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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세리장 삭개오의 회개와 열 므나 비유, 예루살렘 입성과 예루살렘 멸망의 애가 및 성전 숙정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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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그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기준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1-27절은 9:51에서부터 시작되어 온 갈릴리 사역 이후 그리고 고난주간 이전의, 즉 A.D. 29년 여름에서 A.D. 30년 초까지의 대략 6개월 남짓 사이에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수의 후기 사역 기사의 종결 부분이다. 한편 후반부 28-48절은 19:28-23:56에 이르는 예수의 공생애의 궁극적 목적인 구속사역의 최종 성취를 위한 십자가 수난이 있었던 A.D. 30년 봄의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을 전 ․ 후반부 구분없이 각 문단별로 나누어 그 의미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10절은 난장이요 부유한 세리장이었던 삭개오(Zacchaeus)가 예수를 만나 회개하는 유명한 사건의 기사이다. 이 사건은 먼저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우리 죄를 대신 감당하여 우리에게 구속을 주시고자 성육신(Incarnatron)하신 인자, 곧 죄로부터 유일하게 순결하시면서도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러 오신 인자이신 예수와 죄로부터 오염되어 불완전한 우리 인간의 진지하고 순수한 만남은 곧 그 더러워진 인간의 자아발견과 회개(repentance)를 동반함을 보여 준다. 또한 이 사건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여 회개한 자는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회복함은 물론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도 회복하여 결국 주님을 통한 인간의 회복은 그저 지식과 이론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 실천적 회복임을 보여 준다.
11-27절은 주께서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당신의 사후(死後) 그리고 세상 종말 이전까지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의 삶의 자세를 교훈하기 위하여 주신 열 므나의 비유이다. 즉 이제 곧 있을 주의 십자가 수난으로 죄인의 구원을 위한 법적 근거인 구속사역은 성취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최종 실현인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오고 오는 택한 자의 충만한 수가 다 회개하여 구속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 때까지, 구속사(救贖史)가 충분히 전개된 후에 세상의 종말을 통해 비로소 도래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던 당시의 일부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이 바로 이 열 므나의 비유인 것이다. 이 비유는 종말(終末)을 전제했을 때 종말로 가는 구속사적 중간기의 제자들의 삶의 자세를 교훈한다는 전체적 입장에서는 마 25:14-30절의 달란트의 비유와 유사하다. 그러나 달란트의 비유가 성도 각자에게는 각각 능력과 소명의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 충성하는 자세 자체를 주께서 요구하시며 그에 따라 동일한 상급(reward) 곧 동일한 구원이 주어질 것임을 강조하였던 반면, 본 열 므나의 비유는 종말이 닥치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회가 주어질 텐데 그 기회를 선용한 결과에 따라 상급도 차이 있게 주어질 것임을 교훈하고 있다. 따라서 달란트의 비유와 본 열 므나의 비유를 종합하면 종말을 향하여 구속사가 진행되고 있는 현재 우리 모두에게 주의 구속사역에 동참할 동일한 시간과 기회가 주어져 있기도 하고 또 각자 맡은 바 소명과 능력의 차이가 있기도 하므로 각자는 자신의 직분과 처소에 따라 최선 최대의 충성을 다하면 주님으로부터 크게는 그 충성하는 자세 자체로 인하여 큰 상 곧 구원을 함께 보답 받으며 작게는 그 공적의 차이에 따라 크고 작은 상급(reward)을 얻을 것이라는 구속사적 구원과 상급의 원리를 깨닫는다.
28-40절의 예수님의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 사건은 그야말로 구속사 그 자체를 응축적으로 보여 주는 대사건이었다. 먼저 이 사건은 지금껏 천국 복음의 전파와 자신의 사후 당신의 몸된 교회를 설립 유지할 제자들의 훈련을 위한 충분한 시간 확보를 위하여 자신을 되도록 감추셨던 것과 달리 비로소 자신은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신 메시야(the Messiah )요 구속주(救贖主)이심을 이제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건이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예수는 전 민중이 환호하는 가운데서도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자신은 승리의 왕인 동시에 평강의 왕이요, 자유를 주시는 겸손한 왕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둘째 이 사건은 그것으로 종결이 아니라 바로 지금까지 주께서 수행하셨던 공생애(共生涯)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구속사역(救贖事役)을 닷새 후에 성취하시기 위하여. 즉 십자가 수난을 당하사 아담의 범죄 이후 발생한 구속의 원리와 법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사건이었다. 이 예루살렘 입성사건 당시에는 예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이러한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앞서 네 차례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바대로 예수께서는 심지어 지금 환호하는 민중이 곧 변하여 자신을 못 박을 것을 요구하는 자들이 될 것조차 다 내다보고 계셨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이를 피하지 않으시고 이제 그 죄인의 구속에 요구되는 죄 값으로 당신의 피를 흘리시고자 입성하셨던 것이다. 실로 이를 깨닫고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환히 웃으시며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구속의 은혜와 공로에 새삼 감동하게 된다. 또한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여 예수를 그저 빵이나 세금 문제를 해결할 정치 지도자로 착각하다가 나중에는 주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그 당시의 민중들처럼 큰 범죄에 동참하는 어리석음과 악함을 버려야 하겠다.
한편 이 사건은 세상 끝 날에 전 우주의 심판자(審判者)로 이 땅에 강림하실 예수의 재림 사건의 전 단계요, 또한 예표였다. 이 입성 사건은 일단 구속의 원리와 법을 성취하고자 하신 것 뿐이 었으나 훗날 재림 시에는 당신의 구속사역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을, 끝내 거부하는 자에게는 그 자의 죄대로 심판을 주실 것이다. 라라서 우리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救贖史的 觀點)에서 개관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주님의 사랑과 심판의 경초를 동시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41-44절은 갓 입성하신 예수께서 주신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적 애가(lamentation)이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미구에 닥칠 A.D. 70년의 로마군의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예언적 애가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약의 성취로서 오사 새 언약 곧 신약을 주시는 당신의 실체를 못 알아보는 선민 이스라엘, 나아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불신자들이 끝내 당신의 복음을 거절하다 멸망할 것을 애통해 하신 것이었다. 멸망하는 죄인들을 향한 주님의 진한 구속사적 애정이 스며있는 애가의 한 구절, 한 구절이 가슴에 다가오는 듯하다.
45-48절은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의 제 2일인 월요일에 있었던 성전 숙정 사건이다. 여호와의 인재 또는 여호와께서 임재하신 처소를 상징하는 성전(聖殿)을 주께서 정화하신 사건은 1차적으로는 참다운 신앙의 회복을,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사역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던 죄가 척결되어 바른 관계가 정립될 것을 상징한다 하겠다. 주님의 입성이 자유와 해방을 위한 평화의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준다면 성전 정화 사건은 사탄(the Satan)의 무리를 내쫓고 이기시는 심판과 승리의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겠다.
외울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세리장 삭개오의 회개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 이 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열 므나의 비유
11 ○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 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28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1 만일 누가 너희 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 에 저희 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의 애가
41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의 성전 숙정
45 ○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
4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본문 & 자료노트
삽화-19:4 뽕나무 가지
본문에 나타난 뽕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한 무화과(sycamore)이다.
보감-19:2-10 삭개오의 구원을 통한 교훈
예수 시대 당시 세리들은 동족으로부터 과다한 세금을 징수해 로마에 바치고 또 그 중간에 서 횡령을 일삼아 동족에게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삭개오늘 이런 세리들의 우두머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향한 열정으로 구원받고 주님께 인정된 자가 되었다. 이는 영적으로 비록 현재 죄에 몸담고 있을지라도 진리를 갈구하는 심령으로 주를 찾을 때 주께서는 반드시 구원을 베푸심을 보여 준다. 이제 다음에서 삭개오가 구원받는 과정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도록 하자.
구 원 이 전 | 세리장이였음(2절) |
부자였음(2절) | |
키가 작았음(3절) | |
작은 키로 난관에 처함(3절) | |
예수를 보러 뽕나무위로 오름(4절) | |
구 원 과 정 |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당함(7절) |
예수가 그를 보심(5절) | |
예수가 그의 집에서 유하심(5,7절) | |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6절) | |
구 원 받은 후 | 소유의 전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 놓기로 결심함(8절) |
남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고 결심함(8절) | |
영적 선민으로서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9절) | |
교 훈 | 하나님의 구원은 신분, 혈통의 차별 없이 주어짐(롬 3:22) |
주를 간절히 찾는 자가 만나게 됨(사 55:6) | |
주를 만날 때 죄의 길에서 돌이켜 의의 길로 가게 됨(롬 6:12-14) | |
주 안에 있을 때 선한 열매를 맺게 됨(요 15:4) |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가 구원받음(마 3:8) |
주요 주제-19:10 인자의 이해
눅 12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19:11-27 예수의 비유의 이해
마 13장 연구 자료 참조
도표- 19:11-27 '므나 비유'와 '달란트 비유'의 비교
이 두 비유는 예수의 재림, 곧 종말을 맞는 성도의 자세에 관매 교훈하고 있다. 여기서 므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충성된 자가 받을 친국의 기업에 대해 달란트 비유는 각자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충성된 자들이 받을 구원과 하나님의 칭찬에 대해 보여 주고 있다. 이제 두 비유의 세부 내용을 비교해 봄으로써 다시 한 번 말세지말(末世之末)을 사는 우리의 신앙자세를 가다듬는 계기로 삼자.
므나 비유(눅 19:11-27) | 달란트 비유(마 25:14-30) | |
청중 | 무리들(11절) | 제자들(24:7) |
목적 | 하나님나라 설명(11절) | 각자의 재능을 선용케 함(25:15) |
장소 | 여리고(1절) | 예루살렘(24:3) |
시기 | 고난주간 직전(11절) | 고난주간 중 화요일 |
비유의 '주인' | 왕위를 받으러간 귀인(12절) | 어떤 단순한 부자(25:14) |
종의 숫자 | 10명(13절) | 3명(25:15) |
화폐 단위 | 므나(13절) | 달란트(25:15) |
맡긴 액수 | 10명에게 공평히 1므나씩(13절) | 3명에게 각각 5,2,1달란트씩 (25:15) |
남긴 액수 | 10,5,1므나(16-27절) | 5,2,1달란트(25:16-18) |
착한 종의 상급 | 10,5 고을의 권세를 줌(17-19절) | 더 많은 것을 맡김(25:21-23) |
게으른 종의 행위 | 돈을 수건으로 싸둠(20절) | 돈을 땅에 묻음(25:18) |
게으른 종의 형벌 | 받은 1므나를 빼앗김(24절) | 남은 1달란트를 뺏기고 어두운 데로 쫓겨남(25:30) |
보감-19:28-40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목적
마 21장 자료 노트 참조
역사배경-19:2-8 팔레스틴의 세리직
본문에는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를 영접하게 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삭개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죄인 시 되며 버림받아 왔다. 여기에는 세리직에 대한 유대인들의 멸시 감정이 바탕 되어졌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팔레스틴 지역에 대한 식민통치를 실시한 로마제국의 세금 정책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세리가 죄인으로 취급받게 되기까지 팔레스틴에서의 세리라는 직업과 유대인들의 세금과 세금 징수에 대한 자세 등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하겠다.
1. 로마의 세금 정책
많은 점령 시를 쉽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점령지의 상황에 맞게 그곳의 지방 자치 정부를 허용하였던 로마 제국은 예루살렘과 유대 온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총독 뿐만 아니라 상업적, 지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 세관을 두고 로마의 행정 관리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세관원들로 하여금 로마 정부가 요구하는 세금, 곧 인두세(人頭稅)와 지세(地稅) 같은 세금을 정기적으로 징수해야 할 직접적인 책임을 맡게 하였다.
그런데 이들 로마 관리들은 육로나 해상으로 수송하는 재산(노예 포함)에 대한 통행세 징수는 일부 청부업자들에게 하청을 주었다. 이 청부업자들은 일정한 지역에서 통행세를 징수하는 조건으로 약정된 금액을 미리 세관에 지불했고, 통행세 징수를 통해 자기의 이익을 남겨 재산을 모았다. 이런 청부업자들은 때로 로마인이기도 했으나 유대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한편 로마 관리들은 이방인에 대해서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 관리들과 세금 청부인들은 실제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 많은 유대 하수인들을 고용하였다.
2. 세리와 유대인의 적대감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직업인 팔레스틴의 세리는 정복자에 의해 강제로 징수되는 온갖 종류의 납세로 인해 고통을 당하던 유대인들에게 큰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요인을 들 수 있다. 먼저 유대인들은 본래 세금 자체를 공공의 과세로서가 아닌,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는 일종의 범죄로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납세에 대한 기피증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금 징수가 그들의 정복자인 로마 정부를 돕는 데 불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 통치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지 않았던 유대들은 이 세리들이 로마인과 자주 교류하며, 또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동족을 착취한다 하여 로마 세관의 유대인 세리들을 매국노나 변절자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보수를 위해 이 일에 종사하는 유대인들은 압제자의 강탈행위와 백성들의 비난으로 이 중의로 천시 받고 멸시를 받았다. 그러다보니 자연 세리들은 자기 백성들에게 벌금을 책정하여, 아무 거리낌 없이 악랄한 수법으로 이를 징수했으며, 또 일정한 세금 액을 세관에 바친 후 그 이상 과다하게 징수한 것은 자신이 착복(着服)하는 횡포를 부렸다.
이로 인해 세리에 대한 원성이 더 높아졌고, 그래서 유대사회에서 세리들은 창기와 마찬가지로 도덕성을 무시한 극악무도한 범죄자요 천민으로 분류되었다. 또 세리들은 그 가족들은 유대인들의 자치적인 직무를 담당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심지어 유대인의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3. 교훈
복음은 성경시대 당시 통상 강탈자요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에게도 예수께서 새로운 소망과 구원을 주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경멸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나타나기를 꺼려하지 않으셨고(마 11:19; 눅 7:34; 15:1), 또 본문에 기록된 대로 세금 긁어내기로 동족들에게 악명 높았던 세리장 삭개오에게도 관심을 보이셨고 구원을 선포하셨다. 이같이 예수께서는 혈통과 신분의 구별 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구원의 은혜와 새로운 소망을 주러 오셨다.
원어연구 -19:44, 권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에피스코페이며 이 단어는 특정한 자격에 해당하는 사람을 '택하다'(행 6:3), 병든 자나 죄인을 '돌아보다'(마 25:36; 눅 1:68), '방문하다'(행 15:36), 임하다'(눅 1:78) 등의 뜻을 지닌 동사 '에피스켑토마이'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그 의미는 본절의 '권고' 외에도 '감독의 직분'(행 1:20; 딤전 3:1)을 뜻한다.
이로 보건대 본절의 '에피스코페'의 원래 의미는 '감독으로 뽑힌 자가 특정 지역에 있는 병든 자나 죄인 따위를 돌아보기 위해 방문하여 권고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에피스켑토마이'는 전치사 '에피'와 '스켑토마이'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에피'는 ~위에'(on)을 뜻하며 '스켑토마이' 는 '웅시하다'(peer about)라는 뜻을 지닌 동사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위에서 살피다'라는 것이 된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존재가 위에서 살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에피스코페'는 본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택한 백성틀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을 돌아보시고 구원하기 위해 방문하신 것을 뜻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번역으로서 '권고'를 공통번역은 '구원'으로. NIV는 '하나님의 오심'(GODs Coming)으로, KJV와 RSV는 '방문'(visitation)으로 각각 옮기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부패한 예루살렘, 곧 구약 선민인 유대인들이 자신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 민족 가운데 택한 자들까지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 초림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방문'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배척하여 십자가 죽음으로까지 몰아간 것과 아울러 이로 인하여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된 그들의 비참한 운명을 예수께서 내다보시고 탄식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주요 주제-19:1-10 성전 숙정 운동
왕하 12장 자료 노트 참조
19:1-10 삭개오의 구원
수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다가 여리고 가까이 와서 한 소경을 치유하신 사건을 다룬 앞장 마지막 단락(눅 18:35-43)에 이어 본문은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일어난 사건, 즉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의 회심과 구원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오직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으로 앞선 한 소경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본서의 중심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을 보여 준다. 즉, 소경이며 거지였던 한 가난한 사람과 동족으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장인 한 부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과 사랑이 잘 드러나 있다.
본문의 구성은 세 부분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는 삭개고의 열심있는 믿음이다(1-4절).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는 그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예수님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당시 세리는 세금을 징수하는 직업으로 그들은 백성을 착취하여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여 일부는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소유하여 대체로 부요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삭개오도 세리장으로서 그런 착취 행위로 부요하게 된 것 같다(8절). 그래서 그는 부요한 가운데서도 마음에 만족이 없이 항상 불안과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신체적 장애에 부딪쳐 잠시 좌절되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으며 구원의 은혜를 입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삭개오의 영접이다(5,6절), 삭개오의 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를 찾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당신의 사역을 보여 주신다. 셋째는 삭개오의 진정한 회심이다(7-10절). 예수님을 영접하여 자기 집으로 모신 삭개오는 예수께서 아무런 요구도 하시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도적질로 간주하고 그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 회개의 진정한 표시로 재산을 포기하는 결단을 하였다. 실로 회개는 억지로 강압에 못 이겨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발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삭개오는 진정한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고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 되었다(9절). 여기에서의 아브라함의 자손은 당시 유대인들의 주장과 같이 혈통적 폐쇄성이나 율법에 대한 교리적인 집착이 아니라 오히려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을 가지고 선한 의를 베푸는 자를 의미하여 삭개오가 이전의 소외된 죄인의 상태가 아닌 당당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낸다. 즉, 삭개오는 이미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지만 이제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실천하여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해결점을 예수님에게서 찾으려는 자에게 예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점이다(시 34: 10; 잠 8:17). 따라서 삶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나의 능력과 지혜로 해결하려하기 보다는 먼저 예수님께로 나아가 내어놓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② 예수님 자신의 능력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나 행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예수님의 선포에 의해 이루어졌듯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③ 참된 회개자들은 삭개오처럼 반드시 그 증거를 나타내게 된다는 점이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써 의지적인 삶의 결단을 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참된 의의 열매를 맺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마 7:15-21).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 예수님 당시 여리고는 이스라엘에서 상당히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는데, 종려나무들이 많다 하여 일명 '종려나무의 성'이라고 불리워졌다. 여리고에 대해서는 마 20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지나가시더라'(디에르케토)는 말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통하여 지나가셨다'는 뜻으로서, 이는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만나기 전까지는 여리고에 머물 계획이 없으셨다는 것을 시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Morris).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 '삭개오'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명칭으로 '순전하다' 또는 '정의롭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삭개오가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당시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던 유대인들은 삭개오와 같은 세리들을 민족과 나라를 팔아먹는 반역자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매우 멸시하였다. 마 9:10 주석 참조.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 여기서 '세리장'(아르키텔로네스)이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것으로서, 이 직책은 다른 세리들을 관리하거나 혹은 그들이 거두워들인 세금을 로마 정부에 직접 상납하는 역할을 담당하던 위치였다. 특히 그 당시 여리고는 가이사랴 및 가버나움과 더불어 팔레스틴 지역에 위치한 3대 상업 중심지였기 때문에 당연히 세무 업무의 역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온갖 종류의 향료의 집산지로 알려졌던 여리고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모여든 많은 이방인들의 상거래로 항상 붐비는 도시였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번성한 도시였던 여리고에서 세리장이란 직책을 갖고 있던 삭개오가 많은 재산을 소유한 부자였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치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팔레스틴의 세리직'을 보다 참조하라.
19: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 이 말씀은 삭개오 또한 앞장에서 살펴보았던 소경과 같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여기서 '보고자 하되'(에제테이 이데인)라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그가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보기 위해 애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표현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삭개오의 태도가 단순한 호기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 '키가 작다'란 말은 삭개오의 신체적 특징을 잘 설명하고 있는 표현으로, 여기서 '키'라고 번역된 헬라어 '헬리키아'( )는 일반적으로 신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나이'라고도 번역되는 말이다(히 11:11). 그리고 '사람이 많다'란 표현은 여리고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매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흔히 발생하는 일반적인 일이었다(마 4:25; 14:14; 막 2:4; 요 6:5).
19: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지나가시게 됨이러라. - 이 말씀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삭개오의 적극적인 행동을 잘 묘사하고 있는 말씀이다. 사실 다른 사람에 비해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예수님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본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에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이 때야 말로 예수님을 직접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을 알았던 삭개오는 결국 궁리 끝에 길가에 있던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기로 결심했다. 뽕나무에 올라가니. - 여기서 '뽕나무'(쉬코모레안)는 구체적으로 무화과를 가리키는 헬라어 '쉬콘'과 뽕나무를 가리키는 '모론'이라는 말의 합성어로서, 이는 일명 '무화과뽕나무' 또는 '애굽 무화과나무'라고도 불리워진다. 그 이유는 이 나무의 열매는 무화과 같지만 그 잎은 나무 잎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물학상으로 분류하자면 이 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한 무화과나무로 그 당시 요단강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으며, 일반적인 뽕나무와는 전혀 다른 나무이다. 한편 이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는 무화과와 비교할 때. 그 질이 떨어지지만 때로는 가난한 사람들의 중요한 식량이 되었다. 그런데 이 나무는 가지를 낮게 뻗치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 나무에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19: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 삭개오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예수님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놀라운 일이 그에게 발생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삭개오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예수님께서 직접 삭개오를 부르시며 그의 집에서 유하고 가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삭개오가 매우 적극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을 보려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개인적인 만남을 미리 준비한 사람은 삭개오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Hendriksen). 한편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초대를 받지 않았는데 먼저 손님으로 그 집을 찾아가시겠다는 유일한 경우로서, 이는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이 매우 지극한 것이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뽕나무 위에 있던 삭개오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지만 우리는 이것이 예수님의 전지성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어야 할 것이다(Ryle).
19: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 이 말씀이 묘사하고 있는 삭개오의 행동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기쁨과 아울러 지금까지 그를 냉대하여 가까이 하기조차 꺼려했던 많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당시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던 예수님께서 감히 자기 집에서 유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시자, 그의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에 가득차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급히 내려오다', '즐거워하다', '영집하다'고 한 삭개오의 행동에 대한 연속적인 표현은 구세주를 만난 인간의 심정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삭개오만큼 기뻐한 사람이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들어갔도다 하더라. -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기쁨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이 단순히 예수님께서 그들이 멸시하던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비판했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패역하고 완악한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뭇 사람'이란 구체적으로 시종 일관 예수님의 행동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던 바리새인들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한편 '수근거려'(디에공귀존)라는 말은 흔히 비둘기나 별들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묘사하는 표현인데, 미완료형으로 사용된 이 단어는 바리새인과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감히 삭개오의 집 안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그 집 바깥에서 계속 웅성거리면서 예수님 을 비난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Robertson). 또한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는 그들의 말 가운데는 평상시 삭개오에 대한 그들의 좋지 않은 감정과 아울러 삭개오의 집에 들어간 예수님도 삭개오와 같이 죄인의 한 무리로 여기고 싶어 하는 그들의 악한 의도가 다분히 전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8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 예수님에게 자기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자원하는 삭개오의 모습은 얼마 전에 자기의 완전한 율법적 생활을 내세우며 영생을 얻고자 하여 예수님을 찾아 왔던 부자 관원이 그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결국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간 것(눅 18:22,23)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삭개오는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경멸하던 세리였지만 이것을 스스로 자원한 반면,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그 관원은 예수님께서 이것을 명하여도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할 때 결국 믿음은 사회적 지위에 따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소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의 변화된 모습이 그의 행동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범했던 잘못에 대한 회개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데 여기서 '토색하다'(쉬코판테인)는 말은 구체적으로 법을 남용한 강탈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는 삭개오가 세리장이란 직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러 차례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방법으로 세금을 갈취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한편 '사 배나 갚겠나이다'는 삭개오의 고백은 그의 회개가 매우 철저한 것임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도적질한 것을 고백하면 그는 원주인에게 불법적으로 취한 그 액수에 다 1/5을 더 하여 보강하였지만(민 5:7), 2배 내지는 4배로 갚는다는 것은 도적질한 것이 탄로 고 여러 사람 앞에서 도둑으로 인정되었을 때 취하는 행동이었다(출 22:1,4). 따라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면서도 4배로 갚겠다고 말한 삭개오의 행동은 율법에 개의치 않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를 철저히 뉘우치는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9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 여기서 '집'이란 상징적으로 삭개오의 가정을 가리키는 표현인데, 구원의 문제가 개인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았으므로 곧 그 온 가족이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또한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구원 선포가 '오늘'이라는 시점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함과 동시에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에 게 구원은 즉각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이 말씀은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죄 가운데 거하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이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구원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말이다.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 - 이 말씀을 통해 삭개오가 예수님을 먼저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로서 죄 가운데 거하며 고통 받고 있던 삭개오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말하면서 삭개오의 집 밖에서 예수님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답변이기도 했다. 또한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의 삭개오의 변화된 모습은, 눅 15장에서 이미 잘 나타나 있듯이 선한 목자로서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결과를 충분히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19:11-27 므나의 비유
앞 단락(1-10절)의 삭개오에 대한 기사와 함께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는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교훈하신 종말론적 비유이다. 당시 예수를 좇던 무리들이나 제자들조차 메시야는 정치적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고 생각하였고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게 되자 하나님의 나라가 금방 임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올 어떤 귀인의 비유를 통하여 이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신다. 즉 예수는 지금 오시는 중이 아니라 가시는 증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먼 나라로부터 돌아오실 때, 즉 승천하셨다가 재림하실 때에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선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드러내실 것이다. 그때는 또한 심판과 상급의 때가 될 것이다. 귀인이 먼 나라로 가기에 앞서 종들을 불러 은 한 므나씩을 주며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고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결산하였던 것처럼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 돈의 받은바 은혜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고 주의 사업을 확장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제자들도 귀인이 없는 동안의 종들처럼 인내와 충성의 신앙으로 예수께서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선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칭찬받는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다.
마태도 이와 비슷한 달란트 비유(눅 25:14~37)를 기록하고 있는데 들 다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성도의 자세에 관하여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점을 보인다. 두 비유에 대한 비교는 해당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취지에 있어서도 달란트 비유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것이고, 므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오해하고 있는 것을 시정하며 충성스럽게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릴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두 비유는 비슷하나 다른 경우에 다른 목적으로 반복하신 것이다.
더욱이 이 므나 비유에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담겨 있다. 당시 헤롯 대왕(Herod. B.C.37-4년)은 유대 왕국을 세 아들 안디바(Antipas)와 빌립(Philip)과 아켈라오(Archelaus)에게 분할해서 넘겨주었는데. 그 가운데 아켈라오는 헤롯 대왕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황제의 인준을 얻을 목적으로 로마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켈라오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따로 50명의 사절단을 구성하여 로마로 파송하였다. 결국 로마 황제는 아켈라오에게 왕의 권한까지 주지는 않았지만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 권한을 인정해 주어 유대인들의 시도는 실패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을 모함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게함으로써 구속사역에 실패를 가져오게 하고자 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을 묘사하신 것이다(14,27절). 따라서 이 비유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인상깊게 남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수난과 죽음을 당할 것이나 부활, 승천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셔서 충성하는 자와 배척하는 자에게 합당한 보상과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둘째, 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배척하는 자들과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된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이 금방 임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임할 것이므로 세상에서 오직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야 함을 알게 된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인해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므로 장차 완성될 주님의 나라에서 칭찬받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마 6:10,33; 살후 1:5).
19:11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 흔히 본절에서부터 27절까지는 '므나의 비유'라고 불리워지는 부분으로, 이 비유는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구원 선포가 있을 때 주위에 있던 무리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일반적으로 마 25:4-30에 나타난 '달란트 비유'와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므나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가 같은 비유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주석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다. 대체로 다른 것으로 보며(Alford, Bruce, Plummer)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고려하여 그 분량을 달리해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었지만, 므나의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에게 므나를 똑같이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둘째, 상급에 있어 달란트 비유는 주인의 뜻을 잘 이행한 종들에게 같은 보장을 했지만, 므나의 비유에서는 그 결과에 따라 다르게 보상했다는 것이다. 셋째,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의 명을 거역한 종을 무서운 형벌로 다스린 반면, 므나의 비유는 단지 주어진 므나를 회수만 했다. 그리고 므나의 비유에서는 반역자에 대한 주인의 진노가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달란 비유는 주인이 단순히 얼마 동안 여행했으나, 므나 비유에서는 귀인이 왕위를 얻기 위해 떠났다. 결국 두 비유에 나타난 이와 같은 내용의 차이는 두 비유가 같은 비유가 아니고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행해진 비유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달란트 비유는 충성된 생활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말씀이지만, 므나의 비유는 본절에서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오해를 시정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권면인 것이다.
19:12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 이 말씀에서 '귀인'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또한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간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다 받으신 후에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하나님의 왕권을 가지고 이 우주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절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의 왕권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은 당시 로마 제국 하에서 왕족으로 태어난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자기가 살던 곳에서 로마로 갔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이와 같은 사회적 배경들을 충분히 인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비유의 실제적 의미를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한 의도를 갖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Hendriksen, Ryle).
19:13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장사하라. - 주인이 종들에게 열 므나를 나누어 주며 자기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한 말 속에는 주인이 왕위를 받아오기까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므나'는 당시 유대인들이 통용하던 화폐로서 한 므나의 가치는 일반 노동자들의 3개월 정도의 품삯으로, 이는 로마 화폐로 약 100데나리온에 해당한다(제 1권 성경 총론, '성경 도량형 환산표' 참조). 한편 이 비유에서 주인이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할 때 주인에게 므나를 받은 종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제자는 그 시대 속에서 예수님을 좇았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종들에게 주어진 므나는 단순히 개인의 재능을 나타내기 보다는 그들 모두에게 맡겨진 사명, 즉 그리스도의 일꾼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의 사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9:14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 - 전반적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행적을 비난하고 예수님을 모함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게 하기 위하여 온갖 술수를 꾸며냈던 유대인들, 특히 그 가운데서 도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이 말씀은 당시 헤롯의 아들이었던 아켈라오가 헤롯이 죽자 그의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로마로 갔을 때, 유대인들이 모의하여 50인의 대표를 로마로 보내어 아켈라오의 포악성을 이유로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한 역사적 사실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 결과 왕위를 받지 못하고 단지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분봉 왕이 되어 이스라엘로 들아 온 아켈라오는 그 보복 조치로 모의에 가담했던 유대인 8,000명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말았다(Josephus).
19:15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저희를 부르니. - 여기서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는 말은 예수님의 영광적 재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갖고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온 주인이 종들을 불러 그들에게 주어진 므나를 회계하는 것은 맡겨진 사명에 대한 종들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일꾼들에게 맡기신 사명, 즉 복음 전파와 아울러 그에 따라 맡겨진 봉사의 직무를 어떻게 감당했는지에 대해서 반드시 회계하시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맡겨진 사명 수행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주님을 맞아야 할 것이다.
19:16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 여기서 '주의 한 므나'(헤 므나 수)란 말의 정확한 번역은 '당신의 므나'란 뜻으로서, 이는 자기에게 맡겨진 므나는 어디까지나 주인의 것이기 때문에 비록 자기가 열 므나의 이익을 남겼다해도 그것은 주인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종의 겸손한 태도이다. 또한 '남겼나이다'(프로세르가사토)라는 말은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 만 나오는 단어인데, 이 말은 '추가하여 남기다'는 뜻으로서 자기가 이익을 남기게 된 것이 주인이 맡긴 므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종의 고백에는 자신의 노력을 숨기는 겸손한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이 지녀야 할 바른 모습을 깨닫게 된다.
19: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 충성스럽게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한 종에게 주인은 칭찬과 더불어 그가 노력한 것에 합당한 보상을 하고 있다. 특히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심판 때에 행위에 의해서 상급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또한 성도의 충성스러운 생활을 격려하는 권면의 말씀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네가 권세를 차지하라'(이스디 엨수시안 에콘)는 말은 단순한 현재적인 명령이 아니라 '앞으로 네가 계속해서 권세를 차지할 것이다'는 미래적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충성된 일꾼이 누릴 영원한 기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 사실 화폐 가치로 계산할 때. 므나는 달란트(약 6,000데나리온)에 비해 현격히 차이가 나는 액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에서 종이 받았던 한 므나가 매우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주인이 이러한 칭찬을 했다는 일부 주석가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주인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에게 본절과 똑같은 칭찬을 하였으며, 아울러 당시 한 므나는 결코 작은 액수의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종이 받았던 므나의 가치가 매우 적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한 종의 행동을 부각시키는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19:18,19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 본절은 '므나의 비유'가 '달란트 비유'와 상이한 목적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비유라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는 실례이다. 그 이유는 '달란트 비유'에서 두 번째 종은 첫 번째 종에 비해서 이익을 적게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보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두 종은 서로 다르게 달란트를 받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반면에 '므나의 비유'에서 두 번째 종이 첫 번째 종과 보상이 다른 것은 두 종은 처음부터 주인에게 한 므나씩 공평하게 분배받았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종에 대한 주인의 보상은 그들의 노력의 결과에 비례하여 주어진 것으로서 이는 매우 공정한 처사라 할 수 있다. 한편 두 번째 종이 첫 번째 종보다는 적은 이익을 남겼지만 주인은 두 번째 종을 책망하지 않고 그에게 칭찬과 함께 그것에 합당한 보상을 하고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상급은 결과에 따라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기를 힘쓰는 성도에게도 주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9:20,21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과는 달리 주인이 자기에게 맡긴 사명을 감당치 않았던 이 종은 매우 현란하고 가식적인 말로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숨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맡겨진 므나를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은 자기가 주인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기의 게으름을 뉘우치기 보다는 도리어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맡긴 므나를 갖고 열심히 장사하여 열 므나와 다섯 므나의 이익을 남겼던 종들은 주인에게 겸손한 자세로 단순히 그 결과만을 보고했지만, 맡겨진 므나를 가지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던 종은 주인에게 갖은 핑계와 변명으로 자기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결국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의 일꾼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묵묵히 겸손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사람이지 결코 쓸데없는 말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내세우거나 가장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훈 받게 된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 주인이 맡긴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었다고 말하는 종의 모습에는 다분히 자기가 므나를 탕진하지 않고 또한 부주의하게 보관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자랑하는 의도가 함축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의 말 속에는 주인이 떠날 때 므나를 맡기면서 장사하라고 명한 사실은 기억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아무리 이유가 많더라도 종으로서 주인이 맡긴 사명을 전혀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라도 주인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 이 말은 흔히 욕심이 많아 부당한 이익을 가로채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속담적 표현이다(Robertson). 즉 이 종은 주인이 자기에게 맡긴 므나를 가지고 자기가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면 주인이 그 이익을 가로챌 것이요. 만일 장사하다 손해가 나면 그 손해를 배상시킬 것이 걱정되어서 자기로서는 맡겨진 므나를 갖고 있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의 말은 주인의 성품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망언이었다. 그 이유는 만약 종의 말이 사실이라면 주인은 앞서 두 종이 남긴 이익을 가로챘어야 할 것이지만 도리어 주인은 그들이 남긴 이익에 합당한 것으로 충분히 보상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의 이러한 말은 결국 자신의 게으름을 숨기기 위해 꾸며낸 말에 불과하다.
19:22,23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 주인이 맡긴 므나로 아무런 이익도 남기지 않았던 종이 비록 주인에게 갖은 핑계와 변명을 하였다 해도 주인의 책망을 모면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주인의 책망을 피하기 위해 그가 꾸며냈던 말들은 주인의 진노를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라는 말의 정확한 표현은 '네 말이 너 자신을 정죄한다'는 말로서. 이는 주인이 자기의 불순종함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종의 악한 의도를 직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변리'(토코)라는 말은 헬라어로 '열매를 맺다'는 단어인 '티크토'( )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는 고리대금을 통한 폭리나 불법적인 이자가 아니라 정당하고 합법적인 이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로 볼 때 결국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종이 둘러댔던 핑계와 변명은 도리어 자신의 패역함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그는 주인에게서 더욱 심한 저주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 여기서 '곁에 섰는 자'가 구체적으로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온 주인의 신하, 즉 왕의 신하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 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재림하실 예수님은 수많은 천사와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호위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종이 달란트 비유에서의 악한 종처럼 무서운 형벌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 때, 상급에 대한 심판이나 형벌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주인이 맡긴 사명을 감당치 않았던 종에게 '악한 종'이라는 주인의 저주와 함께 맡겨진 므나 마저도 빼앗긴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서 그것 또한 하나의 형벌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으른 종이 가졌던 므나가 가장 열심히 주인의 명령을 수행한 종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은 성도의 충성스러운 생활을 더욱 권면하는 말씀이라 하겠다.
19: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 여기서 '곁에 섰는 자'가 구체적으로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온 주인의 신하, 즉 왕의 신하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재림하실 예수님은 수많은 천사와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호위를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종이 달란트 비유에서의 악한 종처럼 무서운 형벌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의 재림 때, 상급에 대한 심판이나 형벌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주인이 맡긴 사명을 감당치 않았던 종에게 '악한 종'이라는 주인의 저주와 함께 맡겨진 므나 마저도 빼앗긴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서 그것 또한 하나의 형벌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으른 종이 가졌던 므나가 가장 열심히 주인의 명령을 수행한 종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은 성도의 충성스러운 생활을 더욱 권면하는 말씀이라 하겠다.
19:25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 이 말씀에서 '저희'에 대한 해석을 놓고 크게 두 가지 주장이 대두된다. 그 하나는 여기서 '저희'는 단지 비유 가운데서 왕과 대화를 하고 있는 신하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Hendriksen, Cobbin). 다른 하나는 여기서 '저희'는 예수님의 비유를 열심히 듣고 있던 청중들로서, 그들이 게으른 종이 갖고 있던 므나가 열 므나를 갖고 있던 종에게 주어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유를 잠시 중단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저희가 가로되'(카이 에이판 아우토)라는 말은 흔히 삽입적인 표현으로서, 이는 비유의 내용을 전환시키는 어법이라는 견해이다(Robertson, Ryle). 그러나 이 두 견해 가운데 어느견해를 취해도 본 비유를 말씀하신 취지에는 변함이 없다.
19:26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 이 말씀은 므나 비유에 대한 결론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상급에 관한 기본 원칙을 밝히고 있다. 사실 일반적인 세상 생활 속에서도 항상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많은 재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게으름을 피우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회피하는 사람은 가난해지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감사함으로 성실하게 수행하여 많은 열매를 맺은 사람은 심판 때에 반드시 그 수고에 합당한 보상과 기쁨을 누릴 것이지만, 마음이 강퍅하여 맡겨진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안일한 삶만을 추구했던 사람은 당연히 열매를 맺지 못한 대가로 그에게 약속되었던 축복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은 최종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때 가서 후회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행하는 복음의 일꾼으로서 충성스러운 성도의 생활이 궁극적으로 매우 큰 유익과 축복을 보장해 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하겠다.
19:27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죽이라. - 여기서 '원수'들은 주인이 왕 되는 것을 반대하여 술수를 꾸미던 자들로서 이들에게 내린 주인의 형벌은 매우 무서운 진노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형벌의 결과는 용서의 여지가 전혀 없는 죽음이었다. 아울러 이 비유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 원수들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비판하는데 앞장섰던 유대인들, 즉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는 또한 전반적으로 복음의 역사를 거부하고 이를 훼방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일어날 궁극적인 일들을 암시하는 것을 통해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역이 죄에 속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사역이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거부하고 복음의 사역을 방해한 사람들을 심판하는 마지막 때에는 예수님께서 최고의 심판자로서 그들에게 가장 무서운 사망의 형벌을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19:28-44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앞 단락(11-2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예루살렘 입성이 가까이 이름에 따라 제자들을 비롯해 무리들이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세워질 줄로 오해한 것을 열 므나의 비유를 통해 시정하신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에서부터는 예수께서 드디어 그의 모든 공생애를 마감하시는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한 주간의 구속 사역이 기록된다. 그 가운데 본문에서는 수난 주간 중 첫째 날(주일)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 소개되고 있다. 이 예수님의 입성은 소위 '승리의 입 성'(the Triumphal Entry)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나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마침내 승리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문은 세 부분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첫째는 메시야적 행위의 준비이다(28-34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에 앞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준비된 나귀새끼를 끌어오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약 500여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가 예인한 메시야 언약을 성취하신 것이다(슥 9:9). 그동안 많은 비유를 통해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은연중에 드러내신 예수님께서 이제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시는 것이다. 또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예수님께서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구세주이시며(사 9:6)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순결한 제물이 되심을 보여 준다(민 19:2; 히 4:15).
둘째는 예루살렘 입성과 무리들의 반응이다(35-40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무리들은 마치 예수님을 승리하고 개선하는 왕을 맞이하듯이 겉옷을 길에 펴고 찬양하며 환영하였다(시 118:26).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입성과 무리들의 환영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렇듯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거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행동화시켜 구체적으로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드러내신다. 메시야 선언은 나사렛에서 보여준 선언(눅 4:21), 메시야적 행위(눅 7:21), 메시야의 칭호를 받아들이심(눅 18:39)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공개되었고 본문의 예루살렘 입성과 빌라도의 재판(눅 23:3)에서 정점에 달하며 부활로 인해 더욱 확연해진다.
셋째는 예수의 예루살렘에 대한 애가이다(41-44절). 무리들은 예루살렘에 세워질 메시야 왕국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으나 예수께서는 멀지 않은 장래에 예루살렘에 임할 멸망을 보시고 우시며 애통해 하셨다. 결국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배척한 예루살렘은 A.D.70년 로마 장군 디도(Titus)의 침략에 의해 함락되어 멸망당한다. 한편 이 멸망의 애가는 단순히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한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주의 복음을 거부하는 이 땅의 모든 불신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눈물은 인류가 당하고 있는 죄의 고난에 대하여 안타까워하시는 추세주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권고와 사랑의 복음을 거부하고 죄악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자들은 반드시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구원의 반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복음을 언제 어디서나 항상 전파해야 한다(딤후 4:2).
19: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어 앞서서 가시더라. - 이제 므나의 비유를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떠나셨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전에도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눅 2:42; 요 2:23; 6:4). 그러나 본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이전과는 다른 목적으로 그곳에 가신다는 사실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메시야로서 예수님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행로였던 것이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목적에 대해서는 마 21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앞서서 가시더라'(에포류에토 엠프로스덴)는 말의 정확한 번역은 '앞서서 올라가시더라'는 뜻인데, 이는 여리고보다 훨씬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여정을 묘사하고 있는 표현이다.
19:29 감람원이라는 산. - 이곳은 흔히 '감람산'이라고 불리는 곳으로서 그 명칭은 남북으로 약 4km를 차지하는 이 동산에 감람나무가 많이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감람산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거리인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행 1:12), 산의 높이가 약 900m로서 예루살렘보다 200m가량 높기 때문에 산의 정상에서는 예루살렘 시가지 전체를 쉽게 바라볼 수 있었다. 감람산에 대해서는 막 13장 자료 노트와 마 21장 자료 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벳바게와 베다니. - '벳바게'(벳파게)는 '무화과의 집'이란 뜻으로 공관복음서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았던 장소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곳을 처음 방문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벳바게는 베다니와 같이 감람산 동편 지역, 특히 베다니와 인접한 곳에 위치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마도 예루살렘과 베다니 중간 지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마 21장 자료 노트, 지도를 참조하라. 한편 '베다니'(베다니안)는 '사랑의 집'이란 뜻으로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곳이며,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했던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살던 곳이다(요 11:1,2). 예수께서는 이곳에 유월절 엿새 전에 도착하여 토요일 날 이곳에서 마리아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으시고(요 12:1-8) 그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에 벳바게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베다니에 대해서는 막 14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9:30 맞은 편 마을. - 분명하지는 않으나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유하신 것을 감안한다면 벳바게일 가능성이 크다(Bruce).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풀어 끌고 오너라. - 사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아무도 쓰지 않았던 것일 뿐만 아니라 순결한 것이어야 했다(민 19:2), 따라서 예수님께서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서 쓰시기 위해 거룩하게 보존해 두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 마가와 누가는 나귀 새끼만 있었던 것으로 언급한 반면(막 11:2), 마태는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마 21:2).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마가와 누가는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사실만을 강조하기 위해 나귀 새끼만 있었던 것으로 묘사한 반면, 마태는 보다 본래적 사실에 충실하여 기록한 까닭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필 나귀새끼를 타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예언(슥 9:9)의 성취로, 그가 겸손의 왕임을 보이고자 하신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또 다른 이유는 그의 메시야적 본질을 무리들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사실 무리들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칠 즈음에 이르자 그를 메시야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38절). 물론 그들은 예수를 압제받고 고통 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로 오인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평화를 촉진시키고 제정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42절; 사 9:6). 이 평화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요, 사람과 사람간의 화목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는 평화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다.
19: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주가 쓰시겠다 하라. -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놓고 많은 논쟁이 있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대표된다. 첫 번째 견해는 예수님께서 나귀 주인과 일정한 친분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주가 쓰시겠다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Barclay, Hendririsen). 두 번째 견해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초월적인 신적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Bengel, Godet). 즉 예수께서 신적능력으로 섭리하셔서 나귀 주인으로 하여금 나귀를 선뜻 바치도록 했다는 말이다. 이 가운데 두 번째 주장이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퀴리오스)라는 명칭은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가운데는 '너의 주인인 내가 나귀 새끼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너는 내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32-34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맞은 편 마을로 간 두 제자는 그들이 도착한 곳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 나귀 새끼가 묶여 있는 것을 풀고 있을 때에 나귀 새끼의 임자는 그 이유를 물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하자 그 임자는 더 이상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뚜렷이 입증하는 것이었고 또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려고 간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신성을 직접 체험하는 하나의 기적적인 사건이 되었다. 아울러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듣고 더 이상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았던 나귀 새끼의 임자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생활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그 임자들'(호이 퀴리오이 아우투)의 복수 명칭은 그 나귀 새끼의 주인이 여러 사람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귀새끼의 주인과 함께 있던 주위 사람들을 가리키는 총체적 표현이다(막 11:5).
19:35,36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 데리고 온 나귀 새끼에게는 예수님께서 앉으실 만한 안장이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의 등 위에 펼쳐 놓음으로써 예수님께서 앉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안장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준비가 끝나자 그들은 예수님을 그 위에 태웠다. 여기서 '태우니'(에페비바산)라는 말은 사역동사로서, 이는 예수님이 스스로 앉았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강권하여 예수님을 그 위에 앉게 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그러나 비록 이 일을 제자들이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스가랴 선지자에 의해서 예언된 말씀의 성취였던 것이다(슥 9:9). 아울러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에게 모여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그가 가시는 앞길에 펼쳐 놓았는데,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는 것은 그 당시의 왕에 대한 존경과 환영을 나타내는 전통적인 풍습이었다(왕하 9:13). 마 21:7 주석 참조.
19:37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하나님을 찬양하여. - 여기서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란 말은 누가만이 밝히고 있는 표현으로, 이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군중들이 감람산에서부터 예루살렘 성 입구에 이르기까지 가득 차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또한 '제자의 온 무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12제자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서 갈릴리 지방에서 온 사람들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고 또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직접 목격했던 적이 있었으므로 매우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이다. 특히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능한 일, 즉 바로 얼마 전에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신 것(눅 18:35-43)과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요 11:1-44)들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 흥분해 있었는데, 예수님의 이러한 기적들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었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향해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승리적 모습을 묘사하는 사복음서의 공통적인 기록으로 시 118:26에 나타난 사상을 인용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메시야의 대망을 염원하던 유대인들이 유월절 기간 동안 낭독하던 할렐(Hallel) 시편 중의 하나인데, 모인 무리들이 예수님께 이러한 명칭을 부여했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자기들의 소망을 실현시킬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Morris).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는 달리 누가만이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의 말씀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사명을 암시하는데,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탄생 때에 이미 천사들에 의해서 밝혀졌던 사실이다(눅 2:14). 물론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한 명칭들을 사용했던 근본적인 배경에는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욕구를 강하게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특별히 이 말씀의 기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천사들이 찬양했던 바와 같이 인류의 구속을 완성하셔서 참된 평화를 이루시고 또한 그에 합당한 영광을 받으실 메시야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obertson, Morris).
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책망하소서. -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영하는 사람들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제 더 나아가 그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에게 그 사람들의 행동을 중지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요구는 상식을 벗어난 주제넘은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환영하는 사람들을 제지시킬 만한 그 어떤 권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요구에는 다음과 같은 복합적 계산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비록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이지만 그 속에서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열렬히 환영하는 것이 혹시나 로마 정부를 자극시켜 그 결과 자기들에게 그 책임이 지워져 지금까지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던 안정된 지위가 빼앗길 것을 염려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던 그들은 예수님에게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등된 영광과 찬양을 돌리는 것이 자기들이 내세운 종교적 전통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위기감을 인식하고 분개하여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이다(Hendriksen). 이러한 주장들은 성경적인 사실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는 것으로서 바리새인들의 간교한 모습을 잘 입증하고 있다.
19:40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 이 말씀은 분명히 속담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합 2:11의 사상을 반영한 말씀으로, 예수님에게 부당한 것을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매우 적절한 대답이었다. 사실 사람들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의 메시야 사역을 오해하는 것은 몹시 경계하셨지만(마 16:21-23; 요 6:15),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고 또한 이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은 마땅히 여기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이제 예루살렘 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장소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축제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군중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성을 보시고 비탄에 빠지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평화스럽고 웅장한 자태를 갖추고 있는 예루살렘성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능욕하고 돌로 쳐 죽이는 강퍅한 범죄를 아무 거리낌 없이 행했던 이 성읍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눅 13:33,34). 따라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죄악을 매우 애통해 하는 마음으로 우셨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우시며'(에클라우센)라는 말은 단순히 눈물을 흘리며 우는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울음을 터트려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행동'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애통해하셨던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을 아랑하지 않고 소리를 내어 우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19:42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 사실 예루살렘 성은 원래 '평화의 성'이었다(히 7:2). 그러나 그곳에 거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남으로써 스스로 평화를 포기하고 같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권면하셨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어 그들의 죄악을 경고하셨지만, 그들의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은 하나님의 이러한 경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 예루살렘과 그 거민들에게 남은 것이란 하나님의 진노뿐이었다. 또한 장차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하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며칠 후에 예수님께서 이 패역한 성읍에서 어떠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평화에 관한 일이 네 눈에 숨기웠다'는 말씀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마지막 사랑으로 그들을 권면하기 위해 보내셨던 평화의 사자 예수님을 그들이 이전 다른 선지자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능욕하고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비유적 표현이다.
19:43 날이 이를 지라 네 원수들이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 여기서 '날'은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의 날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이 예언은 문자적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는데, A.D.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 파견된 로마 군대가 3일 만에 갑자기 토성을 쌓고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여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들었던 1백만 명이 훨씬 넘는 유대인들이 성 안에서 기근과 질병으로 무수히 죽어 갔다. 한편 여기서 '토성을 쌓고'(파렘발루신 카라카)라는 말은 오래된 군사 용어로 신약 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인데, 이는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 성의 둘레에 뚝이나 울타리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그 성을 외부와 단절시켜 성안의 기근이나 질병 때문에 스스로 항복케 하는 군사전략의 하나였다.
19: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 여기서 '땅에 메어치며'(에다피우신)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납작하게 때리다' 또는 '바닥에 무너뜨리다'는 뜻으로, 이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때 무서운 살륙이 행해질 것이라는 상징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에 그 곳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 이것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의 황폐화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였고, 특히 그 성전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양식 때문에 유대인들은 많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그 성과 성전은 파괴되었는데, 특히 성전은 그곳을 찾아간 유대인들이 그 흔적을 찾을 수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Josephus). 마 24:2 주석 참조.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 사실 예루살렘의 멸망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루살렘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권고 받는 날'(톤 카이론 테스 에피스코페스 수)이란 말의 정확한 원어적 의미는 '하나님이 너를 방문하시는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그분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지만 그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그를 능욕하고 죽인 것이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멸망의 직접적인 이유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말씀이다(요 1:11).
19:45-48 예수의 성전 정화
앞 단락(28-44절)에서는 예수께서 수난 주간 첫 날(주일)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심으로 자신의 메시야 되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수난 주간 둘째 날인 월요일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성전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메시야의 권위를 보여 주는 장면이 소개된다(마 21:12-17; 막 11:I5-18). 마태의 경우는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적인 신앙과 그릇된 제사 의식을 책망하기 위해 성전 정화 사건의 앞뒤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모습(마 21:19)을 기록한 것이 누가와 다른 점이다.
하여간 당시 성전 제사 제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상업주의에 오염되어 있었다. 즉 20세 이상의 유대 남자들은 성전 운영을 위해 매년 한 번씩 반 세겔의 성전 세를 내야했는데 대개 유월절 절기가 시작되기 한 달 전에 전국에 설치된 납세소에서 거둬들였고(마 17:24) 이때 납부하지 못한 사람은 유월절 전에 성전에 직접 납부하였다. 그런데 이 성전 세는 유대의 화폐로 내도록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마 21:12 주석을 참조하라. 따라서 당시 통용되던 로마와
헬라의 화폐는 유대화폐로 환전해서 내야했고 이 환전료가 상당한 액수였다. 또한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성전에서 인정된 희생 제물을 드려야 했고 이 희생 제물로 엄청난 폭리를 취하면서 팔았다. 그리고 이런 환전료나 희생제물을 팔아 생긴 이익금은 대부분 대제사장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 21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따라서 성전에서의 종교 지도자들은 경건한 신앙생활과 제사에 힘쓰기보다 매매행위와 물질의 욕심에 정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저 정화는 종교 지도자들의 물질적인 모습과 외식적인 신앙을 심판하고 성전 본연의 거룩한 모습을 되찾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더욱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의 메시야 수난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부패함과 타락상을 백성들 앞에서 폭로하자 자신들의 체계에 심한 도전과 위기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전에도 이들은 예수님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험하고 비난하여 궁지에 빠뜨리려 했는데(눅 6:11; 10:25; 11:53,54; 13:1,14) 이후로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공작과 음모를 꾸미고 실행에 옮겨 예수님에게 수난을 가한다(눅 20:1-8; 22:1,2,52,53; 23장). 한편 성전 정화가 예루살렘 입성 다음날 있었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마치 예루살렘 입성 직후에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메시야 사역을 보다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 성도들은 어떠한 명목일지라도 교회 안에 상업주의와 물질주의가 침투하게 해서는 안 되며, 교회는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한다.
둘째, 성전 된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이다(고전 3:16; 6:19; 고후 6:16; 엡 2:20-22; 벧전 2:5).
19: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 본절과 다음절은 성전 정화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수난 주간 둘째 날인 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성전 정화가 마치 예루살렘 입성 직후에 있었던 일처럼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메시야 사역을 보다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장사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에 쓰일 소, 양, 비둘기 같은 제물들을 파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당시 이들은 성전에서 이렇게 장
사하여 남긴 이익금의 일부를 제사장들에게 상납하였는데, 제사장들은 또한 그 대가로 순례자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온 제물들은 부정하다하여 받지 아니하고 그 상인들에게 사온 제물만을 정결한 것으로 인정하는 서로 간에 불법적인 담합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유월절 행사가 진행 되는 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관행들이 더욱 심화되어 성전 뜰에서는 제물을 사고자 하는 사람과 그것을 팔고자 하는 사람이 서로 뒤엉켜 마치 시장터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Hendriksen, Ryle, Spence). 이러한 성전에서의 상업 행위에 대해서는 마 21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따라서 성전 뜰에 들어가셨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불법적인 모습들을 보고 격분하셔서 그들이 장사하는 상을 둘러엎으시고 그들을 그곳에서 내어 쫓으셨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21:12 주석에 상세히 언급하였으니 그곳을 보다 참조하라.
19:46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 성전이 세워진 본질적인 동기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한 그분을 경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사 56:7). 따라서 성전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 사이에 참된 교제가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하지만 성전이 이러한 본질적인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장사하여 이익을 남기고, 또 그 이익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금전적 이해관계가 형성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매우 격분한 행동으로 성전에서 이렇게 불법을 행하는 무리들을 내어쫓으시며 성전 본래의 사명을 깨우치셨던 것이다. 한편 '강도의 굴혈'이란 표현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제사장들과의 이해관계를 직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불법적 관행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대 교권자들 사이에서 성행하고 있던 악행이었다(렘 7:8-11).
19:47,48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활동으로 점철되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전 정화 사건 이후 예수님에 의해 자기들의 불법적인 생활이 드러난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제 예수를 잡아 죽이기 위해 은밀히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들의 이러한 계획을 알고 있었던 예수님께서는 그의 계략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더욱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들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많은 백성들이 함께 하였는데, 이것은 도리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의 같은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얻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어, 많은 백성들 앞에서 자기들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이들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로서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이다(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참조). 이로 보아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는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로 일치된 가운데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에서 행해지고 있던 불법적 관행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비리를 파헤침으로써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잃고 권위를 실추당하게 되자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애썼던 것이다.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 여기서 '기울여'(엨세크레마토)란 말은 미완료형으로서, 이는 백성들이 마치 넋이 빠진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이다(Robertson). 예수님에 대한 백성들의 이와 같은 태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는 극히 대조되는 모습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을 더욱 자극시키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에게서 결코 이러한 관심을 끌지도 못했으며, 백성들이 이렇게 예수를 존경하고 따르게 되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안정된 지위와 기득권(旣得權)을 예수에 의해 곧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구 자료
삭개오 - 구원받은 세리장
1. 인적 사항
① 삭개오는 '순전', '순수'라는 뜻.
② 여리고 성의 부유한 세리장(눅 19:1,2).
③ 키가 매우 작음(눅 19:3).
2. 시대적 배경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행하시던 A.D. 1세기 초경의 인물, 당시 로마 제국은 식민지 국가에
대한 원활한 세금 징수를 위하여 그 나라 백성들을 세리로 고용하였던바 유대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통치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세금을 징수하는 일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로마 제국에 고용된 유대인 세리들에
대한 반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창기와 같은 죄인들로 천시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러한 세리들과 함께 하시고 특히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를 구원하신 사건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3. 주요 생애
예수 영접 이전 | ||
출생 | - | - |
여리고 성의 세리장이 됨 | - | 눅 19:2 |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에 올라감 | AD. 30년 | 눅 19:3,4 |
예수님의 부름을 받음 | AD. 30년 | 눅 19:5 |
예수 영접 이후 | ||
부정 축제한 것을 돌려주기로 함 | AD. 30년 | 눅 19:8 |
구원받음 | AD. 30년 | 눅 19:9,10 |
죽음 | - |
4. 성품
① 이스라엘을 침략한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거둔 것으로 보아 기회주의적 성향이 강한자(눅 19:2).
② 직업이 세리장이면서 부자였다는 것을 보아 돈을 모으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악착스러운 자(눅 19:2).
③ 예수를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갈 만큼 무슨 일에든 적극적인 자(눅 19 : 3, 4).
④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하여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또 회개한 것으로 보아 강한 결단력을 갖춘 자(눅 19:5,6,8).
⑤ 회개 후 부정 축재한 것을 모두 환원하겠다고 선언할 만큼 단호한 행동주의자(눅 19:8).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를 만남으로써 인격적으로 변화하여 새사람이 된 자(눅 19:8).
② 아무리 악한 자라도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음과 인자는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임을 보여준 실증적 예가 된 자(눅 19:10).
6. 주요 업적
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회개함(눅 19:6,8).
② 자기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눅 19:8).
③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얻게 됨(눅 19:9).
7. 주요 실수
① 침략국의 정권과 야합하여 동족을 수탈함(눅 19:2),
8. 평가 및 교훈
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한 삭개오는 자발적으로 이제까지의 자신이 부정 축재한 것을 돌려주기로 약속하였다(눅 19:8). 이처럼 진정한 회개는 항상 변화된 삶이 동반되기 마련이다(행 26:20). 이에 우리 성도들은 매일의 기도 속에서 우리가 하는 회개가 생활의 변화는 전혀 없이 다만 입술만의 고백으로 끝나버리지는 않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다.
②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민족 수탈자요,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따돌림 받던 삭개오 조차도 그가 회개할 때 구원해 주겼다(눅 19:9,10), 이를 통해 우리는 아무리 악한사람도 결코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은 참으로 완전하고 크시다!
③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면서까지 주를 영접하여 구훤받은 삭개오는(눅 19:8,9) 예수님께 구원의 도리를 듣고도 재물이 많은 탓에 심히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눅 18:18-30)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것까지도 포기할 줄 아는 자가 축복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8:29,30), 그러면 오늘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인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삭개오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의 가장 귀한 것까지도 자발적으로 드릴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9. 핵심 성구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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