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씨 삼절 모신 삼절사(三節祠)
(1) 삼절사 연혁
삼절사는 왜구로부터 침략을 받은 임진왜란(선조 25년 1592) 때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순절하신 충민공 휘 지(誌 병 17), 호조정랑공 휘 조한(潮漢 병 18), 군자감정공 휘 통한(通漢 병 18) 등 세 분 선조의 충혼을 함께 모시고 기리는 사당이다.
서기 1839년 고을 선비들의 제의로 세 분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 함께 모시자는 청원을 경상감사가 수렴하여 조정에 건의한바 임금의 윤허가 내려 그 다음 해인 서기 1840년 동래부에서 내린 경비로 사당과 강당을 세워 일문삼절의 뜻으로 삼절사라 명명하고 강당을 세한당이라 이름하였다.
서기 1986년 5월 29일 부산시 문화재 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으나 세운지 오래되어 고을 유림들과 후손들이 사우(祠宇)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해 오다가 서기 1986년 5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990년 7월에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제사는 유림제(儒林祭)로 매해 음력 2월과 8월 말정일에 봉행한다.
(2) 충민공 양지(誌)
자는 언신(彦信)이며 남원이 본관으로 대학자 양성지(梁誠之)의 후손이다. 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 양사제(梁思齊)의 아들로 1553년에 출생한 양지(梁誌)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14․5세에 이미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두루 통독하였고 아울러 육도삼략을 배우면서 스스로 정진하고 분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서 등에서 절의를 지키는 대목이 나오면 주먹을 쥐면서 비분강개하고 항시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사할 때에는 문학에 힘쓰고 일단 유사시에는 용력(勇力)을 다해 적과 싸울지니 어찌 일예(一藝)에만 국한하겠는가?”하였다.
벼슬에 나선 후로 예빈시(禮賓寺) 등의 낭료(郎僚)를 거쳤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포 등지에 왜적들이 대거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충성과 용맹을 갖춘 문무겸전의 인재를 뽑아 썼는데 양지를 적성현감(積城懸監)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성(城)은 외롭고 병력은 허약하기만 했다. 양지는 은덕으로 병사들을 위로하고 엄한 군기로 이들을 격려하면서 병기를 재정비하고 경계를 엄하게 하여 죽음으로써 성을 지킨다는 결의를 보이니 온 고을이 그에 힘입어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들의 아비규환과 군사들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왜적의 무리는 점차 북상길을 재촉하여 한성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서울에서 황해도로 빠지는 삭령군(朔寧郡-오늘의 연천 근처)은 군사적 요충지로 그 비중이 어느 고을보다 컸다.
이때 감사가 장계(狀啓)를 올리고 조정의 논의(論議)가 이루어져 양지를 장재(將材)라 하여 삭녕군수(朔寧郡守)로 추천하였다.
현지에 부임한 양지는 방비의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적 여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때 삭녕성에는 경기도 관찰사 심대(沈垈)와 양천군수 윤광원(尹廣元), 병조좌랑(兵曹佐郞) 강은남(姜恩男) 등이 임지에서 패하여 몸을 의탁하고 힘을 보탰으나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성을 에워싼 왜적들은 조총을 비 오듯 쏘아대며 아군의 수비진을 허물고 본진(本陣)으로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양지는 크게 부르짖어 이렇게 말했다.
“살아서 적(敵)을 섬멸해 책임을 다할 수 없으니 다만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겠다.”
형세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은 양지는 관찰사 심대(沈垈)와 더불어 순절(殉節)하기로 결심하고 조복(朝服)을 갖춰 객관(客館)에 나아가 북방사배(北方四拜)한 후에 성의 한쪽 언덕 큰 나무 밑에 버티어 서서 칼을 휘둘러 분전에 분전을 거듭한 끝에 달려드는 적을 무수히 죽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순사하고 말았다. 패전의 자리에는 장졸(將卒)의 흘린 피가 넘치고 있었다.
때는 1592년 10월 18일로 양지의 나이 45세였다. 왜란이 끝난 후 충절에 감복한 고을 사람들이 순절한 그 자리에 사당(祠堂)를 세우고 해마다 이날에 양지(梁誌) 심대(沈垈) 두 절신을 제사지냈다. 세월이 흘러 조정에서 표절사(表節祠)의 사액(賜額)과 함께 충민의 시호가 내려지고 이조판서를 증직한 것은 1796(정조 20)년의 일이었다. 그의 충혼은 삼절사의 주벽(主壁)으로 모셔져 위대한 순절로 후대에 전해진다.
(3) 호조정랑공 양조한(潮漢)
진사 양겸(梁謙)의 아들로 일찍이 동래에서 살았다. 향교의 교수 노개방(盧蓋邦)에게 수학했는데 학문을 함에 있어 의를 앞세우고 문장을 뒤로 하니 당시의 명망가인 문덕겸(文德謙) 같은 이도 이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난 것은 양조한이 동래향교의 훈도로 있을 때였다. 그때 스승 노개방은 고향에 돌아가 귀임하지 않고 있었다. 양조한은 분연히 외쳤다.
“선성(先聖)으로 하여금 요망한 왜놈에게 더럽힘을 당하게 할 수는 없다.”
같이 일어선 문덕겸과 더불어 먼저 동서양무(東西兩廡)에 모셔진 선현의 위판(位板)을 매안(埋安)하고 오성의 위판을 정원루(靖遠樓)에 옮겨 봉안하였다. 다음날 급히 돌아온 노개방과 함께 그 앞에 시립하여 떠나지 않았다.
4월 15일 동래성을 에워싼 왜적(倭賊)들은 “싸우려면 싸우고 싫으면 길을 비켜 달라.”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싸워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조복(朝服)을 입은 단정한 자세로 적의 칼날에 순절한 것은 이때의 일이었다.
한나절이 되자 왜적은 안영(鞍嶺)의 허술한 곳을 넘어 물밀 듯 성안으로 쳐들어 왔다. 성안의 민관군(民官軍)은 송부사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조총으로 무장한 적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동래성은 모든 장졸이 옥쇄(玉碎)하는 순절의 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양조한의 순절은 선현과 오성(五聖)의 위판을 사수하기 위한 선비로서의 의리 때문이었다. 조총의 탄알이 그의 육신을 관통했던 것이다. 노개방과 문덕겸도 같은 순절의 길을 걸었다.
이때 양조한의 아들 홍(鴻)도 함께 순사했으며 13세 소년이던 손자 부하(敷河)는 할아버지의 품안에 안겨 겨우 살았으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9년이 흘러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왜란이 끝난 뒤 충렬공 송상현을 모신 송공단에 함께 배향되었다가 뒤에 삼절사가 세워져 소위(昭位)에 모셔졌다. 양조한은 충민공 양지의 종질이며 그에게 호조정랑이 증직된 것은 1736(영조 12)년의 일이다.
(4) 군자감정공 양통한(通漢)
삼절사 목위(穆位)에 모셔진 양통한은 정랑공 양조한의 아우이다. 자는 이호(而浩). 어려서부터 절개가 남달랐고 형 조한과 함께 향교에서 면학에 전념하니 사람들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 하였다.
왜적이 성을 포위하던 날 마침 외출을 했다가 형 조한이 오성과 선현의 위판을 모시다가 성중에서 순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눈물로 맹서하기를 “한번 죽어서 왜적을 토벌하리라.”하였다. 곧 두 아들 의(鸃)와 숙(鷫)을 데리고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포진하고 있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달려가니 창의(倡義)에 가담하고 있던 영남의 많은 충의지사들이 삼부자가 동시에 창의한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라 하여 절찬해 마지않았다. 신명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싸워 많은 공훈을 세웠다. 곽재우 장군은 양통한의 활략상을 높이 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라와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분전하던 양통한은 끝내 전사 순절하고 말았다.
1695년(숙종 21)년에 그의 절의를 기리는 정려(旌閭)가 세워지고 1736(영조 12)년 호조좌랑이 증직된 뒤를 이어 1758(영조 34)년에 군자감정 통훈대부(軍資監正 通訓大夫)가 추증되었다. 두 아들의 공로도 인정되어 의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르고 아들 숙(鷫)은 참봉이 되었다.