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마음에 드는 영화가 또 한편 나왔습니다. 거두절미 하고, 심리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측면들 중에서도 굵직한 포인트들만 짚어가면서 리뷰를 작성해 볼까 합니다.
영화적 완성도가 얼마나 높은지, 상상력이 얼마나 기발하고 창의적인지 등등.. 칭찬할만한 꺼리들은 넘쳐나지만, 그런 부분들은 다른 영화 리뷰어들께서 충분히 잘 다뤄주실 것으로 믿고요^^
저희 연구소에서 바라보는 시각에서 영화 속 주요 포인트들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우리의 내면을 치유하고 살찌울 수 있는 유익한 정보들을 추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를 보신 뒤 아래 이어지는 리뷰만 꼼꼼히 한 번 읽어보신다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큰 수확을 얻게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우리에게 강력한 심리적 통찰을 던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 한 번 하나씩 함께 살펴보실까요?
1. 우리는 '감히'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기쁨이(Joy)는 상당한 기간 동안 라일리의 삶을 주도적으로 책임져 왔고, 덕분에 라일리는 무탈히 잘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평화롭고 즐거운 일상이 펼쳐지는 고향 미네소타를 떠나게 되면서, 기쁨이의 활약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일리의 일상은 점점 밝은 빛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 라일리의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마음들 : 왼쪽부터 버럭이, 까칠이, 기쁨이, 소심이, 슬픔이
그간 잠잠히 있던 슬픔이(Sadness)가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라일리에게 매우 중요한 핵심기억을 만져서 슬픔의 색깔로 파랗게 물들이려 하는가 하면, 기쁨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조종 계기판을 멋대로 조작해서 라일리가 슬퍼질 뻔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기쁨이는 당연히 펄쩍 뛰면서 슬픔이를 제지하려 하고, 슬픔이는 그때마다 사과를 하며 물러섭니다.
▲ 슬픔 : 쏴..쏴리...어... 나도 모르게 그만.. 내가 왜 이러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슬픔이가 자의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기쁨이의 경고를 듣고 물러서려 마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이 멋대로 조종 계기판을 만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관객들께서 쟤가 왜 저러는 걸까? 하고 의문을 품으셨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초반 슬픔이의 돌출 행동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해명이 등장하지 않는데요.
그 비밀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화 속 슬픔이는 어떤 내적인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선택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면에 등장해 조정간을 잡을 수밖에 없도록 슬픔이에게 강제적으로 충동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라일리를 둘러싼 상황의 변화 그 자체 였습니다.
절친하게 지내던 소꼽친구와 헤어지고.. 긴밀한 유대관계로 연결되어 있던 하키 팀에서 떨어져 나왔으며.. 태어나서부터 편안하게 여기던 자연환경과 아름다운 주택에서 벗어나, 낯설고 삭막한 도심 한가운데, 이삿짐도 받지 못한 채 텅 빈 집에서 지내게 된 상황. 게다가 늘 곁에 있어주던 아빠는 새로운 사업 때문에 바빠서 자신에게 관심을 충분히 기울여 줄 여력이 없으신 상태..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접한 라일리의 내면에서는, 슬픔이라는 감정이 불러 일으켜지는 것이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내면은, 우리를 둘러싼 외부 세계와 상상 이상으로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엄밀히 말하면 '본래 하나'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상호의존성'입니다. 우리의 감정, 느낌, 생각 등의 내적인 경험들은 언제나 외부 세계에 대한 반응으로써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싼 외부의 상황은 늘 변화하며 흐르게 마련이고, 외부 세계와 연동되어 있는 우리의 마음 역시 그에 따라 함께 변화하며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 물론 여기서 철학적으로 더 들어가면.. 세계가 흐르기 때문에 마음이 흐르는 것이냐, 마음이 흐르기 때문에 세계가 흐르는 것이냐를 놓고 다양한 담론들이 펼쳐질 수 있지만 이 자리에서는 그런 복잡한 것들은 일단 생략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ㅋ *)
세계 자체가 변화하며 흐르는 힘은 실로 항거할 수 없이 막강한 힘입니다.. 그러면 그에 연동되어 한몸처럼 함께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이 흐르는 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항거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황의 흐름에 따라 라일리의 내면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슬픔이가 강제적으로 전면에 등장해 라일리의 자아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슬픔이가 전면에 나서기 싫어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어떤 강력한 힘에 이끌린 듯이 돌발 행동을 하던 모습에는 이러한 이유가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2. 긍정이 망친 행복 ㅡ현대인의 자화상ㅡ
우리 사회에는 진취적이고 능동적으로 노력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을 발전시켜나가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권장하는 문화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계발 문화에서, 멘토링 문화에서, 취업 시장과 직장생활의 논리에서 마치 자명한 사실인양 전파되어 왔고.. 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자각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를 내면화하여 그러한 원칙에 입각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라일리의 내면에서 그와 가장 가까운 마음을 찾는다면 그것은 기쁨이일 것입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기쁨이는 슬픔이를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합니다. 슬픔이 때문에 라일리가 우울해지고, 비능률적이 되고, 비관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걸 막기 위해 기쁨이는 최선을 다 해 슬픔이를 탄압합니다.
▲ 기쁨이 : 야, 슬픔이 뭐냐, 먹는 거냐? 웃어 짜샤~~ 하하하하하핳ㅎ하하핳!
조그만 원을 그려놓고서는 못 나오게 해놓거나,계기판을 잡거나 핵심기억에 접근할라치면 손을 찰싹 때리고 갈궈서 슬픔이를 쫓아내지요. 결국은 무리하게 슬픔이를 제지하려다 사고가 나고 마는데요.
기쁨이 슬픔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둘이 함께 파이프 안으로 빨려들어가 본부 밖으로 날아가버리고 맙니다. 라일리의 자아를 구성하던 중요 축이 깨지게 되는 것인데요.
도도한 외부 세계의 흐름에 힘입어 주인공으로 등장하려는 슬픔에게 맞선 것은 세계가 운행하는 거대한 힘에 저항한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 결과 라일리의 자아는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후 극이 전개되면서 그간 공들여 구축해 온 성격 섬들이 하나 하나 무너져가고.. 심지어 조종 계기판마저 회색빛으로 굳어져가서 다른 나머지 감정들조차 라일리의 자아를 견인하지 못하는 파국으로 번져가게 되지요.
이와 같은 일이 우리 안에서는 일어나고 있지 않는 걸까요? 긍정과 열심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문화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라일리와 같은 내적인 파국 상태에 처해 있는 이웃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그게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지요..
사람들은 흔히 이야기합니다. 먹어도 먹는 것 같지가 않고, 잠을 자도 푹 잔 것 같지가 않다고.. 재밌는 것을 봐도 그때뿐이고, 여행을 다녀와도 잠깐 뿐이라고.. 슬프고 우울해서 실컷 울고 싶은데, 눈물조차 잘 나오질 않아 시원하게 울지도 못한다고..
긍정적이고 행복하고 싶어서 싫은 감정들을 억압한 결과, 우리들 내면의 본부에 놓인 계기판은 라일리의 것처럼 회색빛으로 삭막하게 굳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 야.. 시..시발 이거 왜 이래? 왜 안 움직여?! ....대체 누구 책임이야??
우리의 가슴에는 감정이 출입할 수 있는 문이 하나가 있어서, 싫은 감정의 출입을 막고자 이 문을 닫아버리면 좋은 감정까지도.. 그리고 그밖의 다채롭고 독특한 여러 감정들까지도 함께 차단되어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 내면의 고착상태를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 황금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동안 외면당해 온 부정적인 마음들입니다.
기쁨이나 즐거움, 열정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은 그 자체로 온전하고 찬란한 경험이지만, 자신의 자리, 자신의 때가 아니라면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라일리의 환경 변화에 따라 일어난 정당한 슬픔을 인위적으로 억제하려 했던 기쁨이의 철저한 실패를 떠올려보세요.
그뿐인가요. 기쁨이는 로켓을 잃어버리고 실의에 빠져 목놓아 우는 빙봉을 일으켜 세우려 시도하면서, 의욕을 되찾기 위해 기쁜 일을 생각하며 웃어보라고 말합니다..
▲ 로켓을 잃어버렸으니 이제 라일리와 함께 달나라에는 어떻게 가지?ㅠㅜ (내가.. 내가 고자라니..ㅠㅜ)
하지만 빙봉은 더욱 서럽게 울 뿐이었고, 그런 빙봉을 진정으로 위로해줌으로써 일으켜 세운 것은 슬픔이였습니다.
라일리의 핵심기억 중 가장 소중한 기쁨의 기억 하나는, 하키 경기에서 실수한 뒤 실의에 빠져있을 때 슬픔이가 등장해 라일리를 오롯이 슬픈 채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에 비로소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마지막에 가출을 철회하고 집으로 돌아온 라일리와 엄마 아빠가 다시금 따뜻한 가족의 끈으로 연결될 수 있었던 것 역시도, 슬픔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기쁨이는..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숙고해보게 됩니다. 과연 늘 기쁜 것만이 행복하고 건강한 것인가?
▲ 기쁨이 : ....앞으론 요게 블루오션이구만? ..ㅅㅂ...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무슨 힘이 있겠어?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기운내기 힘든 판에.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외면해 왔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진 힘은 실로 어마어마해서,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던 우리 외부의 현실이
순식간에 변화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라일리의 현실이 180도 달라졌던 것처럼 말이지요.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외면돼 왔던 감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감정과 연동되어 있는 세계 자체의 막강한 힘을 받아들인다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 개인의 힘이 아닌, 세계의 힘에 의해 나의 상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변화의 추동력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3. 탁월한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번에는 라일리의 '가출해서 미네소타로 돌아간다'라는 아이디어로 인해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면서, 도대체 우리 삶에서 탁월한 생각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반대로 뻘생각과 끔찍한 아이디어들은 또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기쁨이와 슬픔이, 그리고 핵심기억의 부재로 인해 라일리가 끊임없이 난관에 처하자, 결국 버럭이가 결단을 내립니다. 다시금 즐거운 핵심기억들을 만들기 위해 미네소타로 돌아간다는 아이디어(전구의 형태로 표현됐죠)를 계기판에 꽂아넣은 것입니다.
▲ 흥.. 여기 말고 진짜 집 미네소타로 갈 거임ㅇㅇ 왜냐면 나한텐 행복한 핵심기억이 필요하니깐!!!
그러나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라일리는 엄마의 지갑에서 카드를 몰래 훔쳐냅니다.. → 정직 섬 파괴.. 이어서, 버스 터미널을 향해 가는 길에 엄마에게 수 차례나 전화가 오지만 결국 끝까지 받지 않고 미네소타 행 버스에 오르고야 맙니다. → 가족 섬 파괴.. 몇 개 남지도 않은 라일리의 성격 섬들이 연달아 무너져 버리자, 버럭이는 그제야 뒤늦게 가출한다는 아이디어를 계기판에서 빼내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전구는 전혀 움직이질 않습니다.
소심이와 까칠이가 달려들어도 그건 마찬가지였고, 급기야 계기판은 제 기능을 멈추고 회색빛으로 굳어져버리고 맙니다. 어떤 감정도 입력이 되지 않고, 그저 꽉 박혀버린 가출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궁지에 몰렸을 때 내리는 결정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그간 살아오며 내렸던 수많은 결정들, 고집했던 신념들 중에서.. 라일리의 결정처럼 저 자신을 회색빛으로 몰고 갔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었는지요. 지금 입장에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결정들, 그 생각들이 적절하고 현명한 것이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견해에 푹 몰입되어 있던 당시에는 그것이 마치 세상에서 유일한 선택인 것처럼 느껴졌었지요.
어떤 이들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거나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라 결정내리고, 그 아이디어의 전구를 자신 내면의 계기판에 굳게 꽂아 넣습니다. 그 목표가 달성되기 전까지는 결코 행복해하지 않으리라 다짐이라도 하듯이 말이지요..
혹은 어떤 이들은 자신의 외모를 바꾸고 나면, 아니면 직장을 옮기고 나면, 근사한 집이나 차를 소유하고 나면 행복한 핵심기억을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전구를 계기판에 꽂아 넣습니다.
물론 무언가 좋은 것을 갖기로 결심하거나, 멋진 아이덴티디를 갖기로 결심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고, 우리 삶에서 꼭 필요한 요소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심의 동기가 <슬픔을 느끼기 싫어서 or 우울함을 치우기 위해서 or 불안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싶어서> 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집니다..
명백히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배제하기 위한 결정이 라일리를 파국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기 위해 그렇게 결정을 내린다면 라일리와 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요? 라일리가 어떻게 제한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답은 명확해집니다. 우여곡절 끝에 슬픔이와 함께 본부로 돌아온 기쁨이는, 회색으로 굳어있던 계기판을, 그리고 소중한 핵심기억들을 슬픔이에게 맡깁니다.
▲ 내가 과연 라일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물론이지!! 힘을 내 슬픔아, 너 자신을 좀 더 믿어봐!)
가출해서 즐거운 핵심기억을 만들겠다던 '뻘 생각'은 오직, 최초에 외면당했던 감정인 슬픔에 의해서만 철회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메세지입니다. 피트 닥터 감독님이 아주 노골적으로 보여주었으므로 우리도 찰떡같이 알아차려 주어야 합니다ㅋ 다시 한 번 강조해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억압해 온 감정, 바로 그 감정만이 우리의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뻘 생각, 잘못된 판단, 편협하고 제한적인 신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수 있습니다.
억압되었던 마음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중과 접촉의 회복은, 뻘 생각을 곧바로 그치게 합니다. 왜냐하면 뻘 생각은 애초에 그 마음을 계속 억누르며 살아가기 위해 동원된 '유사 논리적 사고(pseudo-logical-thinking)'였기 때문입니다. 유사 논리적 사고란 쉽게 말하면, 겉보기론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을 말합니다. (ex : 라일리가 엄마 지갑에서 카드를 훔칠 때 버럭이 왈.. "흥! 이딴 데로 이사를 와서 우리를 엿먹였으니 이 정도 보상은 당연히 받아야지!")
억압됐던 감정이 존중받기 시작하면, 뻘 생각은 존재의 근거 자체를 상실하기 때문에 너무나 간단히 휘발성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 내가 지금 놓인 상황에 꼭 맞는 적절하고 유효한 사고로의 지혜로운 전환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라일리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때문에 억누르고 있는 감정을 드러내어 접촉하지 않는 이상.. 누군가에게 멘토링을 받는다든가, 마인드 맵을 그려가며 생각을 정리해본다든가, 용한 데를 찾아가 점을 본다든가, 시스템적 사고를 통해 합리적 의사결정 내리는 법을 배운다든가 하는 식의 수많은 열심 어린 노력들이 허사가 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감정을 대면하고, 존중 속에 그것을 경험하기만 한다면 나의 상황에 꼭 맞는 판단을 내리고 선택을 내려주는 놀라운 지혜는, 다름 아닌 우리 안에서 제한 없이 샘솟을 수 있는 것입니다.
라일리의 경우에는 억압했던 감정이 슬픔이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그게 분노일 수도, 불안일 수도, 혹은 기쁨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이 어떤 감정이건 그 마음을 우리가 존재 자체로 귀하게 바라볼 수만 있다면...
라일리가 처음 태어났을 때, 엄마 아빠는 라일리 안에 존재하는 기쁨을 느끼며.. 그녀를 기쁨 그 자체로 바라봐 주었습니다. 그때 라일리의 안에서 기쁨이가 자기 자신을 깨달으며 눈부시게 환하게 빛나던 그 모습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가 긍정된다는 것은 그처럼 찬란하고 든든한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슬픔일 땐 기꺼이 '슬픔 자체'가 되어볼 수 있다면... 내 맘이 분노일 땐 '분노 그 자체'가 되어볼 수 있다면.. 불안이 있을 땐 '불안 그 자체'가 되어볼 수 있다면.. 그렇게 모든 마음이 존중받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존재는 언제나 생생히 살아 숨쉬며 환하게 빛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감정의 색깔을 띠고 있던 관계없이 말이지요. (기쁨이만 빛나라는 법은 없는 거랍니다!)
슬픔일 땐 슬픔 고유의 따스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채로.. 분노일 땐 분노 고유의 힘과 단호한 멋을 경험하는 채로.. 불안일 때는 불안 고유의 기민함과 순발력을 발휘하는 채로.. 그 감정만의 특별한 온전함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럼 네번째 주제로 넘어가볼까 하는데요.. 여기까지 읽으시느라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하이고 영화 리뷰 한 번 참 길다, 그쵸? 쓰는 저도 힘들지만ㅋㅋ 재밌게 읽어주실 분들이 계실 거 아니까 저도 재밌게 마저 써보겠습니다^^ 대신 남은 주제들은 짧게 짧게 요점만 정리하는 식으로 적어보도록 할게요.
4. 감정은 치유의 대상이 아니다.
몇 해 전, 우리 사회에는 힐링 열풍이 몰아쳤었지요. 위로의 메세지가 넘쳐났었고, 너도 나도 다친 마음을 치유하자고 입을 모았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심지어 상당수의 전문가들조차도, 더이상 우울해 하지 않는 것, 더이상 화를 내지 않는 것, 더이상 불안해 하지 않는 것을 치유라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도 경험하지 않게 만드는 것을 치유라 정의내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는 심각한 오해입니다. 이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치유에 대한 정의부터 새롭게 다시 내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치유에 대한 잘못된 정의 : 더이상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
* 치유에 대한 올바른 정의 : 하나의 감정에만 치우쳐 고정되지 않고, 여러 감정이 두루 자리바꿈하며 흐를 수 있게 되는 것. 그러므로 치유란 상황에 적합한 마음이 어떠한 차별도 없이 자유로이 경험될 수 있도록 마음을 허락하는 것.
이 새로운 정의에 따른다면, 오직 기쁨이나 평화 같은 하나의 감정만을 선택해 그 상태를 유지하며 고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은 치유가 필요한 '아픈 상태'인 것입니다. 물론 늘 버럭이가 지배해서 화만 내고 있다거나, 슬픔이가 계기판을 독차지해서 온통 슬프기만 하다면 그 역시 아픈 상태라 하겠지요.
반면에 상황에 맞게 때로는 환하게 웃고, 때로는 절도있게 분노를 표하며, 때로는 가슴 깊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게 되었다면,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은 치유되었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일리의 마음은 치유되었지만, 슬픔이도 버럭이도 까칠이도 소심이도, 어느 하나 소외되거나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강아지가 멍멍 짖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기린이 목이 긴 데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 것처럼, 토끼의 꼬리가 짧은 것이 결함이 아닌 것처럼, 우리 안의 소위 말하는 부정적인 감정들 역시 본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존귀한, 대체불가능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본디 하자가 없는 것들을 고칠 수 있을 리가요.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새겨야 합니다. 아픈 것이란 흐르지 못하는 것이고, 치유란 흐르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마음이 자유로이 흐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를 조건없이 받아들이는 친절한 태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위에 첨부한 TEDx 강의 영상 내용을 참고해보세요 :)
그러므로 감정이란 설사 그것이 부정적인 감정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치유의 대상이 아닌, 누려져야 할 향유의 대상인 것입니다.
5. 슬픔과 기쁨은 분리할 수 없다.
자 이제 드디어 마지막입니다^^
영화 초반에서 기쁨이는 슬픔이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긴 결과 그녀를 사사건건 제지하고, 없앨 수만 있다면 영구히 없애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소위 말하는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은 그 각각이 온전하고 존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둘을 분리하는 것조차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영화 초반에 기쁨이가 부서진 파이프 안으로 빨려들어갈 때, 옆에 있던 슬픔이는 덩달아 함께 빨려들어가버렸습니다. 영화 중반에 기쁨이가 슬픔이를 버리고 홀로 통제 센터로 돌아가려고 기억 전송 파이프에 몸을 실었을 때, 중간에 파이프가 깨져버려서 결국 슬픔이가 있는 기억저장소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 직후 빙봉과 함께 무의식의 쓰레기장으로 낙하하긴 합니다만) 마지막에 통제 센터로 돌아올 때도, 결국은 둘은 함께였습니다.
▲ 기쁨이와 슬픔이의 즐거운(?) 한 때ㅎㅎ
그 둘이 결코 나눠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에서는 슬픔의 파란색과 기쁨의 노란색이 섞인 새로운 핵심기억을 기쁨이와 슬픔이가 함께 만들어내는 장면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지요.
만일 오직 여자들만이 가득한 별이 있다면, 그 별에는 여성이 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여성와 대비되는 성으로서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자를 여자라 불러야 할 이유가 전혀 없겠지요. 자연 그 별에 사는 여자들은 자신들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별엔 여자들로 가득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그냥 사람일 수는 있어도 더 이상 '여자 사람'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자만 존재하는 별이라 해도 마찬가지겠지요.)
만일 행복만이 가득한 세상이 있다면... 만일 평화만이 가득한 세상이 있다면... 만일 끝없는 풍요로만 가득 차 어떠한 결핍도 없는 세상이 있다면... 제가 무슨 말을 할 지 다들 짐작이 되시죠? 그런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바로 그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되는 것들은 서로의 존재를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듣는 자가 없이는 말하는 이도 없듯이.. 안아주는 이가 없으면 안기는 이도 없듯이.. 그처럼 슬픔의 짝은 늘 기쁨이었고, 기쁨의 짝은 늘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니 둘 중에 하나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늘 나머지 한쪽까지도 함께 제거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이 세상의 이치라 하겠습니다.
초반에 통제 센터 밖으로 빨려나갈 때부터 영화 내내 슬픔이와 기쁨이가 함께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 결말에 이르러서도 서로를 통해서 온전해질 수 있었던 것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