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윤성숙 전도사
<유다서 1장 14-16절>: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같이!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유다서의 기록 목적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가만히 들어 온 사람들이란, 교회 안에 형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거짓을 말하는 거짓 형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예수 믿는 자 같으나 그들이 내어놓는 것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다른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 대하여 옛날 선지자 에녹도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 예언하였다는 것은 오늘 이 시대에도 해당되는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범죄한 인간의 특징이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오늘날이나 변함이 없다는 것을 에녹의 예언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은 누구입니까? <창세기 5장>에 등장한 인물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 데려가심을 당하여 세상에서 죽음을 보지 아니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창 5: 21-24>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살고 죽었더라’라는 인생을 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살고 죽었더라’라는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담 이후의 모든 인생들입니다. 이렇게 아담 이후의 모든 인생은 그 죄 값으로 말미암아 ‘살고 죽었더라’라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어느 인생 하나도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 죽음의 현실을 살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에녹’입니다. ‘살고 죽었더라’는 인생 속에서 ‘살았더라’라고 나온 자가 에녹입니다(창5:23). ‘살고 죽었더라’라는 이 세상의 현실에서 죽음을 보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왜 이 세상에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을 당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함’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에녹의 이 이야기는 ‘살고 죽었더라’라는 세상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자만이 영생의 삶을 살게 됨을 에녹을 통하여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한 자만이 이 세상에서 산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동행’은 walk with, 함께 걷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히 11: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따라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창 5: 24>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히 11: 5>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믿음으로’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는 이제 사망을 향하여 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사는 자가 아니라 그 사망에서 옮겨진 생명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의 삶은 무엇입니까?
<히 11: 5>은 에녹이 세상에서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에서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에녹의 행보에 대해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오늘 본문 <유 1: 14>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 1: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그것은 바로 ‘이 사람들에 대하여 예언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교회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도를 변질시키기 위하여 율법을 가지고 가만히 들어와 있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구약시대에 에녹이 이미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예언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예언하였다는 것입니까? 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유 1: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뭇 사람, 즉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심판한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경건하지 않은 모든 완악한 말입니다. 에녹이 살던 그 당시 그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는 누구입니까? <창 6: 3>에서 말하고 있는 그 육신 됨의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아담의 죄를 가지고 있는 자들, 곧 하나님과 같이 됨의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창 6: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자기의 하나님 됨을 위하여 사는 것, 이것이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이며,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입니다. 곧 자기 ‘의’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런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지금도 예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변질시키기 위하여 율법을 가지고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에녹의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언급하기 위하여 예언한 것이며, 그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홍수로 심판하심으로 에녹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임한 분명한 현실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녹은 이 세상의 현실, 곧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인식한 것입니다. 이 현실이 인식된 자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란, 심판 아래에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자기 현실로 알고 사는 자입니다. 이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삶, 에녹의 그 믿음의 증거는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한 일이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경건하지 않은 일을 정죄하고, 그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이것이 데려가심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은 에녹의 행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창 6: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경건하지 않은 자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산 자가 노아입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행보는 무엇입니까?
<벧후 2: 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전파한 것입니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있는 옛 세상, 즉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방주를 만든 것입니다. 방주를 만듦으로 경건하지 않은 옛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전한 것입니다.
<히 11: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즉 심판입니다. 심판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합니다. 그 방주는 노아와 일곱 식구 외에 모든 인생들에게 심판이 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가 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한 일이 믿음으로 방주를 지음으로 세상에 홍수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 한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믿음의 행보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산다는 그 증거가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에녹이 그러했고, 노아가 그러했으며, 구약의 모든 선진들이 경건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그 세상을 정죄하며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한 자들에게서 나오는 그 믿음의 행위는 세상을 정죄하고, 그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의 삶 =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
이 세상에 죄가 있음을 고발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의 뭇 사람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결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는 쓴소리입니다. 세상에 심판을 전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전하면 세상 어느 누가 이것을 복음으로 듣겠냐는 것입니다. 우습게 여기고 믿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조롱할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아무나 들을 수 없고, 누구나 전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곧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그 심판의 소리를 복음으로 인식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에녹이고, 노아이며,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이고, 신약의 사도들이며 그 사도들의 말을 받은 교회들입니다.
아담의 칠대손 에녹도 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예언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정체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그 믿음의 도를 변질시키기 위하여 형제의 가면을 쓰고 다른복음을 가지고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교회 된 너희는 이들의 정체를 잘 인식하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그들과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힘써 싸우는 것입니까? 그들에게 죄가 있음을 말하고, 그런 너희에게 심판이 임하였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교회들, 예수의 그 길을 따라 걷는 교회들의 영적 싸움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는 자들의 그 믿음의 현실은 참으로 잔혹합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사는 것이 세상의 현실인데 그 세상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자기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으로 사는 그 세상에 심판을 전하면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고난입니다.
<히 11: 35-37>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믿음으로 산 자들이 이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문을 받고,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고난 가운데에서도 다시 일어나 한 일이 복음증거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교회된 자들은 세상에서 아주 낯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세상과 동행하지 않는 삶, 그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자기 현실로 인식하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복음을 위하여 심한 고난을 받을지라도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돌로 죽을 정도로 맞았음에도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세상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비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뙤약볕에서 방주를 짓고 있는 노아를 세상이 어찌 감당하겠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없다는 것은 세상에게 심판이 있음을 전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오직 자기를 위하여 사는 세상속에서,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전한다는 것은 미친놈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말을 받아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전하는 우리 또한 이러한 현실을 살고 있으며 이러한 미친놈 소리를 듣는 일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복음으로 외치는 경건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경건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여러분의 현실을 직시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