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난쟁이 백타산군
구양봉은 남방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려고 임안에 왔지만, 임안에 당도한 뒤에 그가 당한 일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것들이어서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소씨 거렁뱅이한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거지 같으니. 나중에 내가 무예를 배우면 기어이 복수를 해줄 테다! 그때 가서 또 거드름 피우며 개수작을 해 보라지!'
하지만 지금의 실력으로는 소씨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잡념을 털어 버리고 객점까지 왔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한 자그마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찌그러진 오막살이 집들이 늘어선 초라한 마을이었다. 날은 이미 밝아서 마을에는 닭과 개들의 울음 소리가 요란했다. 마을 어귀에 몇몇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사내들은 모두 올이 굵은 천으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살갗이 거칠었다. 행동은 또 어찌나 느린지 한참이 지나서
야 꾸물거리는 품이 몹시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아낙네들은 긴 치마를 입고 부수수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올려 몹시 초라해 보였다. 장정들이나 아낙네들이나 모두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이따금 웃고 지껄이며 야단법석을 떨기도 했다.
구양봉은 허기를 느꼈던 터라 그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먼 곳에서 온 길손인데 먹을 걸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잡고 있던 일감들을 놓고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빈들거리며 게으름을 부리던 차에 볼 만한 구경거리가 생겨 잘 되었다는 듯했다. 그 중에 처녀 몇 명은 구양봉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품이 아마 그처럼 풍채 좋고 영준한 사내를 처음 보는 듯싶었다.
한 노인이 대답했다.
"이 시골에 무슨 맛있는 음식이 있겠소만 손님께서 가리지 않는다면 성의껏 대접해 드리지요."
구양봉은 배가 몹시 고팠으므로 이것저것 타박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하고 나서, 그 노인을 따라 방에 들어가 그 집 안주인이 음식을 내오기를 기다렸다. 준비가 되어 있었던지 음식상은 금방 장만되었다. 야채와 산나물로 얼른 차린 음식들이었지만 금방 볶아 내었는지라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향기가 코를 찔렀다. 구양봉은 노인과 마주앉아 서로의
잔에 술을 따르면서 권커니 자커니 마시기 시작했다.
주기가 오르자 노인이 물었다.
"당신은 점잖은 서생 같은데 말씨로 봐선 서역의 사막 사람 같군요. 이 임안의 교외에선 도련님 같은 인물을 보기 힘들지요."
구양봉이 대답했다.
"노인장께서 보신 것처럼 저는 서역의 백타산 사람입니다. 제 고향이 워낙 황막한 곳이라 그런지 그곳 사람들은 싸움을 좋아하고 성미가 사납지요. 그런데 전 어릴 적부터 남과 싸우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책과 동무하여 자랐답니다. 이번에 임안에 와서 견식을 좀 넓히고자 했는데 가는 곳마다 노략질을 일삼고 약육강식을 하는 정경을 보고 크게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에
요."
노인과 구양봉은 뜻이 맞아 술을 마실수록 말수도 점점 많아졌다.
어둠이 깃들자 집집마다 굴뚝에서 밥짓는 연기가 피어 올라 초라한 마을의 적막을 깨뜨리는 듯했다. 사람들이 들에서 소를 부르는 소리와 닭과 양의 울음 소리가 어울려 작은 마을이 제법 시끌시끌했다.
노인은 호미를 둘러메고 밭에서 돌아온 아들을 불러들이더니 이어 하루 종일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고 돌아온 어린 손자도 불러들였다. 이내 집안은 아들과 손자, 손녀들로 꽉 찼다. 노인은 기쁜 마음으로 구양봉에게 자기 식구들을 일일이 소개해 주었다. 손님과 주인은 곧 친해져서 한데 어울려 웃고 떠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인은 영준하고 교양 있는 구양봉을 우러러보았다. 촌에 사는
농부인 자기가 이렇게 늠름한 귀족 도련님을 자기의 초가집에 모실 수 있는 행운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는 집 기둥이라도 뽑아 손님과 함께 즐길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가족들은 노인과 구양봉을 에워싸고 담소하면서 기쁨을 나누었다.
그런데 갑자기 먼 곳에서 삑삑하고 귀청을 찢는 듯한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의 혼을 빼앗는 마력을 갖고 있는 이 소리는 듣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듣지 않으려고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으면 오장육부에 불이 붙는 것 같아 더욱 참아낼 수가 없었다.
피리 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이제 그건 듣는 사람의 마음을 확 움켜잡아 당장이라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피리 소리와 함께 쉭쉭하는 이상한 소리도 끊임없이 들려 왔다.
어떤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명심해 듣거라! 오늘 사막의 백타산군(白陀山君)께서 이곳을 지나시니 잡인들은 썩 물러나거라."
잠시 후 횃불들이 보이더니 뒤이어 나타난 사람들이 마을을 휘젓고 다녀 주위가 자못 소란스러웠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음이 뚝 멎어 버렸다.
구양봉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서 생각에 잠겼다.
'참 괴이한 일이로군! 나도 서역 사람이라 백타산군이 서역에서 으뜸가는 실력자이고 성미가 포악하여 사람을 파리 죽이듯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가 무엇하러 임안에 온단 말인가?'
그때 다시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모두들 나와라! 산군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인가가 몇십 호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1백여 명 가량의 마을 사람들이 금방 노인의 집 앞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사막에서 온 백타산군이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고 조용히 기다렸다. 나무로 만든 받침대와 받침대 위의 작은 안락의자에 어린아이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의 얼굴과 턱에 검은 수염이 빽빽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어린애는 아
니었다. 그 사람은 손과 발, 몸체가 다 짧은데 머리만 커다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머리를 이쪽 저쪽으로 돌리고 눈을 뒤룩뒤룩 굴려 마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들자 주인집 노인은 손자의 팔을 꼭 잡아 멀리 가지 못하게 했다. 백타산군과 함께 나타난 사람들이 저마다 칼을 비껴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 뒤에는 시뻘건 혀를 날름대는 독사들이 쫙 깔
려 있었기 때문이다.
받침대 위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난쟁이가 바로 백타산군이었다.
한 사람이 큰소리로 외쳤다.
"너희들도 임안 주위에서 살고 있으니 중원의 무림 호걸들의 정황은 잘 알고 있겠지? 천하의 무림인들 중에 내공, 칼 쓰기, 장력에서 최고로 꼽히는 자가 누구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우리같이 해를 머리에 이고 밭에 나갔다가 별을 머리에 이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언제 무림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을 논할 기회가 있는가? 우리 마을 사람들 중엔 떠돌아다니며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도 없고 밖에 나가 일을 저지르고 다니는 사람도 없으니 그런 일을 알 수가 있나?'
갑자기 귀청을 찢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의 피를 빨아 내는 듯한 그 웃음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고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듯했다. 사람들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의자에 앉아 있던 난쟁이가 입을 벌리고 웃어대고 있었다.
이윽고 난쟁이가 입을 열어 말했다.
"너희들은 전진교의 왕중양을 본 적이 있느냐?"
가련하고 무지한 마을 사람들이 봄이 되면 씨앗을 뿌리고 가을이면 곡식을 걷어들이는 농삿일이나 알았지, 무림의 전진교니 왕중양이니 하는 것을 알 턱이 없었으므로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난쟁이는 계속 너털웃음을 웃어대다가 갑자기 뚝 그치더니 굳어진 얼굴로 마을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널려 있던 뱀들이 구불거리며 마을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큰 뱀, 작은 뱀, 검은 뱀, 횐 뱀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몸에 기어오르자 질겁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난쟁이는 손뼉을 치며 깔깔 웃어댔다.
"네 놈들 숫자가 이처럼 많으니 이제 나의 귀염둥이들이 배를 곯을 염려가 없게 됐구나!"
그는 의자에 앉은 채 손발을 건들거리며 춤까지 추었다.
뱀에게 물린 사람, 혼비백산하여 땅바닥에 쓰러진 사람, 머리를 움켜쥐고 아우성치는 사람들로 난리법석이었다. 구양봉은 백타산군을 만날 생각이 없었지만 무고한 마을 사람들의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빠진 것을 보았고, 자기 몸에도 미끌미끌한 독사들이 기어오르자 급히 소리쳤다.
"그만하시오! 내가 말하겠소!"
이상하게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서 백타산군은 구양봉의 소리를 금방 알아듣고는 갑자기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흡사 승냥이의 울음을 닮은 이 괴상한 소리에 놀라서 아우성치던 마을 사람들조차 일시에 잠잠해졌다.
이 소리를 들은 뱀들은 땅으로 기어 내려와 혀를 날름거리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백타산군이 물었다.
"넌 누구냐?"
구양봉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난 누가 중원의 영웅인지 알고 있소! 당신이 내게 묻지 않고 마을 사람 전체에게 물으니 알아낼 수 있겠소?"
산군은 횃불을 비춰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제법 기백 있어 보이는 구양봉을 보고 내심 놀랐다.
'이 조그마한 마을에 이렇게 뚝심 있는 인물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산군은 이런 것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그렇다면 중원의 무림들 중 누가 가장 센지 어서 말해라!"
구양봉은 빙그레 웃고 나서 대답했다.
"난 무림에 속하는 인물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얻어들었소. 지금 중원 무림의 첫째가는 인물은 종남산에서 전진교를 새로 창제한 교주 왕중양이라 하오. 모두들 말하기를 왕 교주는 젊고 소탈한데다 문무를 겸비하여 막히는 일이 없다고 하오. 유감스럽게도 인연이 없어서 난 아직껏 왕중양을 만나 보지 못했소. 그러나 임안에서 거지 무리의 장로 소씨 거렁뱅이와 그 무리의 명망 있는
제자 홍칠을 만났는데, 그들 역시 대단한 무예를 갖추고 있었소. 뿐만 아니라 난 운남 대리 단씨의 일가로 출가한 중인 일속과 동해 도화도의 주인인 황약사가 무예를 겨루는 걸 엿보는 행운도 만났소. 이렇듯 넓디넓은 천하에서 첫손 꼽히는 실력가들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중원의 무림에는 인재가 구름처럼 많이 모여 있으서, 우리 백타산의 실력으로는 상대도 안 되오."
난쟁이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중원의 무림에 아무리 인재가 많다 해도 우리 백타산의 인재들보다야 못하겠지."
구양봉은 백타산군이 잘난 척하는 꼴을 보니 참으로 가소로웠다. 범 없는 골에 삵이 왕 노릇 한다더니, 산군이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 역시 서역 백타산 출신이지만 백 타산에선 내 형님 구양적을 당할 자가 없지 않는가. 그러나 내 보기에 형님의 무예로는 일속 스님의 적수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만하기 짝이 없는 황약사의 상대도 될 것 같지 않아. 까딱 잘못하면 인생을 놀음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소씨 거렁뱅이마저 당해 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얼핏 꼽아 봐도 백타산의 실력이 짧은 거야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그것도 모르고 제가 제일 잘났다고 뻐기니 참 가련한 인간도 다 있지!'
구양봉은 이런 생각을 품고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일속 스님이나 황약사나 소씨 거렁뱅이의 적수가 못 될 것 같소. 그들의 무예 실력은 실로 대단한……."
이때 난쟁이가 꽥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목이 터지게 울부짖었다.
"믿을 수 없어! 도무지 믿을 수 없단 말이야! 왕중양이 도대체 어디에 있나? 빨리 불러 와! 소씨 거렁뱅이는 또 어디에 있어? 당장 그 놈과 겨루어 봐야겠어!"
구양봉은 자기 말이 백타산군의 귀에 한마디도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자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백타산군은 구양봉을 그대로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냉소를 머금더니 구양봉에게 손가락 하나를 겨누었다. 그는 뱀이 기어가는 모양으로 손가락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끊임없이 휘파람을 불어 댔다.
이 휘파람 소리에 맞추어 뱀들이 기어오더니 구양봉을 덮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목, 팔뚝과 허리를 독사들이 친친 감았다. 독사들은 혀를 날름거리며 그의 몸에서 구불거렸는데 선뜩하고 미끌미끌한 감촉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구양봉은 심장이 거칠게 뛰었으나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산군, 내게 왜 이러는 거요?"
백타산군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귀신도 부릴 만한 내 재주로 무림의 첫째가는 영웅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어디 말해 봐!"
구양봉은 잠자코 있었지만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 같은 바보가 백타산의 산군이 된 것도 희한한 일인데, 영웅들이 구름처럼 모인 중원 무림에서 영웅 행세를 하다니 한심한 일이지!'
그러나 그는 이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백타산군의 성품이 잔인하여 분통을 터뜨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또다시 명령을 내리면 뱀들이 달려들어 그를 피범벅이 되게 물어뜯을 것이 아닌가?
백타산군은 구양봉이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두려워하는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입을 열었다.
"내 너에게 백타산군의 위력을 보여 주겠다!"
그가 천천히 앉아 그 자그마한 손을 휙 내젓자 주위가 삽시에 물 뿌린 듯 조용해졌다. 그의 지시에 따라 독사들이 땅에 내려와서 한곳에 엉켰다. 검고 번들번들한 뱀의 무리가 횃불 아래서 꿈틀거리는 걸 보니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이때 먼 곳에서 은은한 음악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이 소리는 무지갯빛 깃털 옷이 하늘에서 나부끼는 듯 사뭇 부드럽고 감미로웠다. 음악 소리 속에서 소복 단장을 한 여인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긴 옷자락을 날리며 가벼운 걸음으로 사뿐사뿐 다가오고 있었다. 백타산군이 작은 손을 획 내젓자 흰 옷을 입은 미녀들은 잠깐 멈춰 섰다가 대열을 변형시켜 한 줄이 다른 한 줄을 꿰뚫
고 지나가면서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미녀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막을 지날 때면 사람을 볼 수 없고
하늘은 맑건만 이곳은 한적하네
눈 들어 바라보니 님 언제나 내 곁에 있고
인걸이 곁에 있으니 광풍인들 두려우랴
노래 가사는 멍청한 사람이 꿈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두서가 없고 몽롱했지만 노랫소리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황홀했다. 선녀들은 그 노래를 반복하면서 너울너울 춤을 추었는데, 그 자태가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이토록 많은 미인들이 아름다운 춤을 추는 정경을 난생 처음 본 촌사람들은 모두들 멍청해져서, 자기들이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다는 것조차 깡그리 잊고 있었다. 구양봉은 오래 전
에 형님이 백타산군이 기이한 재주를 갖고 있다고 말해 주던 게 생각났다. 백타산군에게는 이상야릇한 힘이 있어서 여자들이 그의 마법에 걸려 들기만 하면 이성을 잃고 음탕한 춤을 추게 되는데, 죽을 때까지 그 춤을 춘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과연 놀라웠다.
마을 사람들 중에 건장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여인들이 아름다운 눈매로 자기를 바라보는 모양이 마치 선녀가 양왕(襄王)을 바라보는 듯하자 가슴에서 더운 피가 끓어올랐다. 그는 범처럼 부르짖으며 미인들한테 달려갔다. 그는 미인들에게 안기기 전에 미인들 옆의 뱀무리 속에 고꾸라졌다. 그러자 뱀들이 삽시에 몰려들어 그의 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 건장한 사나
이는 피와 살을 다 뜯기고 백골이 되어 나뒹굴었다. 독사들은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 듯 백골 위를 구불구불 기어다니며 뼈다귀를 핥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끔찍한 정경을 보고 몹시 놀랐지만, 사람의 혼백을 앗아 가는 음악 소리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젊은 부인이 온 얼굴에 웃음을 담고 은근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달, 전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도 절 좋아한다고 해 놓고 왜 말이 없어요? 그새 절 잊었단 말인가요? 지난번 명절에 우리 집 암탉으로 닭국을 끓여 당신에게 대접하려 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두려워서 가지러 오지 못하고 나더러 밖에 놔 두라고 했지요. 당신은 야밤에 가만히 달려와서 닭국을 마시고는, 이 닭국이야말로 당신이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닭국이라고 했잖아요. 당신은
이 모든 걸 잊었단 말인가요?"
여인은 넋이 빠진 멍한 표정으로 뱀 무리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여인은 몽롱한 눈으로 그녀가 꿈에 그리던 아달을 보고 있는 듯했다. 여인이 마음속에 간직했던 말을 내뱉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현숙하고 착한 그 여인을 존경해 오는 터였다. 만약 그녀가 속말을 털어놓지 않았다면 그녀가 옆마을 사내를 몰래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음악 소리에 심신이 노곤해 있었으므로 그녀가 독사의 무리로 걸어 들어가 비명에 죽을 걸 빤히 알면서도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비단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나더니 이윽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피리 소리가 들려 왔다. 옥을 굴리는 듯한 그 소리가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파고들자 모두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이 맑아졌다. 여인은 뱀의 무리 가까이 걸어갔다가 피리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찾았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백타산군은 급히 내공을 걷어들이면서 외쳤다.
"어떤 놈이냐?"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초가집 지붕 위에서 한 사람이 불쑥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젊고 단아한데다가 자주색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옥피리를 들고 있는 자태가 참으로 우아했다. 그는 피리 불기를 멈추고 나서 말했다.
"이까짓 재주를 갖고 중원에서 뽐내고 다니다니……, 가소롭군."
백타산군은 분노에 차서 생각했다.
'감히 날 건드리는 걸 봐서 여간내기가 아니다. 어쩌면 이 자가 중원에서 제일가는 실력자인지도 몰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백타산군은 큰소리로 말했다.
"대체 누군지 어서 이름을 대라. 나의 뱀들이 널 백골로 만들어 줄 테니!"
지붕 꼭대기에 서 있던 사람이 대꾸했다.
"난 동해 도화도의 주인 황약사다. 너는 누구냐?"
백타산군은 이 자가 자기같이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분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 어른의 명함도 모르다니 정말 한심하구나! 좋아, 그럼 내 실력을 보여 주마!"
그가 조그마한 손을 흔들자 곧 네 사람의 건장한 사내가 다가와 받침대를 높이 들어 그를 황약사를 향해 돌려 세웠다. 백타산군은 얼굴에 악착스런 빛을 띠고 째지는 듯한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땅바닥에 있던 독사들이 목을 빼들고 초가집을 향해 스르륵스르륵 기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어 독사들은 지붕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쉭쉭 소리를 내며 황약사를 위협했다. 조금만 지체
한다면 황약사는 비명에 죽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황약사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옥피리를 입가에 대더니 여유 있게 불어 대기 시작했다. 태연자약하게 피리를 부는 모양이 흡사 홀로 앉아 우울한 심사를 달래고 있는 것 같았다.
피리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독사들은 점점 안절부절못하고 혀를 날름거리며 온몸을 비틀었다. 달빛과 횃불빛이 비치는 한밤에 기이한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붕 꼭대기엔 한 사람이 조용히 앉아 마치 자기가 위험에 빠진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이 머리를 숙이고 피리를 불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는 수많은 독사들이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수양버들처럼 흔들흔들
춤추고 있었다. 뱀들은 수시로 머리를 불쑥불쑥 내밀고 사람을 물어뜯으려 들었다. 그러나 황약사는 피리 불기에만 몰두하여 이 모든 것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백타산군이 아무리 기를 쓰고 휘파람을 불어도 독사들이 황약사의 신변에 접근하지 못하고 춤만 추는 것이었다. 황약사의 피리 소리가 점점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듯 쓸쓸한 곡조로 변하자, 곡조에 따라 미친 듯이 춤을 추던 독사들은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듯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의 리듬이 점점 빨라지자 독사들은 더욱 심하게 꿈틀대다가 지붕 아래로 툭툭
떨어져 땅바닥에서 죽어 나자빠졌다.
백타산군은 부끄러운 한편 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돌멩이가 튕기듯이 씽하고 지붕 위로 날아가 황약사의 맞은편에 앉아 싸울 태세를 취했다.
구양봉은 두 사람이 주먹과 손바닥을 내밀었다 들이밀었다 하면서 불이 번쩍번쩍 나게 싸우는 것을 지켜 보았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한 사람이 지붕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굴러 떨어진 사람은 백타산군이었다. 그가 일어나서 휘파람을 불자 아까 받침대를 들어 주던 네 사나이가 달려와 그를 둘러메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흰 옷을 입은 미녀들도 그를 따라 사라져 버렸다.
황약사는 지붕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구양봉에게 물었다.
"난쟁이가 당신에게 뭘 묻고 있었소?"
구양봉은 씩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뱀에게 물려 상한 사람, 백타산군의 부하들에게 얻어맞아 다친 사람들로 아수라장이었다. 구양봉은 간밤에 자기와 함께 술을 마시던 노인이 독사한테 물려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것을 보고 몹시 가슴이 아팠다. 마을 사람들 모두 노인과 아까 백골이 된 사나이의 시체 곁에 몰려들어 흐느껴 울고 있었다. 한 젊은 남자는 아내의 시
체를 끌어안고 통곡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이 처참한 광경을 보자 너무 괴로워서 그곳을 따나려 했다.
갑자기 황약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은 앞으로 어쩔 셈이오?"
구양봉은 언짢은 기색으로 냉랭하게 되물었다.
"당신들의 무예가 아무리 비범하고 재주가 뛰어나다 해도 숱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가니 그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소?"
그러자 황약사가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뭔데 감히 날 훈계하려 드는 거요?"
그는 적의에 찬 눈으로 구양봉을 쏘아보았다. 황약사는 본래 남을 하찮게 여기는 오만한 영재(英才)였다. 그는 구양봉이 감히 자기를 훈계하려 들자 화가 치밀었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날 훈계하려 드냔 말이오?"
구양봉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실히 황약사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었다. 만약 그가 와서 백타산군을 쫓아내지 않았다면 이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더 죽고 상해야 할지 모를 판이 아니었던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구양봉은 미안한 마음에 황약사에게 읍하며 말했다.
"방금 나와 같은 백타산 출신인 산군이 저지른 악행을 보니 부끄러운 마음 금할 수 없군요. 도주에게 사과드리니 받아 주십시오."
황약사는 가벼운 미소를 띠었지만 더 이상 구양봉을 보지 않았다. 구양봉의 사람됨이 떳떳하고 정직하긴 하지만 무예가 신통치 않고 처사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좀 전에 구양봉이 자기한테 화낸 것을 생각하면 불쾌했지만, 이 마을 사람들이 죽고 사는 문제가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심드렁해졌다.
그가 번개같이 손을 뻗어 구양봉에게 한 방 안기자 아무런 방비없이 서 있던 구양봉은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구양봉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황약사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구양봉은 그날 밤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동이 틀 때까지 노인과 여인, 그리고 젊은 사나이를 땅에 묻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서서 눈물을 훔치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구양봉은 중원에 와서 느낀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많았지만, 이 마을에서 보낸 하룻밤을 잊을 수 없었다. 우선 촌사람들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으니 타향에서 지기를 만난 듯이 마음이 푸근했다. 그러나 백타산군이 뱀을 부려 사람을 물어 죽이는 걸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가자면 갖은 생활고와 생명의 위험을 당하게 되는데, 이럴 때 일시적인 혈기만 가지고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백타산에 돌아가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형님에게 일심으로 무예를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이윽고 그는 사막 지대에 이르렀다. 멀리서 볼 때도 인가가 매우 드물더니, 3리나 5리를 걸어야 한두 개의 토굴집들이 나타나곤 했다. 토굴집들은 모두 볼품없이 찌그러져 있었는데, 지금 그가 들어선 토굴집에는 그나마 사람조차 살고 있지 않았다. 토굴 안은 누렇고 뿌연 먼지가 두껍게 쌓인데다 거미줄까지 얼기설기 얽혀 있어서 차마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구양봉은 인가를 찾아 허
기진 배를 달래고 싶었지만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가 없어 낙심천만이었다.
목마르고 배고픈데다 추위에 지친 그는 별수없이 먼지가 덮인 토굴 방바닥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한밤중이었다. 한창 달게 자는 그의 귓가에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 왔다. 구양봉이 머리를 들어 살펴보니 희미한 달빛 아래서 두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반짝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렴풋이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가 싶던 그는, 문득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휜 옷을 입은 사람이 옆에 앉아 있는
걸 깨닫고 갑자기 긴장해서 꽥 소리를 질렀다.
"누구ㄴ?"
상대방 역시 몹시 긴장했던지 샛별 눈이 반짝하고 빛을 뿌리더니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토굴집 천장이 몹시 낮은데다가 급히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그는 외마디 소리를 내지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구양봉은 그제야 쓰러진 것이 밤귀신이 아니라 여인임을 알았다. 여인의 머리에서 풍기는 향기와 옷에서 풍기는 향초(香草) 냄새로 짐작할 수 있었다. 구양봉은 이 모든 일이 꿈속에서 벌어진 환영이 아닌가 싶었다. 여인의 긴 머리가 그의 다리에 흘러내렸으므로 그는 몹시 당황하여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인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머리를 천장에 부딪치고는 까무
라쳤는데, 아마 쉽사리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양봉은 사막의 토굴집에 뜻밖에도 한 여인이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 새고, 이윽고 찌그러진 창으로 햇빛이 비쳐 들었다. 주위가 점점 밝아지자 구양봉은 엎드린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여인의 얼굴과 몸매가 점점 똑똑히 보이자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이런 황막한 사막에 어쩌면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있단 말인가?'
여인은 정신이 들자 눈을 반쯤 뜨고 머리를 돌리다가 눈앞에 앉아 있는 구양봉을 보고는 얼굴색이 변하면서 놀라 물었다.
"다…… 당신은……?"
딱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후 여인은 갑자기 눈물을 떨구었다. 구양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황막한 사막에서 왜 여자 혼자 다니는 걸까? 이렇게 무서워하는 걸 봐선 아마 날 사막에 출몰하는 강도나 야밤에 도둑질하는 놈쯤으로 여기는 것 같군.'
구양봉이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가씨, 정신 좀 차리세요!"
여인은 울음을 그치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곧 구양봉에게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무예에 어두웠으나 형님 구양적이 무예의 대가인 탓에 그 방면에 꽤 높은 견식을 갖고 있었다. 여인의 권법을 본 그는 나약한 여인이 그처럼 지독한 권법을 알고 있는 것이 무척 놀라웠다. 구양봉은 피하려 했지만 얻어맞고 말았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인의 주먹이 구양봉의 기해대혈(氣
海大穴)을 명중시킨 것이다. 다행히 여인이 몹시 기진맥진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타격에 의해 구양봉은 큰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구양봉이 외쳤다.
"처음 보는 사람을 왜 때리는 거요?"
여인이 대답했다.
"난 죽으면 죽었지 당신을 따라 돌아가진 않겠어요!"
구양봉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다시 캐어 물었다.
"아가씬 대체 어디로 간다는 거요?"
"어디로 가든 당신을 따라 백타산 마을로 돌아가진 않겠어요!"
구양봉은 놀랍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여 잠시 생각했다.
'내가 백타산 마을로 돌아가는 걸 이 여자가 어떻게 아는 걸까? 그리고 백타산 마을로 돌아간다 해도 이 여자와 같이 갈 수야 없지. 우린 서로 초면인데다 남녀가 유별하거늘 어찌 같이 간단 말인가? 그런데 이 여자가 입을 열자마자 백타산이라는 말을 끄집어내니 이상하기도 하지. 백타산 마을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단 말인가?'
구양봉은 이 여인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아가씬 백타산 마을 사람이오?"
여인은 잠자코 있다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천만에! 백타산 마을 사람들을 죄다 죽여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워요. 마을에 불이라도 질렀으면 속이 시원하겠어요. 내가 만약 그 마을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개 돼지만도 못한 셈이지요!"
구양봉은 그녀가 이렇듯 원한에 차서 저주를 퍼부어 대는 걸 보고 그녀가 백타산 마을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 고향을 떠올리자 그는 밤낮으로 그리던 형님이 생각나면서 어쩐지 몹시 긴장되었다. 마을을 떠난 지 오래 되었으므로 그는 그 사이에 마을이 많이 변했을까봐 퍽 걱정되었다. 게다가 여인이 저주를 퍼붓는 바람에 그 속에 혹시 형님도 끼여 있을까봐 더욱 두려웠다.
"아가씬 백타산 마을에서 떠나 오는 길이오?"
여인은 대답을 하려다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어떻게 백타산 마을을 알지요?"
구양봉은 천성대로 정직하게 대답했다.
"난 그 마을 사람인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얼굴을 붉히더니 몸을 발딱 일으켜 구양봉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냅다 발로 차서 그를 쓰러뜨렸다. 구양봉은 영문도 모른 채 뺨을 맞고 발길에 차이자 다급히 외쳤다.
"왜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짜 사람을 때리는 거요?"
여인은 눈물을 뚝뚝 떨구더니 목이 메어 말했다.
"당신…… 당신…… 정말 백타산 마을 사람이에요?"
구양봉은 사람 좋게 웃고 나서 대답했다.
"그렇소."
여인은 사납게 그를 노려보며 부르짖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요! 꼭 죽여 버리고 말겠어요!"
구양봉은 이 여인이 화풀이로 독한 말을 내뱉는 줄 알고 내심 우스웠다. 이토록 예쁜 여인이 말끝마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런데 여인은 토굴 안을 뒤져 끈을 한 오라기 찾아내더니 구양봉을 꽁꽁 묶는 것이었다. 더 이상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방글방글 웃는 품이 교태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표독스러운 웃음을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손뼉까지 치면서 깔깔 웃어댔다.
"좋아요. 당신부터 시작해서 난 백타산 마을 사람을 하나 죽인 셈 치겠어요!"
구양봉은 그제야 비로소 그녀가 백타산 마을 사람을 죽이겠다고 한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그만 웃지도 울지도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당황한 그는 생각에 잠겼다.
'부끄러운 일이다. 임안에서 고향까지 갖은 고생을 겪으며 겨우 돌아왔는데 형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막의 토굴집에서 생면부지의 여인 손에 죽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여인은 품에서 푸른 빛이 번뜩이는 단도를 꺼내더니 예리한 칼끝으로 구양봉의 얼굴을 살살 그어 댔다.
"당신네 백타산 마을엔 사람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난 당신을 죽여 버리고 말겠어요."
구양봉은 본시 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인을 보고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아가씨, 아가씬 정말 예쁘게 생겼구려."
여인은 구양봉을 죽일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뜻밖의 말을 듣자 손에 단도를 쥔 채 멍한 얼굴이 되었다.
구양봉은 이 기회를 타서 또 지껄였다.
"아가씬 맘씨도 곱고 칼도 잘 쓰는데 이 밧줄이 좋지 않군! 나도 밧줄에 묶여 있으니 좋지 않고!"
구양봉의 말에 여인은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이제 곧 황천에 갈 사람이 우스갯소리만 연발하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여인은 정신을 차리고는 꽥 소리를 질렀다.
"잔말 말아요!"
구양봉은 빙글빙글 웃으며 계속 이죽거렸다.
"아가씨 옷차림이 좀 남루하긴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안 되는군요. 워낙 예쁘니까 무슨 옷을 입어도 상관없소. '옷자락 날리고 정겨운 눈매 뜻깊네'란 옛사람의 시구도 못 들었소? 말 그대로 옷의 아름다움은 소매에 있고 사람의 마음은 눈길에서 읽을 수 있다는 뜻이오. 아가씨 같은 미인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겠소? 아가씬 손에 칼을 쥐고 입으론 끔찍한 말을 하고 있지만, 눈에 살기가
없으니 사람은 못 죽일 거요."
여인은 한참이나 구양봉을 바라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당신을 죽이지 못하리라는 걸 어떻게 알죠?"
구양봉은 웃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이미 해가 높이 떴으므로 여인은 구양봉을 잡아 일으켜 밖으로 끌고 나왔다. 두 사람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아스라한 사막을 총총히 걷기 시작했다. 10여 보나 걸었을까? 여인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구양봉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부턴 당신이 앞서 걸어요. 만약 내 명령을 듣지 않으면 이 단도에 찔려 죽을 줄 알아요."
구양봉은 여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원체 망망한 사막이므로 큰길은 보이지도 않았고, 간혹 어지러운 발자국들과 짐승들의 자취, 그리고 이따금 풀포기가 눈에 띌 뿐, 인가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구양봉은 길을 알아보고 나서 속으로 연방 욕을 해댔다. 여인이 그를 끌고 가는 길은 임안으로 통하는 옛길이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일이 참 더럽게 꼬여 간다고 생각했다.
'중원에서부터 갖은 고생을 겪으며 이제 겨우 사막에 도착했는데 다시 임안으로 되돌아가다니, 이게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여인에게 간절히 사정했다.
"예쁜 아가씨, 제발 선심을 베풀어 날 백타산 마을로 돌아가게 해 주시오.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소!"
여인은 가볍게 코웃음쳤다.
"당신이 가 버리면 이 망망한 사막을 어떻게 나 혼자 지나가겠어요? 여자 혼자 가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당신이 나한테 미안하지 않겠어요?"
그 말을 듣고 구양봉은 여인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 여인은 입으로는 독한 말을 퍼부어 대지만 마음은 상냥한 여인이었구나!'
구양봉은 제꺽 대답했다.
"정 그렇다면 내가 아가씨를 중원까지 모셔다 드리겠소. 혼자 가자면 적적할 뿐더러 어려움이 많을 테니 말이오."
여인은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구양봉을 손가락질했다.
"당신은 꿀 발린 말을 잘하는 사내로군요. '사내가 말이 많으면 여자한테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말이 있는데, 당신 같은 사내를 두고 한 말 같아요. 나쁜 놈들과 맞닥뜨리면 난 그들에게 당신을 먼저 죽이라고 할 것이고, 배가 고프거나 갈증이 나면 당신에게 먹을 것이나 물을 구해 오라고 할 거예요. 만약 음식을 찾지 못해서 정 배가 고프면 이 비수로 당신의 허벅다리에서 살점을 베어 낼
것이고, 갈증을 풀 길이 없으면 당신의 혈관을 끊어 피를 마실 거예요."
구양봉은 눈이 등잔만해지고 입이 헤 벌어져서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건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망망한 사막에 보이는 거라곤 모래뿐이었다. 바람을 타고 모래가 휙휙 날리더니 순식간에 온몸을 덮쳤다. 모래바람 속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숙인 채 걷고 있는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여인은 칼을 구양봉의 등에 대고 그를 협박하면서 걸었지만, 나중에는 칼을 집어 넣고 잠자코 그의 뒤를 따르기만 했다.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고 모래가 심하게 휘날렸다. 여
인은 연신 헐떡거리면서 걸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구양봉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여인은 급히 외쳤다.
"거기 서요! 멈추란 말이에요!"
구양봉은 멈춰 서서 그녀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여인은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가슴에 칼을 대고 말했다.
"당신……, 도망가려고 했지요?"
구양봉은 히죽 웃고는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봐요! 이렇게 끝없는 사막에서 뛰면 어디로 뛰겠소?"
여인은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흥, 도망쳐 보라지! 당신이 백 보를 앞섰다 해도 내가 뿌린 단도에 머리가 잘려 나갈걸!"
구양봉은 그녀가 횐소리를 치고 있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날 죽이지 않는 편이 나을 거요. 내가 죽으면 누가 아가씨와 동무해서 걷겠소?"
여인은 구양봉이 여전히 히죽거리며 우스갯소리를 지껄이자 그만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서 그를 겨누던 칼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뜨렸다.
여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진짜 정인군자일까? 아니면 교활한 놈일까? 겉으로 봐선 무척 부드러운 사람 같아. 한 번도 날 욕한 적도 없고. 만약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죽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나는 죄를 받아 내세에 태어나서도 고통을 당할 거야. 지금 우리 두 사람은 동행하면서 우스갯소리까지 주고받는 처지니 부부간이라 해도 사람들이 믿을 거야! 하지만 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여러 가지 착잡한 생각을 하다가 여인은 사막을 벗어나는 즉시 사나이를 죽여 버리기로 작정했다.
구양봉은 총명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녀가 서슬이 퍼랬다가 다시 평화로워지는 등 금방금방 기색이 바뀌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심사를 알아차렸다. 이 여자는 악의를 품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지만 마음이 약한 탓에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심으로 한탄했다.
'이 아가씬 어디서 큰 모욕을 당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이같이 행동할 리가 없지! 이 여인은 날 죽이려는 생각을 품다가도 차마 손을 대기를 두려워하는 거야. 이 점만 봐도 이 여인은 아직 선량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해.'
구양봉이 물었다.
"아가씨는 이름이 뭐요?"
여인은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였다.
"그건 뭐하러 묻는 거예요?"
여인의 날카로운 소리에 구양봉이 대답했다.
"난 이제 아가씨 손에 죽게 된 몸이오. 그런데 지옥에 가서 귀신이 나더러 '누가 널 죽였느냐?'고 물으면 '어떤 아가씨가 죽였습니다' 하고 대답하란 말이오? 그러면 귀신은 날 멍청이라고 비웃을텐데, 이런 난감한 일이 또 어디 있겠소?"
여인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당신 생각엔 자신이 무엇인 것 같아요? 당신은 바로 멍청이고 바보예요. 내가 당신을 죽이면 이 세상에 바보가 한 사람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세상에서 사내에게 기만당하는 불쌍한 여인도 한 명쯤 줄어들 것 아니에요?"
구양봉은 이 여인이 이토록 사내들을 증오하는 데 대해 내심 놀라면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