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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 며칠 걸릴 것 같다. 엄마가 올 때까지 장사는 하지 말고 저녁으로 문단속 잘 하고 자야 한다.”
관연한 딸을 가진 부모의 통상적인 노파심일 게다.
“나도 엄마 따라 구경가면 안 될까?”
“네가 어린애니? 엄마하고 구경하게, 친구 문병만 하고 올 테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친구 문병 간다는 어머니의 말이 핑계라는 것을 안다.
묵묵히 있다가도 어느날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멍한 사람이 되어 훌쩍 떠나야만 했던 어머니.
출타시엔 항상 행선지를 알려주었지만 목적지는 매번 서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희의 기억 속엔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아빠라는 사람을 어머니는 그럴싸한 이유로 만나오고 있었다. 만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거니 믿으며 출타하는 어머니를 그냥 모른 체 지켜보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 생각했고 어머니만이 간직해야 할 비밀은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자칫 자신의 캐물음으로 인해 이십 년을 다스려 온 어머니의 가슴앓이에 상처를 줄까봐 자신의 근원에 대하여 어머니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많이 다치셨나봐요.”
“그렇다는 구나. 트럭과 정면충돌을 했다니....”
건성으로 대답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왠지 부자연스럽다. 평상시의 어머니는 자상하고 꼼꼼하면서도 침착하다.
그러나 다소 허둥대고 부자연스런 모습에서 어머니의 행선지는 서울일 것이고 아빠라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임을 예측한다.
날씨는 쾌청이었고 겨울 문턱의 햇볕은 건너편 양철지붕 위에서 투명하게 반사되고 있었다.사십의 중반에 이른 어머니의 나이라면 다른 어머니들처럼 지나 온 결혼을 뒤돌아보며 이야기꽃을 피우다 하얗게 밤을 새우련만 이런 정겨운 이야기는 고사하고 말동무조차 변변찮은 어머니.
남들이야 평범한 아낙으로 볼 것이지만 어머니 스스로가 억누르고 있는 그 회한의 잔재를 윤희는 선명하게 알고 있었다.
시골 아낙네에 비해 조금은 화사한 어머니의 세련미 뒤에 숨겨진 그 아픈 상처를, 하지만 어머니의 내면을 모르는 아낙들의 선망 어린 눈초리 또한 싫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선이 생업의 보루인 술장사에도 다소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고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이 호의적인 배려를 보여 다소 여유 있는 생업이 되고 있었다.
윤흰 어머니가 탄 버스가 신작로 끝간데 굽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을 하고 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울리는 전화벨에 수화기를 들었다.
“윤희?”
“.....”
“학교 운동장이야. 기다릴게.”
익히 익어버린 그의 목소리. 그가 가리키는 곳은 바로 마을 앞쪽에 위치한 초등학교의 연못을 말함이다.
“지금은 안 돼요. 어머니 심부름.....!”
“부산에 간 어머니의 심부름? 그러면 내가 그리 갈게.”
윤희가 그의 만나자는 제의를 거절하려는 것은 워낙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고 보니 소문이 빨랐고 혹시라도 약혼한 여자가 다른 사람과 만나 연애한다는 소문이 날까 두려워서였지 이제와 그를 만나고 있음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알았어요. 기다려요.”
윤흰 마지못해 학교로 향했다. 벌건 대낮에 그가 집으로 찾아와 이웃의 눈에 띄이는 것보다는 어른들의 눈길이 적은 그곳이 낫다는 판단이 되었던 이유다.
그날 포풀러 숲에서 그 일이 있은 이틀 뒤, 윤흰 그의 만나자는 제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버려진 순결일 망정 이 순결을 미끼로 그와 계속 만나야 한다는 사고를 버리고 싶었다. 그때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언젠가는 떼어버려야 할 순결, 차라리 약혼자가 자신에게 다소 기운다는 그 관념을 깨트리는 차원에서는 홀가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 문제는 그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데 있었다.
그는 거나하게 취해서 찾아와 객기를 부리기 시작했고 윤흰 엄마와 이웃에 알려질까 두려워 그를 달래며 요구에 응해주어야 했다.
그와의 교제는 싫고 좋음을 떠나 일방적으로 이루어졌고 어느 계기에 이르러 약혼자와의 관계가 매듭 되어 질 때까지는 떳떳이 그를 만날 수가 없었던 이유였다.
이러한 불륜으로 야기될 그 파장을 윤흰 짐작할 수 없었고 좋게 결말지어 질 수가 없으리라는 불안감이 그에게 순종을 요구했고 전화 한 통화에 어디든지 가야만 했다. 차츰 그에게 길들여지고 있다는 자신을 들여다보면서도.
하늘은 파랗게 높아 있고 휴일의 운동장은 까맣게 변색된 낙엽들이 우수수 쓸려갔다 쓸려오곤 했다.
한 계집아이가 어항을 들고 교실로 들어가는 게 보였고 그네가 매달린 놀이터를 지나 후원으로 돌아가자 오밀조밀 돌로 쌓아올린 연못이 보였고 그 연못의 가장자리에 놓여진 벤취 뒤에서 계집아이 몇이서 공기놀이에 열중인지라 다가가는 것도 모르는 듯 했다.
“애들아 너희들 여기서 오래 있었니?” (원고지 104장)
그를 기다린지 이십여 분이 넘었다. 언제나 그가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기에 혹 오는 시간에 그냥 간 것이 아닌가 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왜요?”
츄리닝 차림의 아이가 대답한다.
“응. 어떤 아저씨가 여기서 있다가지 않은가 해서.”
“아니요.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정말 아무도 없었던 거지?”
“예. 정말 아무도 안 왔어요.”
양쪽으로 머리를 묶어 맨 소녀가 코를 손등으로 슥 닦으며 대답했다.
문득 그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가 놀려주려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 곁을 떠났다. 어쩌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가끔 그런 적이 있었고 그 때마다 누가 이상히 여길까봐 얼마나 가슴을 조였는지.
“얘들아 저 아줌마 남자 만나러 왔나 봐.”
“응. 남자하고 여자하고 좋아하면 애인이야.”
“나도 봤다. 남자하고 여자하고 뽀뽀도 하고 그러더라.”
“저 아줌마도 그랬다. 어제 어떤 아저씨하고.... 봤어. 내가.”
후원 건물로 돌아서기가 무섭게 아이들의 소곤거림이 들렸고 아이들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혹 어른들의 귀에 들어 갈까봐.
창문 흔들리는 소리에 선잠을 깼다. 이미 열시가 넘어있었고 때아니게 늦게 찾아 와 객기를 부리는 손님도 있었기에 문을 열지 않았다.
“오늘 휴업입니다.”
“문 열어!”
고함이 흥청거렸다.
“오늘 장사 안 한다구요.”
“나 상민이란 말야. 진짜 안 열면 유리창 깬다.”
윤흰 잠결에 그가 누군 줄 라게 되자 퍼뜩 잠이 달아나 눈을 열었다. 이미 어머니가 없는 줄 알고 찾아 온 사람 무슨 짓을 할지는 의문이었고 먼저 이웃의 잠을 깨우면 곤란한 일이 잖은가.
그의 얼굴은 이미 취기가 올라 있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서늘했고 더럭 겁이 났다.
“뭐가 그리 겁이 나는 거야? 날 사랑한다면 그깟 이웃의 시선이 뭐 그리 대단해?”
성이 난 듯 올라간 옥타브로 끌어당기며 입술을 찾는 그에게 윤희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눈을 감고 그의 행동을 받아 들였다.
악취가 잠시 거부반응을 보였지만 스스로 억제하며 동화되어 그의 뜨거운 타액을 받았다. 이미 길들여진 애무, 또 다시 몸이 더워지며 꿈길을 걷듯 취해갔다.
내가 어쩌자고 이 떳떳하지 못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인가. 이젠 사내를 집으로까지 불러들이고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풍에 안기는 그렇고 그런 여자가 된 것일까? 혹 그의 말대로 그를 사랑하기에 부끄러움도 잊은 것일까?
내면의 질문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윤희는 그의 품에 안길 때면 이상하게 이러한 이성이 마비되었고 오래지 않아 감성에 더 충실한 육체로 변해갔다.
처음으로 여인의 문을 연 사람이기에 숙명적으로 사랑해야한다는 의무감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이를 진정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이이를 떠나 진정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번뇌의 갈등이 그의 품에서는 소멸되었다가 그와 헤어지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스럽게 사고를 어지럽힐 때면 차라리 그가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열망이 사슬이 되어 어지러워하는 자신의 이성을 묶어주길 기원해 보기도 했다.
“나도 윤희의 단골손님이야. 손님을 언제까지 세워 둘 작정이야?”
그는 윤희를 번쩍 안아들고서 안방 문을 열고 들어섰고 윤흰 이내 침대에 내던져졌다.
“안 돼요. 여기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