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장 문안 인사와 이단 경계 및 이단 척결을 위한 목회자의 자세
구속사적 개관:
전 21권의 신약 서신서는 신 ․ 구약 성경 66권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도의 구속(救贖) 구원의 원리 및 기독교의 교리 전반과 교회생활과 성도 개개인의 신앙생활 속에서의 이 교리들의 실천적 적용을 매우 조화 있게 제시하고 있는 책들이다. 그 중에서도 바울의 목회 서신들 중 하나인 본 디모데전서는 로마 1차 투옥(A.D. 61-63년경)에서 풀려난 바울이 마게도냐(Macedonia) 여행 중에 당시 에베소 교회를 맡아 목회하고 있던 청년 디모데에게 기본적인 목회 지침을 제시해 주고자 보낸 서신으로서 하나님의 값없는 구속 구원의 은혜로 성도가 된 자들이 이 지상에서 세상 끝 날까지 신앙과 생활의 중심지로서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영위하게 되는 교회생활과 관련된 가장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교훈들을 주고 있는 책이다.
이러한 본서를 시작하는 첫 장인 본 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전반부 1,2절은 본서 전체의 도입부로서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사도권(使徒權)에 근거한 축도를 줌으로써 공식적인 문안 인사를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서의 도입부는 여타 서신서들과 달리 별다른 시작하는 말없이 간단한 문안 인사로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본문의 세부 설명은 해당 본문 문단 강해를 참조토록 하고 구속사적 개관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후반부 3-20절은 초대 교회 당시 에베소 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주요 목회 현안과 관련하여 신학 원리적인 측면에서 목회 지침을 주고 있는 본론 전반부 1:3-3:13까지의 일련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이러한 본문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시급한 대외적인 문제로서 교회의 존립(存立) 자체를 위협하는 이단(Heresy)에 대한 경계와 순수한 복음의 진리에 근거한 정통 교리의 확립 및 수호에 책임이 있는 목회자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좀 더 상술하자면, 먼저 3-11절에서는 우선 이단사상을 지닌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거짓 가르침들을 엄히 경계한다. 그리고 12-20절에서는 과거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였으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심(回心)하게된 후에는 도리어 복음 선교를 위해 순교까지도 각오하는 자가 되었다는 바울 자신의 회심 사건에 대한 간증과 더불어 바울이 디모데에게 복음의 진리에 근거한 정통교리의 확립 및 수호를 위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능히 감당하도록 격려하고 촉구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장 후반부 3-20절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개관할 때에 우리는 먼저 교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이단(Heresy)의 존재와 관련된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현 세상에는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께 도전하여 타락하였고 인류의 시조(始祖)인 아담까지 유혹하여 범죄케 한 사단(Satan)이 권세를 부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 세상을 심판하사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녀를 구분하는 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타락한 이 세상의 오고오는 세대에 걸쳐 모든 택한 하나님의 백성(God's People)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고 회개하여 다 구원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시기 위해 사탄과 세상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시고 장구한 구속사(救贖史)가 현 세상에서 진행되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침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모두 회개하여 구원을 얻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사단과 세상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세상 끝 날이 오기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믿는 성도들을 향한 사탄의 공격이 끊이지 아니할 것인데 그 양상은 곧 핍박과 환난 뿐 아니라 각양 이단 사상으로 미혹하는 것 등이다.
한편 사탄의 배후 조종으로 복음의 바른 진리를 거스리고 혼란하게 하는 이단(Heresy, 異端)은 비단 초대 교회 당시뿐만 아니라 약 2,000년 교회사(敎會史)에 있어 한 번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있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세속 학문의 탈을 쓴 이단들이 교회 안팎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단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이 왜곡되게 이해하게 하기 위하여 거짓 교리로써 진리를 흐리게 하며 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지 못하고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한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최대한으로 막음으로써 장차 말세에 자신이 받을 하나님의 무저갱 심판을 할 수 있는 한 연기시켜 보고자 함에서 비롯된 사단의 책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구속사(救贖史) 전개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항상 영적으로 경성해 있음으로 사단의 술수에 넘어지지 말고 자신의 믿음을 지켜 온전히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빌 2:12). 또한 목회자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 개개인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철저히 무장하여(엡 6:10-20) 이단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복음의 수호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그 참된 진리가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들도 우리의 후손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전수하기 위한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속사적 사명 의식으로 새롭게 재무장하게 되는 것이다.
1장 본문 & 자료노트
원어연구-1:13: 포행자
'포행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휘브리테스'( )이다. 이 단어의 기본형은 '휘브리조'( )인데 '거만하다', '(상대방에게)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다', '모욕적으로 대우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단어의 형용사형인 '휘브리스'( )는 '~을 능가하는', '~위에'(over)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페르'( )에서 유래하여 '잘난 체하고 주제넘은'이란 뜻을 지닌다. 여기서 'uppish'라는 영어 단어도 파생되었다.
따라서 본절의 '휘브리테스'는 한글 번역의 표현처럼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의미만이 아니라 오만하고 모욕적이고 무례한 언동으로 부당한 인격적인 대우를 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정신적인 손상을 끼치는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는 이 단어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 시 비방자들에게 '능욕을 받는' 등의 표현으로 사용되었고(마 22:6; 눅 18:32), 여기서는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인격적으로 비난하고 경멸한 것, 또 물리적으로 그들을 핍박하는 등의 과거에 저질렀던 일련의 잘못들을 참회하는 중에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행 9:1,2).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도 과거에 그리스도를 향하여 또 교회를 향하여 바울과 같은 포행자가 아니었는가를 돌이켜 보면서 새 삶 ․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감격과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감사를 드리려야 하겠다.
1:1,2 문안 인사
본문은 본서 전체의 도입부로서 본서의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고 사도권에 근거한 축도를 줌으로 공식적인 문안 인사를 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식의 문두(文頭)는 신약 서신서에서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정형화된 형식이다. 이 문안 인사에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천명하고 있음은 본서가 비록 디모데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도권을 가진 바울 자신이 공적인 입장에서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 전 성도들 앞으로 보내는 공한(公翰)의 성격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이러한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이 복음으로써 양육하고 교훈한 영적 아들로서 칭하고 있다(2절; 고전 4:17). 이는 바울이 영적 아비의 심정으로 간절하면서도 권위를 가지고 디모데를 권면하고자 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즉 바울은 이러한 호칭을 통하여 당시 아데미(Artemis) 숭배의 중심지이자(행 19:33-41) 기독교의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이단들(Heresies)이 횡행하던 에베소에서 어렵게 목회하고 있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격려하고 그에게 목회 실무(實務)에 도움 되는 목회 지침을 주고자 기록한 본서 기록 의도를 수신자인 디모데에게 보다 정감 있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전 4:15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라고 했었다. 이 말처럼 본문에서 바울은 실로 단순히 지식만 전해주는 스승이 아니라 영적 아비로서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바 이는 모든 세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귀감이 아닐 수 없다.
1:1 바울 서신서의 도입부는 대개 공식적인 문안 인사와 시작하는 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절과 2절은 발신인과 수신인 명기, 사도권에 근거한 축도를 하고 있는 공식적인 문안 인사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 주석 14권 서신서 개론, '서신서의 구조적 특징'을 참조하라.
우리 구주 하나님과. - '구주'(소테로스)라는 용어는 '구원자', '구세주'(救世主)라는 뜻으로 고대로부터 신이나 신격화된 왕들에게 적용되었던 단어이다(Robertson), 그리하여 이방 황제숭배 집단에서도 황제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는데 특히 악명 높은 로마 황제 네로(Nero, A.D. 54-68)에게 자주 적용된 말이었다. 그런데 이 헬라어가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심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우리 구주는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을 위시한 전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의 구원자이시자 주인 되심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옥중서신에 두 번 사용된(엡 5:23; 빌 3:20), 외에는 목회서신에 10번 나타나는데 하나님을 지칭하거나(딤전 1:1:2,3; 4:10; 딛 1:3; 2:10; 3:4) 혹은 그리스도께 적용되었다(엡 5:23; 빌 3:20; 딤후 1:10; 딛 1:4; 2:13; 3:6), 그리고 70인역(Lxx)의 구약 역본(譯本)에서도 이 말이 20회 사용되었는데 그 중 18회는 하나님께 적용되었다. 한편 바울이 이 표현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 것은 구원의 궁극적인 근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선 친히 이 세상을 주장하고 계실 뿐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속하신 분이신 것이다. 이는 당시 제우스(Zeus)나 아폴로( )를 세상의 구주로 받들고 있던 헬라 ․ 로마인들의 관념을 정면으로 대항하는 사상이 아닐 수 없다(Lenski, Lock).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 앞서 말한 '우리 구주 하나님'과 동격의 의미로서 양자 간에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 용어이다(Bengel). 즉, 이 말은 골 1:27에 나타난 '영광의 소망'이라는 말과 함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주신 사실을 가리킨다. 한편 초대 교회 순교자들의 편지에도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말들이 많이 있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공동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것입니다'(Ignatius, Ephesians 21:2),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과 진실된 의를 견지할지니 그는 곧 그리스도시라'(Policarp's Epistle). 그런데 '우리의 소망'이란 분명히 객관적인 말이면서 상당히 요약된 표현이다. 이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소망이 그리스도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그는 우리 소망의 실제적인 구현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즉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기까지 친히 낮아지셨으나 대속 사역을 성취하신 후 본래의 영광을 회복하신 분이시다(빌 2:5-11).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소망하거나 또는 소망하지 않거나 간에 그는 인간이 죄악 가운데서 구원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Lenski). 결국 이상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구주'와 '우리의 소망'은 밀접한 연결성을 가진 용어로서 구세주로서의 하나님과 소망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동시에 고백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 '예수' (이예수스)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예호슈아), '예수아' (예슈아)의 헬라식 표기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이다. 이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강림하신 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명칭이다(마 1:21). 그리고 '그리스도'(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 '메시야'(므쉬아흐)에 해당하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선지자, 제사장 및 왕으로서(출 29:7; 삼상 10:1; 왕상 19:16) 이는 그리스도의 삼중 직임(三重職任)을 예표해 준다. 즉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 선지자요 이를 위해 친히 자신이 옴으로써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린 대제사장이시다. 그리고 창세 때에 지은 천지 만물을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이신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마가복음 서론 특별자료, '메시야의 이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결국 '그리스도 예수'란 호칭은 예수가 바로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던 메시야(Messiah)이심을 강조하는 칭호임을 알 수 있다(마 1:16-23). 한편 대체로 바울 서신에 있어서 초기에 기록된 것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란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고 후기에 기록된 서신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란 명칭이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공동서신(약, 벧전 ․ 후, 요일 ․ 이 ․ 삼, 유)에서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란 호칭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차이에 대해 혹자는 '여타 사도들에게는 지상에서 사역하셨던 주님에 대한 기억이 앞섰을 것이므로 주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예수'(Jesus)란 이름을 먼저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을 주로 썼을 것이며, 사도 바울은 주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먼저 언급한 '그리스도 예수'란 명칭을 주로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ock).
명령을 따라. - '명령'(에피타게)은 본래 '권세', '권위' 란 뜻으로 거역할 수없는 절대적 명령을 가리킨다. 즉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그가 먼저 자원하여 된 것이 아니라, 절대적 권위를 지닌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된 것임을 나타내준다. 그런데 바울은 보통 이 같은 표현 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형식을 취하는데(고전 1:1; 고후 1:1; 엡 1:1; 골 1:1; 딤후 1:1)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은 바로 명령으로써 받아들여지게 된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의 사도직에 대한 절실한 사명감이 내포된 말이기도 하다. 한편 그의 사도권에 대한 이 같은 주장은 이 편지의 성격이 디모데에게 보낸 사신(私信)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대상이나 시대에 관계없이 모든 교회에 보내는 공한(公輪)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 ‘사도’에 해당하는 '아포스톨로스'( )는 '보냄을 받은 자'란 뜻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거나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된 자를 가리킨다. 이를 위하여 성부(聖父) 하나님은 성자(聖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성자는 12사도를 택하여(마 10:1-4) 사람들에게로 보내셨다(요 20:21), 이처럼 '사도'(apostle)란 본래 복음을 전파하는데 전 생애를 헌신했던 예수의 12제자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그러다가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자로 맛디아가 보충되었는데(행 1:26) 그가 사도로 선출될 수 있었던 조건은 ① 세례 요한 때부터 주님과 같이한 자 중에서(행 1:21), ②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행 1:22) 라는 조건에서였다. 그 후 사도란 개념은 보다 넓어져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소명 받은 바울(행 9:15; 22:21)을 비롯하여 바나바(행 14:4,14), 주의 형제인 야고보(고전 15:7; 갈 1:19), 실루아노(살전 2:6) 등도 사도로 불리웠다. 또한 훗날 예수의 70인 제자들도(눅 10:1) 사도로 불리웠다는 초대 교회의 기록이 있다(Irenaeus. Terullian, Lightfoot). 이상과 관련해선 행 1장 자료노트. '사도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바울서신에서 바울이 자신을 사도라고 자칭한 것은 롬, 고전 ․ 후, 갈, 엡, 골 등이고, 빌립보서에서는 예수의 종으로(빌 1:1) 빌레몬에서는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로 칭하고 있다(몬 1:1).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 헬라 ․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선생과 제자 관계를 부자(父子) 관계로 표현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이 전도한 제자를 흔히 자녀에 비유했다(고전 4:14-17; 갈 4:19). 디모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바울은 그를 영적으로 양육하고 연단시켰기 때문에(빌 2:19-22) 그리스도 안에서 디모데에 대하여 아들이라 칭한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디모데를 성령으로 중생시켜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약 1:18). 그런데도 바울이 디모데를 가리켜 '아들'(테크논)이라고 한데 대하여 학자들은 저마다 다음과 같이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① 디모데에 대한 친근감을 표하는 의미에서이다(Lenski). ② 디모데가 바울을 닮은 자, 즉 또 하나의 바울이라는 뜻에서 이다(calvin). ③ 디모데가 바울의 대표자 곧 '후계자'라는 뜻에서 이다(Bengel).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들보다는 바울이 디모데를 신앙으로 인도하였다는 영적 부자(父子)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즉 성도들의 최고이고 유일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나 저들을 신앙의 길로 인도한 전도자는 2차적으로 그의 영적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Hendriksen). 한편 '믿음 안에서'란 '육으로 말미암은, 즉 혈통에 의한'이란 말과 대조되는 것으로 바울의 서신에서 자주 나타나는 독특한 표현이다. 그리고 '참'이란 합법적인 아들이란 뜻으로 사생아나 양자(養子)가 아닌 참 아들을 가리킨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여기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해 주시는 무조건적 호의를 말하고, '긍휼'은 불행과 고뇌에 허덕이는 자에게 대한 연민으로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위로를 가리킨다. 그리고 '평강'은 은혜와 긍휼의 결과로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모든 것이 정상화되어 있는 복된 상태, 즉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영적 평안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모든 서신에서 일반적으로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딤후 1:2을 포함하여 이곳에서만 '긍휼'이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극진한 애정을 표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trench). 사실 당시 영지주의(Gnosticism)와 유대주의(Judaism)가 판치던 소아시아에서의 디모데의 사역은 괴롭고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강퍅한 심령도 능히 굴복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함께 자신의 영혼에 참된 안식과 기쁨을 주는 하나님의 평강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에 더 첨가하여 낙망적인 상황과 괴로운 처지 가운데서 그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긍휼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긍휼'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아무런 생각 없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온갖 괴로움을 무릅쓰고 일하는 디모데를 생각하여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기원한 것이다. 한편 루터(Luther)는 '긍휼'이 환난 중에 교역자가 받는 하나님의 보호를 가리킨다고 하였는데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해석이다.
1:3-11 거짓된 교훈 척결을 위한 목회자의 자세 교훈
본 단락은 이제 앞에서 문안 인사를 마친 이후 여타 서신서와 달리 별다른 시작하는 말의 첨가 없이 곧바로 목회자로서 겪어야 하는 제반 사항에 대한 지침을 주고 있는 본론을 개시하는 단락이다. 더욱 정확히는 본론 중에서도 첫 부분으로서 이단에 대한 자세를 다루고 있는 1:3-20 기사의 앞부분이다.
바울이 자신의 믿음의 아들이요 후배 목회자이기도 한 디모데에게 목회 지침을 주면서 이처럼 무엇보다 먼저 복음의 바른 진리에서 떠난 자들의 거짓 교훈 곧 이단(heresy, 異端)의 영향력을 봉쇄하고 바른 교훈 곧 순수한 복음에 근거한 정통 교리의 확립에 힘쓸 것을 강조할 정도로 정통 교리의 확립은 초대 교회 당시의 중차대한 현안이었다.
이제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갓 이전된 전환기인 초대 교회 시대에 비로소 태동된 초대 교회는 내외적으로 심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교회의 분열과 미비된 조직 정비 등이 내부적 도전이었다면 점증해가는 유대주의자들과 로마제국의 박해와 교묘한 거짓 교리로 성도를 유혹하는 이단이 외부적 도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이단은 근본적으로 사단의 궤계에 기인한 것으로써 교회의 본질 자체를 변질시키려는 가장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에 바울은 무엇보다 먼저 바른 복음에 근거한 정통 교리의 확립과 사수를 목회자의 가장 큰 소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의 주요 이단은 유대교(Judaism)의 영향으로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장하는 유대주의적 이단과 다신론, 영육 이원론 등의 헬라 사상의 영향으로 발생한 영지주의(Gnosticism) 등이었다.
이에 본 단락에서 바울은 먼저 이처럼 근본적으로 진실과 정의를 결여한 이단 사설을 퍼뜨리는 불신실한 자들의 침투를 원천 봉쇄할 것은 물론 그들과의 불필요한 변론을 근절할 것을 명한다(3-7절). 그리고 이단 사설이 허망된 실례의 하나로 구원을 위하여서는 율법 준수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유대교적 율법주의의 모순에 대해 율법은 직접적으로 구원을 주는 계시가 아니라 정죄의 기준으로서 다만 악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단히 피력하고 있다(8-11절). 성경은 여러 곳에서 비록 시대와 관경에 따라 그 표면적 내용은 다소 다르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사단(satan)에서 기인하여 기독교 정통 신앙을 왜곡 호도하는 것을 본령(本領)으로 하는 이단이 끝없이 준동하며 특히 말세에 이르러 극성할 것임을 거듭 지적하고 있다(마 24:11-13; 딤후 3:19). 이에 우리는 그 실체를 꿰뚫어 보고 소극적으로는 본 단락의 말씀처럼 이의 침투를 제지하고 이들과 불필요한 변론을 하지 말아야 하겠으며,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기독교 정통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함으로써 원천적으로 이단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1: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 '마게도냐'(Macedocia)는 발칸 반도의 중동부에 있는 아가야(Achaia) 북부지방으로 B.C. 7세기 초에 페르딕카스 1세가 그곳의 원주민들을 내쫓고 마게도냐 왕국을 건설한 곳이다. 이 마게도냐 왕국과 관련하여 세계 역사상 잊혀질 수 없는 인물이 곧 필립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이 이 지역에 속했는데 알렉산더 사후(死後), B.C. 276년경에는 안티고누스 2세가 이곳을 통치하였다. 그러다가 B.C. 168년에 로마에 정복당하고, B.C. 148년에 로마의 한 주가 되었는데 수도는 데살로니가였다. 한편 본절은 바울이 처음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가 놓인 뒤에(A.D. 63년경) 바울과 디모데가 같이 에베소에 머물다가 바울은 마게도냐로 떠나고 디모데는 계속 에베소에 머물게 했던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Ellicott). 이 같은 기사는 사도행전의 바울 전도 여행에 관한 기록(행 13-21장)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로 인해 본서의 저자가 과연 바울이냐 하는 논쟁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본서 자체에 본서의 발신자가 바울임이 분명히 밝혀져 있으니(1절) 그러한 저자 논쟁은 전혀 무의미하다.
너를 권하여. - '권하여'(파레칼레사)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간절히 원한다'(beseech), '간청한다'(entreat), '원한다' (desire), '간구하다'(pray)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마 8:5; 행 2:40; 고전 1:10; 고후 12:8; 히 13:19). 이것은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마게도냐로 같이 가서 그와 함께 일하며 그의 시중을 들고 싶어 했으나 바울은 디모데를 간신히 설득하여 에베소에 계속 머물게 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Hervey).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 에베소(Ephesus)는 로마 제국 당시 소아시아의 로마 관할 지역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유했던 자유 무역 항구 도시였다. 행 18:19 주석 참조. 바울은 그의 3차 전도여행 시(A.D. 53-57) 이곳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선교하였다(행 19:1-20). 그런데 바울이 이곳을 떠나 마게도냐로 가고자 했을 때 디모데로 하여금 에베소에 계속 머물게 한 이유는 에베소가 소아시아 지역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계 2-3장), 그리고 이 지방에 영지주의(Gnosticism)가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즉 이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에베소 교회에 머물러 이 이단(異端) 사상에 대하여 기독교의 정통 진리를 수호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같은 이단 사상을 경계한 서신인 골로새서도 에베소 인근의 교회인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이라는 것과, 그노시스파의 영도자인 케린터스(Cerintus)를 적대한 요한 서신들도 에베소에서 저작되었다는 점에 의해 잘 뒷받침되고 있다. 이러한 영지주의에 대하여서는 요일 서론 특별자료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보다 자세한 사항은 그곳을 참조하라.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거나 꾸며낸 이야기나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을 가리킨다(공동번역). 이들 중에는 20절에 언급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도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까닭은 아마도 저들이 돌이킬 수 있게끔 그 신분을 공개하지 않으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Hendriksen).
다른 교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테로디다스칼레인'( )은 목회서신들에만 특별히 나오는 많은 단어들 중의 하나인데, 이곳과 딤전 6:3에만 나온다. 이것은 딛 2:3의 '선한 가르침'(칼로디다스칼뤼스)의 반대 의미를 가진 단어로써 '이단'(하이레시스) 즉 거짓 교훈을 뜻한다. 그러나 이 단어의 고전적 의미는 조금 다르니 '다른 의견을 품고 있는 사람' 또는, '의견이 다른'이라는 뜻이다. 이로보아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사도들이 전수한 성경적 진리에 어긋나는 이단 사상들이 난무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그 폐단이 가장 컸던 이단 사상이 바로 영지주의였다. 한편 '다른 교훈'은 '다른'(헤테로스)과 '교사'(디다스칼로스)의 합성어이다. 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결합 형식의 합성어는 '다른 방언'(고전 14:21)과 '어울리지 않는 멍에를 멘다'(고후 6:14) 등을 찾아볼 수 있다.
1:4 신화와. - '신화'(위도이스)는 원래 넓은 의미에서 '말'(word, speech)을 뜻했다. 그러나 점차 그 개념이 한정되어 결국 만든 이야기, 즉 꾸며진 이야기를 뜻하게 되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벧후 1:16 외에는 모두 목회서신에 4회 나타나고(딤전 4:7; 딤후 4:4; 딛 1:14), 70인역(LⅩⅩ)에는 외경에 2번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신화란 영지주의의 창조설이나 아니면 헬라 ․ 로마 신화의 영향을 받아 어떤 가문(家門)이나 도시의 기원을 어떤 신에게까지 소급시켜 이야기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어떤 신이 세상에 내려와서 어떤 성을 세웠다느니, 혹은 신이 어떤 집 여자와 혼인하여 한 가문을 세웠다는 허황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이것을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적 기사에 필적하는 당시 헬라 ․ 로마인들의 각종 신화(myth)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ock).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 이는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을 자랑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강조하던 유대주의(Judaism)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자신의 족보를 유명한 조상들에게까지 억지로 연결시키던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경향은 유대인들에게서 극심했지만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Hervey). 한편 이상과 같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는 다음과 같은 폐단을 낳았다.
첫째, 몇몇 그릇된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구약의 유명 인물들에 대한 가상적이고도 허황된 족보가 만들어져 성경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혼란을 초래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영지주의(Gnosticism)의 위험이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을 엉뚱한 다른 신들에게서 찾으려고 하였는바 그릇된 창조관과 신관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한편 '끝없는 족보'에 사용된 '끝없는'(아페란토스)이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발견된다. 그러나 70인역(LⅩⅩ)에서 이 단어는 '한량없는', '끝없는', '지루하게 긴'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그중에 '지루하게 긴'이라는 뜻이 본절의 의미와 가장 가깝다(Hervey). 그러나 이를 다른 말로 의역하면 '무익한'으로 옮길 수 있다.
착념치. - '착념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세르코마이'( )는 딤전 4:13에도 나오는데 '어떤 사람의 생각에 근접하다', '동의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동의한 바를 생활신조로 삼을 뿐 아니라 그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까지도 뜻한다.
이런 것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 여기서 '경륜'(오이코노미아)이란 말은 넓은 의미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주장하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또는 통치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보다 좁은 의미로 해석되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의미한다(공동번역). 그러므로 이 말은 계시에 의해 전달되고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진 복음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본절은 사도 바울이 어리석은 신화와 족보 이야기는 무익한 변론만을 일으킬 뿐 믿음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신화와 족보이야기는 의심스러운 변론만을 일으키고 올바른 진리를 제시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1: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 '경계'란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3절)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라고 명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경계의 목적이 사랑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실 아무리 정통 신학을 가지고 이단을 논박하였다 할지라도 저들 그릇된 자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돌이키게 하려는 사랑의 동기와 목적이 수반되지 않으면 그 일은 의미가 없다. 더구나 상대는 허무한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가지고 헛된 변론을 하는 자들이므로 그들을 정복하는 길은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고 저들을 감동 감화시키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서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아가페)을 말하고 있다. 즉 성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구원을 얻는 무조건적 사랑을 입었듯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서도 그 같은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마 10:8).
청결한 마음. - 거룩하고 참된 사랑의 첫째 출처이다. 여기서 '마음'(카르디아)이란 인간의 도덕심과 감정의 총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곧 허탈한 욕심이나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할 수 있다.
선한 양심. - 거룩하고 참된 사랑의 두 번째 출처이다. 여기서 '양심'(쉬네이데시스)은 지각(知覺)을 통해 공통의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가리킨다. 즉 양심은 지각에서 출발하여 선악을 아는 능력(faculty)이요, 동시에 정서(sentiment)인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정확한 자기 판단을 뜻한다. 항상 진리 가운데 거하며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올바른 판단 작용은 항상 진리 가운데 거하며 진리를 수호해야 하는 성도가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배교자(背敎者)들의 양심이 화인 맞았다는 사실을 디모데에게 경계해 주고 있다(딤전 4:2). 한편 이 낱말은 바울이 늘 애용하는 말로서 그의 서신에 20회 사용되었다. 그리고 복음서에는 요 8:9에서 1회, 사도행전에 2회(행 23:1; 24:16), 벧전에 2회(벧전 3:16,21)가 나타나고 있다.
거짓이 없는 믿음. - 참된 사랑의 세 번째 출처이다. 여기서 '거짓 없는 믿음'이란 자신의 이익의 방편으로 삼고자 하거나 불순한 동기에서 출발하지 않은 신실한 신앙을 가리킨다(행 15:9). 이것은 당시 거짓 교사들이 굳건한 기초가 없는 단순히 가식적인 믿음을 가지고서 자신의 밥벌이를 위해 성경 지식을 팔았던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고를 암시하고 있다. 한편 '거짓이 없는'이란 형용사는 다른 바울서신에 2회 사용되었는데 모두 '사랑'을 수식하였다(롬 12:9; 고후 6:6), 그리고 벧전 1:22에서도 형제 사랑을, 약 3:17에서는 지혜를 형용하였다. 그러나 본절은 간접적으로 믿음을 좇아 나는 사랑을 수식하는 것이다.
1: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 여기서 '사람들'이란 3절에 나오는 '어떤 자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까닭은 바울이 당시의 거짓 교사들을 들추어내기 보다는 다만 저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려고 간접적으로 그들의 오류만 지적하기 위함에서였을 것이다. 한편 '이에서 벗어난'이란 앞절에서 지적한 참된 사랑의 요소인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떠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벗어나'란 문자적으로 '표적에서 벗어난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신약 성경에서 이곳과 딤전 6:21; 딤후 2:18에서만 나타난다. 이것은 이들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을 외면하고 다만 쓸데없고 허풍스러운 말만 늘어놓다가 표적 없이 방황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누구든 바른 신앙의 길에서 탈선하면 결국을 허무의 길에 빠질 수밖에 없다.
헛된 말에 빠져.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타이올로기안'( )은 70인역(LⅩⅩ)이나 고전 헬라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말로서 오직 본절에만 나타나고 있는데, 그 뜻은 '공허한 이야기', '허탄한 지껄임'이다. 즉 이러한 말을 하는 자들은 비록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설득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Calvin)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사람이 만든 많은 번쇄한 세칙들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니만큼 헛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1: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 이 말은 당시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시사해 준다. 즉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써 구원에 이르는 줄로 착각한 자들로서 모세의 율법을 힘써 준행하기 위해서나 모세 율법에 대한 진리 탐구에서가 아니라 대중 앞에 자신들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그릇된 가르침을 퍼뜨리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복음의 바른 진리에 입각해 있지 않고 오히려 당시 도처에 만연해 있던 유대주의와 영지주의가 혼합된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고 다녔으니 정작 자신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한편 '율법의 선생'이란 '교법사'(敎法師)로도 번역되는데 이 단어는 바울서신에서 이곳 한 번 밖에 나타나지 않고 단지 누가에 의해 두 번 사용되었다(눅 5:17; 행 5:34). 그리고 여기 언급된 율법은 분명히 모세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긴 하나 이들 율법의 선생들은 바리새인 같은 율법사도, 아볼로와 같은 성경 교사(행 18:24,25)도 아니었다.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 '확증하다'(디아베바이오오마이)는 말은 딛 3:8과 이곳에만 나타나는 말로서 '굳세게 말하다', '강력히 주장하다'의 뜻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언하는 복음의 일꾼들이 취할 자세이지 헛된 말만하는 사람들이 취할 자세는 못된다. 사실인즉 그들은 율법에 대하여 말하였으면서도 그 가르치는 바에 대하여 확실히 알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얼마나 허무한 일에 종사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종교가 타락한 곳에서는 언제나 발견되는 것이니 우리 모두는 삼가 이들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깨닫지 못하는도다. - 기독교의 근본 진리에 대해 말하지만 그 말하는 바나 확증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인본주의적 종교 지도자들의 실상을 폭로해 주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율법의 선생들을 가리켜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책망하신 것을 기억할 수 있다(마 22 :29).
1:8 그러나 율법을 법 있게 쓰면. - 문자적인 뜻은 '율법을 율법답게 쓰면'이다. 즉 율법은 그 원 목적에 맞게 사용할 때 그 효용성이 발휘된다는 말이다. 물론 아담의 범죄 이래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으니 율법으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구원은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대속(代贖) 죽음을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때에 비로소 얻을 수 있다(롬 3:19-28). 그러나 이제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전혀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악을 깨닫게 해주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필요성을 절대적으로 요청하게 해준다(갈 3:24). 더군다나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선하신 뜻을 담고 있으니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생활 규범으로써의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 이에 관해서는 갈라디아서 서론 특별자료, '구속사적 관점에서 연결되는 율법과 복음의 이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선한 것임을. - 구약 율법은 원래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선민(選民) 이스라엘에게 부여하신 약속 있는 계명으로서(출 19장),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었다(롬 7:1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마 5:18). 이러한 율법은 비록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나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롬 7:7), 회개하여 구원자를 찾도록 하는 기능을 지닌다(갈 3:24).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蒙學先生)이 되어' 라고 하였으며(갈 3:24) 또한 '율법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말하였다. 그런즉 율법은 복음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주며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어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해주는 훌륭한 기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의 기능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율법을 가르친다면 사람들을 여전히 율법의 종노릇하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즉 저들은 율법의 요구를 문자적(文字的)으로 충족시키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그릇된 가르침에 빠져 일평생 괴로워하거나 아니면 자포자기하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율법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 율법의 기능이 약해지거나 또 그릇 사용될 때 폐기되어 버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이해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율법 그 자체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목적 또한 시대를 막론하고 불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노라. - 원문에는 이 말이 문장 초두에 나타나 있어 강조적인 뜻을 담고 있다. 즉 이것은 본절에서 이야기하는 바의 당위성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이다.
1:9 알 것은 이것이니. - 이 말은 분사형으로 앞의 구절(8절)에 나타난 '사람이'와 연결되고 있다. 즉 이는 모든 사람이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거스리는 자를 위한 것'(10절)임을 알아야 하며 그리하여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이다'라는 문맥이다.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 여기서 옳은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대체적으로 세 가지 주장이 있다. ① 이 말은 인류 역사 초기의 범죄하기 전 사람인 아담을 두고 한 말이라는 주장이다(Loek). 그러나 아담도 하나님께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율법, 즉 계명을 받은 자이니 적절하지 않다(창 2:16,17). ② 이 말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주장이다(Hendriksen).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율법이 이런 사람에게는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의미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본절 전후의 문맥과 부합되지 아니하며 또한 본문에 의거한 확실한 근거도 가지지 못한다. ③ 이 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 받은 자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Wohlenberg).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 바울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율법의 기능에 관해 얘기한 것과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를 서로 연결시켜 볼 때 가장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바울이 '옳은 사람은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법적인 측면을 말한 것뿐이지 그 인격적 측면을 들어서 말함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는 데 있어서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공로로 되는 것이고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본절 이하에 열거되는 15종의 죄목들은 대체로 십계명의 순서를 따른 것이다. 이것은 막 7:21-23에 13종, 롬 1:28-32에 21종, 갈 5:19-21에 15종, 딤후 3:2-5에 19종과 더불어 신약 성서에서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각종 죄목을 구체적으로 밝힌 구절이다.
오직 불법한 자와. - 율법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질서를 혼란케 하는 자, 즉 범죄자, 악인을 뜻한다(눅 22:37; 행 2:23; 고전 9:21; 살전 5:14). 다시 말해 이들은 심령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마치 하나님의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이다(Hendriksen).
복종치 아니하는 자와. - 하나님의 요구에 적극 반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를 뜻하는데(살전 5:14; 벧전 4:17), 바울은 딛 1:10에서 특별히 '유대인 가운데 헛된 말을 하는 사람들'과 연관시켜 사용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목회서신에만 3번(딛 1:6,10; 히 2:8) 사용되었는데, 70인역(LⅩⅩ)은 '불량자'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벨리아일'( )을 이 말로 번역하였다(삼상 2:12; 잠 16:27). 위 죄목은 십계명 전체와 관련된 것으로 율법의 개활적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을 뜻한다.
경건치 아니한 자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세베시'( )는 '믿지 않는 자'란 뜻인데 무신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외치 않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교만한 자를 의미한다(벧전 4:18).
죄인. - 하나님과 상관없이 날마다 죄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를 말한다(고전 6:9,10; 10:18-22). 이상은 십계명의 1,2계명을 범하는 자를 가리킨다.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 신약성경에서 이곳과 딤후 3:2에서만 발견되는 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고 그분의 뜻을 받들지 아니하는 자를 의미한다(벧전 1:15,16).
망령된 자와. - 하나님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고 그 영광을 가리우는 자를 가리킨다(히 12:16). 이상은 십계명의 3계명을 어기는 자를 가리킨다.
아비를 죽이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 - 신약성경에서 한 번 나타나는 말로서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자는 영적인 측면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할 가능성이 높은 자이다(히 12:8-10). 그런데 여기서 '치는'이란 단순히 폭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때려죽이고 학대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Hervey). 이것은 십계명의 5계명을 어긴 것이다.
살인하는 자며. - 신약성경에서는 이곳에만 나타나는 말로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까지도 일컫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요일 3:15). 이는 실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도전하는 자가 아닐 수 없다(마 5:21-26), 이상은 십계명의 6계명을 어긴 것이다.
1:10 음행하는 자와. - 이것은 이성 간에 불륜(不倫)을 행한 자(고전 6:18)로서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를 의미한다.
남색하는 자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세노코이테스'( )는 신약성경에서 이곳과 고전 6:9에만 나타나고 70인역(LⅩⅩ)이나 고전어에도 보이지 않는 특수한 낱말이다. 이는 동성 간에 성 접촉을 일삼는 죄악으로 고대 소돔과 고모라에서 성행하였고, 로마 사회에서도 성행되어 신약에 여러 번 언급되었다(창 19:1-11; 롬 1:26,27; 고전 6:9). 그리고 오늘날에 있어서는 아메리카와 유럽 지역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어 크나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상은 십계명의 7계명을 어긴 죄이다.
사람을 탈취하는 자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드라포디스테스'( )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이곳에만 나타나며, 70인역(LⅩⅩ)에 있는 외경인 마카비 3서 7:15에서 단 한 번 나타날 뿐이다. 이는 사람을 유괴 납치하여 노예로 파는 죄악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형제의 권익을 침해하고 그 인격을 모독하는 짓이다(출 21:16; 신 24:7). 그러므로 이런 자는 율법 뿐 아니라 로마의 법률에서도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하였었다. 이상은 십계명의 8계명을 어긴 죄이다.
거짓말하는 자와. - 반드시 정죄 받게 될 거짓 양심을 가진 자로서 거짓을 참말인 양 말하는 자이다. 이러한 죄악은 계시록에서 지옥에 갈 죄로 규정되었다(계 21:8; 22: 15).
거짓 맹세하는 자와. -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세우기 위해 거짓 증거를 일삼는 자로서 산상보훈에서 특히 경계하고 있다(마 5:33; 23:16; 약 5:12). 이상은 십계명의 9계명을 어긴 죄이다.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독선(獨善)에 빠져 사는 자로서 십계명 전체에 대한 결론적 성격을 가진다. 한편 '바른 교훈'이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뜻하는데 목회서신에서는 '바른 말'(딤전 6:3; 딤후 1:13) 및 '바른 믿음'(딛 1:13; 2:2)의 형태로 8회 나타나며 그 외에는 누가복음에 3회, 요한삼서에 1회 나타난다. 즉 여기서 '바른'(휘기에스) 이란 본래 육체적으로 '건강한', '건전한'이란 뜻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거짓이 없는', '진실한'이란 뜻으로 의미 변화한 것이다(Earle).
1:11 이 교훈은. - 이 말은 헬라어 성경 원문에는 없는 번역서들의 해석적 첨가어이다. 그런데 이 말이 바로 앞절의 '바른 교훈'을 받는 말인지(Theophylact), 아니면 율법의 바른 용법을 말한 앞절 전체를 받는지(Mepeer, Hofmann, Vincent)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그렇지만 대체로 후자가 유력하다.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 여기서 '복되신'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을 축복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곧 복의 근원임을 강조한 표현이다(신 1:11).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자는 항상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며(히 6:10), 반대로 하나님과 무관한 자는 이미 저주와 형벌 아래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 '복음'(Gospel)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가리킨다. 그런데 '복음' 앞에 '하나님의 영광'이란 수식어가 첨가되어 있음은 죄인된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복음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 전하는 교훈들이 바로 이러한 복음에 근거해서 밝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이러한 복음에 굳게 서 있었기 때문에 율법에 위배되는 사항들(9,10절)을 정확하게 고발할 수 있었다(갈 1:6-10). 한편 고후 4:4에도 본절과 유사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란 말이 나오는데 본절과 의미상 유사한 것으로서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가리킨다.
1:12-20 바울의 신앙 간증과 디모데에 대한 복음의 진리 수호 권면
앞에서 이단에 대해 경계한 바울(3-11절)은 이제 자신의 회심에 대한 회고를 통한 신앙 간증과 함께 디모데에게 이단의 공격에 맞서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수호해야 할 목회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자신이 과거에 예수를 핍박하던 자였었으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회심케 된 이후에는 도리어 복음 증거를 위하여 순교까지도 각오하는 자가 되었음을 신앙 간증(12-17절)을 통해 영적 아비이며 목회 선배로서의 자신의 삶을 디모데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 사실은 교회의 지도자된 그들이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 때만이 진정 참 지도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다.
또 본문에서 바울은 이단을 대하는 목회자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면서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파견할 때 자신이 주께로부터 직접 받은 복음을 부탁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는 이단의 공격에 맞서 영적 싸움을 싸우고 정통 교리를 수호해야 할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는 것과 이단에 대하여 영적 싸움을 힘써 싸우겠다는 강한 영적 의지를 갖는 것임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18절).
그리고 당시의 대표적인 거짓 교사들로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바울 자신에 의해 출교(黙敎) 당하였음을 언급하면서 디모데에게 이단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다시 한 번 암시적으로 촉구하였다(19,27절).
한편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는 각종 이단 사설(邪說)이 난무하고 있다. 특히 예수 재림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거짓된 교리를 퍼트리는 이단들이 극성을 부려 하나의 사회 문제가 된 것은 우리에게 경종(警鍾)을 울려 주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세상 종말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 사람들을 미혹하리라(마 24:23,24) 하신 주님의 경고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우리에게 세상 종말이 임박하여 더욱 극성을 부릴 사단의 궤계에 대한 단호한 대처의 필요성을 심각하게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세태 가운데서 먼저 소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바른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말씀에 착념하여야 할 것이며,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이단의 광란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영적 전투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엡 6:10-20).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 본절은 자신에게 직분을 맡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바울의 찬양이다. 그가 이런 찬양을 하는 이유는 비록 허물 많고 용서받을 수 없었던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말씀의 사역자로 불러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전파 사명을 자기에게 맡기셨기 때문이었다. 한편 '나를 능하게 하신'이란 말은 자신의 모든 능력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과(빌 4:13), 자신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말이다(고전 15:10).
내가 감사함은. - 원문에는 이 구가 문장 맨 앞에 쓰임으로 매우 강조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어구는 이곳과 딤후 1:3에만 나타나는 목회서신의 독특한 양식이다. 한편 본절의 문자적 의미는 '내가 기뻐함은'(카린 에코)이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 이 말은 충성되지 않은 자신을 충성되다고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은 충성되지 않다는 자를 충성되다 하시고 반대로 충성되다고 자처하는 자는 충성되지 않다고 하시며(마 25:21,23), 또 할 수 있다고 나설 때는 물리치시고 반대로 할 수 없다고 물러 갈 때는 부르시는데(출 3장) 이는 사람의 겸손을 높이 보시는 하나님의 역설적 은총을 잘 나타내 준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회심(回心) 전까지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행 9:1,2)을 어떻게 충성되이 여기셨는가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두 가지 주장이 있다. ①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을 보시되 장차 하나님께 충성할 자로 보셨다는 것이다(Boumn). ②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변화시키시고 또 능력까지 주신 뒤에 그를 충성되이 보셨다는 것이다(Plummer). 이 중 두 번째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데 이는 본절 초두에 있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란 말이 뒷받침해 준다. 이것은 결국 인간 구원과 일 맡기심이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의거한 것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파자요 또 사도로서 봉직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뛰어남에서가 아니라 그 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직분'(디아코노스)은 '봉사'란 뜻으로 하나님께 충성함은 물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헌신, 봉사의 직분을 뜻한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에베소와 그 주변에 있는 교회를 위해 디모데도 그와 같은 일을 실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블라스페모스'( )은 '모독자'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로서 (롬 2:24) 예전에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했던 사실을 기억하게 해준다(행 26:11).
핍박자요. - 이 단어(디오크테스)는 여기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추격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그가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을 일일이 따라 다니면서 괴롭힌 것을 나타내 준다(행 9:1-4).
포행자였으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브리스테스'( )는 여기서와 롬 1:30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악의를 품고 남을 경멸하며 인권을 유린하는 자를 가리킨다(롬 1:30). 이같이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경멸했을 뿐만 아니라 핍박하고 저들을 투옥시켰었다(행 8:3; 9:1; 22:19). 즉 그는 철저한 유대주의자로서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탄압했던 자이다. 그러나 회심한 이후로는 그 일과 함께 특별히 스데반 집사의 죽음 현장에 증인으로 참석했던 사실(행 7:58)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왜곡된 신앙과 그로 인해 빚어진 일련의 죄악들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과거를 언제나 마음 아프게 간직하여 일생을 통해 반복 고백했던 것이다(행 24:4; 갈 1: 23,24).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 바울이 예전에 범한 죄악은 그가 그러한 일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의 무지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영적 어리석음이었다(Robertson). 물론 이 영적 무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할 수 없는 죄악이다(롬 1:2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징계 대신에 긍휼을 베푸시고 당신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증거하는 일을 맡기셨던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영적 무지자의 어리석은 행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기도와(눅 23:34), 오순절 때 베드로의 설교에서도(행 3:17) 지적된바 있다. 이러한 자들은 대개 스스로를 가장 현명한 자로 자처하는 법이다. 그러나 성령의 빛 아래서 자신을 회고할 때는 그것이 무서운 무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평생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여 자백하게 되는 것이다.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 이것은 아름다운 신앙의 조화를 증거해 준다. 즉 은혜는 수직으로 하나님께로서부터 내려오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 그리고 사랑은 횡적으로 사람들 간에 서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관해 혹자는 '은혜'는 바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고 '믿음'은 그의 구원을 확고히 해주었으며 '사랑'으로 바울의 구원이 표현되었다고 의미 부여하기도 한다(Earle).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사용된 낱말로서 다함이 없이 지극히 풍성한 것을 가리킨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은혜는 바울이 죄 용서 받음인데 거기 첨부하여 믿음과 사랑을 풍성히 받아 거룩해졌다'고 한다. 한편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John Bunyun)은 본절을 통하여 깨달은 바가 있어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라는 자서전을 저술하였다. 이밖에도 본절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체험적으로 기록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더니'(롬 5:20) 라는 말을 연상하게 해 준다.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 바울의 이 같은 표현 형식은 목회서신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애용구이다(딤전 3:11; 4:9; 딤후 2:ll; 딛 3:8). 이것은 이하에서 언급하고 있는 말이 전적으로 확실히 그러하고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어구이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어구로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의 상용구를 생각할 수 있다(요 1:51; 3:3,5; 5:24). 한편 이 말에 의거해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지극히 명료하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받아들일 만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받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도케스'( )는 딤전 4:9에도 나오는데 그 뜻은 '열렬한 영접'을 뜻한다. 결국 이 말 속에는 자진해서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행 2:41).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이 문장(흔 프로토스 에이미 에고)을 직역하면 '그들, 즉 죄인 중 첫째'라는 뜻이다(고전 15:9; 갈 1:13; 엡 3:8). 이것은 그가 이 말을 하는 현재에도 그렇다는 뜻이다. 바울의 이와 같은 고백은 그가 형식적이지 아니하고 진실된 죄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서 그의 신앙 간증 중에서 극치라 할 수 있다. 즉 바울의 죄의식은 막연한 종교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다메섹 도상과 결부시켜 그 이전에 박해자로서의 자신의 망동을 전제한 체험적인 것이었다. 한편 역사상 바울뿐만 아니라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을 위시한 위대한 교회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깊은 죄악감에 빠졌었고 그에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절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점점 형식화되어만 가고 있는 현대 교회의 최대의 위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죄악감의 결핍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16 본절에서 바울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자신이 그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사도직에 임명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 그가 죄인 중에서도 첫째이고, 긍휼을 입어 구원받은 자 중에서도 첫째라는 의미이다(Robertson).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 문자적인 뜻은 '온전한 오래 참으심'이다(Alford). 즉 가능한 모든 종류의 온갖 참으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성을 빨리 낸다'의 히브리적 표현의 반대어로 '더디 성을 낸다'란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관용하신 형벌이나 심판을 연기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몇몇 학자들은 본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한다. 즉 '내게 보이신 인내보다 더 큰 인내를 보이신 경우가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인내가 내게처럼 전적으로 필요했던 죄인도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Chrysostom, Ellicott).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 요한복음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으로서(요 3:16; 20:31), 믿음과 영생은 같은 고속도로의 입구와 출구의 양 톨게이트이다. 즉 믿음 없는 영생은 없고 영생 없는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일신양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딤전 6:12; 딤후 1:1,2). 한편 본절과 같은 의미의 어구는 여기서와 롬 9:33; 10:11; 벧전 2:6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Hither).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 '본'(휘포튀포소스)이란 일종의 뚜렷한 모델(model)이나, 스케치(sketch), 개요(outline) 등을 뜻하는데(Hervey, Robertson)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는 이곳과 딤후 1:13에만 나온다. 즉 바울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것은 다른 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의 표본이 된다는 것이다.
1:17 만세의 왕. - 이 말(바실레이 톤 아이오논)은 신약에서 이곳과 계 6:10에만 보이나 구약에는(LⅩⅩ) 자주 나타나는(출 15:18; 삼상 13:13; 시 9:7; 28:9; 144:13; 145:10) 히브리적 표현으로서, 그 의미는 '영원하신 왕', '변치 않는 주재'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셔서 모든 세대를 지배하시는 왕이시란 뜻이다. 이때 바울은 전사(戰死)나 정변(政變) 등에 의해 통치권을 오래 동안, 유지하지 못하던 로마의 황제들과 영원토록 통치권을 향유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서로 대비시켜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Hervey). 따라서 '만세의 왕'이란 영원히 믿을 만한 전능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칭호인데, 혹자는 이에 대해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존재가 그분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는 반가운 것이 되나 그렇지 못하고 심판에 처해질 자들에게는 무서운 것이다'라고 의미 부여하기도 한다(Bengel).
곧 썩지 아니하고. -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또 다른 말로서 '불멸'과 '불변성'을 의미한다(롬 1:23). 즉 하나님은 절대 변하지 않는 순수한 존재로 '더해지거나 덜해질 수 없는' 그래서 썩지 않는 영원하신 분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것은 이러한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생의 보증이 되심을(벧전 1:4) 의미하는 말이 기도하다.
보이지 아니하고. - 이것은 하나님의 불가견성(不可見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계신 영이시며(고후 4:18) 다른 신들과 비교될 수 있는 부족하고 연약한 실체가 아니라 유일하시며 초월적인 신으로서 우리의 유일한 경배 대상이 되심을 나타낸다(요 17:3; 엡 4:6).
홀로 하나이신. - 하나님의 유일성(唯-性)을 나타낸 표현이다(요 5:44; 17:3; 유 1:4). 따라서 우리의 경배 대상도 오직 이 하나님 한분이어야 한다. 이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마 6:24). 한편 지금까지 살펴본 영원성, 불변성, 유일성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신론' 중 '하나님의 속성' 부분을 참조하라.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 사도 바울의 통상적 송영과는 약간 다른 형태의 것이다(롬 1:6; 16:27; 갈 1:5; 엡 3:21; 딤전 6:16). 그러나 존귀와 영광이 함께 언급되는 형태는 신약에 흔하게 나타나는 형태이다(롬 2:7; 히 2:7; 벧전 1:7; 계 4:9), 한편 이와 같은 바울의 찬미는 세상의 모든 왕이나 황제의 권위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지존(至尊)을 강조해 주는 칭송구이다. 이는 하나님께 마땅한 경배와 찬양을 돌리는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아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멘'( )은 히브리어( )를 그대로 읽은 것으로 '확인하다' 또는 '진실로'라는 뜻이다. 이 낱말은 대개 '그렇게 될지어다'는 의미로서 문미(文尾)에서 어떠한 진술 또는 선언을 확인할 때 사용되었고(왕상 1:36: 렘 28:6), 또한 예배시에 기도에 대한 관습적인 응답의 말로도 사용되었다(느 8:6; 시 106:48; 계 5:14). 그리고 신약에서 이 말은 대개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는다는 의미에서 자주 사용되었다(고후 1:20).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대상 16장 자료노트, '아멘(Amen)'을 참조하라.
1:18 본절로 20절까지는 서신서의 맺음말 부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일종의 추신(追伸)이다. 아마도 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경우를 들어, 본장에서 베푼 교훈에 유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일깨워 주려 했을 것이다.
아들 디모데야. - 극진한 애정을 표함과 더불어 간절한 권면의 말을 주기 위하여 디모데를 부른 호칭이다. '아들'에 관해서는 이미 2절에서 자세히 주석해 놓았으니 참조 하라.
이 경계. - 3-11절에서 바울이 베푼 교훈을 가리킨다.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추측하건대 이것은 디모데가 목회자로서 안수를 받을 때 장로들이 준 권면의 말씀일 것이다(Earle). 그런데 이를 '예언'이라 함은 목회자로서의 디모데가 겪을 수 있는 각종 상황을 예견하여 들려준 교훈과 권면의 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 인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신앙과 진리의 명목 아래 무서운 미움과 살육 행위가 감행된 전례가 많았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종교 재판이 열리고 무고한 자에게 사형을 집행한 역사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진리 수호를 위한 선한 싸움이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성도의 선한 싸움은 첫째, 그 목표가 사단의 권세에 대항하는 것이어야지 혈육을 상대하는 것이면 안된다(엡 6:12).
둘째, 그 방법에 있어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이고, 무저항적이어야 하며, 성경의 교훈대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셋째, 자신의 고집이나 뜻을 성취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결코 우리의 힘만으로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야 하는데 곧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胸背)를 붙이고 성령의 검을 착용하는 것과 같은 신앙의 중무장을 해야 하는 것이다(엡 6:10-17).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 양심은 바울서신에서 흔한 말로 20회 사용되었으나, '착한 양심'은 이곳과 행 23:1; 벧전 3:16,21에 세 번만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믿음과 착한 양심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사실 양심이 일단 무시되기 시작하면 즉시 믿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그릇된 행동과 도덕적 부패는 일반적으로 영적인 파멸을 가져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벵겔(Bengel)은 '믿음은 고귀한 향유 같고 착한 양심은 그것을 담는 유리그릇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였느니라. - 인간의 기본 양심을 무시하게 되면 결국엔 믿음조차 저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실례를 들어 경고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로 보아 당시 소아시아의 거짓 교사들은 교리적으로만 과오를 범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생활에도 결정적인 오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 비추어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서 선한 싸움을 싸우도륵 힘껏 권면한 것이다.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 바울이 양심을 저버리고 믿음이 파선된 자들 중 대표적인 두 사람의 이름을 이처럼 공개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어 동일한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이다. 한편 여기서 후메내오(Hymenaeus)는 딤후 2:17에 나타나는 인물로서 그는 교리적으로는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하여 남에게 낙심을 주고 도덕적으로는 망령되고 헛된 말을 함부로 하는 자였다. 그러나 알렉산더(Alexander)는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데 대체적으로 딤후 4:14에 나오는 구리 장색 알렉산더로 추측한다(Alford, Lock. Gealy). 이에 반해 혹자는 본문의 알렉산더를 에베소에서의 소동 사건시 유대인들이 바울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이야기하려 했던 사람(행 19:33)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신빙성이 없다(Hendriksen).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여 함이라. - 이 말은 당시 교회 회중 가운데에서 출교(黜敎)시킨 사실을 의미할 뿐 아니라 범죄한 자들에게 징계나 여러 가지 제재를 가한 사실을 의미한다(욥 2:6; 고전 5:5, Alford, luther). 그러나 이러한 조처는 교회의 공적 조처이기보다 바울의 개인적인 결정에 의한 조처라는 의견도 있다(Leck). 한편 바울이 이 두 사람을 엄히 징계한 이유는 그 징계를 통하여 범죄한 두 영혼이 회개할까 하는 일말의 가능성과 또한 그들을 징계함으로 다른 교인들이 영적으로 더욱 각성할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딤후 2:25,26). 이처럼 징계는 한 인격을 파멸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징계의 대상자와 그 추이(推移)를 지켜보는 공동체 전체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하여 실행되어져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고전 5장 연구자료. '교회의 권징'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