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도서관 수필쓰기 강좌 –6차시 (2022년 5월 18일 수)
첨삭자료
1. 고장난 캐비넷 /권삼국
얘들아! 오늘 청소는 선생님이 할게.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 푹 쉬게 하고 싶었다. 이틀 동안 기말고사 치르느라 고생했다고 다독여 주자. 청소 당번들은 와! 하면서 환호를 울렸지만, 시험이 어려웠는지 표정들이 어두웠다.
창문을 모두 열고 1분단부터 교실 바닥을 쓸었다. 2분단 뒤쪽을 쓸고 있을 때, 책상 밑에 동그랗게 말린 종이 말이가 있어, 그냥 쓰레받기에 담았다가 다시 꺼내 조심스레 풀어 보았다. 조그맣게 빽빽이 쓴 글자들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오늘 시험 친 문제의 답안지였다. 분명히 부회장 ○○의 의자 밑이다.
서둘러 청소를 끝내고, ○○의 시험지부터 채점을 시작했다. 네 과목 모두 만점이였다. 다른 학생들의 문제지도 확인해 보니 90점을 넘긴 사람이 손가락을 셀 정도였다. 평소 공부도 잘하는 학생이였고, 질문도 많이 하는 명랑한 모범생이였지만, 의구심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제 숙직을 한 손주사에게 ○○의 등교시간을 물어보니 07시도 채 안 되어 숙직실로 와서 교실 열쇠를 달라고 했단다. 의심은 현실로 다가왔다. 언제부터 고친다고 미루어 왔던 고장난 캐비넷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아니 나의 안일한 생각이 먼저다. 아쉬운 말 하기도 싫었고 어차피 몇 개월 후면 학교 만기로 떠날 곳이라 계속 미루고 있었다. 평소 앞쪽 교사 책상에 과제물과 일기장을 거두어 오거나,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캐비넷을 잠그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테고, 시험 전날 시험뭉치를 아이들 보는 앞에서 보여주면서 내일 여러분이 풀어야 할 문제지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면서 캐비넷에 시험지와 답안지를 함께 넣은 것이 큰 실수였다.
다음 날 오후. 수업이 끝나고 ○○를 남겨 자초지종을 들어 보기로 했다. 평소 학생의 왕래가 없는 3층 컴퓨터로 ○○를 데리고 갔다. 어떻게 공부하여 모두 100점을 받을 수 있었는지 먼저 물어보았다.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늦게까지 열심히 했다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재차 솔직하게 말하고 사과하면 용서하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끝까지 고집을 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종이말이 컷닝페이퍼를 보여주자. 그때서야 당황해 하며 잘못했다며 용서해 달라고 하였다. 칠판 옆에 걸린 지시봉으로 분이 풀릴 때까지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렸다. ○○는 울면서 용서해 달라고 하였지만, 나의 매질은 계속 되었다. 아파서 주저앉은 것을 보고서야 동작을 멈추었다. 반성문을 서 부모님 도장을 받아 오라고 매정하게 당부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눈물을 흘리며, 쩔뚝거리면 가는 모습에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말고사 통계 정리에 마음이 바빴다.
교실 앞문이 스스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의 어머니께서 냉냉한 얼굴을 하고들어 오셨다. 아들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너무 하지 않는냐며 담임의 몰인정에 서운함을 한참이나 쏟아 내었다. “선생님도 자식을 키우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서 가슴치는 말을 툭 던지며 담배 1보루를 아동 책상 위에 남겨두고 횅하니 가버렸다.
그다음 날 속도 없이 웃으면서 등교하는 ○○를 데리고 양호실로 갔다. 엉덩이가 아직도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연고를 거제에 듬뿍 발라 반창고로 덮어주면서 많이 아프니? 하고 물으니. 어제는 아팠는데 이젠 괜찮다며 친구들이 축구하고있는 운동장으로 다름질 쳤다.
마음만 앞섰던 교직생활. 자상하지도 살갑지도 못한 나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 아이들인데...... 나의 잘못을 아이의 실수에 덮어 보려는 얄팍한 속셈이 들통나고 말았다. 책상 위에 남겨진 담배처럼 나도 세상 한켠에 내동댕이 쳐진 참담한 기분이들었다.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나를 덮치고 그런 상황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이기도 했지만, 초임 때 꿈꾸던 교직 생활이 동화처럼 흘러가지는 않더라도 나는 내 삶이 싫지는 않았었다. 여기까지 버티며 무던한 생을 이어 온 것도 어쩌면 어릴 적 내 안의 작은 동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엄청 어설프기는 하지만.
2. 새 이름을 얻다. /김을수
내 이름은 乙이다. 칠남매에다 딸 다섯의 막내라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던 그해가 을미년이니 乙이라 지어셨다. 두 살터울인 언니는 甲이다. 자랄 때부터 병치레가 잦은 나보다 키 크고 의젓하니 공부도 잘했다. 학교에 입학하니 선생님들도 나를 갑이 동생 을로 먼저 알아봐주었다. 자연스레 언니를 존중하게 되며 졸졸 따라다녔다.
오빠들은 아들이니까 도시로 유학을 가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라 딸들은 조금씩 뒤로 밀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였다. 그때 이미 큰 섬유공장으로 시집간 맏언니가 甲 언니에게 대학 진학을 미루고 자기 집 일을 좀 도와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갑 언니는 단칼에 거절하고 자기의 주관대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맏언니가 또 일 년만 자기 공장 일을 도와주고 진학을 하라는 의지를 보였다. 갑 언니에게 거절당한 전력이 있어선지 막내인 내게 더 강하게 밀어부쳤다. 넉넉치 못한 살림에 맏언니의 도움을 받고 있던 터라 어머니는 싫은 속내를 드러내지도 못하셨다.
나는 온순한 편이라 여럿형제들의 뒷바라지로 대소쿠리에 물 빠지듯 비어있는 어머니의 곳간을 뻔히 보면서 고집을 피울 수가 없었다. 진학을 포기하고 맏언니네 일을 1년만 도와주는 조건으로 직장인이 되었다. 사업이 더 번창하다보니 1,2공장을 세웠다. 진학을 시켜주겠노라는 약속은 흐지부지되고 공장 돌아가는 일을 잘 알게 된 나의 역할만 점점 커졌다.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무게감이 나를 억눌렀다.
점점 멀어지는 학업에 대한 내 욕구는 커졌고, 나는 주경야독을 택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학원을 다니며 진학공부를 했다.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고, 관심도 보이지 않았지만, 직장인 2년을 보낸 후에 내 힘으로 몰래 대학에 합격했다. 맏언니는 자기 집 일을 털치고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나는 다시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모두 이겨냈다.
쾌재를 부르며 시작한 대학 내내 장학금으로 어머니의 곳간도 축내지 않았다. 그 때 만난 친구 둘과는 40년 세월을 훌쩍 넘기며 희노애락을 나누는 절친으로 살고 있으니, 그 길을 찾아가지 않았으면 맺지 못할 인연들이 아니겠는가?
결혼시기가 왔을 때 였다. 甲언니와 나는 결혼관이 달랐다. 甲언니는 신랑은 서울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조건이 있었다. 결혼후 태어날 2세가 반드시 서울말을 해야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원하던 대로 서울에서 대기업에 근무하는 앨리트와 결혼했다. 반면 나는 대가족속에서 화목하게 자란 나와 비슷한 정서를 가진 사람을 원했다. 그래선지 농촌이 고향인 남편을 만났고. 공기업이라 순환보직 전근을 자주 했다. 여러지방을 옮겨 다니고 아이들 전학도 하면서 살았다.
가는 곳마다 그곳의 특성에 따라 적응하며 사는것도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甲언니는 서울댁, 나는 지방댁이 되어 멀어진 거리만큼 삶의 방식은 더 달랐다.
배움에 대한 욕망은 어른이 되어서도 놓지 못한 것은 아마 그 때의 목마름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년전 지인을 통해 우연한 기회에 논어공부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려운 한자를 따라 읽기 바쁘고 그리는 것인지 쓰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힘들었다. 삼인이 같이 해도 나의 스승이 있다는 말처럼 넉넉한 분들과의 공부 분위기에 이끌려 더러 결석도 하면서 5년이란 세월이 흘러 얼마 전 세책례를 하게 되었다.
한 권의 책을 같이 보았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공부가 끝난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옛날 서당의 학동처럼 다과와 음식을 들며 기쁨을 같이했다. 세책례 하는 날 수년간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이 지담(智潭) 이라는 호를 주셨다. 글자 그대로 지혜를 담는 못이 되라는 뜻이 담겨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말도 없고 더듬더듬 따라오더니 끝까지 남은 것을 칭찬하여 내게 꼭 맞는 것이라 주신다니 그저 과분할 뿐이다.
이제 갑이 동생 을이 아닌 지담(智潭) 이란 새 이름을 얻었으니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할 일이 내게 주어진 길이다. 길은 어딘가를 향해 뻗어있기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면 또 길이 열릴 것이다. 삶은 내가 끌어온 만큼 따라와 주지 않을 때도 있고, 남과 다르게 더디게 갈 수 도 있지만, 머물지 않고 내길을 갈뿐이다.
3. 수필의 집/김현옥
1.튜울립 정원에 아침마다 눈도장을 찍으며 출근했다.
어째 이리 예쁜 색깔이 있을까 감탄하며 매일 휴대폰으로 몇 장 찍어서 보기좋게 자르기 편집후 가까운 지인들에게 자랑하면서 날려보냈다. 다들 난리도 아니었다. 언제 이렇게 자랐냐고 마치 신생아실에서 데리고 나온 갓난아기 칭찬을 하듯 튜울립 정원사진에 댓글을 달았다.
업무 준비를 하고 다시 통유리 건너편 정원을 보니 흐믓해졌다.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는 까지 두 마리도 튜울립 사이를 쫒아 다니기 바빠 보였다.
또 어떤 호들갑 답글이 있나 싶어서 카톡 창을 여는데 낯선 번호가 진동벨을 울렸다.
받을까 말까 대출 아님 보험 그것도 아니면 통계청 조사따위....울리면 바로 차단을 해도 어째 이리 다양한 번호로 또 오는지 신기했다. 그런데 이번 번호는 달랐다.
“녜~~” 길게 시작했더니, 잔잔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먼저 확인하는 상대편 목소리. 남성이다. 맞다고 했더니 고산 도서관이란다. “아, 네 ”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가 또 뭘 신청했는지도 모르겠고 친절하게 인사까지 했다.
2.수필반 후보로 신청했는데, 먼저 등록하셨던 분들이 개인적 사정으로 참여를 못하게 되어 나한테까지 순번이 돌아온 것이다. 반가운건지 어떤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상대방은 빠른 속도로 강좌 시간과 참여 유무를 확인했고, 마지막 시간까지 출석을 꼭 해야한다는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단서를 붙였다.
나는 잘 알겠다고 그렇게 하리라고 답을 하고 다음날 퇴근길에 도서관으로 갔다.
늘 다니던 곳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담당하시는 선생님의 대략적인 강좌 설명을 듣고 살짝 번지수가 다르구나 싶어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하는 수 없잖아 뭐 수필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몇 달 다니면 되겠지 뭐 배워서 남주냐 뭐...’
나 스스로 위로하고 나처럼 후보였다가 수업에 들어오신 다른 분들과 간단한 인사, 그리고 본격적인 수필의 맛보기로 들어갔다...
정신없이 2시간을 보내며 시간이 지날수록 난 무슨 글을 어떻게 써내려갈지 큰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환상 속에서 수필을 만났던가? 교과서에서 편하게 아주 친근하게 만났던 수필 작품들이 전혀 다른 문장들처럼 내게 달려오는 듯 했다. 익숙치 않았다. 아니 너무 낯설어서 팔로 막 휘젓고 싶었다.
“아니예요 선생님. 저는 정말 못하겠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필계의 1타 강사라는 선생님의 강의는 지름길 같기도 하고, 속도위반 안하고 달리면 되는 고속도로 주행선 같기도 했다. 혼을 쏙 빼고 둘째 시간을 보냈다. 집에 오자마자 물 한 컵 냉큼 들이키고 침대에 누웠다. 담당 강사님은 피곤하더라도 오늘 꼭 첨삭자료를 살펴보고 정리해서 카페 본인방에 올리라고 하셨지만 도저히 수정본을 다시 보는 것도 힘들었다. 너무 가볍게 결정을 했구나 하는 후회로 그날 밤을 보냈다.
3. 일주일은 참 빠르다. 나이 들면 하루는 천천히 가고 일주일, 한 달은 빨리 간다던 할머니 말씀 생각났다. 그래 틀린 말 하나도 없었다. 다시 찾아간 강의실은 캡틴 강사님의 주제강의로 온도는 올라갔다. 솔직히 놀라웠다. 열정 못지않은 철저한 준비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간은 개인 연보 쓰기. 날이 갈수록 태산이다. 정말 내 손가락을 꼬집어 주고 싶었다.
어쩌자고 겁 없이 이 강좌를 힐끔거렸는지 능동적인 내 모습이 아니라 성급함이 앞서는 나를 다시금 혼내주고 싶었다. 본인의 연대기 필요성은 몇 달전 어떤 문화 강좌에서 들었던 내용과 비슷했다. 확실한 점은 꼭 써 봐야 된다는 것, 그래야만 자기 자신을 살펴 볼 수 있다는 것, 들여다 보기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러고 보니 나는 살펴보는 것도 들여다보는 것도 싫었던 것이었다. 기억도 하기 싫은 일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많았던게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강의가 끝나고 내 발걸음은 근처 주민 센터로 향했다. 숙제처럼 해야할 일이 또 생긴 것이다. 살펴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가 어디서 어디로 어디까지 이동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주민등록 초본을 한 통 떼서 집으로 왔다.
3장짜리 초본 첫 장을 보면서 아득하게 그려지는 내 어릴 적 살던 집이 생각났다.
살짝 웃음이 나오면서 아버지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아마도 돌아가신 분이라 먼저 생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간도 잠시 그 다음 줄부터 새겨져있는 나의 아니 우리 집 이사 이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무슨 이사를 일 년에 두 번씩도 했는지......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여쭙고 싶은 일이 줄줄이 생각났다. 그리고 바뀐 주소 한 줄 한 줄을 읽어보니 좋았던 생각 보다는 힘들었던 집안일들, 내 자신의 일들이 내 머릿속을 헤매고 있었다. 답답하고 기분도 썩 좋지 않았다.
4.그렇다. 나를 살피는 일은 곧 고통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냥 위로하며 어루만져 주기 전에 하나씩 하나씩 이불 호청을 뜯어내는 것처럼 이쪽저쪽을 살펴야했다. 거의 골동품 수준이 될 내 생각들을 하나씩 끼워 맞추기도 하고 또 앞뒤를 재어 정렬도 시켜야했다. 쉽지 않았다. 오히려 난 그 초본 종이 몇 장에 온 기운을 소진시켰다.
한 주간 내내 수필 생각만 했다. 이어진 수필 수업은 지각을 했다. 미리부터 잡혀있던 평가출장이 있어서 늦게야 강의실에 도착했다. 이번시간은 담임 선생님 배정이 있었고 짧은 만남으로 정리되었다. 타 도시에서 수필 수업에 도움을 주기 위해 오신다는 말에 놀라웠다. 많은 분들의 열정과 정성으로 이 프로그램이 운용되고 있음에 걱정보다 이제는 책임감까지 생겼다.
‘그래 욕심내지 말고 좋은 길벗들과 같이 걸어가 보자.’ 라는 작은 책임감.
저녁 식사를 정리하고 교재로 받아 온 수필집을 펼쳤다.
맨 처음 담임으로 배정된 선생님의 책을 손에 들고 “오호라...이런거로구나” 술술 넘어가면서도 잠시 호흡을 가다듬게 하는 글귀들, 장면들에 고개를 끄덕였다.
5.다음 날 출근길에 교재용 수필집을 들고 나갔다. 틈새 시간에 읽어야했다.
그 몇 주 지나는 동안 정원 튜울립은 떨어졌고, 꽃대들만 싱싱하게 남아있었다.
다시 새로운 봄이 찾아오면 이들은 다르면서도 더 고운 더 단단해진 모습을 자랑하지 싶다.
어김없이 찾아온 까치들. 내 초본 등록증엔 없어도 니네들도 나의 글에 넣어야하나......
웃픈 고민도 해본다.
4. 꿈꾸는 거북이 /김형윤
1.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있을까? 어릴 적 엄마 무릎에서 들은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다 믿어지지는 않았다. 재능보다 성실함이 우선이라지만 느림보 거북이가 답답하게 여겨졌다. 경쟁이 심할수록 재능이 빛나 보였다. 잘 달리는 토끼가 부러웠다.
2. 나는 거북이였다. 외딴집에서 친구도 없이 신작로만 바라보던 아이가 학교에 갔다. 동작이 굼뜨고 다른 아이들보다 배우는 것도 더디었으나 학교생활은 즐거웠다. 날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학습의 장은 내 호기심을 채우는데 충분했다. 온갖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실을 알게 된 후 더욱 신이 났다. 그곳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세상이었다. 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도서실에서 나는 꿈을 꾸었다. 책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문이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평범한 시골 아이가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세상 밖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더욱이 엄마의 잔소리도 따라오지 않았고 훼방꾼인 동생들도 없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펼쳐진 시간이었다.
3. 중학생이 되자 나는 새로운 책 읽기에 눈을 떴다. 밤새워 책을 읽고 나면 마음이 뿌듯했다. 세상은 선과 악이 명확히 구별되는 전래동화와는 다른 세계였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세상이 펼쳐졌다. 다양한 주인공들과 그들의 삶에서 만나는 진실은 내 사고의 깊이를 한 뼘씩 더 키워주었다. 내 작은 눈으로 본 세상은 슬프고 안타까우며 아름다웠다.
4. 여성으로 세상에 나오는 첫 단추를 채우는 사춘기에 나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만났다. 미스터리처럼 흥미롭게 전개되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내가 제인 에어가 된 것처럼 그녀의 운명 앞에서 가슴이 떨렸다.
5.제인 에어는 자신의 힘으로 삶을 개척해 나간 강인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운명과 맞서 나갔다. 가난한 고아 출신이었던 그녀가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찾아가는 긴 여정은 또 다른 거북이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6. 독서는 내 인생의 스승이었다. 독서를 통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은 내 삶을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책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길이 거기 있었고, 나는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책을 읽다가 어렴풋이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가 가장 멋진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7. 직장 생활을 하다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행복한 결혼을 꿈꾸었지만, 결혼은 동화에서처럼 해피엔딩이 아니라 미궁의 시작점이었다. 결혼은 내 짐을 더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짐까지 내 어깨에 올려놓는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현실은 스케치북에 그려진 본을 따라 색칠하는 알록달록한 꽃밭이 아니었다. 날마다 난이도가 높은 응용문제를 푸는 것 같았다. 일이 서툴고 재바르지 못한 나는 늘 발을 동동거렸다. 집안일은 날마다 되풀이되는 끝도 없는 일이었고, 두 아이를 키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책은커녕 신문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은 남의 일처럼 아주 멀어져 갔다. 꿈은 서서히 잊혀가고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8.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나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불현듯 내 앞의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어떤 우연에 의해 기회를 잡고 꿈이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머릿속에 공상만 가득한 소녀처럼 발은 지상으로 내딛지 못하고 허공에 있었다. 그동안 모든 일에 ‘가족이 우선’이라며 내 꿈을 뒤로 미루기만 했다. 누가 내 꿈을 대신해주는 것도 아닌데 마냥 주위의 눈치만 볼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9. 오래전에 읽었던 제인 에어의 독립심과 운명에 맞서는 당당함이 나를 흔들었다. 어떤 어려운 일에도 굴복당하지 않았던 그녀가 수동적인 삶을 사는 나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송대학에 편입하였다. 오랜 꿈이었던 문학을 공부하였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영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는 것처럼 설렘의 연속이었다.
10. 방송대를 졸업한 후 나는 글쓰기에 도전하였다. 그것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다. 망설임 끝에 수필 공부를 시작하였다. 오래전에 강좌를 등록까지 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랫동안 바깥을 맴돌다가 이제 겨우 경기장 트랙으로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글을 쓰면서 내 삶도 조금씩 변화되었다. 나를 돌아보며 성찰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11. 언젠가 영국소설을 강의했던 교수님이 내게 주신 경구가 떠올랐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하면 승리한다. (Slow &steady wins the race.)”
12. 나는 오늘도 컴퓨터 자판 위에서 좌충우돌,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아직도 어설프고 갈 길이 멀지만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씩 내 길을 가려고 한다. 제인처럼 당당하고, 거북이처럼 성실하게.
멀리 고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5. 우중골농원 / 박송애
1. 가을바람에 햇살은 활시위를 바싹 당겨 곧 퉁겨질 듯하다. 느슨함은 찾을 수 없다. 퉁 하고 거문고 줄이 울 것 같은 날이다. 풀잎을 튕겨도 고음으로 퉁겨질 것 같은 수분 하나 없는 날이다. 후줄근하게 쳐진 것은 육신뿐이다. 몸속 수분을 다 꺼내 바싹 말리고 싶다. 저 햇살 속에 서면 늘어난 모든 것들이 팽팽하게 당겨져 제 자리를 찾을 것 같다.
2. 송선 저수지를 지나 단석산 초입에서 100여 미터 더 가면 우중골 농원이란 작은 간판이 보이고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농가가 있다. 느티나무, 금낭화, 메발톱이 우거진 뜰은 자연스레 주차장이 되고, 차례를 기다리는 멋진 장소이기도 하다. 본래 이 농장 주인은 건천 읍내에서 오토바이 수리점을 하고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긴 지는 몇 년 되지 않는다.
3. 93년인가 보다. 첫애 백일 무렵 무거운 것을 들다 허리를 삐었는데 그 길로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하는 반병신이 되어버렸다. 정형외과서 사진을 찍었더니 인대가 늘어났다고만 할 뿐 별다른 치료는 받지 못하고 물리 치료만 근 한 달 이상 받았다. 진료받는 동안은 찜질도 하고 전기를 자극해 통증이 가시는 것 같았지만 집에 오면 다시 욱신거려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허리를 쓰지 못하니 시어머님이 오셔서 아이 뒷바라지며 집안일을 하셨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람으로서 할 일이 못 되었다. 수소문 끝에 뼈를 잘 만진다는, 허리 통증엔 한번 만지면 낫는다는 용한 데를 남편이 알아왔다.
4. 그곳이 바로 그때 당시 오토바이 수리점이었다. 국도변에 위치한 가건물 같은 곳은 철물과 고물들로 가득 차 있었고 바퀴 빠진 오토바이와 수리를 위해 맡겨둔 각종 고장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무형물의 고장 난 것들과 자신을 보니 서글프기 그지없었고, 녹슨 물건들을 보자니 나마저도 녹이 슬어 보기 흉한 몰골로 비쳐졌다. 수리해 나가는 오토바이들처럼 내 몸이 나아서 돌아가길 바랐다.
5. 어지러운 것들이 널려있는 가게를 가로질러 컴컴한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가니 서너 평 남짓한 쪽방이었다. 가게에 붙은 작은 방이었는데 일하면서 잠시 쉬는 곳인 듯했다. 일반 병원처럼 차트 같은 것도 없고 접수할 필요도 없었다.
6. 어떻게 왔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어디가 아프다고 먼저 말을 하려 했더니 그냥 엎드리라고 한다. 텁수룩한 털에 숨긴 얼굴은 험상궂어서 더 말을 했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 것처럼 무서운 인상이었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는, 그냥 척 보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다 아니 그냥 시키는데로 하라는 거였다. 대충 들어 짐작은 하고 갔지만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런 인상에 괜히 잘 못 건드려 진짜 병신이 되는 것은 아닌가 겁도 덜컥 났다.
7. 다짜고짜 엎드리라고 하더니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왼쪽 다리를 오른쪽 엉덩이 쪽으로 꺾는 거다. 그리곤 오른쪽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목을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돌리는가 하면 온몸의 뼈들을 직감 하나로 맞추는 것 같았다.
8. 다시 앉은 자세에서 등줄기를 바로 잡는가 하면 팔을 위로 깍지 끼워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시켰다. 그때 왼쪽으로 몸이 기울어 오른쪽 엉덩이 부분이 늘 욱신거리고 당기고 하였다. 골반뼈 (좌골) 오른쪽이 왼쪽 보다 내려간 형상이라 그 뼈를 잡는다고 하였다.
9. 그렇게 두어 번 그곳에 가서 뼈를 맞추고 나니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시고 집안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곤 십여 년 멀쩡하게 지냈는데 재발하게 되었다. 인근 한의원서 침도 맞고 추나요법을 하고 약을 지어 먹어도 신통치 못하였다. 그때 그 집에서 치료받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고생을 하다가 그 집이 우중골로 이사 가서 여전히 의료 행위를 한다는 것을 듣고 가게 되었던 거다.
10. 오전 10시에서 12까지만 진료를 하는 아저씨. 거실 벽엔 무슨 자격증 같은 게 보인다. 수리점 시절엔 근처 의원이나 병원에서 무면허 시술한다고 경찰서에 신고하여 몇 번을 영업 정지를 받곤 했다. 지금은 그 자격증 같은 것이 면허증처럼 의료행위를 가능하게 하나 보다. 휴일이라 부산, 서울, 울산 등 나 같은 환자들이 많이 왔다. 여전히 어디가 아프며, 물을 필요도 없고 5분도 안 걸려 치료는 끝이 난다.
11.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돈이 아니라도 치료비로 그가 좋아하는 것을 들고 가면 된다고 하였다. 술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어떤 사람은 집에 있던 술병을 들고 오기도 하였고 돈도 정해진 금액이 아니었고 손으로 절대 받지 않았다. 그는 호주머니가 달린 바지를 입었는데 그 주머니에 정성껏 치료비를 넣어주면 그만이었다. 그의 그 치료 행위는 광고 없이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나가 그 당시엔 오전 12시까지 진료를 하였다. 12시 이후엔 아무리 먼 곳에서 와서 하소연해도 그는 들은 척도 안했다.
12. 요즘은 금액을 정해서 받는 데 그는 많이 변했다. 말끔하게 면도한 얼굴은 하얗다. 이글이글 구리빛에 험상궂었던 얼굴은 선량하기 짝이 없다.
13. 농원을 가꾸며 아픈 사람들이 오면 말없이 뼈를 맞추는 사람, 그 집 정원엔 온실마저 갖춘 채 선인장류와 많은 종류의 화초들이 자라고 있다. 그때 녹슨 철물들이 있던 자리는 온갖 종류의 꽃들과 풀들로 뒤덮여 있다. 그 주인의 삶이 변하듯 삶의 공간마저 달라져 마음이 편안하다. 그때 그렇게 무섭던 사람이 지금은 인자하고 자상한 모습으로 변하니 자연 속에서 흙과 더불어 살아 그런가, 아니면 삶의 여유가 그를 변하게 하였을까
14. 오랜 고통 속에서 이번엔 말끔히 나아지기를, 더 나이 들어 고통스러워지기 전에 뿌리를 뽑고 싶다. 아픔은 나 하나의 고통이 아니다. 온 식구들이 언짢은 기분이다. 주부의 건강은 온 집안 식구의 건강과 직결된다. 그동안 자잘한 심부름을 해준 아이들, 말없이 집안일을 거들어 준 남편이 고맙기 그지없다.
15. 에펠탑처럼 비스듬히 넘어간 허리가 바로 세워지고 저 가을날 팽팽한 햇살처럼 육신이 바삭 조여지길, 느슨한 모든 것들이
6. 동생들 시집가던 날/ 이장희
1.‘액자’라는 이름의 제 본명은 ‘계단이’입니다. 안방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곳에서 유별나게 사랑받지만 예쁘거나 귀여움과는 멀죠. 고교생 눈에 비친 반복된 층계와 철제 난간이 고색창연한 불투명 수채화에요. 개교 50주년에 태어난 저는 아버지가 새내기 교사 시절 접거나 말아서 실기 교재로 끌어안고 다녔답니다. 허리에 잘록해진 흉터는 있어도 청춘의 민낯이 그대로인 맏딸이죠. 낳고 보살핀 어버이로서 시집보낼 생각이 아예 없었나 싶어요.
2.집에는 동생들이 제 나이만큼 더 있어요. 숫자로 족히 쉰은 넘어도 남과 비교해 결코 다산은 아니죠. 낳고 길러 보살핀 세월이 그토록 길었으니까요.
3.동생들도 대부분 ‘액자’ ‘족자’할 때의 자(子) 자 돌림 공주라, 때가 되면 시집가리라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동생들은 대부분 어려서부터 진작 유리장 안에 보호받으며 컸죠. 족자는 돌돌 말아 가볍게 들 수나 있지, 액자는 알루미늄이나 원목, 합성수지로 되어 크고 무거워서 도둑도 감히 보쌈 해갈 엄두를 내지 못했겠죠? 그런 점에서 저희 자매는 축복받은 딸 들임이 분명해요. 아버지 생각은 이렇더군요.
4.얘들아 너희는 선만 보였을 뿐 배필을 찾지 못했으니 친정살이나 진배없구나. 젊어서는 정분으로 그림을 건네주고 자선단체 기증도 했단다. 감사 표시로 흔쾌히 선물하고는 눈앞에 삼삼해 후회도 했지. 너희들은 치열한 경쟁을 이기고 남은 귀공녀들인가 싶다.
5.아들 둘이 대학 가고부터 빈방이 생겼다. 벽에 굵은 못을 치고 액자를 빼곡히 걸었더니 화랑이나 미술관 못지않게 눈부셨다. 개인전 한 번 열었으면 싶어도 부질없는 짓이란 생각에 거두었다. 그러다 갑자기 좁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어 송별연도 없이 뿔뿔이 흩어질 운명이구나.
6.혼처를 미리 정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집이 팔린 뒤 아파트 입주를 순식간에 결정했기 때문이다. 헌 집에는 버릴 것이 너무 많다. 접시 나부랭이도 편해서 그냥 썼고 묵을수록 정이 들어 여태 구닥다리들 천국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냐.
7.책장의 책부터 정리해 옮기려 하니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새 책과 다름없는 백과사전, 빛바랜 고서와 정든 문고판까지 휴지로 변했다. 볼만한 책도 코로나19 거리 두기 판국에 누굴 물려준단 말인가. 낙엽처럼 가벼워 미련 없이 쓸어버리니 무소유를 실천한 스님 기분이었다. 책은 그런대로 정리했지만 문제는 너희들이지. 레일로 된 액자 걸이에 매달아 걸어 놓을 수 있지만 새 아파트라 왠지 망설여지더구나.
8.평생 동행할 반려자를 찾아, 액자라는 이름처럼 화사한 드레스를 입혀 보낼 각오를 했다. 나는 전시회를 앞두고 미리 그림을 그렸고, 늘 보석 같은 유리 옷으로 단장한 요조숙녀로 키웠다. 그러니 짝을 만나도 얼씨구나 싶어 친정을 몰라라 할 말괄량이는 짐작건대 없다.
9.예전엔 청춘의 그림들을 돋보이려고 액자를 크게 짰다. 장판지 크기 그림이면 액자는 그 두 배라 틀이 크고 무겁다. 유리 액자 없이는 발가숭이 신세 되고, 액자를 살리자니 무게와 덩치를 감당할 공간이 좁다. 그래서 두어 달 내내 死卽生의 각오로 딸 사돈 물색에 나선 게다. 비몽사몽간에도 묘법을 찾았지만 무작정 미룬다 싶던지 마누라 독촉이 빗발쳤다.
10.가장 시급하고 난감한 숙제는 큼직한 여인 나체상. 일반 가정에 보내기가 곤란했다. 오른쪽은 앳된 여인상인데 절반은 뼈골이 드러난 해골상이다. 만학 시절 보름간 주체 부분을 그렸지만 십 년이 지나 작은 나체 여럿을 더 그려 완성했고 큰 미술관에 걸었던 작품이다.
11.시외의 병원장으로 있는 절친한 벗의 사무실에 걸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코로나 확진자 급증으로 만날 길이 끊긴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했으니 첫 번째 딸 사돈이 된 것이지.
12.시작이 반이라지만 크고 무거워 보관에 골머리 앓던 덩치들이 줄을 이었다. 연전에 이런 그림은 얼마 줘야 살 수 있냐고 묻던 친구를 불렀다. 원목액자라 원가의 열 배는 받고 싶었던 전지 크기 수채화를 조건 없이 주려 하니 당장 오겠다고 했다.
13.마침 화물차를 가져왔기에 큼지막한 추상화 하나를 덤으로 줬다. 상부상조의 정 때문인지 우리 농사지을 때 쓰던 철물 나부랭이들을 멀리 밭까지 옮겨줘 고마웠다. 마누라 부탁이었는데 친구 덕에 묵은 숙제를 해치워 백만 원군을 얻은 듯 의기양양했었다.
14.시작 단계라 집 안에 걸기 버거운 작품이 첩첩이 쌓였던 때였다. 외지 산행으로 머리나 식히고 있으려니 반가운 전화가 왔다. 둘이 교대로 안부 전하기에 대구 가면 그림 한두 점 주마고 예고했다. 약속 날이 되자 널찍한 승용차로 왔다. 차가 비좁도록 대형 모자이크와 아끼던 작품을 더 싣는데 액자 한 모서리에 금이 갔다. 후일 손봐서 자신의 집에 모두 걸었다하니 친구보다 내가 더 고마웠다.
15.남 주기 아깝지만 짊어지고 있을 수 없는 큰 액자들이 그래도 숱했다. 재능기부활동을 했던 공무원연금센터와 거기서 배운 어떤 제자에게 전하고 싶었다. 해마다 일가친지들이 모이는 문중 제실에도 걸었으면 해서 모두 여섯 작품을 실었다. 고향에는 택배회사로 보내고, 연금센터는 제자 편에 괜찮은 것들을 보냈더니 그토록 흐뭇해할 수가 없었다.
16.고향에 보낸 것은 도중에 유리가 깨졌다지만 나를 알고 인정해 주는 친지들의 감동이 온몸을 감싼다. 지인의 미용실에 준 염색 작품까지 열두 딸을 보내고 나니 시원섭섭하기 짝이 없었다.
17.대충 크고 짐스러운 것은 정리했어도 더 줄여야 했다. 이사 않고 한곳에 오래 머문 죗값을 톡톡히 치른다 셈치고 내 솜씨를 아는 절친 초등 동기 둘을 불렀다. 흔쾌히 응해 차에 동승해 세 작품을 인계한 곳은 목련 꽃 흐드러지게 핀 전통시장 골목이었다. 늘그막에 새 일터를 구해 바쁘게 일하는 벗에게는 빈손으로 오게 해 가벼운 유화 소품을 건넸다.
18.처남, 동서에게도 서둘러 한두 점 전했다. 살던 집 마당에서 축하 겸 송별 인사는 나눴지만 서로 바빠 끝 순서가 되었다. 작아서 부담 없고 아끼던 그림까지 덜어내니 대충 헤아려도 열여덟은 되었다. 부피가 작아 아직은 끌어안고 싶은 도자기와 조각품은 그대로 있다.
19.그들을 제쳐놓고도 남은 녀석들이 떠나보낸 수만큼 되나 싶다. 하지만 얘들아! 아비로서는 언젠가 혼처 정해질 날이 거듭 늦춰졌으면 싶으니 이럴 어쩌면 좋으냐?
20.마지막 통화한 친구분은 이사 전날 왔죠. 화장지 한 묶음을 들었는데 혼자가 아니더군요. 농사일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친구분인데 갑자기 뇌경색이 와서 부인이 대신 차를 몰았다나요. 두 작품 주려는데 세 작품을 찍기에 딱 잘랐으면 싶더라고요. 하지만 병조차 얻은 벗을 안쓰러워하는 아버지와 한마음으로 빠른 쾌유를 빌었답니다.
21.숨이 차도록 여럿을 바쁘게 출가시키니 더러는 술과 밥을 사더랍니다. 그럴싸한 장소에서 우정을 더했으며 한 턱 더 쏘겠다는 친구도 있었다네요. 그러고 보니 동생들의 혼처는 역시 의리 있고 그림을 좋아해 전부터 선망하던 이들의 가정이라야 후회없겠더군요. 자주 만나는 건강한 분이면 금상첨화이겠지요.
22.줄잡아 스물 남짓 주례 없이 딸 혼사 치른 아버지! 저도 동생들이 오래오래 행복한 시집살이를 이어갔으면 하는 아버지와 한마음이에요.
7. 동행 /차갑희
1. 목이 따끔하니, 온몸에 기운이 처진다. 몸살이 찾아 오려는 모양이다.
2. 편하게 쉬고 싶은 맘 간절하나 같이 놀자고 손자가 성화다. 식구들 저녁 준비조차 미뤄놓고 녀석의 친구 역할이 되어 소꿉놀이한다. 텔레비전을 켜두면 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오래도록 시청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또한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하루 한 시간 이상 보여주지 말라는 딸의 부탁이 있어 되도록 딸의 육아 방식을 따르고자 한다. 앉아서 놀이하다가 저도 피곤했던지 간간이 누워서 휴식 시간도 끼워놓는다. 오로지 저 하자는 대로 따라 해주니 얼굴에 미소가득이다.
3. 할아버지의 귀가 전화를 받고는 또 같이 놀아야 한다고 재촉이다.
“지환아, 할아버지 잔치국수 만들어 드리고 또 놀자.”
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 치맛자락을 놓지 않는다. 면을 넣고 뜨거운 물이 끓고 있어 조심시키는 차 남편이 들어왔다. 다짜고짜 부엌에 있는 아이를 끌어내려는 남편과 반항하는 아이랑 실랑이가 벌어진다. 이미 아이의 엉덩이는 빨갛게 물들어 있다. ‘저건 아닌데 영감탱이가 왜 저런 짓을 하고 있을까?’ 금쪽같은 손자가 맞고 있는데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다. 차리던 저녁상을 내팽개치고 아이를 보듬어 안고 현관을 박차 뛰쳐나가고 싶다.
4. 딸이랑 나는 되도록 매질 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자기 잘못을 생각하여 끌어내려고 한다. 주방의 일도 되도록 함께한다. 아이랑 놀아준다는 것은 큰 인내심을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손자는 어른들 일에도 관심이 많다. 남편을 제지하려니 더 큰 화가 몰려올 것 같다. 아이에겐 이래저래 혼란을 심어주긴 마찬가지다. 부엌과 떨어진 곳으로 밀려나 있는데도 왜 자꾸 혼을 내느냐면서 녀석은 큰 소리로 울분을 토한다. 꾸중을 듣고 있으면서도 네 살의 당찬 한마디에 피식 웃음이 난다.
5. 남편은 일어나지 않는 작은 일에 더 민감하다. 두 딸의 초등학생 시절 야외 학습으로 수영장 가는 날이 있었다. 미처 수영을 익히지 못한 아이들의 안전이 걱정되어 결석 시키자고 한다. 별스럽다고 생각하면서 가장의 말을 따랐다. 담임선생님께 말을 꺼내기가 쑥스럽고 미안했지만, 덕분에 아이들은 일찍 수영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6. 늘 남편의 국수를 빼앗아 먹던 아이가 오늘은 멀찌감치 앉아있다. 식구들보다 손자랑 먼저 챙겨 먹던 저녁밥도 오늘은 지나쳤는데 배고프지 않을까 걱정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부풀어 오른 녀석의 엉덩이를 바라보니 또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놀란 탓인지 자다가 몇 번이나 깨어 울던 아이로 인해 하얀 밤을 보냈다. ‘무식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여태 함께 살아온 한 남자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진다.
7. 시간이 지나 화난 마음을 삭여 앞으론 매질을 말아 달라고 하니 요즘 아이들의 훈육에 매도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역설이다. 어릴 때 고집을 꺽어 놓아야지 성장 후엔 늦다고 한다. 하긴 집안에서 1순위인 요즘 아이들은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있다. 상전이 따로 없다. 업어 키운 자식들이 커서는 부모 업어 버리지나 않을까 농담으로 이야기들 하기도 한다.
8.두 딸을 출가시키고 노년의 여유로움도 잠시, 사위의 사고사로 혼자된 둘째와 합가할 계획 중이다. 한 달 전부턴 딸의 직장 복귀로 손자를 돌보아야 하니 우리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벌써 아이의 훈육 한가지로 부딪히고 있으니 함께 살아갈 일이 걱정스럽다. 손자가 어릴 때는 젊은 세대의 방법에 귀 기울이고 커가면서 조부모의 방식을 조금씩 곁들이면 낫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9. “엄마, 아빠에게 잘해 드리세요. 엄마의 가장 소중한 한 사람이잖아요.”
응어리져 있던 마음이 딸의 한마디에 번쩍 정신이 든다.
8. 뜻밖의 여행 / 한외근
1. 친구 부부들과 1박 2일 동안 동해안 여행을 다녀왔다. 금융기관 연합회 총무국장으로 퇴직한 이 국장과 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한 김 교수네와 함께였다. 두 친구 모두 현직에 있을 때는 일만 하느라 부부 여행은 거의 없었다 했다. 그래서인가 만나기를 좋아했다.
2. 5월에 만나고 헤어질 때 6월에는 동해안을 쭈욱 올라가 보자는 제안에 모두 동의했다. 6월 30일 (토요일)과 7월 1일로 날짜를 잡았다. 다른 계획은 없었다.
3. 6월 초순에 이 국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동해에서 사업을 하는 사돈이 저녁에 식사 대접을 하겠다."
는 제의가 있었다고 한다. 김 교수로부터도 전화가 왔다.
"날씨가 덥다. 아침 일찍 가자."
"그러자. 8시에 출발하자"
고 했다. 부인들도 아침을 하지 않아서 일거리가 줄어 좋다 했다.
4.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볼 것이 있으면 보고 맛있는 것 있으면 먹으며 가자는데 마음이 일치했다. 장마가 시작되고 갑자기 태풍이 올라와서 비가 3백여mm나 온다는 일기예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진행하기로 했다.
5. 출발 며칠 전에 이 국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해 출신 둘째 며느리에게
"숙소를 알아보라고 했다"
한다. 하루 뒤에 전화가 또 왔다.
"성수기여서 펜션은 전부 예약이 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
하더니, 오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며느리가
"친정아버지께서 호텔을 예약했습니다."
고 해서
"호텔에는 가지 않겠다. 취소하라고 전해라.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했더니 며느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 한옥 펜션을 예약했다 합니다."
는 반가운 소식이 왔다는 것이다.
6. 6월 30일 아침 8시에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났다. 새벽에 햇빛이 조금 비치더니 구름이 잔뜩 낀 하늘로 변했다. 김 교수 차로 출발했다. 수성IC에 차를 올리고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의논했다. 포항 고속도로로 가서 동해안을 훑어가기로 했다. 기후 탓인가 길이 조용했다. 계획 없는 여행이어서 그럴까. 이 국장네가 체리 한 통만 들고 왔지 빈손이었다. 영덕 삼사공원에서 우리 집에서 가져간 쑥떡과 참외로 아침을 대신했다.
7. 울진휴게소에서는 파란 바다를 보며 잠시 쉬었다. 길가에는 빨간 해당화꽃씨 열매가 예쁘게 달려 있었다. 꽃보다 아름다웠다. 옛적에는 시골에 집마다 해당화꽃 나무가 있었다. 무슨 병에 좋다는 소문이 난 뒤 뿌리까지 다 뽑히는 수난을 당하여 씨가 마르다시피 한 꽃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도로 옆 화단에 많이 심어져 있어 보기 좋았다.
8.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이 국장에게 사돈에게서 전화가 왔다 했다.
"점심을 먹고 저녁때 맞추어 가겠습니다"
고 했더니
"삼척에 점심을 예약했으니 식사하지 말고 바로 오시라."
고 한다는 것이다. 유명한 맛국수집이란다. 인터넷에 확인했더니 '부일막국수' 금방 떴다.
9. 12시 반에 삼척 문화방송국 앞쪽에 있는 식당에 도착했다. 외진 골짜기에 식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차장이 넓은데도 차들로 꽉 차 있고, 두 채나 되는 팔각정에 기다리는 손님이 많았다. 이 국장 사돈 내외가 우리를 맞았다. 서로 인사를 했다. 김 교수는 아이들 결혼식 때 주례를 했었던 인연도 있었다.
10. 식당 안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식당은 1시간 기다리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우리는 예약 덕분에 식사는 즉시 할 수 있었다. 국수는 보통이 팔천 원, 그리고 특품이 만 원이란다. 수육도 큰 접시는 사만 원으로 가격이 높은 편이다. 밑반찬이 몇 가지 나왔는데 백김치가 듬뿍 나오고 무 채도 있었다. 반찬이 다른 곳에서 보다 특이했다. 수육은 얇게 썰었는데 맛이 좋다며 모두 흡족해 했다.
"사장 여사가 고기는 직접 다룬답니다."
고 사돈이 귀띔해 준다. 수육을 맛있게 먹어서인가 너무 많이 먹은 탓인가 막국수 맛은 별로였다.
11. 식사 후 숙소로 짐을 풀러 갔다. 동해해수욕장의 오토캠핑장이었다. 2시에 방 키를 수령했다. 그곳은 동해시시설공단에서 관리하는 곳으로 오토캠핑장, 펜션, 고층 리조트, 한옥 펜션의 복합단지로 조성되어 있었다. 해수욕장 바로 앞이어서 길고 널은 백사장이 마당처럼 펼쳐져 있어 전망이 좋았다.
12. 우리 숙소는 이층으로 된 복층 한옥으로 6인용이다. 여자들은 2층을 사용하고 남자들이 1층을 사용했다. 방값은 삼십육만 원이었다. 방값도 이 국장 사돈이 예약하여 우리가 계산해 주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그럴 수 없다고 사양한다.
13. 짐을 풀고 또 북쪽으로 달렸다. 강릉 입구에 있는 정동진이었다. 서울에서 정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먼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배 모양의 특이한 선크루즈호텔과 조각공원을 둘러보았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바닷물이 쪽빛으로 바닥이 훤하게 보였다. 강원도 바닷물은 깨끗했다. 호텔 내부가 수리 중이어서 전망대를 볼 수 없었다. 정원에 있는 조각품들을 감상하며 산책 했다. 다른 쪽 언덕 아래로 지상에 펼쳐진 정동진역 국기 게양대의 펄럭이는 태극기를 볼 수 있었다.
14. 정동진역은 유명세 보다 초라했다. 단순한 기차역과 선로 양쪽으로 관광객들이 레일 바이크만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열차형 박물관과 광장에 현대식 둥근 모래시계가 서 있었다. 모래시계는 크기만 컷다. 영상에 자주 나왔던 소나무 실물은 볼 폼이 별로였다
15. 선로에 대기하고 있는 무궁화 열차가 동대구행 목적지 간판을 달고 있어 반가웠다. 4시 반에 출발해서 11시가 다 되어야 종점에 도착하는 완행열차였다. 역전 '선. 카페에서 정동진을 내려다 봐도 감흥이 나는 게 없었다. 맛없는 커피 맛 때문일까?
16. 사돈의 안내로 다시 삼척으로 내려갔다. 삼척항이 내려다 보이는 횟집 3층 방이 예약되어 있었다. 음식이 가득 차려지고 회도 부채형 2접시와 대게도 3접시나 나왔다. 사돈의 30년 단골집이라 했다. 회는 전부 자연산을 사용하여 손님이 많은 식당이란다. 8명이 먹고도 회가 많이 남았다. 먹성 좋은 김 교수도 더 먹기를 사양한다. 여성들은 대게를 좋아했다. 나는 대게가 냉동품이어서 타박하여 맛을 느낄 수 없어 젓가락이 잘 가지 않았다.
17. 점심 대접도 받았으므로 카운터에 갔더니 사돈이 이미 계산했다 한다. 식사비는 1인당 10만 원 정도 된다. 회비로 처리했더라면 우리의 여행 경비 전부로도 부족했을 금액이었다.
18. 촛대바위를 돌아보고 빗속을 달려 동해 숙소에 도착하니 10시 반이 되었다. 고스톱 한판 할 거라고 방석까지 준비했다는 김 교수가 피곤하다며 먼저 꼬리를 내린다. 그럴 만도 하다. 줄곧 혼자 운전했다.
19. 내일 아침은
"명탯국으로 유명한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는 사돈의 제의를 극구 사양했다.
"저녁에 밋 있는 회를 너무 많이 먹어 생각이 없습니다"
고 말했으나 그보다는 염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20. 아침에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아들에게 전화했더니
"어제 대구는 종일 비가 왔습니다."
한다. 이제 비가 남부지방에서 중부지방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일기예보가 맞나 보다.
21. 한 시간여 빗속을 달려 대금굴로 향했다. 주차장에 20여 대의 관광버스가 정차해 있는 것을 보고서야 이곳이 유명한 곳임을 알았다. 환선굴은 들어보았지만, 대금굴은 처음 듣는 동굴이다. 입장 티켓도 사돈이 '암표를 예매한 것'이라고 부인이 얘기 했다. 손님이 많을 때는 예약을 한 달 전에 해야 한단다. 입장 정원이 있어서 예매하지 않으면 관람할 수 없기 때문이다.
22. 사돈 내외가 자기들도 아직 관람해 보지 못한 곳이라며 입장권을 전해준다.
"구경 잘하시고 편안히 가십시요"
라고 인사를 했다. 자기 공장 제품이라며 건 황태 포대 3개 선물까지 건네 주고 돌아갔다. 우리는 환대에 그저 고맙다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고마운 이 국장 사돈이다.
23.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어 기뻤다. 자기 사업도 바쁠 텐대 제쳐두고 사돈 친구들을 위해 이틀 동안 베풀어 준 정성이 고마웠다.
23. 대금굴은 2007년에 개방된 석회암동굴이다. 1,000m가 넘는 산 중턱에 있기 때문에 모노레일을 타고 오르내린다. 모노레일은 3량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루에 17회 운행한다. 500여m 산속에 우렁찬 괴성을 지르는 8m 비룡폭포는 잊을 수 없다. 높은 산속에 저리도 많은 수량이 흘러내리는 게 신기했다. 종유석은 그리 많지, 않고 드문드문 있었다. 1km 정도 관람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한 시간도 안 걸린다. 국내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막대형 석순, 커튼, 휴석소, 천지연 호수 등은 보기에 좋았다.
24. 동굴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1시 반이 되었다. 아침을 건너뛰었으므로 허기가 찾아왔다. 주차장 매점에서 간식으로 사 온 옥수수며 보리빵이 꿀맛이었다. 집으로 갈 때는 중앙고속도로를 타기로 했다. 태백시를 지나 영주행 도로가 잘 닦여 있었다. 강원도 여행을 마치고 경북으로 접어드니 어느새 비도 그쳤다.영주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탔다.
24. 세 가족의 여행을 융숭한 플랜으로 마련해 준 친구 사돈의 환대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삭막한 시대에 대접과 안내로 애써 준 그분들의 배려를 고마움으로 간직한다. 나는 언제 사돈 친구에게 차 한 잔 베푼 적 있었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