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기 |
왕조 |
사 안 |
특기 | |||
년대 |
특정 |
중국 |
한국 | |||
BC 2500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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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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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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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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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黃帝): ㅇ중화인들의 시조(炎帝와 공동 시조라 하기도) ㅇ姓은 姬. 이름 홍영(鴻英), 헌원(軒轅)씨 (공손씨라는 설도) ㅇ25명의 아들⇒그중 희성은 12명 ㅇ원비 西陵씨(누조)에서 세아들을 두다. 그중 次子는 현효(玄囂) 현효⇒교극⇒제곡⇒후직(后稷)과 설(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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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
요. 순
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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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곡: 두아들이 殷과 周의 시조가 되다 ㅇ 원비 소생: 후직(姬성, 이름은 棄, 후직은 농사 담당 벼슬에서 유래한 號)⇒ 주문왕의 선조 ㅇ 二妃 소생: 설(⇒子씨, 교육 담당 벼슬) 二비는 “간적”이라하기도⇒현조(玄鳥) 난생설이 있다. 탕왕의 선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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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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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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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왕: ㅇ자태을(子太乙,大乙,天乙), 설의 후손이며 은나라 건국하다. 송선공(宋宣公)의 선대 ㅇ五顧草廬로 이윤(伊尹)을 영입하여 걸왕을 없애고 殷(商)을 건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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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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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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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왕: ㅇ희창(姬昌), 宣王과 宣伯의 선대이다. 주나라를 개창하다. ㅇ三顧草廬로 강태공(呂尙)을 영입 ㅇ아들 무왕이 주(周) 개국 완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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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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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 ㅇ희단(姬旦), 문왕의 넷째 아들이며 무왕(姬 發)의 동생임. 산동성 곡부에 魯를 개국⇒ 장자 백금이 대신한다. ㅇ魯에는 가지않고 문왕.무왕.성왕을 돕다. ㅇ숙손교여(선백)의 선대이며 공자가 가장 존경했던 聖臣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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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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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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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姬靜):得姓 始祖이며 선씨의 시종(始宗) ㅇ周의 11대왕, 여왕의 아들, 사후 시호(諡號. 廟號)가 선왕(宣王), 어렵게 왕위에 올라 초기에는 정치를 잘하다가 말기에 독단, 46년간 재위,支庶子들이 諡로 성을 삼다. ㅇ據:風俗通議(동한의 "응소"저:약153-1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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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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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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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子力): 득성시조 ㅇ宋의 군주, 19년 재위후 사후 시호가 선공 (宣公), 후손들이 시로 성을 삼다. ㅇ據:路史(宋의 羅泌저,상고 이래의 역사 씨족 방면의 전설 등), 풍속통의. ㅇ동생에게 선양하는 전범(展範)을 세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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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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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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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손교여(叔孫僑如):得姓 始祖 ㅇ노 주공의 후손, 환공의 5세손, 집정대신 (대부), 삼환씨 통합 실패로 위(衛)로 피신 경(卿) 이 되다. 생전의 공으로 선(宣) 의 시를 받아 시호가 선백. 후손들이 시로 성을 삼다. ㅇ據:통지(1103- 1162, 鄭樵저: 기전체 중국통 사, 씨족지는 일생의 역작) 씨족략 *姓纂(唐대 보첩 성씨학의 전문지:林寶修저) *姓氏考略(성씨의 근거 고전, 청대 陳廷휘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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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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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戰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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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시평 .선양 두분의 기록은 안렴공 후손들의 홈페이지에 나타남(선시평님이 노대부 선백님 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선씨들의 군망 시평군을 잘못 해석했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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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 |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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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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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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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宣虎: 한조 장령(將令), 한고조가 천호후에 봉하다. 南安武侯(見漢書 高惠高后文功臣 表 66위, 사후시는 엄(卒 谥严) ㅇ宣義: 한조 장령, 한고조가 천호후에 봉하다 122위 土軍武侯(見 功臣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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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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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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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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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씨들 해동(한반도)으로 기획 탈출 The sun' EXODUS -漢末 中國之宣多 竄 海東" 한말에 많은 선씨들이 해동으로 피난했다 -1681년 선응뢰(안렴공 선윤지님의 10대손)님이 한서(중국 문헌)에서 확인한 사항 -선씨 족보에 대응되는 내용: 自中國來東土矣 奧在百濟前 世居 伏虎村 伏虎乃山陽之舊號 : 중국에서 동토로와서 백제전에는 복호촌에서 살았는데 복호는 보성의 옛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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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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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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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宣汝學: 大鴻臚(려)하였고 선병의 아버지다. ㅇ宣秉: 名气最大,是云阳(现在山东省曲阜市 西北)人,巨公,一家人在东汉初期一直是 名声响亮异常的。 宣秉是一位备受尊敬的 高节之士,早年对于王莽的征 召 不予置 理 到光武中兴汉室,才应徴(音指)出任 御史中丞 并且以秉性俭约 所得俸赐尽散亲 家无担 石之储见稱。据说有一次光武帝临 幸 其舍,看到他家中四壁萧然的情形,曾经 叹说:“楚国二龚,不如云阳宣巨公”呢! *선병: 명성이 높으신 분으로 운양(현재의 산동성 곡부 서북부)인 이시다. 거공님의 일가는 동한 초기 내내 명성의 퍼짐이 보 통이 아니셨다. 선병님은 존경을 온몸으 로 받은고매한 선비의 한분이다. 일찌기 왕망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광무제때 중흥 된 한 왕조 부름에 응하여 어사중승의 벼 슬을 맡으셨고 또한 검소한 품성은 받으 신 녹봉을 친척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부담 되는 돌맹이 하나 쌓두지 않을 정도였다. 광무제가 그의 집을 일차 방문하여 보니 집 네벽이 너무 황량한 지경이라 초국의 이공이 운양의 선거공만 못하구나하고 탄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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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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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宣酆:字伯應 汝南人東陽亭侯(見後漢書 桓 紀 及靈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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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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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우(宣虞): 노자시종기 一권, 著周易象論 *老子始終記(計有 撰) ㅇ선빙(宣聘): 노자시종기 二권,晋朝 팽성령 (彭城令) ㅇ선요(宣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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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 - 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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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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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宣珍之:唐朝状元,浙江义乌暨阳善溪宣氏 宗谱之第一代祖,唐宋八大家之首韩愈为唐 贞元年间状元学生宣珍之写过文章,称赞 他之为人。宣氏家族于唐宋两朝多人中进 士为官,曾与柳宗元、曾巩、欧阳修、王 安石、苏轼、文天祥等同朝为僚,他们都 为吾(宣)族祖先写过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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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 1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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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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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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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宣慮漢: 선명의 형(노자도덕종시일권저) ㅇ宣明 : 字南仲。浩然有归志,筑屋隐居于成 南 五里岩洞 郡守谢稠题曰“宣岩” 高逸之士 ㅇ宣赞:男,原是宋代蔡京手下的一名武官
ㅇ宣缯:南宋庄元府人 因成绩优异而为太学博 士 秘书省校书郎、宰相、观文殿大学士.以 才 知名,卒諡忠靖, ㅇ宣亨: 画家 汴人。精花鸟 ㅇ宣和中:久在画院。入蜀时,徽宋留之 ㅇ宣贊: 靖康(흠종, 1126년) 청소사로 고려 입국 ㅇ宣使黨: 1288년 고려 입국, 中書 ㅇ宣天柱:1368(洪武初)년 황명으로 고려 입국(명조) |
여한 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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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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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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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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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宣昶 : 惠州府同知 ㅇ宣仲庸: 淸吏 ㅇ宣国柱:大臣 ㅇ宣嗣宗:中书舍人 ㅇ宣溫: 字彦学。明朝会稽人。勤奋好学,精 通经史,洪武中被诏上询以治国之道,被授 之为四川参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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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 1911 |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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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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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宣鼎(1832-1938): 소설가.희극가.시인.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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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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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宣鐵吾(1896-1964), 국민혁명군 육군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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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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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宣俠父(1899-1938) 일명 요화, 국민혁명군 육군 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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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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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宣力井:天赋异能,能使用意志力移动物体 ㅇ宣中华:(1898~1927):中共烈士 ㅇ宣永光:笔名“疯话老宣”,三十年代,四川 的 李宗吾与北京的老 宣,可谓中国文坛的 两位奇人怪杰 ㅇ宣萱:女,香港影视演员 |
以發 | |
원년- 4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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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백제 복호촌에 정착하여 세기를 형상하고 본을 세우다 ㅇ복홀현 설립시 보성내에서 이동(지금의 보성선씨 선조들은 동노군 적촌면으로 이사하다 |
한국 이주 정착 | |
1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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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ㅇ선용신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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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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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용신 등(登)문과, 벼슬 시작⇒합문 지후 문하시랑, 참지정사. 文章名世. - 流傳하는 별명은 한솥장군(大鼎將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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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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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용신:경오정변⇒ 좌명공신 책훈되고 병부상서 받다 또 여진 정벌로 공을 세워 패주군(貝州君)되다⇒ 관을 받다(受貫)⇒ 족보상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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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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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유(중서문하평장사) 탄생, ㅇ선좌: 일명 선양좌(수찬)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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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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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원지(예의판서) 탄생 , ㅇ선윤지(호남안렴사)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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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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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중길(절도사)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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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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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중의(호조참의)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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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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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원지: 우제주(우탁:禹倬,1263-1342)와 교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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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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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함안 조 덕곡(조승숙):1357생, 1376(우왕2년)진사, 1377 문과, 1701년 덕곡서원. - 두문동 72현. 선좌의 딸과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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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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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윤지 귀화하였다는 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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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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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덕곡 두문동 가다. 선원지 선윤지, 선기지, 선중길, 선중의 귀향, 고려에 절의 지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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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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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중의님이 호구첩 재발급 - 호조참의께서: 기존 호구를 서실하자 재 발급 받아 후손에게 전하시다. - 총 40명이 등록되어 있고 12개 성씨가 나타나며 그중 6개 성씨는 4대의 계보와 벼슬이 기록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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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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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용도: 권근(1352-1409년, 사병 혁파) 문하에서 수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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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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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칙: 조성으로 이주, 주월산 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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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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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안렴공 후손 일부 :갈몰(보성읍 봉산리)로 이주 정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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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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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달덕 결혼: 덕산군수 진원 박이성의 무남 독녀와 결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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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 |
15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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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대덕 사망(선여경의 시묘살이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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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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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여경 출정: 두아들 및 네명의 종제들과 용만(의주)로 임금 지키러 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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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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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정걸(현감) 동생 정민과 함께 출정: 박죽천(문강공 朴光前,1526-1597년, 진사 선응직등 선씨들이 감사 유희춘에게 추천 하여 공직에 나서게된 분.이황 문하이고 함열, 회덕 현감, 왕자 사부하다) 의막에서 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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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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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무원종공신녹권: 선여경의 가문에 어사하다. 선씨 모두 28명이 공신이되다. *宣伯元:文坊錄에도 나타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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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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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정달(생원):박죽천의 遺事記를 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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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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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절도사 선중길 후손들(조성): 가승 정비하다. 1640년경에 선문환님이 서문을 지어 전해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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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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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시한:선조(1552-1608년: 왕위 1567-1608)를 궁궐 뜰에서 알현하다. 즉흥시(霜後能黃 霜後紅. 楓林菊樂共秋豊...)를 지어 바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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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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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시한:어우 유몽인(1559-1623, 왕세자 시강원. 인조반정 반대로 죽음, 원칙론자) 과 교류하다. 어우에게서 남귀서(南歸序) 받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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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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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시한:안방준 軍容의 2인자(참모관)되어 호란(1636.12월-1637.1월)출정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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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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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영길:안방준 의막의 군관(근왕전임)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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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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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문환(도사공):임경업 장군 참모관되고 원종1등공신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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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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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신유보: 선씨들 족보 복원하다. 안렴공 後 능성의 7대손 선응뢰 선남두님이 주관 (문장은 선복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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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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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무오 수정보: 이때 선수귀 선필하님이 의조 론을 처음(卒然히 창의) 제기하다. 門長 선성구님이 꾸짖고 설득해도 무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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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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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기사년: 갈몰계열들 별보 단행하다. 시조 2대를 삭거(削去),도촌계열 삭제(削除)후 선윤지를 明에서 귀화 시조로 特立하다. 선시덕 선성언님의 고집으로 선씨 분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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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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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익승,선진철님 등이 시덕.성언등의 패륜 행위를 요로에 진정하다. 전라감사 한익모의 제음"換易宗支 錯亂世 代 言誠極可駭"을 받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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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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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정축년: 도촌계열 선씨들 단독보하다. 선익승님 서문쓰시다. 선씨 분열 과정을 마치 동영상을 보듯 전해주시다. 선시덕등의 시조 개변에 대한 패륜을 요로에 알리고 변정을 요구하였음을 기록하다 선응뢰님의 구보 서문이 실려있다. 참의공 호구첩(정장) 내용을 수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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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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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응노: 선대들의 벼슬관련 서류들이 훼손 되자 군수에게 개서(改書) 요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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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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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참의공의 호구첩이 훼손되고있어 改寫해줄 것을 한성부에 요청하다(선광윤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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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성주(군수)에게 갈몰계열 선시덕등의 시조 개변 패륜 행위에 대한 전말을 고하고 행위 자 처벌과 구족보로의 시행 변정을 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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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예조에 갈몰계 선씨들의 시조 개변 행위를 고하고 변정 요구.19분이 연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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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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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병오년: 수정보하다. 서문은 선진철님이 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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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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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전라관찰사(순상)에게 갈몰계 시덕등의 시조 개변과 구보 폐기 행위에 대하여 고하고 행위자 처벌과 구보로의 회귀를 명할것을 요구(진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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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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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시흠외 2명: 선대들의 공직 관련 문서들 을 군수에게 입지를 요청하다. (병사공의 홍패,직첩, 유지등 총 8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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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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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기축년: 수정보하다. 시교님 서문쓰다. 고흥 유재호님 서문쓰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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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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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박종래(5개 판서를 15회 지낸 분)님이 서문 을 쓰시다.선씨 6충 2공을 맨처음 언급. 일 두선생(정여창)님의 글이 있었음 언급. 선씨의 유래 언급: 宣氏以魯大夫宣伯之 諡爲姓 漢宣汝學至明宣天柱 其源 久矣流派分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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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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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갑자년, 수정보하다,鏡華.종미.종칠.종삼님 이 글짓다. 선문환님의 계축가승서문.선진 철님의 병오보 서문.박종래님의 기축보 서 문 등을 수록하다. ㅇ진원 박중회 선생의 서문: 윤지의 부는 유, 조(祖)는 용신임을 진원박씨 외갓집 세계기 에 있음을 밝힘(능성현령 선시중의 따님이 진원朴 暉生의 配가 되었기 선시중님이 밝힌 가계보를 작성 보관해둔것임). 선정달(宣廷達)이 문강공 박죽천 선생의 유사기를 지었음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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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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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신해년: 수정보하다. 圭浩.鼎九.鎭圭.載善 님이 글짓다. ㅇ행주 奇宇萬님서: 郎將公爲伯氏於按廉公 ㅇ광산 鄭時林님의 서문: 東方保守最高先籍 者罕矣 昔在三國時得保竹簡戶籍當時盛稱 三韓古甲族 宣氏之保有麗末戶籍亦已貴罕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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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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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在北 선씨소식: 후덕-경백-사달- (차자)得 日 - 守廷.厚廷.厚命. 居平安道 寧邊郡 梧里 面 鳳舞洞 數百年 聲息 頓純(頓絶) 융희 후 계축(1913)年間 始通居 往來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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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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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진원 박인환(朴寅煥)님이 모현제(선방헌) 와 의제(선영길)의 행장을 짓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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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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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선씨 六忠 유장비 건립하다. 글:연창(죽산) 안규용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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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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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을미년, 수정보하다. 글:珍圭(圭珍).武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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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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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정사년, 수정보하다. 글: 武鉉.良鉉.夏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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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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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병오보: 합책하다(조도계열 폐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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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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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신미년, 수정보하다. 序:성주(星州) 이백순 (李栢淳)선생 "闡發幽光 於百世之下 是 尊祖而 睦族之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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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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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호구첩 쎄미나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박사. ㅇ보성선씨육충절의비 건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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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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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문중의 구 족보등 고문헌을 기탁하다. -기탁처: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 -기탁 사유: 안전 보관. 문중 정통성을 증명하는 문서들의 영세 보전 -기탁 내용: 1.참의공 호구 2.선무원종공신녹권 3.정축(1757년)譜 4.기축(1829년)譜 5.갑자(1864년)譜 (2권) 6.1766년 민원서 7.1783년 진정서(군) 8.1783년 진정서(예조) 9.1783년 호구첩 개사신청서(한성부) 10.1786년 민원서 11.1828년 민원서 총 11종 12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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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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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문헌 기중기탁 목록 13" 발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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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2011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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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첩 세상에 나오다.
KBS공영방송 진품명품 시간(2월7일) 감정가 5,800만원.
선문규 섭외.출연하다 호구첩 한중연의 장서각에 전시됨을 확인하다
일두 선생의 평양공 유사기가 위작임을 해당문중에서 문서로 발표하다.
보성군호구정장(선중의 호적)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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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씨의 유래
한국의 선씨
? 선(宣)씨는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移走)해온
성씨이며 이주 싯점을백제전(前)이라 했으니 대략 삼국시대 초기라할 수 있다. 선씨 후손들은 근대(近代)의 중시조(中始祖)를 고려 고종조 이후의
선용신(宣用臣)으로 하였는데 선용신 전(前) 상계(上系)를 확인할 수있는 문적들이 남아있지 않아서였다. 선씨들의 본(本)은 "보성(寶城 )
단일(單一) 본이며 아직
분관(分貫)된바 없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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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공(都事公)의 선씨 유래(1613년) (都事公 宣文煥: 1598년생.字 子彬. 등무과. 통훈대부.임경업장군-鳥林將軍 참모관. 진무원종1등공신)
아! 우리 선씨(宣氏)는 본관이 본군(本郡=寶城)에서 나왔는데 세대가 아득히 멀어 몇백 년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성을 본으로하기 이전에는 우리조상은 중국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해와서 백제(百濟) 전(前)에는 선씨들이 복호촌(伏虎村)에 살았는데, 복호는 바로 산양(山陽, 보성의 옛 이름)의 옛이름으로 선씨들이 대대로 살아온 터전입니다. 지방조직 개편시 대토해주고 처음으로 관사(官舍)를 선씨의 세거지(世居地)에 세우고 현의 이름을 복홀(伏忽)이라고 고쳤읍니다(346년 근초고왕). 복홀은 복호(伏虎)이니 그 땅의 형세가 호랑이가 엎드려있는 것과 유사했기에 유래한 지명입니다. 이 이후로 선씨들이 각기 나뉘어 흩어져 살 무렵 우리 선조는 동로군 적촌면(冬老郡 狄村面)으로 이사하였읍니다. 동로는 곧 조양현(兆陽縣)의 옛 이름이요 적촌은 지금의(1613년 당시) 도촌면(道村面)입니다. 파가 나누어진 뒤로부터 휘(諱) 용신(用臣)씨 이상은 대수(代數)와 이름자를 상고해 볼 만한 문적이 없어서 용신씨를 근대의 중시조(中始祖)로 삼았는데 그로부터 또 수백 년이 흘렀습니다.
옛부터 전해들은 말이나 문중의 비설(稗說: 잊지않도록 메모해둔) 내용들이 이와 같지만, 이미 고증할 수 있는 믿을만한 역사 자료도 없는데다, 또 여러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증거 삼을 만한 자료도 없게 되었으니, 이 잔약한 후손들이 지난날을 생각하는 감회가 어찌 그칠 수 있겠읍니까? 하지만 그래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옛 사람들의 시에 이르기를, “문적이 없다고 해서 믿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 사실이 아니면 어찌하여 지금에까지 이르러 왔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문적이 없다고 하여 전해오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비조(鼻祖 )로부터 후손인 나까지 12대인데, 10대조는 형제가 두분이셨는데 백씨(伯氏)는 좌우위보승랑장(左右衛保承郞將) 휘(諱) 원지(元祉)이니 곧 우리 계열의 선조이며, 계씨(季氏)는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휘 윤지(允祉)입니다. 9대조 형제 또한 두분이신데 백씨는 호용선전관(虎勇宣傳官) 휘 중길(仲吉)로서 역시 우리 선조이며, 계씨는 참의공(行 參議公) 휘 (仲義)로서 바로 우리 방계(傍系) 선조이십니다. 이상의 세대는 상고해 볼 만한 자료가 없었는데, 다행이 전란 이후에도 참의공의 호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참의공 이상의 부(父), 조(祖), 증조(曾祖)의 휘를 환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니, 이는 전해들은 것으로 증거 삼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어찌 믿을 만한 하나의 중대한 문안(文案)이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리 선대의 시조를 마침내 참의공의 증조(즉 用臣)로 기록한 후 지금까지 수백 년이 되었읍니다.우리 부조(父祖) 위로 문장과 덕이 뛰어난 분, 벼슬과 작록이 높은 분들이 대대로 끊임없이 이어져 나왔는데, 이는 말않해도 아무도 의심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동종(同宗)들이 각 읍에 흩어져 살면서 선대의 계통(系統)과 대수(代數)에 대해 증거삼을 만한 것이 없으니 대강의 이 기록이 도움이 될것입니다. 여러 기록들과 족보가 병란으로 없어젔으니 이렇게라도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앞 선대들의 내력을 어찌 알겠습니까? 만력(萬歷) 41년(1613년) 계축년 2월 ○일
12세손 통훈대부 행 벽사찰방 금부도사(通訓大夫. 行 黃山.碧沙 察訪.禁府都事) 문환(文煥)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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