈추어 서며 뒤를 돌아보니 기품있는 소나무 한그루가 건물 한쪽의 액자모양으로 만들어진 네모난 공간속에 숨어있는 것이 한폭의 그림이었다. 작은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박물관을 지을때 주변의 모습들을 생각하고 만들어낸 작은 마음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박물관의 내부는 모조품만이 전시되어 있어 진품은 볼 수 없었다. 박물관을 지나 건물2층은 공간배치가 특이했는데 왼쪽 멀리 소백산의 설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계단 몇 개를 내려서니 선비촌 입구, 2004년 완공되어 지금은 숙박시설로 이용하는데 바쁜 일정상 선비촌은 다음기회로 미루어 두고 부석사로 향했다. 빡빡한 일정을 탓할밖에 빨리빨리 라는 일정이 해설사에게 많은 부담을 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짧은 시간에 많은 전달을 하기위해 애 쓰는 모습이 나의 모습을 보는 듯 했지만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며 열심히 설명해 주던 윤은희해설사님께 감사드린다.
부석사에는 국보가5개 보물이4개 도지정 문화재가 2개로 궂이 문화재를 따지지 않더라도 유서 깊은 사찰이라 몇 번씩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문화관광해설사의 입장에서 단체로 해설을 들어보기는 처음이다. 부석사는 길이 시작되는 입구부터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양옆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아주 매력적이었던 것이 기억났다. 영주시의 배려로 무료입장한 매표소를 지나 부석사로 향하는 길은 가을이 아닌 나뭇잎 떨어진 겨울에도 겨울 나름의 운치가 숨어있었다. 우리나라 사찰들은 거의 대부분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 사찰을 오르는 길은 항상 오르막이기 마련이어서 조금 덜 힘들기 위해 서로 팔짱을 끼며 오르는데 힘들다며 지팡이 하나를 안내소에서 빌린 박애양회장님의 모습을 ‘도인’이라고 놀렸는데, 지팡이의 힘 때문인지 매우 잘 오르는 모습이 누가 봐도 도인으로 불리기에 꼭 맞았다. 가장 먼저 ‘태백산부석사’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사찰에 들어가는 첫 번째 문. 기둥이 한 줄로 구성되어 유래)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보물 제255호인 당간지주가 눈에 들어온다. 영주에서 두 번째 보는 당간지주다. 순간 사지(寺址)로 지정된 문화재가 없는 제천이 떠오르며 안타까움과 부러움이 밀려와 욕심 같아서는 칠층모전석탑이 있는 장락사터가 사지로 지정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당간지주를 뒤로 하고 계단을 오르니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불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사천왕문 앞에서 부석사담당 해설사 김채수님이 기다리고 있다. 사천왕상의 해설을 시작으로 부석사와의 새로운 만남이 시작되었다. 쌍탑으로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을 지나 범종각을 거쳐 얼음이 얼은 샘터에서 시원한 산사의 물도 마시고 안양루에 다다랐다. 비포장길을 달려오며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썼다는 안양문에 걸린 부석사라는 현판이 보인다. 안양루 양옆의 석축은 바위를 반으로 갈라 반쪽은 안으로 반쪽은 밖으로 쌓아 1,300년이 지나도록 묵묵히 부석사를 지탱해 왔다고 한다. 안양문 사이로 보이는 석등과 그 뒤 무량수전은 배치의 묘를 살린 최고의 모습이라고 할 밖에 없다. 안양문 초석과 어우러진 기둥의 그랭이기법은 한옥의 빼어난 과학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위로 오르니 밖에 있던 안양문의 현판은 안쪽에 안양루라는 현판으로 걸려 있다. 예를 갖추기 위해 밖에서 본 안양루는 팔작지붕이요 안쪽에서 본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작지만 겸손의 미를 나타내기 위해 그랬으리라는 해설사의 설명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무량수전 앞의 석등은 국보 제17호로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1,300년의 세월을 견디어온 국보답게 보존이 매우 잘 되어 있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국보 제18호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건물로 배흘림기둥과 주심포양식이 뚜렷하게 나타나 목조구조 기술의 정수라고 한다. 무량수전에는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4개 있는데 기둥이 참 특이하게도 새롭게 보충하는 기둥에 수령과 나이테가 비슷한 것끼리 맞추어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올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내의 소조여래좌상은 국보 제45호로 흙으로 빚은 부처님을 의미하는데 바닥 또한 흙으로 되어 있어 그리 화려하지 않았고 부처님 뒤의 광배엔 원래 3기의 부처님이 삼각구도로 모셔져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에 의해 강탈당했다고 했다. 우리들의 문화재에 여지없이 일본인의 만행이 개입되어 있음에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부분이었다. "소원 잘 들어주기로 유명한 부처님이니 소원 빌고 가세요" 라는 해설사님의 말에 따라 삼배를 올리고 밖으로 나와 무량수전을 한 바퀴 돌으니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지을수 있게 도와주었다는 선묘를 모신 선묘각이다. 의상대사 당나라 유학길에 신도집의 아름다운 딸 ‘선묘’가 의상을 모시길 원했으나 의상이 이미 출가하여 뜻이 없음을 표하자 평생을 의상대사의 생활품을 시주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맹세한 후 의상이 당나라를 떠나 신라로 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용이 되어 무사히 바닷길을 건너게 하였으며 후에 이 곳 부석사를 지으려 할 때 방해 받는 일을 도와 무사히 부석사를 지을 수 있게 하여 화엄도량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였으며 선묘는 석룡이 되어 아미타불 바로 밑에 머리 부분이, 석등아래까지 꼬리부분이 뭍혀 있다고 하는데 몇 년전 검증을 한 결과 현재에도 확인되었다고 한다. 무량수전 옆의 부석 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는 언제 보아도 공중에 뜬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 헷갈리는 부분이다. 시간관계상 조사당과 의상이 심었다는 골담초, 조사당내의 벽화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어 서둘서러 내려와 무량수식당에서 영주풍의 한정식으로 점심을 마치고 안동으로 향했다.
관광안동의 명소로 가장 널리 알려진 하회마을은 오늘이 두 번째 방문이다. 하회의 풍산 류씨의 동성마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민속촌이라고 한다. 그 규모와 내용의 다양성 그리고 수려한 풍광에서 하회를 당할 곳이 없다고 하는데 하회라는 뜻은 낙동강이 오메가(Ω)자를 쓰듯 반 바퀴를 휘돌아 나가므로 ‘물돌이동’ 이라고도 부르며 풍수상으로는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연꽃이 물에 떠있는 형)이라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강물이 범람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셔틀버스를 타고 하회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몇 년전 차량을 입구까지 타고 왔던 기억이 있는데 이젠 셔틀버스로 입구까지 와야 했다. 입구에서 만난 권문철해설사님은 깨끗한 하회마을을 만들기 위해 애쓴 공무원이야기부터 꺼내신다. 하회마을속 상가들을 밖으로 정리하기위해 많은 공무원들의 노고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제천의림지가 생각났다. 제천시의 공무원들 또한 무던한 노력으로 의림지가 정비되어 성공적인 명소화 사업으로 평가되어 전국에서 모니터링을 하러 오는 생각이 스친다. 잘 정비되어 있는 안동의 고가들은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고 옛 선조들의 고향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을 중심의 수령이 600여년 된 삼신당 신목은 하회마을의 정중앙에 위치하며 아기를 점지해주고 출산과 성장을 돕는 나무인데 모두들 모여 한 가지 소원을 적어 보았고 유성룡의 고택은 안채까지 들어가 설명을 들으며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이 앉았다는 작은 마루에 앉아 사진을 찍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만송정 솔숲은 하회마을의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해 주었다. 겸암 류운용 선생이 젊은시절 심어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서쪽의 지기(地氣)가 약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심은 일종의 비보림(裨補林)이다. 비보림을 돌아 나오며 TV드라마 <황진이>를 촬영했다는 부용대와 옥연정사 화천서원등을 바라보며 빡빡한 일정으로 가보고 싶은 욕심은 누를 수밖에 없었다.
강둑을 따라 이어진 벚나무 또한 철 맞아 꽃을 피우면 이 또한 장관을 이룰 것이었다.
안동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들판’ 으로 생각한다는 풍산들판을 지나 찾아가는곳은 병산서원으로 사적260호로 지정되었는데 광해군6년 1614년 유림이 서애 류성룡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선생 생전에 제자를 가르쳤던 풍악서당에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고 1662년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을 종향하였는데 남인과 서인의 알력 싸움으로 200여년간 사액이 내려지지 않고 철종14년1863년 병산서원이라 사액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으로 한국건축사의 백미이다. 그것은 건축 그 자체로도 최고이고, 자연환경과 어울림에서도 최고이며, 생생하게 보존되고 있는 유물의 건강상태에서도 최고이고, 거기에 다다르는 진입로의 아름다움에서도 최고이다.’ 라는 글을 읽은 후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다녀온 뒤라 두 서원의 비교가 될 것 같은 기대감에 병산서원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되기 시작했다. 비포장길을 가는 찻속에선 병산서원의 기대감이 한껏 고조된다. 번듯하게 포장이 되면 올사람 못 올사람 구분이 생기지 않아 병산서원이 망가질까봐 포장을 해 준다고 하는데도 문중에서 반대한다는 해설사의 얘기는 안동의 외고집 양반들 특유의 향이 느껴진다.
병산서원은 복례문을 들어서 면서부터 감탄이 시작된다.
문입구 돌계단에서 안을 바라다 보면 주욱 이어지는 계단이 사뭇 예술이기 까지 하다. 복례문을 들어서 서쪽의 연못인듯 한 곳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어 놓았는데 해설사들의 풍수선생님 서달원해설사님이 한말씀 하신다. “집안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하수 처리를 하는 곳인것 같은데요.” 풍수학적으로도 잘 만들어진 곳이라는 뜻일게다.
돌계단을 올라 만대루 밑을 지나 대청마루에 모두 올라 앉아 해설을 들으며 만대루 뒤의 화산(花山)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 만대루로 올라 좌우를 둘러보니 200여명은 넉히 강학을 할만한 공간이며 앞에 내다보이는 낙동강과 화산의 어우러짐 또한 절경이라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만대루에서 내려와 사당문의 팔괘를 설명듣고 전사청 입구 담벼락에서 살짝 한옥과 어울리는 나름의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었는데 조화가 이루어졌는지 두고 볼 일이다.
서원밖으로 나와 화장실이 있는데 아무래도 아랫사람들이 사용했을듯 싶은 달팽이 모양의 문이 없는 뒷간인듯, 서원안의 화장실과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의 뒷간 문화를 뚜렷이 알 수있는 보너스까지 병산서원에는 숨어 있었다.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뒤로하고 숙박지인 영덕으로 향하면서 저마다 <선비의 고장>,<정신문화의 수도>라는 곳에서 차려진 밥상을 받은 기분으로 관광에 매진하는 타 도시에 대한 부러움이 밀려와 제천시 문화관광과 직원들의 고충을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훌륭하다.’ ‘멋지다.’라고 말하지만 해설의 현장에선 제천의 자랑스러움을 내세우며 열심히 해설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제천시 해설사의 소명이랄까!!
마당발인 정복순해설사님의 능력으로 맛난 영덕 대게를 저녁식사로 먹었는데 박애양회장님의 언제 어디서나 건강제일 이라는 일품 건배제의는 영덕게맛을 배가 시켜주었다. 2차의 단합회까지 마친후 두명씩 짝을 지어 배정받은 그랜드모텔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여행의 분위기를 한껏고조 시켰고 아쉬움이 남은 우리들은 다시금 한 곳에 모여 제천의 관광의 현 위치와 발전방안등 이용주계장님과 이강호주사님 박준수주사님 주도하에 늦은밤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며 짧은 하룻밤을 보냈다. 나와 하룻밤을 같이한 삼천겁의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은 이순녀해설사님~ 우린서로 행운이었겠죠? ㅎㅎ
18일 아침 황금자 해설사님의 생일, 미역국을 준비해간 나는 전자렌지에 데워 미역국을 전달하니 다들 정성이라고 놀려 댄다. 생일을 맞은 사람을 미역국도 먹이지 않고 하루종일 같이 보낼 생각을 하니 모두의 맘이 편치않을것 같아 준비한 것인데 역시 마음만은 흐뭇했다. 준비한 미역국에 웃음으로 시작된 아침은 물회와 전복죽으로 손맛이 살아있는 식당(이름이 생각나지 않음 역시 기록이 중요^ ^)에서 시작했다.
11시 안동시청에서 권문철해설사님을 만나 전탑과 봉정사를 다녀오는 것이 오늘의 일정이다. 차량으로 5분,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가 높은 17.2m의 신세동칠층전동탑(국보 제16호)(*주 - 서수용 편저의『안동의 문화재』(영남사 1995)에 문화재로 지정할 때 윗동네 이름을 잘못 알고 쓴 것으로 <법흥동칠층전탑>이 정확한 명칭 이라고 함) 앞에 서니 절은 양반이 빼앗아갔고, 강변의 빼어난 경치는 철둑과 안동댐이 막아 우리나라의 국보 중 가장 시달림과 수모와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이 실감났다. 거기에 탑의 기단부는 시멘트로 발라 숨조차 쉬기 힘들어 보였다. 시멘트는 발명당시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에도 끄덕없이 견뎌 건축물의 혁명이라고 까지 했다고 한다. 그 강함에서 오는 경외심으로 이 탑의 기단을 시멘트로 발라 놓았을까? 문화재의 소중함에 조금이나마 눈을 뜬 나의 입장에서도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렇지만 기단부의 화강암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팔부중상의 조각을 보며 작은 위로를 받을수 있었다. 탑신이 한쪽으로 기울어 있어 조만간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들어 갈 것이라는 해설사의 설명에 공감하며 임청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는 임청각(臨淸閣: 별당채인 군자정만 보물로 지정되어 있음)
법흥동 임청각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살림집중 가장 큰규모의 집으로 중앙선이 개설될때 50여채의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철거당한 99칸 집이었다고 한다. 답사 후 돌아와 문화재에 관한 사실들을 조사해 보니 해설사의 해설과 틀린것들이 많았다. 칠층전탑의 기와는 목탑의 변형과정에서 생긴것들인데 보수하는 과정에서 무작위로 올려진것이라는 해설을 생각하니 어처구니 없다. 안동의 해설사를 탓하기 전에 나의모습을 생각해 보며 더욱 열심히 정확한 근거있는 학습과 해설이 필요함을 느끼며 어깨가 무거워짐은 아마도 책임감 이리라! 지금도 머릿속 생생하게 기억되는건 군자정의 멋들어진 겹처마 그리고 시원한 사랑채를 루(樓)처럼 만들어 놓은 품격높은 모습들은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허물어진 담장은 독립운동가 후손의 삶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이상룡, 독립운동을 떠나기전 집안의 족보들을 태우는 마음과의 맹약으로 시작된 그분의 결심은 남기지 못한 후손으로 인해 우리나라 최고의 건물이 담장도 허물어진 채 방치되다 보수공사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안동의 간고등어로 식사를 하고 모두들 가족들이 생각나는지 하나씩 두개씩 간고등어를 구입하여 손에 들고는 마지막 코스인 봉정사로 향했다. 어제 최고의 고찰인 부석사를 다녀오고 오늘은 봉정사, 두 사찰은 우리나라 목조건물의 가장 오래된 부분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 서로 비교하며 학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이번의 견학은 대만족......
봉정사는 안동시내에서 40여분 거리에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봉정사 가는길은 국화재배가 유명해 국화차로 농촌소득을 올린다는 이야기 여름지나 가을입새의 이 길은 멋진 국화가 만발하다는 해설사의 말에 머릿속으로 그 모습들을 상상해 본다. 차량을 주차하고 낮으막한 언덕길을 오르는데 좌측으로 명옥정이 보인다. 계곡물 떨어지는 소리가 옥 굴러가는 소리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명옥대를 지나 일주문에 다다르니 주변의 굴참나무들이 한껏 우거진 것이 여름엔 무성한 잎들이 울창하게 멋들어진 경관을 자아낼 것으로 보였다. 봉정사 입구엔 안내판과 해설사대기실이 따로 마련되어 봉정사 해설사가 따로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안동에서 같이 동행하던 해설사님이 기어이 본인이 해설을 하기 시작했다. 봉정사는 부석사 못지않게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사찰로 극락전은 작지만 아담하고 오래된 세월에 비해 단아하고 깨끗한 모습은 잘 정돈된 우아함이 엿보였다. 내부 유려한 곡선의 배흘림의 기둥들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건물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내부의 단청 또한 오래된 세월을 볼 수 있었다. 내부 기둥의 용틀임 하는 용들의 모습이 처음 보는 모습으로 신기해 보였다. 극락전을 둘러보고 막 나서는데 안길상선생님이 주지스님이 따뜻한 차 한잔 주신다고 하셨다며 잡아끈다. 봉정사 극락전은 국보급문화재이며 내부의 모습을 잘 못건드리면 망가질 우려가 있어 단청을 하지 못한다는 말씀도 들을 수 있었고 맛난 보이차를 안길상선생님 덕분에 작은 찻잔으로 여러 잔 얻어 마시며 한껏 산사의 분위기도 잡아보았다. 차를 마시고 하산 길 <백문이불여일견이라> 서로들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며 이번 답사여행의 고마움에 침이 마른다. 차량 탑승 후 이제는 제천으로 돌아오는 귀경길이다. 하룻밤을 비운 제천이 새삼스러움은 또 다른 만남의 시작이리라! 여행은 새로움을 접함으로 머리와 가슴이 열리는 만남이라는 생각이 가슴에 들어온다.
늘 새로운 만남을 맞이하는 문화관광해설사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나 자신을 더욱 갈고 닦을 것을 다짐하며, 새로운 나의 앞길을 더욱 열심히 매진하리라 생각하면서 거듭 동참하신 직원분들께 감사드리고 기회를 만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새로움으로 가슴이 열리고 머리가 열려 멋진만남이 만들어진 이번여행은 나의 문화관광해설사 활동에 이정표가 될것이다.
첫댓글 감사 , 감사 , 잘 ~읽었어요^^
~ 대단한 필력이세요 건필에 감사드립니다 *^^*
예에.... 박수... 기억이 새록새록!
``에궁~~`` 힘들어라...눈 알이 아푸넹.....수고 덕분에 다시한번 여행한 기분~~감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