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D] HB D 오늘이 네 생일이니까 (생일 축하 소재 주의)

[kiki]

  이쪽은 밴드 리더 박소희. 나이는 스물하나쯤으로 볼까. 내 낯은 너도 알고 있을 거라고 믿고, 네 낯은 비슷한 또래로 적당히 골라 와 줬으면 좋겠다. 어차피 낯 보고 만날 생각은 없었어서. 너랑 나는 같은 밴드. 너는 베이스고 나는 리더. 딱히 하는 건 없고, 그냥 리더랑 밴드원이라는 설정 보고 싶어서 구구절절 적는 글이니까 설정에는 큰 신경 안 써 줘도 돼. 추가하고 싶은 부가 설정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해 줘. 대신 대략적인 설정은 저 큰 틀 안에서만 보는 걸로. 네 이름은 박주연. 나이는 스물셋 정도가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원래도 데면데면하게 알고 지내다가 밴드 만들고 내가 너를 영입한 순간부터 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는 설정으로 보고 싶다. 시기는 밴드 만들기 전이어도 좋고, 밴드 만들고 모든 게 안정되면서 알 건 다 알아 버려서 새로 알게 되는 사실들에 조금 놀랄 정도로 편해질 즈음이어도 좋고. 길게 오래 볼 생각 있음 밴드 만들기 전 시점부터 보고 싶기 해. 따로 원하는 시기 없으면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조율 사항이랑 같이 별 달고 얘기해 주라. 자세한 건 와서 조율해 줬으면 하고. 참고로 이쪽은 시간이 꽤나 많은 사람. 답텀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지문 길이는 유동적인 편이긴 한데, 대부분 상대한테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이니까 너무 길거나 짧은 지문은 내 쪽에서 거절. 종결형 괄호체 쓰고, 소설체든 괄호체든 상관없는데 대화체는 조금 어려워서. 그 점은 양해해 줬으면 좋겠다. 상황은 네 생일, 그러니까 열두 시 자정 종 딱 칠 때 편지 보내서 읽는 상황으로 보고 싶어. 올 때 지문이랑 생일 편지 감상문만 짧게 가지고 와 주라. 기다릴게, 주연아.

  안녕, 언니야. 제법 멤놀충 같은 서두로 시작했지만 나름 산뜻한 편지를 써 보려고 한다. 99년생 천지네, 진짜. 달에 왕언니 세 명 편지를 다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노래는 내가 듣던 재즈인데 생일에 듣기 영 나쁘지 않아서 넣어 봤다. 재즈는 참 이상한 장르지. 끈적하게 늘어지다가도 과장스럽게 이어지는 게 꼭 누구는 삶과 닮았다고 말한 것두 같구. 내가 요즘 좋아하는 노래라 언니도 들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한번 가져와 봤으니까 편하게 들어주든가, 말든가. 서론이 길었죠? 우리 밴드 최고의 철딱서니이자 사람 조아 인간, 걸어다니는 멤놀충, 살아 숨쉬는 멤놀충, 멤놀충의 표본 주연 웅니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와, 나도 이제 탈멤놀충인가 봐. 앞에 첫 문단 적으려고 빨래터 가서 유사 구인 뒤지면서 공부하고 왔어.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 적을 때가 아니긴 한데. 우선 알겠어요. 언니 생일 삼십 분 남았는데 빨래터 유사 트윗 쓰는 동생 어떰? 넵, 그만 깝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너무 길고 험난했던 서두!

  언니,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 나는 언니라는 사람을 알고 이해할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뻐. 이게 오늘의 본론이기는 하지. 이 밑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내가 언니를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이야기고, 결국 생일이라는 건 이렇게 고해성사하듯 긴 편지를 적을 수 있는 적당한 타협점이니까 그다지 좋은 생일 편지라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이런 편지 써 주는 동생 흔하지 않으니까 옆에 끼고 아끼면서 잘해 주란 말이야.

  언니, 나는 이 망할 밴드를 만들고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예전에는 그냥 존재만 알고 있던 가민이를 빼면 다 알고 지낸 사이인데도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처럼 감회가 조금 새롭네. 그 범위 안에 언니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다은 언니 편지에도 적었지만, 나 낯 진짜 많이 가리거든. 소극적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뭐라고 해야 하지? 사람 나누고 선 긋는 게 좀 심해서. 그래서 친한 사람 범주에 애들을 넣은 이후에도 언젠가는 그냥 다 흩어질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때 내가 속이 조금 꼬여 있기도 했고, 원래 한번 하고 싶다고 결심한 일은 두 번 고민 안 하는 무지성 거인 비슷한 거니까. 그래서 언니랑도 조금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 같네. 성격이 안 맞는다거나 이런 문제가 아니라, 나는 모든 사람이랑 벽을 두고 싶어 하는 특이한 부류의 인간이니까 그냥 고질병이 한 번 더 고진 거라고 보면 될 것 같지만. 근데 언니는 정말 언니가 생각한 것보다 다정하고 단순한 사람이거든. 어떨 때 보면 철딱서니 어디 갔냐 싶다가도 또 어떨 때 보면 진짜 어른스러운 사람이고. 언니는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써서 참 삶이 피곤하겠다. 이게 내 첫 번째 결론이었어. 그리고 밴드 만든 지 두 달도 안 돼서 개박살이 났지. 그때의 언니는 감정 기복 심한 정신병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텐션이었거든. 와, 씨발. 다정함도 체력이라더니, 무슨 사람이 골든 리트리버도 아니고 어떻게 지치질 않지. 멤놀충 그만해. 이러면서 언니 노는 걸 가만히 지켜봤던 기억이 나네. 그때 언니를 보면서 조금 신기함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사람을 오래 관찰하는 습관이 있지만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렇게 많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모든 정보는 연계되어 있고, 나는 그 연계된 틈을 건드려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하여튼 그때 언니를 잘 모르던 내 기억 안에서 언니는 멤놀 열심히 하고 성격 좋은 걍 졷나 해맑은 사람이 됐어.

  근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힘들 때 받은 도움은 오래오래 기억하게 되잖아. 나한테는 언니가 그런 사람이었어. 다정한 사람은 내가 스스로 마음을 열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언니가 내 인생에 자리를 잡고 있었어. 사람이 힘들면 그냥 뭔가를 다 놔 버리고 싶거든. 그냥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서 너무 힘든데, 원래 다정한 사람들은 다 단단하고 강한 거라. 남에게 친절하고 다정할 줄 아는 사람들은 정말 상상했던 것보다 곱절은 더 단단하고 대단한 사람이거든. 힘들 때마다 언니가 나를 위로해 주고 할 수 있다고 담담하게 말해 주는데, 나는 이것 때문에 언니를 조금 동경하게 된 걸지도 몰라. 맞는 말을 하는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게 누구라도 말이야. 때를 놓친 것뿐이지, 살면서 한 마디쯤은 남기고 간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근데 다정한 말은 정말 아무나 할 수 없는 무궁한 치트키니까. 언니가 해 주던 다정한 말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내 인생에 스며들어 버린 거고, 나는 거기에 딱 걸려서 박주연이라는 사람이 너무너무 궁금해진 잼민이가 됐어. 그런 언니의 다정함을 어미 새 기다리는 새끼 새마냥 받아먹으면서 든 생각은 사람의 친절은 늘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온다는 점이었어. 누군가는 언니의 다정함을 기회나 오지랖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언니가 꼭 천성처럼 나한테 알려 준 다정함은 누구 하나한테는 잊지 못할 충격적인 일일 수도 있다는 거지. 예를 들면 나처럼 대차게 꾸여 있는 사람한테 말이야. 사람은 간사해서 자기가 행복할 때는 남의 걱정과 친절을 사소하고 귀찮은 것쯤으로 생각하지만, 힘들거나 불행할 때는 그 친절의 크기를 곱절로 더 크게 기억하니까. 사람들은 언니를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할지는 몰라도, 나는 언니를 조금은 대단하고 엄청나게 단단한 사람으로 기억할 것 같아. 원래 다정함에는 끝없는 체력이 필요한 거잖아. 나는 사회 생활하는 얼굴로 남 얘기 10분만 들어도 질리고 질려서 속으로 욕만 줄창 하는데, 그럴 때마다 살짝은 언니가 생각났어. 체력 부족한 직장인 주제에 함부로 다정해서 진짜 대단한 사람이구나 곱씹게 되는 언니를 슬쩍 생각해 보고는 한다. 다정한 건 강한 거구나, 다정함에는 늘 대가가 따르는구나 싶었어. 그러니까 언니 아무렇지도 않게 보내는 다정에는 꽤 많은 체력이 들어가고 있던 거고, 언니는 그걸 견디는 건지 아니면 몸에 익은 일이고 보람을 느껴서 기쁘게 행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언니를 동경하게 된 계기일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언니는 모두에게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지만, 모두에게 친절을 베풀지만... 그건 언니의 천성이라고 치부하면서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대단하고 빡센 일이니까 두 살 어린 동생이라도 칭찬해 주께요. 언니야, 수고했다. 요지경 세상 그래도 웃는 얼굴에 침 뱉는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들이 창궐하는 이 미친 요지경 세상에서 다정이 얼마나 강한 거고 또 얼마나 불리한 건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이상하고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나는 언니가 편한 사람 포지션을 맡아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가끔 언니한테 너무너무 고마울 때가 많아. 언니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도 이게 왜? 싶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이 스물하나가 있는데 어떻게 서로를 다 편하게 생각하겠어. 그런 와중에도 언니 같은 사람이 애들한테 친절하고 서스럼없이 굴어 줘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언닌 모르지? 내색하진 않았지만 하여튼 그려~ 그냥 고맙다고.

  모두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이상한 안정감을 주거든. 나는 언니를 보면서 답습하는 미묘한 안정감을 인정하게 된 지 얼마 안 된 편에 속하지만, 언니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겠지. 언니는 힘들 때는 힘이 되고 기쁠 때는 또 미운 데 없이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야. 우리 주연이 마음 쓰고 다정 쏟느라 별별 일들이 많았을 텐데. 두 살 어린 소희가 진심으로 칭찬해. 언니의 다정함을 기회로 아는 사람들도 숱했을 테지만. 상처는 받아도 예외는 없는 언니의 사람 좋아 모멘트가 가끔 너무 좋아, 나는. 나는 언니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올해 겨울에도 언니한테 그 이상한 안정감을 느끼고 있네. 진짜 이상한 언니야....... 항상 편한 관계라는 건 없다지만, 언니랑은 조금 더 오래 편해지고 싶기도. 어, 씨발 열두 시. 하여튼 나는 언니라는 사람의 본질을 정말 동경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언니가 베푸는 모든 다정과 선택을 응원하고 존중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언니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게 내가 싫어하는 어떤 놈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든. 이거 진짜 흔하지 않은 일이야. 에이, 씨벌. 다 망했네. 그래도 아무튼.

  생일 진심으로 축하한다, 주연아. 갑자기 반말하는 연하 어떰? 하여튼.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 날 때부터 다정한 사람은 없다지만, 언니의 다정은 꼭 천성 같아서 가끔은 당연한 거라고 착각하게 된다. 더 새삼스럽게 고마워하고 좋아할게. 생일 진심으로 축하해. 언니의 인생에 어떤 시련이 닥쳐 와도 오늘 하루를 떠올리면 내년 생일까지 살아 있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잘 완성된 하루를 보내길 바라. 언니의 다정함이 모두에게 환영받고 또 보답받는 하루가 되길. 내 하루치 행운은 오늘 언니한테 전부 빌려줄 테니까 신나게 쓰고 깨끗하게 빨아서 내일 돌려줘. 사랑한다.

  P.s. 술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아방수 돼서 택시 탔다가 또 십만 원 내면 어떡하냐고. 감동이 휘몰아치다 마지막에는 줘패고 싶은 편지 쓰는 여자 어떰? 나 같음 감동받아서 울었다.

  밴드에서는 멤놀충이던 내가 알고 보니 힘숨찐 주연이에게

  언니의 다정함을 항상 동경하고 있는 소희가

[주연]

새해 기념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이 편지가 읽고 싶어져서 왔는데 나는 또 비상이 걸렸다 담담해 보이는 문장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네 마음들이 너무 좋아 나라면 마냥 사랑한다는 말과 좋다는 말로 범벅이 되었을 텐데 네 표현 방식으로 읽는 사랑이 참 좋아 편지를 늘 누구 하나 울리고자 쓴다는 네게 목적을 채워 줄 수 있는 어른이라 너무 다행이다 싶은 여자 어떰? ㅋㅋ ㅇㅇ 지금도 울고 있다는 뜻 난 내가 다정하지 못하다고 늘 생각했어 그럼에도 난 너희에게는 다정하고 싶어 친절하고 다정하고, 일종의 스파이더맨이 되고 싶다 ㅋㅋ 늘 말했던 것처럼 너희가 있어서 잘 버틸 수 있었고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된 큰 계기 중 하나가 너랑 수전 멤버들이 날 너무 사랑해서 나도 내가 너무 좋아졌던 거더라 이제서야 생각해 보면 난 작년 박제에 멤놀 현갤에 별거 다 했지만 그래도 니들이 있어 늘 행복했다 작년에 멤놀충 짓에 다시 빠져서 너희와 소홀했지만 올해는 다시 잘 지내 보자 너희의 사랑을 당연하고 쉽게 여기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어

[kiki]

우리의 친절한 이웃 주연아 언니야보다 우리 친절을 생소하고 새삼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는데 별 걱정을 다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