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위치: 남미대륙 남동부
인구: 46,254,577명 (2023년 추계)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면적: 2,780,400.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아르헨티나 공화국 (Argentine Republic)
기후: 아열대기후, 온대성기후 , 한대성기후
민족 구성: 이탈리아계 에스파냐계 백인(97%)
언어: 에스파냐어
정부/의회형태: 연방공화제 / 양원제
종교: 로마가톨릭(92%), 개신교(2%), 유대교
화폐: 아르헨티나 페소 (ARS)
국화: 피토라카
대륙: 남아메리카
국가번호: 54
GDP: USD 625,921,000,000
인구밀도: 16명/㎢
전압: 240V, 250V / 50Hz
도메인: .ar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삼각형 모양의 거대한 국가. 공식 이름은 아르헨티나 공화국.
남쪽과 서쪽은 칠레, 북쪽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북동쪽과 동쪽은 브라질과 우루과이에 접한다.
남동쪽에는 대서양 해안이, 서쪽과 남서쪽에는 안데스 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수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이다. 남위 22∼52°(남북으로 3,800km), 서경 54∼74°(동서로 1,423km)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있다.
남쪽과 서쪽은 칠레, 북쪽은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북동쪽과 동쪽은 브라질과 우루과이에 접한다. 남동쪽에는 4,725km에 이르는 대서양 해안이, 서쪽과 남서쪽에는 안데스 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 끝에서 북동쪽으로 약 5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포클랜드 제도(말비나스 제도)는 아르헨티나가 주권을 주장하고 1982년 잠시 점령했으나 현재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다.
자연환경
아르헨티나는 북동부 평원, 팜파, 파타고니아, 안데스 산맥 등 최소한 4개의 큰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북동부의 아열대 평원지대는 파라나 강을 경계로 동부의 메소포타미아, 그란차코에 속하는 서부 및 북부 지역으로 나뉜다. 메소포타미아의 몇몇 우림지대를 포함한 삼림지대의 대부분은 북동부 평원에 분포해 있다.
팜파는 파라나 강의 남쪽과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의 라플라타 강과 남쪽의 콜로라도 강 사이의 대서양 해안까지 펼쳐져 있다. 전에는 인구가 희박한 초원지대였으나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농업지대가 되었다. 인구면에서도 아르헨티나 전체인구의 2/3 이상이 모여 사는 가장 조밀한 지역이다. 황량한 반건조지대인 파타고니아는 콜로라도 강 남쪽에 펼쳐져 있다. 아르헨티나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대규모 목양에 필요한 목초지 역할을 한다. 풍부한 지하자원인 석탄, 석유, 천연 가스 대부분이 파타고니아 남부에 있는 주(州)에 매장되어 있다. 파타고니아 북부에는 유일하게 개발된 철광산지가 있다.
안데스 고지대는 아르헨티나 서쪽 국경을 따라 펼쳐져 있다. 광물자원이 많이 매장되어 있고, 최고봉인 아콩카과 산(6,959m)을 비롯해서 세계에서 가장 지형이 험한 곳으로 꼽힌다. 1944년에는 심한 지진이 발생하여 안데스 산맥의 지질학적 조산대에 속하는 산후안 주의 주민 5,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977년에도 비슷한 지진이 일어났었다. 아르헨티나의 수자원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총 518만㎢가량의 라플라타 강 유역으로 흘러드는 강들이다. 라플라타 강 전체유역의 약 1/3은 아르헨티나 영토 안에 있고, 나머지는 브라질·파라과이·볼리비아·우루과이 등에 속해 있다. 라플라타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들로는 파라나·우루과이·필코마요 강 등이 있다.
북동부 평원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서늘한 습윤 아열대기후를 보인다. 서쪽과 북쪽에 자리잡은 안데스 고지대와 파타고니아 북부는 대륙의 스텝 지역보다 훨씬 건조하다. 내륙 쪽 남부 저지대로 가면서 점차 사막 및 반사막 기후가 나타나며 안데스 산맥에서는 온화한 아한대 기후로 변한다.
팜파는 동쪽이 습하고 서쪽이 건조한 온대지역이다. 안데스 산맥의 다우지 몇 곳을 제외하면 아르헨티나 남부 및 남서부는 강우량이 매우 적은 편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우림지대에는 해마다 2,000㎜ 이상의 비가 내린다. 주요지하자원은 구리·납·아연·금·은·우라늄·망간 등이다.
국민
국민은 주로 유럽계 백인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은 스페인·이탈리아·독일·프랑스·영국계가 대부분이다. 인디언과 메스티소(인디언과 백인의 혼혈)는 거의 동화되었으며, 지금은 인구의 2%에 지나지 않는다.
곳곳에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독일계 주민들은 독일어와 스페인어를 함께 사용한다. 비교적 소수인 유대인들은 대부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고 있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지만 바스크어·시실리어에서부터 웨일스어·우크라이나어에 이르기까지 많은 외국어와 방언들이 사용된다. 국민의 대부분은 국교인 로마 가톨릭교도이나 개신교도도 상당수 있다.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비교적 낮은 편이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로서는 출생률과 사망률도 꽤 낮은 편이다. 전국 인구밀도는 16명/㎢이지만 그란차코·안데스·파타고니아 지역에서는 대개 2명/㎢ 이하이다. 전체인구의 4/5 이상이 도시지역에 살고 있다. 인구의 30%가량이 15세 미만인 반면, 약 9%가 65세 이상이며 평균수명은 남자가 67세, 여자가 74세이다.
언어
공용어는 없다 스페인어 지역 과라니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스페인 식민자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이래,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620만 여명의 유럽 이주민 이 나라로 들어왔다. 주요 출신지로는 이탈리아(피에몬테, 롬바르드, 나중에는 캄파니아, 칼라브리아), 스페인(주로 갈리시아와 바스크), 프랑스이다. 그 밖에도 아일랜드,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그리스, 포르투갈 등이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동유럽이나 폴란드,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등 중부 유럽에서도 이민자가 왔다. 마케도니아나 몬테네그로 등 발칸 국가에서도 상당수가 왔다. 아르메니아인도 있으며, 추부트 계곡에는 웨일스인들이 큰 집단을 이루고 있다. 러시아인, 폴란드인,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에스파냐인 등은 인종적으로도 서로 섞이고 이들 중에 혼혈이 존재하기도 하면서 각자 자국어를 사용하는 편이다.
문화
아르헨티나의 다양한 민족적 특성은 시장·축제·지방민속 등에 강하게 남아 있다.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약 100개의 미술관과 극장·박물관·연주회장들이 수없이 몰려 있는 주요 문화 중심지이다. 국내외의 많은 예술가들이 공연하는 콜론 극장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최고의 문화시설답게 크고 아름다운 오페라 극장으로 이름이 높다.
역사
식민지 시대 이전의 역사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남부 지방의 토착원주민들은 대부분 유목생활을 하는 사냥꾼과 어부였다. 반면 일찍이 잉카 제국의 세력이 미쳤던 북부 지방에 사는 원주민들은 농경생활을 했다. 잉카인들은 남쪽으로 지금의 멘도사 시까지 도로를 건설했다.
처음으로 도착한 유럽인은 스페인인이었지만 이들의 정착은 서서히 이루어졌다. 1536년 세워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인디언들의 습격이 잦고 담수가 부족하여 1년 후에 버려졌다. 뒤이어 칠레·페루·파라과이(아순시온) 같은 다른 스페인 식민지들로부터 온 스페인인이 아르헨티나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원주민과의 결혼도 널리 이루어졌다.
이러한 공동체는 인디언 노동력과 스페인인들이 들여온 말·소·양과 옥수수·감자 같은 토산품을 기반으로 해서 단순하지만 활기찬 사회로 발전했다.
1776년까지 아르헨티나는 페루 부왕령의 일부였으나,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한 신생(新生)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수도로 승격되고 유럽의 지식과 사상이 유입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1816년 투쿠만에서 열린 의회는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고 선언했다. 1829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기반을 확실히 다졌고, 이어서 1835년에는 나머지 지역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그의 독재는 1852년에 끝났다. 1853년 제헌회의가 산타페에서 열렸고,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처음에는 다른 주와의 통합을 거부했으나, 1860년 다른 주들의 무력사용에 패하여 통합을 받아들였다. 외국 자본과 기술의 원조로 철도가 잇달아 건설되었다. 철조망, 개량종인 소와 양, 냉동기술 등도 도입되었고, 유럽에 낙농제품을 대규모로 수출하게 되었다. 무역이 성장함에 따라 늘어난 정부수입은 이주민의 유입을 육성하고 공교육제도를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880년에 들어와서 에스탄시에로로 불리는 대농장주들이 핵심을 이룬 보수적인 과두정치시대가 열렸다(에스탄시아). 이 체제는 1916년 민주적으로 선출된 온건 정부로 계승되었으나 1930년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한동안 유지되던 민정은 사실상 끝이 났다.
불안한 정국은 10년간 계속되다 1940년대 초 후안 페론이 카리스마적인 민중지도자로 떠오르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1946년 대통령이 된 페론은 급속한 산업 확대 및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개입 정책을 펴고 노동자의 사회적 이익증진에 목표를 둔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책은 경제적·사회적 문제들을 남기고 실패로 끝났으며, 1955년 그는 군부에 의해 축출되어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20년 동안에도 악성 인플레이션, 파업, 높은 실업률, 잦은 정권교체 등이 계속되었다. 1973년 페론은 망명지에서 돌아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74년 그가 죽자 3번째 부인이던 이사벨 페론이 대통령직을 계승했으나, 1976년 군장교들에 의해 실각했다. 계속되는 경제침체와 정치불안정, 극단주의적 정치파벌에 의한 테러의 증가 속에 1983년까지 군부 통치가 계속됐다. 아르헨티나를 장악한 군부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군정전복혐의로 최소한 1만 명의 사람들을 처형했다.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군은 100년 이상 소유권을 주장해왔던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같은 해 6월 영국군이 제도를 탈환함에 따라 군부는 치욕 속에 영유권을 포기했다.
1983년 총선이 실시되었다. 대통령이 된 라울 알폰신은 군정이 저질러온 악습을 퇴치하려는 정책을 단행했다. 또한 높은 연평균 물가인상률과 막대한 외채를 줄이고자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로 인해 1989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당의 카를로스 사울 메넴에게 패했다. 페론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페론주의 지지층인 빈민과 노동계급에 호소함으로써 선거에 승리할 수 있었던 메넴은 노동자·기업·정부 사이의 임금-가격 협정에 기초하여 낮은 관세와 비효율적인 공기업의 민영화 등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계획했다.
메넴은 경제위기를 맞자 군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인권침해로 기소된 자들을 사면하여 후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에서 비롯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영국과의 외교관계를 재정립했다. 메넴이 성공적으로 인플레이션율을 낮출 수 있었던 데는 도밍고 카바요 경제장관의 도움이 컸다. 1994년 알폰신 전대통령과의 합의를 통해 대통령 연임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이루어 낸 메넴은 1995년 재선에 성공했다.
종교
아르헨티나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을 믿고 있다. 국교인 가톨릭이 75%, 10%의 개신교도 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나, 대통령과 부통령은 반드시 가톨릭 신자를 선출하도록 헌법으로 정해져 있다.
아르헨티나와 한국의 관계
외교
아르헨티나는 1962년 2월 15일에 한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한국은 1963년 12월에 주 아르헨티나 한국 대사관, 아르헨티나는 1966년 3월에 주 대한민국 아르헨티나 대사관을 개설했다. 아르헨티나는 과거 국제사회에서 한국정부의 입장을 적극 지지했으나 1973년 비동맹회의 회원국으로 가입한 후 국제연합(UN)에서 중도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정상회담으로는 1996년 9월에 김영삼 대통령과 메넴 대통령, 2004년 11월에 노무현 대통령과 키르츠네르 대통령, 2018년 11월에 문재인 대통령과 마끄리 대통령과의 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아르헨티나는 1995년 9월에 메넴 대통령, 2010년 11월에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방한한 바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북한과 1973년 6월 1일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 해 11월 통상협정이 체결되는 등 정치·경제·문화계 인사의 교류가 있었다. 그러나 1977년 6월에 북한 공관 방화사건으로 북한 공관원들이 무단 철수하자 단교했다.
경제· 통상· 주요 협정
2020년 기준 한국의 아르헨티나 수출액은 3억 9,062만 달러, 수입액은 18억 2,441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자동차부품, 합성수지, 평판디스플레이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사료, 은, 화학원료 등이다. 한국은 아르헨티나에 2017년 기준 누계 1.87억 달러를 투자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 기업의 진출 및 상담을 돕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무역관을 설치했으며, 한성기업, LG전자, 삼성전자, 현대건설, 세라젬, 한국선급, 포스코, 판토스 등의 대기업이 진출해 있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문화협정(1968), 발명특허권 보호협정(1972), 경제·과학 및 기술협력협정(1989), 무역협정(1981), 복수상용비자협정(1992), 투자보장협정(1994), 범죄인인도협정(1995), 원자력 협정 및 항공업무협력 협정(1996), 과학기술협력협정, 수산기술협력약정체결, 일반여권비자면제시행(2003), 외교관/관용여권비자면제협정, 경제무역협력협정 및 개정문화협정 서명(2004) 등이 있다.
문화교류· 교민 현황
아르헨티나에는 한글학교 17개가 설립되어 있어 교민과 아르헨티나인의 한글교육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한인회가 결성되어 있어 양국의 이해와 친선을 증진하고 있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2006년 10월에 개원한 한국문화원은 한국의 문화·예술 홍보하는 등 문화교류에 이바지하고 있다. 2021년 기준 아르헨티나에는 22,847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21년 12월 기준 155명의 아르헨티나의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