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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예루살렘 입성과 무화과 저주, 성전 숙정 사건 및 기도의 자세에 대한 교훈과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구속사적 개관:
마가복음의 후반부인 제 11-16장은 죄인의 구속(救贖)을 위한 주의 십자가수난 사역이 결정적으로 성취된 수난 주간 사건 및 예수의 부활 승천에 대한 기록이다. 이는 주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으로 시작하여 주의 승천으로 끝맺는다. 물론 다른 복음서 기자들도 당연히 메시야요. 구속주로서 오신 주님께서 죄인을 위한 구속 희생을 직접적으로 실현한 십자가수난을 강조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은 분량 면에서만 보더라도 전채 복음서의 40%를 바로 이 주님의 십자가 수난 기록에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마가복음의 기록 목적 또는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마가는 전 제국에 걸쳐서 마치 거대한 노도처럼 소리도 없이 거세지는 로마 제국의 대 박해에 직면한 각처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를 따르는 신앙의 순결은,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것이기에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떠한 박해나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지킬 때 참 구원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복음서를 집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가는 본래 주님은 제 2위 성자로서 성육신하신 메시야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즉 전 우주적 주권과 능력을 가지셨음에도 다만 이미 태초 에덴동산에서부터 세워진 구속의 법에 따라 당신이 사랑하는 택한 죄인들의 죄 값을 대신 하기 위해 수난 받는 종으로서 실로 미천하고 버림바 된 종처럼 죽으셨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이 죽음을 통하여 구속사역을 성취하신 후 다시금 이를 이기고 마침내 부활하셨음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런 기사를 통해서 인간이 구원을 얻을 길은 오직 주님을 믿는 길밖에 없으며 또 그런 주님을 믿을 때 그 옛날 스스로 타락하여 사람까지 죄에 빠트린 후에 이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엡 2:2)의 사주를 받아 주님을 부당하게 죽인 세상이 그를 따르는 성도도 해칠 것이지만, 주님이 이를 이기고 부활하셨듯이 성도도 주안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 승리할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다가오는 박해가 일시적으로는 고통과 고난이지만 오히려 영원한 구원을 위한 지름길임을 강조하여 박해에 처한 성도들에게 믿음의 확신과 소망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동기와 목적으로 마가는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따라 우리 인간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종으로서 실로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죄인을 위해 애써 일하시는 주님의 행동과 그의 능력을 강조하였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마침내 죄인의 구속을 위한 십자가 수난과 나아가 최초의 부활로써 모든 성도의 부활과 구원 승리의 산 증거인 주님의 부활을 혼신을 다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본장은 이처럼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에 하나님 이 죄인의 구속을 위해 파견한 종으로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사 구속 사역을 성취하심은 물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사 우리의 부활과 구원의 확증이 되신 우리의 종으로서의 예수의 수난과 부활 승리를 동시에 강조하는 마가복음 후반부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제 이런 문맥 하에서의 수난 주간 첫째 날에 있었던 주님의 승리의 입성 사건에서 시작하여 둘째 날인 월요일에 있었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 및 성전 숙정 사건 그리고 셋째 날인 화요일의 마른 무화과나무에 즈음한 기도의 확신에 대한 교훈 및 유대 지도자와의 긴 논쟁의 첫 시작인 주님의 권위 논쟁을 보도하는 본장의 문단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11절은 예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인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중의 첫날인 일요일에 발생했던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보도한다. 다음 12-17절은 월요일에 발생했던 성전 정화 사건을 보도하고, 18-22절은 월요일과 화요일 양일 간에 걸쳐서 발생한 무화과 나무저주 사건을 보도한다. 그리고 23-27절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여 야기된 논쟁을, 뒤이어지는 28-44절은 예수애서 비유로 형식과 가식에 찬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해악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경고하신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1-11절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 사건은 그야말로 구속사 그 자체를 응축적으로 보여 주는 대사건이었다. 먼저 이 사건은 지금껏 천국 복음의 전파와 자신의 사후 당신의 몸된 교회를 설립 유지할 제자들의 훈련을 위한 충분한 시간 확보를 위하여 자신을 되도록 감추셨던 것과 달리 비로소 자신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메시야(the Messiah) 구속주(救贖主)이심을 이제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예수는 민중이 환호하는 가운데도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므로 자신은 승리의 왕인 동시에 평강의 왕이요, 자유를 주시는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둘째 이 사건은 그것으로 종결이아니라 바로 지금까지 주께서 수행하셨던 공생애(共生涯)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구속사역(救贖事役)을 닷새 후에 성취하시기 위하여, 즉 십자가 수난을 당하사 아담의 범죄 이후 발생한 구속의 원리와 법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입성한 사건이었다. 이 예루살렘 입성 사건 당시에는 예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앞서 네 차례나 예고하신 바 대로예수께서는 심지어 지금 환호하는 민중이 곧 변하여 자신을 못 박을 것을 요구하는 자들이 될 것조차 다 내다보고 계셨다. 그럼에도 여수께서는 이를 피하지 않으시고 이제 그 죄인의 구속에 요구되는 죄 값을 흘리시고자 입성하였던 것이다.
실로 이를 깨닫고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환히 웃으시며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구속의 은혜와 공로에 새삼 감동하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여 예수를 그저 빵이나 세금 문제를 해결할 정치 지도자로 착각하다가 나중에는 주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그 당시의 민중들처럼 큰 범죄에 동참하는 어리석음과 악함을 버려야하겠다. 한편 이 사건은 세상 끝 날에 전 우주의 심판자(審判者)로 이 땅에 강림하실 예수의 재림사건의 전 단계요, 또한 예표었다. 이 입성 사건은 일단 구속의 원리와 법을 성취하고자 하신 것 뿐이었으나 훗날 재림 시에는 당신의 구속사역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을, 끝내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자의 죄대로 심판을 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救贖史的 觀點)에서 개관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주님의 사랑과 경고를 동시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12-14절의 무화과나무 사건은 주님은 구원과 사랑의 주님이시지만, 당신의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여 믿음의 열매를 맺지 않은 자에게는 심판을 행할 능력과 권세(權勢)가 있으시며, 또 분명히 시행하실 것을 보여 주는 구속사적 경고이다.
15-19절은 성전 숙정 사건이다. 여호와의 임재 또는 주께서 임재하신 처소를 상징하는 성전(聖殿)을 주께서 정화하신 사건은 1차적으로는 참다운 신앙의 회복을,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사역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던 죄가 척결되어 바른 관계가 정립될 것을 상징한다하겠다. 주님의 입성이 자유와 해방을 위한 평화의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성전 정화사건은 사탄(Satan)의 무리를 내쫓고 이기시는 심판과 승리의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
20-26절은 주에서 수난 주간 둘째 날인 화요일에 열매가 없으므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다음날인 수요일에 하루 만에 말라 죽은 것을 발견하고 놀라는 제자들을 보고 주께서 이를 기회로 기도의 자세에 대하여 주신 교훈의 기록이다. 이는 말씀 한마디로 나무를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능력의 주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그 주안에서 서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서로 용서하는 사랑을, 응답받는 기도의 양대 조건으로 축약하고 있다. 우리는 비단 응답 받는 기도의 조건으로서만이 아니라 나아가 구원 받는 조건으로서 수직적 관계 속에서는 주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수평적 관계에서는 이웃 사랑을 가져야 하겠다. 더욱이 이 교훈은 이제 십자가 수난을 몇 일 앞두신 주님이 주신 것임을 생각해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먼저는 몇일 후의 주의 수난은 자신을 믿는 자에게 그야말로 말 한마디로 산을 옮길 능력까지 줄 수 있는 절대적 능력의 소유자인 주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당한 것이 아니라 죄인의 구속을 위하여 자청한 수난임을 깨닫는다. 나아가 자신의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서 도 인간의 믿음을 촉구하는 주님의 교훈 앞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숙연히 묵상하게 된다.
마지막 단락인 27-33절은 다음 장인 제12장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논쟁들 곧 이제 십자가 수난을 통한 구속 사역의 최종 성취의 때가 이르러 당신이 메시야요, 구속주임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를 몇 일 후에 정치범으로 몰아 죽임으로써 결국 예수 구속 사역의 성취의 통로가 될 유대 종교 지도자들 간에 있었던 긴 논쟁의 시작부분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께 대한 구약의 분명한 예언과 이들의 예수를 통한 성취, 예수님의 바르고 정의로운 교훈의 복음을 실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조건적이고도 악의적으로 예수를 배척하여 주님께 나아와 메시야로서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숙정을 감행하시는 예수의 권위의 근거를 물었던 것이다. 구약의 계시와 주의 사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처럼 맹목적인 우문을 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곧 그들의 완고함과 영적 무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이미 편견과 이해타산에 사로 잡혀 아무리 사실 자체를 말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간파하시고 그들에게 사실은 당신의 선구자였으며 자신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증거하던 자로서 당시의 민중들에게 의로운 선지자로 추앙받던 세례인 요한의 세례의 기원을 되물음으로써 진리를 그 자체로 보기보다 정치적 입장에서 고려하는 그들을 역습하심으로써 그들을 침묵시키시는 놀라운 지혜를 보이셨음을 보여준다. 이는 구속사의 진리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늘 세속적 입장에서 보고자 하는 자는 끝내 그 구속사(救續史)의 실체를 보지 못할 것을 교훈해 준다.
외울 말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에로 되리라(막 11:19)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열매 없는 무화과의 저주
12 ○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의 성전 숙정
15 ○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응답 받는 기도의 두 조건
20 ○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26 (없음)
예수의 권위에 대한 논쟁
27 ○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31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에게로서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저희가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33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난제 해설 -11:12-14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본문은 예수께서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사 말라 죽게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마 21:20).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그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아직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열매 맺을 때가 아직 되지도 않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으며, 또 그러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사 말라 죽게 하시는 무자비한 행동을 하신 셈이 된다. 그러면 과연 그러한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이유?
팔레스틴에서 무화과 열매의 수확기는 대개 6,7월경이다. 따라서 본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4월경으로 추측되므로 무화과 열매의 수확기가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팔레스틴 지역의 무화과나무는 보통 1년에 2회 수확하게 된다. 즉 지난 해의 가지인 헐벗은 겨울나무 가지에 4월 이전부터 푸른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고(아 2:13). 그 후에 잎사귀가 나면서 열매가 차츰 익어 6월에 수확하게 된다. 또한 당해 봄에 난 가지에서 결실한 열매를 8월에 수확하게 된다. 그래서 팔레스틴 사람들은 4월경의 아직 익지 않은 푸른 열매를 '파가'라 하고. 6.8월경의 잘 익은 열매를 '비쿠라'라고 따로 명명했다(사 28:4). 한편 아직 익지 않은 푸른 열매인 '파가'는 맛은 없지만 그 시기에 다른 과일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먹기도 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는 으례히 푸른 열매가 열린 뒤에 잎사귀가 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열매는 얼고 잎사귀만 무성했던 것이다. 열매가 없었던 이유는 푸른 열매를 이미 누군가가 다 따먹었거나, 아니면 그 나무가 병에 걸려 열매를 맺지 못했거나 했을 것이다. 아마 당시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열매를 따먹음으로 인해 본문에서처럼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많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 나무는 열매도 없으면서 잎사귀만 무성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열매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리게 했으나 결국 예수를 실망시킴으로써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은 이유는 예수께서 어리석게도 때가 아닌 때에 열매를 구하였다가 열매를 얻지 못하자 그것에 대한 분풀이로 무자비하게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그 나무 잎사귀의 무성함 같이 마땅히 열매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열매가없었기 때문인 것이다.
2. 교훈
이상 살펴본 대로, 예수께서 잎사귀만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단지 열매를 얻지 못한데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실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외식으로 가득찬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 이어 나오는 성전 정화 사건과 연관하여 종교적 행사는 요란하게 치루면서도 실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은 도무지 행치 않는 당시의 유대인들을 책망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도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종교생활은 하되 참 신앙은 얼고. 성경 지식은 가득하되 선한 행위의 열매는 얼고. 많은 직분을 맡아 행하기는 하나그것이 오히려 무화과나무의 무성한 잎사귀처럼 자기 과신과 허영의 도구는 되고 있지 아니한지‥‥ ! 날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기에 먼저 힘써야할 것이다.
원어 연구 -11:17, 만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파시 토이스 에드네신'( )이다. 여기서 '파시'는 본래의 형태가 '파스'( )인데, 이는 '모든'(마 1:17; 행 2:17) 또는 '누구든지'(행 3:23)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토이스'는 정관사 '호'( )의 여격 형태를 띠고 있다.
한편 '에드네신'은 '에드노스'( )의 복수 여격으로 쓰였다. 여기서 '에드노스'는 원래 관습이나 관례에 '익숙하다'(be accustomed to) 또는 '전례가 된다'(마 27:15)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에도'( )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이는 같은 습관을 가진 '민족'(마 24:7; 롬 16:26)이나 '족속'(눅24:47; 행 14:16) 및 '만국'(계 2:26; 딤전 3:16)을 가리키기도 하며 특별히 유대인이 아닌 외국 사람. 곧 '이방인'(마 6:32: 엡 2:11)을 가리키기도 한다.
한편 본문은 예수께서 사 56:7의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그곳을 보면 '만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 '골 하암밈'( )이 적혀 있다. 여기서 히브리어 '암'( )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만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이방 민족만을 지칭할 때는 고임'( )을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암'의 복수형 '암밈'이 사용되어 장차 많은 이방인들까지도 회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에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주로 이방인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헬라어 '에드노스’를 사용하심으로써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됨을 시사하고 있다. 즉 구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혈통적, 민족적 경계를 넘어 모든 백성들이 다 영적 선민이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11:1-11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본장에서부터 15장까지는 고난주간에 발생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불과 일주일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의 이야기가 본서 전체의 1/3분량에 해당될 정도로 상세하게 서술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만큼 본서가 수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여 묘사함으로써. 엄청난 박해 가운데 처해 있던 로마의 성도들 곧 본서의 수신자들을 위로하려는 기록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이 부분은 예수께서 베레아 전도를(10:2-52) 마치신 후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는 과정과 그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것은 그를 적대시하며 체포하려는(요 11:57)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의 일신상의 위험을 생각치 않으시고 죄인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완수하려고 묵묵히 전진하신 것이다.
한편 우리는 승리의 입성이 있기 이전에 베다니 시몬의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실 때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요 12:2-8). 본서를 비롯하여(막 14:3-9) 마태복음에서는(마 26:6-13) 이를 승리의 입성보다 뒷부분에서 언급하나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를 때 이는 승리의 입성이 있은 주일 하루 전인 토요일에 일어난 일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이한' 배치가 이루어진 이유에 대하여는 막 14:1-11의 문단 강해를 참조하라.
이에 이어지는 사건으로서 본문에서는 고난 주간 중에서 첫째 날(일요일)에 발생한 사건이 소개되는데, 이때 예수님께서는 새끼 나귀를 타고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그런데 메시야이자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승리를 상징하는 백마가 아니라, 초라하기 짝이 없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진정 주님께서 얼마나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셨는지 보여준다(슥 9:9). 아울러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던 정치적 메시야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시기 위한 상징적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① 성도들은 언제나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롬 12:16; 빌 2:3).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이다(벧전 5:5,6).
② 성도들은 재림의 주님께서 백마를 타고 이 땅에 다시 오실 날을 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계 19:11-17)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환영했다. 물론 이러한 그들의 열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으로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차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이 땅의 모든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성도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 순간을 바라보면서. 당장이라도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마 24:32-25:13).
11:1 저희가 예루살렘에‥‥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 예수께서는 베레아 지역의 여행(막 10장)을 마치시고 여리고에 들려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후유대의 예루살렘 근처에 도착하였다. 이 여리고에서(막10:46-52) 예루살렘까지는 약 24km 정도의 거리로서 7시간의 여행 거리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바로 예루살렘으로 입성(入城)하지 않으시고 베다니에 유숙하시며 안식일을 보내신 것은, 다음 날 메시야로서영광스럽게 입성하는 것과 아울러 바로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시게 되는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감회에 젖어 있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한편 본절에는 세 장소가 언급되었는데 먼저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시내건너편에 있는 해발 800m 정도의 산으로 꼭대기에 올라서면 예루살렘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감람산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의 도래'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슥 9:9; 14:4). 그래서 마가는 이 지명을 언급함으로써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고대해 온 메시야임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 같다. 감람산에 대해서는 막 13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또한 '벳바게'는 '익지 않은 무화과들의 집'이란 뜻으로 그 위치에 대해서 확실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달만(DaIman)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역의 경계 또는 도성의 동쪽 성벽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교외 지역이라고 한다. 벳바게의 위치에 대해서는 마 21장 자료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그리고 베다니는 '고뇌자의 집'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남동쪽 약 3km 지점에 위 치한 마을(요 11:18)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살던 곳인데, 예수의 전 행선지였던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만 했다. 이에 대해서는 막 14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 마가가 언급한 장소, 즉 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내신 장소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또한 파견된 이 두 명에 대해서도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군지 알 수 없으나 베데(Bede)는 베드로와 빌립이었다고 말하고, 얀세니우스(Jansenius)는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신뢰하셨고 이 두 사람에게 많은 것을 맡기셨으며(눅 22:8), 또한 베드로와 요한이 단짝이었다는 점에서 (행 3:1) 후자의 주장이 더 가능성이 있는 듯하다. 또한 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나귀의 주인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5절이나 눅 19:33에 임자가 따로 나오므로 적합한 추론이 아니다.
11:2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 맞은편 마을은 아마도 저들이 그때 접근하고 있었던 벳바게일 것이다(Lane, Bruce, Cranaeld).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 - 본절에 대해 마태는 '나귀와 나귀새끼'라고 표현함으로써 당시 그 나귀 새끼가 어미와 함께 있는 어린 것임을 강조했으며(마 21:2), 누가와 더불어 본문은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이란 수식어를 사용하여 나귀의 순결성을 보여 주고 있다(눅 19:30). 한편 '나귀 새끼'에 해당하는 헬라어 '폴로스'( )는 모든 짐승의 새끼, 즉 어린 나귀뿐만 아니라 망아지를 나타낼 수도 있는 말이다. 따라서 혹자는 여기에 언급된 짐승이 나귀 새끼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하나 70인역( )의 용례나 전시(戰時)에 사용되는 말과는 대조적으로 나귀는 평화를 상징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나귀 새끼가 확실하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여기서 '나귀 새끼'란 말이 강조하는 점은 '평화'와 '순결성'이다. 즉 예수께서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으며 구약의 전통이 말하는바 신성한 곳에 사용되는 것은 세속적인 일에 사용되지 않은 것이라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신 것이다(민 19:2; 신 21:3; 삼상6:7),
한편 본절에는 예수의 정체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예수의 신성 (神性)이다. 즉 그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디에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요 1:48). 둘째는 택하신 나귀의․ 상태이다. 즉 그것은 흠이 없고 깨끗하며 완벽한 제물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민 19:2; 신 21 :3). 이것은 예수께서 마리아의 태내에 임신되었을 때나 그의 탄생 때까지 마리아 역시 처녀였다는 사실(마 1:25; 눅 1:34)과 일치하며,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던 무덤 역시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것(눅 23:53)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전혀 우연히 아니라 구속사의 계획에 따라 처음부터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질서 정연하며 또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당위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11:3 누가‥‥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 본 구절은 마가복음에서 가장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그 논쟁의 요지는 여기서 언급하는 '주'(主)가 누구를 가리켜 한 말이냐 하는데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첫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주'(호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없으므로 이 '주'는 나귀의 주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나귀의 주인도 예수와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Taylor, Bolkestein),
둘째, '여호와 하나님'을 뜻한다는 입장이 있다(Allen). 이러한 주장은 예수께서 '주'라고 말할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셋째, '주'는 메시야로서 예수를 가리키는데, 이 말은 모든 일들에 대해 전권(全權)을 행사할 수 있음을 알리는 그리스도론적인 칭호라는 것이다(Bruce, Erdman, Could, Swete). 우리는 다소 어색함이 있다 할지라도 이 세 가지 해석 중에 마지막 견해를 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타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예수가 바로 메시야이며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른 곳에서 사용되지 않은 칭호를 사용한 마가의 의도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가 바로 우리의 주이시며 메시야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사실은 또한 당시 예루살렘 주변에는 예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 본문을 '즉시 그것을 다시 이리로 돌려보내리라'로 이해하면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사용하시고 돌려주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본절의 문맥으로 볼 때 나귀의 임자가 나귀를 예수께 보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듯하다. 즉 예수께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미래에 있을 나귀 주인이 예수께 나귀를 빌려드릴 일까지 아신 것이다.
11:4 문 앞거리에. - '거리'(암포돈)는 '모두' 혹은 '둘'(암포테로스)과 '길'(호도스)의 합성어로서 '로타리'나 '교차로'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주도로가 아닌 '뒷길'(Wordsworth) 혹은 '주변 길'(Trench)로도 번역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문 앞'이란 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집 안으로 통하는 뒷길 정도로 볼 수 있다.
11:5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 -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 제자가 거리에 묶여 있던 나귀 새끼를 풀었다. 한편 본문에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 주위의 어떤 사람이 이유를 묻는데 반해. 누가복음에서는 임자들이 질문을 제기한 것으로(눅 19:33) 나타나 있다. 이것은 나귀 새끼 주위에 그 임자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로써 예수가 말씀하신 바로 그 위치에 나귀가 있었고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 것까지 사실로 이루어졌다.
11:6 예수의 이르신 대로. - 제자들이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을 나귀 임자에게 하자 이들은 아무 말 없이 허락하였다. 이것은 저들이 이미 예수를 알고 있었고 그의 권위에 완전 복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로 미루어 예수께서 열두 사도들 이외에도 여러 가지로 예수에 시종들려고 하였던 다른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막 15:40; 16:1; 눅 6:13; 10:1; 요 12:19; 19:38; 20:1). 이들은 '주가 쓰시겠다'라는 그 말 한마디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예수가 머물 장소이건(막 14:13-15), 나귀 새끼이건, 또는 무덤까지도(막 15:46) 예수께 드리려고 하였다. 오늘날도 역시 주의 참 제자들과 그의 뜻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헌신과 봉사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즉 주를 따르는 성도들은 기도하는 것, 가르치는 것, 약한 자를 도와주는 것,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 등등 이런 일들을 기꺼이, 그리고 어떤 찬사나 타산적인 계산 없이 실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11:7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 히브리인들은 일상적으로 속옷만을 입고 다녔으나 어깨를 덮을 수 있고 소매 둘레가 있는 정방형 천으로 만들어진 겉옷도 지참하여 밤의 한기를 막는데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겉옷은 쉽게 벗을 수 있었고 본문에서처럼 그것을 나귀 위에 걸칠 수도 있었다(요 19:23,24). 그런데 옷을 벗어서 나귀 등에 펴는 행위는 존경하는 자에 대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복종을 다짐한다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왕하 9:13에서 왕에 대한 존경과 예우의 표시로 자기들의 옷을 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근동 지방에 있어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에게도 이와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경의를 표했다. 이로 보건대 당시 자기들의 겉옷을 걸쳐 놓았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영광스럽게 입성함으로 말미암아 곧 메시야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평화와 겸손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제자들이나 당시의 민중들이 기대하였던 정치적 메시야가 아닌 평화와 겸손의 왕이 심을 선언하셨다(슥 9:9),
예수께서 타시니. - 눅 19:35에는 제자들이 주체가 되어 '예수를 태우니'라고 기록된데 비해, 본문은 예수가 주어로 묘사되어 능동적으로 예수살렘에 입성하심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마가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더욱 생동감 있고 세심하게 나타내기 위 해서 취한 문장 기교인 것으로 볼 수 있다.
11:8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 예수를 환호하는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에서 나온 무리일 뿐 아니라 베다니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던 맡은 무리이다. 이들 역시 예수를 로마의 압제와 정권 잡은 자의 폭정에서 구해낼 메시야로 생각하고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처럼 당시 예수에 대한 예의는 왕으로 추대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바 과거 북이스라엘의 예후도 그가 왕이 될 때 친구들에 의해 이러한 영접을 받았었다(왕하 9 :13).
나무가지를 길에 펴며. -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할 때 사용한 나무 가지가 헬라어로는 각 복음서마다 각기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다. 즉 본서에서는 '잎사귀', '잎이 많은 가지'라는 뜻을 가진 '스티바다스'( )가 사용되었고, 마태복음에서는 '나무에서 잘라 낸 어린 순'이란 뜻의 '클라두스'( )가 사용되었다(마 21:8).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종려나무'를 나타내는 '바이아'( )가 사용되었다(요 12:13).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이 나무 가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눅 19:36). 따라서 각 복음서들을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한다면 당시 예수를 환영하던 사람의 일부는 밭에서 베어낸 잎사귀가 많이 달린 나뭇가지로서 길을 덮었으며, 다른 사람은 들에 있는 나무순을 잘라 동일하게 길을 덮었고, 또 다른 일부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예수를 환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이 구절은 당시 민중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그분을 왕으로 환영하는 무리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있었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계 7:9).
1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 - 마가는 마태의 기록(마 21:9)과 같이 이들을 두 종류의 무리로 분명히 구별 지었다. 즉 본절은 무리들을 '앞에서 가는 무리'와 '뒤에서 따르는 무리'로 구분지음으로써 이들이 예수님의 앞과 뒤를 에워싸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요한의 기록에 의하면(요 12:13), 이때 예수와 동행하였던 한 무리는 베다니에서 나사로를 보려고 왔던 무리로서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무리들이며, 또 다른 한 무리는 예루살렘 에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나온 무리라고 한다. 한편 눅 19:37에서는 이 무리가 감람산 기슭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가까운 곳에서 모인 무리라고 알려준다.
호산나. - 이 말은 본래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구하소서'란 뜻의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으로(삼하 14:4; 왕하 6:26; 시 118:25), 하나의 기원문이었으나 점차 종교적 환호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즉 이 말은 장막절과 같은 축제의 기간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쁨의 갈채, 찬양의 송영으로 사용되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이 구절은 유월절에 부르는 찬미시(a Hallei Psalm; 시 113-118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시 118:26을 인용한 것이다. 즉 이 시편의 구절은 절기를 당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맞아들이는 인사말로도 사용되었으나, 그 진정한 의미는 장차 다윗 가문에서 나타날 '메시야'를 기다리며 빨리 임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11:10 우리 조상 다원의 나라. -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마가만의 기록으로서 당시 사람들의 메시야관을 잘 보여 준다. 즉 그들의 이러한 외침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 왕국의 주체로 인정하고 환영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사실이나, 예수를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공의를 실현할 제 2의 다윗왕 정도로 이해한 것이란 점에서 잘못되었다(사 9:6,7; 암 9:11). 또한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지도자로 생각했지 실제로 자신들의 죄를 대속할 메시야(마 1:21)로 환호했던 것은 아니었다. 즉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참된 목적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면과 정치적 해방만을 염두에 두었는데 이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마가복음 서른 특별자료, '메시야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그래서 이처럼 열성적으로 환영했던 그들이 예수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자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이다(막 15:13).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예수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해석하면 오류를 범하는 실수와 더불어 반대로 현실적인 상황에만 연결시켜도 과거 유대인들이 예수께 범한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벧후 1: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전인격으로 인정하고 모든 삶의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 혹자는 이 말을 이 땅 위에서 행해지는 무리들의 환호에 대한 하늘에서 행해지는 천사들의 화답송이라고 보기도 하나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당시 군중들의 환호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가장 높은 곳'이란 하나님이 계신 처소를 뜻한다고 볼 때, '하나님이여 이 땅에 다친 왕국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의 축복이 나타나게 하소서'라는 기도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11:11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 본절의 표현은 예수께서 성전 모든 것을 돌아보셨다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이방인의 뜰과 거기 인접한 행각을 돌아보셨음을 가리킨다(Hendriksen). 왜냐하면 본절의 '성전'(히에론)은 성전 본 건물이 아니라 '성전 경내'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날은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기 하루 전인 일요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께서 다음 날 있어질 사건을 위해 미리 성전을 방문하셨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주민들의 반응에 대해서 생략하고 있으나, 마태는 온성이 소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마 21:10,11). 즉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 거민뿐만 아니라 많은 순례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예수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한편 본절과 병행 구절인 눅 19:41-44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성을 보고 우신 장면이 나온다. 이는 장차 멸망할 예루살렘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이기지 못한 이유이다.
베다니에 나가시다. - 예수께서는 그날 저녁을 지내시기 위해 베다니로 돌아가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이 자신에 대하여 격분해 있다는 것과 자신의 죽을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 밤을 예루살렘에 머무르실 수 없었다. 또한 그 성을 떠남으로 해서 예수는 군중들의 소동을 피하고 기도와 명상의 시간, 그리고 아마 자기 제자들과 약간의 교제 시간이나마 가질 수 있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한편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잠시 머무르다 베다니로 떠나실 때 성전 뜰에서 종교 지도자들과 상인들의 결탁된 악행을 살펴보시고 성전 숙정에 대한 결심을 더욱 굳게 하였을 것이다.
11:12-19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성전 정화
본문은 고난 주간 중에서 둘째 날(월요일)에 발생한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본문에는 두 가지 특별한 사건, 즉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과 장사꾼들에 의해 시장터처럼 변해 버린 성전을 정화하신 일이 언급된다. 여기서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수난 주간에 행하신 유일한 이적임과 동시에 예수 생애 가운데 있었던 유일한 파괴적인 이적이란 특징을 가지며,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 이어(요 2:13-17) 두 번째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두 사건, 곧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성전 정화 사건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두 사건이 다 같이 예루살렘 멸망의 예언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즉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내용이 없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고 성전 정화 사건은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린 성전의 파산을 선언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학자들 간에 윤리성에 있어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는 사건인 바 이에 대해서 는 본장 자료노트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와 해당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처럼, 예루살렘 성전 역시 하나님께 대한 진실된 예배는 사라져버린 채 형식적인 종교 의식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통하여 타락한 이스라엘 종교에 대한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태도는 당연히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로부터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을 제거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그들의 음모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따라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다운 믿음과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장차 주님의 책망과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마 3:10; 7:19-21; 요 15:1-8).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우리가 열심 있는 종교 생활을 할지라도 '성령의 열매'와 '빛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결국 어둠상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갈 5:22,23; 엡 5:8-11).
② 교회의 순결성은 그 어떤 이유로든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에 장사꾼들이 들끓게 된 것은 미처 제물을 준비해 오지 못한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어 주는 행위가 허용되었기 때문이었으나 이는 결국 거룩한 성전으로 하여금 불의의 온상이 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 실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무슨 명목으로든지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처사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삼상15:22; 사 1:11-17; 요 4:23,24).
11:12 이튿날. - 이 날은 종려 주일 다음 날 아침으로 니산월 11일로 추정되는 월요일이었다(마 21:18).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 만일 예수께서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까지 그의 친구 집에서 지내셨다면 아침에 시장하셔야 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 전날 밤을 금식하시며 기도하셨거나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셔서 그가 하실 일에 대하여 기도하러 가셨다고 짐작된다. 왜냐하면 병행 구절인 마 21:18은 예수께서' 이른 아침' 성안으로 들어오시는 길에 시장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이른 아침'(프로이)이란 새벽 3시~6시 사이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아침 식사를 하지 않은 채 이른 새벽에 베다니를 떠나 오셨기 때문에 몹시 시장하셨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평범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시장하심을 느끼신 것에서 우리는 예수의 인성(人性)을 발견하게 되며, 본래 하나님이셨던 분이 성육신하여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한편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인성(humanity of Christ)은 복음서 여러 곳에 잘 나타난다. 따라서 예수는 신성(divinity of Christ)을 지니셨음을 물론 완전한 인간으로서 인성(人性)도 아울러 지니셨던 분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인간적인 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때는 본절의 경우와 더불어 그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하나님을 향하여 외친 절규에서이다(마 15:34). 특별히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피로하시고 목말라하시는 것을 묘사하면서(요 4:6,7; 19:28) 그의 옆구리에 창을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왔다(요 19:34)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예수의 고난이 환상적인 허구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따라서 육체는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께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셨음을 부정하는 '가현설'(假顯說)은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1:13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때가 아님이라. - 유대인의 사회 보장 율법에 있어서 굶주린 자는 타인 소유의 열매도 따먹을 수 있었다(신 23:24,25). 따라서 예수께서는 시장기를 느끼시고 길가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게로 가서 열매를 찾으셨다. 한편 열매와 잎을 함께 내는 특성을 지니는 무화과나무에 잎이 무성하다는 것은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음을 은연중 암시한다. 그러나 본절의 사건은 유월절에 가까운 4월경이었으므로 무화과 열매를 따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다. 즉 팔레스틴에서 일반적으로 무화과는 3월말에 싹이 나서, 5,6월에 익고 6,7월에 일차 수확을 하며 8-10월에 완전한 열매를 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자연적인 이치와는 다르게 결실기가 되기 전에 무화과 열매를 구했으며, 또한 열매가 없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해석상의 혼란을 가져온다. 예수께서 왜 수확기도 아닌데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셨을까에 대한 난해한 문제의 해 결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시도가 있어 왔다.
① 이 사건은 본래 무화과 열매가 익는 여름에 있었던 일이나 의도적으로 예수의 수난과 관련을 시켰고, 더불어 마가가 '때가 아님이라'는 구절을 첨가하므로 이 사건의 때가 봄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Smith). 그러나 이는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된 것으로서 성경 기록의 신빙성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② 무화과나무의 경우 잎이 무성하면 열매 또한 풍부한 것이 상례이므로 잎이 많은 나무에서 잘 익은 열매를 구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적 예지력을 갖고 계신 예수께서 이처럼 나뭇잎에 속아 그릇된 판단을 하셨다는 것은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다.
③ 무화과나무와 그 열매에 대한 상징적 의미는 이스라엘을 나타내는데(렘 24:1-10; 호 9:10; 미 7:1). 예수께서 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임할 심판의 급박성을 알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즉 이 행동은 당시 이스라엘은 교만에 가득차 외식을 일삼으며 입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패역한 종교 지도자들로 가득차 마치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았으나, 실상은 그 열매가' 없음을 폭로키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에 나오는 '무화과의 때'에서 '때'(카이로스)가 '계절'이란 의미보다는 결정적 시점을 나타내는 종교적 용어로 쓰인 것으로 보아(막 1:14,15; 본절의 무화과나무 역시 종교적인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는 종말론적인 때를 놓침으로 인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기를 포기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4절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21절에 있는 저주의 성취가 당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스라엘에 대한 그리스도의 분노와 이것의 성취로서 A.D. 70년에 이스라엘의 멸망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설득력을 지닌다. 이러한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1:14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 예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직접 저주를 하심은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의 창조자로서 이를 주관할 권능을 지녔음을 나타내 주는 이적이다(롬 11:36).
영원토록‥‥따먹지 못하리라. - 예수의 이 저주는 마치 열매를 맺지 못한 책임이 그 나무에게 있는 것처럼 그 나무에게 벌하셨기에 타당치 못하며 이기적인 이적 사용이라는 지적이 있다(Manson). 그러나 이는 궁극적으로 무성한 잎을 가진 무화과나무처럼 겉으로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지만 실제로 어떤 신앙적 열매도 맺지 못하는 유대민족들의 외식적 모습을 기억하시고 상징적으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란 점에서 이 이적의 의의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형식과 의식에만 치우치고 실제로 성령의 열매(갈 5:22)를 맺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심판의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 마가가 구태여 이 구절을 언급한 것은 예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을 확인시키기 위함이다.
11:15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 예수의 성전 정화작업은 그의 사역 기간 중 두 번 있었다. 첫째는 요 2:13-22에 기록된 것으로 초기 활동시 였고, 둘째는 본절에 기록된 것으로 수난 주간 중 월요일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한편 그의 첫 번째 성전 청결 작업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일한 범죄가 계속되었던 것은 당시 성전 상인들의 완악함과 이를 두둔하던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상을 잘 보여 준다. 따라서 이번 두 번째는 보다 강력한 비난으로 책망하심으로써 성전의 주인이신 메시야의 권능을 드러내셨다(17절,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한편 본절의 성전이란 성소나 지성소와 같은 성전 본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전의 뜰, 즉 바깥마당인 이방인의 마당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성소나 지성소는 제사장과 대제사장만이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 - 당시 성전에는 대규모의 순례자들이 와서 많은 제물을 바쳐야 했던 큰 절기에 앞서 성전의 바깥마당에 큰 제물 시장이 열렸다. 그런데 이 시장은 구약에 결코 언급된 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포로 시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포로 이후에 여러 디아스포라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제물을 가지고 오는 불편함을 덜기 위해 초창기에는 감람산 지역에 비교적 크지 않았던 제물 시장과 환전 시장이 개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임 제사장 안나스에 의해 성전 바깥마당에도 시장이 개설됨으로 본절과 같은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당시 랍비 문서에 의하면 이 마당은 큰 면적(475×370m)을 차지했으며, 다른 마당들과 성전 일부 건물들까지 포함되었다고 한다(Billerbeck). 이처럼 성전에서의 매매활동은 성전 당국에 의해 묵인되었을 뿐 아니라 제사장들의 허욕과 탐욕으로 인해 불공정한 거래가 유도되었고 하나님께 바칠 제물이라는 명목으로 종교 지도자들 및 그들과 결탁한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도록 방관하였다. 그리고 이 시장은 대제사장의 친족들이 소유했는데, 당시는 대제사장 안나스의 아들이 소유하였다고 한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매매하는 자', 즉 사는 자들과 파는 자들이 모두 예수님이 분노하여 쫓아내신 대상이 되었다는데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점이 있다. 왜냐하면 파는 자들은 순례자들을 속이고 폭리를 취하는 완전한 죄가 있으나,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경제적인 피해자일 뿐 아니라 단지 편의를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랄한 비난 대상에 이 사는 자들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마도 엘리 제사장처럼(삼상 2:22-25; 3:13)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하나님 뜻에 따른 비판 없이 받아들인 점에 있다. 즉 자신의 짐승이 제물로서 합당한 것인가를 검사하는 검열관들에게 거부당할지도 몰랐기 때문에 차라리 그것 보다는 이방인의 뜰에서 자신의 제물을 사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파는 자들의 특권은 사는 자들의 편리가 되었던 것이고, 사는 사람은 파는 사람들의 악행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돈 바꾸는 자들. -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세를 납부하기 위해서 관례적인 화폐 또는 고대 히브리 화폐를 사용해야만 했다(출 30:13-16; 레 27:3). 왜냐하면 부정한 자로 취급된 이방인의 화폐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히브리 화폐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그와 흡사한 두로의 은전이 사용되었는데(Lane, vessel), 이들은 돈을 바꾸면서 약 2.1~4.2% 정도의 수수료를 받았다(Billerbeck).
비둘기 파는 자들. - 제물로서 비둘기는 여러 경우에 바쳐졌는데 주로 값비싼 제물을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이 애용하였다. 또한 문둥병에서 나은 자가 바칠 제물이기도 했으며(레 14:22), 해산한 여인이 부정한 기간이 지나 정결례를 드리는 제물 등으로도 사용되었다(레 12:6; 15:14). 이러한 상업 행위가 성전에서 행해진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마 21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내어 쫓으시며‥‥둘러엎으시며. - 요 2:15에 나오는 제 1차 성전 정화 시에는 예수께서 채찍으로 그들을 내어 쫓으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는 그러한 표현이 없다. 그러나 본 구절을 통해 볼 때 완력으로 그들을 쫓아내셨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처소를 더럽힌 자들에 대하여 의로운 분노를 발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성전 정화 행위를 다시 생각해 보면 두 가지 의문점이 대두된다. 즉 이것이 부패한 성전 제의의 회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묵시적 희망에 따라 새로운 성전이 세워져야 한다는 기대를 표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16절에 이어지고 있다.
11: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허치 아니하시고. - 구약 시대부터 성전은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으므로 그 성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규칙이 시행되었다. 솔로몬 성전 건축 시 돌을 돌 뜨는 곳에서 다듬어서 성전 안에서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한 것과(왕상 6:7), 성전 안에는 먼지 있는 발로나 지팡이나 전대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는 등의 규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시는 제사장들의 허용에 의해서 시장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성전 뜰이 통행로로 이용되었다. 즉 베데스다에서 예루살렘 성읍의 상부로 지나가는 자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이 이 성전의 큰 뜰을 통과하여 솔로몬 행각 옆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물건을 나르는 종들과 일꾼들에게 성전 큰 뜰을 통과하는 이 길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적 권위로서 그 지름길을 사용하지 못하게 봉쇄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의 집 전체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이러한 예수의 행동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즉 본문에서 '기구'(스큐오스)는 일상적인 짐이 아니라 종교의식에 필요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70인역(LXX)에 이 단어가 300회 이상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1/3 이상이 성전 도구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명령은 성전을 통행 도로로 사용하거나 여기서 장사하는 것을 금한 정도가 아니라 제사를 위한 기물 사용 금지를 통하여 성전 제의 전체에 대한 폐지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Kelber). 물론 문맥상으로는 본문을 성전 정화를 위한 편의적 상업행위나 통행을 금지시킨 것으로 보아야 하나 이를 후자와 같이 해석하여도 반드시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는듯하다.
11:17 가르쳐 이르시되. - 예수는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행한 자신의 폭력이 단순한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 본절은 사 56:7의 하반절을 인용한 것으로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이 허용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런데 당시 제도로서는 이방인이 성전에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은 이방인의 뜰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의 뜰을 제물 시장으로 만들어 장사를 했다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유대인들의 횡포였고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를 저지하는 사탄적 행동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횡포를 중단시키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누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성전을 성결케 하시고 그 이유를 이와 같이 설명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만인'(토이스 에드네신)이 이방인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마 6:32; 막 10:33; 행 9:15 ; 롬 1:5). '만인'의 원어적 의미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또한 본절에서 '내집'은 원칙적으로 성전이 하나님 임재를 상징하는 '하나님 집'이라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암시적으로 제 2위 하나님되시는 '예수 자신의 집'이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로 보아 예수는 집 주인의 자격으로 성전 청결 작업을 진행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도하는 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친히 만나시며 인간의 거룩한 바램을 들어 주시는 곳임을 보여 준다.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 이는 렘 7:ll에 나오는 여호와의 책망을 예수께서 인용하신 것이다. 예레미야 당시 유대인들은 온갖 가증한 일을 하고서도 성전에 나와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였던바 하나님은 이러한 회개치 않는 범죄자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도적의 굴혈'로 표현하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시대에도 성전은 상인들과 교권주의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는 장소로 변했으므로 예수는 극단적인 말로서 이들을 비난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집'으로 정해 놓은 곳을 '강도의 굴혈'로 변모시킨 자들을 질타하신 것이다. 한편 혹자는 여기서 말하는 '강도의 굴혈'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확대 해석하여 상인과 교권주의자 뿐 아니라 성전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을 질책하는 말로도 이해했다(Strabo). 즉 '기도하는 집'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종교적인 장소가 반 로마 투쟁을 하는 장소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경계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성전이 다윗 왕국의 영화를 가시적으로 회복하려고 시도하며 로마의 외세를 몰아내려던 열심당의 활동 장소로서도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실제로 로마에 항전하는 유대인들이 성전을 요새로 하여 투쟁하다가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성전마저 무너지는 결과를 야기하였던 것이다(Josephus).
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 대제사장은 본래 한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대제사장들'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로마가 유대 민족을 수월하게 통제하기 위해 대제사장을 자기들 임의로 임명함으로써 전임 대제사장, 현직 대제사장, 대제사장 대리인 등이 생겨났고, 그들이 모두 대제사장으로 불리운 까닭이다(Josephus). 한편 당시 제사장들은 주로 사두개파였고, 서기관은 주로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두 그룹은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의 주축을 이루는 인물들이었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것은 특권 귀족 계층인 제사장들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는 모임으로, 사법 문제만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틴 전역의 통치 기구로서 광범위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국내의 종교 문제를 완전히 관장하였고 민사 문제와 로마 행정 장관의 재량에 따라 형사 소송도 재판하였다. 그러나 신약의 내용에 비추어보면 산헤드린에는 사형의 재판권은 없었다(요 18:31). 산헤드린 공회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을 보다 참조하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 본래부터 반목(反目) 상태에 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행 23:7-9)들이 서로 공모하여 예수를 잡으려 한 것은 성전 청결 같은 공공연한 행위로 인하여 이들이 큰 충격을 받고 격렬한 분개에 가득찼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은 이전에도 예수에 대하여 조사하며 죽이려 하였으나(막 3:6) 이제 전보다 더 치밀하게 예수를 죽일 것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데, '꾀하니'(에제툰)란 말에서 이들의 살의를 잘 엿볼 수 있다. 즉 이 말은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어떻게 그 살의를 실행할 것인지에 대해 골몰하여, 조사하며, 구하는 진지한 노력을 암시하고 있다.
무리가‥‥그를 두려워함일러라. - 이 말은 산헤드린이 왜 예수님을 두려워하여 죽일 방도를 구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즉 당시 교권주의자들의 외형적 권위에 식상해 있던 모든 무리는 예수의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행위와 또한 권위 있고 생명력 넘치는 가르침에 완전히 압도되어 심히 경탄해 마지않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예수에게로 집중되자 산헤드린이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11:19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 밖으로 나가더라. - 본절의 '매양 저물매'(호탄 오프세 에게네토)란 '저녁이 될 때마다', 즉 매일 저녁을 말한다. 이 날은 월요일 저녁이었는데 일요일 밤에 베다니에서 지내신 것과 같이 이 날도 베다니에 가셨다(마 21:17). 이것은 11절에서 보여지듯이 마지막 주간의 예수 숙소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유대의 지도자들이 군중이 목격하지 않을 때를 택하여 예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베다니에서의 예수 거처는 예수께서 평소 가깝게 지냈으며 죽었을 때 살린 적이 있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사는 집이었을 것이다.
11:20-26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앞 단락에서 우리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 종교를 책망하신 예수님의 상징적 행동을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수난 주간 화요일 아침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인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저주대로 뿌리 채 완전히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소개함으로써 예수님의 신적권능을 보여 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계기로 예수님께서 능력 있는 기도의 비결에 관해 교훈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에서는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기도하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면 응답받지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무화과나무 저주와 그 결과로서 무화과나무가 마른 사건에 이어 이처럼 기도의 응답에 대해 교훈한 것은 당시 제자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즉 바로 앞으로 닥친 그리스도의 고난은 신적 능력을 지닌 예수 자신조차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될 정도로(눅 22:44) 열심히 기도했던 바 제자들 역시 기도했어야 했던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 남겨지게 될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 역시 기도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기도의 교훈은 본서가 쓰여질 당시 고난 받은 성도들은 물론 모든 시대 모든 성도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한편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참으로 능력 있는 기도의 비결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 미사어구를 늘어놓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동정심을 유발시키려고 애쓰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왕상 18:25; 눅 18:11,12). 오로지 확신을 갖고 하나님께 구하며 또한 이미 기도의 응답을 받은 줄로 믿는 데에 있다. 또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거나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만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지 못하기 때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기도에 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며, 혹은 이미 기도의 응답을 받고도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하여 마치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이와 더불어 기도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하며, 또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란 이웃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함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성도들은 이웃과 더불어 화목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마 5:23,24; 골 3:13). 만약 그렇지 못한 채 하나님께 자꾸만 무엇을 구하는 자는 결코 무엇을 얻을 줄로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마 18:21-35).
11:20 아침에 지나갈 때‥‥마른 것을 보고. - 예수께서 월요일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에 대한 결과를 보여 준다(14절). 한편 본 사건과 병행 구절인 마 21:18,19에는 예수님의 신적 저주가 있은 직후에 나무가 말라버린 것으로 되어 있어 하루 후에 이를 확인했다는 본절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명령 후 바로 나무가 생명력이 상실해 감을 지적한 것인데 반해, 마가는 그 다음날 말라버린 결과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마가는 나무의 상태를 뿌리부터 말랐다고 표현함으로써 그 당시 이를 직접 목격한 베드로로부터 마가복음이 기원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즉시 나무가 생명력을 상실한 것으로 묘사한 마태는 예수의 즉각적인 능력에 관심을 둔 반면 마가는 무화과나무의 상징성에, 주목하여 성전과 이스라엘의 생명력 상실을 암시하고 있다. 즉 잎만 무성하고 결실이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외형적인 종교행위는 있으나 결실은 없는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인해 구원의 반열에서 멀어짐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예언은 A.D. 70년 디도(Titus) 장군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서 성취되며 이러한 완전한 파멸은 전적으로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들의 책임이다.
11: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말랐나이다. - 마태는 이 질문을 제자들이 함께 제기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반면(마 21:20), 마가는 베드로의 독단적인 질문인 것처럼 기록한다. 이러한 차이는 당시 제자들의 공통된 의문을 베드로가 중심하여 제기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양자가 상이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베드로의 제자이며 복음서를 베드로의 관점에서 기록했던 마가는 자연스럽게 베드로를 전면에 내 세우는 기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랍비여. - 베드로는 전처럼(막 9:5) 예수께 말을 건넬 때 '랍비'( )라는 명칭을 사용한다(마 26:25,49; 막 10:51; 14:45; 요 1:49; 4:31; 6:25; 9:2; 11:8). 이 아람어는 요한에 의해 일반적으로 '선생'으로 해석되어져 있는데(요 1:38; 3:2), 근본적으로 크게 높임을 받는 자를 가리킨다. 일찍이 기록된 바에 의하면 세례인 요한까지도 이와 같이 불리어졌다(요 3:26),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적인 이적이 묘사되는 이 부분에서는 일반적인 용어인 랍비보다 그의 권능을 강조하는 '주'(큐리오스)라는 명칭이 더 합당했을 것이다.
11:22 예수께서 대답하여‥‥이르시되. - 본절이하 25절까지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나, 이 말씀이 제기된 질문과 논리적 관계가 자연스럽지 못한 관계로 이 부분에 배치된 것이 잘못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와 동일한 구조의 말씀이 다른 상황에서도 여러 번 사용되었기 때문이다(마 7:7; 17:20; 18:19; 눅 11:9; 17:6). 그러나 다른 상황에서 나타난다고 해서 이 부분과의 관련을 부인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무화과나무 사건이 당시 이스라엘의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이스라엘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믿음 없는 것에서 찾는다면, 믿음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믿으라. - 이 명령은 이어지는 교훈의 결론임과 동시에 출발점이 된다. 한편 원문에서는 현재 명령형이 사용되어 계속적인 믿음 갖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바, 이 말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막 5:36; 요 3:16)는 말과 뜻이 상통한다. 이러한 명령은 한계가 뚜렷한 인간이 급변하는 환경에 시선을 고정시킬 때는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으나, 모든 사건과 환경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신뢰하며 끝내 그분이 각자의 삶에서 활동하시도록 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갈 2:20).
11:2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앞부분에 언급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보완 설명함에 앞서 제자들의 관심을 유도하는 말이다. 또한 앞으로 되어질 교훈이 '진실함'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바다에 던지우라. - 당시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었으므로 감람산과 더불어 사해(Dead sea)의 서편 부분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더 실감나게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산더러‥‥던지우라'는 표현은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속담의 하나로서 '어려운 일을 한다'란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을 가리켜 '산을 옮긴 자'라는 말로 칭찬하였는바(Lightfoot, Craufield), 이는 '해결자'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도 예수님의 교훈의 요지는 의심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믿음은 어떠한 어려운 문제도 해결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 본문은 '믿음'과 '의심'이란 반대어를 등장시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의심'(디아크리데)이란 말은 '두 가지'(디아)란 단어가 '결정을 하다'(크리노)란 단어의 합성어로서 '가닥을 잡지 못하고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믿고'(피스튜에)는 '확신을 가지다'( 피스튜오)의 제 1과거 가정법으로서 확신한 바에 대하여 계속적인 신뢰감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부정과 긍정의 양면을 대비시키심으로 신앙의 필요성을 대단히 강조하셨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깎아 내리려 하지 말며, 그 의미하는 바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여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함에 대한 교훈이다. 왜냐하면 의심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와 대립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사도들은 산이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고 하는 것처럼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을 물질적이며 영적인 각 영역에서 이미 행하고 있었다. 즉 베드로는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으며(마 14:29), 열 두 제자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소리쳤었다(눅 10:17). 며칠 뒤에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에로 감이니라'(요 14:12)고 약속까지 하셨다(행 2:41; 3:6-9; 5:12-16; 9:36-43; 19:11,12). 사실 사도행전 전체는 예수께서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가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적과 기사는 자신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관련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24절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되어진다.
11:24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그대로 되리라. - 본절은 23절과 병행되는 말씀이나 23절을 보다 더 강조하며 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본절은 믿음이 전제된 기도가 가지는 효력을 밝히고 있는바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받은'(엘라베테)이란 말이 과거형으로 쓰여 '이미 받은 상태'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따라서 혹자는 이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구하기도 전에 이미 주시는 것으로 해석하여 기도의 효력을 평가 절하하기도 한다(Schweizer). 그러나 본절의 의미는 앞부분의 조건절을 전제해서 해석하여야하므로 '무엇이든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은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런 의미에서 본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말과 일치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과 온전히 일치된 상태에서 가지는 믿음은 불가능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생각하고 기도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인간적인 정욕을 위한 간구이므로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약 4:3). 그러므로 신자들은 기도할 때 무조건 간구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고 그분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해야 한다(마 6:33). 마 6장 자료노트 '구하기 전에 먼저 아시는 하나님' 참조.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 이 말을 서서 기도하는 것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는 유대인들의 기도하는 관습 가운데 하나인 서서 기도하는 것을 반영하는 것일 뿐 또 다른 기도의 관습인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께 간구할 때는 언제나'란 의미로 풀어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아무에게나 협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 티 에케테 카타티노스')는 조건을 나타내는 불변사 '에이'( )와 부정대명사 '티'( )와 속격 '티노스'( ), 그리고 '소유하다'는 의미의 '에케테'( )와 '~에 대해서'란 의미의 '카타( )가 합해져서 '만약 어떤 사람에 대하여 어떤 것을 가졌다면'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를 의역하면 ' 만약 타인에 대하여 불화나 다툼을 가졌거든'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도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앞절에서 교훈한 바대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아울러 반드시 용서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 용서에 대해서는 무척 강조하신 바 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할 것을 가르친 산상수훈(마 5:23,24)과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받기 위해서는 죄지은 자를 먼저 용서하라고 가르친 주기도문(마 6:15)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앞부분에 언급된 믿음과 더불어 용서는 응답받는 기도의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첫째는 기도가 인간의 분노 때문에 하나님께 도달하지 못하여서는 안 되며,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웃이나 형제와의 관계가 잘못되면 기도는 효과가 없으며 교회 공동체의 바른 유지를 위해서도 이 규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 -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이 부분에만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있어서 용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표현에 대해서는 마 6:9 주석을 참조하라.
11:26 이는 시내 사본(N), 바티칸 사본(B), 레기우스 사본(L), 프리얼 사본(W) 등 유력한 사본들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알렉산드리아 사본(A), 모스코 사본(K), 므니취 사본(X) 등에는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 하시리라'로 번역되는 마 6:15의 내용이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본문의 내용을 보강하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삽입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개역 성경과 같이 생략하는 것이 정당하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을 이 부분에 삽입한다 할지라도 본문의 흐름이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11:27-33 예수님의 권세에 관한 논쟁
고난 주간 가운데서 셋째 날(화요일)은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일을 하신 날이며 이 날 발생한 사건들을 공관복음서의 기록자들은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마가 역시 이미 앞 단락에서부터 시작되어 14:11까지 계속되는 고난 주간의 셋째 날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는 중에 특히 이 부분 이후부터 12장까지는 주로 예수의 대 적자들과의 논쟁을 기술하는 바 이 부분에서도 그 중의 하나를 다루고 있다.
특히 본문은 앞 단락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난 주간의 둘째 날(월요일)에 발생한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앞 단락의 기도에 대한 교훈이 그 전날에 행하여진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관련된 것이라면 본문의 내용은 성전 정화와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유대 종교의지도자들은 도대체 무슨 권세로 예수님께서 산헤드린이 허용한 성전 내에서의 제물 매매와 환전을 금하는지 추궁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들의 질문 속에는 일종의 함정이 숨겨져 있었는데,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대답하면 신성모독죄를 뒤집어씌울 작정이었고, 만약 그렇지 않고 예수님께서 스스로의 독자적인 권세로 성전 정화와 같은 엄청난 일을 행했다고 대답하면 감히 산헤드린의 권위를 무시하는 광신자로 몰아세워 처벌할 작정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신 채, 오히려 세례인 요한의 권세가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들에게 반문하심으로써 간단히 음모에서 벗어나셨다.
한편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적 지혜와 더불어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 해 함정을 파고 올무를 치는 자는 바로 자신이 거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욥 18:7,8; 시 37:12-15).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해 그럴 듯한 꾀를 꾸몄으나, 도리어 자신들이 진퇴양난에 처하고 말았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인 요한의 권세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반문하시자, 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대답하면 세례인 요한을 배척한 자신들의 불신앙이 문제될 수밖에 없었고, 세례인 요한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세례 요한을 참 선지자로 추앙하고 있던 군중들의 지탄을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예수의 권세는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신적 권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께서 이것을 명확하게 밝히시지 않으신 것은 대적자들이 이를 수용할 만한 마음의 자세가 되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이를 악용할 것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11:27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 예수께서는 일요일에(11절)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신 후 성전을 둘려 보셨고, 월요일(15절)에는 성전을 깨끗케 하신 데 이어 이제 다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계신데 이 날은 화요일 아침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아마 사람들이 많이 모이므로 교훈을 주시기에 적합한 왕의 행각 또는 솔로몬의 행각(요 10:23)에 계셨을 것이다.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 - '성전을 걸어 다니신다'는 표현은 본절밖에 없으며 병행구인 마 21:23과 눅 20:1에는 이때 예수께서는 무리를 가르치고 계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옮겨 다니시면서 적극적으로 백성을 가르치심으로 자신이 성전의 주인 되심을 드러내셨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전날 예수의 성전 청결 작업으로 크게 명예가 실추된 대적들이 다가 왔는데 이들이 예수께서 가르치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 대제사장이 직접 예수께 나아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이란 표현은 대제사장을 구심점으로 하는 '제사장의 무리들'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한편 이때 예수께 다가온 무리들은 유대 최고 의결 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인데, 산헤드린은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하므로 '대제사장들'이란 말을 앞세운 것이다. 한편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 가운데서도 사상적으로 투철한 무리로서 아마도 산헤드린에서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공적으로 파견되어 나왔던 것 같다.
11:28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사람들은 예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두 가지 질문을 하였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질문은 권위의 종류에 대한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전날(월요일)에 교권주의자들이 허용했던 성전에서의 제물 판매 행위를 정죄하고 상인들을 쫓아낸 바 있었다. 그리고 그 전날(일요일)에는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 입성을 감행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교권주의자들의 허위의식을 계속 공격하였으므로 대제사장을 비롯한 기득권자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거슬리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의 수장(首長)인 대제사장과 율법 전문가였던 서기관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예수의 권세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런 일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 앞선 질문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예수를 모함하기에 보다 용이한 성격을 지닌다. 즉 당시 교권주의자들에게는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가 최상이었는바 산헤드린과 뜻을 달리하는 예수님이 그 권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시 교권주의자들은 예수의 이러한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함으로써 예수를 하나님의 권위를 절하시키는 신성 모독죄로 고발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 같은 사악한 계획은 그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본체이심을 전혀 믿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에서 나온 계책이었다.
11:28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 예수께서는 대적들의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에 역으로 또 다른 질문을 하심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셨다. 이러한 한 질문에 대해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은 당시 유대 랍비들이 즐겨하던 대화법으로 최초의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질문을 통해 스스로 찾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예수에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자신들의 질문에 포함된 불순함을 자각하도록 유도하시는 것이다(막 10:2,3; 12:16).
11:30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예수의 이 질문은 단지 질문하는 자들의 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헤집고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즉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던(마 3:7-12) 세례인 요한을 심정적으로는 거부하였으나 민중들이 그를 선지자로 믿고 있었으므로 그의 선지자적 위치를 부정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못함으로 인해 민중들이 믿고 있던 바와 같이 세례인 요한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란 사실을 그들 역시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 됨으로써 결국 예수의 권위도 하나님에게 근거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하늘'이라 하는 것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명칭이다.
11:31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 예수의 예기치 못한 반문에 대하여 이들은 매우 당황하였으므로 서로 머리를 맞대어 묘책을 찾고자 하였다. 아마 이들은 이 난제를 풀기 위하여 예수가 있었던 그 자리를 떠나서 숙의(熟議)를 거듭하였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하려는 대답이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라든지 자기가 믿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인가에 대한 이기적인 것이므로 오랜 시간 의논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 세례 요한의 세례나 선지자로서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을 시인한다면 그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으며 반목하고 결국 그를 죽게 한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게 됨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11:32 백성을 무서워하는지라. - 이들은 예수의 반문에 대하여 첫 번째를 선택하면 스스로 자기의 죄악을 폭로함이 되고 두 번째를 선택하면 백성에게서 위험을 당하게 되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해졌다. 왜냐하면 당시 많은 무리들은 교권주의자들의 생동력 없는 가르침과 기득권을 이용한 횡포에 식상해 있었고 이러한 자들의 비리를 공격하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던 요한을 선지자라 인정하였고, 그 요한의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인정하였고, 그 요한의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진실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부인하는 대답은 백성들의 정치적 소요를 야기할 것으로 생각하며 매우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본서와 병행 구절인 눅 20:6에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칠 것이라'라고 표현하고 있음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11:33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 세례 요한의 권위의 출처에 대해 가부간(可否間)의 모든 대답이 올무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산헤드린의 파견자는 알지 못하겠다는 궁색한 답변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진리에 입각하지 못한 비겁한 태도이며, 동시에 영적 무지를 스스로 인정한 것이고, 처음에 예수에 대한 공격적 태도가 오히려 철저한 패배로 끝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나도… 이르지 아니하리라. -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 교권주의자들의 대답과는 달리 그리스도는 알고 있는 바를 대답치 아니하시겠다는 신적 권위에 입각한 대답을 하셨다. 이로써 교권주의자들은 그들이 생각해 낸 예수를 빠뜨리려 했던 절묘한 올무에 오히려 자신들이 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위험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며 이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더욱 악랄하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예수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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