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장 바울의 인사말과 본서 기록 목적 및 바울의 사도직의 기원
구속사적 개관:
성경은 구원의 주체(主體)이신 하나님께서 구원의 대상인 죄인된 인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근거로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할 때 구원을 주신다는 원리와, 그 원리가 역사에 반영됨과 구원 얻은 자가 추구해야 할 실천적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성경 각 권은 그 저자와 기록 배경 그리고 문학 장르에 있어서는 도저히 획일화시킬 수 없는 다양성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 담긴 진리와 사상은 한점 오류도 없는 연속성과 통일성의 맥을 도도히 유지하고 있다.
한편 신약 서신서 가운데 로마서. 고린도전 후서와 더불어 교리 서신(敎理書信)으로 분류되는 본서 역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다는 구원의 원리를 일관되게 주장함으로써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구속사적 진리와 연속성 및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즉 본서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세운 갈라디아 교회가 그 어떤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구원의 원리인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망각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구약 선민 이스라엘에게 한시적 방편으로 주어진 율법을 준수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그릇된 사상을 전하는 유대 율법주의적 거짓교사에게 미혹당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기록한 일종의 기독교 변증서이며 율법주의에 대한 선전 포고이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 하에 쓰여진 본서에는 교회의 와해를 방지하며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격렬한 어투와 단정적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기독교적 구원 원리의 핵심적 내용이 바울의 생동력 있는 필치로 쓰여진 본서는 다음과 같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본서의 머리말(1:1-10)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인사말과 본서 기록 동기를 밝힌다. 다음으로 바울이 본서 본론의 전반부인 1:11-2:21에서는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입증키 위해 자신의 사도직이 구속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았으며 이것이 또한 구속받은 자의 모임인 교회의 인정을 받았음을 논하며 이어 자신이 전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내용을 요약한다. 본론의 중반부인 제 3,4장은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 있어 한시성(限時性)을 가진 율법과 율법의 완성으로 주어진 복음과의 관계를 보다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다룸으로써 복음의 절대 우월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본론의 후반부인 5:1-6:10은 복음을 받아 구원의 자리로 부름 받은 성도가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가 복음이 주는 참 자유를 향유하며 육적 행위를 멀리하고 영적 생활을 지향하며 성도간의 교제에 힘쓰는데 있음을 논한다. 그리고 본서 전체의 끝맺는 말로서 6:11-18이 이어진다.
이런 문맥 하에서 본장은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한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논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도 마땅히 바울이 전한 구속의 복음을 수용해야 함을 밝히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를 보다 상세히 기술하자면 1:1-10은 본서 전체의 서론으로서 먼저 1-5절에서는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인사말이, 그리고 6-10절은 본서의 집필 동기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여기서 인사말(1-5절)은 다른 서신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바와 같은 우호적인 내용이 아니라 강경한 어투로 되어 있어 구속사의 목표인 하나님 나라 건설에 역행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질책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즉 바울은 1절에서부터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자신이 전한 복음이 인간적 기원을 갖는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교훈과 차별성을 가짐을 확실히 하였다. 또한 이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란 표현을 통해 자신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은 물론, 구속사의 주체가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대속의 사역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배후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자신은 단순히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제정하시고 성취하신바 구속의 원리를 전하는 사도일 뿐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 선포의 내 용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란 4절의 표현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즉 이 표현 속에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렸다는 구속사의 핵심 사항이며, 또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구속사의 주관마이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는 이 은혜를 힘입는 자면 누구나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을 받고 죄의 억압에서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이미 자신이 앞으로 증거하려는 내용은 물론 구속사의 주요 진리를 밝힘으로써 본 서신서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어지는 6-10절은 바울이 본서를 쓸 수밖에 없게 된 동기를 밝히는데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변질된 신앙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곧 바울은 믿음을 통하여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망각하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미혹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강하게 견책하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킴으로써 타락을 유도한 사탄과 그 하수인들은(창 3:1,4,5) 역사 가운데서 계속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기 위하여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그러므로 믿는 자라 할지라도 근신하고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사탄의 미혹하는 말을 구별치 못하고 '다른 복음'을 받아들여 저주와 멸망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케 된다. 따라서 성도는 마땅히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복음만을 굳게 잡고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한편 후반부인 11-24절은 바울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과 교회의 인정을 논한 본론 전반부(1:11; 2:21)의 일련 부분으로서 당시 갈라디아의 거짓 교사들이 제기한바 바울의 사도권 문제에 대한 명쾌한 바울의 자기변호이다. 즉 사도 바울이 간직하고 있으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하였던 복음이 사람의 경험이나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받은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11,12절). 이것이야말로 바울이 전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구속사적 진리가 명멸하는 인간의 사상과는 달리 이 세상이 없어질지라도 사라지지 않는 구속의 원리임을 보여 준다.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배워오고 열심히 추구해온 유대주의 가르침에서 일거에 떠나 다른 사도들의 권위에 힘입지 않고서도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구속의 유일한 원리인 바로 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있었던 보다 근원적인 이유는 그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확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에 의해서이다(15절). 이러한 바울의 인식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예정(豫定)과 예지(豫知)를 믿는 신앙에 근거한다. 또한 바울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러한 택정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부여된 사도로서의 사명을 온갖 난관 가운데서도 머뭇거림 없이 과감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에 있어서도 구속사의 주역으로 부름 받은 성도들에게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소명(召命) 의식을 가질 때 자신에게 부여된 구속사의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게 된다.
1장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1:8, 저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나데마'로 동사형인 '아나티데미'()에서 유래했다. '위를 향하여'(upwards) '위로'(Up)의 뜻인 '아나'와 '두다'(put), '놓다'(set). '나타내 보이다'(to set forth)의 뜻을 가진 '티데미'()의 합성어인 '아나티데미'는 어떤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방을 붙이는 고대 풍습에서 나온 말로 '선포하다'(declard) , '공표하다' (to set forth)란 뜻으로 쓰였다. 또한 당시에 도둑질한 자나, 살인자 등을 산채로. 또는 그 시신을 나무에 달아 세워 놓음으로써 그러한 죄를 범 하는 사람은 이런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된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나티데미'는 이를 반영하여 '저주를 받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아니티테미에서 파생한 명사 아나테마는 좋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란 뜻을 가지며 나뿐 의미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로써 '비참하게 찢겨져 나무에 달린 자', 즉 '저주받은 자'. 또는 '저주'라는 뜻을 갖는다. 한편 헬라어 '아나데마'와 관련된 히브리어는 '헤렘'이다. 이는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성물'을 뜻하는 단어이다. 구약시대에 '성물'을 함부로 탐하거나 만지는 자는 곧 저주받아 죽임을 당하였는데 여기서 '저주'라는 의미가 파생되어 나왔다. 따라서 '아나데마'는 하나님의 영적인 것을 함부로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형벌로서의 '저주'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며 이것을 변질케 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신성모독 행위로서 그에 상당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우리 성도의 자세는 실로 하나님 의 신성 한 것을 대하듯 하는 경건된 것이어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이 복음을 인간의 이성으로 왜곡시키거나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외울 말씀
1:4,5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1-5 인사말
본서는 바울의 다른 서신서나 당시 일반적인 편지 양식에 따라 송신자(1절)와 수신자(2절)를 밝히고 이어 수신자에 대한 축복(3-5절)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 어조는 우호적인 다른 서신과 달리 강경하다. 또한 송신자를 소개함에 있어서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당시 갈라디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그분을 부활시키신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후에 전개될 본서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대속(代讀)의 공로를 약화시키는 율법주의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복음을 전한 자신의 사도권을 확립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본서는 그 수신자를 한 교회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2절)에 둔다는 점에 있어서도 특이하다. 그리고 그 소개가 간단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 역시 갈라디아 교회 내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원리를 부인하는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의 악행을 염두에 두고 강경하게 본서를 썼기 때문인 듯하다. 그리고 이어 축도 부분에서도 다른 서신서 들에서 나오는 칭찬이(롬 1:8; 고전 1:4-7; 살전 1:6-8) 없고, 처음부터 바울 자신의 관심, 즉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 원리와 사도권의 신적 기원에 대해 간결하고 힘 있게 나타냄으로써 본서 초두부터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자신의 사도권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의 진수를 전하려는 본서 전체 주제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한편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거부하고 사도권 또한 부인하는 자들에게조차도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는 바울의 선교 열정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4절)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으로서 오늘날 우리 역시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무릅쓰고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뒤를 따라 굳건히 걸어가는 신앙의 용장이 되어야 함을 교훈 받을 수 있다.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사도 된 바울은. - 갈리디아서의 서두를 이루고 있는 이 부분은 신약성경의 다른 서신서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특이한 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서신서의 첫 부분은 으례히 부드러운 문체로 통상적인 문안 인사를 하는 것 이 보통인 데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는 이 부분은 매우 강한 문체로 발신자가 밝히고자 하는 핵심 내용, 즉 자신의 사도됨을 처음부터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바울이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 사이에서 야기되고 있던 바울의 사도직의 정당성에 관한 논쟁을 인식하고 본서를 통해 자기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을 밝힘으로써 사도로서의 그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특히 본문의 표현은 자신의 사도권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아프 안드로폰), 즉 '사람들로부터(from men, RSV)난 것이 아님을 말함으로써 사도권의 '출처'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근원하지 않았음을 강변한다. 또한 이어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디 안드로푸). 즉 '사람을 통하여'(through man, RSV) 얻어진 것도 아님을 말함으로써 사도로 부름받은 '경로'도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음을 밝힌다. 이는 이어 나오는 사도권의 출처와 통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란 표현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에게서'와 '사람으로 말미암은'을 먼저 거론하며 부정한 것이다. 이처럼 본절을 통해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이 인간적인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의해서 부여된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사도된 바울'이라는 구체적인 명시는 예수님의 열 두 사도와 같이 자신도 정통성을 갖고 있는 사도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의 서신서에서 자주 반복되는 표현이다(고후 1'1 ;골 1 :1). 한편 '사도의 이해'에 대해서는 행 1장 자료노트를,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는 고후 11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 본문의 '오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는 '그러나'란 뜻을 갖는 역접 접속사로서 앞에서 기술한 내용을 강하게 부정하는 기능을 지닌다. 즉 바울의 사도권은 갈라디아의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사람에게서 비롯됨을 강력히 부인하는 것이다.
한편 어느 시대, 어느 곳이든지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잘 입증는 최상의 교훈이다. 특히 신약 시대 이후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사실이며 뚜렷한 구원의 예표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러 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말씀을 통해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또한 그것을 능히 이루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직을 부여받았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간접적으로 그가 회심하게 된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들을 구원키 위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사건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 말씀은 바울자신의 사도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므로 자신의 사도직을 문제 삼아 그가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Hendriksect).
1: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 바울은 서신서를 쓸 때, 일반적으로 그의 곁에서 복음의 사역을 도왔던 몇 사람의 이름을 첨부시켜 수신자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고전 1:1; 고후 1:1; 빌 1:1; 골 1:1). 본절에서도 이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나 본서의 성격이 문안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갈라디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려는데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명단은 생략한다. 따라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언급된 '모든 형제'가 바울의 사도직에 관한 논쟁과 아울러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 속에 침투하고 있는 유대주의적 이단들을 염려하는 성도들로서, 이들 가운데는 바울과 같이 갈라디아 지방의 선교를 담당했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Campbell, Cole). 아울러 이러한 사실들은 바울이 분쟁이 일어났던 교회들이나 이단적 사상이 침투하고 있던 교회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보낼 때, 바울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주위에서 같이 사역하고 있던 여러 믿음의 형제들과 그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상의하고 또한 같이 기도하는 가운데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편지를 보냈으리라는 사실을 암시 받을 수도 있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본서의 수신자가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또한 '여러 교회들'이란 복수 명칭은 이 서신이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들이 서로 돌려가면서 읽게끔 되어 있는 회람 서신(回覽書信)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뿐만 아니라 다른 서신에 있어서도 모든 성도들에게 신앙적 관심과 교훈이 되고 있는 사도의 편지들은 서로 돌려가면서 읽으라고 권면 했기에 당시 바울이 쓴 편지가 대부분 회람 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골 4:16). 한편 이 서신의 수신지인 갈라디아 지방이 정확히 어느 곳인지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본래 소아시아 지역의 북쪽인 '북 갈라디아 지방'을 가리킨다는 견해 (Lightfoot. Dods)와 이는 로마 제국에 의해 행정적으로 명명된 소아시아의 남부 지역, 즉 비시디아 안디옥,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과 같은 '남 갈라디아 지방'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Schmidt, Ramsay). 그중 오늘날에는 '남갈라디아 지방'이 유력시되고 보다 타당한 견해로 인정받고 있는데, 그것은 ① 바울의 전도 여행을 다루고 있는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바울이 북 갈라디아 지방을 전도했다는 언급이 없으며, ② 이와 달리 남 갈라디아 지방은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뿐만 아니라 2차, 3차 여행 때에도 자주 찾아갔던 지역이며, ③ 바울서신을 살펴보면 바울은 교회를 명명할 때 일반적으로 당시 로마가 규정하고 있는 행정지역의 명칭에 의존했다는(고전 16:19; 고후 8:1) 사실 등을 볼 때 그러하다. 이에 대한 설명은 본서 서론을 보다 참조하라.
1: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이는 바울 서신에서 자주 나타나는 대표적 문안 형식의 표현이다(고전 1:31 엡 1:2; 빌 1:2 등). 특히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바울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이러한 축복들 속에서 그들의 삶을 날마다 영위해 가기를 바라는 소원을 담고 있었다. 즉 바울에게 있어 '은혜'(카리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실현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말하고, '평강'(에이레네)은 단순히 타인과의 분쟁이 사라진 외적 평화가 아니라, 내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던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나서 그 마음에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안정되고 축복된 상태를 소유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롬 15:33; 고후 13:11). 바울은 그의 전도 활동이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교리적 분파나 이단적 사상에 의해 심각한 분쟁이 일어나고 있던 교회들을 권면 할 때, 항상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을 강조하여 사용함으로써 십자가를 통한 은혜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룩하는데서 오는 평화를 소유하기를 기원했다. 이것이 바울의 후기 서신서들에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Robertson), 한편 본문에서 바울이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파트로스)란 표현을 쓴 것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자녀들을 보호해 주시는 부성(父性)을 지니셨음을 보여 준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주'(퀴리오스)란 표현을 쓴 것은 구약에서 성부(聖父) 하나님을 주(아도나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역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서 우리 삶의 주관자가 되심을 보여 준다.
1: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 서신서의 서두임에도 불구하고 수신자들을 위로하고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상적인 관례를 벗어나 바울은 처음부터 이와 같이 성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또한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것은 당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한 구원의 복음을 부인하고 율법의 행위만을 강조하는 유대교적 율법주의 사상이 범람해 있는 것을 바울이 상당히 염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복음, 즉 '새 언약'의 교리를 명백히 제시함으로써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게 사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신학적 교훈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그리스도의 성육신(聖肉身)과 십자가 죽음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를 보여 주는 표현이다.
한편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에서는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분명히 구별하셨으며(막 10:30; 눅 20:34,35), '이 세상' 또는 '이 세대'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것이 불의하거나 패역한 세대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자주 암시하셨다(마 17:17; 눅 16:8). 그리고 바을 또한 이러한 사상을 더욱 구체화시켜 성도는 이 세대의 모습을 본받아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을 여러 번 언급했다(름 12:2), 여기서 '이 악한 세대'(투 아이오 노스 투 에네스토토스 포네루)라는 말을 정확히 번역하면 '존재하고 있는 이 악한 세대'라는 뜻이다. 이는 복음을 거부하는 이 세상의 패역한 상태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또한 '건지시다'(엑사이레오)라는 말은 원어상 '잡아내다' 또는 '구출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 단어를 통하여 바울은 예수님께서 악이 지배하는 이 세대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복음이란 죄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능력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1: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술할 때마다 이어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와 경배를 강하게 표출하는 것이 바울서신의 특징이다(롬 9:4,5; 딤전 1:16,17).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바울이 구원의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 그에게 닥친 역경이나 고난을 이기는 비결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게 구원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 또한 당연히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해서 바울은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을 향한 그의 두 가지 관심사, 즉 그의 사도권의 확립과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을 서론 부분에서 미리 언급함으로써 갈라디아서 전체의 윤곽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Campbell).
아멘. - '아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확언하다', '신뢰하다'는 뜻을 가진'아멘'()을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이 단어는 구약시대에는 서약이나 선언 등을 확인할 때 사용되었으며(민 5:22; 신 27:15-26),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나타날 때 사용되었다(마 6:2,5; 요 1:51), 오늘날에는 기도의 응답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대상 16:36).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대상 16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1:6-10 집필 동기
일반적인 서신의 경우는 앞 부분에 나오는 인사말(1-5절)에 뒤이어 수신자를 칭찬하는 동시에 이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의 부분과 수신자의 모자람을 위한 기원이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다(롬 1:8-15: 고전 1:4-6). 그러나 본서의 경우는 이러한 관례를 무시하고 곧바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질책을 언급한다. 당시 갈라디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은혜를 저버리고 '다른 복음', 곧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그룻된 가르침에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너무나 속히 미혹되었다(6절), 따라서 바울은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 강하게 견책(讀責)할 뿐 아니라,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을 회생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안에서 믿음의 순수성을 간직해야 하는 당위성을 갈라디아 교회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바울이 본서를 쓰게 된 동기이다(7-9절). 그리고 그는 이어서 그리스도의 종된 자는 인간적인 기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전도자로서 의 삶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임을 밝히면서(10절), 갈라디아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 암시하였다.
한편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복음을 받은 자라 하더라도 이 복음을 잘 간직하지 못할 때는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자를 미혹하려는 사탄에 의해 타락할 수 있다(벧전 5:8).
②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탄의 세력은 대부분의 경우 그 자신을 위장하고 성도에게 접근하기 때문에 지극히 미혹받기가 쉽다. 따라서 성도는 복음 전파자란 외형적인 간판이나 비록 하늘로부터 온 천사와 같은 자라 할지라도 그 외형이 아니라 전하는 말이 복음의 진리와 어긋나지 않는 것이냐의 여부로 진위를 판단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경우가 있는 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 고백하는 진실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 여기서 '부르신 이'는 그리스도(Luther, Calvin, Bengel) 혹은 바울(Paulus)이란 견해도 있으나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Chrysostom, Lightfoot, ford). 그 이유는 바울에게 있어 '부르심'(콰레인)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죄인을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롬 4:17; 살전 2;12; 살후 2:14). 따라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의 백성을 부르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신약시대 이전 하나님께서 명한 율법을 통해 그의 백성을 부르신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모든 율법을 이루셨으므로 그 은혜에 힘입을 때에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에의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로 나오라는 초청과 동일한 것이다.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일반적으로 인사말에 뒤이어 수신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을 칭찬하며 이에 대해 하나님 제 감사를 표현하고 있는 다른 서신서들과는 달리 본서는 그 첫 부분부터 책망의 말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이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 사이에 증가되고 있는 이단적 파상들에 대해서 매우 분개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서 '다른 복음'(헤테론 유앙겔리온) 이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복음, 즉 바울을 분노케 하는 이단적 사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무시하고 율법적 의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유대 율법주의적 사상을 가리킨다. 아울러 '속히 떠나'(타케오스 메타티데스데)라는 말은 '재빠르게 떠나 버리다'라는 뜻으로 현재 수동형으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는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 인지 얼마 안되어서 곧 '거짓 복음'의 유혹을 받아 진리의 길을 떠났으며 지금 현재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다(Alford, Calvin, Wette). 따라서 여기서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다우마조)는 말은 단순히 '이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망스럽다'는 뜻으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책망하고 있는 표현이다.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 이 말씀을 통하여 바울은 복음의 불변성과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 (호 우크 에스틴 알로)라는 말의 정확한 표현은 '복음은 결코 다른 복음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특히 본절의 '다른 복음'에서 '다른'에 해당하는 헬라어인 '알로'는 '비슷하나 같지는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바울이 먼저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게 전한 복음 외에는 결코 이와 비교할 수 있는 다른 복음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Huxtabale). 한편 본절에서의 '어떤 사람들'이란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에 침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율법적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참된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는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바울로부터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을 소란케 하는 자들이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참 복음과 다른 복음의 수용 문제로 인해 분쟁이 야기되었으며 교회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탄의 사주를 받은 이단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파괴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러 함이라. - 여기서 '변하려 함이라'(데론테스 머타 스트레프사이)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뒤집어 엎으려고 한다'는 뜻이다. 이는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를 혼란케하는 유대주의자들의 행위가 단순히 복음을 변질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복음을 뿌리채 뒤흔들어 놓으려는 시도라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따라서 바울은 이 말을 통하여 그들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위태로와질 것이기 때문에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게 그들을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1:8,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 교회를 혼란케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는 무리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심판의 선포이다. 여기서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라는 말은 복음을 왜곡시키는 행위는 그 어떤 존재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가상적으로 삽입된 표현이다. 즉 여기서 '우리는'은 바른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 즉 디모데나 실루아노 등을 포함하는 표현이다. 또한 여기서 '천사'가 언급된 것은 당시 갈라디아 지방에 있었던 유대주의적 이단들이 천사를 인간에게 율법을 전하는 증보자로 부각시켰기에 바울이 이를 염두에 두고 이들의 그룻됨을 알리기 위해 천사를 특별히 거론했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Cole). 흑은 최고의 피조물인 천사라 하더라도 복음을 왜곡시키는 잘못을 범한다면 이는 결코 용서될 수 없음을 밝힘으로서 복음 변질의 죄가 너무나 큼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저주받다'(아나데마)의 구약적 용어 '혜렘'()은 원래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해 구별되다'란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은 인간이 다시는 취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본절의 저주도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저주를 가리킨다. 한편 본문에서 '저주를 받다'라는 말을 두 번 반복한 것도 저주의 불가피함을 잘 보여 준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 이 구절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의 교인들에게 이 번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그들을 혼란케 할 수 있는 이단적 사상들에 대해서 몇 차례 경고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사실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지인 갈라디아 지방은 여러 동방의 신비 종교들이 혼합된 지역으로 그들의 종교 문화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더욱이 많은 전도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곳에서는 그의 동족인 유대인들의 위협으로 바울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복음 전도 사역을 계속 수행하였으며(행 14:19-28), 특히 바울은 그들 가운데 유대주의적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것을 직시하여 유대인들의 유혹을 경계할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돌아서지 말 것을 자주 권면했던 것이다(행 20:29).
1:10
이제 내가. - 헬라어 원문에는 본문 서두에 '그러니까 지금'(알티 가르)이란 말이 나음으로 10절이 지금까지의 언급의 결론임을 보여 준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 바울은 항상 자신을 복음의 일꾼, 즉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처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지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또한 자신의 형편을 돌아보지 않고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을 전도한 이후에 그 지역에 있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단지 이방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을 강조하며 율법 이 정한 규례를 무시했다고 바울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이러한 주장을 모를 리 없던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본절을 통해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떤 이익을 구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바울의 고백은 그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고자 했다면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보다는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율법적 행위를 내세우며 존경 받는 바리새인으로 계속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또한 이는 오히려 바울을 모함하며 율법적 행위를 내세우는 유대인들이야말로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역설적 표현이다(Cole). 롬 6장 자료노트, '죄의 종과 그리스도의 종 대조' 참조. 한편 여기서 '종'(둘로스)은 자신의 의지보다 주인의 의사에 복종하여 움직이는 자를 가리키는 바 이는 바울의 모든 행동의 기준이 자신의 의지나 사람의 기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리스도의 명령에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1:11-24 사도직에 대한 바울의 자기 변호
앞 부분(6-10절)에서 본서의 집필 동기를 밝힌 마을은 이제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가면서 먼저 자신의 사도적의 정당성을 변론한다. 이는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거부하고 율법 준수를 주장하는 자들이 자기 입장의 강화를 위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자기가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도직 변론이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즉 여기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신적 기원(神的起原)을 가지고 있음을 사도가 되게 된 경위 설명을 통해 밝히고 있다(11-17절). 즉 자신이 받은 이신득의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11.12절), 자신이 회심 이전에는 남달리 율법을 고수하는데 열심을 내고, 교회를 박해하던 자였으나(13,14절),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부르심을 받아(15-17절) 이제는 율법주의를 버리고 오직 복음전파에만 주력하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즉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것임을 밝힌다. 이것은 바을 자신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자신의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밝힌 바울은 이어 이에 대한 하나의 증명으로 제 1차 예루살렘 방문과(18-20절) 수리아와 고향 길리기아로 돌아가 전도함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사도권을 부여 받았음이 입증되었음에 대해 논한다(21-24절). 이는 행 9:26-30과 관련을 가지는 내용으로서 예루살렘을 방문했으나 여러 사도들을 만나 폭넓게 교제를 나누지 못하였으므로 사도들의 지도를 받아 바울이 사도가 됐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과 길리기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데 이 기간 역시 마을은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영적인 힘을 공급받았음을 암시함으로 자신의 사도권이 신적기원을 가졌음을 보여 준 건이다. 한편 이 부분의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의 근본적인 근거를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물론 방편적으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소명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원천적인 소명 수여자는 하나님인 것이다(롬 1:1; 고전 9:16). 따라서 사명자는 '하나님 앞에서'란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지고 주의 일을 굳건히 수행해야 한다.
➁ 하나님은 어떠한 간악한 자도 변화시켜 당신의 일꾼을 만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다(눅 5:32). 따라서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력보다 하나님의 붙드심과 인도하심이 더욱 요구된다.
➂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긴 기간이 흐른 다음에서야(18절; 2 :1) 본격적으로 이방 선교의 대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큰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인내함으로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1:11
형제들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델포스'는 문자적으로는 같은 혈통을 지닌 사람을 의미하나 상징적으로는 예수 안에 속한 모든 사람(마 12:50)), 특히 동역자를 의미한다(고후 1:1). 여기서는 상징적 의미로 쓰였다. 한편 바울은 지금까지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질책하기 위해 강한 어조로 말했으나, 본절에서는 사랑이 담긴 호칭을 사용함으로써(갈 3:15; 4:12; 5:11; 6:1) 독자들로 하여금 지금부터 전개하려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변증에 관심을 집중시키려 한다.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파 사역이 결코 사람의 기쁨과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혔다(10절). 그리고 나서 이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사람의 생각에 따라 된 것이 아니다'는 뜻으로서 이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단순히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내가 전한 복음'(토 유앙게리온 휘프 에무)이란 말의 원어상보다 정확한 표현은 '나로 말미암아 전해진 복음'이라는 뜻인데, 이는 바울 자신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1:12
이는 내가‥‥아니요. - 본절은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데 가르 에고'()로 시작 된다. 여기서 '우데'는 '결코 아니다', '역시 아니다' 라는 의미로 본절이 인간적인 것에 대한 강한 부정에 기초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가르'는 '왜냐하면'의 뜻으로 본절이 11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을 밝힌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 사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인간에 의해 전승되고 교훈되어진 것들을 좇아 갔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울은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또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철저한 율법 교육을 받았기(행 22:3) 때문에 예로부터 인간적인 관계에 의해 유래된 것들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이후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았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받았다. 즉 여기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언급은 바을 자신이 전한 그 복음은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 말을 통해 바울은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는 또한 바울이 항상 복음을 전할 때마다 예수님과 지속적으로 영적인 교제를 가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편 '계시'(아포칼쉽시스)는 문자적으로 '덮개를 제거하여 드러나는 것'이란 의미를 지니는데 이처럼 덮개를 제거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되어질 수 없다. 따라서 계시는 인간이 추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 주셔야지만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보더라도 바울이 복음을 받고, 사도가 된 것은 오직 신적 역사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교회를 심히 핍박 궁낼 잔해하고. - 이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 전의 그의 생활, 즉 그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복음의 가치를 깨닫기 이전에 행했던 복음의 박해자로서의 생활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의 잘못된 자기의 체험을 제시하여 기독교의 가치를 논증하는 것은 바울이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었다(행 22:3-10; 26:5-12; 빌 3:4-6). 한편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란 말은 과거 바울이 어느 유대교 율법주의자 못지 않게 그들의 규례를 열심히 행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유대교란 모세 율법을 기준으로 하고 조상들의 유전을 중시하여 이것을 행함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매우 강한 율법주의 성향을 가진 유대인들의 종교인데, 바울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때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신앙에 위배되던 기독교를 열심으로 박해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핍박하여'(에디오콘)란 말과 '잔해하고'(에포르둔)란 말은 모두 미완료형으로서 이는 회심하기 이전 바울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여 멸절시키고자 끊임없이 박해를 가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전자 즉 '핍박'은 짐승을 추적하여 사로잡는 사냥꾼의 행동을 가리키는 표현이고, 후자 즉 '잔해'는 군인들이 점령지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을 뜻하는 말인바 여기서 두 단어가 겹쳐 나오는 것은 그 당시 바울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의 정도가 대단히 심했음을 보여 준다. 행 12장 연구자료 '초대 교회 박해사' 참조.
또한 바울이 핍박의 대상을 '하나님의 교회'라 표현한 것은 교회에 대한 핍박은 예수에 대한 핍박임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핍박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결국 유대주의자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교회를 핍박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이는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는 참 진리를 가진 종교는 유대교가 아니라 오직 기독교뿐임을 보여주기 위한 표현이기도 하다.
1: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 보다‥‥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 본절에서 '여러 연 갑자보다 더욱 열심히 있었다'는 바울의 고백은 그가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을 때, 비슷한 나이의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 우월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소, 프로에코프톤 앤 토 유다이스모)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유대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는 뜻으로서 이는 바울이 회심하기 전 유대교의 신앙과 규범에 매우 철저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본절에서 '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제로테스'는 당시 율법에 대한 열심히 로마나 개종자에 대해 폭력도 불사하던 열심당(Zealot)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마 10:4; 눅 6:15; 행 21:20). 따라서 바울도 개종 이전에 열심당원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Lightfoot) 오히려 본절의 표현은 앞의 문맥과 연결하여 개역 성경의 번역과 같이 율법과 조상의 유전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이 있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Burton). 한편 여기서 '조상의 유전'은 구체적으로 바리새 인들로부터 전승된 규례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다(AHord, Lightfoot). 유대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성문 율법(成文律法) 뿐 아니라 구전 율법(ㅁ傳律法)도 받았다고 믿었으며 그 구전 율법은 모세로부터 당시까지 계속 전수되고 있다고 보았다. 이는 주로 생활과 밀착된 조항들이었기 때문에 성문 율법보다 사람들의 생활에 더욱 깊숙이 침투하여 제한하는 성격을 지녔다. 또한 후대 랍비들은 이를 613개 조항으로 요약해 더욱 큰 권위를 부여하여 이것의 준수 여부로 신앙심의 크기를 판가름했다. 바울은 이러한 당시의 상황 가운데서 그 누구보다도 율법과 유전에 충실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말할 때, 유대교에 대한 열심으로 가득찬 광신자로 자주 묘사하고 있다(행 22:4; 26:11; 빌 3:6).
1:15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 13,14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유대교에 그처럼 깊이 빠져 있던 바울이 자신의 과거 생활을 청산하고 회 심하여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인간적인 힘이나 노력에 의해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변화는 매우 기적적인 사건으로서 그것은 곧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의 문장의 주어가 '나' 곧 바울이었으나 본절에서 하나님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한편 여기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란 말은 바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을 말할 때 자주 강조되는 말씀이기도 하다(사49:1; 렘 1:5; 눅 1:15). '예정'에 대해서 롬 8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또한 '택정하다'(아포리조)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떼어놓다', '분리하다'는 뜻으로서 이는 멸망할 자와 구분하여 구원할 자로 삼았다는 의미와 더불어, 특정한 직분과 사역을 위해 구별되어 부르심을 받은 사람과 연관시켜서도 사용되는 표현이다(레 20:26; 마 25:32). 한편 이러한 예정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부르심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택정하다'와 더불어 '부르신'(칼레사스) 역시 부정 과거 시제로 사용되어 하나님에 의해 단번에 결정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보여 준다.
1: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의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성장한 바울이 예수님을 이방에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 자이며 나쁜 사상을 퍼뜨리는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여겨 박해에 앞장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만들기에 앞서 그에게 예수님을 나타내셔서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바울을 결정적으로 회심하게 만든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수님을 계시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리스도께서 바울로 하여금 복음 전도자로서 반드시 필요한 내적 확신과 소명을 충분히 주셨음을 시사한다. 또한 여기에 이어지는 '기뻐하실 때에'(호테 데 유도케션)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그분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합당히 여기셨음을 강조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이다. 즉 헬라어 원문에는 이 말이 15절 초두에 나타나서 바울의 선택과 부르심 그리고 예수님을 계시하는 일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Robetson).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 이 말은 바울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즉각적으로 순종했다는 것을 뜻한다. 아울러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바울의 진술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은 매우 분명한 계시였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에 대해 굳이 다른 사람들과 의논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한편 성경에서 '혈육'(사르키 카이 하이마티)은 흔히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없는 영적 무능력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체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고전 15:50; 엡 6:12).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신비로운 체험과 부름 받음이 이와 같이 영적 무능력을 가진 인간에 의해 보완 받을 필요조차 없는 하나님이 주신 내적 확신에 근거하고 있음을 이러한 표현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1:17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 앞절에서 바울은 복음을 그가 교제하던 사람들과 상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본절을 통해서 바울은 그가 회심한 이 후에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의 내용을 전수받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사실 바울이 복음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했다면 그는 예수님에 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이나 여러 중인들을 찾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내린 예수님의 계시는 매우 명확한 것이었기에 굳이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만나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바울의 행동은 결코 그보다 먼저 사도된 사람들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라 단순히 당시 시점에서는 사도들을 만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는 의미일 따름이다.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이 아라비아에 간 기록은 사도행전에 전혀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구체적으로 아라비아의 어느 곳을 다녀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 '아라비아'란 명칭은 페르시아만과 홍해 사이에 이르는 넓은 사막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혹자는 이곳을 아라비아 가운데서도 과거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고(출 19:14,25) 엘리야가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찾았던 (왕상 19:8) 유서 깊은 시내산일 것으로 추정한다(Stanley, Lightfoot). 그러나 바울이 '아라비아에 있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을 살펴볼 때, 다메섹 인접 지역일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듯하다(Lipsius, Rendall). 한편 바울이 아라비아로 간 이유도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흑자는 그곳의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보기도 하나(Chrysostom). 전도 여행의 과정이라기보다는 모세와 예수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바울 또한 복음의 사역자가 되기에 앞서 그곳에서 많은 시간 동안 경건의 훈련을 쌓으며 사역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이 시기는 구체적으로 행 9:22절과 23절 사이의 기간으로 보인다(Hendriksen).
1: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함께 십 오 일을 유할새. -여기서 '그 후 삼 년 만에'는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온 지 삼 년 후라는 의미가 아니라'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3년이 지나서'란 뜻이다(Meyer, Lightfoot). 즉 바울은 회심한 이후 다메섹에 며칠 있었으며(행 9:19) 또한 아라비아에서 얼마를 있었고 돌아온 후에도 다메섹에 여러 날 있었던 것이다(행 9:23). 따라서 3년은 이 모든 기간을 합한 기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3년은 만 3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3년째'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 즉 만 1년과 그 전후 시간 얼마를 포함한 기간을 3년이라 표현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513mm). 여하튼 이러한 여러 상황을 중합해 볼 때, 바울은 그가 회심한 이후 바로 게바, 즉 베드로를 만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게바를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 전파 사역이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오해를 종식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와 교제를 나누기 전에도 이미 바울은 사도로서의 복음 전파 사역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15일이라는 기간이 명시된 것은 15일 만에 사도 아닌 사람이 사도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사도가 될 수는 없는 짧은 기간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한편 '심방하다'(히스토레오)라는 말은 유일하게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로 '개인적으로 친숙해지다', '서로 교제하여 지식을 얻다'는 뜻을 갖고 있다. 이는 바울이 동역자 베드로와 교제함으로써 사도로서 서로 간에 유익을 얻기를 원했으며 또한 15일에 불과했을지라도 베드로를 통해 역사적 예수의 행적에 대한 다소의 지식들을 얻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1: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만을 만나고 다른 사도들을 만나 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다른 사도들이 과거 바울의 핍박 활동을 생각하고 또 바울을 이용하여 사도들을 색출하려는 유대인들의 계략이 숨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바울 만나는 것을 피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 이 후 사도들이 보여 준 담대함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잘 나타나 있는데 (행 4:23-31; 5:40-42), 그 대표적 예로 스데반이 순교한 직후 죽음의 위협이 닥쳐왔을 때 에도 사도들은 결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행 8:1). 따라서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다른 사도들을 만날 수 없었던 까닭은 그 당시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팔레스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한 전도와 또한 이방인을 전도하는 과정에서 사도들이 당연히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주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행 11장). 한편 여기서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가리키는데.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으며(요 7:5) 오히려 미친 자로 보았으나(막 3:21)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 후에 예수님을 믿게 되어(고전 15:7) 오순절 성령 강림시에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다른 동생과 더불어 성령 강림을 체험했다(행 1:14).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앙으로 복음 전파에 앞장서서 활동하였으며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예루살렘 총회 때 의장이 되기도 하였다(행 15:13). 그러나 A.D. 62년경 산혜드린 공회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정죄 받고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약 1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1: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거짓말이 아니로라. - 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에게 먼저 예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밝힌 바울은 이제, 자신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했으며, 베드로를 만난 기간도 15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란 말로써 확증함으로써 그의 사도직의 기원에 대해 또다시 언급하고 있다. 즉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 출처에 대해 당시 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 사이에 떠돌던, 회심한 이후에 예루살렘에 오랜 기간 동안 머물면서 여러 사도들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아 사도가 되 었다는 소문이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Huxtable). 한편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란 구체적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 의식 가운데 자신의 정당성을 밝힐 때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강조적 표현이다(롬 9:1; 엡 1:3,15; 골 1:4). 엡 1장 자료 노트 참조.
1: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바울은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동안 헬라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는 사실을 안 성도들이 바울을 피신시켜 가이사랴로 가게했으며, 그곳에서 다시 다소로 가게 됐기 때문이다(행 9:26-30).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피신이 아니라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보다 널리 이방에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계획이었다(행 22:17-21). 따라서 짧은 예루살렘 방문 후에 바울은 당시 수리아의 행정 구역에 속해 있던 가이사랴에 잠시 머문 후 그의 고향이자 길리기아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인 다소로 가서 그곳에 머물렀음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1: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 '유대'란 명칭은 행정 구역으로는 사마리아 이남 지역을 말하나 여기서는 보다 통상적인 의미로 쓰였다. 그리고 문맥으로 보아서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팔레스틴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obertson), 왜냐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로부터 율법을 배웠고(행 22:3) 그곳에서 기독교인을 박해했을(행 7:58; 9:1,2) 뿐만 아니라, 회심 이후에도 15 일간 머물렀으며(18절) 그의 생질도 이곳에 살고 있었으므로(행 23:16) 예루살렘에는 바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란 표현은 유대인의 종교 집회 장소였던 회당과는 분명히 구별된 곳으로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써 세워진 교회를 말한다. 따라서 본절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대 여러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이는 예수님 부활 이후에 활발하게 전개된 초대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의 복음 전도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얼굴로 알지 못하고'란 말은 당시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대 지역에 있던 여러 교회들이 당시까지는 예루살렘과 수리아 그리고 길리기아 지방에서만 활동하고 있던 바울에 대해서는 소문만 들었을 뿐 면식이 있다거나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하였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1: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성도들은 바울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바울의 변화된 모습에 대한 소식만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 이제는 변화되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한편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호 디오콘 혜마스포테)라는 말을 직역하면 '과거에 우리를 수시로 박해하던 자'란 뜻으로서 이는 당시 유대 여러 지역의 성도들이 과거 바울이 앞장섰던 여러 핍박 사건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또한 여기서 '그 믿음'(텐 피스틴)으로 정관사를 붙인 이 말은 바울이 전에 핍박하던 바로 '그 믿음'을 이제는 전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는 구체적인 표현이기도 하다(행 6:7; 살후 3:2).
1: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핍박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 성도들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 도리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바로 그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었다는 것은 기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과 유대 지역의 성도들은 처음에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바울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행 9:26). 그러나 바울의 회심의 진실성이 드러나고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복음의 일꾼으로서 바울이 행하는 사역의 결과를 듣게 된 여러 성도들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극적인 변화를 통해 크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바울의 변화는 그 시대의 여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케 했다. 한편 회심 이후 바울의 주요 행적에 대해서는 본서 17권 서신서의 개론 특별자료를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