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란 게 있기는 있나 보다.
무심히 시간을 지켜내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
동서로 길게 펼쳐진 장대한 히말라야 산맥,
어울리지 않게 짙은 녹음으로 둘러싸인 아늑하고 소담한 호수가 있다.
Fokhara, 호수의 도시.
따로 정한 발걸음이 없다보면 내쳐 딛는 발걸음마다 목적지.
그런 발걸음이 Fokhara 로 향한 것은 행운이었다.
한 몇 일 쉬었다 갈만한 곳이다 .
호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기웃거리다 조그만 정원을 낀, 호수가 바라다보이는 모텔에 check in 했다. 배낭을 풀고,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 앉아, 잠시 일몰의 고즈넉함을 즐겼다.
혼자임의 넉넉함. 그건 자유일까, 외로움에 대한 서툰 변명일까?
웬 동양 여자가 길 위를 서성인다.
머물 호텔을 찾는다 싶다. 나이는 스물에서 서른사이. 단발머리, 중키, 약간 통통하다. 따가운 햇살 때문인지 깊이 눌러쓴 모자 아래 흰 얼굴이 고운 홍조를 띠었다. 그녀는 내가 머무는 호텔을 택했다. 고즈넉함에 빗대어 호수를 내려다보며 하루 저녁을 같이 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반가웠다. 혼자 먹는 저녁이란 아무래도 뻑뻑하다.
check in 한 그녀는 정원을 가로질러 안쪽 객실 건물로 횡하니 가버린다. 레스토랑을 나와 호텔 정원 잔디밭 위 의자에 앉았다. 해가 졌으니 머지않아 식사를 하러 나오겠지, 그녀를 기다렸다.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마칠 만큼 충분히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나오지 않는다. 어둑해진지 한참이 지났는데.
혼자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시간쯤 더 앉아 있어도 그녀는 오지 않는다. 저녁도 못 먹을 만큼 피곤했던가, 아니면 낯선 곳의 밤을 내키지 않아 하는 신출내기인가? 어쨌든 호수가 뜬 별들이 저리 아름다운데 방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늦은 시간이다. 그녀가 오기를 기다린 것은 아니다. 별과 호수와 혼자를 어우려보려 한 것일뿐. 길 위, 레스토랑에 아무도 없다. 종업원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어쩌면 바람 한 점 없다.
커튼을 꼭꼭 드리운 그녀의 창엔 불이 켜져 있다. 자는 걸까? 자지 않는 걸까? 자지 않는다면 저녁도 거르고, 이 늦은 시간까지 무얼 하는 걸까? 살을 빼려 부러 굶는 걸까? 통통한 것이 내겐 좋아 보이는데. 그런 게 불편한 여행자일까?
아침, 정원을 마주하고 본 그녀의 창은 여전히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투명한 햇살이 정원에 가득한데도. 도리질을 했다. 인연이 닿지 않나 보다.
육로로 인도에 들어가려면 Snouli 로 가야한다. Fokhara 의 버스 터미널은 큰 운동장처럼 넓다. 너른 공터를 사이에 두고 언덕 위와 언덕 아래 저멀리 맞은 편에 매표소가 있다. 언덕 위 매표소는 Snouli 로 가는 표를 팔지 않는다. 여기선 갈 수 없는 것인가?
매표소 앞에 망연히 서 있는데 삼십대 초반의 네팔인이 다가왔다. 그는 나를 데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에게 간다. 아내라며 소개한다. 그의 눈에 아내에 대한 긍지가 넘쳐난다. 아내는 미모가 대단하다. 그는 그런 고운 아내를 잠시 버려 두고 언덕 아래의 매표소로 나를 이끈다. 직접가는 차편은 이미 끊기고 멀리 휘돌아가는 차편이 있다.
창구에 돈을 넣고 표를 기다리는 사이, 잠시 둘러본 매표소 주변. 몇걸음 건너 동양 여자가 따사로운 햇빛 아래, 구멍 가게에서 내어놓은 작은 의자에 앉아 있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옆얼굴만 드러낸 채 여행안내책을 보고 있다. 작고 둥근 얼굴이 일본여자다 싶다. 나이는 스물 댓쯤. 홍조를 띤 볼 아래로 하얀 턱이 둥글다. 피부가 멀쩡한 걸로 보아 오랜 여행객은 아니다. 꽤나 따가운 햇살 아래, 두꺼운 잠바, 깊이 눌러쓴 모자, 책에 파묻힐 정도로 푹 숙인 고개. 행선지가 같다면 동행해도 좋다 싶은 느낌이다.
얼핏 발을 내밀다 말았다. 그녀는 따가운 햇살 아래 뚜껑을 닫은 조개처럼 무겁게 시간을 이고 있다.
버스 출발 시간은 11 시 10 분.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혼자여야 하는 여자다. 그건 그녀에게 무척 어울린다.
오래도록 책장을 넘기지 않는다. 졸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디로부턴가의 시선속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같다. 무얼까? 햇살이 조금만 덜 따가웠어도 그냥 스쳐 지나갈 일이었다.
그녀의 굳어있음이 짜증스럽다. 타야할 버스를 찾는다. 출발 시간이 가까웠는데 버스엔 아무도 없다. 가운데쯤 창가 좌석에 앉아 고개를 돌려보지만 다른 버스에 가려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그녀는 어디론가 가버렸을까? 그녀는 드디어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 그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기듯, 틈을 드러낸 여백 속으로. 터미널에 버스는 수십대. 아마 그녀는 물이 되어 스며들었을 것이다.
일곱 사람이 올라탄 버스가 출발한다. 눈을 감았다. 그녀는 따가운 햇살 아래 여전히 웅크리고 있을 수 있다. 관광객들이 가지 않는 오지를 거치는 버스. 그녀와 나는 행선지가 다를 것이다. 그녀가 그런 오지에 갈 리 없다. 그녀의 웅크린 모습. 그녀를 둘러싼 따갑고 투명한 햇살.
버스는 터미널을 빠져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시장 거리로 향한다. 정류장에 버스가 선다. 우르르, 스무명쯤 탄 뒤, 두 명의 네팔 남자가 한 여자를 밀어 올리듯 버스에 오른다. 그들은 버스 안을 둘러보더니 그 여자를 떼밀고 내게로 온다. 나를 향해 씩, 웃으며 그녀를 내 옆에 앉히고 손을 툭툭, 턴다. 귀찮은 물건을 적당한 곳에 버린 듯. 처음부터 그녀임을 알았다. 햇빛 아래 고슴도치.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터미널에서 그녀는 날 보지 못했다. 그녀는 모자를 벗고 목례를 한다. 난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앞을 본다. 그녀는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댄다. 승객이 꽉 찼다. 그녀의 머리 위로 사람들의 턱이 와 얹힌다. 마음이 불편하다. 턱 때문은 아니다. 그녀의 몸에 배인 시선을 향한 의식 때문이다. 그녀의 웅크림 때문이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그쯤은 물어봐도 될 일이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질까? 그러나 말을 건네는 대신 창문을 연다. 바람이 상쾌하다. 바람이 그녀에게 간다. 짧은 단발머리가 날린다. 그녀는 모자를 눌러 쓰고 바람을 피해 얼굴을 등받이에 묻는다. 창문을 닫는다.
버스는 해발 1000 - 2000m 의 능선을 타고 7 시간쯤 달렸다. 산비탈엔 듬성듬성 집들이 박혀 있다. 어둑신한 산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몇 번의 휴식이 있었는데도. 도중에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창문을 닫은 이래로 그녀는 등을 기대고 모자를 얼굴에 씌우고 똑바로 누워 있다. 잠을 자는 것 같지는 않다. 그녀가 낯선 시간 속을 흐르고 있다 생각했다.
버스 안 통로 건너 앉은 젊은 네팔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둘은 뭐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녀의 영어는 서툴다. 그녀는 말을 적게 한다. 말보다는 그저 하하, 소리내 웃는다. 그들은 일본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일본 여자다.
젊은 네팔 남자의 언성이 높다. 그녀의 서툰 영어는 네팔 남자를 화나게 만든다. 그들의 대화는 그녀가 네팔의 가난을 무시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하하하, 조금 소리 높여 웃지만 서툰 영어는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다. 그들의 오해는 점점 깊어진다. 젊은 네팔 사람은 부자나라 일본을 비웃는다. 마침내 그녀는 입을 다문다.
밤 8 시쯤. 밖은 몹시 어둡다.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그녀는 내린다. 과자봉지를 늘어놓은 가게 앞마당이 전등불에 환하다. 새어나간 불빛 아래 집이 서너 채 이어져 있다. 이 어둠 속에 어디로? 그런데 네팔 남자가 내린다. 그래서 나도 내렸다. 그사이 버스는 가 버린다. 난 다섯 시간은 더 가야했는데.
적막과 어둠과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침침한 백열 전등 불빛이 부딪힌다. 그녀는 버스가 가버린 길이 아닌 다른 길의 어둠 속을 향한다. 네팔 남자가 그녀의 뒤에 붙는다. 어둠 속에 그의 말이 날카롭게 퍼진다. 난 그들 사이로 어깨를 들이민다. 네팔 사람을 어깨로 밀어 등지고 그녀를 가슴에 껴안다시피 했다.
[ Where are you going? ]
그녀는 놀란 기색이다. 언제 내가 내렸나, 한다. 나를 물끄러미 본다.
[ I am going to siddhartha hotel. ]
주변을 둘러 살핀다. 멀리 깊은 계곡, 산 능선을 따라 난 길,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는 집이 서너채. 어디에도 호텔이 있을 것 같지 않다. 팔을 양 옆으로 벌리고 손바닥을 펼쳤다.
[ Here is No hotel. ]
젊은 네팔 사람이 내 팔을 붙들고 거칠게 흰두어로 뭐라 한다. 영어가 아닌 것이 욕인 것 같다. 그를 무시하고 그녀를 어깨로 떼밀며 발걸음을 서둔다. 네팔 남자는 뒤에 남는다. 능선을 돌아 그가 보이지 않자 발걸음을 멈춘다. 깊은 밤, 달도 없는 밤, 산비탈을 따라 희미하게 난 길. 그 속을 흐르는 그녀와 나.
[ Where is siddhartha hotel? ].
그녀는 배낭을 내려 가이드북을 꺼낸다. 난 목에 건 손전등을 꺼내 비쳐준다. 그녀는 책 속의 지도에서 siddhartha hotel 를 손가락으로 짚는다. 나는 나침반을 지도 위에 올려놓았다. 버스가 간 곳과 다른, 그녀가 향하고 있는 방향에 호텔 표시가 있다. 그녀는 책을 집어넣고 가벼이 배낭을 등에 진다.
어둠 속, 인적이 드문 산 능선에 그렇듯 가벼이 내린 여자. 그녀에게 네팔 남자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도로 넘어가는 날짜가 하루 늦어지겠지만 그건 상관없다. 나 역시 그녀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을 것. 이제 siddhartha hotel 를 찾는 일만 남았다. 그녀는 동행을 개의치 않는 눈치다.
그녀와 나는 묵묵히 산길을 걷는다. 가끔 어둠 속에 집이 나타나지만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은 없다. 능선을 따라 도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넓게 펼쳐진 깊은 계곡이다. 우리는 그 계곡을 내려다보는 산꼭대기 언저리에 서 있다. 별이 하늘에 가득하다. 달은 보이지 않는다. 깊게 패인 산자락 어둠이 진하다. 별빛에 드리운 숲그늘을 따라 난 길은 별빛에 반사되어 희미하다. 그래도 버스가 다니는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다. 그녀도 나도 손전등을 켜지 않은 채 걷고 있다. 갑자기 그녀가 발걸음을 멈춘다.
[ Where are you going? ]
난 손을 들어 앞을 가르킨다.
[ I am going to siddhartha hotel. ]
그녀가 잠시 의아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후후, 가만 웃는다. 하얀 얼굴이 어둠 속 박꽃 같다. 나도 따라 웃는다. 그녀가 묻는다.
[ Where are you from? ]
[ Korea. ]
[ Japan. ]
[ I know. ]
난 고개를 들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앞서 걷는다. 그녀는 일 미터쯤 곁에 떨어져 걸으며 나를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은하수가 밤하늘에 가득 채워진 밤이다. 어릴 적 섬에서 늘상 보았던 그 은하수다. 한동안 그렇게 걸었다.
[ I love dark and walking in dark. ]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말한다.
[ You are heavy. ]
[ No. I don't put no weight in my life. I don't stay anywhere. I have no thinking. ]
그녀는 말이 없다. 그녀도 나도 걷기에 열중한다. 불쑥 그녀가 혼잣말처럼 말한다.
[ It's sad. ]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다. 난 잠시 머뭇거렸다.
[ Not at all. there is a light enjoyment. ]
그녀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십분쯤 지난 뒤 그녀가 묻는다.
[ Are you single? ]
[ yeah. Forty-one years old. middle school teacher. And You? ]
[ Twenty-five. Post-graduate student. Single. ]
1000-2000 m 를 넘나드는 산능선을 따라 난 밤길이다. 사십을 넘은 나도 긴장이 되는데 , 그런데 그녀는 전혀 담담하다. 그녀는 미구에 다가올 뭔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구도자 같다. 그것이 뭔지를 알고 있는. 먼 異域의 땅에서 걷고 있는 그녀. 목적지도 없이 그저 걷고 싶은 때가 있는 것처럼 그녀는 걷고 있다.
[ Are you heavy? ]
[ I don't know. …. perhaps. ]
[ It's sad. ]
나는 가벼워 슬프고 그녀는 무거워 슬프다. 그녀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킥킥, 웃는다. 소녀같은 웃음이 경계의 벽을 스스로 허물었나 보다. 그녀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 How far is it to the siddhartha hotel? ]
[ About one hour? ]
길을 걸은 지 오래다. 좁은 협곡을 넘어서자 멀리 능선 기슭에 불빛이 여러 개다. 거기 마을이 있다. 산기슭을 따라 100 여호 되는 집들이 자리잡은 큰 마을이다. siddhartha hotel 은 그 중심부에 있었다. 우린 건물과 건물 틈새로 난 어둔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간다. 이층을 올라서기 전에 서서 그녀에게 묻는다.
[ Single room is comfortable. Double room is economic. Which one do you want? ]
[ Single room. ]
난 이해한다. 이 밤길을 뚫고 낯선 곳을 찾아온 여자다. 사람 냄새를 피해 온 여자일 수 있다.
[ Ok. ]
이층에 올라서 들어선 홀은 어둡다. 식당인 것 같은데 사미터쯤 떨이진 구석 테이블에 모여 이야기를 하는 네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바 너머 중년의 뚱뚱한 여자가 서 있다.
[ Do you have a room? ]
여자는 두리번거리더니 흰두어로 누구를 부른다. 식당과 이어진 문을 통해 흐릿한 불빛아래 당구를 치던 젊은 청년이 나온다.
[ Single room? ]
청년은 잠시 우리를 살피더니 말했다.
[ No. double room. ]
[ Only double room? ]
[ Yes. ]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묻는다.
[ Only double room. Two? or, One? ]
[ Two. ]
다시 청년에게 말했다.
[ Two Double room. ]
[ No. only one double room. ]
그녀는 고개를 숙일 뿐 말이 없다. 하긴 다른 수도 없다. 내가 방을 양보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 산 속의 밤이 너무 황량하고 춥다. 어쨌든 버스를 내린 건 그녀 때문인데, 그녀도 그것은 알 것이다.
[ How much? ]
[ One hundred Rupee. ]
[ We have to book? ]
[ No. ]
[ I will pay tomorrow morning. Ok? ]
[ No. Now! ]
[ Please show me the room. ]
그는 키를 찾아 들고 손전등을 켠다. 어두운 계단을 지나 꼭대기 층인 사 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모퉁이에 있는 화장실 바로 앞에 선다. 방문을 열고 안을 보여준다. 나는 코를 부여잡고 말한다.
[ Another room? ]
[ Sorry. No another room. ]
나는 그녀를 향해 어쩔 수 없다, 손바닥을 펴 보인다. 그리고 젊은 청년에게 100 Rs 건네주고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오고 안들어오고는 그녀 문제다. 배낭을 열고 비닐을 꺼내 침대 위에 깔고 그 위에 다시 침낭을 꺼내 깐다. 그때까지 그녀는 방 앞에 서 있다. 대충 짐을 정리한 나는 그녀를 돌아본다.
[ …. ]
마침내 그녀가 들어온다. 배낭을 열고 침낭이며 등등을 꺼내 침대 위에 늘어놓는다. 난 그녀를 지켜보고 서있다. 짐 정리를 마친 그녀가 돌아서자 내가 말한다.
[ Let's Have a dinner. We have no lunch. ]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호텔을 나온 우리는 마을을 기웃거리며 식당을 찾는다. 흐릿한 조명 아래 두 명의 네팔인이 식사를 하고 있다. 벽 쪽으로 자리를 잡는다. 주인이 물단지를 들고 온다. 나는 두 명의 네팔인이 먹고 있는 것을 가르킨다.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말한다.
[ Dalbhat. ]
점심을 굶었음에도 식사는 그다지 맛이 없었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그녀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밥알을 하나하나 꼭꼭 씹는다.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무슨 경건한 의식을 집행하는 것 같다. 그녀를 따라 밥 한 톨, 커리 한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 How much? ]
주인 남자가 네팔어로 뭐라 하지만 그녀도 나도 알아듣지 못한다. 나는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 How much? ]
주인이 주방 안 쪽에 대고 소리친다. 열두어살쯤 된 소녀가 나온다.
[ One hundred rupee. ]
그녀가 돈을 냈다. 내가 방값을 냈으니 그녀가 저녁값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 사람들이 절대 타인에게 신세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식당을 나와 시계를 보니 열시다. 잠을 청하기엔 이른 시간. 식사를 하는 도중 우린 서로의 눈빛에 제법 익숙해져 있었다.
[ How about night-walking? ]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어둔 밤 하늘에 대고 가만히 말한다.
[ Yeah. ]
밤하늘의 별도 가까울 거고, 어둠 속의 계곡도 볼 겸 산 위를 향한다. 그녀는 말없이 따른다. 이십분쯤 좁은 골목을 올라 마을을 벗어나자 넓은 공터가 나온다. 잔디밭도 있다. 그 위에 앉았다. 그녀는 내게 일미터 쯤 떨어져 앉았다. 그녀는 늘 일미터의 간격을 두고 있다. 산들거리는 산바람이 불어 왔다. 그녀가 일미터쯤 거리를 두어서일까, 숨을 길게 들어 마셨다.
[ beautiful stars and milkyway. ]
난 차라리 팔을 괴고 모로 눕는다. 그녀는 한참을 앉아 있더니 마침내 땅에 눕는다. 그렇게 한시간쯤 누워 있었다. 불쑥 그녀가 몸을 일으켜 앉더니 말한다. 그녀는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한 것은 드물었다.
[ Now is Christmas eve. ]
[ Really? ]
나는 말꼬리를 올렸다. 마치 놀란 양.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특별히 달랐던 적은 없었다. Tansen 이라는 異域의 산꼭대기 마을. 별, 은하수, 어둠, 산과 계곡. 젊은 일본 여자. 그리고 나. 새삼스런 의미일 수 있었다. 그녀는 내 표정에 미소지었다.
[ Really! Beautiful silence and peace and tiding time. I will remember tonight forever. and … you. ]
[ …. ]
[ I have a present for you. ]
선물!
[ What? ]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Merry christmas. ]
나는 하하, 웃고 가볍게 내민 손을 잡았다.
[ Merry christmas. ]
그녀가 얼굴을 닿을 듯 가까이 들이밀고 속삭인다.
[ I saw you at lakeside hotel in Fokhara yesterday. I stayed at same hotel. ]
[ You stayed lakeside hotel? ]
그녀는 빙긋이 웃는다. 그녀가 그녀였던가? 저녁식사를 같이 하려 정원에서, 레스토랑에서 온 밤을 기다렸던 여자. 너무 멀어서 얼굴을 기억 속에 담아두지 못했던 여자. 그랬던 것인가? 그리고, 오늘. 결국 식사를 같이 하게 된, 방을 같이 쓰게 된, 여자. 그런데 그렇게 새침이었다니.
[ I saw you at bus terminal this morning. You sat at bench with reading guidebook. I remembered your hat, clothes. When you got on the bus, I knew you are her. ]
[ You saw me this morning at terminal? ]
그녀는 놀란다. 난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하-, 하더니 말했다.
[ We have shared a string time. ]
[ Accidently we have met three time. It's miracle. ]
그녀가 움찔 몸을 추스린다. 산 속의 밤은 춥다. 나도 한기를 느낀지 오래다. 하지만 그녀의 추스림이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 It's a miracle. )
그것이 지닐지도 모를 낯선 의미. 나 역시 몸을 흠칫 떤다. 혼자임이 어울리던 여자. 그녀가 지금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혼자가 아님을 견디고 있었다.
그런 속내를 떨치려 일어선 것은 아니었다. 몸에 축축히 스며든 차가운 밤 때문이었다. 그 축축함을 털어내듯 일어나 옷을 털고 앞서 걸었다. 그녀는 내 팔굽 근처까지 다가와 있다.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움찔 손을 움추린다. 그러나 굳이 힘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발걸음이 가뿐하다. 그 가벼움에 그녀도 동의하듯 붙잡은 손을 내게 맏겨 둔다.
호텔의 공동욕실에는 전등이 없다. 그나마 하수구가 막혀 바닥에 물이 고여 넘친다. 손전등을 못에 걸고 대충 씻었다. 그녀가 씻으려간 사이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침낭 속으로 기어든다. 그녀가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으며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전등도 없이 어떻게 머릴 감았을까? 침낭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다. 잠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잦아든다. 침낭 밖으로 머리를 내민다. 그 사이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노트에 뭘 끄적거리고 있다.
[ You are a strong and nice girl. Have a nice dream. ]
그녀가 돌아보며 웃는다.
[ You are a good man. Have a nice sleep. ]
등을 돌리고 돌아눕는다. 오분쯤 후에 불이 꺼진다. 그녀가 침낭 속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적막하다. 우울같은 것이 귓가를 맴몰고 있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린다. 침대는 일미터쯤 떨어져 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단념한다. 그런데도 그녀의 숨소리 때문에 쉬 잠들지 못한다. 다시 온 몸에 칙칙한 어둠이 스며든다. 그녀도 그런 듯 하다. 그녀는 가끔 몸을 뒤척인다. 그녀의 숨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들쑥날쑥하다. 난 침낭을 뒤집어쓰고 내 숨소리를 차단한다. 그러나 그녀와 나의 숨소리를 차단하기엔 너무 고요하고 가깝다. 잠을 기다리기에 지친 그녀는 잠들기를 포기하고 편하게 긴 한 숨을 내쉰다. 나도 따라 한 숨을 내쉰다.
異域의 땅. 산자락마을의 호텔.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 크리스마스 이브. 우연한 세 번의 만남. Miracle. 그런 것들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기엔 우린 너무 멀리 떠나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내일 또, 어딘가로 가야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특이한 느낌이 있다. 그녀 곁에 머무는 시간을 정지시키는 것 같은, 아니면 시간을 버리는 것 같은. 나 라는 자아를 정체시키고, 묻어버리는 느낌. 무엇임을 거부하지도, 찾아 나서지도 않는, 그 안에 가라앉아 있는, 그냥 그대로인.
그런 느낌이 좋은지, 그런 느낌을 지닌 그녀가 좋은지, 상관없다. 그런 느낌에 대한 내 감상 따위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녀의 혼자임에 내가 불쑥 끼어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난 그러고 싶지 않지만 돌아가는 게 심상찮다. 그리고 그건 몹시 불편하다.
잠이 들지 않은 것을 알지만, 혹시 잠이 든 것이라면 깨지 않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 Do you sleep? ]
대답이 없다. 그녀의 숨소리가 갑자기 들리지 않는다. 정적이 더욱 짙어진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You want sex? ]
왜 갑자기 그렇게 물었던 것일까? 그녀는 아침의 터미널에서, 낮의 버스에서처럼 여전히 움직이지 않을 기세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것은 아침의 투명한 대기 속에 모래알마냥 튕겨 나던 햇살처럼, 그렇게 내안에서 튕겨 나왔다. 그녀는 그 햇살 속에서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가만히 침낭을 가슴께로 끌어내렸다. 비닐이 부스럭거렸다. 뭔가 웅크리고 있다. 이미 충분히 예감되었을...
[ No. I am sorry. ]
당황스럽다. 그러나
[ No?
Ok. please Sleep.
Not sorry. Not at all.
have a peaceful dream. ]
나는 잠들지 못한다. 그녀도 잠들지 못한다. 잠들기엔 워낙 색다른 밤인 모양이다. 하루쯤, 자지 않았다고 별다를 건 없다. 손을 머리 뒤로 올려 깍지를 끼고 눈을 뜬다. 잠들지 못할 바에야 눈을 뜨고 어둠을 지켜보는 것이 낫다. 부릅뜨고.
새벽의 여명이 창으로 깃들기도 전에 닭이 먼저 운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베란다에 선 그녀의 그림자가 창으로 비친다. 그녀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담배를 찾아 들고 밖으로 나가 그녀 뒤에 선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 들였다가 길게 내뿜었다. 흰 연기가 푸른 계곡사이로 흩어진다.
[ I think I had a mistake last night. ]
그녀는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 You are welcome. ]
한동안의 침묵 후,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 kasumi is slow, slow kasumi, …, slow. ]
난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름은 kasumi 다.
2000년 2월 김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