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회]
성리봉은 이곳 천산의 모든 산봉우리를 아우르는 주봉이다. 또한 높이 또한 이천오백장에 달해 인간의 어떠한 접근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는 성리봉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천산파에서도 이곳에 오른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신황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고고히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아니 구름에 휩싸여 보이지 않는 성리봉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이곳 천산에 들어오면서 그가 목표로 해왔던 곳이다.
“올라가자.”
신황은 품속에 있는 설아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중얼 거렸다.
슥!
성리봉에 내딛은 첫발, 신황은 그 감촉을 음미하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부러 성리봉에서 제일 험한 산로를 택했다.
거의가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으로 되 있는 산로, 만약 이곳에서 떨어진다면 제아무리 신황이라 할지라도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탁 탁 탁!
신황은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 띄며 위로 위로 올라갔다. 아직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비록 성리봉이 험하기는 하였지만 월영봉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신황은 매우 빠른 속도로 위를 향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삼분의 일정도 올라갔을 때부터는 모든 것이 확연히 변했다.
얼음처럼 반들반들한 바위들, 그리고 바위를 뒤덮은 눈 무더기, 때문에 약간만 헛딛어도 그대로 미끄러질 수 있었다.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천산의 고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덕분에 신황의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휘이잉~!
위로 올라갈수록 강풍이 날리며 하얀 물방울들이 몸에 엉겨 붙기 시작했다. 밑에서 구름이라고 생각했던 영역에 진입한 것이다.
물방울들은 금세 신황의 몸에 엉겨 얼어붙기 시작했다. 때문에 그의 몸에는 얇게 한 겹의 서리가 끼었다.
“후욱! 후욱!”
내뱉는 숨은 순식간에 얼음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몸을 얼려오는 지독한 추위, 만약 신황이 월영심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순간적으로 얼음이 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성리봉의 한기는 지독했다.
신황은 구름을 헤치고 위로 올라갔다. 이제는 밑에서처럼 경공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성리봉이 허락을 안 하는 것이다.
마치 유리처럼 맨들 맨들한 벽면 그 어디에도 발을 밟을 수 있는 곳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신황은 벽에 붙어서 손가락을 박아 넣으며 조금씩 전진했다.
푹! 푹!
그의 손가락이 벽에 박히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찬바람과 눈발이 흩날리는 속에서 그는 그렇게 위로 올라갔다.
얼마나 그렇게 올랐을까! 어지간한 그이지만 이젠 손가락 끝이 아파왔다.
매번 손가락 끝에 공력을 집중시켜서 몇 시진 내내 산을 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삼분의 이를 올라온 이상 멈출 수도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를 악물고 위로 올라갔다.
손바닥에 갈라져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지가 이미 오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입고 있는 옷만큼은 저번처럼 부서져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이를 악물며 정상을 향해 한발 한발을 내딛었다.
그가 목표로 한 것은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험한 길, 그것은 힘들다고 멈출 수도, 쉴 수도 없는 길이다.
이제 그 길에 첫발을 내딛었는데 이정도가 힘들다고 울면 차라리 여기에서 손을 놓고 절벽 밑으로 떨어져 자살을 하는 게 낳다. 그것이 신황의 의지였다.
신황은 악전고투를 했다. 그의 옷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 걸레가 되 있었고, 그의 손바닥은 온통 까지고 벗겨져 피투성이가 된지 오래였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크으~!”
마침내 한손이 절벽의 꼭대기에 걸쳐졌다. 신황은 그 손으로 온몸을 지탱하며 전신을 바위위로 올렸다.
마침내 산 정상에 도달했다. 그것은 그가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거의 하루만의 일이었다.
갸르릉!
그가 정상에 도착하고 나서야 품속에서 설아가 얼굴을 내밀었다. 신황은 그런 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여간 네 녀석 얍실한 것은 알아줘야겠구나. 나는 그렇게 용을 쓰고 올라오는데 네 녀석은 고개한번 내밀지 않으니 말이야.”
갸릉!
설아의 머리가 살짝 좌우로 흔들렸다. 아마 헛소리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신황은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세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흰 눈에 감싸여서 너무나도 눈부신 순백의 세상, 세상의 모든 것이 내 발밑에 놓여 있다. 이 벅찬 감격을 뭐라 해야 할까!
신황은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랫배에서 시작 되 가슴을 울리고 식도를 짜르르 넘어서 터져 나오는 그 느낌, 신황은 입을 벌렸다.
“으아아아아아-!”
그의 고함이 메아리가 되어 천산을 울렸다. 동시에 이제까지 그의 품에만 있던 설아도 신황의 어깨에 앉아 같이 포효를 했다.
쿠오오오오~!
생김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포효, 그들의 포효는 천산 구석구석을 울리며 퍼져 나갔다. 눈 속을 헤매던 호랑이들이 그들의 소리를 듣고 같이 울음을 터트렸다.
크아아아앙~!
천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 지금 신황이 느끼는 감정이 그랬다. 자연과 내가, 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일체감, 그것은 전율로 신황에게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의 기운이 모두 자신을 통해 흐르는 것 같았다.
신황은 자리에 앉아서 발밑에 놓인 광경을 보았다. 자신의 발밑에 놓인 세상이었다. 그렇게 광활한 대지가 온통 자신의 발밑에 놓여있다.
그리고 저곳은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곳이기도 했다. 그는 산속에서 닦은 무예만으로 자신의 가문의 무예를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은 이보다 더욱 험할 것이다. 그것은 혼자서 걸어가야 할길,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외롭고도 험한 길이었다.
그르릉!
옆에서 설아가 몸을 부벼왔다. 신황은 녀석의 턱을 만져주며 말했다.
“조만간 세상구경을 하겠구나. 너도 나와 같이 가자.”
캬우웅!
“그래! 네 녀석이 좀 게으르지만 내가 감수하마.”
크르릉!
“후후! 그래도 너와 같이 한다면 외롭진 않겠지.”
신황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마치 석상이 된 것처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내려가자.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우인이가 오는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를 테니.”
아직 백우인이 올 때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리 기다려야 하는 것이 예의이기에 그는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설아가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신황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신황은 올라올 때보다 더욱 힘들게 성리봉을 내려왔다. 발밑의 상황이 전혀 파악이 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힘이 들었다.
자칫 방심이라도 하면 그대로 이천 장 밑의 절벽 밑으로 추락할 것이기에 그의 몸놀림은 더욱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미 한번 올라왔던 길이기에 별 탈 없이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그가 내려왔을 때 이미 세상은 하얀 눈 천지였다. 약하게 흩날리던 눈발은 이제 어느새 폭설로 변해 있었고,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신황은 경공을 펼쳐 눈 위를 질주했다. 마치 눈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처럼 그는 눈 사이를 헤쳐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눈 속을 헤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음!”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자신의 집에 가까이 갈수록 느껴지는 이질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자신의 집이고 특별히 변한 것이나 별다른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건만 그는 통나무집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집에 발을 들여놓고 나서야 자신이 왜 그런 느낌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집이 차갑다.”
집으로 들어서자 차가운 냉기가 그를 맞았다. 요 몇 년 사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다.
그가 집을 비우고 있어도 하루에 한번 씩 아룡이 들어와 불을 피워놓고 갔다. 때문에 그는 몇날 며칠을 집을 비워도 항상 따뜻한 집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집은 그가 비운 이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처럼 싸늘했다.
신황은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 머리를 스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얼마 배우지 않았지만 아룡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극진해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신황이 말리더라도 그는 기어이 하루에 한 번씩 집에 찾아와 불을 피워놓았다. 그것이 사부로 모시는 신황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접이라면서.
그는 발걸음을 옮겨 마을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집에서 마을까지는 그의 걸음으로 잠깐이었다.
비록 눈이 허리까지 쌓였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순식간에 마을까지 내려왔다.
“아저씨 계십니까?”
마을에 와서 그가 찾은 곳은 최 씨의 대장간이었다.
“자네 왔는가?”
안에서 최 씨가 나오며 그를 맞았다. 여전히 밝은 얼굴, 그의 얼굴을 보며 신황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무언가 이상이 있었다면 최 씨의 얼굴이 밝지는 않았을 테니까.
“아룡은 잘 있습니까?”
“아룡 말인가? 아룡은 지금 우인이 오면 같이 간다고 이녕으로 내려갔다네.”
아룡은 백우인이 온다는 말을 듣고 동네 친구들과 이녕으로 내려갔다. 백우인이 오기위해서는 반드시 걸쳐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전 집에 불이 꺼져 있어서 혹시 아룡에게 무슨 일이 있나 했습니다.”
“이곳에서 뭐 별일이야 있겠는가?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네. 추우니 어서 들어오게.”
“예! 잠시만 불 좀 쬐다 가겠습니다.”
신황은 사양하지 않고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대장간 안에는 변함없이 여러 가지 농기구들과 사냥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신황은 그것을 헤치고 화로 옆에 앉아 따뜻한 불을 쬐었다.
이제까지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에 앉자 몸이 나른한 것이 풀어졌다.
그르릉!
따뜻한 열기에 설아가 신황의 품속에서 나와 무릎에 자리를 잡았다.
“맛은 없을 테지만 차나 마시게나.”
“감사합니다.”
최 씨가 차를 내왔다. 처음에 그에게 냉대를 하던 모습에 비하면 정말 많이 발전한 모습이었다. 이제 최 씨도 더 이상 신황을 외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제가 요즘 바빠서 아룡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군요.”
“하하하! 녀석이야 항상 건강하지. 자네한테 배운 덕택에 이녕에까지 장사로 소문이 났다네. 덕분에 항상 든든하다네.”
최 씨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었다. 자신의 뒤를 이을 든든한 자식이 있다는 것은 정말 든든한 일이다. 그것은 자식을 가진 아버지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었다.
“잘 됐네요.”
“자네 덕이야. 그래서 항상 자네에게 감사하고 있다네.”
“후후! 제가 한 게 뭐 있습니까. 다 아룡이 열심히 노력한 덕이죠.”
아룡은 정말 열심히 수련했다. 비록 나이를 많이 먹어 상승의 무공을 익힐 수 는 없었지만 꾸준히 익힌 삼재심법 덕에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힘이 셌고, 몸놀림도 날랬다.
더구나 5년 동안 꾸준히 익힌 검은 불과 찌르기 베기, 막기 등 몇 가지 동작밖에 되지 않았으나 놀랍도록 완숙해져 어지간한 불량배나 낭인들은 우습게 볼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 탑리에서 장군감이 태어났다고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덕분에 최 씨의 어깨엔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차를 즐겼다. 비록 이름 없는 야생초를 뜯어 말린 이름도 없는 차였지만 지금 이순간은 그 어느 고급 차가 부럽지 않았다.
덜컹!
그들이 그렇게 차를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아저씨!”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쓰러지며 최 씨를 불렀다. 온통 피투성이에 옷이 여기저기 찢겨져 있는 것이 무언가 낭패스런 일을 당한 것 같았다.
“넌 운복이 아니냐? 아룡이 하고 같이 이녕에 간 네가 왜? 아니지! 어디가 다친 거냐? 이피는 웬 것이고?”
최씨는 문 앞에 쓰러진 이가 바로 아룡하고 이녕으로 내려간 윗집 장 씨네 아들인 운복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겁할 듯이 놀랐다.
그는 서둘러 운복이를 화롯가 옆에 누이고 몸을 살폈다. 그러나 온통 피투성이라 어디가 다친 것인지 정확히 알기가 힘들었다.
“제가 살펴보지요.”
당황해 하는 최 씨 대신 신황이 나섰다. 운복이의 전신을 살핀 신황은 대부분의 상처가 피륙에 나있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특별히 크게 다친 곳은 없습니다. 며칠만 요양하면 금방 나을 겁니다.”
그는 최 씨를 안심시키고 운복이의 몸에 내력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너랑 같이 간 아룡이는 어떻게 되었고?”
“아···아저씨.”
신황의 내력이 몸에 들어오자 운복이가 눈을 뜨며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최 씨의 대장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허둥지둥 일어나며 급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큰일 났어요. 우인이 아저씨가 그···무림인, 천산에서 왔다는 사람들한테 잡혀 갔어요. 저희가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어요.
아이들은 모두 그 사람들한테 얻어맞아 쓰러졌고, 우인이 아저씨도 엉망으로 얻어맞고 그들에게 잡혀 갔어요.
그리고 아룡이 그들을 쫓아갔어요. 어서 아룡을 좇아가야 해요. 그러니까······.”
“알았다. 알았으니까 그만 쉬거라.”
신황은 입에 거품을 물고 이야기 하는 운복이를 눕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보게. 무림인이라면 그 손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왜 우인이를 잡아가? 그리고 아룡이 그들을 따라 갔다고? 이를 어째. 이를 어떡하지?”
“아저씨, 침착하십시오. 제가 갖다 오겠습니다. 제가 아룡이하고 우인이를 데려올 테니 아저씨는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우리 아룡이, 그 아이는 우리 최 씨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데, 이보게 우리 아룡이 좀 꼭 데려와 주게. 아직 어린 아이야. 그 아이를 부디 데려와 주게. 내 이렇게 부탁하겠네.”
최 씨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무림인들이 얼마나 무자비한 인물이고, 힘없는 사람을 어떻게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의 마음은 다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가봐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신황에게 염원을 가득 담아 부탁했다. 그라면 어떻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물론입니다. 아룡이는 제가 데려올 겁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신황은 최 씨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밖으로 서둘러 나왔다.
‘천산파에서 무슨 일로 우인이를······. 혹시?’
신황은 순간 무언가 짚이는 게 있었다. 때문에 그는 급히 성리봉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성리봉을 넘으면 바로 천산파였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 않은 장원이다.
중원에 있는 많은 고관대작들의 저택에 비하면 크다고 자랑할 수도 없는 크기였지만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견뎌온 무게가 장원에는 있었다.
천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인 성리봉의 뒤편에는 중원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문파가 있다.
천산파(天山派).
천산에 사는 사람들조차 그 위치를 자세히 모른다는 신비의 문파이다.
천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그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구한 역사와 비밀을 자랑하는 문파였다.
비록 중원의 구대문파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지만 단일 세력으로는 꽤나 강대한 힘을 가진 문파였다.
때문에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이곳 신강과 천산 일대의 패자로 추앙받는 곳이 바로 천산파였다.
일반 사람들은 오르지도 못할 천산파의 장원, 지금 그곳에는 소년 한명이 악을 쓰고 있었다.
“야 이 새끼들아. 우리 우인이 아저씨 내놓으란 말이야.”
바락 바락 고함을 지르며 악을 쓰는 소년, 그는 바로 최 씨의 아들인 아룡이었다. 이녕에서 백우인이 천산파에 의해 잡혀가는 것을 보고 무조건 뒤를 따라왔다.
그들은 산골의 소년이 따라와 봤자 얼마안가 떨어져 나갈 거라 생각을 하고 경공을 펼쳐 이곳으로 왔다. 그러나 아룡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었다.
신황과 함께 다니며 경공의 기본을 갖춘 아이였다. 때문에 비록 멀리 뒤쳐졌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을 쫓아 착실히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다.
탑리 마을에서 사냥꾼으로써의 기본을 닦아온 그에게 있어 이정도의 추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룡은 성리봉 아래쪽에 있는 이곳 장원에 그들이 들어온 흔적이 있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락 바락 고함을 쳤다.
“이 도둑놈의 새끼들아! 우리 아저씨 내놓으란 말이다.”
아룡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문을 격렬히 두들겼다. 지금 그의 눈에는 오직 한가지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어떤 곳이든지, 이곳에 누가 사는지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는 백우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쾅 쾅 쾅!
얼마나 문을 두드렸을까. 마침내 견고한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무지하게 시끄러운 녀석이군.”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 주려 했는데 스스로 명줄을 재촉하는군.”
거대한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 그들은 바로 천산파의 경계근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는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털보였고, 다른 하나는 삐쩍 마른 빼빼였다.
비록 천산파의 외당에 소속되어 문이나 지키는 신세였지만 세상에 나가면 충분히 이류고수 소리는 들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털보와 빼빼는 조금 전에 귀대한 외당 고수들을 안에 들이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그 사이에 아룡이 와서 난리를 피운 것이다.
그런데 아룡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분명히 자신들이 잡아온 남자를 찾는 것이 분명했다.
“운수가 지독하게 없는 녀석이군. 하필이면 그자를 찾아오다니.”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서 온 것이지. 가만히 있었으면 목숨이나 보존했을 텐데. 하필 이곳까지 찾아오다니 말이야.”
털보와 빼빼가 아룡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비록 외당의 무사지만 그들은 천산파의 무사들이다. 그들이 가볍게만 손을 써도 일반인들은 그냥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자와 약자의 차이였고 그들은 바로 강자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아룡은 약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최소한 그들이 보기에는 그런 것이다.
꾸욱!
아룡은 입을 여는 대신 옆구리에 찬 목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털보와 빼빼가 비웃음을 흘렸다.
“뭐하는 짓이지?”
“글쎄! 어디선가 검 쓰는 법을 조금 배운 모양이군.”
“거참! 살다보니 이런 경우도 다 있군. 진검도 아닌 목검으로 천산파의 정문에서 시위를 하다니.”
그들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비록 아룡이 검을 배웠다고 하나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진검이 아닌 목검, 그리고 이제까지 그의 대련 상대는 천산의 나무들이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사람과는 싸워본 적이 없는 아룡, 때문에 그의 속은 바싹바싹 타들어갔으나 다시 한 번 각오를 하며 그는 자신의 목검을 움켜잡았다.
차-앙!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털보와 빼빼가 검을 뽑았다. 꼬마가 어디선가 검을 좀 배운 것 같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곳은 천산파의 정문이었다.
“시체는 천산에 묻어주마.”
빼빼가 앞으로 나서면서 살기를 피워 올렸다.
쉬이익!
그가 검을 휘두르자 검이 마치 세 개로 나눠진 것처럼 아룡에게 짓쳐들었다. 천산파의 외당 제자들이 모두 익히는 삼분검(三分劍)이었다.
눈앞에서 세 개로 불어나는 검, 아룡은 당황스러웠지만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거친 기합이 터져 나왔다.
“챠하핫!”
번쩍!
아룡의 기합과 함께 그의 목검이 마치 번개처럼 빼빼의 어깨를 향해 쏘아졌다. 가히 섬전 같은 빠르기, 매일같이 찌르기와 베기만 수련했던 아룡의 진가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퍼-어-억!
“크윽!”
둔탁한 소성과 함께 빼빼의 삼분검을 뚫고 그의 어깨에 적중했다.
“이런······!”
옆에서 보고 있던 털보가 놀라며 한발 앞으로 나섰다. 설마 아직 스물도 안 된 아이의 목검에 동료의 삼분검이 뚫릴지 생각지도 못했다.
빼빼는 아룡의 목검에 얻어맞은 어깨부위를 감싸고 망연자실해 있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이 아니다.
만약 아룡의 내력이 조금만 더 심후했더라면 영락없이 구멍이 뚫릴뻔 했다. 그야말로 어린아이라 얕봤다가 큰 코가 다친 격이었다.
천산파의 규율은 대단히 엄하다. 문파의 제자들에게 함부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면서 대단히 엄하게 수련을 시킨다.
때문에 비록 외당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수준 높은 무예를 익힌다. 그것은 빼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한낱 애송이에게 어깨를 허용하고만 것이다.
퉁퉁 부어오른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안이했던 자신의 마음에 화가 난다.
‘젠장!’
비록 공격이 성공했지만 아룡은 자신의 공격이 적에게 그리 타격을 입히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빼빼가 더욱 화가 나 검을 휘둘러왔다.
쉬이익!
아룡의 목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검, 아룡은 단련된 눈으로 검의 궤적을 예상하며 몸을 움직여 피했다.
그러나 미처 아룡이 피하기도 전에 검의 궤적이 바뀌며 그의 허리를 스쳐 지나갔다.
피리릿!
날카로운 검에 베이면서 화끈한 통증과 함께 피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 불같은 통증에 아룡은 하마터면 쥐고 있던 목검을 놓칠 뻔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며 검을 움켜쥐었다. 동시에 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며 익혔던 보법으로 빼빼의 검을 피했다.
“쥐새끼 같은 꼬마 놈, 네 놈을 아주 갈가리 찢어 놀 것이다. 그래서 천산의 호랑이들에게 먹이로 줄 것이다.”
빼빼는 자신의 검을 피해 몸을 구르는 아룡을 보며 저주의 말을 퍼부어 내며 접근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보고만 있던 털보가 합세했다.
피피핏!
그들의 검이 휘둘러지자 아룡의 몸에 점차 상처가 하나씩 늘었다. 제 아무리 아룡이 5년간 산에서 검을 배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신을 위한 용도였다.
그리고 신황이 가르쳐 준 것은 기초에 충실한 검, 때문에 아룡이 그것을 실전에 이용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도 최소 5년 이상 수련을 요하는 검이었다.
만약 그가 다섯 살만 더 먹었다면 이들하고 충분히 자웅을 겨룰 만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개화하지 못한 꽃이나 마찬가지였다.
“크으~!”
아룡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이 힘이 없는 것이 이렇게 서러울 줄이야.
우인이 아저씨가 저기 담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구하지 못한다니. 아니 자신의 생명조차 구하지 못하다니.
이러줄 알았으면 사부를 졸라서 더욱 강한 무예를 익혀야 했다. 자신조차 호신의 목적으로만 익혔던 검, 그것이 이제는 가슴 아프게 후회된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네 녀석의 마을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흐흐흐!”
빼빼의 입에서 음흉한 미소가 풍겼다. 그는 이제 방심을 하지 않는다.
대신 아룡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몸에 하나 둘씩 상처를 내며, 자신이 낸 상처에서 솟구쳐 오르는 피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이제 아룡은 훌륭한 장난감이었다. 가지고 놀다 싫증나면 언제든 폐기처분할 수 있는. 그의 피부를 가르고 근육을 자르고 뼈를 부러트릴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때 죽일 것이다. 그때까지는 자신의 장난감이다.
스윽!
털보가 검을 거뒀다. 굳이 자신이 참견하지 않더라도 빼빼 혼자 충분히 처리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검을 검집에 꽂고 문가에 기댔다.
파파팟!
빼빼의 검에 아룡의 가슴에 깊은 상처가 나며 선혈이 솟구쳤다.
“크으으~!”
아룡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손등위로 떨어졌다. 죽는 것은 겁이 나지 않는데 이렇게 죽는다면 너무 억울했다.
이렇게 개보다 못하게 죽는 것은 억울했다. 이렇게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한테 죽는 것이 억울했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면, 아니 자신의 사부만 있다면 이렇게 억울하지 않을 텐데.
“크하하핫! 죽어랏. 아니 죽지 말라. 죽을 때까지 고통에 겨워해 봐라.”
“이 개돼지만도 못한 놈들아!”
“오냐! 난 개돼지만도 못하다. 어디 개돼지만도 못한 놈에게 죽어봐라.”
빼빼의 광기는 이제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서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제 끝을 내려는 것이다.
쉬이익!
이제까지 장난처럼 휘두르던 검과 달리 기세와 힘이 실린 검이었다.
그것은 아룡이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룡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해요! 사부님.’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죽을 때가 되면 살아온 생을 모두 돌아본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아직 자신은 죽지 않은 것인가! 아룡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바로 앞에 보이는 익숙한 등.아룡의 입술이 떨렸다.
“사···사부님.”
“고생 많았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는 말. 매정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 이만큼 반가운 목소리도 없었다.
빼빼와 아룡 사이에 서 있는 남자, 그는 바로 천산 성리봉을 넘어 온 신황이었다. 그의 몸은 지금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가 얼마나 전력질주를 한 것인지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사.....사부님, 저들이 우인이 아저씨를 잡아갔어요. 우인이 아저씨를···그래서 나.......난!”
아룡의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위기의 상황에서 신황을 보자 긴장이 풀려 버린 것이다.
제 아무리 천산파가 대단하다 해도 분명히 자신의 사부가 해결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최소한 그에게 있어 신황은 신이나 다름없었다.
“한숨 자거라.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테니.”
신황은 아룡의 수혈을 잡았다. 그러자 아룡의 눈이 흐릿해지며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신황은 아룡을 한쪽에 잘 뉘여 놓고 일어났다.
“호~! 이건 누구야? 말을 들어보니 애송이의 사부 같은데 정말 사제지간이 용감하기 그지없군.”
빼빼가 신황을 보며 이죽 거렸다. 그러나 신황은 빼빼의 말을 무시하며 물었다.
“우인이가 이곳에 있느냐?”
“우인이? 아! 우리가 잡아온 녀석의 이름이 우인인 모양이지. 물론이야. 그는 이곳에 있어. 하지만 넌 만날 수 없을 거야.”
“왜지?”
“죽을 테니까. 곧 죽을 놈이 그를 만날 수는 없는 법이지. 아! 좀 있으면 녀석도 죽을 테니까 나란히 저승에서 볼 수 있겠군.”
빼빼는 신황의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은 것도 모른 채 주저리 떠들어 댔다.
신황은 이제 빼빼의 말도 무시한 채 정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빼빼뿐 아니라 털보도 같이 그의 앞길을 막았다.
“어디를 들어............”
쉬리릭!
털보와 빼빼는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언가 감촉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신황은 어느새 그들을 지나쳐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그들은 움직이지를 못했다.
“너 이자식...........!”
“아복, 너 몸에 웬 선이?”
“응? 그런데 너의 몸에도 빨간······.”
스-윽!
갑자기 그들의 가슴위로 번져 가는 선, 처음엔 미세했지만 그것은 곧 선명해졌고, 갑자기 그 위로 붉은 색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어...........어?”
츄화학!
갑자기 가슴에서 솟구쳐 오르는 엄청난 양의 선혈, 이미 그들의 가슴은 날카로운 칼로 베어진 것처럼 기다란 자상이 나 있었고, 그 위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혈무는 하얀 눈 위에 자국을 남기며 흩어져 내렸다.
철퍼덕!
신황이 지나간 자리 조금 전까지 이죽이던 표정 그대로 빼빼와 털보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 어떻게 인지도 모르고 죽었다.
“우인이 몸에 상처 하나라도 생긴다면 각오해야할 거야.”
신황의 눈에 월영봉의 달 빛 만큼이나 차가운 빛이 맺혔다.
정문을 넘어 들어가자 커다란 수련장이 눈에 띈다. 성리봉을 배경으로 넓게 트여있는 거대한 수련장, 바닥에는 단단한 청석이 깔려있고 그 위에 다시 눈이 덮여있다.
그리고 수련장에는 수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신황이 안으로 들어오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수십이 넘는 남자들의 눈빛이 일제히 신황에게 집중됐지만, 정작 신황은 개의치 않은 채 수련장 중앙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다가갔다.
두근!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고깃덩이가 되다시피 한 육체, 이미 찢어져 형태를 알기 힘든 옷가지들, 그리고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몸, 신황은 알고 있었다.
비록 오래 떨어져 입고 있던 옷이 변했지만 알 수 있었다.
저기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 거리는 인물이, 다진 어육처럼 변해 있는 인물이 바로 자신이 알고 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말이다.
신황이 들어오는 모습에 천산파의 남자들이 움직이려 하였다. 그러나 수련장 제일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태사의에 앉은 노인의 제지에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매부리코에 강퍅한 입술, 그리고 하얀 눈처럼 희디 흰 백발, 그가 바로 천산파의 태상 문주인 천산노조(天山老祖), 적유세(赤劉世)였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눈으로 낯선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끄으으~!”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신음소리가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신황은 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누였다.
그러자 짙은 선혈이 그의 가슴과 다리, 그리고 손에 흘러내렸다.
“우···인아.”
신황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미 형체를 알 수 없는 얼굴에 눈이라고 짐작되는 부분이 힘겹게 떠졌다.
이미 한쪽 눈은 온통 핏줄이 터져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초점, 이미 한쪽 눈이 시력을 잃은 것이다.
“혀···형님!”
백우인은 한쪽으로만 흐릿하게 보이는 눈으로 신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초점조차 제대로 맞지 않아 목소리로만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이 신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셨........군요. 형...........님!”
이미 여러 개의 이빨이 부러져 나가고 입안이 찢겨 발음이 세어 나왔다.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흔적이었다. 신황의 손안에 느껴지는 백우인의 몸은 그야말로 넝마 그 자체였다.
팔이고 다리고 온전한 곳이 하나 없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고 있어 말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백우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힘들게 말을 이었다.
“혀.....엉님! 허억, 허억! 전 이제 죽.........나 봐요.”
“우인아!”
“허~억, 허~억! 형님, 제가 죽으면 우리.....딸은 어떻게 해요. 허~억! 이제 우리 딸 목··숨을 구해줄 영약을 구했는데 내가 여기서 주......주그면 내 딸은 어떻게 해요?”
백우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굴에 엉켜있는 핏물과 섞여 나오는 붉은 눈물이 백우인의 뺨을 타고 신황의 손등으로 떨어졌다.
이미 백우인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었다. 간신히 숨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내.....가 바보처럼 떠들지만 않았어도...............”
백우인의 눈이 흐릿해졌다.
이녕에 도착했을 때 백우인은 정말 세상을 모두 다가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5년을 세상을 떠돌며 그토록 찾아 헤맸던 구지영초를 구했기 때문이다.
비록 있는 돈을 모두 털어놓고, 그도 모자라 빚까지 졌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과 아내의 사랑의 결실인 딸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뭐가 아까울까.
그렇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구지영초를 구했다.
구지영초(九枝靈草), 태양의 영기를 받고 자라난 영물이다.
일반인이 복용하면 평생을 무병장수 하고 내공을 익힌 무림인이 복용하면 반 갑자의 내공을 얻는다고 알려진 천고의 영약이었다.
때문에 그가 구지영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천하의 무림인들이 몰려올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최대한 비밀을 유지했다.
그는 그렇게 보안을 유지한 채 무사히 이녕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녕에서 아룡을 비롯한 운복이 등, 마을 아이들을 만났다.
기쁜 마음에 그들은 이녕의 객잔에서 비싼 음식을 시켜 먹으며 회포를 풀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했다.
바로 구지영초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옆에 탁자에서 식사를 하던 천산파의 외당당주인 곡진옥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신황도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저......들이 내.....딸을 구할 영약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난 내......놓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
백우인은 자신의 품속에 있는 구지영초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적유세는 구지영초는 천천히 꺼내도 되니까 감히 자신의 말에 거역한 백우인의 버릇을 고쳐 놓으라고 했다.
그의 명령에 의해서 외당의 고수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백우인을 구타했다. 한두 명이 아니다. 예순두 명이나 되는 외당의 고수들이 백우인의 요혈을 피해 때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일반인에 불과한 백우인은 돌아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형....님! 하....늘이란 없는가··봐요. 나.....난 착하게 지냈는데 정말 착......하게 살았는데 그....런데 이...렇게 죽어야 돼요.
하......늘은 없는 게 분.....명해요. 하늘이 있다면 이럴 리가 없어요.”
“우인아!”
신황의 눈이 안타깝게 변했다.
백우인이 마지막 힘을 끌어올려 신황의 팔을 잡았다. 생의 마지막 끝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서 그는 신황의 옷자락을 잡았다.
“혀.....형님! 내 품에 있는 영......약으로 내 딸을,......., 형님! 반드시 내 딸을............ 형....님이라면 미.....믿을 수가 있어요, 허~억, 허~억!”
“반드시 네 딸을 구해주마.”
“야.....약속.....하는 거죠?”
“그래 약속한다. 내 모든 것을 걸고.............”
신황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눈 꼬리에는 어느새 한 방울 눈물이 맺혀져 있었다.
“내...........딸 무이야. 아...........빠가 더...이상 자장가를 불.....러줄 수가 없구나. 무...이야. 무이 내 딸......아.”
툭!
백우인의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몸에는 더 이상 산 자의 기운이라고는 없었다. 천산의 눈처럼 차가운 그의 몸, 신황은 그의 몸을 꽉 안았다. 으스러질 듯이 안았다.
“우...........인아!”
자신의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아이다. 지난 5년 동안 일 년에도 몇 번씩 자신을 찾아왔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모두 털어놨다.
자신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도 항상 웃음을 짓던 아이였다. 자신의 고향을 못 잊어 일 년에도 몇 번씩 생필품을 보내오던 아이였다.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노심초사하며 지내오던 그 아이가 이제 싸늘한 시체로 자신의 품안에 안겨있다. 이제 자신은 이 아이의 딸에게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
“눈물겨운 신파극이구만. 클클클! 더 봐주고 싶지만 내가 시간이 없구만.”
신황의 귀로 역겨운 적유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황은 백우인의 시체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무슨 잘못을 했지?”
“잘못이랄 게 뭐 있나? 범부가 보물을 가진 것이 죄지. 그리고 마침 난 중원으로 진출한 자식과 손자 놈에게 줄 선물이 필요했고 말이야.”
천산노조 적유세의 표정에는 권태로움이 가득했다.
오랜 세월 천산에서 지내온 그, 이제 자신의 대에서 그의 아들이 중원으로 나갔다. 때문에 홀로 천산에 있는 상황.
그런 그의 귀에 이녕에 있는 객잔에 머물고 있는 상인에게 구지영초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손자 놈의 내력이 부족한 게 늘 마음에 걸렸는데 구지영초면 보충해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열양지기를 머금고 있는 영약이었지만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천산파의 역사 수백 년, 그 정도면 영약하나 성질 바꾸는 비법 정도는 몇 가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상인 하나 죽은 거야.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범부가 사라진 것뿐이지.”
“너에게 있어 이 아이는 그냥 세상의 많고 많은 범부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이 아이에게는 기다리는 딸이 있고, 아내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보상할거냐?”
“클클! 보상? 그런 게 뭐있을까? 이제 헛소리를 듣는 것도 지겹구나. 어서 구지영초를 넘기고 물러가라. 내 너의 용기를 가상히 봐주어 목숨만을 살려줄 테니까.”
적유세의 말에도 신황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백우인의 시체를 조심스럽게 앉혔다. 그는 백우인을 눕히지 않았다. 아직 그는 누워서는 안됐다.
“뭣하고 있는 거냐? 노조께서 아량을 베푸시어 목숨을 살려주신 다는데 어서 구지영초를 바치고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고.”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천산파의 외당 당주인 곡진옥이었다. 그가 바로 백우인을 잡아온 당사자였다.
곡진옥은 이제 40대 후반의 남자였는데 마치 염소처럼 난 수염 때문에 마치 쥐 같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에도 신황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다시 소리쳤다.
“어서 노조께 구지영초를 바치지 못하겠느냐. 이놈!”
신황은 아직도 부릅뜨고 있는 백우인의 눈을 감겨 주지 않았다. 그 한 많은 눈을 감겨주지 않았다. 아직 그가 눈을 감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우인의 눈을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우인아! 넌 하늘이 없다고 했지. 그것은 틀렸다. 하늘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늘의 법은 분명히 존재해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히 돌아간다.
단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것을 단지 인간이 모를 뿐이지.”
신황이 일어났다.
“만약 지금 이 순간 하늘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다면 내가 대신할 것이다. 내가 악마가 되어서라도 이들을 심판하마.”
으스스~!
순간 신황의 몸에서 지독한 한기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한겨울 천산의 눈보라보다도 차갑고 지독하게 싸늘한 기운. 세상의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달빛이 그의 몸에 어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지켜 보거라. 금방 돌아오마.”
이제까지 잊고 지냈던 본능이 그의 심장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