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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구제 연보의 실례 제시 및 구제 연보의 권면과 연보 준비를 위한 헌금 위원 파견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예루살렘(Jerusalem) 교우들을 위한 구제 연보에 대한 관련 기사를 보도하는 제 8,9장의 일련 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주로 사도직에 임하는 자신의 자세와 자신의 사도권의 정통성에 대해 변론하는 것을 본령으로 하는 고린도후서 전체의 시각에서 볼 때 본론의 중반부에 위치하면서도 화제를 잠시 바꾸어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구제 연보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제 8,9장은 일종의 삽입 기사라 하겠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한 구제 연보도 본서 기록 당시 그 설립자요 사도인 바울과 고린도 교회가 공동으로 직면하고 있던 교회의 주요 현안이었던 바 이는 그저 단순한 화제 전환을 위한 삽입 기사는 아니었다. 다만 제 8,9장을 전후로 한 본서의 본론들이 모두 다 바울의 을바른 사도직 수행 자세와 사도권의 정통성을 다루는 데 반해서 이 두 장은 구제 연보 문제를 다루므로 전체의 문맥 구조상으로는 삽입 기사의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문맥하에 진행되는 제 8,9장의 일련 기사의 내용 전개를 보다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8:1-5은 예루살렘 교우들을 위한 구제 연보에 있어서 모범을 보인 마게도냐(Macedonia) 교우들의 실례를 제시하면서 구제 연보 관련 기사를 시작한다. 다음 8:6-15은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의 정신을 구현하는 방법의 하나로서의 당위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성도 간에 상보하는 유익도 있음은 물론 전날 고린도 교우들이 이미 자원한 바도 있는 구제 연보를 이제 실천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한편 8:16-24은 고린도 교회의 구제 연보를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바울이 설립자요 사도로서 디도(Titus)를 위시한 삼인의 선한 헌금 위원을 파송할 것을 천명한 내용을 보도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9:1-5은 이제 바울이 헌금 준비 위원을 파송하여 자신이 당도하기 전에 미리 구제 연보를 준비하도록 조치한 사유를 밝히면서 고린도 교우들이 그들을 맞아 바을 자신의 도착 이전에 구제 연보를 미리 비축하는 방법으로 구제 연보를 실행할 것을 재삼 당부하고 있다. 끝으로 9:6-15은 연보에 임하는 바른 자세와 구제 연보가 그것을 바치는 이와 그로 인해 혜택을 받는 이에게 가져을 유익을 설명함으로써 다시금 간접적으로 구제 연보를 촉구하며 일련 기사를 종결짓고 있다.
이러한 구제 연보에 대한 일련 기사를 개관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구제(救濟)라는 주제와 연보(捐補)라는 두 큰 주제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 바 먼저 구제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위해서는 본 주석 신명기 26장 자료노트, '구제와 자선'을 참조하기로 하고 본개관에서는 연보에 대해서만 개관하기로 한다.
한편 우리가 연보에 대해 개관할 때에도 본 일련 기사 각 단락 자체가 연보의 자세와 유익 등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밝히고 있으므로 그러한 세부 측면은 각 단락별 강해주석에서 다루기로 하고 본 개관에서는 구속사적 입장에서 본 연보의 근본적 당위성에 대해서만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구속사의 주체이신 하나님, 곧 전역사를 통하여 그것이 마침내 우리 인생의 천국 구원과 축복으로 귀결되도록 홀로 절대적 주권을 가지시고 사역하시는 유일한 구속사의 궁극적 원동력이신 하나님은 그분 자체가 절대 초월자로서 그리고 우주와 역사의 창조자요 주권자로서 그 어떤 존재와도 상관없이 구속사를 전개해 나가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필히 당신의 구속사적 주권에 순복함으로써 구속사의 은혜에 동참케 된 성도의 사역을 경유하여 심지어는 당신의 뜻을 거스리는 자들의 행위까지도 이용하석서 당신의 섭리를 실현해 나가신다. 구속사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객체이신 인간을 경유하여 구속사를 전개하심으로써 그 절대 주권은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님께 귀속되나 그 전개 과정에서 인간의 동참을 허락하시는 것은 구속사 전개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한편 재물(財物)이란 모든 인간에게 이 땅에서의 힘과 지위, 쾌락과 번영을 가장 확실히 보장해 주는 매체이다. 따라서 인간은 생명 다음으로 재물에 집착하게 마련이다(마 6:21).
따라서 성도가 이 땅에서 자신의 소유로 허락된 것 중에서 일부를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 연보 곧 헌금(獻金)은 이미 전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무엇이 새로 더 필요해서가 아니라 먼저는 그 자신과 그의 소유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시인함을 행동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이 확정될 수 있도록 기여함으로써 결국 그 헌금을 바칠 자가 하나님의 구속사의 확장에 공헌하는 기회를 갖게 하고자 요청되는 것이다. 즉 헌금이란 구속사의 객체인 인간이 구속사의 주체인 하나님에게 전적 순복과 감사를 표시하고 나아가 구속사에 동참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의 하나로서 필연적으펄 요청되는 것이다.
이러한 헌금은 결국 구속사의 은총으로 구원을 입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구속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훗날 천국에서 더욱 큰 상급을 얻을 공로를 쌓는 한 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헌금의 구속사적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헌금에 인색하거나 아니면 헌금을 내는 행위와 액수만 인간 앞에 과시하고 참으로 중요한 것 곧 하나님에 대한 전적 헌신은 결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늘 되돌아 보아야 한다.
외울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의 모범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구제 연보의 권면
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헌금 위원의 파견
16 ○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17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18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19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20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1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22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은 고로 더욱 간절하니라
23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24 그러므로 너희는 여러 교회 앞에서 너희의 사랑과 너희를 대한 우리 자랑의 증거를 저희에게 보이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8:1-24 연보를 하는 12대 이유
1. 하나님에 의해 구원 받았으므로(출 23:15)
2. 모든 것을 주께로부터 받았으므로(대상 29:10-14)
3. 하나님을 공경하는 한 방법이 되므로(마 6: 19-24)
4. 성도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므로(눅 16:11-13)
5. 사역자들이 생계 걱정없이 복음 전파사역에 전념토록(고전 9:4-14)
6.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한 방편이 되므로(고후 8:6-15)
7.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하므로(고후 8:1-5)
8. 우리의 연보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으므로(고후 9:11)
9.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한 방법이 되므로(고후 9:13)
10. 성도 간에 사랑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수 있으므로(고후 9:14,15)
11. 신앙을 성숙시키는 한 방법이 되므로(빌 4:17)
12. 연보 이상으로 하나님이 풍성한 은혜를 주실 것이므로(빌 4:18,19)
보감-8:1-24 헌금하는 자에 대한 축복 약속들
말 3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8:2 주요 원어로 살펴본 헌금의 개념
여기에 제시한 원어들 중에는 '헌금'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들과 헌금의 의의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관련 용어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헌금의 본질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구약 원어 의미 및 관련 성구
1. 미싸( ): 정기적으로 바치는 예물(신 16:10)
2. 마시에트( ): 태워서 향기로 드리는 예물(겔 20:40)
3. 민하( ): 피 흘림이 없는 헌물, 선물(말 1:13)
4. 하누카( ): 구체적인 용도에 따른 봉헌 예물(민 7:10)
5. 고르반( ): 자기 신앙의 표시로 드리는 헌물, 헌신(레 1:2)
6. 네다바( ):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출 36:3)
7. 테누파( ): 흔들어서 바치는 요제(출 35:22)
8. 테루마( ): 제사장께 바치는 예물(대하 31:10)
9. 티슈라( ): 먼 곳을 방문하여 드리는 선물(삼상 9:7)
10. 마타나( ):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예물(레 23:38)
신약 원어 의미 및 관련 성구
1. 하드로테스( ): 풍성함(고후 8:20)
2. 하플로테스( ): 솔직함, 성실함(고후 8:2; 9:11,13)
3. 율로기아( ): 축복, 선물(롬 15:29; 고후 9:5,6)
4. 로기아( ): 거두어 모음(고전 16:1,2)
5. 카리스( ): 은혜(고전 16:3)
6. 코이노니아( ): 교제, 동정(롬 15:26)
7. 레이투르기아( ): 봉사(고후 9:12)
8. 엘레에모쉬나( ): 구제(행 24:17)
보감-8:1,2 환난에 처한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
살후 1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8:2,3 올바른 연보의 자세
고후 7장 자료노트 참조
인물연구-8:6 디도
딛 1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8:6-15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 10가지
고전 2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8:21, 선행의 자세
살후 3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8:16-24 헌금의 바른 관리법
왕하 12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연구-8:21 선한 일에 조심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프로노우멘 칼라'( )이다. 여기서 '프로노우멘'은 '미리 깨닫다', '예견하다', '준비하다', '어떤 일을 남에게 나타내 보이기 위해 애쓰다'는 뜻의 동사 '프로노에오'( )의 현재 1인칭 복수형으로서 '우리가 애쓰다'는 뜻이다.
그리고 '칼라'는 '아름다운', '질이나 성향에 있어서 좋은', '유용한'이라는 뜻의 형용사 '칼로스'( )의 변형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형용사가 명사처럼 사용되어 '아름다운 일', '좋은 일'로 해석된다.
따라서 원문을 직역하면 '좋은 일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애쓰다'가 된다.
한편 본문의 해석에 있어서 역본 성경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한글 개역 성경은 본문을 의역해서 '연보와 같은 좋은 일에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 없도록 조심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영역 성경인 NIV에서는 '우리가 옳은 일을 행함에 있어 따르는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We are taking paints to do what is right)로 해석하고 있고 RSV에서는 '우리가 이 일에 명예로울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We aiam at what is honurable)로 해석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역본 성경늘이 다양한 해석을 취하고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의 해석이 무난한 듯하다. 어쨌든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이와 같은 신중한 태도는 하는 일이 바을 당시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현대 교회에 더욱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8:1-5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의 모범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 야기된 오해를 풀기 위해, 자신의 사도로서의 직분과 사역자세에 대해 변호하며 그에 근거해 관용과 화해를 호소하는 데에 주력했다(1:12-7:16). 이제 제 8,9장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즉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근과 핍박으로 말미암아 궁핍에 시달리던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구제 연보에 동참하도록 권면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본장과 다음 장은 일종의 삽입 기사로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은 바을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번째 편지의 말미(고전 16:1-4)에서 이미 거론한 바 있는 연보를 통한 성도의 사랑과 교제를 주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 하에 바울은 먼저 본문을 통해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이 보여준 모범된 연보 자세를 소개하고 있다. 즉 당시 마게도냐 지방에 있던 교회들(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 등)은 자신들 역시 상당한 박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로마 제국의 착취로 인해 결코 넉넉한 생활을 하고 있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난한 중에서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륵 하였다(2절). 물론 그들은 결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연보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원하여 자기 능력 이상으로 연보하였으며, 어려운 처지에 있던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로부터 구제 연보받기를 꺼려했던 바울에게 그들이 거룩한 구제 사역에 동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하기까지 했던 것이다(3,4절).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풍성한 연보는 전적으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즉 그들은 인류를 구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과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소유한 바 재물을 형제를 구제하는 일에 아낌없이 바친 것이다.
한편 이러한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의 모범은 고린도 교회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귀한 교훈을 준다. 그것은 구제란 넘치는 풍요 가운데 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인한 자발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눅 11:41; 고전 13:3).
8:1 마게도냐 교회 돌에게 주신 은혜. - 마게도냐는 그리스의 북쪽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였는데 B.C. 148년 이후에 로마 제국의 영토로 흡수가 된 지역이다. 마게 도냐는 바울이 유럽 선교의 첫발을 내던 곳이기도 했는데(행 16:9-12; 살전 1:7) 바울의 2차 전도여행으로 말미암아 그곳에 데살로니가, 빌립보, 베뢰아 교회 등이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마게도냐 교회'란 이들 교회들을 가리킨다. 한편 마게도냐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천연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수입원이 될 수 있는 금은광의 채굴권이나 기타 권리들을 모두 빼앗기는 등 정치적인 박해를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거듭된 로마 제국 내의 내전에 의한 기근으로 이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큰 곤란을 겪고 있었다(Stanley). 따라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도 매우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내외적으로 가해오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박해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을 극한 상황으로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한 가지 받았는데 그것은 곧 '연보의 은혜'였다. 사실 연보에 대한 특별했던 그들의 관심은 부유한 타지역의 교회들을 능가했는데(빌 4:15), 바울은 이들의 연보가 하나님 의 풍성하신 은혜의 결과이며 성령의 감동에서 결과된 성령의 열매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 주지하다시피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중압된 환난을 당하고 있었다(행 16:20; 17:5; 살전 1:6; 2:14). 그리고 이러한 환난은 이미 앞서 언급한 대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넘치는 기쁨을 가졌고, 그 기틀은 풍성한 연보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에 넘치는 연보는 그들의 믿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에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의 믿음을 고린도 교회에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 -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 풍성한 연보를 하게된 동기이다.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은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것으로 이 두 가지가 함께 풍성한 연보를 하게 하였다는 것은 실로 역설적인 사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에서 이 두 가지는 모순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되었다. 즉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죄를 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아낌없이 연보를 하였고, 이 연보는 그들의 극심한 가난으로 인하여 더욱 풍성하게 보인 것이다.
풍성한 연보를‥‥하였느니라. - 여기서 '연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플로테토스'( )는 '표리 부동', '두 마음을 품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한 마음', '단순함', '순진함' 등의 의미가 있다. 이는 헌금의 기본적인 태도가 개인의 유익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이나 자신의 생활을 먼저 생각하는 데서가 아닌 오직 순수한 마음에서 출발해야 함을 시사한다. 하여튼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가난을 핑계로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드리지 않거나 이웃을 돕는데 인색해서는 안 될 것을 교훈해 준다.
8:3 힘대로‥‥힘에 지나도록. - 본절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연보에 대한 열심을 증거하는 동시에 연보는 그것을 바치는 당사자의 경제적 능력과도 긴밀하게 관계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본절의 '힘대로'라는 단어가 현대적 의미에서 개인의 경제적 소득 수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신자는 자신의 소득 수준을 고려하여 적절한 분량의 액수를 연보로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말은 연보란 억지로, 즉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부담을 느끼면서 바쳐서는 안된다는 뜻을 포함한다. 그 뿐 아니라 '힘'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연보도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미도 된다.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만큼의 분량을 바치지 않는 것은 곧 불성실이요 인색함의 표시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의 경제적 소득 수준을 넘어서 '힘에 지나도록' 연보에 열의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기실, 그들은 극도로 빈곤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가중되는 로마 정부의 박해를 맨 몸으로 견디어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원하는 마음으로 풍성하고, 힘에 지나도록 연보를 드렸다는 사실은 곧 우리 기독교 신앙의 '역설'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마게도냐 성도들의 이러한 고귀한 희생 정신은 자기가 소유한 물질 모두를 바친 가난한 과부를(막 12:41-44) 연상시킨다. 이와 같이 자기 희생이 없이는 그 어떤 사랑의 행위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8:4 이 은혜와. - '은혜'(카리스)라는 단어는 본래 인간을 대상으로 서술되기에는 과분한 용어이다.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는 은혜 역시 사도 바울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의 본래적인 속성에서 기인한 것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사역의 결과로써 나타난 것이다. 특별히 본절의 맥락과 같이 어떤 선한 사업에 관계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래적인 속성은 매우 악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의 자발적인 힘으로 선한 사역을 도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좀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그의 지성 ․ 감성 ․ 의지가 악의 영향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total depravity)했기 때문에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서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보여 준 희생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밝히면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기를 간접적으로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 -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제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였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제 연보를 동일시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이 연보에 열심을 가지도록 권고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문맥상으로는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이 구제 연보와 하나님의 은혜를 같은 의미로 간주한 것으로 느껴지는데, 그렇게 이해해도 별반 무리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성도 섬기는 일을 단순하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라는 문구로 한정시켜서는 안된다. '연보'라는 수단의 내면에 담겨진 내용을 포착해야 하는 것인 바, 그것은 곧 '교회 공동체의 일치'의 추구이다. 즉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단순한 '동정'과 '인정'의 차원에서 연보를 바친 것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모교회(母敎奈)이고 마게도냐 교회들이 지교회(支敎奈)라는 외부적인 형식이 있었지만 그런 형식을 초월하여 교회를 하나로 묶어 주는 믿음과 형제애(brothership)가 있었기에 비로소 서로 섬기려하는 행위가 도출될 수 있었고 그것이 자발적 연보라는 수단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처럼 각각의 지역교회들은 개교회의 특성을 간직하고 그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일치성,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부분들이며 교회는 하나다'라는 일치성을 지혜롭게 견지해 나가면서 서로 섬기고 돕는 일에 매진함이 마땅하다.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 이 구절은 두 가지 사실을 내포한다. 첫째는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의 연보가 전적으로 그들의 자율적인 의지에 따라서 바쳐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는 사도 바울은 그들의 연보를 받기를 꺼려했다는 사실이다. 한편 흠정역 성경(KJV)은 본절의 '우리에게'를 '우리가 받도록'(That we would receive)이라고 번역하여 마게도냐인들이 구한 것이 바울이 그들의 연보를 관리하고 그것을 분배하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였는데 이러한 번역은 부적절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여기서는 오히려 연보의 분배와 관리에 대한 위탁의 의미가 아니라 성도를 섬기는 거룩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과 혜택을 간청했다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적 절하다 하겠다(Hodge). 왜냐하면 그렇게 해석해야만 마게도냐 성도들의 자발성이 부각될 뿐 아니라 그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열심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이 마게도냐 성도들의 연보를 수납하기를 마음속에 흔쾌히 수락하지 않았음도 살펴보아야 한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마게도냐 교인들의 빈곤함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차마 연보 요청을 할 수 없었는데, 그러던 차에 마게도냐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연보를 하고 연보 수납을 꺼려하던 바울을 설득하여 그들의 연보가 받아 들여지도록 한 것이다(2절).
8:5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 일차적으로 이 구절에서 받는 인상은 바울이 마게도냐의 성도들에게 일정 정도의 연보를 기대했었는데 그들이 그 기대 이상으로 연보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를 목적으로 각 지역의 교회마다 일정한 액수의 할당량이 분배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마게도냐의 교회들도 그들에게 할당된 금액을 연보로 바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에 일정액의 연보를 기대했었으리라는 전제를 배제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바울은 그들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풍성한 연보를 바쳤던 것이다. 때문에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의 연보가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임을 반복해서 강조하게 된 것이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 본절에서는 두 가지의 과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 첫째는 '먼저'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을 주께 드린다'는 문구의 정확한 뜻을 규명하는 일이다.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부사 '먼저'(프로들)는 통상적으로 '처음에', '시초에'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본절의 문맥에서는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중요성', 즉 본질적인 요소를 지칭하는 데 인용되었다고 풀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먼저라는 말은 바울이 '그들에게 연보를 바치라고 '요구하기 전에'라는 특정한 시점이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 앞서서' '가장 본질적으로'라는 개념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마게도냐의 성도들이 힘에 지나는 연보를 바칠 수 있었던 동기는 그들이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마게도냐의 성도들은 먼저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과 인격을 전폭적으로 하나님에 바침으로써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연보도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구제 연보도 하나님께 자신들을 온전히 바쳤다는 외적 표시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게도냐 교인들의 연보는 형식적인 모양새와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위선적인 행위와는 비교되지 않는 거룩하고 숭고한 신앙의 발로였다 하겠다.
8:6-15 구제 연보에 관한 권면
앞에서 바울은 환난과 극한 가난 중에도 풍성한 구제 연보를 한 마게도냐 지방 교회들의 모범을 제시함으로써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 구제에 적극 동참하도록 자극하였다(1-5절). 그런데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에게 단도직입적으로 구제 연보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아마도 바울은 '눈물의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로 갔던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가 구제 연보를 하는 일에 적극 동참하도록 이미 부탁했었던 것으로 보인다(6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본 서신을 통해 재차 언급하는 것은 디도의 헌금 모금 사역이 적지 않은 난항을 겪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렇게 고린도 교회가 구제 헌금을 하는 일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큰 은혜로 풍부한 은사를 소유했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특별히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열심으로 붙잡는 믿음도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는 이해력과 지식 수준도 높았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들이 사랑에도 풍성하다고 덧붙이 고 있다(7절).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일에 있어서 행동보다는 말이 더 앞섰다.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구제 연보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그들의 모든 말과 사랑이 진실됨을 보이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8절).
한편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린도 교회가 구제 연보에 적극 동참해야 할 당위성을 다음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성도들을 위해 가난하게 되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절). 즉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심으로 성도들을 영적으로 부요케 하셨으므로(엡 1:3; 빌 2:6-8).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부요함을 누리고 있는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발적으로 이웃과 형제를 구제하는 일에 앞장섬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 구제를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자원하여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0-12절). 즉 고린도 교회는 이미 1년 전에 구제 연보를 작정하고 모금을 시작했으나 오히려 그들보다 형편이 훨씬 열악한 마게도냐 교회가 연보를 모금하는 일을 끝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미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물른 그 사이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내적 문제가 산적하여 그 일을 처리하는 일에 몰두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들이 해결된 이 시점에서는 다시 구제 연보 모금에 적극 참여를 해야 마땅한 것이다. 셋째는 성도들 상호 간에 나눔의 삶을 가능케 만들어 서로 평등케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13-15절). 특별히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출 16:18의 만나 사건을 인용하고 있는데, 실로 성도들은 상호 간에 지체 의식을 갖고 상부 상조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자발적인 구제 연보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본받는 것이며 형제에 대한 사랑의 진실성을 중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평균케 하시는 하나님의 공급 원칙에 순종하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8:6 디도를 진하여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 1절에서 5절까지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의 모범을 일례로 보여 준 바울은 이제 본절부터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들어 연보의 원리와 목적, 자세 등에 관해서 논하고 있다. 본절에 등장하는 '디도'는 바울의 준엄한 편지 혹은 눈물의 편지를 직접 가지고 고린도를 방문했던 바울의 특사로 연보를 모으는 사역도 함께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본절에서 다시 이 문제가 거론된 것으로 보아 디도의 사역은 적지 않은 난항을 겪은 것으로 여겨진다.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향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외부의 풍요로운 환경이 고린도 성도들의 열심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단시일에 모금을 완료했는데 고린도 교회는 1년이 넘도록지지 부진한 상태에 있었다(10절). 이에 바울은 마치 호소하는 듯한 어투를 사용하여 고린도 교회의 모금 사역을 종용하게 된 것이다.
8:7 믿음과‥‥풍성하게 할지니라. - 고린도 교회는 마게도냐 교회들의 헌신과 열심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의 은사는 풍부함으로 가득했다(고전 1:5-7). 그러나 그렇게 풍부한 은사들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이 부족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장점을 들어 격려하는 동시에 그들이 남을 돕는 연보의 은사에는 부족함을 지적하여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연보에 열심을 내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열심으로 붙잡는 믿음도 있었고(Bengel)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는 이해력과 지식 수준도 비교적 높은 편이었으며 하나님의 은사를 사모하는 간절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인 바울에 대하여서도 극진한 사랑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한 은사에는 풍성했으나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은사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소유한 여러 은사들은 남을 돕는 사랑의 연보에서 빛나게됨을 설명함으로써 연보에 적극 동참하도록 한 것이다.
8:8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 연보의 생명은 거론할 필요도 없지만 역시 드리는 당사자의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마음의 결단이다. 연보를 강요하는 자나 강요에 못이겨 억지로 바치는 자나 모두가 그룻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사실 의무나 책임감이라는 동기에서 바쳐진 연보는 인색하지 않을 수 없을 뿐더러 내용보다는 형식이 앞서서 자칫 '외식'에 빠질 우려가 있다. 바울은 실제로 사도의 권위가 있었고 고린도 교회의 형편에 상응하는 연보를 요구할 수도 있었으나(고후 10:8) 그는 격려하고 호소했을 뿐 강요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의 사역자들이 기억하여 모범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성도의 결단이나 인격적인 헌신이 동반되지 않은 목회자의 간접적인 강요에 의한 헌금은 교회의 내적인 성장에 전혀 무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 예물을 예물로써 기쁘게 받지 않으신다.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증명코자 함이로라. - '다만 이 일에 열성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여러분의 사랑은 얼마나 진실한가를 알아 보려는 것뿐입니다.'라고 번역한 공동번역은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도움을 제공한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마게도냐 성도들의 열심을 보여 주어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자각하고 각성하여 그들의 사랑이 곧 연보라는 결과물로 나타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여기서 '증명하다'(도키마조)는 '시험하다'(페이라조)와 동의어로서 바울이 고린도의 성도들을 대상으로 '선의의 시험'을 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시험은 측정, 평가(test)의 의미보다는 격려, 결단에의 촉구로 인지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이성적 지식이나 정서적인 감정의 상태에 상당 부분을 의지하고 있지만 지식과 감정의 옳고 그름은 외부로 표출되는 행위에 따라서 결정된다(약 1:23). 그런데 우리 중의 대다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서도 자기는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이런 식의 오류에서 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즉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감정, 덕성 등의 은사들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어야 진정한 신앙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의미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을 시험해 보고자 한 것이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란 의미의 접속사 '가르'( )가 있다. 그러니까 7절과 8절에서 그가 이야기했던 내용, 즉 고린도의 성도들이 연보에 열심을 보여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본절에서 밝혀지고 있는 셈이다. 즉 지금까지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을 제시하여 고린도 교인들의 연보의 동기를 유발시킨 바울은 이제 보다 높은 차원의 연보의 동기 및 연보의 원리를 제시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연보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8:9 부요하신 자로서‥‥가난하게 되심.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성 육신하심으로써 하늘의 영광과 부요를 버리고 가난하게 되셨다(빌 2:6-8).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하신 분이었으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심을 받지 않으시고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바울은 이런 성육신 사건 자체를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게 되었던 사건으로 규정한다. 이는 그의 '가난하게 되심' 이 지상에서 그가 사역하시는 동안 일어났던 일로서가 아니라 예수애서 세상에 오신 사건 자체가 이미 그 분의 가난해지심으로 이해된다는 말이다. 즉 바울은 천상의 주님을 '부요한 자'로, 성육신 주님을 '가난한 자'로 나타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삼위 일체의 지극한 영광 가운데 계시던 성자 하나님께서(요 17:5) 그 영광의 보좌를 비워두시고 인간이 되어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기 비하(自己卑下)의 길을 걸으신 것을 예수에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도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머리 둘 곳조차 없을 정도로 가난하셨다(마 8:20; 눅 9:58).
가난함을‥‥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 성육신의 목적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영광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백성들이 영광에 참여하고 거룩한 성품을 소유하도록 함으로써 결국 그들이 부요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죄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심으로 가난하게 되신 것이다(요 17:22; 벧후 1:4). 이는 그리스도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세상에 오셔서 대속적인 희생을 감당하셨기에 그를 믿는 성도들이 그와 함께 영광을 받을 뿐 아니라 왕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로(롬 8:7)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성도들을 영적으로 부요케 하였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가난'은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을 하시며 공중의 새나 들판의 여우보다도 못하게 살았던 적나라한 가난(눅 9:58)과 같은 도덕적 차원에서 거론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구속 사역이라는 틀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 역시 현재 고린도 교회가 향유하는 물질적인 부요와 문화적인 풍요로움이 그리스도의 가난한 지상 생활의 결과로 유래되었다고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바울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대속과 희생의 죽음을 통해서 고린도의 성도들이 누리게 된 영적인 부요함을 표면에 부각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자기비하(自己卑下)를 보여줌으로써(엡 1:3) 비교적 풍부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형제들을 위한 구제 연보에 적극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빈곤한 가운데 풍성한 것을 드렸고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부요하심을 버리고 스스로 가난하게 되어 인간들을 부요케 하셨다.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라는 두 가지 모범적인 선례를 통해 고린도 교회는 자발적인 결단을 내려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8: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 여기서 '이 일'이란 연보에 관한 일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이 연보하는 일에 명령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명령하려 하지 않았으며, 다만 그의 뜻만을 제시하여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이 일에 능동적으로 결단하고 참여해 주기를 소망했다.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 '이것'이 '연보하는 것'을 가리키는지(De Wette, Ewald),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명령하지 않고 '뜻만 보인 것'을 의미하는지(Meyer, Plummer)는 분명치 않다. 이 중 어느 것을 취해도 무방하나 후자가 문맥에 보다 자연스럽다.
일 년 전에 행하기를‥‥원하기도 하였은즉. - 일 년이라는 기간이 정확히 작년 이맘 때부터 계산하여 12개월이 경과한 시점을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일 년 전'이라는 말을 바울이 어떠한 역법(曆法)에 근거해서 한 말인지 매우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세 가지의 역법이 사용되었는데 매년 1월 1일로부터 개시되던 로마의 역법과 10월을 기준으로 시작되는 유대와 마게도냐의 역법, 그리고 7월부터 1년의 시작을 계산하는 아테네의 역법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가 연보의 모금을 시작한 때가 정확히 언제 인지를 산출하기란 매우 난해하고 역법의 기준 또한 설정하기가 곤란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일 년 전이 지난 해의 어느 시점인가를 지칭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공동번역). 다만 고린도 교회가 마게도냐 교회들보다 시기적으로 앞서서 모금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사료되는데, 본절은 고린도 교회가 모금을 마게도냐 교회보다 먼저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원한 것이기도 한 사실임을 보여 준다.
8: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 할지니. - 바울은 8절에서 자기가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본절에서는 아주 강력한 어조로 명령하는 문구가 나타난다. 그러나 본절은 '강요'의 뜻을 함축한 명 령보다는 '자각'과 '결단'을 요구하는 의미로 풀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절(10절)에서 그는 고린도 교회가 모금에 열심을 내야만 그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밝힌 후에 본절에서 는 강조하고 촉구하는 뜻에서 '행동'과 '열매'를 요구한 것이다. 한편 사도 바울이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그들의 연보를 빨리 성취하라고 요구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들이 모금 운동을 1년 이상이나 지지부진한 상태로 지체해 왔으며, 둘째는 이미 풍성한 연보를 바쳤던 마게도냐 교회들에 비교하면 고린도 교회의 경제적 수준은 상당히 풍요로운 상태였고, 셋째는 고린도 교회는 타 지역의 교회가 소유하지 못했던 다양한 은사들(7절)을 소유했음에도 이렇다할 구체적 열매를 맺지 못했으며, 넷째는 결정적으로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운동을 자원했었기 때문이었다.
있는대로 하라. - 연보의 원리가 간략하게 나마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있는 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 투 에케인'( )은 직역하면 '가진 것에서'(out of what you have)인데 이는 곧 소유한 재물 전체를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은 '가진 것을 따라서'(according to what you have)라고 해석하는 것이 연보의 원리에 더 가깝다(Alford). 즉 연보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곧 자기가 가진 것을 따라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다.
8:12 할 마음만 있으면‥‥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 11절의 '있는 대로'와 연결된 연보의 원리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연보는 그것을 드리는 당사자의 자원하는 마음과 연보에 대한 내적인 동기와 자세가 그 요체이다. 하나님은 결코 개인이 소유하지 않은 재물까지도 바치라고 요구하시지는 않는다. 또한 연보의 진위(眞僞)는 실제로 바쳐진 물리적인 양, 즉 액수에 기준해서 판단되지 않는다. 연보는 그것을 드리는 자의 마음이 준비가 되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열납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진정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다면 그가 재물을 적게 바치든지 많이 바치든지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울러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자가 인색하게 연보할 리도 없다.
8:13 다른 사람들은‥‥평균케 하려 함이니. - 여기서 '다른 사람들'이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들을 평안케 한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가난에서 구제한다는 의미로, 그리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은 고린도의 성도들은 오히려 과도한 구제 연보로 인해 멍에를 지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바울은 아마도 만일 고린도 교회가 그들의 재력 가운데 상당 부분을 연보로 바친다면 그 연보의 덕택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가난에서 해방되고 고린도 교회는 재정난을 겪어 오히려 상황이 역전되는 결과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고린도 교회 내부에서 제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상한 듯하다. 이에 바울은 그의 원하는 바는 재력이 풍부한 교회의 재물을 거두어 가난한 교회를 부요케 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요, 다만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도와줌으로 모두가 평등하게 살게 하고자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8: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 '지금 여러분이 넉넉하게 살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 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될 매에는 또한 여러분의 궁핍을 덜어 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공평하게 되지 않겠습니까?'(공동번역)라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서로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의 불안정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만의 하나 그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한편 혹자는 본절을 롬 15:27과 관련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축복과 고린도 교회의 물질적 축복의 교환의 의미로 이해한다(Lenski, Chrysostom). 하지만 본절은 롬 15:27과는 달리 상부 상조하는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물질적 보충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Famr).
8:15 기록한 것 같이‥‥아니하였느니라. - 출 16:18의 인용이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으며 생활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각 사람마다 한 오멜썩 만나를 거두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많이 거두어 들인 자나 또 반면에 적게 거두어 들인 자나 장막으로 돌아와 되에 되어보면 누구나 한 오멜썩으로 같았다는 것이다. 만나 자체가 이적이었으나 누구나 동일하게 거둔 것은 또 하나의 이적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로 하여금 물질 생활을 평균케 하신 이적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정신에 따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이 가진 자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없는 자에게 그의 남는 것을 나누어 주어 평등하게 되어야 한다. 특별히 우리는 자기의 먹고 남은 만나를 저장해 두려 했을 때 그것이 부패되어 고약한 냄새를 풍겼음을 직시하여(출 16:20) 필요 이상의 재물을 소유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8:10-24 헌금 위원의 파견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이 보여 준 모범을 제시하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한 구제 연보에 적극 동참할 것을 촉구한 바울(1-15절)은 이제 본문에서는 헌금 모금을 위한 위원들을 파견했음을 밝힌다. 즉 바울은 '눈물의 편지'를 갖고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다가 돌아온 디도와 다른 두 사람을 헌금 위원으로 선정하여 고린도 교회에 파송함으로써 헌금 모금에 박차를 가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디도를 헌금 위원의 대표로 선정한 이유는 그가 이미 한 차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어서 그곳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음은 물론, 그가 바울의 특사로 파송되어 고린도 교회에 내재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디도를 단독으로 파견하지 않고 다른 두 사람을 헌금 위원으로 함께 선정하여 파견한 이유는 '거액의 연보'로 인해 운송 도중에 생길 수 있는 불의의 사고나 공연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었다고 할 수 있다(20,21절).
한편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이 과연 어떤 기준으로 헌금 위원들을 선정하여 고린도 교회에 파견했는지 찾아볼 수 있다. 특별히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들이 복음의 일꾼을 세우는 데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므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바울은 '간절히 자원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헌금 위원으로 선정했다(16,17절). 디도의 경우, 그는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로 파송을 받았다가 마게도냐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지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교통 수단이 구비되어 있지 않던 당시로서는 다른 지역으로 여행한다는 것이 커다란 위험을 감수해야만 되는 일이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디도는 바울로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헌금 모금을 위해서 고린도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꽤히 승낙을 했다. 결국 이와 같은 디도의 자발적인 태도는 온갖 수고와 위험에도 불구하고 오직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봉사하겠다는 그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둘째로. 바울은 '모든 교회로부터 칭찬받는 자'를 헌금 위원으로 선정했다(18절). 특히 그 사람은 바울의 개인적 추천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공식적인 투표에 의해 선택된 자였다(19절).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취향이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가급적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을 고린도 교회에 파견할 일꾼으로 택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셋째로, 바울은 여러 차례에 걸릭서 열성적인 신앙이 입증된 자를 헌금 위원으로 선정했다(22절). 이러한 바울의 결정은 오늘날의 교회가 일꾼을 세움에 있어서 너무 성급하고 경솔하게 판단하여 낭패를 겪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감안할 때, 얼마나 지혜로운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렇듯 교회는 외부적인 조건만 그럴 듯하게 갖춘 사람을 일꾼으로 세우기보다, 내적으로 은전한 믿음을 지닌 사람을 일꾼으로 세워야 함이 마땅하다.
8:16 바울은 6-15절까지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구제 연보에 적극 동참해야 할 당위성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개진하였는데, 본절부터는 실제적인 사무 절차로 들어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세 명의 대표단에 대해서 추천함과 아울러 대표단을 보내는 이유와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 이 구절을 쉽게 풀어 쓰면 '내가 고린도 교회에 가지고 있는 열심과 같은 열심을'이 된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가진 열심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양립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고린도 교회의 신앙 생활에 대한 영적인 관심이라는 젓이고(Hodge, Plummer),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의 연보에 대한 열심이라는 것이다(Billroth). 문맥상으로 보면 후자의 입장이 약간의 설득력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울 사도의 관심을 단순히 연보에만 국한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고린도 교회와 사도 바울의 영적인 접촉들을 고려한다면(1-2장, 6-7장) 바울이 그들의 영적인 성장 문제 등에 애정을 가지고 깊게 관여하였음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디도는 할례받지 않는 이방인으로서(갈 2:3)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시에 회심을 한 후에 유능하고 신실한 목회자로서의 삶을 살았다(딛 1:5).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관리할 당사자로서 디도를 천거하였는데, 이는 디도가 바울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 이 디도는 바울의 눈물의 편지 혹은 준엄한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전달해 주기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불화를 지혜롭게 해소시켜 주기도 하였다(고후 7:5-16). 이러한 접촉을 통해서 디도는 고린도 교인들과의 적극적인 유대를 가지고 깊은 애정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이타. 사도 바울은 여기서 디도에게 고린도 교회의 연보를 관리하는 중책을 위임하면서 디도가 바울과 같이 고린도 교회에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디도'에 대해서는 딛 1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8:17 저가‥‥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디도는 바울의 권유로서 뿐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에서 고린도 교회에 가려했다. 여기서 '나아갔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엑셀덴'( )으로 과거형이다. 이것은 서신서에서 종종 등장하는 '서신적 과거형'으로서(고후 9:3) 실제 의미는 '가려하고 있다'가 된다. 즉 디도가 본서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고린도의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시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디도가 고린도로 출발한 것은 과거 시점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이다.
8:18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 디도와 함께 고린도 교회에 파견된 사람은 두 명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본절에, 다른 사람은 22절에 소개되어 있다. 바울은 디도를 완전히 신임하면서도 디도에게 두 명의 조력자를 딸려 보냈다. 이는 연보를 관리하는 일에 공적 성격을 부여하여 엄중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덕을 세우고, 또한 두 명의 조력자로 하여금 연보의 모금 운동이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하도록 하려는 바울의 배려로 풀이된다. 그런데 본절에 소개된 '한 형제'가 누구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즉 ① 디도의 육신의 형제(Robertson), ② 누가(Orison, Anselm), ③ 바나바(Luther, Calvin), ④ 마가(Storr)를 비롯하여 실라, 디모데, 세군도 등 많은 이들의 이름이 제시되었는데 이중 어느 견해도 명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사람이 복음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고 모든 교회들, 특히 마게도냐 교회들에서 돈독한 신임을 얻고 있었던 자일 것으로 추정한다.
8:19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 바울이 디도와 함께 고린도에 파송하는 '한 형제'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이 설명에 의거해 볼 때 '한 형제'는 이미 거두어진 연보를 관리하도록 선택되어 바울과 동행하던 자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에서 선발한 대표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는 이미 연보 모금이 완료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행 20:4에 나오는 연보 관리 위원들 가운데 베뢰아 사람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8:20 이것을 조심함은. - 여기서 '이것'은 '디도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낸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조심하다'(스텔로)는 '설치하다', '정리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사업에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디도와 다른 두 사람을 파송시켰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구절에 언급되어 있다.
거액의 연보로 ....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당시 고린도 교회의 일각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의 물질적인 부를 목적으로 선교 활동을 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었고(Barrett),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 일부의 악의에 가득찬 비난과 자신에 대한 석연치 않은 반응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회의 모금 운동과 연보 관리에 자신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사람 두셋을 보내어 그 일을 관장하게 함으로써 일절 오해와 의심을 받지 않고자 한 것이다. 한편 바울이 모금된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대표단에서 될 수 있으면 빠지려고 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고전 16:3,4 주석 참조.
8:21 이는‥‥조심하려 함이라. - 본절은 70인역(LXX) 잠 3:4 말씀의 반영으로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모두 옳다 인정받고자 한다는 말이다. 사실 복음의 사역자는 사람의 기쁨을 구하지 않는다(갈 1:10). 그러나 비록 중상 모략일지라도 하나님의 사역자가 구설이나 좋지 못한 평판을 받게 된다면 복음을 위해 조금도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된다(고전 9:12).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중상하는 자들(고후 11:8)에게 빌미를 줄 것을
우려하여 고린도 교회의 연보 모금 사업에 세심하고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며, 고린도 교회의 연보 모금에 자신이 개입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할 다른 사람을 보내어 그 일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선한 일을 모든 사람에 의해 진실한 것으로 인정받고자 한 것이다.
8:22 우리의 한 형제‥‥더욱 간절하니라. - 디도와 함께 고린도에 파견될 두 사람 중에 다른 한 사람이 또 소개된다. 바울은 이 사람의 이름 또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18절에 소개된 사람은 마게도냐의 여러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이고 본절에 언급된 사람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간절히 사모하는 열심을 가졌다는 단편적인 사실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즉 바울은 왜 그들의 명단을 익명으로 하였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는 아마도 고린도 교회가 이미 이 두 사람을 익히 잘 알고 있어서 이거나 아니면 디도가 이 두 사람을 동행하고 고린도에 도착해서 그 둘을 고린도 교회에 소개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연보를 관리하는 공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두 사람이 디도와 동행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 두 사람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낮설지 않은 친숙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
8:23 디도로 말하면‥‥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 - 본절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모금 사역을 위해 고린도 교회에 파송되는 사절단 세 사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신원 보중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신분을 요약하면서 디도와 다른 두 사람을 구별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바울은 디도를 자기의 동무요 동역 자라고 하여 개 인적 인 친밀 관계를 강조하는 한편, 자기 자신과 동일한 위치로 상승시켜 소개하였다. 이는 바울이 디도를 그만큼 신임한다는 의미이다(딛 1:4). 그러나 디도에 관한 바울의 개인적인 신임이 곧 디도와 다른 두 사람 사이의 위계 질서를 결정하는 의미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고린도 교회에 파송되는 사절단 세 사람은 동일한 자격을 소유하며 단지 디도는 '대표적 성격'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절 후반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즉 디도는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고린도에 간 것이 아니라 마게도냐 교회에서 정식으로 추천되어 파송된 동료 사역자들과 함께 행동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사실이 밝혀져야 하는 까닭은 이렇다. 만일 사절단의 두 형제가 단순히 디도의 수하라면 연보 모금이라는 공적 성격이 그만큼 회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사람 모두가 동일한 입장과 지위에 있어야만 그들이 맡은 공적 업무의 성격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개인적 차원에서 소개한 후에, 마게도냐의 여러 교회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들어 사절단의 다른 두 형제들의 지위와 신분을 확고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 교회의 사자들. 디도와 동행 한 사절단의 다른 두 사람은
여러 교회가 선출한 대표자였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서 '사자들'로 번역된 '아포스톨로이'( )는 '사도'(使徒)를 뜻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 )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절에 언급된 사자들이 바울과 같은 '사도'의 부류에 속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단지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에서 '아포스톨로이'가 사용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행 1장 자료노트, '사도의 이해'를 참조하라.
8:24 여러 교회 앞에서‥‥저희에게 보이라. - 본장의 결론으로서 사도 바울의 진지하고도 정중한 부탁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분명한 반응을 요구하였는데 '여러 교회 앞에서' 그들의 사랑과 그들에 대한 바울의 자락이 헛되지 않다는 중거를 드러내도록 촉구하고 있다. 물론 이는 구체적으로 구제 연보 모금에 열심을 내라는 촉구이다. 한편 '여러 교회'는 협의로는 마게도냐의 다수의 교회들을 지칭하고(1,19절), 광의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모든 교회를 가리키는 총제적 의미를 가진다(롬 16:4; 고전 14:34). 이것은 결국 고린도 교회가 하나의 독립된 지역 교회로서 뿐 아니라 '교회'라는 전체적 통일성 속에서 하나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바꾸어 생각하면 이미 초대 교회는 서로 단일성을 유지하며 밀접한 친교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과 결속은 그들의 타 교회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헌신의 행위들을 통해서 확인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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